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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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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가계 및 어린 시절3. 조부와 부친의 죽음4. 여진족의 통일
4.1. 당시 여진족의 상황4.2. 건주여진 통일4.3. 해서여진 복속4.4. 후금 건국
5. 명나라와의 전쟁6.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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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후금)의 초대 황제청태조 천명제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생애에 대한 항목.

2. 가계 및 어린 시절

누르하치는 랴오닝성 출신으로 오도리 만호부(斡朶里 萬戶府)의 만호였던 먼터무(孟特穆)[1]의 6대손이었다. 아버지 탁시와 할아버지 기오창가는 여진족이었지만 고려 출신 귀화인의 후손인 명나라 요동 총병 이성량에게 복속해 있었다.

누르하치의 조상들은 수극소허부(또는 수크수허 아이먼) 소속으로 전체 부를 다스리는 족장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유력한 가문은 되었다. 그리하여 대대로 명나라에 복속해 있었다. 그리고 건주위의 여진족들은 명나라와의 교역으로 계속 문화 수준이 높아져 있었으며, 수렵-채집-유목생활을 버리고 점점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탁시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했다. 명나라의 문화적인 영향 때문에 누르하치는 어릴 때부터 글(한문)을 배워 다른 정복왕조의 개창자처럼 문맹이 아니었고, 여진족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었던 말타기와 무예도 열심히 익혔다. 하지만 9세 때 생모가 죽고 아버지가 계모 하다나라씨를 맞자,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져 통갸씨 가문의 딸과 결혼한 후 18세에 집을 나가 처가에 머물렀다. 아버지는 가축 몇 필과 노비 몇 명을 주면서 누르하치를 분가시켰다.[2] 이때 누르하치는 넉넉한 상태가 아니었고, 만주의 산에서 약초와 산삼을 캐내 명나라 상인들에게 파는 심마니 노릇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는 만주뿐만 아니라 명나라 북방의 여러 곳을 떠돌면서 중국어몽골어를 익혔다.

하지만 이런 약초상 생활에 싫증이 난 누르하치는 요동 총병 이성량의 휘하에[3] 입대했다. 승마와 활쏘기에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당장 이성량의 눈에 들었고, 그는 이성량 휘하에서 점점 승진했다.

3. 조부와 부친의 죽음

1583년 24세 되던 나이에 누르하치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다. 당시 여진의 한 추장인 아타이 장긴이 고성(古城)에서 명나라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아타이의 난) 이성량이 지휘하는 명나라군은 즉시 반란 진압에 나섰고, 이성량에 복속해 있었던 누르하치의 조부 기오창가와 부친인 탁시는 아타이 장긴을 설득하려고 성안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아타이의 아내가 기오창가의 손녀, 즉 누르하치와는 사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속한 수극소허부(또는 여진어로 수크수후 아이먼)의 족장(또는 대추장)인 니칸 와이란은 명군에게 공격을 하도록 설득했고, 명군의 공격에 반란군 및 반란군을 설득하러 성에 들어간 탁시와 기오창가는 모두 사망하게 되었다.[4]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누르하치는 이 때문에 이성량에게 크게 항의를 했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사과하고, 그를 좌위지휘사로 승진시키는 한편, 명나라 조정은 칙령 30통[5]과 말 30필을 누르하치에게 배상금조로 주었다. 그리고 조부와 부친의 시신을 정중히 누르하치에게 인도했다. 누르하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비명에 세상을 떠났지만, 벼슬도 높아졌고 재산도 불어났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이어 자기 가문의 추장이 되는 행운도 얻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르하치가 이들의 죽음을 기뻐한 것은 아니고, 명나라에 깊은 한을 품었다.

4. 여진족의 통일

4.1. 당시 여진족의 상황

여진족은 예전에는 읍루, 말갈족이라고 불리던 사람들로, 기원전부터 대체로 한족이나 예맥계(한민족계) 민족에 비해 문화수준이 낮아서, 중앙집권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국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고구려, 발해등의 예맥계 민족이나 그밖의 요나라등에 복속해 있다가 12세기 민족적 자각으로 만주에서 금나라를 세워 요나라를 멸하고 송나라장강 이남으로 쫓아내 약 100여년간 화북을 지배했다. 하지만 몽골족칭기즈칸의 지도아래 일어서고, 이어 몽골제국남송과 협공을 통해 남북으로부터 금나라를 공격하자 멸망했다. 화북에 남아있던 여진족은 상당수 몽골족에게 학살당하고, 만주에 남아있던 여진족들은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별로 몽골제국이 이름을 바꾼 원나라에 복속해 있다가 이후 원나라가 명나라에 쫓겨 몽골고원으로 도망가자, 만주까지 진출한 명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원래 만주 지역은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잠시 당나라가 관할했으나, 698년 발해가 세워지고, 이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가 지배하다가 북원의 장수인 나하추가 명나라에 귀순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족 왕조인 명나라의 관할이 되었다. 명나라는 이렇게 민감한 지역인 만주를 다스리기 위해, 일반 행정구역처럼 6부의 이부에서 관할하는 것이 아니라 병부에서 관장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여진족 자체도 안보상으로 문제였거니와, 만주 서쪽에 있는 몽골도 명나라의 안보에 위험한 존재였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대군이 주둔하며 군인이 행정과 군사를 총괄했다. 이성량은 이곳을 다스렸는데, 점점 요동을 사적으로 영지화했다.[6]

한편 남만주에 분포하던 여진 부족들 상당수는 조선왕조에도 복속했는데, 이들을 번호라고 한다. 조선왕조는 이들을 자국 백성으로 간주했다. 원래 조선왕조는 여진족의 영역이었던 함흥평야에서 자란 이성계시절에는 여진족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여진족 또한 조선왕조 초반의 여러 내란(조사의의 난이시애의 난)에도 개입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후 명나라의 여진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면서 여진과 조선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이들이 통제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교역을 허가하기도 하고, 여진 추장들에게 조선의 벼슬을 주는 등, 여러모로 관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만주의 여러 여진 부족들은 명나라와 조선의 영향 아래서 점점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으며, 이는 부족국가에서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음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4.2. 건주여진 통일

누르하치는 이렇게 24세의 젊은 나이로 자기 일족의 추장(수러 바일러)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그의 일족을 무순의 동쪽 지방으로 옮기고 다스렸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추장에 오른 것에 반대한 누르하치의 일족도 많았는데, 이들은 누르하치의 원수인 부족장 니칸 와이란과 손을 잡았다. 누르하치의 부족은 큰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병력은 100여 명에 불과했으며, 그래서 누르하치는 여동생인 가하샨과 사르후 지역의 추장이었던 노미나를 혼인시키고 그의 부족과 동맹을 맺은 후, 조부와 아버지의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죽이려고 했다.

1583년 누르하치는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제거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는데 니칸 와이란은 번번히 도망쳤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작전이 자꾸 누설되는 것을 알고 동맹자인 노미나가 니칸 와이란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결국 누르하치는 노미나를 계략으로 죽이고 사르후를 차지했다. 이어서 니칸 와이란을 계속 추격했으나 친족이 배신하여 다시 중지했다. 누르하치는 친족들의 배신을 토벌했고 1583년까지는 모든 친족의 반항을 진압하여 이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1584년 동악부(동오 아이먼)의 족장인 아하이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누르하치를 두려워하여 먼저 싸움을 걸었다. 이에 양측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본거지인 허투알라에 돌아왔다. 상처를 회복한 누르하치는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뭉친 여러 여진 부족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9월에는 혼하부(후너허 아이먼)를 손에 넣었다.

1586년 결국 니칸 와이란의 거점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니칸 와이란은 명나라로 도망갔고, 누르하치는 명나라에게 그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명나라 측 지휘관이었던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달랠 겸, 니칸 와이란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누르하치에게 넘겨주었고, 누르하치는 그를 참수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이렇게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는 주변 부족을 공격하여 1587년에는 저천(哲陳)부, 1588년에는 마지막으로 완안부를 복속시켰다. 이로써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8부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불과 병력 100여 명을 가졌을 뿐이었던 누르하치는 단 5년 만에 병력 15,000명의 병력을 가진 건주여진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4.3. 해서여진 복속

건주여진이 통합된 직후인 1592년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누르하치의 세력을 주시하던 명나라는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을 막기 위해 한반도로 향했고, 이틈을 타서 누르하치는 동쪽에 있는 해서여진을 통합하기 위한 작전을 짜게 되었다.

해서여진의 주요 부족은, 울라(烏拉)씨, 호이파(輝發)씨, 하다(哈達)씨, 예허(葉赫)씨 등 4개 부족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금나라의 후예를 자칭하고 있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해서여진은 건주여진보다 세력이 더 컸다. 같은 여진 동족이었지만 해서여진과 건주여진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나라가 교역권을 가지고, 해서여진과 건주여진, 그리고 각 부족끼리 서로 반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누르하치 이전에 두 여진 대부족의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명나라가 조선에서의 대일 전쟁에 정신이 팔린 동안,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해서여진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해서여진은 1593년 9월 구러산 전투 당시, 4개 부에다가 일부 몽골 부족을 끌어들여 9개 갈래의 병력 30,000명으로 병력이 10,000~15,000명이었던 건주여진을 쳤지만 누르하치의 눈부신 지휘 끝에 건주여진이 승리했다. 이때부터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주의를 끌게 되었으며, 명나라측에서는 이후
군대가 위세를 떨치며,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복종하고 있다.(軍威大震,遠邇懾服)
라며 우려를 표했다.

구러산 전투 이후, 건주여진 내부에서 누르하치와 그의 동생 슈르하치의 사이가 나빠져 누르하치가 동생을 죽이는 등, 형제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누르하치는 이후 하다부, 호이파부, 울라부를 차례차례 항복시켜 예허부를 제외한 해서여진을 휘하에 복속시켰다. 이 시점부터 누르하치는 여진족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때 조선 사신들도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누르하치의 군대를 목격하고, 광해군에게 이들이 절대로 야만족의 군대가 아니라 군율이 엄정하며 모두 갑주를 입을 정도로 무장도 충실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조선측은 누르하치를 "누르하치 추장"이라는 의미에다가 비하의 의미로 "종 노"()를 써서 노추(奴酋)라고 불렀는데 광해군의 조선 조정에서도 이들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으며, 《광해군일기》에 160번이나 나올 정도였다. 광해군은 함경도와 평안도쪽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명령을 계속 하달했다.

두만강 동쪽, 현재의 백두산 동쪽에 살았던 야인여진은 문화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부족 단위로 복속시키지 않고, 그냥 개인별로 팔기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어쨌든 야인여진도 부족별로 편제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가 후금 쪽으로 간 것은 맞다. 그래서 누르하치가 일어선 이후 함경도쪽의 여진족의 노략질은 없어졌다. 인구가 적었던 만주족의 형편상, 청나라는 산해관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넓은 의미에서 동족인 야인여진인들을 중국 본토로 데려와 만주족의 규모를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만주 - 연해주의 산악 지역에 살았던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분명한 여진족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만주족에 편입되지는 않았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의 전쟁 와중인 1606년 수러 쿤둘언 한에 등극했다.

4.4. 후금 건국

해서여진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1616년 허투알라에서 후금의 건국을 선포하고, 수러 겅옌 한으로 즉위했다. 생여진의 완안(完颜)부가 1115년에 세운 옛 금나라를 계승해 국호를 아이신(aisin, 金)으로 정하고, 연호를 압카이 풀링아(abkai fullingga, 天命)라고 했다.

5. 명나라와의 전쟁

5.1. 이성량

위에서 보았듯이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요동총병 이성량 휘하에서 성장한 인물이었다. 이성량이라는 인물은 ‘요동왕’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요동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7]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부대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성량의 양아들이라는 소문도 퍼져 있을 정도로 이성량과 사이가 좋았다. 명나라는 만주를 장악한 이래 이이제이와 분할지배를 통해 여진족을 분열시키고, 서로 싸움을 붙였으며, 일부 여진족은 명나라편에 붙어서 동족을 공격하거나 북원(몽골) 원정에 동원되었다.

이성량은 능력이 출중해서 여진족을 분열시키고 북원의 좌익을 견제하는 공작을 성공적으로 해냈으며, 특히 북원의 대칸인 차하르부의 투먼 칸의 공격을 몇번이나 저지했다. 그래서 당시 암군인 신종 만력제의 재위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의 북방은 안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이성량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은 이성량을 두려워했고, 누르하치조차 이성량이 좌천되기 전까지는 명나라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량은 만주를 영지화하고 전횡을 일삼았으며, 사치도 엄청났다.[8] 이렇게 이성량은 점점 독립 군벌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9] 당시 만력제가 등극하고 있었음에도 군비를 마음대로 쓰며 만주를 개인왕국화하는 이성량의 행태를 북경의 조정에서 두고 보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이성량은 휘하 여진병을 이용하여 왜란으로 약화된 조선을 침공해 전주 이씨를 대체하고 한반도를 지배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0] 이런 이성량의 행태가 너무 심각하여 결국 1591년 웅정필에게 탄핵되어 자리를 잃었다. 이후 어떻게 다시 복직하여 요동으로 돌아갔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8년 다시 재탄핵되었고, 베이징에 돌아와 사망했다.

그러나 이렇게 이성량을 해임한 것은 결과적으로 명나라의 섣부른 판단이었는데 이성량이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몽골이나 여진 같은 전투민족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명 조정은 이성량을 파면시키고 경험도 없는 사람을 보내버렸다. 새로운 인사들도 본국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예상외로 강한 누르하치의 세력에 놀랐고, 함부로 제압하지 못했다. 여기서 누르하치의 선택은 대적도 아닌 뇌물이었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의 전쟁 중에 적을 동시에 여럿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고, 일단 명나라에게는 굽신거리면서 이성량의 후임자들에게 뇌물을 바쳐 명나라 조정을 안심시켰다. 게다가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싸우는 것은 명나라가 보기에는 그동안 여진족을 분열시켰던 이이제이책이 먹혀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면도 있어서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예전의 건주-해서 전쟁과는 달리 아예 해서여진을 복속 및 합병하려고 했고, 명나라는 여기서 누르하치의 대전략을 읽는 데 실패했다.

그래도 명나라는 당시의 건주여진 따위는 충분히 제압할 힘이 있었지만, 불운했던 것은 건주여진이 이렇게 누르하치 휘하에서 흥기할 때 쯤, 명나라만력 3대정에 휘말린 것이었다. 이 '만력 3대정'은 누르하치에게 있어서는 천재일우로 이후 명나라의 시선은 전부 이 3대정에 집중되어 누르하치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어버렸다. 만력 3대정 중에 건주여진은 해서여진 및 야인여진을 모두 통합했다.

이성량은 두 번이나 좌천되었어도, 누르하치가 유일하게 두려워하고 존경한 명나라 장군인 듯하다. 이성량이 죽은 다음에야 누르하치는 소위 "7대한"을 이야기하며 명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또한 훗날 조선으로 망명하지 않고 청나라에 남은 이성량의 후손들은 한인 팔기에 소속되어 청나라에서도 대접을 받았다.

5.2. 사르후 전투

이성량이 죽자, 거칠 것이 없어진 누르하치는 1618년 "7가지 한(恨)" (또는 7대한)을 내걸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원래 건주여진이 이름을 바꾼 후금은 명나라의 신하국을 자처했으나, 이 7대한을 발표한 시점에서는 대명 침공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첫째, 명나라는 아무 이유없이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였다.
둘째, 명나라는 해서여진을 우대하고, 건주여진을 푸대접했다.
셋째, 명나라는 서로 합의한 국경선을 마음대로 바꾸고, 이를 넘어온 건주여진인을 죽였다.
넷째, 명나라는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전쟁에서 해서여진을 도왔다.
다섯째, 명나라는 누르하치와 약혼한 예허부의 딸을 몽골의 하르하부에 주도록 권했다.[11]
여섯째, 명나라는 건주위가 개간한 땅과 토지를 파괴했다.
일곱째, 명나라는 만주 사정을 잘 모르는 소백지(蕭栢芝)를 파견하여 건주여진을 완전히 무시했다.[12]

이후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 옆에 있는 명나라의 거점이자, 여진족과 명나라 간의 교역 도시였던 푸순(무순)을 함락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누르하치의 군대는 상인으로 위장해서 무순에 입성한 후, 약탈을 하고 도주하여 명나라 군대를 성밖으로 유인했고, 명나라 군대가 이를 추격하자, 숨겨둔 복병으로 역습, 섬멸시킨 후 무순에 입성했다고 한다.[13]

무순을 함락시키면서 누르하치는 다른 유목민족 왕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군사력만 믿고 중국을 정복했다가 단명한 다른 유목민족들과는 달리, 왕조를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를 경영해보고 백성을 다스려 본 한족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한 것이었다. 이때 이성량의 손자였던 명나라 유격 이영방이 후금에 항복했다. 이영방은 후금에서 매우 후대를 받고 벼슬이 높아졌으며, 누르하치의 아들인 아바타이의 딸과 재혼하여 손주사위가 되었다. 그 이후에도 사르후 대전에 참가해 명나라군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고, 정묘호란때도 선봉에 서서 조선을 침공했다.[14]

또한 누르하치는 한족 포로 중에서 대단한 지략을 가진 선비 범문정을 얻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범문정의 집안은 역모에 휘말려 만주로 귀양을 온 처지였는데, 명나라에서 벼슬길이 막히자 명나라를 증오하게 되어 만주족을 도와 출세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범문정은 제4대 성조 강희제때까지 후금ㆍ청나라 황제 4명을 섬기면서 여러 계책을 내 후금이 동북 만주의 지방 정권에서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는 중화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15] 이렇게 누르하치는 민족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인재라면 파격적인 자리와 혜택을 주고 초빙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여진족 특유의 군사력에 큰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족의 인재들까지 갖추니 누르하치의 세력은 점점 커졌다. 이 방침은 제2대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 시대에 와서도 변함이 없었고, 이후에도 홍승주, 오삼계모문룡의 부하들과 같은 명나라 측 한족 장수들이 후금의 이런 후한 대접을 보고 편을 바꾸어 결과적으로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하는 데 선봉에 섰고, 명나라 잔당 및 남명을 멸망시키는 데도 큰 활약을 했다.

이어 자신들이 점령한 명나라 도시들의 한족들을 상대해서도
그대들도 짐의 백성이니라.
고 안심시키며 그대로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는 한편, 점령된 도시의 명나라측 관원이 귀순 의사를 밝힐 경우 자리를 유지시켜주고 그대로 다스리도록 했다. 그리고 별 효과는 없었지만 한족과 여진족을 함께 거주하게 했다. 누르하치는 시들어가는 명나라를 대신해 진짜 금나라를 재건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1619년 4월, 명나라는 후금이 더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버리기로 결심하고 임진왜란에도 출정한 바 있었던 양호(명나라)를 총대장으로 삼아 중국 전토에서 끌어모은 10만~16만 명에 달하는 대군으로 동서남북 4면에서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를 포위 공격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조선과 아직 후금에 복속하지 않은 해서여진의 예허부까지 끌어들였다. 이를 맞는 후금군은 약 6만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후금은 황사바람이 불어 명나라군의 장기인 화력전을 하기 어렵고[16] 명나라의 4개 부대가 손발이 안맞는 틈을 타서 기병을 이용한 기동력으로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4개 부대를 차례대로 패퇴시켰다. 이 역사적인 대전에서 전사한 후금군은 약 2천 명에 불과했지만, 명나라군의 전사자는 4만 7천 명에 달했고 전사한 장수만 300명이 넘었다. 병력 1만 5천을 투입한 조선군도 무려 8천 명이 전사하는 극심한 손해를 입었다. 이를 사르후 전투라고 하며, 이후 명나라에게 미개한 여진족의 연맹 정도로 치부하던 후금은 확고히 위협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르후에서의 대승에 이어 누르하치는 자신에게 복속하지 않고 있었던 예허부도 곧 정복했다.[17] 1621년에는 만주에 마지막으로 남은 명나라 거점인 심양요양을 함락시켰다. 이것으로 누르하치는 요하 동쪽에서 명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요동을 손에 넣었다.

사르후 전투 이후인 1621년 요양에서 5 km 떨어진 곳에 동경성을 짓고 천도했다. 기존의 수도였던 허투알라는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인구 부양력이 낮은 지역이라 인간 사냥과 정복으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누르하치는 여진족과 한족이 한 집에서 동거하도록 조치했는데, 이는 한족들이 여진족들이 이용하는 우물에 독을 푸는 등 민족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5년 동안 이런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자 인내심이 바닥난 누르하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요양의 한족들을 대규모로 학살하고, 남은 이들을 노예로 삼은 뒤 동경성을 떠나 심양으로 천도한 것이었다. 이는 하술할 영원성 전투와 함께 그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실패였다.

5.3. 영원성 전투

후금은 만주를 거의 장악했지만, 명나라의 하급 무관이었던 모문룡은 명나라의 패잔병을 모아 조직한 후 조선의 철산 가도에 주둔하여 후금군을 치고ㆍ빠지기 수법으로 괴롭혔다. 특히 수군을 동원하여 요동반도요하 강을 거슬러 올라가 후금의 심장부인 심양이나 푸순까지도 공략하곤 했다. 이 때문에 후금은 전군을 대명전에 투입하지 못하고, 요하나 요동반도 방면의 수비에 할당해야 했는데, 이것은 인구와 병력이 부족한 후금에게는 큰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명나라도 1620년대부터 중국 전역에서 농민 반란이 발발하여 대후금전에 전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명나라는 수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산해관 이북의 모든 병력을 이남으로 철수하여 만리장성을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하지만 병부주사인 원숭환은 이에 반발하여 산해관과 만주의 중간에 있는 영원성에서 농성하자고 주장했다. 원숭환의 전략은 영원성을 지키되, 후금이 영원성을 우회하면 영원성에서 출진하여 후금의 보급로를 끊는 것이었다. 결국 원숭환의 주장이 채택되었으나, 명나라에서는 1만 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원숭환에게 후금군을 막도록 했다.

1625년까지 후금군은 끈질기게 후방에서 괴롭히던 모문룡군을 몰아내고 뤼순을 탈환하여 요동 반도를 평정했다.

이어 누르하치는 전 병력인 6만 명을[18]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영원성을 공략했다. 이때 원숭환이 지휘하는 수비 병력은 1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영원성은 성벽이 견고했고 홍이포 11문을 비롯한 수성용 병기들을 대량으로 운용했다. 1626년 2월 10일부터 22일까지 벌어진 농성전 끝에 후금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고, 이를 영원성 전투라고 한다.

6. 최후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재기불능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소수 정예의 철기병이 중심이 된 후금 / 청군은 공성전에 유달리 약했고, 요양 및 심양을 공략할 때도 계략으로 명군을 성밖으로 끌어내거나 혹은 성안의 세작으로 공작을 펼친 후 함락시킨 것이었다. 10여 년 이후 병자호란때도 끝내 남한산성 자체는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강화도를 함락시켜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송산전투때의 금주성도 포위만 하고 있다가 식량을 모두 소진시켜 항복을 받았다.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도 마찬가지로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고, 산해관도 결국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를 지키던 장군인 오삼계가 항복하고서야 넘을 수 있었다.

1626년 8월 11일 67세 나이로 붕어했다. 청나라의 기록에는 "병으로 죽었다."라고 나온다.

누르하치가 홍이포를 맞고 부상을 입어 사망했다는 말도 있으나, 일단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되려 정사에는 누르하치의 사망 직전에 탄저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에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을 비추면 탄저병에 감염되어 죽은 것처럼 보인다.

홍이포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기에는 영원성 전투 이후 겨우 석 달 만에 누르하치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몽골 고원으로 진격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자신들의 군주가 부상을 입었다면 본진인 요동으로 돌아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는가? 대포에 맞았는데 부상이 심각하지 않았다는 가정은, 대포를 살살 쏘는 것도 아니고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당시 명군의 화포에 맞아 사망한 사람은 누르하치가 아니라 그의 친족일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만주실록》등의 기록에서 누르하치가 영원성 전투 패배를 자책하는 걸 보면 그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아직 공성 능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후금 입장에서 영원성 전투 패배는 자신들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한 것으로, 누르하치에게는 사실상 산해관 입성이 저지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원성 전투에서 일생 처음으로 참패하여 체면을 구긴 누르하치는 땅에 떨어진 후금군의 사기를 되살리려 했고 영원성 전투 3개월 후인 5월, 직접 내몽골로 친정하여 할하부를 정벌하고 이들의 항복을 받았다. 또한 6월에 몽골 귀족인 오오바 훵 타이지가 후금의 수도인 심양으로 찾아오자 직접 걸어나와 맞이한 행적도 있다. 이런 좌절감이 병으로 이어져 사망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어쨌든 당시 평균 수명을 훨씬 넘긴 68세로 사망한 것을 보면 사실 살만큼 살다가 사망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그의 뒤를 8남인 홍타이지가 이었다. 1636년, 홍타이지는 후금의 국명을 대청(大淸)으로 개칭했고 누르하치는 청나라의 태조로 불리게 되었다. 사후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복릉(福陵)에 안장했다.

[1] 흔히 몽골식 이름인 몽케테무르 혹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는 한국식 독음인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로 알려져 있다. 먼터무는 원래 조선 왕조의 영역인 함흥 주변에서부터 북쪽으로는 무단장송화강 유역까지 부족을 이끌고 다닌 여진족의 추장으로 결국 대륙의 동북부 지방 남부에 정착했다. 훗날 청나라에 의해 조조(肇祖) 원황제(原皇帝)로 추존되었다.[2] 이런 분가는 유목민 특유의 말자 상속에 기반한 듯하다. 즉, 누르하치는 장자였지만, 말자 상속을 선호하는 여진족 관습상,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추장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3] 요동의 명나라는 여진족을 모병해 외인부대, 즉 고대 로마 제국의 포에데라티 비슷하게 운용했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이 거느린 요동병도 상당수가 이런 여진족 또는 몽골병 출신이었다.[4] 또는 얼떨결에 포로로 잡힌 탁시와 기오창가가 명군에게 반란군으로 오인되어 처형당했다고도 한다.[5] 명나라에서는 조선이나 몽골과 무역을 하려면 칙령이 필요했다. 칙령 30통은 누르하치가 30번 외국과 교역할 수 있는 허가서였다.[6] 이는 후한때의 서량에 주둔하면서 강족 오랑캐를 막던 동탁의 행태와 비슷한데, 이런 이민족 방어를 맡은 장수가 군벌이 되는 현상은 한나라 시기부터 중국사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었고, 중앙 권력이 약화되면 바로 독립정권이 되었다.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는 이것을 경계하여 삼번을 폐지하려 했고, 결국 삼번의 난을 겪은 이후에야 폐지할 수 있었다.[7] 참고로 이 이성량의 아들이 바로 임진왜란조선에 파견된 이여송이다.[8] 자택에는 기생이 2,000여 명이나 있었고, 정원의 너비가 10리에 달했다고 한다.[9] 사실 이런 행태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자주 일어나던 일이다. 이렇게 하다가 중앙 권력이 약화되면 바로 이런 군벌들이 중앙 권력에서 독립하여 대륙 전역에서 할거하곤 했다. 《삼국지》가 바로 이런 행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10] 본인의 뿌리가 한국계인 성주 이씨인 것을 어느 정도 의식은 했다고 볼 수 있다.[11] 예허부는 끝까지 누르하치에게 복속을 거부한 마지막 해서여진 부족이었다. 즉 명나라는 이간책을 써서 여진 통합을 방해한 것이다.[12] 웅정필이 이성량을 대체하기 위해 보낸 인물이었다.[13]광해군일기》 1618년 4월 16일[14] 아이러니하게도 이영방의 (전처의) 아들 이연경은 오히려 아버지를 혐오하고, 후금의 장수로 일하면서 명나라와 내통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15] 한국에는 잘 안 알려졌지만 중국에서는 범문정제갈량, 강태공, 관중, 장량과 견줄 수 있는 모사로 보기도 한다. #[16] 이 황사바람을 운이라고 치부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현상은 매년 봄마다 몽골 고원에서 만주 (및 한반도)로 부는 바람이며, 명나라나 후금이나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만 봐도 누르하치가 보통 지략을 가진게 아님을 알 수 있다.[17] 이때 예허부의 수장이었던 예허나라 긴타이시는 죽으면서 "내 부족에 딸 한 명만 남더라도 만주족들을 끌어내리리라."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가 죽은지 약 300년 후, 그의 직계 후손인 한 여자가 청나라를 쇠락하게 하고, 그 조카인 다른 여자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퇴위를 알리는 조서를 반포한다.[18] 영원성 전투 항목에는 후금군 총병력이 16만 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산해관 입관 이전에 후금-청나라의 총 실전 병력은 10만 명을 넘긴 적이 없었다. 16만 명은 아마도 병사들에게 딸린 종이나 노비까지 합한 수일 것이다. 10년 후인 병자호란 때도 전투 병력은 6만 명이었고, 18년 후 도르곤오삼계의 인도로 산해관을 넘을 때도 마찬가지로 청군의 총병력은 6만 명 남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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