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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 vs 디에고 마라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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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비교3. 다른 경쟁자4. 두 선수의 우승 기록
4.1. 펠레4.2. 디에고 마라도나
5. 두 선수의 개인 수상
5.1. 펠레5.2. 디에고 마라도나
6. 평가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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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레디에고 마라도나의 라이벌리[1]를 일컫는 말로, 명실공히 20세기 축구의 양대 산맥인 두 선수 중 '누가 더 위대한 선수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펠레가 산투스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전 세계를 호령하며 '축구 황제'라는 칭호를 얻은 후 많은 선수들이 그의 아성에 도전했으나 그 중에서도 리오넬 메시 이전 펠레의 위상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받은 자는 단연 마라도나였다.

마라도나가 2020년 11월 25일, 펠레2022년 12월 29일에 각각 세상을 떠나며 두 명 모두 축구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2. 비교

두 선수의 공통점은 클럽에서나 국가대표로서나 역대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쳤다는 것이다. 펠레산투스를 이끌고 전 세계의 강호를 박살냈고, 역대 최고의 브라질 대표팀을 이끌고 유일무이한 월드컵 3회 우승[2]을 달성했으며, 마라도나도 상대적 약팀인 나폴리를 이끌고 스쿠데토 2회와 UEFA컵 우승을 차지, 마찬가지로 상대적 약팀이던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이끌고 두 차례나 조국을 월드컵 결승으로 올렸을 뿐만 아니라 1986 월드컵을 말 그대로 혼자서 지배하며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단일대회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였다.

정리하자면 월드컵 우승 횟수, 즉 커리어와 롱런은 펠레가, 역대 최고의 월드컵 단일대회 퍼포먼스, 즉 고점은 마라도나가 우위다. 얼핏보면 3회 우승 vs 1회 우승이 왜 논쟁거리인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선수 평가에서 누적에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잣대가 바로 고점이다.[3] 이를 증명하는 사례는 많은데 리오넬 메시는 아직 누적이 한참 부족했던 2010년대 중반부터 요한 크루이프를 제치고 펠레, 마라도나와 비교되며 GOAT 논쟁에 끼기 시작했고, 메호대전 역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UCL 3연패로 발롱도르 갯수를 5:5로 따라잡았을 당시조차 대다수의 매체와 전문가들이 메시가 우위임을 고수했다. 메시와 고점을 비교할 것도 없이 호날두 본인의 개인기량과 퍼포먼스가 3연패 시기보다 레알 초중기가 나았기 때문. 마르코 반 바스텐도 부상으로 일찍 은퇴했지만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호나우지뉴 역시 전성기가 굉장히 짧았고 하락세가 완연했으나 그 짧았던 전성기 시절의 퍼포먼스로 인해 역대 20위권으로 평가받는다. 호나우두도 전성기가 워낙 짧지만 대다수의 매체는 역대 10위권 수문장엔 두고, 조지 베스트도 괴팍한 성격과 방탕한 사생활로 맨유에서의 짧고 굵은 전성기 이후엔 커리어가 망가졌지만 여전히 맨유 역대 레전드 탑3 안에 무조건 꼽힌다. 농구는 우승 횟수가 마이클 조던보다 2배나 많은 가히 신화적인 선수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조던이 GOAT로 평가받고,[4] 야구는 누적 스텟을 굉장히 중요시함에도 불구하고 강정호김병현이 상위 리그에서 2~5년 정도 좋은 성적을 냈다는 이유로 더 오랜 기간 대한민국의 에이스로서 활약한 이승엽, 이대호 또는 오승환보다 이들을 높게 평가하는 야구 팬들도 많다. 이렇듯 고점은 그 선수의 최대 역량을 보여주는 지표로서 선수 평가에 매우 중요한 기준 중 하나다. 한 마디로 이 라이벌리는 가장 많은 업적을 쌓은 펠레와 가장 높은 고점을 찍은 마라도나의 대결로 요약할 수 있다.

펠레와 마라도나의 월드컵 활약상을 더 자세하게 비교하면, 펠레는 1958 월드컵에서 17세의 나이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브라질의 첫 우승에 큰 기여를 했지만 당시엔 월드컵 MVP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아 펠레와 디디 중 누가 MVP였는지 애매하다. 둘이 쌍두마차였던 것은 확실한데, 둘 중 누가 1인자였냐에 대해선 당시 골든볼이 없었기에 당대의 축구잡지 및 남아있는 영상 자료를 통해 따질 수 밖에 없다. 1962 월드컵의 경우 안타깝게도 펠레는 부상으로 2경기 만에 벤치 신세로 전락, 대신 동료였던 가린샤가 캐리해서 우승했으니 냉정히 말해 펠레의 평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다.[5] 1970 월드컵의 경우 부상+은퇴선언에서 돌아온 펠레가 다시 에이스가 돼 우승에 기여했으나 이때도 골든볼이 없었기에 여전히 펠레와 자이르지뉴 중 누가 MVP였는지 애매하다. 정리하자면 3회 우승 중 1번은 버스 우승에 가깝고 2번은 단독 캐리보단 쌍두마차로서의 공동 캐리였다. 만약 3번 모두 펠레 혼자만 돋보이는 단독 하드캐리였거나, 1번이라도 86년 마라도나와 비슷한 급의 원맨 퍼포먼스를 보였다면 처음부터 마라도나와 GOAT 논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6]

마라도나는 월드컵 우승이 1986 월드컵 뿐이고 1990 월드컵 준우승 1번이 더 있을 뿐이나 정식으로 골든볼이 제정됐고 펠레에 비해 영상 자료도 풍부하며 목격자가 많이 생존하기 때문에 마라도나가 당시 아르헨티나의 완벽한 1인자였다는 사실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게다가 1986 마라도나는 단순 1인자를 넘어 1974 크루이프, 2022 메시[7] 등 역대 월드컵에서 특별히 임팩트가 컸다고 찬사받은 다른 레전드들과 비교해도 가장 돋보이는 역사상 최고의 단독 하드캐리였다.[8] 앞서 언급된 선수들도 유별나게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준 사례로 꼽히지만, 아예 혼자 힘으로 우승시켰다[9], 팀 스포츠에선 원론적으로 말이 안되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극도의 찬사를 받은 사람은 마라도나가 유일하다. 때문에 마라도나가 1회 우승에도 불구하고 3회 우승의 펠레와 수십년간 GOAT 자리를 놓고 경쟁한 것. 물론 두 선수는 월드컵 말고도 여러 비교할 요소가 많지만, 두 선수의 위상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대표업적은 월드컵이고 일반적으로 커리어는 펠레가, 임팩트는 마라도나가 우위로 평가받는다.

축구사에 영원히 남을 이 논쟁에서 펠레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펠레와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모두 목격한 세대는 펠레를 더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 그가 17세의 나이에 기록한 1958 월드컵 토너먼트 6골[10], 1970 월드컵 전경기 공격포인트[11], 월드컵 3회 우승이라는 독보적인 커리어, 그리고 마라도나보다 오래 유지한 전성기 등을 근거로 펠레의 손을 들어준다. 이들은 펠레가 뛰었던 시기엔 남미 리그의 위상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12] 유럽 무대 활약을 근거로 마라도나를 지지하는 주장을 비판한다. 그리고 마라도나는 선수 시절 도핑으로 기량을 속였다고 커리어 전체를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13]#

반면 마라도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마라도나는 펠레와 달리 유럽 리그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았다는 점, 펠레는 같이 뛴 동료들[14]이 호화찬란했던 데에 비해 나폴리와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전적으로 마라도나 1명에 의존했다는 점[15]을 강조한다. 또한 이들은 전술 수준이 조잡했고 비교적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던 고전 축구 시대에 활약한 펠레와 달리 마라도나는 상업 축구의 발달로 전술 수준과 인재 풀 등 축구 산업이 전반적으로 성장한 현대 축구의 태동기에 활약했고, 실제로 남아있는 영상 자료를 비교해보면 마라도나가 객관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플레이를 보여줬기 때문에 마라도나가 우위라는 의견도 제시한다. 실제 많은 영상 및 스탯이 소실돼 단순 경기 기록과 목격담을 통해 겨우 파악 가능한 펠레의 전성기[16]와 달리 마라도나의 전성기는 풍부한 영상 자료와 발달된 세부 스탯을 통해 비교적 쉽게 가늠할 수 있다.

3. 다른 경쟁자

20세기 축구사에서 이들 이전에 최고였거나 이들의 아성에 근접한 선수들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등이 있다.

이 여섯 명 중 펠레와 마라도나의 위상에 가장 근접한건 단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다.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에 아예 출전하지 못했고, 가장 앞 세대 선수라 경기력에 대한 자료 및 실제 경기를 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점점 역대 선수 평가에서 밀려나고 있지만[17] 한때 펠레, 마라도나와 같은 라인으로 평가받았다. 푸스카스는 매직 마자르 시절 엄청난 활약상으로 40년대 후반~50년대 초반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지만 레알 마드리드 시절 팀 내 1인자 이미지를 디 스테파노에게 내준 점과[18] 마찬가지로 가장 앞 세대 선수라 경기력에 대한 자료 및 실제 경기를 본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점점 밀려나고 있다. 베켄바워는 월드컵 결승전에서 크루이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면 크루이프와의 라이벌리에서 완전히 제압됐을 거란 평가를 받고, 크루이프는 월드컵 결승전에서 베켄바워에 패배해 펠레, 마라도나의 위상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1989년 슈퍼 발롱도르 투표에서 디 스테파노에 밀렸다. 지단은 메시나 호날두처럼 커리어 내내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꾸준히 보여준 적이 없었고 동시대 경쟁자들[19]에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해 평가가 주로 5~8위 정도, 심하면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날 때도 있고, 호나우두의 경우 약관의 나이에 펠마를 소환하며 둘의 위상에 근접한 평가와 이들을 뛰어넘을거란 기대를 동시에 받았으나 1998 월드컵 결승 참패로 시작된 슬럼프와 자기 관리 실패, 두 번의 십자인대 부상으로 기량이 이른 나이에 쇠퇴하고 펠마를 뛰어넘긴커녕 동시대 지단에게도 위상이 역전당하며 10위권 수문장으로 전락했다.

위의 레전드들이 결국 펠레, 마라도나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20세기가 마감된 후, 리오넬 메시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나타나 다시 한번 대격변을 일으켰고, 이중 메시가 2022 월드컵을 우승해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펠레, 마라도나와 동격으로 평가받게 됐다.[20]

3.1. 리오넬 메시

파일:메시 공식 GOAT.jpg
2022년 12월 19일, 메시2022 월드컵에서 마라도나 이후 36년 만에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우승시키고 본인은 골든볼을 수상해 메호대전을 완전히 종결시켰다.

월드컵 우승 이전부터 각종 매체와 전문가들의 의견은 메시가 마라도나보단 위, 펠레보단 아래라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었고, 이제 월드컵 우승 그것도 7경기 7골 3어시스트에 역사상 최초로 16강-8강-4강-결승 전경기 골+POTM 선정이라는 86 마라도나를 연상케하는 퍼포먼스로 우승함으로서 본격적으로 GOAT 논쟁은 펠레와 메시의 대결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펠레로서는 마라도나와의 수십년 대결 끝에 더 강력한 맞수가 생기게 됐고, 더군다나 그가 마라도나의 후계자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FIFA 월드컵 공식 트위터 계정은 GOAT 논쟁은 끝났다. 궁극의 상이 리오넬 메시 컬렉션의 일부가 됐으며, 마침내 유산이 완성됐다는 게시물을 업로드하기도 했다.

4. 두 선수의 우승 기록

4.1. 펠레

4.2. 디에고 마라도나

5. 두 선수의 개인 수상

5.1. 펠레

5.2. 디에고 마라도나

6. 평가

시간에 따른 펠레 vs 마라도나에 대한 매체들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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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에 각국 매체에서 선정한 랭킹

종합적인 평가는 펠레의 우위다. 20세기 말엔 펠레가 축구선수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엘 그라피코와 같은 아르헨티나 축구 잡지조차 마라도나가 아닌 펠레를 1위로 뒀고[30], 2022 월드컵 이전 랭킹을 보면 과반 이상에서 펠레가 1위를 차지, 2022 월드컵 이후 나온 랭킹에서도 펠레는 일부라도 메시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경우가 있는 반면 마라도나는 그런 경우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라도나의 평가가 가장 높았던[31] 2000년대[32]에도 펠레의 플레이를 직접 목격한 기성 세대나 전문가들의 의견은 펠레의 우위였다. FIFA20세기 최고의 선수를 선발하기 위해 투표를 실시했는데, 온라인 투표[33]에선 마라도나가 약 54%의 득표율로 약 19%의 펠레를 거의 3배 차이로 따돌렸지만 기자, 임원 및 감독 투표에선 펠레가 약 73%의 득표율로 약 6%의 마라도나를 10배 이상의 차이로 따돌렸고, IFFHS가 진행한 기자, 전직 선수 투표에서도 1,705표의 펠레가 1,214표의 마라도나를 제치고 세기의 선수로 선정됐다.

그리고 2004년 '펠레 에테르노[34]'를 시작으로 펠레의 영상 자료와 키패스 기록 등 골 외 다른 스탯이 발굴[35]된 2000년대 중후반~2010년대엔 펠레 세대 이외의 세대에도 펠레의 퍼포먼스가 다방면으로 뛰어났다는 것이 알려졌고, 2020년대에 들어서는 과거 펠레 세대가 그랬듯 마라도나 세대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2022 월드컵 이후 두 선수의 평가 격차가 다소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36] 여전히 전반적인 순위는 펠레의 우위이고, 이 평가들도 거의 전부 펠레를 접하지 못한 세대의 평가이기에 정당한 평가로 볼 수 없다. 펠레, 마라도나를 모두 접한 20년 전의 인물들은 대부분 펠레의 우위를 주장하며 논쟁을 종결시켰는데 펠레를 접하지 않고 마라도나만 접한 사람이 본인의 기억만 가지고 마라도나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로 보기 힘들다.

7. 기타

은퇴 이후 지도자로서의 경력은 비교 자체가 애매한 편이다. 펠레는 일선 코치나 감독으로 활동하지 않고 브라질 체육부 장관 등 스포츠 행정가로서 주로 활동한 반면,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는 등 일선 감독으로 활동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펠레와 마라도나 둘은 경쟁 의식이 있었는지 틈만 나면 서로를 디스했다. 펠레는 자신 다음이 크루이프라고 발언하였고 마라도나는 틈만 나면 펠레를 노망난 노인이라고 디스했다. 펠레가 메시를 평가할 때도 "메시는 아직 크루이프, 플라티니, 디 스테파노 등 예전 스타들을 따라잡지 못했다"라면서 정작 마라도나를 쏙 빼놓아 라이벌 아르헨티나의 두 레전드를 동시대에 디스했다.

두 사람이 2002 한일 월드컵 유치전 당시 벌였던 신경전 역시 매우 유명한데, 펠레가 브라질의 전통적인 우방국인 일본을 지지하자[37] 마라도나는 브라질과 펠레가 일본을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을 지지했다.[38] 덕택에 1995년 9월 한국의 월드컵 유치 홍보 계획의 일환으로 열린 한국 대표팀[39]보카 주니어스와의 경기[40]에 출전했다. 특히 이 경기는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약물 복용으로 인해 출장 정지 징계를 받은 후 나선 첫 공식전이었기에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41]

사실 두 사람은 FIFA 월드컵에서 쓴 맛을 본 선수들이기도 하다. 펠레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서 더블 디팬딩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월드컵에서는 고작 조별리그도 통과하지 못했는데 이 월드컵만 우승했더라면 FIFA 월드컵 4연속 우승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자탑을 쌓을 뻔했다. 디에고 마라도나 역시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당시 고작 1라운드만 통과하고 어지간한 결승전을 능가하는 상대로만 구성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죽음의 조에 걸려 거기서 조꼴찌 탈락했으며,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도 고작 16강만 통과하고 퇴출당했다.

2011년 6월 들어서부터 두 사람은 서로의 후계자를 두고 싸우기 시작했는데 마라도나는 네이마르를, 펠레는 리오넬 메시를 디스하며 대리전을 벌였다. 펠레가 먼저 유망주 네이마르가 메시보다 낫다는 희대의 망언을 하자 마라도나 역시 펠레를 노망난 늙은이라고 비난했다.

실제 축구 실력과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과거 마라도나가 진행하던 토크쇼에 펠레가 게스트로 초청된 적이 있었는데, 이 토크쇼에서 둘은 서로의 이름과 등번호가 마킹된 유니폼을 교환하고 마라도나는 펠레를 칭찬했고, 펠레 역시 마약을 끊으려는 마라도나의 노력을 크게 칭찬했다.
둘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이 진행되었는데 마라도나가 먼저 헤더 대결로 서로에게 헤더해서 공을 넘겨주는 것을 제안했고, 즉석에서 성사되었다. 결과적으로 펠레가 이겼다. 심지어 마라도나는 자신보다 20살이나 더 많은, 60대 무렵의 펠레에게 헤더 실력에서 패했다. 마라도나가 실수를 해서 공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펠레에게서 한 30cm 떨어진 채 바닥으로 직행하던 것을 마라도나가 재빨리 캐치해서 펠레와 뜨거운 포옹하는 애드립으로 넘기며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제대로 봤다면 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고, 마라도나는 자신이 진행하던 토크쇼에서 굴욕[42]을 당했다.

브라질에서는 상당히 민감한 주제인지, 마라도나의 사망을 애도하면서 나온 '최고의 축구 선수'라는 수사에 브라질 축구 협회에서 불만을 표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좀 황당할 정도의 자존심 싸움이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만큼 축구가 브라질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만 펠레와 마라도나의 라이벌 감정과 별개로 둘 사이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마라도나는 생전 펠레를 역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한 적이 있으며 과거 선수 시절 펠레와 같이 있는 자리에서 팬들이 마라도나만 알아보자 이를 두고 자신이 현역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 바 있다. 상단 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라도나의 토크쇼에 펠레가 출연했을 정도로 은퇴 이후 둘의 교류는 꽤나 활발했다. 펠레 역시 마라도나 사망 당시 SNS를 통해 추모 글을 올렸으며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마라도나의 후계자인 메시가 우승하자 그를 축하하면서 마라도나를 언급했다. 이렇듯 펠레와 마라도나는 서로 경쟁심을 보이고 언론을 통해 온갖 디스전을 벌이며 티격태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했다.


[1] 다만 두 선수는 세대가 완전히 달라 동시대에 경쟁하거나 대결을 한 적은 한번도 없어서 사전적 의미의 라이벌은 아니다.[2] 다만 1번은 펠레가 부상으로 대회 초기에 이탈해 가린샤라는 또 다른 천재가 캐리했다.[3] 특히 리그가 아닌 토너먼트 대회는 이런 경향성이 더 강해 여러 차례 부진과 광탈을 경험해도 단 한 번의 대회에서 높은 고점을 찍으면 해당 대회의 활약을 약점으로 지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4] 조던은 1차 쓰리핏을 달성한 시점에서 이미 카림 압둘자바, 매직 존슨, 윌트 체임벌린, 빌 러셀 등을 모두 제치고 명실상부한 농구계 GOAT로 인정받았다.[5] 그래도 조별리그 1차전에서 1골 1도움으로 확실히 활약해 완전히 논외로 두진 않는다.[6] 물론 어디까지나 86년 마라도나에 밀린다는 것 뿐이지 58, 70년의 펠레가 보여준 개인 퍼포먼스 역시 엄청났다. 58년엔 본선 3경기에서 6골, 4강에서 해트트릭까지 기록하며 득점 2위에 올랐고 70년엔 전경기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브라질 대표팀은 역대 최강의 대표팀으로 자주 회자되지만 그 중에서도 1인자이자 에이스로 지목받은건 펠레였다. 마라도나처럼 상대적으로 평범하거나 약한 팀을 단독 캐리하는건 물론 경이로운 일이지만, 역대급 팀에서 쟁쟁한 동료 선수들을 제치고 에이스가 되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7] 1986 마라도나에게 가장 근접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고 평가받는다.[8] 크루이프는 준우승에 그쳤고 메시는 신체적 전성기가 지나 피지컬적인 파괴력은 마라도나에 비해 낮았다고 평가된다.[9] 당시 중계진이 마라도나를 가리켜 축구는 11명이 하는 운동이라는 상식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내렸다.[10] 8강 결승골, 4강 해트트릭, 결승 멀티골.[11] 조별리그 1차전 1골 1어시, 2차전 결승골 어시, 3차전 멀티골, 8강전 1어시, 4강전 1어시, 결승전 1골 2어시.[12] 펠레의 소속팀이었던 산투스 등 강팀은 유럽 강호들과의 경기에서 대부분 압승을 거뒀고, 펠레는 월드컵에서도 숱한 유럽 강호들을 물리치며 자신의 역량을 증명했다. 즉, 펠레의 유럽 활약 부재는 과거 인터넷에서 성행했던 메시의 PL 검증론과 같이 무의미한 담론에 불과하다. 다만 남미의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디, 기예르모 스타빌레 등 스타 선수들은 대부분 남미에서 유럽으로 갔고 펠레 본인도 유럽 진출을 원했으나 브라질 정부가 막아서 가지 못했다.[13] 다만 축구라는 스포츠가 상대적으로 약물에 관대한 편인 게 사실이다. 프란츠 베켄바워게르트 뮐러 등은 서독 국가 차원의 도핑 보고서가 남아있고 미셸 플라티니도 동료의 폭로가 있었으며 요한 크루이프아약스 팀닥터의 폭로가 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 국가대표 선수였던 야프 스탐, 에드가 다비즈, 프랑크 더부르와 94 월드컵 우승의 주역인 호마리우도 도핑 테스트에 걸린 전적이 있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서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한국 대표팀 주치의는 일부 선수들에게 성장 호르몬을 몰래 주사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기도 했다.[14] 가린샤, 토스탕, 제르송, 자이르지뉴, 자우마 산투스, 지투,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지우마르, 니우통 산투스, 디디, 호베르투 히벨리누 등.[15] 사실 마라도나도 호르헤 발다노, 호르헤 부루차가 등 꽤 훌륭한 동료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발다노나 부르차가는 역대급 레벨의 선수와는 거리가 멀다. 전체적인 팀원 수준은 역시 펠레의 브라질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1970 브라질은 매직 마자르 시기의 헝가리나 메이저 3연패 시기의 스페인과 함께 가히 역대 최강의 국가대표팀 중 하나로 길이길이 회자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대단한 선수들이 가득했던 당시 브라질에서도 최고였던건 펠레였으니 당시 브라질이 황금 멤버였다는 것이 펠레를 폄하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 2트레블 시기의 바르셀로나(단 08-09 시즌UCL 결승에서 역배당을 받았다.)와 UCL 3연패 시기의 레알 마드리드가 역대급 팀이었다는 것이 메시, 호날두를 폄하하는 근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물론 약팀을 하드캐리 하는 것은 당연히 평가에 있어 가산점을 받아야 하는 일이지만, 이것이 강팀의 에이스를 감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16] 훗날 2004년이 되어서야 '펠레 에테르노'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영상이 일부나마 발굴됐다.[17] 27살에 레알로 가서 라리가 8회 우승, 라리가 득점왕 5회, 4연속 라리가 득점왕, 29살에 생긴 유러피언컵 5연패, 유러피언컵 득점왕 2회, 30살에 생긴 발롱도르 2회 수상을 달성했다. 첫 시상이 41살의 스탠리 매튜스에게 돌아가고 디 스테파노가 2위를 차지해 실질적으로 3회를 챙긴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가 익히 아는 대회, 상들이 막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다. 실제로 29살에 유러피언컵이 생긴 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챔스 5연패를 해본 선수는 디 스테파노의 동료 외엔 없고, 자기 눈으로 그 시기를 지켜본 퍼거슨 감독은 디 스테파노를 마라도나보다 높게 평가했다.[18] 팀 내 1인자냐 아니냐는 선수 평가에서 중요한 요소다. 지단이 피구사비, 이니에스타보다 평가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이유도 클럽과 국대에서 모두 1인자였기 때문이다. 다만 헝가리 혁명으로 인해 2년 동안 축구를 쉬었다는 것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19] 프란체스코 토티, 루이스 피구, 파벨 네드베드, 호나우지뉴, 히바우두, 호나우두 등.[20] 반면 호날두는 8강에서 모로코에 역대급 충격패를 당하며 커리어 통산 월드컵 토너먼트 0골 0어시라는 초라한 성적표로 월드컵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신세가 됐고, 심지어 개인 기량도 노쇠해 조별 리그 3차전에선 그야말로 상대의 승리를 떠먹여준 수준의 폼을 보여줘 16강부턴 아예 벤치로 내려갔다. 메시가 펠레, 마라도나의 반열에 올라선 반면 호날두는 기존의 평가를 사수하는 데 만족해야 할 처지가 된 것.[21] 브라질 전국 리그[22] Metropolitano(메트로폴리타노)[23] 라리가리그컵[24] 최초, 최연소 수상[25] 스포츠계 인물 중에서는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26] 링크[27] Metropolitano(메트로폴리타노)[28] Nacional(나시오날)[29] 링크[30] 20세기 말 마라도나가 말년의 몰락으로 인해 간혹 5위권 밖으로도 떨어졌다곤 하나, 구설수는 골프 황제로 불리는 타이거 우즈도, 수영 황제로 불리는 마이클 펠프스도 있다. 타이거 우즈는 섹스 스캔들이 있지만 골프의 아이콘으로 꼽히고, 펠프스도 마약, 음주운전을 했지만 수영 황제로 꼽히며, 메시도 똑같이 논란은 있다. 즉 대부분의 스포츠에서 GOAT로 꼽히는 선수들은 구설수가 있어도 GOAT로 평가받는데, 마라도나만 3위 아래로도 떨어졌다는 것은 결국 마라도나는 펠레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압도적인 축구의 GOAT로 평가받긴 부족하단 것을 뜻한다.[31] 마라도나의 각종 논란이 슬슬 가라앉음과 동시에 펠레 세대가 일선에서 은퇴하거나 사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32] 당시 마라도나 세대의 펠레 폄하는 상당했는데, '마라도나가 펠레보다 축구 3배 잘한다' '마라도나의 월드컵 우승 1번은 펠레의 월드컵 우승 3번을 능가한다' 같은 말을 기정사실처럼 했고, 조금 심하게 말하면 펠레가 마라도나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기록만으로 선수를 평가하는 축알못, 좆문가 취급을 하는 수준이었다.[33] 당연히 펠레 세대의 의견이 반영되기 어렵다.[34] 펠레의 다큐멘터리 영상. 펠레 스페셜 영상 대부분의 출처가 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5] 해당 기록 발굴로 펠레의 인식이 골만 잘 넣던 정통 스트라이커에서 컴플리트 포워드로 바뀔 수 있었다. 산투스 FC, 브라질 대표팀에서 펠레는 주로 4-2-4 포메이션의 최전방 공격수 2명 뒤에 위치했는데, 이를 현대적 관점으로 보자면 공격형 미드필더세컨드 스트라이커에 해당하지만 당시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라는 포지션이 정립되기 전이었다.[36] 메시의 월드컵 우승으로 메시를 1위로 꼽는 매체가 많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37] 이미 19세기부터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전역에 일본인 이민자들이 유입되었을 정도로 일본과 브라질의 유대 관계는 깊다. 다만 여기에는 당시 FIFA 회장으로 장기 집권하며 독재 권력을 휘두르던 주앙 아벨란제의 입김도 상당히 있었다.[38] 이때문에 그당시 한국에서는 마라도나의 여론이 더 좋았다.[39] 당시 감독이 공석이라 전남 드래곤즈 감독이던 정병탁 감독이 감독대행 자격으로 지휘했다.[40] 이 당시 '마라도나 복귀전'이라고 널리 홍보되어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카를로스 메넴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까지 경기장에 방문했는데, 하석주가 동점골을 넣었다. 경기는 2:1로 보카 주니어스가 승리했다.[41] 참고로 한일 양국의 월드컵 유치 경쟁 당시 남미에서는 일종의 대리전 구도가 형성되었다. 브라질이 일본에 붙고 이런 브라질의 영원한 앙숙인 아르헨티나가 한국에 붙자 역시 브라질과 악연이 깊은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를 따라 한국에 붙었고, 아르헨티나와 악연이 있는 칠레가 일본에 붙었으며 이번에는 또 칠레와 사이가 좋지 않은 페루볼리비아가 한국에 가담했고 또 볼리비아를 싫어하는 파라과이가 일본에 붙었다. 한마디로 동아시아를 두고 남미 국가들이 대리전을 벌였다.[42] 다만 펠레는 173cm의 키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점프력으로 현역 시절 세계 최고의 헤더 중 하나였던 선수고, 마라도나는 딱히 헤더에는 강점이 있는 선수가 아니어서 대결 자체가 마라도나가 불리했다. 신장 역시 마라도나가 펠레보다 8cm 더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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