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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B3A><colcolor=#FFD700> 출생 | 1883년 5월 18일 |
브라질 제국 마투그로수주 쿠이아바 | |
사망 | 1974년 6월 11일 (향년 91세)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주 과나바라 | |
재임기간 | 제16대 대통령 |
1946년 1월 31일 ~ 1951년 1월 31일 | |
경력 | 군사 클럽 회장,(1933~1934), 전쟁 장관,(1936~1945), 브라질 제16대 대통령 ,(1946~1951), |
복무 | 브라질 육군 |
1922년 ~ 1974년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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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인출신 브라질 제16대 대통령. 지금까지 마토그로수주에서 배출한 유일한 대통령이다.2. 군인 시절
1883년 5월 18일 쿠이아바에서 파라과이 전쟁참전용사인 아버지와 평범한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에우리쿠 두트라는 1904년 리우데자네이루의 프라이아베르멜랴군사학교에 입학[1]했다. 전문적인 장교의 길을 걷던 그는 재학 도중 백신반란[2]을 진압하는데 동원되기도 했다. 이후 1908년 포르투 알레그리의 전쟁학교를 거쳐 1912년 당시 브라질 최고의 장교양성기관인 참모학교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야심찬 장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1930년 혁명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코파카바나 요새반란[3] 1924년 상파울루반란에 참여해 성과를 낸 바 있다.
1930년 혁명 이후 바르가스 대통령이 집권하자, 두트라는 입헌주의 운동에 맞써 싸우면서 바르가스 대통령의 눈 안에 들게 되었다. 1935년에는 브라질의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리우데자네이루를 위수지역으로 둔 1군구 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승승장구 했다. 결정적으로 2차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6년 제툴리우 바르가스 대통령이 두트라를 전쟁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 또한 높아졌다.
이후 자신의 후임 1군구 사령관인 고이즈 몬테레이 소장과 함께 제툴리우 바르가스의 요인으로 거듭나는데, 1937년 신국가 선언과 1938년 신국가 선언에 대한 반란진압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1945년 바르가스가 공직에서 물러날 때 까지 전쟁부장관에 머물렀다.
3. 대통령 선거
바르가스 대통령의 사임 이후 브라질 정계는 매우 분주해졌다. 12월 2일로 예정된 16대 대선은 얼마 남지 않았고, 1930년 이후로 실시되는 첫 직접선거이자 금지되었던 정당활동이 시작되는 법률이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제 4공화국 시기 브라질 정쟁의 중심에 있었던 여러 정당들이 결집하며 서로 여당이 되기 위한 수싸움에 들어갔으며, 특히 적절한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그는 이 가운에 바르가스의 정치적 지지기반인 사회민주당과 노동당 연합의 대선후보로 출마했으며 상대는 민족민주연합의 공군 사령관 에두아르두 고메즈 준장과 바르가스정권하에 위헌정당으로 낙인 찍힌 브라질 공산당의 이에두 피우자였다. 치열한 삼파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사임한 제툴리우 바르가스는 두트라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상당히 싱거울 정도로 55.39%의 득표를얻어 제 16대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4]
4. 두트라 정부
1946년 1월 31일 제헌의회의 개회와 함께 평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두트라는 대통령으로써의 첫 걸음을 떼었다. 19년동안 지속될 조용한 민주주의체제의 시작이었다. 바르가스 시대를 청산하기 위한 신헌법 제정에 온 힘을 쏟았던 두트라는 파격적인 개헌을 통해 큰 인기를 얻었다. 새로운 브라질 헌법은 1946년 9월 18일에 제정되었으며 브라질 국민들은 민주적인 권리를 다시 되찾게 된다.새 헌법에 대한 기대감도 많았지만 문맹자에 대한 투표권은 여전히 보장되지 못했고, 농촌 노동자에겐 파업권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비판이 존재하기도 했다.
두트라 정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냉전시대 브라질의 맥락과 큰 관련이 있다. 1947년 당시 세계의 권력구조는 너무나도 명확했으며 브라질은 이미 미국으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두트라는 지난 대선에서 브라질공산당의 이에두 피우자 후보가 9%라는 무시못할 득표율을 기록한 것을 두고 공산주의의 성장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에 따라 두트라 정부는 미국의 이익에 동조하기로 결정했다.
냉전시대 브라질은 결국 1937년의 정당활동금지법과 유사한 조례를 통해 공산당의 활동을 금지시켰는데, 이 여파로 인해 소련은 브라질과의 국교를 단절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박해는 곧 노동권에 싸늘한 바람을 불러왔는데 국가는 노동조합에 절대적으로 간섭하면서 노동자의 파업권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
4.1. 경제
방임주의를 골자로 한 두트라는 특히 고정환율제를 즉시 폐지하였고 그 여파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공산품 수입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당시 브라질 대부분의 자금은 2차세계대전의 낙수효과에서 비롯된 외화가 주 출저였는데, 두트라 정부는 이를 관리하는데 소홀했다. 1946년 절반의 가까운 외환은 금의 형태로 보관되었으며 나머지 절반은 영국 파운드화 였고 유동성 있는 자금이라고 해야 고작 9천 200만달러가량 뿐이었다. 원인으로는 브라질의 경상수지의 흑자는 대부분 태환이 불가능한 화폐사용국에서 나왔으며 오히려 미국 같은 경화사용국에선 엄청난 적자를 기록한 점이 있다. 나아가 전후 어지러운 세계정세 속 민간자본의 유입이 전혀 일어나지 않아 새로운 경제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다만 외환보유고와 관련한 문제 때문에 과대평가된 환율은 수출부진이라는 악영향만 초래한 것은 아니다. '자생적 산업화'로 일컫어지는 일련의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수출부문으로 가야 할 자금이 내수산업 투자로 몰리면서 산업생산은 연 평균 7%대의 어마어마한 성장률을 기록했다.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높았지만 산업또한 꾸준히 성장해 약20%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지금도 브라질에서 가장 큰 규모의 철강회사로 남은 CSN을 설립하여 철강 생산량 증대에도 기여했다.
[1] 그는 입교 당시 1885년생으로 나이를 속였다.[2] 리우데자네이로의 인구과밀화 현상때문에 빚어진 공중보건 문제가 심각해지자 브라질 정부가 도시정비를 선언하면서 많은 서민들이 집을 잃은 데 분개했다. 여기에 필수예방접종법 발효로 천연두 백신접종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일부 공공서비스를 제한한다는 조치가 내려지자 대중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3] 구공화국 시절 과두정치의 종말을 선언하고자 했던 테넨티즘주의자들이 일으킨 반란[4] 부통령은 사회민주당 소속 산타카타리나주 출신의 네루 하모스로 후에 지정되었다. 당시엔 1937년의 대통령선거법을 그대로 따랐는데, 부통령에 대한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 제헌의회의 동의를 거쳐 부통령을 임명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