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3 20:46:10

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최고의 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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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티니 가디언즈의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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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뼈 분쇄기3. 단순의 미덕4. 점호5. 미완의 임무6. 어떤 행운7. 과대평가8. 미지의 공간9. 두 개의 감방10. 재회11. 혁명12. 불꽃13. 영혼의 속박14. 충성의 자리

1. 개요

이 지식 책은 '뒤엉킨 해안 내에서 진행하는 활동(공개 이벤트, 잊혀진 구역, 영웅 모험 등)으로 얻을 수 있다.

2. 뼈 분쇄기

고대의 감옥 심층부에서, 심판의 가문 바릭스는 태양계가 불타는 광경을 보며 뼈 분쇄기를 꽉 움켜잡았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감옥에는 리프 전체에 펼쳐진 거대한 감지망이 갖춰진 상태였다. 따라서 붉은 군단의 격노에 대해 자세한 분석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방 안을 비추는 것은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뿐이다. 바릭스는 제어판으로 손을 뻗었다.

페트라를 비롯한 각성자들에게 경고를 전송해 본다. 남은 각성자 함대가 벌써 모습을 감추며 그의 감지 범위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도시에 경고를 전송해 본다. 이미 늦은 것을 알면서도. 도시의 통신망은 끊어져 있었다. 들을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동포들에게 경고를 전송해 본다. 가문들이 몰락한 뒤로 통신을 들을 자는 거의 남지 않았다. 하지만 단 몇 명이라도 구해낼 수 있다면….

바쁘게 손을 놀리면서도 바릭스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면에는 공포와 파괴와 죽음이 비춰지고 있었다.

도시의 수호자들과 협력하는 동안, 바릭스는 단탈리온 엑소더스 Vi에서 보낸 조난 신호를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굴복자 전쟁 이후로 녹색 까마귀는 대량의 분석 자료를 도시에 열 번도 넘게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최후의 도시의 시스템 전원이 꺼진 덕분에, 벽 너머로 감지기를 돌리는 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인류의 고향이 아주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공원과 호수, 시장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바릭스는 기계 주먹으로 뼈를 갈았다. 바로 그 감지기가, 지금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위대한 기계가 속박당하는 모습과, 수호자들이… 몰락하는 모습을.

바릭스는 재빨리 까마귀에게 알리려 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네트워크가 일시에 정지된 것이다. 모든 까마귀가 응답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단 한 대뿐이었다. 일그러진 화면에 비친 것은 손이었다. 각성자의 손. 하지만 곧 그 화면마저도 정지되었다. 무언가 느껴져야 한다. 아무 감흥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릭스의 머릿속을 사로잡는 것은, 그의 합성 음성 깊은 곳에서 경고음을 내는 것은 여왕의 계획이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차 커져 가는 두려움이었다.

바릭스는 의자에 등을 기대앉아 생각에 잠겼다.

고대의 감옥은 각성자의 주요 전초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따라서 기갑단 방패병과도 거리가 멀었다. 이 사태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봉쇄 절차를 밟았다.

통신 장치가 울린다. 페트라 벤지가 적은 병력을 이끌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정착지 주민들을 대피시켜 리프의 모퉁이로 사라졌다는, 알고 있지만 다시금 확인된 소식이었다. 감옥으로 지원을 보낼 여유가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심판의 가문, 다음에는 늑대의 가문이더니 이제는 마라 소프 켈이다. 새로운 동포들이 곁에서 사라져 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바릭스는 기계 팔로 뼈 분쇄기를 와지끈 바스러뜨렸다.

3. 단순의 미덕

바릭스는 페트라의 해적들이 가장 최근에 붙잡은 포로들을 감방 구역으로 데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경멸의 남작 표식을 두르고 있는, 에테르에 굶주린 드렉 무리다. 페트라는 근처에서 칼자루를 따라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시샘의 빛이 번뜩였다.

페트라는 감옥에 집착했다. 마치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건 감옥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붉은 군단 잔병들과 리프를 활개 치고 다니는 경멸의 남작 틈에서 각성자가 설 자리는 거의 없었다.

남아 있는 각성자도 거의 없었다.

바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생존은 기다려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아는 건 진정한 켈뿐이다. 페트라 벤지는, 비록 군사적 기량은 뛰어나지만, 켈이 아니었다.

"켈이 부재하는 세상에서 드렉의 저력은 혼란만 부르리니." 바릭스는 비의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오랜 격언을 중얼거렸다. 과감한 통치를 펼치던 그의 여왕을, 그의 켈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뭐라고 했지?" 페트라가 그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혼돈." 바릭스가 대답했다. "이 드렉들이 혼돈을 부른다고 했다."

페트라가 코웃음을 쳤다. "몰락자들이잖아. 몰락자가 있는 곳엔 반드시 수호자가 나타날걸." 페트라는 발길을 돌려 걸어갔다. "심판은 네게 맡기지, 바릭스. 이 경멸의 남작들이 웅크려 있는 구멍들을 찾아내." 페트라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그에게 도로 다가왔다. "배급량을 늘리는 게 어때? 조금… 야위어 보이는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등을 두드려 주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릭스는 페트라의 뒷모습을 보았다. 신체 구조상 할 수만 있다면 그도 미소를 돌려주었을 것이다. 페트라는 언제나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비록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다만 이 경멸의 남작들이 끼치는 위협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단 집정관과 드렉 7명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바릭스는 그녀에게 경고하려 했다. 남작의 무정부주의적인 부름에 점점 더 많은 몰락자들이 응하고 있는 지금은 리프 전역에 공포를 드리우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맞았다. 배급량은 늘려도 괜찮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갈증이 났다. 붉은 군단이 나타난 이래 다른 동족들과 마찬가지로 바릭스도 배급량을 제한해야 했다. 처음으로 자신이 연약하게, 죽음에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늘 그랬듯 그는 살아남을 것이다.

언젠가 혼자 살아남아야 할 날이 다가올 것임을 바릭스는 알고 있었다.

4. 점호

굴복자 전쟁 이후, 힘이 약해지자 경멸자 남작들은 서로 뭉쳤다. 강해지기 위해, 옛 엘릭스니 방식을 수행하는 자는 누구라도 먹이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그들 동족이 살아남는 데 필요한 단 한 가지, 에테르였다. 어떻게 보면 남작들은 새 가문의 수장이 된 셈이었다. 저들만의 의식을 치르는 성직자이며, 저들만의 재판을 여는 심판자였다.

남작들이 주는 공포는 점차 여느 켈에 못지않을 정도가 되었다. 이 이교도들은 엘릭스니가 아니다. 다른 어떤 신도들보다도 '몰락한' 자들이었다. 엘릭스니가 몰락한 "대폭풍" 이전에 심판의 가문이 그토록 정화하려 애썼던 바로 그런 존재다. 이제 그들은 고대의 감옥 깊은 곳에서 썩어 가고 있었다. 케이드의 "여섯번째" 신분이 약속대로 잘해준 것이다.

바릭스의 지팡이가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목을 울렸다. 바릭스는 걸음을 절뚝거리며 감방을 지나쳤다. 서비터들이 원기를 회복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먹이를 먹는 시간이었다.

지나치는 감방마다 바릭스는 증오를 볼 수 있었다. 넘실거리는 에테르 빛 속에서 그들은 수천 번도 더 바릭스의 살을 바르고 팔다리를 자르고 싶다는 듯이 빛났다.

길들여지지 않은 폭주족 야빅스. 유독성 파이크로 질병과 공포를 퍼뜨리던 일당이다.

기술자 일라이크리스. 기갑단 원격 데이터와 중력 덫을 훔쳐 함선을 파괴하고 화물을 실어 내린 다음, 고철이 된 함선들은 조선소로 끌고 가 분해해서 팔아넘겼다.

지옥의 협곡 유령, 눈먼 피르하. 남작의 영토에 환영을 미끼로 부려 어둠 속에서 침입자들을 모두 제거했다.

신을 살해한 교수형 집행자, 레크시스 반. 제물에게서 에테르를 빼앗아 부패한 잔치를 열고 남작과 추종자들을 광란으로 몰아 넣었다.

수완가 아라스케스. 배신자에, 협잡꾼, 모략가이며, 속이고 훔치고 헐뜯는 자다.

손가락 두 개인 미친 폭파범 카닉스. 놈이 소행성대 전역의 암석마다, 구석진 자리마다 지뢰를 설치한 덕분에 리프는 백 배 더 위험한 곳이 되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혐오스러운 마인드벤더 하이라크스. 하이브를 통해 엘릭스니의 정신을 오염시킬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여기에 없는 건 한 명뿐이었다.

피크룰. 이단자이며 광신자. 집정관이 칼릭스 프라임을 섬기던 시절, 바릭스가 터무니없게도 친구라 불렀던 자다. 배신하기 전까지는. 바릭스는 광신자가 죽었기를 바랐다. 케이드는 죽었을 거라고 단언했다. 케이드-6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는가.

바릭스는 혼자서 낄낄 웃으며 복도 불을 껐다. 어둠이 남작들을 다시 덮었다.

5. 미완의 임무

바릭스는 고대의 감옥 경비 구역에서 지난 일을 곱씹고 있었다.

위대한 기계가 깨어났을 때, 그는 마음속 깊이 무언가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고 확신했다. 해답을, 힘을, 뭐라고 얻을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몰락했는지만 다시금 깨달을 뿐이다.

바릭스는 콘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화면 속에선 감옥 거주민들이 감방 벽을 할퀴어 대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못 얻은 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쁘다. 이제 의심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릭스의 목표는 언제나 단순했다. 심판의 가문 깃발, 그가 이 우주에 태어난 목적, 동족들을 한데 모으는 것, 그뿐이다.

이제 빛은 항성계 전체에 흐르고 있건만 나타나는 성과는 없다. 여왕도, 에리스나 오시리스도, 거대한 기계가 엘릭스니를 기억하고 있다는 조짐도 없다. 이 상황에서 무엇에 기대를 걸 수 있단 말인가? 하루하루를 버티는 기본적인 생존. 단지 숨을 쉬고 있기에 살아가는 삶. 여기에는 드렉의 저력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바릭스." 페트라가 통신기 너머로 느닷없이 말했다. "189번 베어링에서 군단 수확기를 탈취했다. 포획팀이 가는 중이야. 생존자들은 투기장 행이고. 받을 준비 해."

그에게 남은 것은 페트라 벤지뿐이다. 바릭스는 그녀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에게 남은 유일한 동지가 아닌가.

바릭스는 통신기를 조작했다. "예, 예, 그러죠. 41번 구역입니다. 데려오시죠. 팀도 맞이하고 새로운… 손님들이 묵을 방도 준비하겠습니다." 바릭스의 합성 음성이 부글거렸다. 재조정해야 할 모양이다.

"알겠다." 페트라가 교신을 끊었다.

바릭스는 벽에 기대 놓았던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선적 구역으로 향하는 먼 길을 걸으며 그는 자신에게 남은 선택지와 정보, 비밀에 대해 숙고했다.

비밀은 심판의 가문을 보호해 주었다. 정보를 혼란스럽게 만들수록 중요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비밀은 가능성을, 장악력을 주었다.

그러나 진정한 심판에는 체계가 필요하고, 엘릭스니의 체계는 가문들이 몰락하면서 함께 붕괴했다. 켈과 프라임 서비터는 수호자들에 의해 하나씩 사라져 갔다. 이제 남은 엘릭스니 문화는 해적과 쓰레기 수집가, 외로운 늑대들 같은, 저 경계 전쟁 이전의 문화뿐이다. 신의도, 명예도 존재하지 않으며… 하등 쓸모도 없는 문화.

엘릭스니 가운데 마지막 희망이 살아 숨쉬고 있기는 했다. 왕들의 켈, 크라스크다. 왕들의 가문은 심판의 가문을 이해했다. 황금기에 경계 전쟁을 함께 끝낸 사이기 때문이다. 크라스크. 그가 꿈꾸는 하나된 엘릭스니의 마지막 희망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락을 취해야 한다.

바릭스는 그록스라는 현상금 사냥꾼을 고용해 크라스크를 찾고 그와 자신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전하게 했다. 그록스는 바릭스가 혐오하는 동족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탐욕스럽고, 거만하고,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심. 이야기를 나눌 때 그록스는 바릭스에게 장황한 모욕을 퍼부었다.

도망자 바릭스라느니, 거지 바릭스라느니, 켈메이커 바릭스라느니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다 쇼에 불과했다. 그록스는 해낼 것이다. 대가도 에테르 나선 네 뭉치와, 고대의 감옥을 면제해 주겠다는 약속이면 충분했다. 거래가 성립되자 그록스는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하! 나한테 맡겨만 두라고, 도망자 씨!" 그록스는 엘릭스니 일상어를 사용했다. 바릭스가 그를 고용한 유일한 이유다. "네 '켈'이 사라지니 절박해졌군그래. 못 들었나?"

바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왕의 가문 켈은 이제 없다, 켈메이커. 미친 집정관 피크룰과 놈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부랑자 각성자의 손에 죽었지. 남은 자들은 지구의 데드존에, 위대한 기계의 조각 그늘에 모여 있다는군. 내 에테르는 어디로 보내 주냐면—"

바릭스는 통신을 껐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위대한 엘릭스니와의 연결고리마저 끊어졌다. 스스로를 켈로 자칭하는 자들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바릭스나 심판의 가문, 또는 가문들을 존중했던 규칙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회오리의 아이들이 죽은 것이다.

그런데… 피크룰이 케이드와 수호자한테 죽지 않았다고? 그록스가 악한이긴 해도 거짓말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피크룰이 살아 있고 크라스크를 죽일 만큼 강하다면… 또, 그록스가 말한 부랑자 각성자는 또 누구일까? 바릭스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피크룰이 살아 있는 한, 리프는 안전할 수 없다. 그는 황급히 알맞은 통신 채널을 찾았다.

"케이드 님. 이 바릭스가 면담을 요청합니다. 당신과 페트라와 한 거래, 미완의 임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6. 어떤 행운

바릭스는 아무 인장도 그려지지 않은 망토를 걸치고 거미의 본거지에 내려섰다. 심판의 인장을 두르고 뒤엉킨 해안에 들어서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거미의 축복을 받아 지난다고 해도 최소 두 번은 붙잡혀 팔다리가 해체될 것이다.

거미 궁전에서 쾌락주의적인 소리가 들려 왔다. 승리의 외침과 패배의 절규를 듣자 엘릭스니 동족 최악 무리가 떠올랐다. 동포들의 타고난 과시욕은 보석과 장신구를 건 도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바릭스는 허리를 낮게 숙이고 군중 속을 찾아 헤맸다. 또 반달이었다. 구석에서 잘못 볼 수 없는 무리가 보였다. 바릭스가 도시 밖에서 보았던, 헌터 선봉대를 둘러싸고 있었던 무리였다.

바릭스는 구경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케이드 옆에 자리 잡았다. 케이드는 그를 알아본 게 틀림없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릭스도 침묵한 채 케이드가 거미의 경호원 한 명에게 미광체 수천 과 보조 무기를 따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케이드는 오른손으로 칼을 돌리더니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얘기할 거면 나한테 술 한 잔 사 주고 하자."

그들은 방 끄트머리에서 조용한 자리를 찾았다. 케이드는 부스에 등을 기대앉아 기다렸다.

"당신은 리프에 봉사하지요?" 바릭스는 자신의 독특한 목소리를 낮추려고 애쓰며 말했다. 지금 합성 음성이 오작동해서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면 얼마나 창피할까. "남작을 잡고. 범죄자도 잡고. 각성자와 페트라를 위해서요."

케이드는 빈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엎었다. 눈빛이 강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엑소가 이렇게 풍부한 표정을 만들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본론을 말해, 바릭스.""

"피크룰. 마지막 경멸의 남작. 놈이 살아 있습니다."

케이드는 두 번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공기 중을 떠다니던 전기 입자가 뿔에 부딪쳐 잘려나갔다. "놈은 죽었어. 확실해. 여기에 뜨거운 걸 한 방 먹여 줬다고." 케이드가 바릭스의 가슴 한가운데를 찌르며 말했다.

"지구에서 봤습니다. 나도 아는 게 있습니다. 정보가 있습니다. 당신도 알겠죠? 엘릭스니만의 방법이 있습니다. 미스락스처럼, 타닉스처럼." 그 이름을 내뱉자마자 바릭스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내 앞에선 두 번 다시 타닉스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 알았어? 그땐 나머지 진짜 두 개 팔도 없애 주지. 얘기는 끝났다. 네 녀석은 악재야. 난 간다." 케이드가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 바릭스는 기계 손을 뻗어 케이드를 붙잡았다.

"미안합니다. 내 접근이 나빴습니다. 부탁이니 들어 주십시오."

케이드는 팔을 뿌리치고는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몰락자를 내려다보았다.

바릭스는 똑바로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자발라한테 데려가 주십시오." 바릭스의 입에서 타이탄 선봉대의 이름이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나한테 정보가 있습니다. 내 얘기에 관심이 있을 겁니다. 당신이 날 데려가야 합니다."

케이드는 눈을 깜박였다. "나더러 널 도시에 데려가 달라고? 꿈 깨시지. 백만 년이 지나도…"

바릭스는 쿵 소리를 내며 망토에 숨기고 있던 손대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밋밋한 갈색으로, 윗부분에 털이 나 있고, 에테르 기술식 방아쇠에 입마개로 조립된 물건이었다. 케이드가 놀라 눈썹을 치켰다.

"신뢰의 증표입니다. 리프의 기념품이죠. 업그레이드되어 있고. 치명적인 놈이죠."

헌터 선봉대는 흥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거, 음. 이게 마지막 물건이야? 이런 물건을 본 지가…"

"거의 그렇습니다. 많이 안 남았습니다." 바릭스의 음성은 침착하고 차분했다.

손대포를 탁자에서 낚아챈 케이드는 가늠장치를 확인해 본 다음, 손으로 몇 번 돌리며 무게를 느껴 보았다. 끙 소리를 내며 만족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린다.

"역시 악재라니까. 가자. 태워 주지."

7. 과대평가

바릭스가 선봉대 사령관을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전에는 호선 감시 카메라에서 발췌한 사진이나 요원들이 찍은 자연스러운 사진으로 봤을 뿐이었다. 어느 쪽도 사령관의 진짜 위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자발라가 육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은 방어구 탓으로, 실제로는 근육이 팽팽하게 잡힌 호리호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발라 앞에 선 바릭스는 알 수 있었다. 자발라는 침착한 자신감과 빛으로 주변 공기를 장악하고 있었다. 마라 소프 이후로는 누구 앞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위압감이었다. 심지어 케이드조차도 이 사람 옆에서는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매혹적인 사람이다.

바릭스는 그의 빛과 침착한 태도 너머로 저 위대한 자발라의 강인함과 함께 자리한 불안감을 엿볼 수 있었다. 바로 그 지점을 노려 바릭스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선봉대 사령관 자발라 님." 바릭스가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펴서 바닥에 댔다. 시선은 마주 응시한 채다. 복종의 의미를 나타나내는 심판의 가문의 자세다.

케이드가 뒤에서 킬킬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바릭스가 힘을 빌려드리고자 왔습니다. 리프를 도와준 수호자들을, 선봉대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자발라가 바릭스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심판의 서기는 많은 것을 읽었다. 의연함과 강렬함, 절박함까지.

"일어나게, 바릭스." 자발라는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바릭스는 명령대로 따랐다. "원하는 게 뭐지?"

"리프의 미래입니다." 자발라가 탐색하는 눈길을 보냈다. 바릭스는 꺽꺽거리며 말을 이었다. "리프 출신은 멸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각성자 자발라여. 몰락자, 굴복자, 붉은 군단. 모두가 리프의 살점을 도려내려 합니다."

"나는 전쟁 후에 페트라에게 제안을 했네." 자발라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무신경하지는 않았다. "결정을 내린 건 페트라였지. 그 후로 사정이 달라졌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바릭스가 부글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 같은 진정한 지도자에게 더 들려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8. 미지의 공간

어둠에 잠긴 미지의 공간 지평선에서 푸른색 빛이 춤을 추는 듯 보였다.

마치 빛이 덩굴손으로 자라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바릭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앞에 놓인 길은 불확실하고 광활하기만 했다. 난생처음으로, 그는 심판이 내부로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 의지는 네 것이어야 한다." 바릭스가 스스로에게 일렀다. "너는 심판의 가문의 마지막 남은 엘릭스니. 동포들의 운명이 네 손에 달렸다. 너는 동포들을 구할 것이다. 몰락자를 지킬 것이다."

네가 거기에 있는 건 실패했기 때문이야.

허공에서 부드럽지만 강한 목소리가 울렸다. 마치 바릭스가 악기인 양 그의 몸을 관통하는 울림이었다.

"내가 지구의 아이들과, 여행자라 불리는 위대한 기계의 축복을 받은 자들과 함께 있는 건, 그들이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네게 위대한 기계는 사악한 거울인데 말이지.

바릭스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추위를 느꼈다.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밀려왔다. 엘릭스니의 최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바릭스는 그저 버티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부드러운 털로 덮인 망토를 걸치고 동료 서기들과 함께 재판을 내리고 있는 기억. 회오리가 몰아쳐 고대의 감옥을 산산조각내고 가문들이 약탈당하는 기억. 창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위대한 기계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자신. 기나긴 어두운 여정.

늑대들과 함께 달아나고, 스콜라스에게 간청하던 기억. 칼릭스 프라임을 섬기고 비밀리에 감추자고 피크룰과 계약한 일. 프라임이 사라지고… 또다시 피크룰이 지평선에서 몰락자들에게 응당한 벌을 준비하는 모습.

네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바로 이곳…

…모든 것이 죽고 새로 시작되는 곳이지.

그러자 새로운 힘이 타올라 그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다. 심판이 그에게—

바로 그때 세찬 경보가 울려, 바릭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통신기에서 페트라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케이드가 돌아왔다.

9. 두 개의 감방

페트라가 주문한 감방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바릭스는 에테르를 마저 끝내고 생각에 잠겼다. 케이드가 드디어 피크룰을 찾아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릭스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가능한 한 모든 힘을 끌어내야 한다.

바릭스는 에테르가 온몸에 흐르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점차 훤칠하고 당당한 자세가 나왔다. 경비가 가장 삼엄한 건물 꼭대기에 도착한 그는 제어판으로 손을 뻗었다. 빈 감방 두 개를 준비하고, 축출된 서비터 두 대를 주문했다. 피크룰을 심판할 생각에 즐거웠다. 준비를 마친 그는 뒤로 물러나 기다렸다.

고함 소리와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죄수들이 건물에 들어섰다. 한 명은 엘릭스니였다. 페트라가 그를 떠밀어 극저온실에 집어넣었다. 감방에 갇힌 몰락자는 비실비실해 보였다. 페트라는 감방 문을 잠갔다.

피크룰이 커다란 몸집으로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보자 바릭스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경멸의 남작들의 구명줄이자, 자신이 한때 믿었던 공모자이며 배신자. 축출 서비터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이단자 집정관의 소중한 에테르를 빨아들였다. 바릭스와 피크룰은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수백 년의 역사가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피크룰이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드가 누더기를 입은 휴머노이드 형체를 끌고 오자, 바릭스는 불안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머리에 자루를 씌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케이드가 자루를 홱 벗기고 휴머노이드를 감방 안으로 던져 넣었다. 각성자 남성이었다.

"거기서 나오지 마!" 케이드가 말했다. 완전히 실패한 농담이었다.

바닥에 무릎과 손을 댄 그 각성자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칼, 푸른 피부, 날카로운 노란색 눈동자.

"바릭스…."

여왕의 남동생, 각성자의 대공, 리프 왕족의 후예. 울드렌 대공이었다.

10. 재회

"전하…." 바릭스가 저도 모르게 경칭을 붙여 불렀다. 거의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바릭스는 대공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평범한,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에 일순이지만 어둠이 춤추는 것이 보였다. 바릭스는 페트라를 돌아보았다.

"페트라 벤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렇겠지. 그게 말이지… 뭔가 이상해졌어, 바릭스. 이성을… 잃으신 것 같아. 가둬 놔. 이 구역 전체를 봉쇄하고. 우리 둘 외에는 누구도 못 들어오게 해.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울드렌 소프는 토성에서 죽었다고, 그렇게만 알려져야 해."

바릭스는 대답을 구하듯 케이드를 보았지만, 케이드는 두 손을 드는 자세를 취했다.

"왜 날 보고 그래. 우리가 찾아냈을 땐 징징이 왕자님이 피크룰과 벌써 찰떡처럼 붙어 있었단 말이야. 둘 다 쏘지 않으려고 무진 애쓴 게 이거야."

페트라는 왕족을 가둔 감방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망설임이 어린 것도 한순간, 그녀는 해치를 닫아 울드렌 대공을 가뒀다.

"바릭스." 케이드가 전에 없이 사근사근한 투로 불렀다. "여기 있는 이 피크룰이 투기장에 오걸랑 나한테 알려 줄래? 내가 이 친구랑 못 끝낸 얘기가 있거든."

"그러죠, 네." 바릭스는 페트라의 시선이 대공을 가둔 감방에 머물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페트라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부끄러움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바릭스가 쳐다보는 것을 알아채고 페트라는 자신을 다잡았다. 여왕의 분노답게 꼿꼿한 얼굴로. 바릭스와 페트라의 눈길이 마주쳤다. 바릭스는 그녀의 혼란과 부끄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친구 바릭스." 페트라의 목소리에 다정함이 담겨 있는 걸까? "저 분은 변하셨다. 저 눈은…" 페트라가 멈칫하더니 다시 말했다. "울드렌이 입을 열거든 귀 기울이지 마. 입에서 나오는 건 참담한 거짓뿐일 테니." 그 말을 끝으로 페트라는 걸어 나갔다. 케이드가 바로 뒤를 따랐다. 그들의 등 뒤에서 구역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바릭스는 한참이나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는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페트라 벤지와 울드렌 소프는 오랫동안 서로를 흠모해 온 사이다. 함께 있을 때는 편안한 분위기였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깊은 애정이 느껴졌었다. 두 사람이 함께 전장에 나가면 그보다 신속하고 효율적이고 위협적일 수가 없었다. 사신과 함께 춤을 추며 맞닥뜨리는 적마다 불행을 안겨 주었다.

바릭스는 울드렌이 대체 어떤 범죄를 저질렀기에 페트라가 심판을 내렸는지 알고 싶었다. 대공이 갇힌 감방문을 다시 열면서는, 페트라가 바릭스 자신이라도 심판했을지 궁금해졌다.

바릭스는 울드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살펴 드리게 되었군요." 바릭스의 팔이 조심스레 울드렌을 쓰다듬었다. 탐색하는 듯하지만 다정한 움직임이었다.

울드렌이 눈을 깜박이더니 바릭스를 응시했다. 아니, 황금빛 눈동자가 바릭스 너머를 응시했다고 해야 할까. 바릭스는 확인 차 어깨너머를 돌아보았다. 물론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님…."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 사이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11. 혁명

그때 서비터가 폭발해 바릭스는 대공의 말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다. 그는 빨리 움직이려 했지만 철사가 삐죽삐죽 솟은 통로에서 발가락 하나가 접질려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머리를 들자 산산조각나 맥없이 누워 있는 추출 서비터가 보였다. 증발한 에테르가 공기 중에 퍼져 씩씩거리며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릭스는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천천히 움직였다. 누가, 아니면 무엇이 나타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피크룰의 감방에서 모든 봉인을 확인한 후 용기를 내 현창을 들여다보았다.

피크룰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전보다 더 강해 보이는 것 외에는. 그는 사악한 웃음을 만면에 띠고 눈을 번득이며 서 있었다. "내 에테르가… 고통스럽던가?" 그는 으르렁거렸다.

바릭스는 이 에테르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색도 더 진하고, 알 수 없는 뭔가로 오염되어 있었다. 그는 마스크를 꼭 조이고 서비터의 잔해를 조사했다. 피크룰에게서 뽑아낸 것이 독극물이 아닐지 두려워하며. 그는 물을 건너듯 안개 같은 가스를 뚫고 이동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에테르처럼 소멸되지 않은 채 불투명하고 묵직하게 계속 남아 있었다.

바릭스는 피크룰의 감방으로 다시 올라갔다. 전송 마이크를 작동시켰다.

그는 피크룰이 고대의 법률을 아직 따르기를 바라며 심판의 확성기로 "피크룰, 아살리 아키소릭스"라고 소리쳤다.

"아, 바릭스. 레인 가문이 거짓말을 일삼듯 심판에 집착하는군." 피크룰은 노숙자처럼 말을 내뱉었다.

"넌 노숙자에 불과해. 쓰레기라고. 이것이 굴복자 최후의 전성기를 누렸던 칼릭스에게 네놈이 한 짓이냐? 지금 그의 피로 숨을 쉬고 있냐고?"

"하! 아직도 내게 칼릭스가 있다고 믿는군. 바보 같으니. 칼릭스는 우릴 버렸다고. 하지만 내 에테르는… 피크룰은 더 이상 기계 에테르의 노예가 아니란 소문은 사실이야. 각성자 아버지의 은총으로 난 진화했다고."

바릭스는 아직도 열려 있는 대공의 감방을 돌아보았다. 각성자 아버지라…

바릭스는 대공에게로 다시 걸어갔다.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더욱 확실하게 들렸다. 이제 울드렌은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를 들으며 그림자 사이로 보이지 않는 뭔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친 악마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대공은 말했다.

"누나, 이제 보여. 누나가 내게 약속했던 비난받는 자들의 무리가…"

12. 불꽃

충성스런 바릭스는 페트라의 명령을 따랐다. 맨 아래층 독방동은 감시관과 사령관 대리 외에는 접근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소한 작업은 전부 그가 처리해야 했다. 식사 배급. 쓰레기 처리 등등 남작 8명과 각성자 대공들을 관리하는 허드렛일을 새로 떠맡게 되어 심판을 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그 구역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근방에 출현하는 해적을 떼어 놓기 위해 감옥의 맨 아래층이 현재 접근 금지 구역이 된 이유를 하루에 세 번씩 꾸며대야 했다. 하지만 소문은 막을 수가 없었다. 페트라와 케이드-6가 중요한 죄수를 몰래 데려왔다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고대의 감옥 최초의 휴머노이드 죄수를 말이다. 하지만 바릭스는 낌새를 눈치챈 이들에게 경멸의 남작을 심판하는 일은 중요한 과정이므로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니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페트라는 소문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페트라가 비밀을 잘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비밀을 캐묻는 사람에게 "쓸데없이 상관 마"라고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소문이 어느 정도 사실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페트라는 테키언 훈련을 재미있게 받아서 여왕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어야 했다.

바릭스는 일과를 처리할 때마다 대공에게 충성을 해야 하는지를 자문해 보았다. 그리고 대공의 헛소리를 들을 때마다 멈춰서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울드렌은 팔을 무릎에 올리고 앉아 똑같은 감방의 어두운 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 흑발에 파묻힌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이제 보여… 그래, 좋아. 아주 좋아."

그는 뭔가를 더 듣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그렇게 하지. 누나, 그는 이미 여기 있어."

그러더니 울드렌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주 편안해 보였다. 잠시 후에 울드렌은 어깨너머로 현창을 바라보았고, 바릭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대공님." 바릭스는 중얼거렸다.

"충신 바릭스로군." 울드렌은 히죽 웃었다. "불꽃 바릭스. 할 말이 있는 건가, 아니면 염탐 놀이를 즐기고 있는 건가?" 그리고는 또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스쳐 지나며 울드렌의 빛나는 눈을 잠시 뒤덮었다. 바릭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포로 얼어붙은 건지, 할 말을 잃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울드렌은 몸을 기울이고 입술에 손가락을 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을 알려 주지, 바릭스. 들어 주겠나?"

바릭스는 승낙의 의미로 아주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켈은 살아 있어." 울드렌은 속삭였다. 그는 좀 더 가까이 기대더니 바릭스가 절대 대답할 수 없었던 질문을 했다. "진정한 충성심은 어디에 있는지 아나, 바릭스?"

울드렌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곧장 어깨너머로 눈을 돌려 고집스러울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던 어두운 구석을 또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물론 바릭스는 믿을 수 있지. 최고의 충신이니까…"

13. 영혼의 속박

바릭스는 자신의 걸작품인 즉석 서비터 체인을 감탄스럽게 바라보았다. 이것이 있으면 미치광이 같았던 옛 친구의 비밀을 마침내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크룰은 옛날이야기 대신 미래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 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 아니면 자신의 죽음의 경계에서 데려와 엘릭스니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내재된 파워를 각성시켜 준 각성자 "아버지"인 울드렌에 대한 이야기. 울드렌은 죽음도 초월하는 파워를 각성시켰다고 말이다. 백성들을 재창조하여, 그들을 버림받은 자들로 만든 빛과 어둠의 우주에서 번성하게 만들어 준 파워를.

바릭스도 그런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 고대의 감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카타콤에서 엘릭스니를 재건하던 시절에 경험했던 느낌이었다. 나중에 이용할 수 있는 "잠재력" 있는 죄수를 자유롭게 찾아다니던 이 "직장"은 이제 그의 집이 되었다. 군체의 에메랄드빛 골수와 시체, 벡스의 분광 바이러스, 사이온 피박자 파장… 이런 여러 가지 비밀스러운 능력들을 축축한 감방 안에서 자유롭게 얻어내서, 정보망을 통해 더 많은 비밀과 교환하거나 각성자를 위한 무기로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크룰의… 돌연변이… 에 대한 비밀만은 알아낼 수가 없었다. 피크룰이 파워를 소유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파워의 증거가 온 바닥에 흩어져 있었지만 계속 실패만 거듭할 뿐이었다. 위층 독방동에 갇혀 있던 파괴된 보초병 서비터와 오그라든 드렉 수십 마리가 그의 "조수" 노릇을 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피크룰의 몸속에 있는 차갑고 비정상적인 액체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백성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에테르처럼 전송하거나 복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릭스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피크룰을 경기장으로 보내 케이드-6과 대결시켜서 경멸의 남작의 유산에 끝장을 내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릭스가 평소처럼 순찰을 돌던 중 울드렌이 갑자기 말을 걸어온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대공의 눈빛은 의외로 평온했다. 그가 토성의 고리 위로 사라지기 전에도 볼 수 없었던 또렷한 눈빛이었다. 그날 이후 바릭스는 울드렌을… 다시 보게 되었다.

체인도 마찬가지였다. 피크룰의 오염된 생혈을 기존의 에테르와 섞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이 서비터에는 바릭스가 비축해 둔 에테르가 70% 채워져 있었다. 이게 실패한다면… 바릭스가 모든 것을 걸어서 실패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바릭스는 레버를 당겼다.

서비트 체인의 소음이 점점 커졌다. 하지만 바릭스에게 들리는 건 계속 메아리치는 울드렌의 사악한 질문뿐이었다. 진정한 충성심은 어디에 있는지 아나, 바릭스?

하지만 그것이 작동했더라면 피크룰을 치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바릭스가 의심했던 게 사실이고, 피크룰의 오염이 대공의 고통과 연관된 것이었다면… 울드렌 역시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릭스는 페트라에게도 말하려 했지만 페트라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대공에겐 실험을 하면 안 돼."

"대공은 편찮으시다구. 각성자의 눈을 피해 대공을 여기 숨겨 놓는 건… 옳지 않아. 옳은 일이 아니라구."

"난 결정했어, 바릭스."

바릭스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충신 페트라 님," 바릭스는 이죽거렸다. "카말라 리오르가 중얼거렸던 말이 사실인가 보네?"

페트라가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울드렌은 내가 처리해. 넌 손끝 하나 댈 수 없어."

페트라는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날 이후 바릭스는 페트라를 만나지 못했다.

서비터 체인과 개인적인 생각에 온통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14. 충성의 자리

자 또 다른 회오리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몰락자가 아니었다. 피크룰은 그들을 자신의 경멸자라고 했다.

피크룰은 그의 뒤에서 계속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그 순간 경멸자는 바닥으로 떨어져 또다시 시체로 바뀌었다.

"너희들의 이야기, 켈, 가문은 모두 고대의 선조와 스케이스처럼 곧 잊혀질 것이다." 피크룰은 바릭스가 아끼는 심판의 확성기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바릭스는 감방에 더 가까이 다가가 감방 현창에 얼굴을 갖다댔다.

피크룰은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바릭스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침묵이 허공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넌 진정한 충성심이 어디 있는지 안다더군."

광신자는 현창에서 물러서서 기다렸다.

충성심이라. 진정한 충성심.

그는 마라의 추억이 떠오르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 대신…

레인 가문의 예언에 대해 생각하고 말았다.

켈 중의 켈이 나타난다는 예언.

며칠 후 바릭스는 마지막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그는 중앙 통제소로 향했다. 그리고는 보안 시스템 테스트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고 결과를 토대로 몇 가지를 조정했다. 그리고는 일일 교대 근무 명단을 수정하여 완성했다 마지막으로 감옥에 마지막 남은 상위 서비터와 비밀 대화를 나누었다. 고대의 감옥에는 감시관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페트라와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그날 밤 고대의 감옥은 혼돈 상태에 빠졌다.

"네가 기다리는 때가 올 것이다, 바릭스."

울드렌은 늘 앉던 곳에 앉아 늘 보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동생이 알려 주었다. 여동생이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바라는 건 하나뿐이다."

"아닙니다, 대공님." 바릭스의 걸걸한 목소리에는 오만 가지 감정이 묻어났다. "저야말로 대공님께 마지막으로 봉사할 것이 있습니다."

바릭스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자리를 떴다.

경적 소리가 들렸다. 감옥 상위 서비터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바릭스의 음성으로 울려 퍼졌다. "보안 시스템 고장. 긴급 종료 및 재부팅 개시 중."

감옥은 잠시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였지만, 곧 비상등이 독방동을 밝혔다. 그의 주위에서 경보가 울리고, 경고등이 켜지고, 공압 장치가 쉭쉭거리고, 이 독방동의 냉동 감방들이 열리기 시작하며 초저온 액체가 증발하여 안개로 피어올랐다.

바릭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최대한 빨리 출구로 갔다. 돌아보지 않아도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경멸의 남작들과 대공 울드렌이 풀려난 것이다.

고대의 감옥 내 모든 죄수들도 풀려났다.

바릭스는 난장판이 된 감옥에서 도망쳐 나와 페트라와 케이드가 대공 울드렌을 몰래 데려왔던 비밀 통로로 빠져나갔다. 감옥에 보관되어 있었던 에테르를 가득 실은 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바릭스는 걸어가면서 무사히 빠져나간 후 감옥 중계기를 통해 전송할 명령 두 개를 녹음했다. 첫 번째 녹음 파일에서는 음성 합성을 끄고 깊게 울리는 확성기를 통해 명령을 전달했다.

심판의 소환에 몇 명이나 응답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도는 해 봐야 했다.

두 번째 녹음 파일에서는 음성 합성을 다시 켰다. "날더러 배신자라고 하더군. 난 최고의 충신이었는데. 나도 소문을 다 들었지. 벌레 같은 놈이라는 소문을. 그는 말을 멈췄다. "내가 몰락자라는 얘기를."

그는 경사로를 따라 배를 향해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교각 쪽으로. 그가 지나가자 늑대와 같은 색의 반달이 인사를 했다.

"나도 다 들었어. 심판의 가문은 항상 듣고 있지. 선택의 여지는 없어. 가문을 합쳐야 해." 배의 교각에 도착한 그는 다시 말을 멈췄다. "심판자는 항상 듣고 있다."

"거대한 기계가 심판을 내렸다. 엘릭스니는 싸움에 졌다. 증오에 진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울컥했다. "이 증오를 참을 수가 없다." 그가 말하는 사이에 배의 엔진이 부르릉거렸다. 장막을 통해 감옥에서 울려 퍼지는 폭발음이 들렸다. 그가 통제하던 곳이 무법천지가 된 것이다. 그가 탄 배는 만의 장벽을 통과해 육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달리 갈 곳이 없다. 이곳에는 다른 사람도 없다." 그는 몸을 쭉 펴고 일어섰다. "그래서 나는 켈 바릭스가 되겠다. 심판의 가문은 엘릭스니."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반복해서 말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엘릭스니는… 일어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