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9:29:36

찰스 로버트 젠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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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후 주일미군 기지로 복귀한 후의 모습.

Charles Robert Jenkins
1940년 2월 18일 ~ 2017년 12월 11일(향년 77세)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월북 후 처우2.3. 탈북과 처벌, 그 후2.4. 말년
3. 여담

1. 개요

주한미군 육군 보병병장[1]으로, 자진 월북한 이후 탈북한 인물.

2. 생애

2.1. 초기 이력

1940년 2월 18일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났다. 체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젠킨스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엄청난 거한으로 공장 노동자로 일했는데 평상시에는 근면한 노동자였지만 술에만 취하면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흑인 직원들에게 총을 쏘고 공장 사장이 이를 꾸짖자 제빙공장 전원을 통째로 내려 공장을 작살내는 등 통제불능의 인물이었다. 젠킨스 부부의 자녀가 무려 일곱이나 되었기 때문에 어렵게 살았고 아버지가 제빙공장 파이프를 수리하던 중 지나치게 많은 암모니아를 흡입하여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에 어머니가 어떻게든 집안을 꾸리려고 노력했고 트럭 운전사와 재혼하였는데 다행히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라서 젠킨스 일가를 잘 대해 주었다고 한다.

젠킨스는 학업에는 영 소질이 없었고 기계를 만지는 일에 능했는데 평소에 자주 놀러가던 스케이트장에서 제복 입은 군인들을 보고 군인이 되고 싶어서 15살인데도 불구하고 17살로 나이를 속이고 노스캐롤라이나 주방위군 육군에 입대, 119보병연대 D중대에 배치됐다. 이건 젠킨스의 집안이 어릴 때 정식으로 젠킨스의 출생신고도 하지 않아서 공식 생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동의서만으로 입대가 가능했던 것이다. 처음에 사고를 치고 혼나면서 군대 생활이 맞지 않는다고도 여겼지만 익숙해지면서 꽤 즐거운 군생활을 보내게 되었고 3년간 주방위군으로 복무하였다. 근무성적이 좋아서 부사관으로 진급하였으나 중사 진급은 실패했는데 승진 심사위원회에서 적전 도주하는 부하를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과거에 포트 잭슨에서 교육받은 대로 설득해서도 듣지 않으면 쏴 죽이겠다고 대답한 것이 문제가 된 걸로 보인다고.

1958년에 주방위군 복무기간이 끝난 젠킨스는 주방위군에서 전역한 후 연방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제1연대 제19대대 B중대 훈련소에 보내졌다. 이미 부사관으로 수년을 복무한 젠킨스에게 훈련은 너무 시시했고 훈련소에서도 그가 딱히 훈련받을 게 없다고 여겨서 운전수 보직을 주고 편하게 있었다고 한다. 훈련기간이 끝난 후 뉴저지주 포트 딕스로 가서 상급 훈련을 받은 후 텍사스의 포트 후드에 주둔한 제1기갑사단 "올드 아이언사이즈"에 배치되었다. 거기서 사격 훈련장 관리계로 배치되어 사격장 표적을 만드는 목공 일을 하는 등 적성에 맞는 임무를 맡았으나 생각보다 시시한 임무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59년에 상병으로 진급하고 1960년 9월 주한미군에 배속되어 한국에 파병되었다. 캠프 카이저에 주둔한 주한미군 제7사단 제17보병연대에 배속되었고 근무 성적이 좋아서 1961년 2월 4등 특기관으로 진급되어 6월에 진급하였다. 한국에선 1년만 근무하고 다시 주독미군에 배치되었다. 이후 서독에서 3년간 근무하고 다시 근무지 재배치 시점이 되자 과거 주한미군 근무가 너무 재밌었기 때문에 한국 재발령을 희망하여 다시 주한미군으로 보내졌다. 1964년 9월 제1기병사단 제8연대 제1대대 C중대에 배치되어 분대장이 되었다.

그런데 상부로부터 북측을 도발하기 위한 '헌터킬러' 정찰대를 인솔하라는 '요청'을 받게 되자 너무 위험하다고 여겨서 계속해서 거절했으나 조만간 요청이 명령으로 바뀔 것으로 여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의정부에 주둔한 1군단에서 일하던 먼 친척뻘인 조지프 젠킨스와 만나게 되었는데 조지프 젠킨스는 고향 얘기를 해 주더니 제1기병사단이 곧 베트남에 갈 것이라는 정보를 주었다. 당황한 젠킨스는 베트남에 가거나 헌터 킬러 정찰대 인솔 명령을 거부하여 군법재판에 회부될 것이라는 생각에 극도의 공포감에 빠지게 되었다. 젠킨스는 이를 피하려면 탈영밖에 없다고 여겼지만 남한으로 탈영해 봤자 금방 체포되어 인계되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여겼고 남은 선택지는 월북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1965년 1월 5일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는 게 두려워서 10여 캔의 맥주를 마신 후 만취하여 휴전선을 돌아보겠다는 핑계를 대고 휴전선을 넘었다. 정작 해당 부대는 베트남에 파병되지 않았다.[2][3]

냉전 당시 서독에서 소련군과 대치 중이던 미군들 중 일부가 전쟁이 진행 중이던 베트남으로 차출되어 죽는 것이 두려워서 탈영하여 국가인민군에 잡혔고 동독은 이들을 소련에 넘긴 사례가 있다. 소련군은 나중에 이들을 미군에 잡혀 있던 소련 스파이와의 교환용 협상물로 사용하였고 탈영병들은 그렇게 귀국하여 징역형을 받았으나 그래도 전쟁터에서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젠킨스도 그리 생각했고 자신도 탈영하면 북한이 자기를 소련에 넘겨주고 소련에서 다시 미국으로 송환할 줄 알고 국경을 넘었다. 즉 본인과 비슷한 시기에 탈영했던 드레스녹과 달리 애초에 북한은커녕 공산권에서 살 생각 자체가 없던 인물이었다. 탈영죄로 좀 썩고 불명예 전역이나 하고 고국에 돌아와 조용히 살면 그만이라고 여겼던 것인데 그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2.2. 월북 후 처우

M-14 소총 끄트머리에 흰 티셔츠를 묶고 조선인민군 진지로 넘어간 젠킨스는 즉시 인민군 병사들에게 체포되었는데 어이없게도 인민군들은 젠킨스가 내건 흰 티셔츠가 항복 의사라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압수한 M-14 소총을 장전해 놓지 않은 것을 보고 좀 눈치를 챘다고 한다. 하지만 인민군 중 누구도 영어를 할 줄 몰라서 심문도 없이 가두어만 놓았다. 식사로 죽과 누룽지가 제공되었는데 이때는 젠킨스가 누룽지가 뭔지 모르고 흙탕물인 줄 알아서 거절했지만 나중에 북한에 살면서 누룽지에 익숙해져서 즐겨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상급부대로 보내져 심문을 받았는데 인민군 대좌가 미군 감시초소가 배치되어 있는 산의 높이를 묻자 젠킨스가 이를 피트로 대답했는데 인민군 통역이 피트를 몰라 그걸 미터로 대답하자 대좌가 젠킨스가 거짓말을 한다고 분노하여 폭행했다고 한다.[4] 이후 평양으로 보내졌는데 감시병들이 젠킨스로부터 노획한 신형 수류탄이 뭔지 궁금해하면서 마구 만지는 바람에 열차가 통째로 날아갈까봐 기겁한 젠킨스가 뜯어말렸다. 평양에서는 미군 부대의 점호 등 일상생활에 대해 캐물었는데, 젠킨스는 인민군이 카투사로 위장한 특수부대를 보내려는 의도로 짐작하고 일부러 대충 대답했다고 주장했다. 열흘 간의 심문 이후 드레스녹 등 다른 월북 미군과 함께 살도록 조치받았다. 월북 미군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지도 않은 부사관이 넘어온 사실에 무척이나 궁금해하면서 이유를 캐물었고[5] 젠킨스가 베트남에 가기 싫어서 왔다고 하자 드레스녹이 끓는 물에 발 담그기가 싫다고 불구덩이에 몸을 던진 격이라고 혀를 찼다고 한다.

처음 사동에 6개월 정도 살다가 다시 이사를 했는데 가는 곳마다 당에서 파견한 지도원의 감시를 받았으며 매주 생활총화를 하면서 자아비판, 상호비판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아비판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도둑질까지 했다고 한다. 젠킨스의 예상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젠킨스를 비롯한 월북 미군들의 이용가치를 알고 있었고 끝내 젠킨스는 원하던 바와는 달리 소련에 보내 주지 않아서 평생토록 이를 후회하고 뉘우쳤다고 한다. 게다가 월북 미군들을 세뇌하려는 각종 교육과 학대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대접은 형편없었으며 배급되는 물품의 질은 너무 끔찍해서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게다가 본인이 북한에 정착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한국어도 배우지 않았고 북한 생활을 제일 힘겨워했다.[6] 젠킨스의 주장에 따르면 처음에는 북한에서 월북 미군들과 북한 사람들이 소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오로지 김일성 선집이나 주체사상 문헌을 달달 외우게만 하고 일상적인 회화 등은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한글도 일부러 엉터리 한글만 가르치다가 나중에야 정식 문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매우 유창한 문화어를 할 수 있었던 드레스녹과 달리 젠킨스는 북한 선전문구는 달달 외우게 됐지만 일상회화에는 극히 취약한 모습을 보였으며 불만도 많아 자주 담당자들에게 불만을 토로해서 월북 미군 선배격인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의 불만을 샀다.

드레즈녹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미군제식 소총M14를 들고 월북해 다른 월북자들보다 대우가 좋아[7] 은근히 차별의식이 생겼고 본인은 부사관인데 다른 월북 미군들은 다 병이다 보니까 본인이 계급을 내세워 대장 노릇을 하려 해 주위 다른 미국 출신 월북자들과 자주 티격태격했다. 젠킨스가 계급을 내세워서 드레스녹을 휘어잡으려고 할 때마다 드레스녹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과는 최고로 뛰어난 방법으로 젠킨스를 제압해왔다. 그 방법이라는 게 바로 현피였다. 거진 2m에 가까운 거한인 드레스녹은 젠킨스에게 힘으로는 꿀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젠킨스는 드레스녹이 페리쉬와 연합하여 몸도 약하고 성격도 어리숙한 앱셔를 종처럼 부려먹었고 앱셔와 함께 힘을 합쳐서 드레스녹을 때려눕혔다고 정반대의 증언을 하였다. 전체적으로 미군들이 사이가 좋지 않아서 피를 볼 때까지 싸우는 일이 종종 있었고 이 때문에 북한에서 배급하던 면도칼이 흉기가 될 수 있다고 배급을 중지하고 이발소에 데려가서 정기적으로 면도를 시켰다. 1966년 이후로 가면서 형편이 계속 나빠져서 면도기와 비누 배급도 줄어들었고 이전까진 상한 고기나마 주는 일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끊기게 되었다. 대신 돼지 한마리를 주면서 살찌워서 잡아먹으라고 하였고 이에 월북 미군들이 필사적으로 돼지를 살찌워서 80킬로그램으로 만들었는데 지도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돼지를 잡아서 당에 바치라곤 가져가버렸다. 이에 격노한 앱셔가 "조선로동당 개새끼!"라고 대놓고 욕설을 퍼붓자 지도원들이 앱셔를 끌고가서 총살대에 세우고 사과하지 않으면 즉시 총살한다고 위협해서 그의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월북 미군들은 지도원들이 물자를 횡령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서 처음에 당에 직접 탄원하기 위해 평양에 갔지만 직원들이 면담을 거부하자 지도원에게 이르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황급히 청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소련 대사관이 우연히 눈에 띠자 즉시 그곳으로 가서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대사관 앞에는 무장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난데없이 나타난 백인들이 미국인이라곤 상상도 못하고 그저 소련인이라고 여겨 신분증 검사도 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월북미군들은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고 소련 외교관들이 나와 훌륭한 커피를 대접하면서 주의깊게 얘기를 들어 주었지만 소련 측에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며 다신 오지 말라고 내보내서 조용히 물러나야 했다. 이후 젠킨스 혼자 중국 대사관에 도움을 청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967년에 이르러 상황이 더 나빠져 그나마 괜찮던 숙소에서 쫓겨났고 교육도 받지 않고 하루종일 어망 만드는 노동에 동원되었다. 그러다가 푸에블로호 사건이 마무리되고 1968년부터 교육이 다시 시작되었으며 1969년 3월에 화천에 있는 더 열악한 집으로 보내졌다. 1971년에는 북한으로 표류한 일본인 두 사람과 같이 살게 되었으나 다음날에 도로 데리고 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1971년 말에 5차 당대회에서 제시된 학습자료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공민증, 집, 직장, 여자를 주겠다고 북한 측이 갑자기 회유에 나섰고 이에 미군들은 필사적으로 공부하여 1972년 3월에 정치시험에 통과하였고 6월 30일에 공민증을 발급받았다. 젠킨스의 회고에 따르면 젠킨스는 조평통 사무직원으로 배치되었으나 정작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었다. 이후 대접이 좋아져서 배급량도 늘었고 각자 집에서 살게 되었고 요리사 겸 성욕 해소를 위해 불임여성도 배치되었다. 하지만 이 여성이 6.25 전쟁 때 미군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노골적인 증오를 드러내서 전혀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순지라는 이 북한 여성은 젠킨스를 증오하면서도 젠킨스가 외화상점에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외화벌이에 협조하지 않으면 젠킨스를 당에 신소(고발)하겠다고 위협했고 젠킨스는 그럼 나도 신소할 것이 많다고 으르렁거렸으나 결국 젠킨스가 어느 정도 이순지의 외화벌이에 협조하면서 수익을 나눠갖는 것으로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어 7년을 같이 살게 되었다. 이때 이순지로부터 당 지도원들을 대하는 방법도 배우게 되었는데 앞에서만 예예하고 뒤돌아서면 무시하면 된다는 것이었다.[8] 하지만 앱셔는 북한 요리사와 잘 지낸 모양인데 1978년에 앱셔의 요리사가 앱셔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당황한 북측 당국에서 요리사들을 모조리 데리고 가 버렸다.

한편 미군들은 각자 집을 받으면서 서로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고 앱셔와 페리시, 젠킨스와 드레스녹이 각각 함께 살게 되었다. 젠킨스의 주장에 따르면 드레스녹이 겁이 많아서 웬만한 건 북한 측에 다 일러바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둘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1972년 9월 9일 북측 간부와 식사를 하다가 북측 간부가 젠킨스에게 성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시비를 걸어 댔다고 한다. 이에 젠킨스가 개인 사생활을 왜 간섭하냐고 맞섰고 간부가 드레스녹을 시켜 젠킨스를 밧줄로 묶은 다음에 40대 정도 폭행하게 시켰다고 한다. 드레스녹은 망설이지 않고 젠킨스를 구타했고 이후에도 7년간 젠킨스가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드레스녹을 시켜서 젠킨스를 구타했으며 그러한 일이 30번 정도 된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드레스녹은 그 말에 사실이 아니라고 길길이 날뛰면서 30년 형에 처해지라고 저주했다. 둘이 같이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젠킨스가 은근히 드레스녹의 눈치를 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3년 5월에 압록강대학이라는 사관학교에 영어교수로 배치되었고 덕분에 수입이 상당히 올랐다고 한다. 젠킨스의 주장에 따르면 적국의 고위간부들을, 그것도 반미 감정에 불타서 적대적으로 구는 북한 생도들을 가르치는 것도 너무 싫어서 대충 가르쳤으며 일부러 틀리게 가르쳐서 시험해 보기도 하고 엉터리 발음으로 알아들을 수 없어도 건성으로 Very good! 하면서 넘겨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관학교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팔에 새겨진 U.S.Army라는 문신을 제거하기 위해 마취없이 생살을 칼로 뜯어냈을 때는 정말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마취약이 적어서 총상자 치료에만 썼다고 한다. 제임스 드레스녹은 그 문신을 북한 당국에서 허락을 받아서 떼냈고 마취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사실인지 젠킨스는 드레스녹이 젠킨스가 문신을 지운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 젠킨스가 마취제도 못 받았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진실은 둘 만이 알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북한에서 고분고분하지 않은 젠킨스를 차별대우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나면서 압록강 사관학교는 폐쇄되었고 미국의 소리, 주일미군 방송, NHK 영어방송을 문화어로 번역하는 업무에 동원되었다. 1978년에 다시 평양에서 다른 월북 미군들과 살게 되었으며 북한에서 아랍인 여성들을 아내로 데리고 살라고 제의했는데 이는 레바논에서 납치해 온 여자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납치를 해 왔는지 하필이면 레바논 고위 인사들의 딸들을 납치해 오는 바람에 레바논에서 난리가 나서 어쩔 수 없이 여성들을 돌려보내야 했으나 페리쉬에게 배치된 시함은 이미 임신을 한 상태라서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9]

이후 젠킨스는 새 요리사 고춘미와 잠시 살았으나 고춘미가 수술 후유증으로 정신이 이상해져서 1980년 1월에 북측 당국에 사정하여 고춘미와는 헤어지게 되었다. 이후 민혜경이라는 새 여자가 배치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납북 일본인 여성 소가 히토미(曽我ひとみ)[10]였다. 북측에서는 유일하게 아내가 없는 젠킨스에게 데리고 살라고 소가 히토미를 준 것이었으나 젠킨스는 이를 거절하고 소가에게 영어만 가르치겠다고 했다. 북한 측에서 그에게 소가와 결혼할 것을 종용하였다. 젠킨스는 히토미가 너무 한국어를 잘 해서 정말 일본인이 맞는지 의심하기도 했고 자신보다 한참 어린 20대 처녀와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처사에 황당한 소리를 한다고 화를 냈지만 의지할 것 없던 두 사람은 나이 차이와 전혀 다른 성장배경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게 됐다.[11] 1978년에 납치된 소가 히토미는 극도의 불안증세를 보였는데 한번은 히토미를 위해서 NHK 방송을 틀어주니 히토미가 하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면서 일본 방송을 틀어주면 즉시 처형된다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도원들이 어차피 너희들에겐 서로밖에 없는데 같이 사는 게 어떻냐고 설득하고 젠킨스도 히토미에게 반해서 계속 청혼하게 되었으나 히토미는 일본에 살 때도 서양인을 본 적이 없어서 계속 거절하였다. 결국 젠킨스가 만약 우리가 결혼하지 않으면 언제 북한에서 당신을 다시 어디론가 데려갈지도 모른다고 설득하자 히토미도 결혼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젠킨스가 북측에 허락을 받기 위해 지도원들에게 소가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북한 당국자들은 경악해서 무슨 짓 한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결국 만난 지 40일 만인 1980년 8월 8일에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몇 달 후 히토미가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부부는 서로를 더욱 믿고 의지하게 되었고 금슬도 좋아졌다고 한다.

이후 1980년부터 영화에 출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북한 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에서 '출처를 밝힐 수 없는 미국의 방첩기관[12]'의 의장으로 미국의 침략계획을 담당하는 켈튼 박사로 유명했다. 출연 당시에는 앞대머리 분장을 했으며 드레스녹은 비열한 역할임을 설명하면서 젠킨스에게 딱 어울리는 배역이라고 씹어 대기도 했다. 1981년에 마동희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또 아마도 북한 고위층 관람용 혹은 영어 교재로 쓰기 위한 할리우드와 디즈니 영화 번역도 맡았다.

2.3. 탈북과 처벌, 그 후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부인의 일시적 방일이 허용되었는데 당시 일본 사회는 그동안 도시전설 취급을 받던 납북 일본인들이 정말로 있었단 사실에 분노와 경악으로 들끓고 있었다. 일본 매체는 연일 귀국한 일본인들이 북한화된 모습을 집중하면서 지금까지 일본을 속여 온 북한에 일본인들을 내 줄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고 시민사회도 동조했다. 이에 고이즈미 총리는 일시귀국이라는 합의를 번복하고 이들의 영구귀국을 결정했다.

북한 측은 발칵 뒤집혔고 젠킨스에게 일본 정부가 아내를 납치했다고 비난하라고 시켰다. 금슬이 좋았던 젠킨스는 정말로 고이즈미를 마구 비난했는데 해가 지나도 아내와 재회하지 못하자 술에 취해서 김정일에게 쌍욕을 뱉는 엄청난 짓까지 저질렀다고 한다. 다행히 동석한 북한 간부들이 모두 젠킨스와 친한 사이라서 그 일을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결국 양국의 줄다리기 끝에 미국과 범죄자 인도 협정이 되지 않은 인도네시아에서 부인과 재회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 측은 젠킨스의 배급을 늘려주면서 아내를 다시 데리고 북한에 돌아오라고 그를 구슬렀지만 동행한 두 딸과 함께 그대로 돌아오지 않고 일본으로 갔다.[13] 드레스녹은 북한 당국이 젠킨스가 북한을 떠나는 것을 허용해 줬다고 주장했다. 사실 거짓말은 아니고 2002년 북일 합의를 깨고 영구귀국하게 된 5명의 일본인의 잔류 가족 8명에 대해 일본 측은 강력하게 송환을 요구했는데 이에 김정일이 수락하면서 2004년 5월 고이즈미, 김정일 간에 개최된 2차 북일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는 일본인 가족 5명을 즉석에서 비행기에 태워서 같이 귀국했으며 2개월 후에 북한에서 소가 히토미 가족도 돌려보내기로 합의하면서 인도네시아를 경유해서 송환된 것. 그가 일본행을 결정하자 북한 관영매체는 "인간의 초보적인 리성마저 저버린 비렬한", "정신병자", "추악한 탈주병", "가롯 유다"라는 등 갖은 인신공격을 퍼부어댔다.

이때 북한에서 세뇌가 철저히 됐던 두 딸들은 자신들이 자본주의 일본에 갔다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14] 주일미군 기지에 딸려 있는 상점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다시는 북한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걸 보던 젠킨스의 담당 육군 검사가 북한의 주체사상도 겨우 달러 조금이면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웃었다고 한다. 한편 젠킨스는 일본에 입국하자마자 주일미군의 육군 기지에 수감되었다.

젠킨스의 아내가 일본인이란 점이 일본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에게 선처를 부탁할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동정을 샀다. 부시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많은 장병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탈영병을 관대하게 처벌하는 것에 난색을 표했으나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젠킨스는 30일 외출 금지형을 받았다. 젠킨스는 법적으로 육군 부사관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육군 피복류 일체와 근속 기간 중 받을 수 있는 훈장 등을 재지급받았으며 부대 내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보직도 배당받아서 월급과 수당도 받았다고 한다. 단지 부대 정문 너머로 나가지만 못했는데 선고된 30일 중 모범수로서 5일 감형되어 총 25일간의 영내 감금 겸 근무를 마쳤다. 탈영 전과 및 고령으로 인한 현역 복무 부적합 사유로 육군에서 이병으로 강등 및 군인연금 등 각종 전역 장병 혜택 대상에서 제외되는 불명예 퇴역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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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미육군 기지에서 퇴역 전 그간 밀린 급여 등에 대한 수령 확인서에 서명하는 젠킨스 병장.

2.4. 말년

석방 이후 부인의 고향인 일본 사도 섬에 정착해 아내와 함께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였으며 금슬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나름 유명인사였다 보니 그를 보러 오는 관광객들이 제법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자체에서 관광 진흥에 도움을 준 공로를 인정하여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미국을 방문했다. 탈영해서 월북한 지 40년 만에 처음 미국을 방문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고향 버지니아를 방문하여 90세가 넘은 나이로 살아 있던 어머니와 형제 등 가족들과 재회했다.



미국 방문 당시의 영상.

이후 <고백>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판했다. 위에 언급된 문신을 칼로 떼냈다거나 드레스녹에게 30여차례 두들겨 맞았다거나 하는 내용은 여기서 나왔다. 한국에도 번역본이 출간되어 시중에서 구해 읽어 볼 수 있는데 품절되어 중고로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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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자신의 기념품점 앞에서 찍힌 사진으로, 당시에는 정정했으며 북한에 있을 때보다 살도 찌고 혈색이 좋아졌다.

2017년 12월 11일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부정맥으로 사망했다. 기사 노환이 원인인 것으로 보이며 동료였던 드레스녹은 2015년부터 흡연비만 등이 원인으로 보이는 성인병중풍으로 투병하다가 2016년에 젠킨스보다 1년 일찍 평양에서 사망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 볼 땐 탈영병인지라 cold war defector list[15]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다.

3. 여담

전술하듯이 젠킨스의 회고록 고백은 물푸레 출판사에서 2005년에 출판했다. 북한식 용어를 일본식 한자어로 몇 개 바꾼 것 빼고는 번역의 질은 괜찮은 편이나 일본어 중역이기 때문에 앱셔를 아부셔, 페리쉬를 퍼리슈라고 일본어식으로 번역한 것이 흠. 2006년에 개봉한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는 젠킨스 회고록이 영어로는 번역되지 않았다고 다소 아쉬워하는 멘트가 나왔는데 2008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역하여 <The Reluctant Communist: My Desertion, Court-Martial, and Forty-Year Imprisonment in North Korea>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발음이 깔끔했던 드레스녹과는 달리 젠킨스는 타고난 발음 자체가 좋지 못했던데다 미국 남부 출신이라 영어발음도 느려서 실제로 영어를 가르치는 일도 잘 못했다고 한다.

파일:Picture-of-Anocha-with-Jenkins.jpg

1984년 젠킨스 가족이 원산에서 찍은 휴가 사진 속에서, 1978년 마카오에서 행방불명되었던 태국인 여성 아노차 판조이가 찍혀 있어서 논란이 일었다. 아노차의 오빠인 수캄과 조카인 반종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태국 정부도 아노차의 송환을 요구한다. 하지만 북한 정부는 아노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젠킨스에 따르면 2003년 북한 정부가 북한에 남으면 아노차와 살게 해주겠다며 설득했지만 거부한다.


[1] 그의 계급은 Sergeant로, 대한민국 국군병장에 해당한다.# 후술하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이병으로 강등되었다.[2]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베트남 전쟁에서의 계속되는 실전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의 여론을 씹고 계속해서 군사를 파병한 데다 이에 대한 비난을 피하고자 나중에는 파병 사실을 일부 숨기거나 축소해서 밝히는 병크까지 벌인 탓에 군인들 사이에서 언제든 자신들도 파병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젠킨스가 괜한 걱정을 한 게 아니다. 또 베트남 전선에서의 생존율도 높지 않았으며 설령 생존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극심한 PTSD에 시달릴 가능성도 매우 컸다.[3] 실제로 미국은 주한미군을 베트남으로 파병하려고 했지만 한국은 절대로 반대했고 주한미군 대신 한국군이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미국은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전쟁이 격하되고 국내여론도 나빠지게 되면서 미군은 보내는 것보다 한국군을 파병시키면 미군의 희생도 줄이고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 걸 민주주의 국가 모두가 원하다는 식으로 프로파간다로 쓰기 좋다고 판단하였다.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 파병 비용을 전액 미국이 부담하고 파병 물자를 한국에서 생산한다는 조건으로 이루어졌다.[4] 1m는 대략 3.28 피트이다. 즉 젠킨스는 졸지에 산의 높이를 원래의 1/3으로 대답해버린 것이다.[5] 젠킨스는 상당한 노안으로, 드레스녹은 젠킨스가 월북했다는 소식을 듣자 '저런 나이도 많은 부사관이 왜 월북한 거지?'라고 의아해했으나 젠킨스는 드레스녹보다 고작 1살 많은 24세였다.[6] 위에도 언급된 대로 처음부터 북한에서 살려는 작정으로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 귀순이나 투항 시 아군의 무기를 가저가면 아군의 전력손실이자 적성무기를 온전히 획득하여 연구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삐라 등으로 유혹하곤 했다. 실제로 겨울전쟁 당시 소련군도 핀란드군을 상대로 탱크는 얼마, 전투기는 얼마 따위의 내용을 담은 삐라를 날린 적이 있다.[8] 실제로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자주 겪는 혼란이기도 하다. 하나원 직원들이나 통일부 공무원들이 이거 하면 안 된다고 하면 앞에서 예 하고 뒤돌아서서 바로 무시하는 관행인데 노동신문에 잘 묘사되어 있다.[9] 푸른 눈의 평양 시민에 나왔던 시함은 자신이 납치된 것이 아니고 레바논 정부와 자신의 가족들도 자신이 북한에 있다는 것을 안다고 주장했는데 설령 레바논 여성이 북한에 여행까지 온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북한에서도 엄중한 기밀 사항이었던 월북 미군들과 원나잇해서 임신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북한 정권 입맛에 맞게 임신해서 돌아온 부분만 말한 것일 뿐이다.[10] 납북될 당시 19세의 간호조무사로 어머니인 소가 미요시(曽我ミヨシ)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다가 남성 3명에게 모녀가 납치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시인하고 일본 귀국을 허용할 때 소가의 어머니는 그 명단에 없었다. 소가 히토미 본인도 납치 당시 어머니와 강제로 분리되어 이후로 북한에서 단 한 번도 어머니를 보지 못했고 납북 일본인 가운데에서도 그를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납치해서 북한으로 건너오는 도중 사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다.[11] 북한 측에서 소가와 결혼하라고 하면서 했던 말은 그냥 확 덮쳐 버리라는 얘기였다. 그 때문에 젠킨스가 심하게 화를 냈다.[12] 영화 속의 정식 명칭이다.[13] 냉전 시대에 소련에 납치되었거나 소련망명한 미국인들이 다시 제1세계로 합법적으로 넘어올 때 사용한 고전적인 수법이다. 물론 그 와중에 높으신 분들의 막후합의가 있지만.[14] 젠킨스가 90년대에 중국에서 밀수된 할리우드 영화 비디오 테이프 몇 편을 보여줬지만 학교에서 배운 미국과 다르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15] 미국이 냉전 시기에 전선에서 이탈한 자국민들을 정리한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