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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20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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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
19세기 초반~19세기 중반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20세기 후반 21세기 한계와 비판

1. 개요2. 68혁명3. 해방신학의 대두4. 신자유주의의 대두5. 마약 카르텔의 번창6. 브라질, 군사정권과 산업화, 민주주의7. 멕시코, 멕시코의 기적과 그 종말
7.1.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8. 콜롬비아, 폭력의 시대와 내전9.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와 민주화, 고질적인 경제위기10. 기타 국가
10.1. 과테말라10.2. 쿠바10.3. 칠레10.4. 니카라과10.5. 엘살바도르10.6. 파나마

1. 개요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의 20세기 후반을 다룬다.

2. 68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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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마오쩌둥, 체 게바라, 호치민을 아이콘으로 서구권에서 좌파 운동이 문화적으로 새로운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이 강해지고 종교 근본주의에 대한 냉소, 제3세계 문화에 대한 재해석, 록 음악의 재발견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68혁명은 냉전 체제에 대한 염증을 바탕으로 기존 사회의 권위와 억압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의 히피들을 중심으로 과거 "미개한 히스패닉이나 피는 물건" 정도로 인식되던 마리화나가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으며, 유럽에서도 역시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톱리스 같은 개방적인 성문화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소련이 배후에서 암약하여 해당 국가의 좌파세력을 지원했으나, 사회보수주의 성향이 있던 소련 공산당의 배후 조종은 곧 유명무실해지고 곧 68혁명은 순수한 민중 혁명으로 발전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하던 68운동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다시 재해석되고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은 좌파 성향으로 급격히 기울게 되었다. 이를 전후하여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르헨티나의 마누엘 푸익,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가들이 명성을 떨쳤다.

같은 시기 대한민국에선 이 시점부터 장발족이 생겨났고 미니스커트가 도입되었으며, 일본에선 적군파의 반체제 무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군사정권 시기였기 때문에 별다른 반향이 일어나지 못했고, 일본에서도 요도호 납치 사건이나 산장사건 등으로 무장운동의 급진성과 폭력성 때문에 인기를 잃으면서 몰락하고 만다.

3. 해방신학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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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는 1945년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과 도시화가 엄청난 빈부격차를 초래했다. 저명한 라틴아메리카 가톨릭 신학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기독교의 의무임을 다시 역설한 새로운 기독교 해석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1980년에 암살당한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추기경과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브라질의 레오나르두 보프 신부와 동생 클로도비스 보프 신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신학자들은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실천해 온 자선사업에만 머물지 않고, 고삐 풀린 자본주의와 억압적인 정치적 권위가 결합된 라틴아메리카 정치체제를 공공연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대안으로 최저 생계 수준의 보장을 통한 인간 존엄성 보존과 기독교 윤리에 따른 부의 재분배를 전제로 하는 체제를 요구했다. 정치적으로 좌파인 이 신학자들은 노동 기준의 향상과 산업 규제를 요구했고, 외국 투자자, 주로 미국 투자자들의 권한 축소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형평성 증대를 위한 운동의 대가로 바티칸의 검열을 받았고, 고국에서는 박해를 당했다.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1945 이후 / 서로 의존하는 세계 / 4부 세계 문화

4. 신자유주의의 대두

1970~80년대는 일본이 세계의 주요 경제대국으로 올라서고, 한국, 타이완, 싱가포르 등이 중진국 함정을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잡아타던 시점이었다. 일제 가전제품과 자동차, 오토바이가 우수한 품질과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서구 시장을 휩쓸고 뒤이어 중국이 핑퐁외교, 흑묘백묘론을 통해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세계의 공장으로 거듭나는 가운데,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경쟁력 있는 제조업 육성에 실패했다. 여기에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80년대 원자재 가격 정체의 영향으로 라틴아메리카 각국은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다. 이에 각국 정부는 경제난 타개책을 강구하였고 일부 국가에서 선택한 것이 자유시장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첫 타자는 칠레였다.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피노체트는 집권 2년차인 1975년부터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다. 3년 뒤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도 비슷한 정책을 실시했다. 1982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중남미 각국으로 투자된 외국인 자금이 속속 이탈하기 시작하면서 경제위기가 찾아오자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는 속속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외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차관을 요청하자 미국과 국제금융기구(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 등)들은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조언해서 긴축재정, 공기업 민영화,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가 강도 높게 추진되었다.

이 정책은 칠레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나[1] 아르헨티나에서는 실패하게 되는데, 사실 아르헨티나의 진짜 문제는 소위 신자유주의 정책이 아니라 개혁 진행 중에 정말 운없게도 1979년 오일쇼크를 겪고, 국제적 약속을 어겨서 아르헨티나의 대외신인도를 하락시키고, 여기에 포클랜드 전쟁까지 일으킨데 있다. 대외정책 자체가 자국을 서방진영의 파리아로 전락시키는 것이었는데 이 상황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쓰든말든 경제가 망하는게 당연한 일이다.

5. 마약 카르텔의 번창

대항해시대 페루 부왕령포토시 은광은 세계에서 가장 은 채굴량이 많던 광산으로서 포토시에서 채굴된 은은 유럽 전체의 가격 혁명을 일으켰다. 다른 한편으로 누에바에스파냐 사카테카스에서 채굴된 은은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수출되어 명나라와 청나라에 은본위제도가 확립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볼리비아인들 입장에서는 약오르게도 라틴아메리카 각국이 독립한 시점에서 은광 상당수가 고갈되었으나... 대신 포토시 은광산에서 일하던 원주민 광부들이 애용하던 코카나무 이파리가 새로운 자원으로 떠올랐다. 코카나무 이파리를 가공해서 만든 게 바로 비싼 마약 코카인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콜롬비아는 공산 반군 FARC와의 내전 상태에 돌입하면서 정부의 지방장악력이 느슨해졌고, 이 틈을 타서 범죄조직들이 코카인을 재배해서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마약 카르텔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통하는 파블로 에스코바르메데인 카르텔이었다. 에스코바르는 기존의 콜롬비아 반군 M-19와 세력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콜롬비아 각지에 흩어져있던 마약 카르텔들을 통합하여 메데인을 중심으로 거대한 군벌 집단을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1980년대 미국 빈민가에 크랙 코카인의 보급되면서 코카인 수요가 늘어나면서 콜롬비아와 볼리비아, 페루의 마약 카르텔들은 돈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어느새 콜롬비아 최고 부자가 된 에스코바르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의 기사를 작성하는 언론인들을 마구 보복살해한 것은 물론 아비앙카 항공 203편 폭파 사건을 일으키고도 별 다른 처벌을 받지 않는 등 콜롬비아의 제왕으로 군림했으나, 결국 너무 눈에 띄게 나댄 나머지 1993년 미합중국 법무부 마약단속국에게 사살당했다.

공교롭게도 콜롬비아와 미국 코카인 밀매 루트의 중간 교역로에 해당하던 멕시코는 1980년대 크랙의 등장으로 코카인 수요가 늘어날때 즈음 모라토리엄에 빠지면서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상당수의 멕시코인들이 마약 카르텔에 가담하였는데, 중진국 함정을 극복하지 못한 멕시코는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빈부격차 해결이 실패하고 결과적으로 카르텔을 통제하는데 실패하였다. 미국과 인접한 멕시코 북부 국경지대는 카르텔들의 자치 지역으로 전락하였고 멕시코의 유명 관광지는 카르텔들이 호텔을 관리하면서 잡범들로부터 미국인 관광객들의 안전을 책임지게 되었으며,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는 세계에서 인구 수 대비 경찰 수가 가장 많은 도시로 어렵사리 치안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6. 브라질, 군사정권과 산업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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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쿠데타로 바르가스 정부가 무너져 새로운 민주정부가 수립되었다. 민주정부가 쿠데타로 무너지는 1964년까지의 짧은 기간을 브라질 제4공화국이라고 한다. 민주선거로 선출된 제4공화국 시대의 첫 번째 대통령 에우리쿠 가스파 두트라(1946~1951)는 강력한 친미, 반소, 반공주의 정책을 펼치고 노조를 강경하게 탄압했다. 또한 페론이 집권하여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을 펼치던 아르헨티나와 달리 무역개방 정책을 펼쳤다. 브라질은 1961년까지 이어지는 경제호황을 맞아 두트라 재임기에만 연평균 7.6% 성장하였고 두트라 재임기 이후로도 간헐적인 정체기를 제외하면 고도성장했다. 1950년 대선에서 승리, 대통령으로 권토중래한 바르가스는 수입대체산업화 및 친노동자 정책을 펼쳤으나 보수파와 군부의 반발을 사 1954년에 자살했다. 주셀리누 쿠비체크(1956~1961) 대통령 임기인 1960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라질리아로 천도했다.[2]

1962년부터 수입대체산업화의 단점으로 인한 침체가 나타났다. 1960년 이미 30.5%에 달했던 인플레이션은 1963년 79.9%, 1964년 92.1%까지 증가했고 경제성장률은 1961년 8.6%에서 1963년 0.6%로 급락했다. 가파른 물가 상승으로 인한 생활비 증가와 실질임금 하락으로 생활고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대대적인 반정부 투쟁을 벌여 1958~1960년 180건에 그쳤던 파업 건수가 1961~1963년 430건으로 증가했다.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기업가들, 군부의 보수파 장교들도 똑같이 저마다 브라질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거나 직접 행동에 나섰고 당시 주앙 굴라르(1961~1964) 정부는 이들 이익단체들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도, 사회혼란을 막을수도 없었다. 결국 1964년 육군참모총장 카스텔루 브랑쿠가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나 19년만에 민주정부가 무너지고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브랑쿠가 수립한 군사정권(Ditadura militar), 또는 제5공화국이라고 불리는 브라질 군사정권은 1985년까지 이어졌다. 다만 브라질 군사정권은 좌파에 대한 물리적 절멸에 나섰던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과 달리 피는 덜 뿌렸다.[3]

브랑쿠 정권(1964~1967)은 두트라 정권 시절의 친미, 반소, 반공 노선을 부활시키고 FDI를 통한 적극적인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브랑쿠는 FDI 유입을 촉진하고 복잡한 외환 시스템을 간소화하여 경상수지 불균형을 해소하려고 했다. 또한 수출진흥 정책을 펼치고, 당시 통화인 크루제이루를 시기별로 절하하는 메커니즘을 도입했다. 1964년부터 이루어진 개혁 결과 1968년부터 197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11.1%에 달하는 이른바 "브라질의 기적"을 겪었다. 특히 제조업 부문의 성장률은 같은 시기 연평균 13.1%에 달했고 수출도 원자재와 중간재, 소비재 할것없이 증가했다. 비록 수입이 더 큰 폭으로 증가하여 무역수지 적자 증가를 유발했지만 무역수지 적자를 메꿀 정도로 막대한 FDI가 유입되되어 경상수지는 흑자였다. 제조업 부문이 양적, 질적으로 급속히 성장하면서 무역 양상에도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수출에서 공산품(가공품, 반가공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다. 제조업 부문의 수출액은 1963년 14억 달러에서 1973년 62억 달러로 증가했고,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3년 5%에서 1974년 29%로 증가했다. 수입에서는 중간재와 자본재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 재화들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0~1962년 각각 31.0%와 29.0%에서 1972년 42.7%와 42.2%로 증가했다.

1973년 이후 경제성장률이 약간 꺾이긴 했지만 이후 경제성장도 분명히 호황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경제호황이 끝나는 1980년까지 합산한 1968~1980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7%에 달했다. 당시 경제호황의 과실은 상류층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과 서민들까지 혜택을 보는 것이었다. 물론 고도경제성장이 으레 그렇듯 소득에서 하위 80%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기는 했으나[4] 이것은 상위 20%의 소득이 더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지, 절대적 기준으로 보면 하위 80%의 소득도 분명히 증가일로에 있었다. 당시 경제호황을 나타내는 일화로 원래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텔레비전과 자동차가 중산층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군사정권도 "브라질, 사랑하거나 떠나거나"라는 식의 국뽕 캠페인을 펼쳤고 브라질이 2000년까지 현재의 경제발전을 지속한다면 소득이 일본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고 홍보하기도 했는데 당시 브라질의 노인들이 2000년까지 살지 못해서 안타까워했다는 소리가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중남미 전역을 휩쓴 외채위기는 군사정권이라고 피할 수 없었다. 1973년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큰 위기를 겪은 후[5] 수입대체산업화를 재개했다. 수입대체산업화는 명목상 성장을 가져왔으나 대신 경상수지 적자와 외채의 급증도 가져왔다. 결정적으로 1978년 제2차 오일쇼크와 1980년 외채위기로 브라질의 경제성장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80년대 들어 마이너스로 전환되었고, 1984년 인플레이션은 223.8%까지 급증했으며, 대외채무도 910억 달러까지 증가했다. 1982년 브라질은 결국 디폴트를 선언했고 그 대가로 한동안 국제 금융시장에서 추방당했다. 1980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는 1993년까지 이어졌고 그래서 1980년대를 가리켜 브라질의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5년 1월 브라질 민주화의 영웅 탄크레두 네베스가 민간 출신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다만 직선이 아니라 간선이었다) 20년간의 군정은 끝났다.[6] 그러나 네베스는 당선된지 세달만에 지병이 악화되어 급사했다. 후임자 조제 사르네이(1985~1990)는 민주화에 큰 족적을 남겼으나 통화개혁에도 불구 경제위기를 해결하는데 실패했다. 가장 큰 문제는 1980년대부터 경제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지나치게 방만하게 운영한 것이었다. 1988년 신헌법은 정부의 경제개입을 지나치게 세세하게 규정하고 연금과 공공부문을 확장하며 이자율 상한을 지정하여 향후 초인플레이션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주요 인프라와 산업에 대한 정부의 독점을 재확인하고 외국 기업의 진출을 원천 차단하여 국내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켰고 국내의 독과점 구조를 더욱 강화했다. 결과적으로 통화개혁은 언발의 오줌누기였고 경제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1989년 인플레이션은 1,782%를 기록하여 모든 경제개혁이 무의미했다는 것만 다시금 재확인했다.

사르네이의 후임 페르난두 콜로르(1990~1992)는 위기 해결에 실패한 것으로도 모자라 부패 스캔들로 아예 탄핵을 당했다. 콜로르의 후임 이타마르 프랑쿠(1992~1994) 재임기에 재무장관 페르난두 카르도주(후일 1995~2002년 대통령으로 재임)가 주도한 통화개혁인 헤알 플랜(Plano Real)을[7] 기점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성장하는 등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개판에서 정상화되기까지 과정을 잘 설명한 글. 블로그의 다른 글들도 읽을 가치가 있다.

7. 멕시코, 멕시코의 기적과 그 종말

멕시코 근현대사에서 1940년은 전환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집권 정당인 제도혁명당이 기존의 혁명성을 탈각하고 방향을 선회한 해, 즉 '보수화'되기 시작한 해이기 때문이다. 이제 제도혁명당은 사회혁명이 아니라 조국근대화의 기수를 자임하기 시작했다.

1940년 당선된 대통령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는 개혁을 대부분 종식하고 보수주의 세력과 화해를 추구했으며, 1941년 제조업법(Ley de Industrias de Transformación)을 통과하여 이른바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때마침 벌어진 2차대전을 계기로 멕시코의 공업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연평균 10% 성장했고 미국의 전쟁산업에도 멕시코산 원자재를 공급했다. 장장 30~40년에 걸친 경제기적의 서막이었다. 이른바 멕시코의 기적(Milagro mexicano)이라 불리는 고도 경제성장은 1970년까지(또는 1980년대 초까지로 잡기도 한다) 유지되었다.[8] 1940년부터 1970년까지 멕시코의 경제 규모는 6배 증가했고 경제성장률은 6~7%에 달했다.[9][10]

1946년 당선된 미겔 알레만 발데스 대통령은 적극적인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펼쳤다. 정부는 값비싼 수입품을 줄이고 높은 보호관세를 유지하여 국내 공업을 활성화하려고 했다. 또한 500여개에 이르는 공기업을 통해 천연자원을 관리하고 주요 사업을 집행하여 경제 전반의 운영을 좌우하는 등 경제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였다. 알레만 대통령이 구상한 전반적인 경제정책 기조는 1970년까지 유지되었다. 알레만 대통령은 카마초 대통령이 호소한 '국민 통합'과 '계급 화해' 노선을 이어받아 정치적인 안정을 유지했고 제도적 틀에서 벗어난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공업 생산고가 1940년부터 1970년까지 10배로 늘었고, 경제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1950년 22%에서 1970년 29%로 늘었다. 1970년대 들어 기초적인 식량작물과 철강, 대부분의 소비재는 자급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성장 이면에는 저임금과 빈부격차 심화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또한 멕시코의 공업화는 정부가 설정한 높은 수입관세와 각종 수입장벽을 토한 국내 시장 독점을 통해 이루어졌고 때문에 외형적인 성장과는 별개로 외국 기업들과 경쟁력을 잃어갔다.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이 이어지면서 정치적 보수화와 권위주의가 가시화되고 부패가 심각해지자 좌파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반정부 시위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정부와 좌파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멕시코의 좌파 무장조직들은 1968년을 기점으로 게릴라 운동을 전개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1980년대 초에 소멸했고 남은 세력들은 제도적 틀 내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수입대체산업화는 1970년대에 한계를 나타냈다. 농장과 기업체는 사실상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여 운영되었고 국제적 경쟁력을 상실했다. 1970년대 전반기 들어서 경상수지 적자가 심화되었고 1976년 경제위기가 발생하여 연평균 3%를 유지하던 인플레이션이 18%에 달했다. 그러나 1977년 멕시코 남부 일대에 대형 유전이 발견되면서 경제파탄이 몇년간 유예되었고 오히려 1981년까지 고속성장이 유지되었다. 멕시코는 세계 4위의 석유 수출국으로 올라섰고 여기에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경제호황이 발생했다. 석유 판매 자금으로 멕시코의 신용도가 개선되고 국제 금융시장에 산유국의 자금이 수혈되면서 이자율이 낮아져 석유개발과 인프라 투자를 위해 막대한 외채를 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고 이란과 이라크가 되는대로 석유를 팔아치우면서 유가가 급락하였다.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는데 고유가 약빨마저 떨어진 멕시코는 1982년 디폴트를 선언하고 몇년간 민영화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정책과 재정균형을 시행하였다. 멕시코는 1980년대 말까지 경제침체를 겪었지만 아예 1973년 이전으로 경제가 후퇴해버린 베네수엘라보다는 상황이 좋았다. 어느정도 체질 개선에 성공한 멕시코는 이후 NAFTA 가입과 21세기 초 고유가와 같은 호재가 겹치며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지역 내에서는 성장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축인데, 이것은 멕시코가 못해서가 아니라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극빈국들이 뒤늦게 경제성장을 하다보니 중진국은 되었던 멕시코의 성장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려보이기 때문이다.

7.1.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사파티스타는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장 언론 집단으로, 반정부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엄연한 테러단체이다. 1994년 발흥한 이 집단의 특이점은 지금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무장 봉기와는 여러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친미 정권(칠레의 피노체트 등)과 반미 정권(쿠바의 카스트로 등)으로 크게 둘로 나뉘어 있던 라틴아메리카 정치사에서 벗어나 있던 단체라는 것이다. 이들은 친미도 반미도 아닌 반세계화와 반신자유주의를 들고 나왔으며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낙후된 사람들을 위한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아나키즘을 표방했다.

둘째로, 이들은 평화혁명과 민주주의 선거 방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 페루의 아주 유명한 농민게릴라조직인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빛나는 길)라는 무장집단은 폭력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복 폭력을 자행하면서 원주민 농민들로부터 고립되어 쇠퇴하고 만다. 마약 게릴라, 납치 게릴라라고 불리는 콜롬비아혁명군(FARC)은 지도부가 사실상 궤멸상태로 치달았다. 민중은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며 무장쿠데타를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파티스타는 자신의 입장에 맞는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평화가두행진을 진행하고 인터넷과 PC통신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퍼트려 나갔다.

셋째로 이들은 정권을 노리지 않았다. 애초에 이들은 무장 봉기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1994년 1월 1일 봉기한 것도 이목끌기식 쇼일 뿐, 바로 정글과 산악지대로 후퇴한 후 눈에 띄는 게릴라 활동이라곤 하지도 않았다. 멕시코시티로 진군하겠다고 으름장을 논 1999년의 멕시코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소규모 원주민 자결주의를 원하며 2007년에 드디어 무장을 포기하고 민간단체로 회귀한다.

8. 콜롬비아, 폭력의 시대와 내전

1948년 자유당의 유망 대권주자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의 암살사건은 라 비올렌시아(La Violencia)라고 불리는 10년간의 내전을 초래했다. 이 내전으로 20만~30만에 달하는 콜롬비아인이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의 정도가 그나마 줄어든 것은 라 비올렌시아 도중 1953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로하스 정권이었다. 로하스 정권은 1957년 자유당-보수당 양당의 지원을 받은 또다른 쿠데타로 붕괴되었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당해 7월 보수당의 전 대통령 라우레아노 고메스와 자유당의 전 대통령 알베르토 예라스는 향후 16년간 4년마다 교대 집권 및 선출직의 동등 분배를 골자로 한 "국민전선"(Frente Nacional) 정부를 선포했다.

그러나 국민전선 체제는 근본적으로 이웃 베네수엘라의 푼토피호 체제보다 더 경직된 권력 분점[11]이었고 자유당 내 강경 좌파와 콜롬비아 공산당과 같은 체제 반대파를 정상적 정치 시스템 바깥으로 추방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 체제 반대파들은 1960년대 이후 게릴라 조직들(FARC, ELN, EPL, M-19 등)을 창설하여 196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콜롬비아 내전을 일으켰다.[12] 60년이 넘는 내전으로 지금까지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80만 명이 사망했고 500만 명이 넘는 실향민이 발생했다. 콜롬비아 진실위원회(Comisión de la Verdad)가 2022년 6월 28일 제출한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콜롬비아 분쟁(1985~2019)으로 발생한 살인 피해자는 45만 명이 넘었고 실종자는 12만 명이 넘었다. 피해의 45%는 민병대, 12%는 정부군과 경찰에 의해 발생했으며 27%는 게릴라에 의해 발생했다.(16%는 가해자 미상) # 전투와 학살, 납치, 노동력의 피난으로 인한 생산성 하락, 인프라 파괴,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도 극심했다.

국민전선 이후 콜롬비아 정부들은 성향을 불문하고 내전을 종식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내전 중에 발생한 각종 인권유린을 비롯한 과거사 문제와 새로이 생겨난 마약 카르텔 문제, 반정부 게릴라와 친정부 민병대의 변질, 사회로 복귀한 전 게릴라의 처우 문제 등으로 인해 아직도 완전 종식은 요원한 상황이다. 1984년부터 시작된 평화협상으로 사회에 복귀한 FARC만 하더라도 당원 수천명이 친정부 민병대에 학살당하자 1987년 이후 살기 위해 다시 게릴라 투쟁을 벌였고, 2016년이 되어서야 정부와 협상 끝에 무장해제를 위한 세부계획을 발표하고 2017년에 무장을 해제했다. M-19는 1990년 무장해제하고 사회에 복귀했다. 그러나 FARC 내 강경파와 ELN, EPL은 아직까지도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게릴라 투쟁을 벌이고 있다.

내전에도 불구하고 콜롬비아의 경제는 1980년대의 침체기를 제외하면 계속 성장했다. 커피산업의 큰손인 브라질이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국제 커피 가격이 크게 상승했고 다른 주요 생산자인 콜롬비아의 커피산업이 그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콜롬비아 경제는 최소한 1980년대 말까지 라틴아메리카 역내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정부는 재정수지 균형을 유지했으며 공공부채를 안정적 수준에서 관리했다. 볼커 쿠데타[13] 여파로 1980년대 초 라틴아메리카에 투자된 국제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각국이 경제위기에 처했을 때, 콜롬비아는 채무재조정을 하거나 디폴트를 하지 않은 유일한 주요 라틴아메리카 국가였다.[14] 콜롬비아도 1980년대에 상당한 경제침체를 겪었을지언정 그 충격은 경제성장률을 약간 깎아먹는 선에서 그쳐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보다 양호했다.[15] 정부는 1980년대 후반 자국 페소를 평가절하하고 수출 인센티브를 지급하여 수출을 장려했으며 1990년대 초에는 대외무역 자유화를 시작했다. 이후 콜롬비아의 경제성장은 아시아와 러시아 금융위기의 악영향이 미친 1998년과 코로나가 영향을 미친 2020년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9.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와 민주화, 고질적인 경제위기

"(아르헨티나) 경제는 17세기 환자와 비슷하다. 열병에 걸려 창백한 이 불쌍한 환자는 라틴어를 중얼거리는 의사들로 둘러싸여 있다. 의사들은 환자의 얼굴색을 살피고 체온을 재며 피를 뽑기도 한다. 처음에는 환자의 고통이 완화되는듯 하다가 다시 동일한 징후가 재발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비통스럽게도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뉴욕대 사회학과 후안 에우헤니오 코라디(Juan E. Corradi) 교수의 평가. "민선정부하의 경제정책: 알폰신 정부의 아우스트랄 계획에서 메넴정부의 경제개혁에 이르기까지(이성형, 1992)"에서 발췌

후안 페론(1946~1955, 1973~1974)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운명을 결정지은 인물이다. 그는 임금을 인상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증진하려고 했고 강력한 외국 기업 국유화, 수입 대체 산업화 정책을 펼쳤다. 페론이 물러난 후 집권한 군부 독재자들과 민간 정치인들도 페론의 경제노선을 수정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제지표 상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분명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근본적으로 1차산업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 탈피하는데 실패했다.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직전인 1975년에도 아르헨티나의 최대 수출품은 옥수수, 밀가루, 쇠고기와 같은 농산물과 축산물이 수출의 3/4에 달했다.

더욱이 아르헨티나는 농업 외에 경쟁력이 있는 산업을 창출하는데 실패했다. 제조업 부문의 국영 기업들은 정부가 설정해준 높은 수입관세와 고정가격, 막대한 보조금 정책에 의지한 채 돈만 퍼먹는 하마가 되었고 국제적 경쟁력이라고는 전무한 상태였다. 페론의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경제가 버티면서 페론의 경제정책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일하게 경쟁력이 있는 부문인 농업과 축산업이 워낙 탄탄했기 때문이다. 농업과 축산업에서 올린 이익이 공업화 정책으로 약탈당한 결과 농축산 기술의 구식화로 농업과 축산업의 경쟁력이 서서히 뒤처졌고[16], 여기에 수입 대체 공업화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자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몰락은 가시화되었다. 페론은 죽기 직전 대규모 확대재정으로 마지막 발악을 했고 이 정책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라는 원자폭탄으로 이어졌다. 후안 페론이 죽고 집권한 이사벨 페론(1974~1976)은 1975년 6월 버티다 못해 고정환율과 공공요금, 유류 가격 인상을 발표했다.[17] 이사벨 페론이 썅년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후안 페론이 잘 묻어뒀던 지뢰가 그제서야 폭발했을 뿐이다. 이후 하이퍼 인플레이션과[18] 실질임금 급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아르헨티나는 지옥을 맛보게 된다.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로 군부가 집권할 때,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다. 그리고 군사정권은 1983년까지 집권하면서 이미 초토화된 경제에 원자폭탄을 한번 더 날렸다. 군사정권은 헌법의 주요 조항들을 정지하고 페론주의 좌파와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노조 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사냥했다. 이것을 가리켜 더러운 전쟁(1976~1983)이라고 하며 연구자들은 최소 9천명에서 최소 3만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낸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거나[19]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는 등 무모하기 짝이 없는 사업들을 대거 추진했는데 둘 다 극심한 경제적 댓가를 초래한 것은 물론이고[20] 특히 포클랜드 전쟁은 아예 군사정권이 붕괴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좌파를 조지는 것 외에도 경제 살리기 또한 초미의 관심사였다. 군사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경제를 재건하려 했고, 아르헨티나 최대 철강사 아신다르(Acindar)의 CEO인 호세 마르티네스 데오스(1963, 1976~1981)를 경제장관으로 기용했다. 그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중박은 쳤다는 평이다. 그는 데이비드 록펠러와 가진 친분을 십분 활용해 체이스 맨하탄 은행[21]과 IMF로부터 10억 달러를 융자했다. 또한 가격통제와 환율통제를 철폐하고 수출입규제 완화를 비롯한 자유무역 정책을 펼쳤는데 임기 중 외채가 4배로 급증하고 빈부격차가 늘긴 했지만 암시장과 품귀현상을 없애고 국제무역에서 흑자를 달성하는 성공했다.##

그러나 데오스는 1978년 말 관리변동환율제인 타블리타(Tablita)를 도입하는 큰 실수를 하였다. 타블리타는 엷은 판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인데 고정환율제 하에서 평가절하 또는 절상의 필요가 있을 경우 한번에 10%나 20%씩 변경하는게 아니라 매월 0.2%씩 1년에 2.4% 절하 또는 절상하는 식으로 연속적이며 점진적으로 변경하는 제도였다. 데오스는 초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동료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타블리타를 도입했지만 안하느니만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타블리타는 한동안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정상적인 환율보다 절상하는 효과를 불러왔는데, 고평가된 페소로 수입품의 가격이 하락하여 수입품의 가격경쟁력이 향상되고 반대로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이 약화되니, 이미 실질임금 하락과 같은 요인으로 수요 부족을 겪던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 및 국제무역 적자 증가를 일으켰다.# 결국 기업들의 연쇄 파산이 이어졌는데 중소기업이 특히 극심했으며 생산의 하락과 실업률 증가로 이어졌다. 덤으로 1979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된 폴 볼커가 초고금리 정책을 펼쳐 아르헨티나에 투자된 외국 자금이 회수되었고 채무 부담은 시간이 갈수록 증가했다.

타블리타에 집착하던 데오스는 퇴임 직전인 1981년 2월에 가서야 타블리타를 포기하고 페소를 평가절하했다. 그의 후임인 로렌소 시고(1981)와 시고의 후임 로베르토 알레만(1981~1982)은 각각 9달과 6달밖에 되지 않는 임기 내내 데오스가 펼친 정책의 후폭풍을 그대로 당해야만 했다. 결정적으로 1982년 무모한 포클랜드 전쟁에서 그야말로 참패를 당한 군사정권이 같은해 말 디폴트를 선언하고 1983년 민정이양으로 막을 내리면서, 군사정권에서 봉직한 경제관료들도 도매금으로 묶여서 허구헌날 까이는 신세가 되었고 자신의 실수를 시정할 기회마저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더 큰 문제는 단순히 외채 급증이 아니라 군사정권의 자폭으로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진짜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는 민정이양 후 구성된 민선정부들도 경제분야는 딱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상대적으로 덜 까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급진시민연합 라울 알폰신(1983~1989)의 민선정부는 군사정권으로부터 해결하기 힘든 경제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데오스가 대충 땜빵해놓은 인플레이션 문제는 임기 말에 폭발하여 1980년 87.6%였던 것이 1983년 433.7%, 1984년 688.0%로 부활했다. 재정적자도 1977년 5.0%에서 1982년 18.9%까지 증가했다. 외채는 1976년 97억 달러에서 1983년 451억 달러로 급증하여 거의 통제불능 수준이었다. 알폰신은 경제문제 외에 군사정권의 학정이 빚은 과거사 청산도 해결해야 했다. 알폰신은 대통령에 취임한지 3일 만에 군부가 제정해놓은 특별사면법에 대한 법안을 내놓아 비델라, 비올라, 갈티에리, 오스카르 생장, 비그노네 등 인권유린을 저지른 군부 인사들을 체포하여 법정에 세워 단죄했다.

알폰신은 군사정권의 경제개혁 기조를 어느정도 유지했지만 외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무역과 환율정책을 일부 수정했다. 우선 무역적자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군사정권 이전의 고(高)관세로 복귀하고 수입을 통제했다. 전통적 수출품에는 원천징수를 하였고 수출 제조업체에는 보조금을 주었다. 다음으로 페소화를 대폭 절하하고 1985년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아우스트랄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한번 진정되는듯 하던 초인플레이션은 아우스트랄 도입 3년만에 다시 부활하여 1989년 3,000%를 넘겼다. IMF와 세계은행을 위시한 국제 금융기구들은 아르헨티나 정부에 급전을 융자하고 채무재조정을 해주는 대신 강력한 구조개혁을 촉구했다. 수차례 협상이 이루어졌지만 개혁의 후폭풍이 두려웠던 아르헨티나 정부는 개혁을 주저했고 금융기구들은 더 이상의 대출을 거부했다. 수차례에 걸친 안정화 정책은 아무 소용도 없었고 가격통제는 오히려 품귀현상을 유발했다. 소득수준은 1980년에 비해 오히려 후퇴했고 경제성장률은 -7.2%를 찍었다. 외채는 증가율만 느려졌을 뿐 여전히 증가하고 있었다. 로사리오에서 반정부 봉기가 일어나 대규모 인명피해까지 빚어지자 알폰신 정부는 같은해 12월 10일까지였던 법정 임기조차 채우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갔다.

7월 8일 알폰신의 뒤를 이어 카를로스 메넴이 집권했다. 메넴은 선거운동에서 페론주의적 레토릭을 반복했지만 막상 취임 후에는 신자유주의 충격요법을 실행하였다. 이전 정부에서도 점진적인 개혁이 있긴 했지만 바로 그 점진성이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했기 때문에, 메넴은 차라리 과감한 개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마침 이전 정부의 무능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저항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한층 과감한 개혁이 가능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메넴은 알폰신 정부 말기 16%에 달했던 재정적자를 축소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부터 국영기업이 계속 파산하자 이참에 일부 금융기관을 제외한 모든 국유자산에 대한 전면적인 민영화에 나섰다. 민영화 정책으로 각종 재화와 서비스가 향상되고 농장, 공장, 항구가 현대화되었으며, 민영화된 기업과 인프라에 외국 자본이 대거 유입되면서 투자가 급증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수반하는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해고되어 실업률이 급증했다. 1990년에는 알폰신 정부 말기에 강화된 보호무역 기조에서 다시 자유무역으로 정책을 전환하여 수입관세를 인하했다.

1992년 1월 1일에는 경제장관 도밍고 카바요(Domingo Cavallo)의 주도 하에 이른바 카바요 계획(Plan Cavallo)이라고 불리는 화폐개혁을 실시, 구권과 신권의 비율을 10,000:1로 하여 교환하고 달러화에 가치를 1:1로 고정하며 무제한 태환을 허용하는 정책으로 초인플레이션을 순식간에 진정시켰다. 카바요 계획이 성공한 비결은 IMF와 협상하여 필요한 외환을 확보하고, 민영화를 철저히 이행하여 획득한 자금으로 IMF로부터 빌린 외채를 상환하고 금융기관의 신뢰를 사며, 무엇보다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페소화를 발행하는 것을 제한한 것이었다.[22] 이후 아르헨티나는 1995년 멕시코발 위기로 한차례 휘청인 것을 제외하고는 실로 오랜만에 상당히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환율고정은 반대로 말하면 환율의 변화를 봉쇄하여 환율의 신축적 운용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1997년 최대 무역대상국 중 하나인 브라질(1996년 아르헨티나 무역 총액의 24%)의 헤알화가 폭락하자 아르헨티나 경제도 바로 직격탄을 맞았다. 헤알화 폭락으로 페소 대비 헤알의 가치가 낮아지면서 브라질 상품의 가격 경쟁력이 상승한 반면 아르헨티나 상품의 경쟁력은 하락했으며 브라질의 경제위기로 인한 아르헨티나 상품 수요가 감소해 무역수지가 추가로 악화되었다. 주력 상품인 곡물도 국제가 하락이 누적되면서 부담이 가중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다른 이머징 마켓인 러시아마저 1998년 금융위기에 빠져들자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이머징 마켓 전체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안심리가 확산되었다. 한때 3선까지 노리던 메넴은 최대 치적인 경제가 병신이 되자 1999년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1999년 대선에서 승리한 급진시민연합 후보 페르난도 데라루아(Fernando de la Rúa) 대통령은 IMF와 협상하여 2000년 3월 강력한 긴축 정책을 펼치는 대신 3년 만기로 72억 달러를 빌려왔다. 2000년 말에는 대규모 차관 패키지(loan package)의 형태를 띤 다자원조로 추가로 400억 달러를 받기로 했는데 개혁의 진행도에 따라 지급되는 조건부 차관이었다. 강력한 긴축정책과 국제 거시경제 환경의 악화, 정치적 불안정성은 정부의 시장접근(market access) 전면상실 및 2001년 2분기에 가시화된 자본도피를 초래했다. 긴축정책이 이어지는 동안 국민과 기업은 지출과 투자를 중단했고 생산 급감으로 이어졌다. 경제위기 해결에 실패한 데라루아는 2001년 말 또다시 디폴트를 선언하고 성난 시민들을 피해 헬기로 탈출했다(...) 급진시민연합은 결국 2003년 페론주의자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주었다. 1998년 3분기부터 시작된 아르헨티나 대침체는 2002년 2분기까지 이어졌고 같은 기간 GDP는 28% 감소했다. 2002년 2월 페소화는 달러화 고정에서 변동환율제로 전환했고 빈번한 평가절하에 따라 그해 하반기 상당히 저평가된 채로 안정화됐다.

아르헨티나가 겪는 경제위기는 단순히 경제정책이 페론주의냐 신자유주의냐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정책 기조가 무엇이든간에 그것이 오랫동안 유지되면 일단 해당 경제정책이 장기간 유지될 것이라는 신뢰감이 형성되며, 기업가와 투자자들은 좋든싫든 경제정책을 토대로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짜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의 경제정책 기조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변동하는 이른바 '스톱-고 사이클(stop-go cycle)'에 갇혀있다. 즉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너무 자주 바뀌어서 기업가와 투자자들의 정부신뢰가 땅에 떨어졌으며 이 상황에서 기업가와 투자자들은 장기적인 안목에 바탕을 둔 생산적 활동보단 비생산적인 활동을 해서라도 단기적인 지대(rent)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단순히 페론주의 경제정책만 문제가 아니라 경제정책 기조가 너무 자주 바뀌고 있는것도 큰 문제이다.
"아르헨티나 사적부문에 종사하는 기업인이나 경영진의 전형적인 하루살이는 아침 일찍 라디오 뉴스를 두 시간 듣고 두어 가지 신문을 보충적으로 읽으면서 시작된다. 아침의 사무실 근무시간은 관료들을 만나는데 바쳐지고, 점심 시간은 의례 고급 공무원들이나 '경쟁자들'과 식사하는데 쓰여진다. 그리고 나서 사무실로 돌아와 라디오 뉴스에서 다시 귀기울인다. 전형적인 아르헨티나 기업인들은 너무 바빠서 일을 할 수가 없다."
국립경제아카데미(ANCE) 소속 경제학자 후안 카를로스 데파블로(Juan Carlos de Pablo)의 평가. "민선정부하의 경제정책: 알폰신 정부의 아우스트랄 계획에서 메넴정부의 경제개혁에 이르기까지(이성형, 1992)"에서 발췌

10. 기타 국가

10.1. 과테말라

1944년 6월, 과테말라를 철권통치하던 호르헤 우비코는 6월 총파업으로 군부에 권력을 이양했다. 같은 해 알다나 산도발(Aldana Sandoval), 프란시스코 아라나(Francisco Javier Arana), 하코보 아르벤스라는 젊은 장교에 의해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의 중심인 페데리코 폰세 바이데스(Federico Ponce Vaides)가 사임하는데 이를 과테말라 혁명이라고 부른다. 쿠데타 세력은 공정한 대선을 치루어 당선된 후안 호세 아레발로(Juan José Arévalo)의 민정에 권력을 이양했다. 그는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개혁을 진행했다. 아레발로는 다수의 쿠데타 시도를 모두 진압했고 1950년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아르벤스에게 권력을 넘겼다.

아르벤스는 아레발로의 정책을 계승했는데 토지개혁은 더 급진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르벤스가 집권하기 1년 전인 1950년 당시 과테말라의 전체 토지의 72% 이상이 약 2%의 지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아르벤스는 1952년 6월 272헥타르보다 큰 비경작지, 그리고 91헥타르보다 크고 272헥타르보다 작은 토지 중 비경작지가 1/3 이상인 토지를 유상으로 몰수하는 토지개혁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고, 분배 가능한 토지를 대상으로 농민들이 직접 땅을 요구할 수 있도록 지역농민위원회를 결성하도록 했다. 개혁이 실시되는 18개월 동안 1,500여개가 만들어졌으며 당시 혜택을 본 농가는 약 10만개, 인구로 따지면 약 50만명이었다. 1950년대 초 과테말라의 전체 인구가 약 300만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토지개혁의 성과는 단기간에 이루어진 셈이고, 적잖은 농민들이 토지분배의 혜택을 보았다. CIA의 1952년도 비망록은 이러한 과테말라의 상황이 "사회 개혁과 민족주의적 정책을 호전적으로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에 "미국의 이해와 상반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51년 과테말라시티 주재 미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은 워싱턴에 "과테말라 정부가 과테말라 기업에게 강경하게 나가는 것이야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미국 기업을 상대로 강경하게 나온다면 그때는 우리가 관여해야 한다"고 서한을 보냈다.[23]

미국의 우려대로 아르벤스는 2차에 걸쳐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 소유 토지 947㎢(2억8,646만 평)에 대한 수용에 착수했다. 이 회사가 소유한 전체 토지 2,226㎢는 과테말라 전체 경작지의 약 1/5이었는데 이 중 85%가 놀리는 땅이었다. 물론 UFC도 그러지는 않고 싶었으나 파나마병이 바나나밭을 초토화시키고 있었고, 이를 막을 능력이나 새로운 품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벤스는 UFC에 보상금으로 6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회사가 앞서 소득신고서에 기재한 토지 가격을 기초로 산정한 금액이었다. 헐값을 받게 된 UFC는 곧 CIA를 이용해 1954년 아르벤스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1954년 3월 제10회 미주대륙회의에 참석하고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갔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쿠데타에 앞서 아르벤스 정부의 체코슬로바키아산 무기 구매[24]를 구실로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추진했으며, 결과적으로 과테말라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정치공작을 했다.

CIA는 과테말라 군부와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아르벤스가 1953년 8월 12일 2차 토지 수용을 단행한 후, CIA 작전조정위원회는 아르벤스를 최우선 순위로 놓고 작전을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CIA는 300만 달러를 투입해 카스티요 아르마스 대령의 용병단을 훈련시키고 전체 군 수뇌부가 아르마스를 지지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했다. 1954년 6월 CIA에서 훈련받은 용병들이 온두라스와 니카라과의 기지를 떠나 과테말라로 침투했고, 미국은 항공지원을 해가며 이들을 도왔으며,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고자 했다. 6월 27일 아르벤스는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퇴했다.

미국의 후원으로 대통령직에 오른 아르마스는 곧바로 반공법을 제정하고 '공산주의자'는 6개월까지 재판 없이 임의 구속이 가능하도록 했는데, 실제 공산당원 수가 4천명이었던 데 반해 정부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체포한 사람은 7만2천명에 달했다. 쿠데타 이후에는 친미정부가 개혁을 깡그리 되돌렸지만 1960년부터 쿠바의 지원을 받은 좌파 반군들이 속속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1996년까지 36년간 내전이 지속되었다. 정부는 원주민을 반군의 지지층으로 간주하고 잔혹하게 진압했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앤서니 루이스는 칼럼에서 소위 반공이라는 명분 아래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과테말라의 경우 정부군이 헬기를 타고 농촌 마을에 들이닥쳐 벌초용 칼로 여성들을 난도질하고 오두막을 불태우고 주민들의 눈알을 뽑아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는 보도를 상세히 소개했다. 루이스는 당시 과테말라 정부의 게릴라 소탕작전을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학살로 규정했다. 미국은 이후 자신들이 세운 정부 하에서 자행된 학살을 돕고 방조했지만, 자신들의 관여한 행위를 부정했었다.

당시 과테말라에서 아르벤스의 개혁정치를 지켜보던 체 게바라는 쿠데타 이후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이후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한편 UFC는 쿠데타 후 본국의 반독점법에 걸려 중남미의 철도망과 과테말라의 토지 일부를 매각해야만 했다.

10.2. 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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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남미 국가에 대한 선린정책을 표방한 이후 미국은 직접적인 무력 개입은 자제했지만, 카스트로 혁명 이전까지는 쿠바 내 대다수 생산시설을 소유하는 등 경제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1950년대 말 미국 기업은 쿠바 소재 광산의 90%, 공공 서비스 부문의 80%, 제당 산업의 40%, 은행 예치금의 25%를 소유했다. 쿠바 경제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실업문제와 도농격차도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총인구 600만 명 중 50만 명이 실업 상태에 있었고, 도시의 문맹률은 11%인데 반해 농촌의 문맹률은 41.7%에 달했다. 여기에 쿠바 수출의 80%를 차지하던 설탕의 가격이 1950년대 내내 요동치면서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요인들은 자연스레 혁명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였다.

1953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소수의 무장세력이 정부군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바티스타 정부 하에서 풀려났고, 3년 후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상륙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쿠바 혁명을 일으켜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냈다. 사실상 라틴아메리카 사회주의 혁명의 시초가 된 사건으로, 쿠바는 이 혁명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반미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즉시 교육제도 개혁과 토지 재분배에 착수했으며,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를 비롯한 3개 미국 회사의 땅 약 4,050km²를 몰수했다. 다른 한편으로 안마당인 줄 알았던 쿠바에 혁명으로 친소정권이 수립된 것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후술한 것처럼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몰래 후원하는 등 대라틴아메리카 외교 정책을 보다 공격적으로 변경하였다.[25]

이와 더불어 미국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주도한 쿠바 혁명이 성공한 시점부터 사회주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1960년 3월 17일 아이젠하워는 CIA에 쿠바인 망명자들로 반군을 조직해 카스트로를 타도하라고 지시했으며, 그리하여 1년 뒤인 1961년에 일어난 것이 바로 피그스만 침공이었다. 이 침공은 반공성향의 쿠바 망명자 1,500명을 투입한 것이었는데 대실패로 끝났고 114명이 전사, 1,189명이 체포됐다. 그 이후에도 미국은 CIA를 통해 피델 카스트로의 암살을 여러번 시도했었다. 미국의 침공위협에 공포를 느낀 카스트로는 소련에 미국을 겨냥한 핵미사일 배치를 요구했고, 소련이 보낸 미사일 발사대를 미국이 발견하여 세계는 3차대전 발발 직전까지 간다. 이것이 바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다.

혁명 이후 쿠바는 무상의료와 무상주택 및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을 펼쳤다. 미국은 1962년 위기로 쿠바가 언제든 제 목을 겨누는 비수가 될 수 있단 것을 깨달았다. 니카라과 내전에서 쿠바의 지원을 받은 사회주의 조직 FSLN이 승리하고 엘살바도르도 내전에 휩싸이자 이런 시각은 더욱 강화되었다. 결국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쿠바 역시 필연적으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자기 안마당 앞에 위치한 반미국가가 가만히 발전하게 놔둘 이유가 없었고, 이런저런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쿠바의 산업 발전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이런 살인적인 경제제재는 2022년인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90년대 이후 쿠바의 커피 산업 완전 몰락을 예로 들 수 있는데[26] 소련 해체바르샤바 조약기구 해체를 전후하여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던 헝가리, 몰도바, 조지아의 와인 양조 산업이 부흥했던 것과는 별개로 쿠바의 커피 산업은 계속된 제재로 인해 원두 가공 기계를 개선하지 못하면서 급속히 도태되고, 같은 제2세계 국가였던 베트남에게 완전히 추월당했다. 1차산업 생산품인 커피 원두가 이럴진대[27] 2차산업을 경쟁력을 키우기는 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냉전시기 쿠바는 소련과의 관계에 많이 의존했지만, 소련과의 경제관계는 제법 양심적이었다. 1960년 2월 5일 소련의 지도자이자 옛 볼셰비키인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아바나에 와서 소비에트 과학, 문화, 기술 전시회 개막식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만났는데, 일주일 뒤 미코얀과 카스트로는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시장 가격으로 쿠바 설탕을 구매하고 자국 제품을 구매하도록 쿠바에게 신용을 제공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소련은 이후에 비록 소비시장에서 자국 내에서 사탕무 설탕의 공급으로 설탕이 충분했음에도 쿠바 설탕의 거의 모든 수확량을 구매했으며, 가격 변동이 있었지만, 대체로 쿠바는 미국 구매자를 대신할 경기적 구매자를 찾을 수 있었다. 소련은 또 쿠바 화학 산업 건설을 위해 1억 달러 이상의 신용을 제공했고, 소련에서 과학자와 기술자를 교육시켰다.[28]

이후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북한과는 다르게 이런저런 노력이 결실을 거두며[29] 석유 부국이 된 베네수엘라와의 공조로 부활하는가 싶더니… 2014년 후반 사우디와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유가치킨게임(국제유가폭락) 이후 우방국 베네수엘라가 파탄나고, 브라질의 극우 정치인 보우소나루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 인한 외교 정책 변경으로 다시 소련 해체 직후 수준의 데미지를 입은 상황이다. 2019년부로 휘발유 공급이 제한되고 20~21년에는 쿠바 국민들이 동요하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10.3. 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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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칠레는 좌익과 우익 양극의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대통령 집권기인 1968년, 칠레 노동조합연맹은 프레이의 파업금지령에 맞서 전국적인 파업을 단행하는 등 직접행동에 나섰다.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투쟁을 더욱 확산시켰다. 1969년에는 파업 1,939건에 참가자 23만 725명, 1970년에는 파업 5,295건에 참가자 31만 6,280명으로 늘어났다. 1970년 대선에서 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턱걸이로 승리하여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실 아옌데의 득표율은 옛날보다 더 떨어진 상태였다. 중도파와 우파가 지난 대선처럼 힘을 합치지 않아 표가 갈려 얻은 승리란 게 더 정확하다.[30] 취약점은 금세 노출됐다. 민중연합이란 선거연합은 대통령을 배출해 냈지만 의회에선 다수세력이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상당 부분 운이 좋아 집권한 아옌데 정권의 정책은 자신을 지지해준 여러 세력들(노동자/중산층/자본가 일부)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합법적인 방법으로만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옌데는 1971년부터 급진적인 개혁에 나섰다. 1971년 초 블루칼라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실질 최저임금을 각각 37~41%, 8~10% 인상하면서도 상품 가격은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다. 1972년에도 블루칼라 노동자의 실질 최저임금을 27% 더 인상했고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임금을 인플레이션에 연동했다. 이때 경제성장을 통해 임금이 올라가는게 아니라 칠레의 통화인 에스쿠도를 마구 찍어내서 노동자의 실질 최저임금을 인상했다. 그리고 7월 국유화조치를 통해 구리, , 질산염, 섬유산업 및 은행 등을 국유화했으며,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66% 인상, 400만 어린이에 대한 우유 무료급식, 실업자 구제, 토지개혁(3,300건의 대규모 토지몰수) 등 대대적인 사회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급진적인 사회주의 경제개혁은 이미 도시화율이 75%를 찍고 농업과 구리 광업, 외국의 투자에 의존하던 칠레의 연약한 경제구조를 도외시한 채로 진행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생산 급감으로 인한 초인플레이션과 품귀 현상을 초래해 칠레 경제를 전면적인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이는 피노체트를 위시한 군부의 쿠데타를 촉발하게 된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쿠데타로 아옌데는 자살했고, 미국은 곧바로 피노체트 정권을 지지했다. 는 1990년 민주화로 물러날 때까지 17년간 통치했다. 그는 칠레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박멸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는 반대파 3,200여명을 처형했고, 수만 명을 구금하고 고문했다. 피노체트 정권의 공포정치는 죽음의 카라반(Caravan of Death)으로 알려진 칠레군 살인부대의 작전으로 시작됐으며, 닉슨 정부 당시 국무장관이던 헨리 키신저는 미국이 피노체트 정권을 신속히 인정하고 원조를 제공하도록 조치했다. 당시 키신저가 피노체트 앞에서 한 말은 "우리는 각하가 여기서 하시려는 일에 공감합니다"였다. 피노체트 정부의 살인행위는 칠레 외부에서도 일어났다. 키신저의 칠레 방문 3개월 후 피노체트가 보낸 암살자들이 워싱턴에서 아옌데 정부 때 미국 주재 칠레 대사를 지낸 오를란도 레텔리에르 정책연구소 연구원과 레텔리에르를 돕고 있던 미국인 로니 모피트를 살해했다. 이들이 탄 자동차는 백악관에서 14 블록 떨어진 지점에서 폭발했다. 뿐만 아니라 칠레의 피노체트 정부는 미국 CIA가 벌이는 암살작전인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를 통해 반대파 암살작전을 폈다.[31] 교육계는 좌파들을 해고하고 장교를 파견하여 빈자리를 채웠다. 반군부 진영을 단합시킬 만한 인물들도 죄다 암살당했다. 노동조합 활동도 극도로 위축됐다.

경제는 1975년부터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당시 세계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칠레 경제의 핵심이었던 광업 부문은 기존의 구리 국유화는 유지하되[32] 국내외 업체들의 신규 광산 개발 및 소유는 막지 않았다. 국영 광산의 생산량은 정체했지만 대신 민영 광산의 생산량은 증가하였다. 농업 부문은 농지 개혁의 유산을 상당 부분 유지하되[33] 아옌데가 추진한 집단농장은 모두 해체하여 농지개혁 방향을 올바르게 수정했다. 수입 관세는 낮아져 칠레 시장에서 국내 기업과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했다. 이때 진행된 경제개혁은 비록 등락이 상당히 심하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칠레가 라틴아메리카 주요국 중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함에 따라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34]

10.4. 니카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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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이래 소모사 일가는 니카라과를 통치하면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1956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가 암살되고 1959년 쿠바 혁명이 성공하자 그 영향으로 무장세력이 준동하고 사회적 불안에 시달렸다. 1961년 카를로스 폰세카(Carlos Fonseca)와 토마스 보르헤(Tomás Borge)를 주축으로 FSLN이 조직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 교회, 군부, 지주 등 체제 내의 분열과 마나과 지진으로 인한 산업시설의 파괴, 인명 손실 등으로 인하여 3대에 걸친 소모사 족벌 체제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게릴라전을 벌이던 FSLN은 1978년부터 대중봉기 노선을 채택하고 군사력을 급격히 확장하여 1979년 소모사 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43년간 3대 세습을 거쳐 해오던 소모사 독재는 막을 내렸다. 좌익 혁명 세력인 FSLN를 비롯해 자유주의 우파까지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봉기하였으며, 쿠바 혁명과 함께 성공한 유이한 무장혁명이다.

내전 기간의 희생은 극심했다. 유엔의 보고서에 의하면, 내전을 통틀어 최소 4만 명 이상 사망하고, 가옥 20만 채가 파괴되었다. 고아는 4만 명이 넘었고, 75만 명이 기아상태였으며, 10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외채는 16억 달러에 달했고 국내 산업의 1/3이 파괴되었다. 국경을 넘어 피난한 난민은 15만 명, 노숙자는 60만 명에 달했다. 1979년 니카라과 인구가 246만 2,000명 정도로 추산되니 니카라과 전체 인구의 2%가 죽고 1/3이 도피 상태에 빠졌던 셈이다. 거기다 1970년대 수도 마나과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각종 인프라들은 내전으로 남은 것들마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재산 피해는 무려 15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니카라과 내전과 콘트라 전쟁(War of Contras, 1979~1990)

초기 FSLN 정권은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단행된 토지개혁을 통해 대략 7만 명의 농부들과 4천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FSLN 정권은 소모사 시절 부족하고 불평등했던 의료복지를 늘리고자 의료시설을 설립했고, 무상의료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소모사 독재 정권 하에서 자행된 고문과 학살을 확인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1979년 7월 20일 FSLN 혁명평의회는 포고 3호를 발하여 소모사 가족, 헌병대의 고위 지휘관 및 정부 고위 관료들의 소유 재산을 몰수하였고, 동년 8월 8일에 개정 보완되어 공포된 포고 제38호에 의하여 소모사 독재정권에 협력한 자의 기업이나 사유재산의 소유권 이전 또는 점유 등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1979년 11월 23일에는 1,500개의 플랜테이션 약 80만 헥타르의 농경지를 무상몰수했다.[35] 하지만 FSLN 정권은 동해안에 거주하던 원주민의 인권을 무시하는 정책을 펴서 이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카터의 뒤를 이어 집권한 레이건 행정부는 불법으로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란-콘트라 스캔들을 터뜨리기도 했다. 사실 레이건이 이러한 전복 및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은 당시 그가 추진하던 반공주의적 정책에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은 콘트라 반군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 비유할 정도로 콘트라를 옹호했다. 콘트라 반군은 물자보급과 훈련이 용이한 온두라스에 근거지를 두고 1980년대 내내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게릴라전을 벌였다. 니카라과는 내전과 소련의 지원 축소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고, 결국 1990년 선거에서 반FSLN 하나로 뭉친 빅텐트 선거연합 UNO에게 총선과 대선에서 패배하였다. 2006년 정권을 탈환한 다니엘 오르테가는 아직까지도 니카라과를 통치하고 있다.[36]

10.5. 엘살바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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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말 오소리오 정권은 조세감면의 형태를 띤 강력한 투자유인을 중심으로, 1960년대 리베라 정권은 미국의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Progress)'과 '중미공동시장(CACM)' 정책을 통해 공업화를 추진했다. 엘살바도르는 중미공동시장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공업국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았고 교역이 확대되면서 기존 공업도 계속 성장했다. GDP에서 공업의 비중은 1960년 14.5%에서 1975년 18.5%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성장률은 연평균 7.3%에 달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중소기업에서 종사하는 노동자의 약 60%가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살았다.

1970년대 들어 노동운동과 반독재운동이 성장하자 정부는 부정선거와 기본권 제한, 암살로 대응했다. 이후 다양한 좌파 게릴라 조직들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뭉쳤다. 정부군은 게릴라 토벌전에서 1980년 5월 13일 숨풀 강(Rio Sumpul) 학살, 1981년 12월 11~12일 엘 모소테(El Mozote) 학살과 같은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엘살바도르의 암살단은 군대와 비밀경찰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활동했다. 내전은 1992년에 멕시코시티 차풀테펙(Chapultepec) 성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종결됐다. 7~8만명이 죽었는데 3명 중 2명이 민간인이었다.

미국은 엘살바도르와 가까운 니카라과에 혁명정권이 들어서고 니카라과와 쿠바와 엘살바도르에 개입하자 자기도 내전에 개입했다. 미국 정부는 미군의 개입을 최대한 줄이면서 게릴라를 진압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정부군을 늘리고 군사원조를 보내 장비를 현대화했으며, 1983년에 이르러 병력의 정부군 병력의 규모가 5만 3,000명으로 증강됐다. 1980년부터 1990년까지 엘살바도르는 미국으로부터 총 10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받았다. 또한 미국은 엘살바도르에 최소 100명 이상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엘살바도르 정부군을 지휘하고 교육했다.

10.6. 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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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미국은 마약 범죄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법정에 세운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파나마를 침공했다. 사실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노리에가는 미군이 운영하는 아메리카학교에 두 차례 입교해 훈련을 받았으며, 1960년대부터 CIA의 돈을 받고 하수인 노릇을 했다. 부패하고 파렴치한 노리에가는 콜롬비아의 메데인 마약 카르텔의 편의를 봐주고 이익을 챙기는가 하면 마약 밀매에서 자신과 라이벌 관계인 메데인 카르텔의 거물들을 미국 마약단속국에 밀고하기도 했다. 또한 니카라과 반군을 지원함으로써, 윌리엄 케이시, 엘리엇 에이브럼스, 올리버 노스 같은 레이건 행정부 고위급 관리들의 비호를 받았었다.[37]

그러나 그런 노리에가가 1988년 미국 법무부에 의해 마약 혐의로 기소됐고, 1989년에는 파나마 대통령 선거 결과를 무효화해 미국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자 아버지 부시는 노리에가를 버리기로 결심했으며, 미국의 부추김 및 사주를 받은 파나마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시도했고, 결국 12월 대규모 미군 병력을 동원한 파나마 침공으로 이어졌다.


[1] 무리한 고정환율정책과 막대한 외채로 1982년 경제위기를 맞이한 것을 제외하면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비해 장기적으로 더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와 함께 가장 부유한 국가이며, 밀턴 프리드먼은 칠레의 성장을 가리켜 "칠레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다.[2] 그러나 아직까지도 경제적 중심지는 리우데자네이루를 비롯한 남부 해안지대이다. 빽빽한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는 리우데자네이루와 달리 브라질리아는 개발이 힘든데다 운송비용이 많은 내륙지역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빈 곳이 많다.[3] 브라질 군사정권에서 살해되거나 실종된 인사는 400~1,000명인데 훨씬 덩치가 작은 칠레의 3,200명, 아르헨티나의 22,000~30,000명에 비하면 굉장히 적다. 이것은 똑같은 훈타(junta)라고 할 지라도 각각의 나라에서 성립된 훈타의 본질이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 성립한 훈타는 기본적으로 군대가 "국가 속의 국가"로서 상당히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용인된 스페인 제2공화국바이마르 공화국을 모범으로 삼았고 따라서 학살을 자제하고 선거제도를 유지하는 포용력을 지녔으며, 공산당을 제외한 기존 정치세력들은 이들 군부와 상호견제를 하면서 또 서로의 존재를 용인했다. 반면에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성립한 훈타는 스페인 최후의 카우디요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집권한 스페인국을 모델로 삼았다. 즉 이들 훈타가 브라질 훈타와 달랐던 점은 프랑코 치하 스페인처럼 자기에게 반대하는 기존 정치세력의 존재 자체를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브라질 훈타도 상당히 가혹한 통치를 하긴 했으나, 본인들은 그 덩치에 400명 남짓 죽였는데 칠레, 아르헨티나 훈타가 수만명을 잡아죽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경악했다고 한다.[4]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브라질의 지니계수는 1960년 0.50에서 1970년 0.54로 증가했다.#[5] 당시도 브라질은 산유국이었지만 개발이 덜 되어서 지금처럼 수출은커녕 국내 수요도 충족하기 힘들었다. 또한 석유는 정제해야 사용할 수 있는데 브라질은 원유만 생산했지 정제유는 기술력 미비로 외국에서 수입하는 형편이었다.[6] 1985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브라질의 정치체제를 가리켜 제6공화국이라고 한다.[7] 영어의 real과 뜻이 같다. 한마디로 그동안의 "가짜 돈"과 차원이 다른 "진짜 돈"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8] 안정 속의 성장(Desarrollo estabilizador)이라는 용어도 쓰인다.[9] 사실 라사로 카르데나스는 사회의 전 분야에서 펼친 야심적 개혁정책과는 별개로 별개로 경제적 성과는 확실히 초라했다. 적어도 석유 국유화만큼은 그렇다(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최고 업적으로 꼽힌다). 석유 국유화는 경제논리보다는 정치논리에 사로잡혀서 초래한 정책적 오류였다. 석유 메이저들은 이미 1920년대부터 멕시코보다 베네수엘라 개발에 집중하고 있던 판에 카르데나스가 석유 국유화 정책까지 펼치자 멕시코산 석유 수출과 자국산 석유산업 부품 유입을 봉쇄하고 석유 산업에 대한 차관 공여를 방해하는 식으로 보복에 나섰다. 때문에 멕시코의 석유산업은 1921년 세계 원유 생산량의 1/4을 차지하던 위치에서 1940년대에 이르면 겨우 자급이나 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멕시코의 석유산업 쇠퇴는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멕시코의 석유산업 국유화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자원국유화를 촉진하기보단 오히려 위축시켰다.[10] 소 뒷걸음치다 쥐잡은 격으로, 카르데나스가 석유산업을 조져놨기 때문에 1970년대 중반까지 자원의 저주를 겪지 않을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카르데나스의 경제적 업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며, 예를 들어 교육제도를 개선하고 고등 공업교육기관들을 설립하여 경제발전을 이끌 인재를 양성한 것이 있다.[11] 푼토피호는 그래도 참여 정당이 3개였는데 국민전선은 2개밖에 없었다.[12] 사실 콜롬비아 내전의 합의된 시작 시점은 없다. 어떤 경우는 1958년, 그러니까 라 비올렌시아가 끝난 바로 그 시점부터 콜롬비아 내전이 발생했다고 본다. 이 관점을 따르면 콜롬비아는 1948년 이래 지금까지 평화기를 아예 가져보지 못한 것이다.[13]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폴 볼커(1979~1987)의 초고금리 정책(연 20%)을 가리킨다. 결과적으로 미국 경제는 살렸지만 막대한 외채를 졌던 라틴아메리카 경제는 조져버렸다.[14] 다른 주요국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는 전부 1980~1982년 사이에 디폴트를 선언했다.[15] 1979~1990년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의 실질성장은 각각 27.7%, 29.7%, -6.2%였다. 같은 기간 콜롬비아의 실질성장은 45.6%로 훨씬 좋았고 칠레(44.0%)에 필적했다. 콜롬비아야 애초에 가난한 나라니 경제침체도 덜한게 당연하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똑같이 거지처럼 살고 똑같이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던 페루(같은 기간 -4.2%)의 침체가 설명이 안 된다.[16] FAO 자료에 따르면 밀(wheat) 생산량만 하더라도 1961년과 1975년 사이 아르헨티나는 50% 증가에 그친 반면에 같은 시기 프랑스는 57%, 미국은 73%, 캐나다는 121%, 브라질은 228%나 증가했다. 옥수수(maize) 생산량도 같은 시기 아르헨티나는 59% 증가에 그친 반면 미국은 62%, 브라질은 81%, 프랑스는 231%, 캐나다는 391% 증가했다. 아르헨티나는 시간이 갈수록 농업에서 지닌 패권적 지위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17] 페소화 150% 평가절하, 공공요금 100% 인상, 유류 가격 180% 인상, 임금 45% 인상.[18] 1974년 24.4%에서 1975년 182.4%, 1976년 444%.[19]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개최 자체는 이미 1966년 7월 6일 영국 런던의 FIFA 총회에서 결정되었다.[20] 월드컵 개최 비용은 7억 달러에 달했고, 포클랜드 전쟁 전비는 30억 달러가 넘었다.[21] 2000년 하반기, 투자은행인 JP모건과 합병하면서 JP모건 체이스로 사명을 변경했다.[22] 장기적으로 카바요 계획은 다른건 몰라도 초인플레이션은 확실히 때려잡는데 성공했다. 1992년 이후부터 2022년 이전까지 아르헨티나는 연 인플레이션이 100%를 넘긴 해가 없었다. 그게 진정이 된거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경제위기가 본격화된 1974년부터 1991년까지 아르헨티나는 인플레이션이 100%를 넘기지 않은 해가 오히려 드물었으니 이 정도만 되어도 나름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23]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86[24] 미국이 과테말라로 향하는 무기 수출을 중단하자 수입선을 바꾼 것이다.[25] 아옌데의 경우 대외적으로 피델 카스트로와의 관계에 많이 의존했다.[26] 냉전 시대 쿠바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 설탕과 커피를 수출하였다. 설탕은 소련 내에서도 사탕무를 사용해서 어느정도 자급할 수 있었지만 커피는 확보가 어려웠다. 쿠바가 소련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원조를 받은 줄 아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 쿠바는 제2세계의 커피 수요를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워서 쿠바 국민들에게 커피 원두에 완두콩을 섞어 볶아 공급해야 했다.[27] 쿠바에서 자랑하는 유기농 농업 진흥 정책 역시 미국의 제재를 뚫기 위한 궁여지책에서 나온 것이다.[28] 비자이 프라샤드, 원영수, 제3세계의 붉은 별, 두번째 테제, 2018 p.137~138[29] 북한에서는 소련이나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이 보내준 물건들 대금을 횡령하는 일이 많았던 반면, 쿠바는 그래도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는 국가인 것도 해도 양심적으로 무역하던 편이었다.[30] 선거 개표 초기 우익들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익들은 김칫국부터 마셨다가, 패배하여 실망하기에 이르렀다.[31]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옮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86~87[32] 아이러니한 사실은 피노체트하에서 다른것은 민영화가 착착 진행된 반면에 구리 국유화만큼은 변하지 않아서 이후로 칠레 정부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33] 60~70년대 농지개혁 당시 수용된 농지의 33%만이 이전 소유자에게로 되돌려졌고, 41%는 소농가에게로, 그리고 나머지는 경매로 처분(16%)되거나 공공기관(10%)으로 이전되었다.[34] 1975년부터 2022년까지 칠레의 달러 기준 1인당 GDP는 연평균 3.9% 성장했다. 같은 기간 콜롬비아는 2.4%, 브라질은 1.5%, 페루는 1.4%, 멕시코는 1.1%, 아르헨티나는 0.7%였다. 또한 1975년 칠레의 1인당 GDP는 미국의 12.8%에 불과했으나 2022년 22.9%까지 증가했다.[35] 정명기, 니카라과 혁명사, 한마당, 1986 p.190[36] 현재 FSLN은 다소 보수화 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산디니스타는 현재 많이 우경화되어 낙태를 불법화하는 것에 동조하다. 그러나 다니엘 오르테가가 '기독교인'임을 강조하며 표를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비범죄화를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37]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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