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1:39

최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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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함장
최원일
崔元一[1] | Choi Won-il
파일:최원일.jpg
출생 1968년 ([age(1968-12-31)]~[age(1968-01-01)]세)
대구광역시
학력 청구고등학교 (졸업 / 21회)
고려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 석사[2])
자녀 1남 1녀[3]
종교 가톨릭 (세례명: 빈첸시오)무종교[4]
SNS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해군
1991년 ~ 2021년
임관 해군사관학교 (45기)[5]
최종 계급 대령 (대한민국 해군)[6]
최종 보직 한미연합군사령부 보안과장
주요 보직 제8전투훈련단 종합전술훈련대대장
해군교육사령부 조함훈련실장
해군교육사령부 기준교리처장
해군역사기록관리단 연구위원
PCC-772 2대 천안함 마지막 함장

1. 개요2. 생애
2.1. 학창시절2.2. 군 시절2.3.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2.4. 전역2.5. 전역 이후
3.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최원일_천안함기념관.jpg
대한민국 해군 퇴역 대령. 초계함(PCC-772)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 함장이었다.

2. 생애

2.1. 학창시절

청구고등학교(21회)[7]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45기)에 입교하여 생도 4학년때는 해군사관학교 명예위원 생도(학년별 8명)를 역임하였으며 해군 항해 소위로 임관하였다. 주요 보직을 거쳤으며 중령까지 전 계급을 1차 진급하는 등 꽤 잘나가는 장교였다. 1997년에는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2. 군 시절

2008년 천안함 함장으로 부임했으며,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까지 근무하고 있었다. 피격 당시 함장실에 있었는데, 폭발로 인해 함장실 도어가 뒤틀려서 갇혔다가 승조원들의 도움으로 함 외부로 나왔으며, 남은 승조원들을 수습해 함수에서 모든 생존 승조원[8]들(본인 포함 58명)을 구조하는 것을 지휘하다가, 구조를 위해 출동한 해양경찰 경비함에 올라탈 때도 맨 마지막으로 퇴함하였다. 사실은 천안함과 운명을 같이 하려고 했지만, 부하들이 억지로 끌고 나와 마지막으로 구출됐다. 전준영 당시 병장의 증언.[9]

2.3.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천안함 피격 사건에서 함장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며 최선을 다했으며, 애초에 천안함은 스펙상 대잠능력이 없어 잠수함 탐지가 불가능했음에도 정치계와 언론들은 여야, 진보보수를 불문하고 이를 거론하기는 커녕 도발에만 집중조명하는 바람에 경계실패로 무력도발을 허용한 패장이라는 오명만 뒤집어쓰게 된다.[10]

사건 이후로는 계룡대 해군본부에 위치한 해군 역사기록관리단 연구위원, 해군교육사령부 기준교리처장, 제8전투훈련단 종합전술훈련대대장 등 여러 한직을 전전하며 무려 10년을 진급하지 못하고 중령에 머물렀다. 왜 패장을 진급시키느냐고 논란이 일 것을 겁낸 해군 측이 그를 진급시키는 것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11] 전역하던 2021년 시점에서 해사 45기 동기들 중[12] 선두주자들은 소장까지 진급해 각각 1•2•3함대 함대사령관을 맡고 있었는데[13] 그 사이 그는 한 번도 진급하지 못했다.

2.4. 전역

중령 연령정년 53세가 된 해인 2021년 2월 28일 한미연합군사령부 보안과장을 마지막으로 대령으로 명예 진급[14]하며 전역했다.

해군에서 명예진급을 권했을 때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진급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동정심에 적선하듯 던져주는 진급에 불과하다 여겨 거부하려 했으나, 생존 승조원들이 함장의 진급이 곧 승조원들의 명예가 될 것이라고 설득하여 명예진급을 받아들였다.

전역한 당일, 국립대전현충원정복 차림으로 방문하여 자신의 정모를 천안함 전사자 묘역에 장식된 위에 올리고 참배했으며, 2013년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에도 대령 계급장을 올렸다.

2.5. 전역 이후

2021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재조사를 의결하자 천안함 유가족과 승조원에 대해 명예회복을 위해 관련자 처벌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했던 최원일은 조상호 전 민주당 부대변인이 "생때같은 부하를 수장시킨 장본인"이라고 하자 "잠수정 탐지 기술이 없다"는 등의 내용으로 반박하였으며, 휘문고등학교 영어교사 정해욱이 비속어를 사용하여 "경계에 실패한 군인"이라며 자신을 비방하자 국가수사본부에 모욕죄로 고소했다.[15]

2021년 6월 15일 MBC PD수첩 천안함 생존자의 증언 편에 출연해 천안함 피격 사건은 정부와 정보의 실패이며 당시 상급부대의 거짓말들을 밝힌 바 있다.

2021년 7월 1일 기존의 천안함 현역과 예비역 전우회를 통합한 천안함 전우회를 설립하고 같은 해인 12월 1일에 천안함 생존자 전우회로 개편하여 회장 직책을 맡고있으며 천안함 명예회복을 위한 음모론 대응과 생존 장병 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2021년 7월 12일, 함장의바다 Captain's Sea라는 제목의 채널을 개설하였으며 7월 15일에 첫 영상을 업로드 하였다. 이후로 음모론을 반박하는 내용 등 천안함 사건 관련 영상을 업로드 중이다.

2021년 12월 음모론자 신상철에 의해 군형법상 거짓보고·함선복몰죄로 고발당했다.[16] 그리고 비슷한 시기 신상철을 변호했던 권경애 변호사에게 사과를 받아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신상철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뉴스1

2022년 6월 9일,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천안함 피격 사건, 제2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전, DMZ 목함 지뢰 도발 사건 등, 북한의 도발에 맞선 호국영웅들을 대통령실로 초청한 '호국영웅 초청식탁' 자리에 초청을 받아 윤석열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 하며 간담회를 하였다.

간담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감사인사와 "호국영웅 여러분들을 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지켜드리겠다" 는 다짐을 받고, "현 정부 들어, 호국과 보훈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해 주시는 대통령님께 감명을 많이 받았다, 한반도 평화라는 이유로 북한의 소행임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우리들은 상처를 많이 받고있다." 라며, 이전 정부인 문재인 정부를 에둘러 비판하는 소감을 윤석열 대통령에게 밝혔다.

2022년 7월 12일 경상남도 양산시, 그리고 2022년 7월 27일 경기도 용인시 주관으로 안보교육 강연 행사에 초청되었다.경남도민신문

10월 1일 2022년 국군의 날 기념식 진행 관련 논란때 "마지막 멸공의 횃불을 개사한건 좀 그랬다"고 비판했다.최 대령 페이스북

10월 27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음모론자 신상철의 트위터를 팔로우했다며 할말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

11월 4일 보훈부 격상 논의를 찬성하는 세계일보 사설을 냈다.#

2023년 3월 15일 창설된 326호국보훈연구소[17]에 피격 당시의 최원일 함장이 초대 소장을 맡았다.

연구소는 앞으로 천안함 전상자에 합당한 예우제도 연구, 천안함 생존 장병과 부상장병 등 국가를 위해 희생한 청년들을 위한 정책연구, 천안함 피격 바로 알리기, 천안함 기록 보관(아카이브) 사업 등의 활동을 전개한다. #

2023년 5월 15일 대구급 호위함 7번함 천안함[18]의 인도식에 참석하였다.#

2023년 6월 5일 "천안함 피격 사건은 미국의 조작이며 이로 인해 남북관계가 파탄났다."고 발언한 친명계 인사 이래경을 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되자마자 상술한 발언과 여러 발언이 재조명 받으면서 직위 수행하기 전에 사퇴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바로 현충일이였기에 최원일은 "더불어민주당 대표님! 현충일 선물 잘 받았습니다"이란 글을 올리며 해촉하지 않는다면 현충일날 찾아뵙겠다고 글을 올렸다.

이에 민주당 수석대변인 권칠승 의원이 "무슨 낯짝으로 그런 얘기를 한 건지 이해가 안 간다", "원래 함장은 배에서 내리는 게 아니지 않느냐”는 발언을 하자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6월 5일 최원일 함장은 이재명 당대표에게 현충일 기념 선물 잘 받았다고 비꼬면서 오늘까지 입장 발표하고 해촉 등 조치 연락 없으면 내일 현충일 행사장에서 천안함 유족, 생존 장병들과 함께 이재명 당대표를 찾아뵙겠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다음날 실제로 행사장에서 이재명을 만났다.

이후 최 함장 등 생존자 대표들이 권칠승 의원실을 찾아가 사과를 받았으나, 사과는 사과받는 사람이 만족할 때까지라고 주장한 민주당의 말대로 해주겠다며 사과로 인정할지는 사실상 보류했다.

사실 조상호 때까지만 해도 최 함장과 전준영 대표는 천안함을 정치와 엮으려 하지 않았고, 조상호가 사과했을 때는 최소한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한다는 전제 하에" 조건부로 용서를 해줬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민주당 인사들이 계속해서 논란을 일으키자, 더 이상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민주당 인사들의 천안함 모욕이 도를 넘어가고 있음에도 지도부는 이를 방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 인사들이 천안함 생존자 및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이 계속 이어지니 정치와 엮이는 것을 피하려던 최원일 함장도 당연히 민주당을 적대하게 되었다.

2023년 9월과 10월에 자신의 SNS를 통해 윤석열 정부국가보훈부를 비판하는 글을 작성했다. 국군의 날 75주년 기념 행사에서 항상 초대받던 유가족과 생존 장병들이 패싱당한데다 최 함장만 전날 새벽에 초대 문자를 받고 생존 장병인 전준영은 당일에 사정을 설명한 후에 겨우 참석할수 있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행사 도중에도 유독 천안함 유공 장병만 빠져 민망했다고 밝히며 '용산의 천안함 모자와 티셔츠는 무슨 의미냐'며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또한 뒤이어 10월에는 지난 현충일 행사 이후 VIP에게 유공자증을 받을때 화면에 2010년 3월 26일 북한 어뢰 공격으로 좌초[19]라고 적혀서 나와 당황하고 이를 항의했으나 장관은 자신의 일정을 다 소화한 이후에야 전화를 줘서 화가 나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이후에 전화를 하지 않았음에도 계속 연락을 받지 않는다며 꼬투리를 잡거나 유가족의 항의와 사과 요구에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안았다.

이후 열린 강연에서 이를 지적하자 보훈부 국장들은 사과도 없이 강연 내용만 지적했다고 밝혔는데 이후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과 국군의 날 행사에서 만났으나 이때도 연락을 받지 않는다며 따지는 말만 했다고 한다.

이후 이러한 국가보훈부의 행보가 천안함 비하로 상처를 준 모 정당과 뭐가 다르냐며 국방부와 국가보훈부, 그리고 보훈부장관을 비판했다. #

또한 최원일 함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말로만 도와주는 척하는 것보다 누구들 같이 조롱하고 외면하는 게 차라리 더 낫다. 싸워서 바꿀 수라도 있으니..."라면서 강도높게 보수정권과 국가보훈부를 비판했다. 결국, 보수 정부도 그저 말뿐이지 실질적으로 천안함 장병들을 알아주고 도움을 주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보훈부의 행태에 염증을 느꼈는지 국가보훈부정책 자문위원회에서 자진 사임했다.

이후 이러한 SNS 글이 기사화 되자 기존 천안함 음모론자에 추가로 우파 진영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을 욕한다는 이유로 악플이나 달아대는 바람에 악플러들에게 그만하라는 글을 올렸다.

또한 오마이뉴스가 이를 기사화 하자 자신의 글을 허락도 없이 기사화 하고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거냐, 기존에 음모론을 퍼트린건 생각 안하냐며 오마이뉴스도 비판했다. #

그 후 박민식 장관이 22대 총선 출마를 위해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후임자로 임명될 국가보훈부장관 후보자 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앞의 행적에서도 볼 수 있듯 윤석열 정부와의 관계도 파탄난 지가 오래인지라 무산되었고, 강정애 장관이 임명되었다. 대신 제2연평해전 참전용사인 이희완 해군 대령이 보훈부 차관에 임명됐다.

3. 기타

  • 임관 동기로 황선우 해군 중장, 김성학, 황정오, 이수열 해군 소장, 조영수, 임성근 해병 소장, 김영수 해군 보급 소령 등이 있다. 해사 45기는 중장 진급자를 1명밖에 못 낸 비운의 기수가 되었다.[20] 게다가 온갖 사건사고에 휘말린 기수로도 유명한데, 2009년에 김영수 소령이 해군 수뇌부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스타트를 끊었고 2010년 최원일 중령이 함장으로 근무하던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했으며 2023년에는 임성근 소장이 해병대 1사단장으로 재직하던 중 정권이 날아갈 수준의 대형사고를 치면서[21] 해사 45기는 진짜로 마가 낀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는 중이다.
  • 월간조선과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 해군 수병으로 군 생활을 한 부친이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같은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본래 언론인을 꿈꾸었으나, 어려웠던 가정 형편과 투병중이던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 드리고자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이 사연은 최 대령의 전역사에도 등장하였다.
  • 2021년 변호사 조상호가 천안함 침몰 과정에서 최 함장이 부하들을 수장시키고 자신만 살아남으려고 했다며 왜곡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최 함장은[22] 고소장을 제출했으며 민주당에 조상호의 제명을 요구했다. 또한 휘문고등학교의 교사 정해욱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함장을 모욕한 사건이 발생했다.[23] 최 전 대령은 절대 고소를 취하하지 않겠다는 강경대응을 선언했다. 결국 조상호는 대전현충원에서 함장 및 전사자들에게 직접 찾아가 사죄했고, 최원일 함장은 조상호의 사과를 받고 고소를 취하했다. 이후 조상호는 천안함 관련해서는 완전히 입장을 바꿨고 이후 화해해서 두 사람은 호형호제할 만큼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정해욱에 대해선 끝까지 고소를 취하하지 않아, 그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 국방TV에서 천안함 피격 14주기를 맞아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 슬하의 1남 1녀 중 아들은 자진해서 해군으로 복무 후 만기 전역했다고 한다. 본인도 딱히 말리진 않았다고 하며 손자 또한 자기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라며 가족들의 해군 복무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듯한 이야기를 했다.


[1] 해군 수병으로 복무한 아버지가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독과 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최원일'이라고 지었다고 한다.[2] 석사 학위 논문 : 신생 조직의 상징 활용 : 해양수산부를 중심으로(1997).[3] 천안함 사건 당시 중3, 초6이었다.[4]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천안함 음모론 옹호로 가톨릭에 회의감이 들어 2010년부터 냉담자가 되었다.# 가톨릭 외에도 여러 종교단체들이 음모론을 들이밀며 인신공격을 지속해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회고했다.[5] 현역에 남은 동기들 중 최고 계급자는 황선우 중장이며, 이 외에 김성학, 이수열, 황정오가 소장으로 재직중이다. 해병대까지 포함하면 조영수임성근도 소장이다.[6] 명예진급으로 전역 당일 대령 진급.[7] 김창기 국세청장이 3년 직속선배, 권영진대구광역시장이 7년 직속선배다. 권영진은 최원일 함장의 고려대학교 대학원 선배이기도 하다.[8] 이미 침수된 격실에 있어 수색 및 구조가 불가능한 1명 제외.[9] 생존장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원일 예비역 대령은 당시 승무원들을 퇴함시킨 후에, 배의 선미가 사라지고 없는 모습과 있어야 할 46명의 휘하 장병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잠시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한 모습을 보이다가 남은 장병들에게 퇴함을 명령하고 본인은 배에 남으려고 했다고 한다. 함께 있던 장병들이 거의 연행하다시피 강제로 끌어낸 뒤 구명정에 반쯤 집어던져서 탈출시켰다고...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영상이니 여유가 되는 사람은 보는 것을 추천한다.[10] 이것이 누명인 이유는 경계 실패 논란 참조[11] 다만 대놓고 찍힌 것이 아니라, 맡은 배가 침몰함으로 인해 커리어 공백이 발생하며 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해군은 규모가 작고 배를 탄다는 특성상 영관급부터 보직이 급감하기 때문에 중령까지 1차로 진급하고도 대령을 못 다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 일례로 제1연평해전대청해전에 각각 참수리 357 정장과 편대장으로 참전해 화랑무공훈장을 중복 수훈한 연제영 대령조차 2021년에 가서야 7차로 대령에 진급했다. 진급한 지 2년 만에 군을 떠난 것을 보면 임기제 진급으로 추측된다.[12] 여담으로 해사 45기는 여러모로 진급운이 없는 기수이기도 한데, 2022년 11월 정기인사에서 1명만 1차로 중장 진급에 성공했으며, 이후 중장 2차 진급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은 채 이듬해인 2023년 김명수 중장과 양용모 중장이 동시에 대장 진급하면서 46기 2명이 중장에 올라 황선우 제독을 제외한 45기는 최대 소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대부분은 기수당 2명, 많으면 3명까지 중장을 다는 것을 고려하면 운이 없는 기수가 맞다. 게다가 같은 45기인 임성근 해병 소장이 정권이 날아갈 수준의 대형사고를 치고 사실상 기수열외되는 등, 여러모로 마가 낀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중.[13] 김성학 1함대사령관, 황정오 2함대사령관, 황선우 3함대사령관. 이중 황선우 제독은 현재 중장까지 올라 합참 군사지원본부장을 지내고 있다.[14] 명예 대령과는 다르다. 명예 대령인 경우 민간인을 명예 군인으로 위촉하고 명예 계급을 수여한 것으로, 대표적인 사례는 명예 해군대령 이국종 교수(명예 해군대위 위촉 후 3차례 진급)가 있다. 최 함장은 진급과 동시에 전역했을 뿐, 현역으로 정식 복무하다가 (비록 현역 대령 신분은 전역일 하루뿐이었지만) 대령 계급을 받았기에 공식적으로 예비역 대령이며, 연금 등의 혜택도 역시 대령 기준으로 받는다. 일반적으로 고위장교들의 명예진급은 기준이 해마다 다르긴 하지만 5차 진급(혹은 이상)까지 진급을 못한 인원에 대해서 매년 일정 시점에 내신지시가 시달된다. 말 그대로 명예직이다.[15] 초계함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알다시피, 천안함은 초계함이기에 대잠경계가 불가능한 군함이었다. 그렇기에 이를 경계실패라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자 왜곡이다.[16] 그런데 거짓보고죄의 공소시효는 5년이라 신상철의 말이 맞다 쳐도 처벌이 안된다.[17]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 당시 전사자를 비롯한 104명 전우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그들의 명예를 지켜나가는 활동을 하고자 설립됐다. 작년 3월 보훈처로부터 비영리법인 설립 허가를 받아 7월에 법인 등록을 마쳤다. 12월에는 기획재정부로부터 지정기부금단체 승인을 거쳐 이날 용산구에 사무소를 열었다.[18] 2대 천안함의 함명을 계승한 3대 천안함[19] 좌초는 배가 암초에 얹혔다는 뜻으로 천안함은 북한 어뢰 공격에 침몰 등으로 표현하는게 맞다. 북한 어뢰 공격에 좌초 라고 하면 북한 어뢰 공격을 맞고 암초에 얹혀 좌초 당했다고 읽히게 된다.[20] 보통 중장은 기수당 최소 둘은 나오며 해병대사령관이 나올 경우 1명이 추가되기 때문에 많으면 4명까지 나오기도 한다.[21] 사실 책임자를 처벌하고 뒷수습을 제대로 했다면 이럴 일은 없었다. 그러나 같은 식구를 감싸는 대신 책임자 처벌을 제대로 하려던 해병대 군사경찰들이 수사 외압을 받았다는 논란이 터지면서 정권에 치명타를 날리게 되었다.[22] 상술했듯 함장실에 갇혔다가 구조된 후 구조 작업 지휘 및 마지막으로 나가는 것으로 함장의 의무를 다했다.[23] 해당 교사는 논란이 일자 SNS에 사과글을 올렸으며(현재는 삭제), 학교 측에서는 해당 사건에 대해 부담을 느껴 담임직에서 직위해제 및 수업참여를 금지시켰다.[24] 실제로 천안함 피격 사건 장례식 때도 한 남성이 "함장 이 XXX야!"라면서 욕설을 퍼붓고 최원일 함장에게 달려들어 옷자락을 잡는 폭행 시도까지 했다가 제지당한 사례도 있었다. 다만 이 사람은 전사자 유가족 중 한 명이었고, 여러모로 침착하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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