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20:45:29

에피타시우 페소아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6a25, #009b3a 20%, #009b3a 80%, #006a25); color: #fedf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데오도루 다 폰세카 플로리아누 페이쇼투 프루덴치 지 모라이스 캄푸스 살리스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호드리기스 아우베스 아폰수 페나 닐루 페사냐 에르메스 다 폰세카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벤세슬라우 브라스 데우핑 모레이라 에피타시우 페소아 아르투르 베르나르지스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와싱톤 루이스 제툴리우 바르가스 조제 리냐리스 에우리쿠 가스파 두트라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툴리우 바르가스 카페 필류 카를루스 루스 네레우 하무스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주셀리누 쿠비체크 자니우 쿠아드루스 하니에리 마질리 주앙 굴라르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하니에리 마질리 카스텔루 브랑쿠 아르투르 다 코스타 이 시우바 에밀리우 가하스타주 메디시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에르네스투 가이제우 주앙 피게이레두 조제 사르네이 페르난두 콜로르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이타마르 프랑쿠 페르난두 카르도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지우마 호세프
제37대 제38대 제39대
미셰우 테메르 자이르 보우소나루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추증
페드루 알레이시우 · 탄크레두 네베스
}}}}}}}}}

브라질 연방 공화국 제11대 대통령
에피타시우 링도우푸 다시우바 페소아[1]
Epitácio Lindolfo da Silva Pessoa
파일:Epitacio_Pessoa.jpg
<colbgcolor=#009B3A><colcolor=#FFD700> 출생 1865년 5월 23일
브라질 제국 파라이바 움부제이루
사망 1942년 2월 13일 (향년 76세)
브라질 합중국 리우데자네이루주 페트로폴리스
재임기간 제11대 대통령
1919년 7월 18일 ~ 1922년 11월 15일
경력 브라질 검찰총장 ,(1902~1905),
법무부 장관 ,(1902-1912),
파라이바주 연방 상원의원 ,(1912~1919),
브라질 제11대 대통령 ,(1919~1922),
서명
파일:에피타시우 페소아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대통령 이전2.2. 대통령 임기2.3. 대통령 이후
3. 여담

[clearfix]

1. 개요

브라질 제11대 대통령

2. 생애

2.1. 대통령 이전

7살이었을 때 천연두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이후 페르남부쿠 주지사였던 외삼촌 엔히키 지 루세나의 밑에서 성장했다. 페르남부쿠 연방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젊은 나이에 이미 저명한 법학자이자 교수였던 페소아는 1890년 제헌의회 하원의원이 되었다. 1898년 캄푸스 살리스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시작으로 교통부 장관, 연방 대법관, 연방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까지 고위직을 역임하고 1912년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페소아는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브라질 대표단장을 맡았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에 있던 1919년 4월 대선[2]에서 페소아는 71%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2. 대통령 임기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무기 수요가 크게 늘자 브라질은 원자재를 수출하여 경제 상황을 개선시켰다. 하지만 종전 후 수출이 감소하여 다시 어려워졌고 노동자의 파업이 빈번히 일어났다. 항구에 커피 원두를 보관하기 위한 비용 900만 파운드를 차관했다.1922년 대선에서 아르투르 베르나르지스가 당선되자 에르메스 다 폰세카가 강하게 비판했다. 페소아는 폰세카를 감옥에 가두고 군사 클럽을 해체시켰다. 이에 반발하여 1922년 7월 5일, 코파카바나 요새의 반란이 발발했으나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8년간 지속된 테넨치의 반란의 시작이었다. 그의 임기말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페소아는 임기 동안 북동부 지역에 200개의 댐을 건설했고 가뭄 방지를 위한 공공사업을 착수했다. 브라질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이 설립되었다.[3] 1920년 브라질 황실을 브라질에서 추방시기는 법을 폐지했다.[4] 국가 화폐 본위를 영국 파운드에서 미국 달러로 바꿨다.

2.3. 대통령 이후

1923년, 페소아는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의 판사로 재직했다. 같은 기간, 파라이바주 연방 상원의원도 겸했다. 하지만 1930년 7월 외조카이자 정치인인 주앙 페소아가 암살당하자 충격을 받고 정계에서 은퇴했다.[5]

3. 여담

인종차별주의자였다. 1921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 브라질의 흑인 축구 선수들이 참가하는 것을 금지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데우핑 모레이라가 페소아 정부의 부통령으로도 재직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이(e, i, y)'는 띄어 쓰도록 하고 있다.[2] 10대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호드리기스 아우베스의 취임 전 사망으로 잠시 데우핑 모레이라가 대행을 맡았다가 조기 대선이 열렸다.[3] 그 해 9월 7일 페소아 대통령의 연설이 최초로 라디오로 중계되었다.[4] 이 덕분에 1921년 페드루 2세의 유해가 브라질에 묻힐 수 있었다.[5] 이 사건을 계기로 제툴리우 바르가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