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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B3A><colcolor=#FFD700> 출생 | 1907년 8월 3일 |
브라질 합중 공화국 히우그란지두술주 벤투곤살베스 | |
사망 | 1996년 9월 12일 (향년 89세)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 |
재임기간 | 제29대 대통령 |
1974년 3월 15일 ~ 1979년 3월 15일 | |
경력 | 육군 장관 ,(1964~1967), 고등군사법원 판사 ,(1967~1969), 페트로브라스 사장 ,(1969~1973), 브라질 제29대 대통령 ,(1974~1979), |
신장 | 177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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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제29대 대통령이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907년 8월 3일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 주 벤투 곤살베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기예르모 아우구스트 가이젤은 1867년 독일 헤센 주 헤르보른에서 태어나 1883년에 브라질로 이민을 왔으며 원래 이름은 빌헬름이었지만 브라질로 이민 온 후 기예르모로 개명했다.[1] 어머니 리디아 베크만은 히우그란지두술 주 Teutônia에서 태어난 독일계 브라질인이었다. 가이젤이 태어난 벤투 곤살베스는 주민 대다수가 이탈리아계로 이탈리아계 집안에 비해 왜 자신의 부모는 엄격한지 비교하기도 했다고. 집안은 루터교였으며[2] 포르투갈어는 물론 독일어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독일어는 많이 잊어먹었다고.2.2. 군인 시절
1921년 형 올랜도(1905~1979)와 함께 포르투알레그리에 있는 군사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192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Realengo 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928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1940년 루시 마르쿠스(1917~2000)와 결혼해 딸과 아들을 하나씩 낳았는데 딸은 나중에 대학 교수가 됐고 아들은 1957년 기차 사고로 요절했다. 1960년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1964년 브라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때 참가해 좌파 정권인 주앙 굴라르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동참했고 같은 해 중장으로 진급했다. 1966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한다. 1969년 전역과 동시에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브라스의 사장으로 임명된다.2.3. 대통령 시절
1973년, 에밀리우 메디시 대통령은 가이젤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형 올랜도가 당시 육군 장관이었으며 가이젤과 막역한 사이였던 주앙 피게이레두가 군 총사령관이었던 점도 작용했다. 당시 브라질은 군사정권 시기였고 대통령은 군부가 선출했지만 형식상 민주주의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집권 여당인 국가개조동맹(ARENA)이 친 군부였고 국회의원의 다수를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었다. 가이젤은 찬성 400, 반대 76, 무효 21, 기권 6표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1974년 3월 5일 대통령에 취임한다.1968년부터 1973년까지 브라질 경제는 연 평균 10%이상 성장하고 있었다.[3] 하지만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경제성장률이 반토막 났다. 이는 석유의 대부분을 수입했는데[4] 석유값이 오르면서 나라빚이 늘고 재정적자가 불어났기 때문이다. 가이젤 대통령은 고속도로, 통신, 수력발전, 광업, 원자력 등의 인프라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으며 1950년대 초반 이후 처음으로 외국 석유회사들에게 브라질에서 석유 탐사를 하는 것을 허용했다.[5] 또한 반대파에게 그 전보다 관대한 입장이었다. 골베리 실바 참모총장이 점진적이고 개혁적인 민주화 구상을 제안했는데 이를 받아들인 것. 하지만 좌파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그 외에 군 사령관들을 자신이 신뢰하는 인물들, 온건파들로 대거 교체하기도 했다.
1977년 들어 여당, 군 강경파들과 사이가 나빠졌으며 10월에는 대선 출마를 시도했던 극우 성향인 실비우 다 프로타 육군 장관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1978년 총선에서 야당인 민주운동당(MBD)이 승리했으며[6] 대규모 파업도 일어났다. 12월 말 가이젤 대통령은 외국으로 망명한 브라질인들의 귀환을 승인하고 신변 보호, 참정권을 보장해 주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도 크게 축소했다. 후계자로는 주앙 피게이레두를 임명하고 1979년 3월 15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3. 그 외
그는 보수주의자였고 반공주의자였지만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중국, 앙골라, 모잠비크같은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고 당시 석유수요의 80%를 수입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과의 갈등에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한 주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유럽, 일본과의 교류도 그 전보다 더 강화되었다.미국과 사이는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7] 일단 우익~극우 성향의 군부정권의 연장선상이기도 하고 본인도 독재적 통치를 하긴 했기 때문. 그래서 1977년에는 미국과의 군사 동맹 포기를 선언하기도 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에는 조용히 살다가 1996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4년뒤 부인도 세상을 떠났다.
[1] 개명이라기보단 빌헬름이란 이름을 포르투갈식으로 읽은 것이다. 빌헬름은 영어식으로 읽으면 윌리엄, 프랑스어식으로 읽으면 기욤, 스페인어 및 포르투갈어식으로 읽으면 기예르모가 된다.[2] 친할아버지가 사제였다[3] 이 기간을 브라질의 기적이라 일컫는다.[4] 브라질은 산유국이지만 원유를 정제하는 비용보다 정제유를 수입하는 것이 저렴했다[5] 브라질은 세계적인 산유국이다. 2023년 기준 매장량 세계 15위, 생산량은 세계 6위다.[6] 그렇다고 정권을 내주진 않았다[7]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인권을 중시한 지미 카터였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