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 | |||||||||
19세기 | 20세기 전반 | 20세기 후반 | 21세기 전반 | 한계와 비판 |
1. 개요
19세기 이전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가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보여준 한계와 그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2. 식민주의 잔재인 인종구조의 재생산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은 유럽에서 발생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식민 지배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력과 위신이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개박살이 난 것을 계기로 본토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자기 나와바리를 마음껏 지배하겠다는 식민지 출신 지배층들의 욕망으로 인해 벌어진 독립이었다. 당연히 독립 이후 이들 대지주들이나 정치귀족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지고 이들끼리도 뭉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싸우거나 이합집산하면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부정부패가 극심해지며 쿠테타를 비롯한 혼돈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었다.[1][2]앵글로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는 본래 아메리카 원주민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지역이었으나 유럽계 백인과 사하라 이남 흑인이 자의 또는 타의로 이주하여 인종구성이 다양해졌다. 또한 식민지 시대부터 백인이 흑인과 원주민을 착취하거나 배척하는 인종주의적 지배체제가 생산되었고, 이 체제는 식민지의 독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양 지역은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주민의 인종구성"이다. 전근대 사회는 지역과 민족을 막론하고 소수의 상류층이 다수의 하류층을 지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8세기 말 미국의 전신인 13개 식민지도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런데 13개 식민지의 주민은 거의 80%가 유럽계 백인이고, 나머지 20%는 비백인(대부분 흑인이고 소수는 원주민)이었다. 캐나다는 미국보다 원주민이 더 적은데다 흑인의 유입도 거의 없었으므로 백인의 구성이 이것보다 높았을 것이다. 즉 앵글로아메리카는 사회의 소수인 상류층은 물론 다수인 하류층 또한 백인이 절대다수인 지역이었고, 다른 말로 하면 앵글로아메리카는 "인종이 곧 계급"일 수 없는 지역으로, 소수의 지배가 인종주의에 의해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지역이었다.
반면에 라틴아메리카는 하류층의 절대다수가 비백인(아메리카 원주민, 메스티소, 흑인, 물라토)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1825년 라틴아메리카 주민의 19.2%만 백인이었고 나머지 80.8%는 아메리카 원주민(35.3%), 메스티소(27.3%), 흑인(18.1%)이었다. 더욱이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 프랑스인이 침투한 이후 각 인종의 역사를 살펴보면 소수의 유럽계 백인들이 정복자로서 권력을 독점한 가운데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정복당해 노예화되고, 흑인들은 플랜테이션 확대, 광산 개발 및 원주민 급감으로 발생한 노동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입되어 노예로 굴려지고, 이들 원주민과 흑인들이 백인들과 자의 또는 타의로 관계를 맺어 메스티소와 물라토가 생겨났다. 즉 라틴아메리카는 식민지 시대부터 소수의 백인 상류층이 절대다수의 비백인 하류층을 지배하는 사회구조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고, 다른 말로 하면 라틴아메리카는 "인종이 곧 계급"인 지역으로, 소수의 지배가 인종주의에 의해 정당화될 필요가 있는 지역이었다.[3] 이 상황에서 페닌술라르와 크리오요를 막론하고 백인은 인종과 계급을 동일시하는 시각을 내재화할 수밖에 없었다.
신생국의 메스티소들은 법적으로 백인과 동등한 시민으로 간주되었고 노예제를 철폐한 신생국들도 점점 많아지면서[4] 이들 신생국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법적으로는 평등해졌다. 그러나 백인 지배계급은 국가의 유지와 경영을 위해 비백인들을 국민으로 동원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들과 "급이 다른" 이 인종들을 피지배 집단으로 묶어놓거나 또는 장기적인 "백인화"를 통해 비백인의 존재 자체를 지우고 싶어했다. 따라서 신생국들은 오랜 제도적 차별에서 비롯된 차별적 관행들을 철폐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같은 국민이라는 명분 하에 실존하는 인종구도를 은폐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산업혁명 이후에도 상류층인 백인은(아이티는 물라토) 정치공간을 독점하면서 원주민과 흑인으로 하여금 사회의 최하층으로 힘들고 위험한 일을 도맡게 하고 중간 관리자로 메스티소를 기용해 이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이런 인종에 기반한 사회구조는 다시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견고한 인종주의적 관념을 주입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3. 우파에 대한 비판
소위 신자유주의 같은 미국식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세력도 비판을 피하기 힘든데 모든 산업이 발전한 미국과 달리 라틴아메리카는 1차 산업만이 발달한 상태에서, 2차산업의 제대로 된 육성 없이 무리하게 미국식 경제정책을 도입하였다. 중공업과 같은 2차산업은 그냥 가만히 놔둔다고 풀밭에 잡초자라듯이 슥슥 자라는 것이 아니다. 허약한 경제구조를 기반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시행한 결과 하층민과 최상류층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었고, 부정부패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서 아무런 제대로 된 대비없이 공공부분을 민영화한 것이 패착이었다.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부상한 한국의 경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정부 주도의 강력한 계획경제를 실현하여 2차 산업을 키워나갔고, 홍콩과 대만 역시 식민지나, 식민 잔재로 남은 공업시설을 써먹고 2차 산업을 위주로 키워나갔다.당장 우파 쪽에서 비판하는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권의 국유화 관련 논란은 당시 1차 산업 위주 국가였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입장에서 봤을 때 1차 산업에 종사하는 국민들의 숫자부터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데 이익은 다국적 기업이 거의 다 가져가는 구조에 있었다. 심지어 과테말라의 지배자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같은 경우처럼, 아예 임금을 돈이 아닌 회사 쿠폰으로 줘서 회사가 제공하는 의식주를 사게 만들고 임금을 회수하는 악랄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과정이 대규모로 지속되면 자체 산업 역량도 아작나고 농경지가 식량 작물이 아닌 상업 작물만 키우게 되니 농사를 짓는데 식량은 모자르게 되는 악순환까지 발생한다. 사실 라틴 아메리카의 국유화/민영화 문제는 좌파건 우파건 장기적인 비전과 운영 계획 없이 국유화/민영화를 해 버린 것이 공통적인 문제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볼리비아의 수도 민영화 사건으로 에보 모랄레스 등장 이전 볼리비아 집권세력이 원주민들의 인권에 관심이 없는 것까지 겹쳐 수도 요금이 폭증하는 것을 방관하면서 폭발한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미국식 자유주의를 가장 잘 받아들였다는 칠레도 2010년대 후반에는 요금 인상 등의 물가 문제로 인해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카를로스 메넴 정권이 무리한 개혁을 하다 오히려 디폴트로 인해 국가 경제가 붕괴되는 처지가 되었다.[5] 멕시코의 경우에는 NAFTA로 인해 공동농장이었던 에히도가 폐지되면서 미국의 멕시코 농지 점유가 쉬워지고 멕시코의 농민 계층이 더욱 빈곤해지는 결과를 초래했고[6] 이는 멕시코 육로로 올라오는 마약 카르텔들에 들어가면서 카르텔 조직들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 꼴이 된다. 결과적으로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비난했던 '농민 반군과 좌파 게릴라들이 날뛰는' 멕시코는 '전 세계로 마약을 흩뿌리는 마약 카르텔'이 대체하게 된 것.
또한 보수주의, 친미주의를 외치는 라틴 아메리카 정치 세력들의 경우,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사례를 보듯 대부분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고, 당연히 상당수가 자국 내에 가득한 유색인종, 원주민 문제에서 가장 적대적이고 차별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자기들만의 대농장을 가지고 있고 인종, 혈통이 다른 하층민들을 멸시하고 같은 나라 국민으로도 보지 않는 경우가 많음을 감안해야 한다. 특히 남미의 인종차별 문제는 인도의 카스트제도 못지않게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볼리비아 모랄레스 정권 전복 당시 임시대통령 아녜스만 해도 기독교 근본주의에 기반을 둔 인종차별주의자였고[7], 모랄레스 축출에 앞장선 극우 인사 카마초의 경우에는 볼리비아 인구의 60% 가까이를 차지하는 원주민들을 사탄이라고 부르며 볼리비아에서 나가라고 비하한 전적이 있다.
이렇듯 본인들에게도 일정 책임이 있으면서도 우파 세력은 포퓰리즘, 좌파의 실책만을 문제 삼아 비난해댔으며 자신들의 잘못은 침소봉대하다 본인들이 정권을 잡자마자 대안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한심한 리더십을 보여주기만 했다.
이는 2019년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에서 과이도와 서방 진영이 사실상 실패하는데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민심이 마두로도 막장이지만 친미 정부가 들어서면 80~90년대 처럼 신자유주의가 유행할 것이며[8] 이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해 질것이며 달라질 게 없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9]
4. 좌파에 대한 비판
중남미 내의 잘못된 사회적-정치적 구조의 폐단을 외면한 채, 무조건 미국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비교하자면 2021년 미얀마 쿠데타의 원인을 100% 중국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실 강대국들은 원래 주변국들이 컨트롤하기 만만한 약소국으로 남는 것을 선호하며, 같은 맥락에서 주변국들이 민주 국가가 되는 대신에 독재 국가가 되는 편을 선호한다. 왜냐면 독재 국가는 독재자와 친인척 및 그 측근만 매수하면 손쉽게 조종이 가능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경우 약소국이라 하더라도 강대국이 마음대로 조종하는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연히 강대국에 이웃한 약소국이라도 성공적으로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나라가 없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의 이웃 국가 조지아, 몰도바의 경우처럼 국민 소득은 개도국 수준에다가 주변에 딱히 강력한 우방국도 없지만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사례가 있다. 외압에 시달려서 자국 내 독재자를 인정하고 옹호하는 것은 해당국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그리고 초강대국 미국과의 관계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미국의 매판자본이 했더라도, 어차피 외국 자본은 국가 경제의 필수요소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무조건 미국 등 서방은 나쁘다는 식의 인식은 단순히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고립만 심화할 뿐이다. 물론 외국 자본도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하게 받아들여야 의미가 있는거지 정경유착 등으로 인해 쓸개까지 다 빼주는 식의 외국 자본 도입은 국가 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 좋다는 외국 자본 받아들인 쌍용자동차가 뭔 꼴이 났는가. 다만 그렇다고 적대적으로 나오는것도 나쁜결과를 초래하는데 2007년 우고 차베스가 오리노코 벨트의 개발을 원하는 해외 석유 기업들을 전부 내쫓고 국유화한 일은 10년 뒤 베네수엘라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최악의 자충수로 판명났다. 베네수엘라/경제 항목 참조.
특히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였다. 여기서의 고립은 외교적인 고립이 아니라 자본적인 고립에 가깝다. 사실 국제적인 고립이라고 그러기엔 남미 지역에 좌파가 다수 정부를 구성한지라 굳이 고립 정책을 펼 필요도 없다. 자칭 '미제에 맞서는 차베스'는 개헌을 동반한 독재정치로 변하여 독재와 인권탄압을 저질렀다. 그는 자기 권력을 위해 베네수엘라의 제2의 국민돌격대를 만들었으며, 의회를 친 차베스파로 대체했다.[10] 베네수엘라에선 누군가가 정권을 비판만 하면 전부 다 미제의 꼭두각시로 일관하여 탄압한다. 차베스와 후임인 마두로도 비슷해서 권력욕만 넘치는 독재자이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실제로 차베스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 2%였다.[11] 선심성 복지와 포퓰리즘의 결과다. 물론 우고 차베스 이전에도 석유 의존도가 엄청난 수준이었으며 빈부격차가 엄청났으며 1960년대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을 정도로 경제가 막장인 상태였지만, 우고 차베스는 2000년대의 고유가로 활황을 맞이해 복지 정책을 이것저것 추진했음에도 빈부격차 해소와 나쁜 치안사정이 해결되지 않았다. 차베스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여당은 2015년 총선거에서 의석의 2/3를 야당에게 내주는 대패를 당했다. 그러나 마두로는 현재까지 기어이 정권은 틀어쥐고 있는 중이다. 그냥 일개 정당의 선거 참패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현재의 베네수엘라는 단순히 '어려운 환경' 따위로 표현할 상황이 아니다. 국민은 난민이 되어 이웃나라들이나 해외로 달아나고, 돈은 휴지조각으로 전락해 공예품 용도로나 사용되는 지옥을 겪고 있는 중이다.
2015년 들어 유가하락과 경제불황이 본격화되면서 석유를 비롯한 자원에만 지나치게 의존했던 남미 국가들은 하나같이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룰라의 정치적 후계자인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2016년 2월, 지지율 5%를 기록하다가 탄핵당하여 파면되었으며 이후 정치적 혼란을 거듭한 끝에 다시 우파 정당이 집권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권의 경제정책 비판에 대해서는 포퓰리즘의 거짓 약속- 라틴아메리카, -희망에서 좌절의 대륙으로- 라는 제목의 책을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저자 세바스티안 에드워드는 칠레에서 태어나 칠레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Chicago Boys이며, 에드워드 가문은 19세기부터 칠레 은행가와 언론가를 주물러 온 칠레 최상류 계급의 대표다.[12]
5. 미국, 유럽 등 외국 개입에 대한 비판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미국이 벌여온 공개적·비공개적 개입의 길고도 대개 수치스러운 역사는 20세기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차대전 이전에는 이런 개입이 주로 미국의 사업상 이익을 지키기 위해 행해졌는데, 여기에는 심지어 니카라과와 아이티에서의 장기적 군사점령까지 들어 있다. 냉전 시의 개입은 좀더 은밀해졌지만 여전히 무자비했다. 라틴아메리카 경제와 국제관계사를 전공한 저명한 학자인 존 코츠워스의 계산에 따르면, 1948년에서 90년 사이에 미 정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적어도 24개의 정부를 전복시켰는데, 4건은 직접적으로 미 군대를 동원해서, 3건은 CIA 주도의 반란이나 암살을 통해서, 그리고 17건은 미국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그 지역의 군대나 정치세력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대개는 군사적 쿠데타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p.93~94[13]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p.93~94[13]
물론 미국이나 유럽 열강들도 현재의 라틴 아메리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영전쟁 이래 외침이 덜 했던 미국[14]과 달리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해방 이후에도 이 지역을 탐낸 영국,[15] 프랑스,[16] 스페인,[17] 독일[18] 등 내로라 하는 유럽 열강들은 독립전쟁 시절에도, 독립 전쟁 이후에도 내전에 개입하거나 이권과 영토를 요구하며 침공해 오는 등 라틴아메리카 권역 국가들을 계속 공격했다. 특히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이리저리 개조해 가며 라틴아메리카 권역을 자신들의 베타적 이익지대라고 삼았고, 원교근공 외교 정책 하에 카리브 해와 중앙아메리카 권역 국가들을 필리버스터[19]와 연합 과일 회사 등을 동원하여 군사적, 경제적으로 공격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굴복한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도 원주민의 인권 문제나 보호에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당장 미국부터가 자국의 원주민들을 보호구역으로 추방해가며 성장한 국가였고 유색인종이나 원주민 거주 지역이 미개발지가 많았던 데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는 암묵적으로 백인우월주의가 대세였기 때문에 유색인이나 원주민을 탄압하는 정권들을 지지했다. 이 때문에 원주민, 유색인종, 혼혈 인구가 많은 국가일수록 일반 국민들의 반미정서가 매우 강하다. 특히 미국은 현재까지도 사관학교 유학생 출신 장교진들과 CIA, 식량기업 등으로 연결된 커넥션이 작동하고 있으며 현재진행형으로 라틴아메리카 정세에 개입중이다.
냉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칠레의 경우는 피노체트를 앞세워 아옌데 정권을 뒤집고 국민들을 탄압하는 것을 적극 협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미 CIA 지부는 적극 협조했으며 카르텔과 결탁해 마약을 재배해 미국에 팔아먹는(!) 행위를 일삼았다. 냉전 이후에도 이는 다르지 않아서 멕시코는 워싱턴은 멕시코의 사회적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을 방기하거나 조장했고 이는 마약 카르텔의 성장과 미국으로 입국하는 라틴 아메리카 인구의 증가를 낳게 된다. 중미랑 남미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존 볼턴이 폭로했던 2019년 베네수엘라 정권 전복 시도부터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던 미국의 전형적인 라틴아메리카 정권 전복 절차를 그대로 밟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는 무조건 소련이나 중국을 좋아했던것은 아니다. 쿠바 혁명의 주도자들중 한명인 체 게바라라는 말년에 소련의 계속된 내정간섭에 불만을 품고 소련도 미국과 다를 것이 없는 제국주의 국가라고 비난을 했으며[20] 이 때문에 소련 눈치만 보던 피델하고 갈등을 격기도 했으며 결국 그는 행동 장소를 콩고와 볼리비아 순으로 옮겼다가 볼리비아에서 죽었다. 중국에 대해선 당시 소련/미국에 필적하는 강대국이 아니었고, 라틴아메리카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과 접점이 제한적이어서 그런지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직접 나서서 라틴아메리카를 밟아버리는 미국과 미국이랑 다를게 없이 구는 소련의 행각에 질려버렸을 뿐이다.[21]
[1] 정말 심각했던 것이 백인 정착지가 주로 동에서 서로 확대된 역사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미국과 캐나다는 적어도 국가가 분열될 위기는 미국에서 남북전쟁, 캐나다에서 퀘벡 독립운동 등 단 1건밖에 없는데 그란콜롬비아는 콜롬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까지 차지하고 있었는데 단합하지 못하고 내적 분열로 4개국으로 공중분해되었고,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해있던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역시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등 총 5개국으로 분열되었다.[2] 사실 미국도 독립운동이 따지고 보면 이런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수는 없지만 그래도 건국의 아버지들은 나름대로 새 국가에 대한 비전과 이상이 있었고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일례로 조지 워싱턴은 후대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3선을 권유받았음에도 2선까지만 하고 물러났다. 물론 이때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예시:노예제)이 후대에 남북 전쟁이라는 내전을 일으켰지만 남미에 비해서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편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상류층들이 많이 해먹긴 했지만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알겠지만 앤드루 잭슨의 잭슨 민주주의 이후로는 가문의 배경보다는 개인의 능력으로 자수성가한 대통령이 훨씬 많다.[3] 당연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백인 비율이 지역별로 균등한게 아니므로 이것도 지역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나타난다. 혼혈되지 않은 백인이 거의 절반을 차지한 아르헨티나와 과반을 넘겼던 쿠바는 비혼혈 백인만 상류층으로 인정받았지만, 페루와 볼리비아처럼 혼혈되지 않은 원주민이 인구의 80%를 넘는 곳은 메스티소에 가까워도 백인 상류층으로 인정받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이들 지역조차도 인종에 따른 계급 구도는 강고하게 유지되었다. 즉 페루와 볼리비아 같은 곳은 백인 행세를 할 수 있는 메스티소도 있었다 뿐이지 백인과 메스티소, 원주민 간의 인종적 장벽이 허물어진게 아니었다.[4] 당연하지만 이것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아이티와 중미, 칠레, 볼리비아는 독립 직후(아이티는 1804년, 나머지는 1820년대)에 노예제를 철폐했고, 쿠바와 브라질은 1880년대에 가서야 철폐했다. 또한 같은 나라라고 해도 아르헨티나처럼 지역별로 노예제 폐지일이 다른 경우도 있고, 실질적인 노예제 관행은 법적인 폐지보다 훨씬 오랫동안 이어졌으므로 관행이 사라진 시점도 다 다르다.[5] 이른바 좌파식 경제정책을 비난하며 시장 방임에 맡기라는 보수주의 경제학파 세력은 메넴의 실패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거나 오히려 메넴을 포퓰리스트로 몰아가는 적반하장을 보이고 있다.[6] 통계를 보면 멕시코 농업의 경제적 수익은 나아지는데 극빈층은 오히려 늘어나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다.[7] 결국 이것 때문에 국민들의 반발이 커져 선거에서 패하고 좌파가 오히려 집권하며 아녜스는 구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8] 실제로 후안 과이도는 신자유주의 성향이 존재했다.[9] 다만 과이도는 제3의길 사민주의자이지 보수파라고 보기 힘들다. 또한 마두로는 과이도가 낫다고 할 정도로 악랄한 독재정치를 하고 있으며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10] 헌데 이건 1999년 제헌의회 소집건이라면 모를까 2005년도 총선 때의 야권 보이콧은 그냥 야당의 자충수에 가깝다.[11] 하지만 2002-2003년도의 쿠데타 미수사건과 자본파업으로 까먹은 몫이 엄청나다보니 그만큼의 경제성장률을 까먹어서 실질적으로 그보다 높다.[12] 물론 비판하는 쪽에서는 미국이 평소 라틴 아메리카의 '후진성'을 비난하는 것을 답습한다는 평이 많았고, 실제로도 그런 내용이 많다.[13] 하버드 대학교에서 미일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은 매사추세츠 공대 역사학 교수인 존 다우어가 2017년에 쓴 책이다.[14] 물론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보다 미국의 내정이 훨씬 안정적이었기에 외세가 개입할 건덕지가 적었던 것에 가깝다.[15] 해방 이후부터 끈질기게 코노 수르와 카리브에서 영향력을 늘리려 시도했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지속적으로 충돌했다.[16] 아이티에게 독립으로 인한 손해 배상을 요구해 기어이 관철시켰고 멕시코 제국 건설을 시도하는 등 지속적으로 개입했다.[17] 스페인은 진지하게 이 지역을 자신들의 '국토'로 생각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다시 수복하려고 시도했다.[18] 독일은 통일 이후 카리브 해역에 식민지를 확보하려 시도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참전을 결정한 것도 독일의 신대륙 영향력 확보 시도로 인한 갈등이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폭발했기 때문이다.[19] 카리브 해역 일대에서 해적질을 하던 미국인들의 사설 무장 조직으로 의사 진행 방해 행위를 이 해적집단에 빗대서 부른 게 오늘날의 필리버스터라는 정치 용어가 되었다.[20] 다만 체 게바라가 쿠바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쿠바는 소련 편인 제2세계가 아닌 미국이나 소련편도 아닌 제3세계 진영에 있었을 거라 보기는 힘든 게, 냉전기의 미국을 상대할 수 있는 나라는 소련 뿐이었기에 국가의 존망을 생각한다면 소련에 대한 비난과는 별개로 소련과 외교적으로 거리를 두는 건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난 이후 쿠바의 경제가 상당히 힘들어졌으며, 쿠바보다 소련에 덜 의존적이던 북한도 고난의 행군이라는 위기를 겪었다. 물론 이러한 이유에는 미국의 경제제재도 한몫하지만, 소련의 원조 및 경제협력도 상당부분 경제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21] 하나 더 덧붙이자면 체 게바라는 흐루쇼프 당시 소련의 정치경제학 편람을 비판하며 이 따위로 하다가는 자본주의로 회귀할 것이라고 예언할 만큼 반수정주의 경향이었고 당시 소련은 평화공존론을 내세우며 중국과 수정주의 논쟁 중이었다. 중국은 아직 미국과 데탕트에 들어가기 전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