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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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지식 책은 행성 곳곳에 숨겨져 있는 결정화된 생각들을 찾아야만 얻을 수 있다.2. 복수 II
마라가 선출된 대표들을 소집해 회의를 연 곳은 신성한 불이다. 리프에 버려진 배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선체 중 하나로, 4 베스타 거주지 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마라가 언젠가 함대를 전부 이끌고 가서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눈앞에서 희망과 두려움에 찬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그런 날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고향의 그림자만 보고도 모두들 달려가 버리면 어떡하나. 기나긴 세월과 수많은 별들을 거쳐 이곳에, 지구 가까이에 도달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만류할 수 있을까?"마침내 찾아냈다. 인류를, 우리의 선조를."
기쁨과 감격의 함성이 터지자 오싹한 전율이 마라의 등골을 타고 흐른다. 이들 각성자 대부분은 지류 태생이다. 어려서부터 인류와 여행자에 대한 신화를 들으며 자랐다. 그들에게는 이야기책 속 주인공들이 마법처럼 나타나 현실이 된 것이다.
"남은 인류는 하나의 정착지에 모여 사는 모양이야." 마라가 고갯짓을 보내자, 울드렌이 손가락을 튕겨 화면을 띄운다. 겹겹이 둘러싸인 구름과 안개를 지나 맑은 하늘이 홀로그램에 드러나고, 다음 순간 선명한 풍경이 나타난다. 하얗게 덮인 산과 도시, 그 위에 부서진 채로 걸려 있는 거대한 구체까지.
"정지." 울드렌이 명령한다. "저게 여행자다."
흥분에 찬 웅성거림이 들리자, 마라는 울컥해서 고개를 쳐 든다. 이 숭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곳에 떠 있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휴면 상태나 다름없는 여행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세히 관찰하면 마치 몸에서 도려내 따뜻한 물속에 던진 심장처럼, 펄떡이며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지 않은가?) 여행자가 정녕 누구든 지킬 수 있다면, 어째서 조그만 정착지 하나만 보호하고 있나?
실라의 딸 에실라가 군중 가운데 일어난다. 키가 작아 혼자서는 어렵지만 주변에서 열성적으로 에실라를 위로 올려 준다. "뭘 기다리고 있는 거죠? 이걸 찾으러 온 거잖아요! 저들한텐 우리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속한 곳이고요!"
울드렌과 마라가 눈빛을 주고받는다. 울드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화면이 이어서 재생된다.
나무 꼭대기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덮개가 흐려지더니 여럿으로 나뉜다. 마치 뚱뚱하고 날개 없고 성난 잠자리처럼 보이는 적갈색 항공기가 박차올라 신호를 수신하기 위해 기어오른다. 울드렌이 머릿속으로 신호를 보내 카메라가 표적을 따라가게 한다. 상대방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라는 울드렌이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을 상상한다.
잠자리 비행선이 조그만 바늘들을 투하하자, 바늘들은 곧 지저분한 주황색 불꽃과 함께 산개해 울드렌을 향해 날아온다. 울드렌은 방 안 전체에 들릴 정도로 신음 소리를 내며 급격히 방향을 틀어 위로 날아올랐다.
"저 녀석들은 몰락자들이다." 울드렌이 말한다. "우주의 쓰레기 수집가이자 해적질로 생계를 부양하는 족속이지. 저곳에 아주 오랫동안 있으면서 인류가 최초로 몰락하면서 남긴 거대한 정착지는 대부분 약탈했어. 아마 지구에는 몰락자가 인간보다 더 많을걸." 울드렌은 턱을 들어 목을 가로지르는 창백한 흉터를 보여 주었다. "나는 착륙해서 포로들을 찾으러 갔다. 놈이 칼 두 자루를 빼 들었을 때 대비가 되어 있었지. 그런데 알고 보니 팔이 두 개가 더 있더군."
신경질적인 웃음소리.
"그뿐만 아니야." 마라가 손짓으로 심우주 수동 센서 데이터 창을 불러내며 말을 받았다. "놈들은 태양계 전체를 뒤덮었어. 목성과 금성 인근에서 놈들의 함대와 성간 우주선을 탐지했다. 화성에는 가까이 가지 않지만, 거긴 벌써 다른 외계 종족이 장악했기 때문이지. 수성은… 뭐, 보는 바와 같다." 잿더미가 된 태엽 장치가 나타나자 공포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다. 정원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물체다. "벡스가 한 일로 추측된다. 함선첨탑의 위협 색인에 포함되어 있었던 기계 종족이야."
저명한 역사가인 에실라는 사람들에게 호소의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니까 우리가 도와 줘야 합니다. 안 그런가요? 우리가 가야 해요! 우리가 가진 함선들과 기술로 변화를 줄 수 있을 겁니다."
"안 돼." 마라는 두 손을 움직여 투사된 이미지를 없앤다. 간밤에 이 문제로 씨름하느라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덕분에 슈어와 침대에서 뒹굴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자신 혼자 내려야 하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를 드러낼 수는 없다. 몰락자들이 우리를 추적해 올 수도 있으니까. 정보가 더 필요해. 우리의 주된 목표는 이곳 버려진 리프 지역을 보호하고 인구와 산업을 자력으로 일으키는 것, 그다음 태양계 정찰이어야 해."
"마라 님, 우리를 이곳까지 데려다 주신 것도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에실라가 한숨을 쉰다. "누가 죽어서 당신을 왕위에 올렸는지 아십니까?"
마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속으로 생각한다. 모두가 죽었어, 에실라. 우리 모두가 죽어서 날 왕위에 올린 거야.
3. 복수 III
"상황이 안 좋아요." 슈어 아이도가 말한다. 마라가 이미 아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피와 눈물을 닦아내 동족들을 둘로 나누는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 마라에게 보여 주는 귀중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리적인 상처가 아니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울드렌의 상처를 돌보며 조그만 몰락자 금속 파편들을 연구를 위해 뽑아내고 있긴 하지만.) 리프의 균열, 또 다시 분리되고 있는 분립을 뜻한다. 마치 지류 각성자들을 마라의 백성들로부터 떼어냈던 그 지진이 이제 와선 여진을 일으키는 것 같다.이렇게 될 줄 알았어야 했다. 지구에 대해 말해 주지 말았어야 했다. "얼마나 안 좋은데?"
슈어는 금속이 녹아내리면서 붉은 화상으로 기다란 선을 남긴 울드렌의 단단한 내장을 콕 찌른다. 울드렌은 마취된 상태에서도 슈어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마지막 회의를 기준으로 보면 탐험대의 30% 정도가 지구로 가고 싶어 해요. 891명한테 물어보면 80% 정도가 되겠죠." 지금은 891명이 안 되지만 말이다.
마라는 욕설을 내뱉고 응고된 피투성이 화산암재를 남동생에게서 떼어냈다. "용납 못 해. 그들의 기술을 잃을 수는 없어." 유전자도 마찬가지다. 각성자는 이 혹독한 우주 환경에 아직 적응하지 못 했고, 어머니들은 여전히 자녀 계획의 초기 단계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유전자 공급원을 폭넓게 유지해야만 했다. "게다가 몰락자 놈들이 진로를 역추적해 우리를 찾아낼 거야."
"그러게요." 슈어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때가 바로 제가 죽는 날이겠죠."
언어는 치명적이다. 마치 진실이 드러나듯, 카드 앞면을 펼치듯 마라의 의식을 후려친다. "용납 못 해!" 마라가 소리치고, 두 사람은 나란히 웃음을 터뜨린다. 마라는 고개를 내젓고는 딱딱거리며 말한다. "슈어, 그건 모르는 일이야. 아무도 그런 건 알 수 없어."
"난 알아요. 어째선지 모르지만 알 수 있어요. 내가 선택할 만한 일입니다. 반론의 여지 없이 영웅적인 행동이 될 테고요. 그거면 충분해요."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원래라면 지금 나누고 있어야 할 개인적인 대화와 거기에 담겼을 날것의 감정으로부터 회피하며 마라가 의견을 제시한다. "네가 몰락자의 공격을 받을 때 죽는다면, 이 사람들이 지구로 달아나는 걸 내가 막지 못한다는 뜻이잖아. 그러면 몰락자에게 추적당해 우리도 파멸한다는 뜻이고." 그녀는 이미 우주가 운명이나 파멸을 어떻게 수용할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그것들을 무너뜨릴지 복잡한 모델을 세우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슈어는 울드렌의 상처에서 양피지처럼 얇은 죽은 살점을 떼어내며 말한다. "들어 봐요. 난 여왕의 호위대잖아요. 언제나 내 최후는 끔찍한 죽음일 거라고 생각했다고요."
"난 여왕이 아니야."
"그게 문제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녀가 울드렌의 가슴을 톡 치자 보라색 멍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나저나 동생과는 왜 그래요? 동생 얘기는 통 안 하잖아요. 생각조차 안 하는 것처럼 보이고요. 동생은 당신을 위해 몸도 내던질 기세던데. 하나뿐인 사랑하는 누님이 동생과 수백 년을 함께 살면서… 어떻게 미소 한 번 안 지어 주는 거예요?"
비밀 덕분이지. 마라가 속으로 생각한다. 서로 간에 비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만의 행복한 상상으로 간극을 메울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두 배를 빈틈없이 엮어 버리면,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들 때 서로를 산산이 부수게 되지 않겠는가. 느슨하게 엮이면 배를 교묘하게 조종할 여유가 생긴다. 필요하면 재빨리 떼어내기도 쉽다.
마라는 슈어가 한 예언을 다시 떠올린다. 파편을 해부용 접시에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그녀가 말한다. "넌 죽지 않아. 내가 허락하지 않겠어."
4. 복수 IV
우주에서는 수많은 재난이 일어날 수 있지만, 폭동은 그 중에서도 최악이다. 균열은 막으면 된다. 불은 소화시키면 되고, 전염병은 격리하면 되고, 방사선은 봉쇄하면, 열은 배출하면 된다. 하지만 폭동은? 폭동에는 의지가 담겨 있다. 혼란과 기발함으로 어떤 대응책이라도 좀먹을 수 있는 의지가.마라는 증발한 냉각수로 가득 찬 방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 자세를 낮추고 호흡기를 얼굴에 갖다 댄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켈다 와지의 마지막 메시지와 첨부된 데이터뿐이다. "마라 님. 역인 효과의 위력이 가장 강한 곳은 당신 주변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당신이 중심지예요.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묘한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도 없겠군요. 마라 님, 방사능 붕괴를 기폭제로 시뮬레이션 폭탄을, 각성자에게 위험한 폭탄을 사용할 때, 당신 주변에서는 기폭제 원자가 천 배로 덜 붕괴됩니다. 당신이 가까이에 있으면, 글자 그대로 더 안전해지는 거죠."
폭동 한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 백성들을 보호해야 한다.
엄청난 진동이 거주지 건물을 울리더니 무시무시한 전율을 일으키며 무언가가 리프를 빠져나간다. 함선이다. 함선이 떠나고 있다. 실패한 것이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마스크에 가쁜 숨을 토한 마라는 편두통 예감에 몸을 움츠리며 증강을 활성화시킨다. 바로 이런 때를 위해 유테크들이 붕괴된 지류 물질을 추출해 재가공하여 만들어 준 비상 장치인 보강기다. 수동 명령을 내려 함선 내 시스템을 중지시킬 생각이다.
하지만 마라는 뒤늦게 깨닫는다. 그 배는 인양된 인간 함선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명령이 먹힐 리 없다.
좌절감에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마라는 통에 담긴 차가운 공기를 빨아들인다. "슈어."
"여기 있어요." 라디오에서 속삭임이 답한다. "주임실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어요. 몇 명 어깨에 쐈는데, 상황을 눈치챈 모양입니다."
"보내줘. 한 척이 떠난 이상 나머지는 붙잡아 봐야 의미가 없어. 위치는 벌써 발각당했다."
"알겠습니다."
"전체 방송으로 전해. 누구든 리프를 떠나길 원하면 보내 주겠다고.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야." 그녀는 옆으로 굴러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소용돌이치는 냉각수 기체를 올려다 본다. 여러 얼굴들이, 미래가, 지금 막 잃어버린 생명들과 앞으로 잃을지도 모르는 목숨들이 보인다. 사지로 데려왔다는 점에서 동족들을 죽으라고 몰아낸 거나 다름없지만, 이렇게 빨리 벌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 슈어가 말한다. "이미 다들 알고 있습니다."
"뭐?"
"폐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슈어 아이도의 음성에는 감사에 가까운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들렸어요, 마라 님. 제게 말을 거셨다고요."
5. 복수 V
분열된 각성자는 리프 출신과 지구 출신으로 또 다시 나뉘었다. 떠난 이들은 잃어버린 역사의 폐허를 찾아다니고, 여전히 적대적인 세계를 붙들고 있는 친척뻘인 인류에게 원조를 제공해 주었다. 인류의 눈에 이들 각성자는 잃어버린 무기와 잊혀진 산업과 의약품을 장비하고 나타난 구원군처럼 보였다. 외계 행성에서 태어난 식민지 주민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해석하고 희망의 징조로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진실과 전혀 거리가 먼 해석도 아니었다. 그들을 본 이들의 눈에는 밤하늘도 어둠만 도사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진실해지고 종종 인류와 결합하기도 했으며, 몇 세기를 거치는 동안 많은 이들이 지류를, 또는 심지어 리프를 잊기도 했다. 하지만 영혼에는 언제나 갈망이 웅크리고 있었다. 소행성대에 있는 머나먼 그곳, 자신들의 여왕이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항로가."벌써 변화가 나타나고 있답니다." 각성자가 지구에 처음 발을 디딘 지 얼마 되지 않아 슈어가 마라에게 말했다. "의약품, 깨끗한 물, 건축 자재만 공급해도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겠죠. 해가 지나기 전에 전원이 사망한다 해도 인당 인간 열 명에서 스무 명 정도는 살릴걸요."
"그렇지." 자부심과 씁쓸한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마라가 말했다. "얼마든지 성인군자로 기억하라고 해. 신념을 져버리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살릴 수 있었을지는 비밀로 묻어 두자고." 마라는 잘 알고 있었다. 각성자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귀한지, 얼마나 많이 희생시켜야 할지를. 보다 작은 목표에 낭비된 영혼들을 그녀는 애도했다.
몰락자가 습격한 그날, 마라는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견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말을 걸 수 있는 군주를 모두들 두려워했던 탓이다. 하지만 그녀의 힘과 통치권을 부인하는 것은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그녀의 이름 아래에 두 세계 사이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거부하면 스스로의 선택권도 거부하는 꼴이었다.
"각성자들이여." 마라가 말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힘을 손에 넣기를 주저했다. 그 탓에 여러분 1/3이 사라졌다. 우주가 내게 요구하는 모습을 더는 부정할 수 없구나. 나는 여러분의 유일무이하고도 적법한 여왕이다."
그녀는 다른 자들과 대등한 척한 것이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알았다. 동생에게 해당되었던 것은 다른 각성자들에게도 모두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경이감을 느낄 비밀이, 영혼 깊은 곳에 품은 수수께끼와 조화를 이루는 비밀이 필요했다. 완벽하게 이해하는 존재는 따를 수 없었다.
공식적인 대관식은 추후에 지을 적절한 장소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처음에 마라는 아직 치르지 않은 대관식을 위해 왕관을 쓰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관측할 수 있는 우주를 둘러싼 사상의 지평선 고리가 자신의 왕관이라고 주장했다.
마라는 켈다 와지를 비롯해 그곳에 남은 유테크들에게 말했다. "내 테키언들에게는 새로 얻은 능력 및 여행자의 유물과 관련된 모든 영역을 탐사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이 부여될 것이다. 순수 과학의 영역에서 살던 시대는 지났어. 신비와 마법의 논리가 필요해."
한 시간도 안 되어 은신했던 몰락자 범선이 모습을 드러내고 4 베스타를 향해 감속을 밟았다. 팔이 네 개 달린 포식자들은 지구로 향하는 함선 하나를 잡고 그 불규칙하게 변경시킨 진로를 역추적해 리프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들은 파란색 피부의 유인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 찾고 있었다.
물질응집성 총이 함선을 향해 일제히 발사되었다. 고대의 분노로 물질을 상대성 핀머리로 압축한 것으로, 아무리 강대한 배라도 순식간에 함락시킬 수 있는 무기였다. 재장전도 재충전도 불가능한 무기를 낭비하는 일이었지만, 지휘권을 잡은 남작은 이미 소형선을 씨앗처럼 흩뿌리고 있었다. 상륙한 몰락자 침입자들은 리프를 뒤덮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각성자는 어리거나 불멸에 가깝거나 관계 없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 달아났다.
마라, 울드렌, 슈어 아이도는 최대한 인원을 모았다. 슈어는 강화된 전투 의체를 입고 싸웠으나, 약해 보일 필요가 있었던 마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은발을 휘날리며 스스로를 적에게 내던졌다. 사용하는 무기도 권총과 단검이었다. 그녀의 남동생은 유령처럼 옆에 달라 붙어 행동을 같이 했다. 동족들은 그들의 소심함에 부끄러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종종걸음 치는 외계인 침략자, 몰락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수치심을 느꼈다. 코웃음 한 방과 소총 한 발 감에 불과한 왕족이라니, 모욕적이었다. 각성자들의 눈에도 놈들의 절박함이 보였다. 팔다리가 뭉개진 드렉이 힘없이 비틀비틀 나아가는 모습, 벽에서 패널을 벗겨낸 반달이 전투에서 움찔거리는 모습, 자기네 대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양에 힘쓰는 모습들을.
무장한 슈어 아이도는 거미 전차 위의 무중력 전장에서 몰락자 남작과 맞닥뜨렸고, 놈을 쏘아 죽였다. 흔들림 없는 총알 한 발이 놈의 판금과 목을 관통했다. 에테르가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진공 속에 흩어졌다. 슈어는 신성한 불의 선체에 달라붙어 있는 거미 전차 위에 내려섰다. 그녀는 환희로 웃음을 터뜨리며 전차의 총열을 가르고 장전된 탄알을 내던졌다. 다음 발사될 탄알은 신성한 불의 주 거주 북으로 향할 것을, 그리고 자신은 오발로 처참하게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전차가 포탄을 발사했고, 포탄은 폭발했다. 슈어 아이도는 아무 해도 입지 않고 공중에 내팽개쳐졌다.
"저기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녀가 경이감을 느끼며 말했다. 머릿속으로는 여왕의 미소 짓는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6. 목적 I
마라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흩어진 동족들을 고향으로 불러 보았다. 습격 사건 이후 리프에 대한 책임감, 집으로 돌아와 자신들로 인해 입은 피해를 복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깨달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마라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켈다가 개발한 보강기를 이용해 기계 마녀들이 마라와 동족들의 결속을 증폭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파묻혔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의미에서 각성자의 안테나는 민감하지만, 온갖 소음 속에서 마라의 호소를 듣기는 어려웠다. 통신 기술자들이 마라에게 '폐하'나 '여왕님'을 붙이는 걸 자꾸 깜박하는 탓도 있었다."희소식이 있습니다." 울드렌이 큰 낭패를 겪고도 살아 남을 때마다 으레 그렇듯 음울하게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린과 함께 몰락자 통신 기록을 살펴봤는데, 그 남작 놈은 우리 위치를 켈에게 전송하지 않았더군요. 상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우린 발각되지 않았어요."
"남작이 시간 지연 신호기를 심어 놨을 수도 있어." 마라가 주의를 주었다. "얕봐선 안 된다. 우리보다도 공허에서 오래 산 녀석들이야."
"전 벌써 존경마저 느끼는걸요." 울드렌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너무 많은 걸 잃어버린 자들이에요. 어떤 놈들은 스스로 팔다리를 자르는 의식을 치르더라니까요. 팔다리를 재생시킬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말입니다. 설령 우리가 서서히 수가 줄어 멸종에 이르더라도 몰락자는 우리를 초월해서 살아남을 겁니다."
마라는 건조한 기분으로 동생이 마침내 동족을 찾았음을 마음속에 기록해 두었다.
한편 슈어 아이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살아났다는 기쁨과 이젠 죽을 날을 알 수 없다는 슬픔을 동시에 느끼는 모양이었다. "당신 안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군요." 슈어가 마라에게 말했다. "당신 덕분에 나는 살아 있어요." 그녀의 강인한 활과 활줄, 자신의 다리와 반대편 팔에 감긴 팔다리를 보며, 마라는 슈어가 살아 남은 것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이윽고 마라는 알리스 리가 신정론 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팔라딘을 지명해 새로운 군대를 감독하게 했다. 또한 해적처럼 솜씨 좋은 우주 뱃사람들을 길러내 소행성대를 극도로 비밀스럽게 탐험하고 각성자 함선이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항로와 보급품 저장소를 마련하게 했다.
무엇보다 동생에게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임무를 맡겼다. "두 번 다시 내 백성들을 흩어지게 할 수는 없다, 동생아. 차디찬 원형 거주실과 베스타의 굴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문화를 일궈야 한다. 우리 자신들의 신비에 대한 경이감과 자부심으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실이. 문화를 번영시키기로는 도시 만한 곳이 없지."
"한 자리에 모이면 표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울드렌이 지적했다.
마라도 이 문제를 고려했고, 해답을 찾아냈다. "나가서 이 세상 어느 세력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힘을 찾아오너라. 내게 가져오면 그것을 주춧돌로 삼아 각성자가 이제까지 지나온 것과 다가올 것에 대한 꿈을 꾸는 도시, 새로운 도시를 만들겠다."
울드렌은 청색 편이 유령보다 빠르게 세계 곳곳을 항해했다. 이윽고 리프로 돌아왔을 때는 손바닥 만한 생물을 데리고 있었다. "보세요, 누님. 스스로를 진실로 만드는 거짓입니다. 아함카라라고 하지요."
7. 목적 II
마라는 홀로 숙주를 본떠 사용명을 리븐으로 정한 어린 아함카라와 계약을 맺었다. 남다른 의지와 목표 통합으로 우리가 저주의 찬가라고 부르는 사건으로부터 각성자를 구해낸 것도 마라 혼자였다. 마라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소망한 대로의 현실'이 거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백 년에 걸친 목적과 인내심, 그리고 강물이 마침내 목표한 바다에 이르기 위해 그러하듯 똑바르지 않은 길에 자신이 있었다. 완전한 자아에서 몰아의 상태에 이른 자들에게 복이 있으라. 가장 밥맛 없는 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기만의 가능성은 배제하는 자들이니."누님." 여왕의 남동생이 말했다. "왜 저는 아함카라와 대화하지 못하게 하시는 거죠?"
"이건 나만의 비밀이니까." 여왕 마라가 대답했다. 동생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누메라고 불리는)과 '곧 다다를 자신'(커스트라 불리는)의 간극을 좁히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하는 바깥 세계로 가거라."
그때 켈자 와지와 에실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슈어 아이도가 마침내 여왕 앞에 나아갔다. 슈어는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폐하, 켈다 와지에게 들으니 폐하께선 신이라고 하더군요. 폐하께서 소망하시는 바와 현실에 차이가 없다고요. 하지만 저는 현실로 이루어지기 전에 폐하께서 소망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에실라의 말로는 동생 분이 절대로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을 간직하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으론 그 비밀이란 이것 같습니다. 폐하께선 지금 신이십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신이 되실 텐데, 신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동생 분은 신이 아닙니다. 영원이 신이 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폐하를 숭배해야 할까요?"
"슈어." 마라가 무릎을 꿇고 떨리는 두 손으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움켜 잡았다. "슈어, 나를 숭배하면 그날부터 넌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숭배란 모든 힘을 내려놓고 복종하는 행위인데, 나는 내게 힘을 휘두를 수 없는 자를 사랑할 수 없어."
이때 아함카라가 마라의 목을 스르르 감고 하품을 하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런 것'과 '그러기를 바란 것' 사이에 간극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슈어 아이도가 말했다. "그럼 저에게는 아직 신이 아닌 것으로 하지요."
결국 마라가 미래에 무엇이 될지가 두 사람의 등을 떠밀기는 했지만, 친구가 사랑하는 벗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기회를 잡으라고 재촉하듯 다정하고 행복한 떠밈이었다. 그들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8. 독재적 살해 I
마라의 죽음은 바로 이X
기호에서 시작되었다. 에리스 몬, 오시리스, 톨란드, 그밖의 부수적인 것은 이 장엄한 자결 뒤의 일이다. 리프가 벡스와 기갑단, 몰락자와 군체가 잠정적으로 엮이게 되는 것도, 늑대의 가문이 인류 최후의 도시를 정복하려 지구로 방향을 돌린 순간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 또한 뒷날의 일이다. 뒷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펼쳐지리라. 아함카라와 꿈의 도시의 창조, 리프 전쟁의 분노, 여왕의 남동생 울드렌이 검은 정원으로 떠난 모험, 그리고 품위 문제로 처음과 끝이 통째로 잘려 나간, 또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루트81 부로 편집된 거대 음모들.
마라가 불현듯 꿈에서 깨어나는 이 순간부터 시작은 시작된다. 테키언들은 안개가 자욱하고 겨울처럼 차디찬 방에 그녀와 함께 있다. 돌아올 때는 비틀거리며 더듬더듬 재동기화하고 있었다.
마라는 완전한 단순성과 완전성에 대한 생각과, 이빨이 되어 그녀를 문 생각을 꿈으로 꾸었다. 그 생각은
X
와 같은 모양의 상처를 남겼다. 마라는 수정 종이 한 장을 잡고 손을 휘둘러 단단한 수용형으로 변환한 다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검과 폭탄에 대한 꿈을 꾸었다.' 자기 연마하는 칼에 대한 꿈을 꾸었다. 스스로를 어찌나 훌륭하게 깎았는지, 세상을 꿰뚫고 스스로 세상이 되는 칼이었다. 자기 연마하는 칼인 까닭은 쉼 없이 스스로로 스스로를 갈기 때문이다. 이 칼을 지닌 죽음에 대한 꿈을 꾸었다. 또는 죽음과 한 몸이 될 만큼 밀접한 동맹을 맺어 예리함보다 더 예리한 칼날이 아니면 구분할 수 없는 어떤 존재다. 죽음이 칼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베며 모든 것은 내게 베이노라. 아이아트."
그리고는 죽음이 폭탄을 베니 폭탄은 폭발하지 않고 그대로 쪼개졌다. 폭탄 안에 내가 있었다. 나는 죽음이 곧 벤다는 동작이며, 벤다는 동작밖에 할 수 없음을 알았다.
형태와 미끄러짐. 나는 셀룰러 오토마타 게임이라는 형태로 존재에 대한 꿈을 꾸었다. 이 은유에는 오직 두 가지만이 존재한다. 게임 세계 안에 존재하는 형태와 게임 세계의 규칙이다. 규칙이란 곧 삶과 죽음의 규칙이다. 나는 검이 게임 세계 안에 존재하는 형태에서 벗어나 형태를 조형하는 규칙이 되고자 하는 욕망임을 이해했다. 이 규칙에는 오직 삶과 죽음만이 있다. 다른 결과물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비밀을 지키지도 못한다. 이 규칙에 맞서는 것은 곧 다른 게임을 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한 형태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곧 이를 것. 죽음이자 규칙인 검이 복잡함을 찾아내고 그것을 베어 그곳에 내재된 단순함을 드러내는 꿈을 꾸었다. 나는 우리가 비밀로 가득한 복잡한 존재이기에 머잖아 베일 것임을 알았다. 그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휘둘러질 것이며 나는 막아야 했다.
폭탄이 검을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을 죽음으로부터 분리해내는 규칙은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는가?
"꿈의 도시로 가서 오라클 엔진을 사용해야겠다." 마라가 테키언들에게 말했다. "함선을 준비해라."
9. 독재적 살해 II
열 번에 한 번 더 마라는 오라클 엔진에게 죽음인 검이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열 번에 한 번 더 오라클 엔진이 보여 준 이미지는 그녀의 가족이었다.처음 보여 준 사람은 슈어 아이도였다. 웃는 얼굴을 한 슈어는 강인함으로 빛났고,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다음은 남동생인 울드렌이었다. 울드렌은 몰락한 세계의 폐허를 탐사하며 스스로를 시험할 시련을 찾아다녔다.
그 다음은 마라 자신의 얼굴이었다. 특히 비밀스러운 광채를 띤 두 눈을 오래 비춰 주었다.
마지막으로 보여 준 인물은 마라가 오만한 태도로 자기 감정을 경멸하게 만들고, 무슨 심각한 일이 있냐고 묻는 모든 이들을 퉁명스럽게 밀어내게 하는 사람. 뒤에 남겨진 오사나였다.
마라는 이 수수께끼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뒤에 남겨진 어머니. 비밀스러운 누나. 탐험하고 추적한 남동생. 진솔하고 거침없는 성정의 여인. 마라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자기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또한 다가올 것을 물리치려면 자신을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를 격리시켜야 한다. 모든 것은 격리되었을 때 가장 이해하기 쉬운 법이니까.
마라는 먼저 정원으로 가서 어머니를 위해 꽃을 심었다. 어머니는 아직 살아 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장녀와 장자를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에게 딸보다 자매가 되고자 했죠. 그래서 비밀을 들을 기회를 거부했습니다. 어머니가 딸들에게 하는 거짓말 틈새에 놓인 그 진실을요. 제 비밀을 고백하죠. 저는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어머니가 없었다면 저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을 테죠."
다음으로 마라는 동생과 얘기하러 갔지만, 울드렌은 화성에 있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빈 방에 놓여 있는 반쯤 갈린 단검과 권총걸이 시렁뿐이었다. 마라는 비탄에 잠긴 채 바닥에 꿇어앉아 바닥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동생의 신발에 긁혀 소행성 돌이 부드럽게 마모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들 남매의 형태였다. 빈 자리를 좇는 형태 말이다.
마라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람은 슈어 아이도였다. 슈어는 수호자 현상금 게시판에 올릴 몹시 위험하고 아주 바보 같은 임무들을 목록으로 작성하고 있었다. "진실을 말하고 싶어." 마라가 말했다. "나한테 아무거나 물어 봐."
"아무 양의 정수나 취해 짝수면 1/2로 나누고, 홀수면 3배로 곱하고 1을 더한 다음 이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면 언젠가는 1에 도달할까?" 슈어 아이도가 물었다.
"슈어, 나의 충직한 분노여." 마라가 말했다. "내 솔직함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면 좋겠군. 네 수학 문제는 일린이 해답을 줄 수 있을 거야."
"알았어요." 슈어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럼 물어보죠.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죠?"
"우리 산책할까?" 마라가 제안했다.
10. 독재적 살해 III
우주로 나간 마라와 슈어 아이도는 해적용 압력 스킨 수트를 입고 가느다란 안전줄을 연결한 채로 선체를 박차 오른다. 별들이 마치 선명하게 타오르는 촛불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무용수들이 왕관 모양을 이루어 춤을 추는 것처럼 그들 주위에 떠 있었다. 슈어 아이도는 몸을 붙여 마라와 헬멧을 맞댄다. "이제 우리뿐이에요. 무슨 일이에요, 마라? 당신은 항상, 뭐랄까…""내 얘기를 잘 안 하지?" 마라가 거들었다.
"세상을 등진 것 같고 비밀스럽다고 말하려고 했지만요."
"검 휘두르기가 폭파 기제라면 검도 폭탄의 일부가 될 수 있어." 마라가 말했다. "셀룰러 오토마타 게임의 규칙을 바꾸기는 불가능해. 하지만 자체 규칙을 가진 하위 게임을 만들고 하위 게임으로 상위 게임에서 이익을 도모할 수는 있지.
"대단하네요." 슈어가 말한다. "마라, 당신이 그런 식으로 얘기할 때면 '남들이 날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아. 하지만 남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이해하길 바라.'처럼 들린다고요."
"그렇겠지." 순순히 인정한 마라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슈어, 나 비밀이 있어. 내가 한 일이 있는데, 그걸 알고도 날 영원히 미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어."
"비밀이라면 나도 있었는걸요." 슈어가 상기시켜 준다. "내가 한 짓도…"
"내가 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난 오랫동안 당신을 미워했다가 포기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 그때로 다시 돌아갈 것 같지 않네요." 슈어가 흔들림 없는 손길로 마라의 등을 받친다. 두 사람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위로 떠오른다. 수천 킬로미터 길이의 안전줄이 서서히 펼쳐진다. "나한테 말하고 싶어요?"
"아니. 하지만 말해야 할 것 같아."
"알았어요. 폐하, 어떻게 해서 알리스 리가 블랙베리 차를 용안에 끼얹게 만드셨습니까?"
"내가 먼저였어." 마라는 생략되었던 앞부분을 설명했다.
최초의 조건과 규칙을 만든 사람은 자신이며, 그녀 스스로 결정했다고 믿도록 속였다고.
뒷이야기는 이미 말한 내용과 이어진다.
슈어 아이도는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마라를 바라본다. 손으로는 마라의 압력복과 헬멧에 그려진 유리 꽃잎 사이의 이음새를 쓰다듬고 있다. 먼 옛날, 이 여인은 스스로의 맹세를 저버리고 다이아시름을 섬겼다. 물질성의 저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의 가능성 때문에 울부짖던 여인이었다. 먼 옛날, 이 여인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일생을 내던졌다. 초월적인 신성을 손에 넣었을 자들에게 그 신성을 부정하는 범죄다.
"당신이 악마였군요." 슈어가 말한다. "당신이 죽음을 만든 유일한 힘이었어. 악의 가능성을 용인한 사람이 당신이었군요. 이제까지 없었던, 막을 수 있었던 수많은 고통을 야기했을지도 모르고요."
마라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못한다.
"흠.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린 누구도 여기에 있지 못했겠죠." 슈어가 말한다. "당신이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남겨 두고 온 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돌아가서 함께 싸울 수 있기를 바랐다면 말이에요." 슈어는 몸을 기울여 마라와 맞닿은 헬멧 안쪽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다. 마라의 정신은 모든 각성자에게 묶여 있지만, 그녀는 부드러운 입술 감촉을 느낀다.
슈어는 문득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있죠, 마라. 당신이 무엇이든 털어놨다는 건 더 깊은 비밀을 숨기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데. 진짜로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신성에는 여러 길이 있어." 마라가 말한다. 오리온자리 세 별이 슈어가 일전에 죽였던 어떤 군체 독립체가 남긴 별 3개짜리 등급처럼 헬멧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나는 죽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죽이는 방법이야. 그러면 남은 것은 모두 불멸일 테니까. 또 다른 하나는, 대부분 우연이었지만 내가 걸어 온 길이지. 둘 중 하나는 검과 더 가깝고, 다른 하나는 폭탄과 가까워. 폭탄이 검의 기준으로 검을 이길 수 있다면, 폭탄은 일인자라 일컬을 권리가 생기겠지."
"물어 본 제가 잘못했네요." 슈어가 한숨을 쉰다. "오늘 까마귀 정찰 결과에서 뭐 재밌는 건 없었나요?"
11. 독재적 살해 IV
또 만나죠. 한참 흐른 후, 비명의 날 바로 전날 밤. 마라는 무중력의 요람에서 책상다리를 틀고 명상하고 있다. 바릭스는 몰락자가 각성자를 어떻게 보는지 여러 번 말해 준 적이 있다. 생식 능력이 없고, 스스로의 살을 재생하지도 못하며, 영원히 흉터를 지고 다녀야 하는 자들. 또한 자기 자신의 그림자와 쌍둥이처럼 공존하는 자들. 아득한 옛날, 천국의 여왕인 이나나도 자신의 쌍둥이 그림자 자매 에레시키갈과 맞서기 위해 지하 세계로 내려가지 않았던가.이나나는 오만죄로 재판받고 사형당했다.
죽음과 동일한 것을 물리치려면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달아나선 안 되며, 맞서야만 한다. 죽음은 검이고, 검이란 교차점, 즉 다리와 같으며 다리에는 두 방향이 존재한다.
계획은 오직 그녀의 머릿속에만 있다. 다만 사랑스러운 에리스만이 필요에 의해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테키언들은 계획의 전모는 모르는 채로 전령을 한계점 위로 보낼 것이다. 유능하고 상냥한 페트라도 전모를 알지는 못 했다.
그녀는 많은 이들을 뒤에 남기게 될 것이다.
울드렌은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동생은 점점 비밀과 책략을 혼자 간직하는 일들이 늘었는데, 오로지 비밀을 숨겨야만 누나가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임을 마라는 알고 있었다(동시에 가엾이 여겼다).
비밀은 그녀의 강점이자 그녀가 받을 천벌의 장점이기도 하다. 오라클 엔진이 보여 준 가족 유추로 그녀가 추론해 낸 존재.
오늘 마라는 여왕의 남동생의 종말을 시작할 것이다. 그 일이 자신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도 알고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녀는 이제 우주 전체의 운명을 생각해야 한다. 군체의 차가운 검의 논리에 대한 연약하고 반만 완성된 해답도. 비탄에 젖어서는 안 된다.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지하 세계로 내려갈 적에 이나나가 두려워했을까? 마라는 웬 옛날이야기 속 인물에게 뒤처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죽음이 아닌가. 하지만 퇴각을 다룬 다른 신화들과 달리 이나나의 이야기에서 동경하는 부분은 하나 있었다.
이나나는 정복하기 위해 떠났던 것이다.
12. 독재적 살해 V
그녀는 눈을 감는다. 오릭스의 왕국이 그녀의 함대를 돌파하자 돌과 금속과 살점이 가루가 되어 비명우주에 거품처럼 떠다닌다. 마치 한낱 물질은 굴복자의 왕이 의지화한 사실 앞에서 항복할 수 없다는 듯이. 어디선가 울드렌의 저항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극한 희생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자신들이 한때 저버렸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들의 위대한 죽음이 흐느낌처럼 마라를 덮쳐 온다.마라는 테키언들이 비상 자기관문을 준비하는 것을 감지한다. 슈로 치가 마라에게 손을 뻗어 온다. 그녀가 살기를 바라는, 조용하지만 절박함이 담긴 몸짓이다. 그 손을 물리치기 위해 마라는 천 년의 냉정함과 무감정을 동원해야 했다.
충격파가 강타한다.
마라는 죽는다.
어떤 면에서는 범선과 함께 기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릭스가 가진 무기의 참혹한 논리가 그녀의 몸을 구성하는 입자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 결합을 없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연적 핵분열의 원리로 파괴되는 것이다. 파괴를 만든 이는 기쁘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보다 진실에 가깝고 상징적인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녀는 오릭스의 칼에 찔린 것이다. 마라는 오릭스를 향해 모든 권능을 내던졌고, 오릭스는 이에 답했다. 그는 마라의 신성이 미숙하고 왕위에 앉아 있을 권리는 미약함을 감지했고, 마라를 신랄하고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가득한 자신의 고위 전쟁에 노출시켰다. 마라는 검의 논리에 패배했다.
그녀는 칼날을 따라 춤추며 내려가서 오릭스의 왕국에 내려선다. 하빈저로 문을 만든 그녀는 걸음을 내딛는다. 그녀는 죽었다. 오릭스에게 흡수되었다. 그의 승천 영역에서, 그의 의지 안에서 죽었다. 이 진정한 방법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이나나는 최소한 자신의 백성들에게 미리 경고라도 할 수 있었다. 신하에게 지시해 비가와 북소리와 기도를 올리고 뱃고물을 찢게 했다. 이나나는 자신을 구해 달라는 기도를 신에게 올리도록 지시했다. 마라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에리스와 수십만 명의 광포하게 춤추는 수호자들에게 자신을 죽인 신을 쓰러뜨려 줄 것을 청했다. 은행털이만큼 간단한 일이다. 스스로를 보물로 삼아 금고에 들어간 다음, 금고의 주인이 죽고 나면 다른 물건들을 함께 들고 도로 탈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나나조차 마지막 문을 넘을 때 모든 이들의 전송을 받지 않았나.
마라는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을 떠올린다. 양 루이와 가장 깊은 어둠 속의 빛줄기까지. 그녀는 또 다시 안전줄에 매달려 수수께끼 속으로 떨어진다. 동생은 목이 터져라 부르짖으며 그녀를 쫓아오고 있다. 마라는 뒤를 돌아볼 수 없다.
그녀는 자신만의 논리를, 감춰진 계획과 비밀을 생각해 왔다. 이 시대의 우주는 더 단순하지 않다. 생명이 시작될 수 있는 곳에서라면 시작되었다. 분별 있는 이들이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도 말이다. 거대한 흐름은 복잡함, 정교함, 깊게 사고하고 존재가 풍부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은 모든 날이 날카롭지만, 폭탄 조각은 조립되기 전까지는 다른 무기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릭스의 왕국은 그녀의 육신과 정신을 수천만 개의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으려 하지만, 마라는 시공간이 존재하기 이전, 태고의 혼돈부터 살아남은 여인이다. 이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아를 유지해 왔으며, 영겁을 버틸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 에리스가 해낼 것이다. 수호자들도 제 몫을 다할 것이다. 이 세계의 힘이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해방된다면 마라는 손에 넣을 것이다. 전리품을 취하는 승자로서가 아니라 걸작에 대한 포상으로 폐품을 거머쥐는 쓰레기 수집가로서.
졸이 체스판 맞은편 끝까지 다다르면 여왕으로 승진된다. 여왕을 승진시키면 무엇이 탄생할까? 그녀가 새로 자리 잡는 판은 어떤 곳일까?
마라는 알고 있다.
그녀는 기나긴 기다림을 온전히 혼자서 견디며 편안하게 지낼 준비를 한다.
13. 섭정
"그렇군. 그럼 아군 늑대선 상황은?""칼락스 신을 제외하고 전부 대파됐습니다. 그마저도 극심하게 손상된 상태입니다. 현재 팔라스로 이동 중이랍니다."
"갤리선 상황은 어때?"
"전초기지에 남아있던 선박들은 상태가 좋은 편입니다. 팔라스에도 예비 선박이 몇 척 있습니다."
"정확히 몇 척?"
"아… 열두 척입니다."
"조선공은 얼마나 있지?"
"죄송한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핼럼을 민간인 보호에 투입하도록. 카말라랑 남는 인력은 전부 비밀 수색 구난 작업에 보내. 적과의 교전은 최대한 피하라고 하고. 혹시 생존자 찾거든 바로 나한테 알려줘."
"알겠습니다. 통신 종료하겠습니다, 지휘관님."
통신 장치의 불빛이 꺼진 후 페트라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내 그녀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스위치를 돌리고, 다이얼을 조정했다. 페트라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휘관이라." 애초에 그녀는 지휘관이 될 사람이 아니었다. 페트라는 단지 마라를 섬기고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마라 소프는 이제-
마라 소프는…
마라는 살아있다. 어딘가에 분명히 살아있다. 본인이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전용 갤리선에 다시 올라탄 그녀는 뒤엉킨 해안으로 항로를 설정했다. 우주 공간을 지나는 동안 페트라는 통신 채널을 두루 살폈다. 전초기지들은 군체로 들끓고 있다. 신봉자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게 호위대를 요구하고 있다. 데비는 실종됐다. 수호자 도약선들은 순서를 돌아가며 괴물같이 거대한 군체 우주선에 자살 특공을 감행하고 있다. 그래 봐야 일종의 방어장에 부딪혀 튕겨 나오고 있지만. 백 기의 파종선이 세레스에 내려오고 있다. 핼럼은 힘이 닿는 데까지 보호막이 쳐진 도시 내부로 민간인을 전부 대피시키고 있다. 팔라스에는 이백 기의 파종선이 더 나타났다. 하늘연소기 병력이 중무장하고 돌입하고 있다. 늑대의 가문 동맹은 탈주하고 있다. 데비가 발견됐다고 한다.
페트라는 통신을 끌 수 없었다. 듣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호흡조차 어려워졌다. 페트라는 항로를 돌려 전용선을 그 기함의 눈에 꽂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 추악하게 조각된 선체를 들이받고 싶었다. 죽어가면서 또렷한 비명을 내질러 그 뒤틀린 야수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기가 무슨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게 해주고 싶었다. 마라가 살아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대체 어떻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데. 그 저주받을 계획을 훤히 꿰고 있지도 않은데!
페트라는 저돌적으로 도적 소굴에 접근했다. 그러고는 단단히 고정된 해안의 잔재를 저공비행으로 빠르게 통과했다. 흙먼지, 잔해, 은은하게 빛나는 실체 없는 전령 물질이 뒤섞여 공기는 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야가 1클릭 너머로는 보이지도 않았다. 페트라는 레이더를 따라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마침내 그 자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감시탑.
페트라는 이를 앙다문 채 한숨을 내쉬었다.
탑은 건재하다. 상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14. 일린
벽에 폭탄이 설치되어있어 일명 '정비로'라 불리는 장소에서는 비명이 멎은 뒤였다."정비로가 이렇게 조용한 건 처음이야." 일린이 속삭였다. "놈들이 떠난 건가?"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포티아, 나시아도 알았고 일린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다. 굴복자는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얼마 전만 해도 일린과 자매들은 정비로를 찾아와 황폐를 만들곤 했다. 황폐란 앞서 오릭스의 굴복자들이 가졌던 힘의 겉껍데기가 깃든 장비였다. 살아있는 매개체가 된 건 일린이 최초였다. 그 심오한 내면, 즉 근본적인 각성자의 분열을 가교로 활용한 것도 테키언으로서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끝없이 들려오던 끔찍하면서도 무한하리만치 사악한 비명을 선명히 떠올렸다. 하지만 속삭임도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당장 비명이 멎은 것으로 보이자 속삭임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들렸다.
"서둘러." 일린이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페트라가 알아차리기 전에." 경보는 정비로 어디서든 울릴 수 있다. 일린 일행은 최대한 교묘하게 잠입하긴 했지만, 지극히 미세한 체온과 공기의 변동이라도 노출되는 순간 발각당할 것이다. "질문은 하고 가야지."
용감한 포티아가 사용하기로 정한 물체가 있는 장소로 일행을 안내했다. 안팎으로 신호를 차단하는 은박으로 덮여있고, 내부는 진공으로 된 강철 성물 구체가 기다리고 있었다. 추악한 내적인 결함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진주이자 새카만 여행자를 축소해놓은 것 같은 구체는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일린이 바늘처럼 얇은 접속 포트를 열었다. 그러자 유독한 오존이 뿜어져 나왔다.
안에는 굴복자 반달이 들어있었다. 반달은 쾌락에 휩싸인 채 이름 없는 고통을 만끽하며 몸을 비틀면서 떨고 있었다.
"나시아." 그녀가 속삭였다. 조용한 나시아가 가느다란 전선을 정확히 포트에 꽂아 넣었다. 그녀의 보강기 파장이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게 암호화된 잠금장치를 마치 애무하듯이 부드럽게 파훼해 나갔다.
일린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여기서는 속삭임이 크게 들린다. 한때 여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장소의 공백을 속삭임이 메우고 있다. 사라진 슈로 치와 여왕의 기함에 탔던 다른 이들의 목소리와 너무나도 유사한 속삭임이 말이다.
애당초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꿈의 도시로 도망쳐야 했다.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으면 됐을 것을. 혹시 그들이 도움이 필요하진 않을까? 페트라가 일린으로부터 그들의 운명을 지켰더라면 어땠을까? 마녀들의 손에 자란 집회의 딸 페트라라면 그렇게 했을까? 최근 대리 지휘관과 테키언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준비해." 나시아가 자매들에게 갈라진 전선 끝마디를 건넸다. "다들 조심해."
마치 햇빛이 다이아몬드로 된 평원을 비추는 것처럼 그들의 보강기가 빛 속에서 버벅대며 동기화되었다. 호기심 많은 리실이 첫 번째 질문을 구성했다.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느냐?
곧 굴복자의 독사 같은 공격이 그들을 덮칠 것이다. 강력하지만 낯설진 않다. 일린은 굴복자의 요구를 무시했다. "목소리가 들리나 봐." 일린이 음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린 굴복자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라니까. 안 그래?" 한번은 굴복자의 힘이 깃든 방어구를 수호자들이 질색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페트라의 말이 옳았다. 수호자들은 전술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뭐든 걸칠 것이다.
일린과 자매들은 굴복자의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기하학적인 내부 구조를 펼쳤다. 그들의 목적은 시공간을 넘어 뻗어있는 연결을 찾는 것이었다. "슈로?" 일린이 속삭였다. "네 목소리를 들었어. 너는 우리 목소리가 들려?"
그녀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순간이었다. 일린은 토성에서 그 일이 있기 전을 떠올렸다. 그녀는 슈로 치와 울드렌, 그리고 마라를 떠올렸다. 일린은… 그 시기로 돌아가고 싶었다.
열망은 강해졌다.
그들을 에워싼 거대한 아귀가 갑작스럽게 닫혔다.
"리븐!" 용감한 포티아가 절규했다. 일린은 겹겹이 에워싸진 완벽한 존재이면서 우아한, 그렇기에 감당할 수 있는 굴복자에 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 절대적인 식욕과 불가해한 의지는…
그녀는 자매들의 보강기를 파괴하여 교감을 멈추는 비밀 정지 암구호를 읊조렸다. 일린은 자신이 늦진 않았는지 몰랐다. 조용한 나시아가 울부짖었다. 호기심 많은 리실도 울부짖었다. 비명이 다시 시작되었다.
15. 질소
"번개야!" 코로의 외침에 간밤에 잠자리가 불편했던 텔리아 로스가 눈을 떴다. "번개가 쳤어! 드디어! 드디어!" 코로는 망토와 호흡기를 하고는 바깥으로 나가 기쁨의 춤사위를 췄다.코로의 초라한 플라스틱 움막 너머로 하얀 섬광이 번뜩였다. 텔리아는 전기 수류탄과 실험실 문을 자르고 들어오는 남작의 경멸자를 떠올렸다. 그녀는 몸서리치고는 화살통에 남은 화살의 수를 셌다. 그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결국 텔리아는 활과 화살통을 메고 바깥의 코로에게 다가갔다. 그는 바보처럼 환한 미소를 띠고 벼락이 떨어진 땅의 흙을 거르고 있었다. 땅에 숨어있던 곤충이 코로의 손가락 사이를 오갔다. 그는 녀석을 잡으려고 했지만, 고작 얇은 더듬이 하나를 뽑는 데서 그쳤다. "식물의 성장에는 질소가 필요해." 그가 하늘과 이쪽 리프 지역을 에워싼 격리된 공기로 이뤄진 안개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격리장이 충분히 충전되면 지면으로 전달하게 되어있거든. 그 과정에서 번개가 공기 중의 질소를 분리하게 돼. 결과적으로 토양이 비옥해지지. 굉장하지 않아?"
텔리아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여기서 농사를 지으려는 건 아니지?" 이곳은 제대로 된 문명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방비도 잘 된 주거지였다. 실로, 빛이 가득한 시원하고 정갈한 터전이었다.
"왜? 지금 우린 피난민 신세잖아, 텔리아. 상황이 더 좋아지기라도 할 것 같아?" 코로가 팔을 치켜들어 주거지와 선박이 있는 밝은 별들을 가리켰다. "저것들… 저것들은 전부 표적일 뿐이야. 우리 땅에서 나는 것들로 자급할 줄 알아야 해."
"자꾸 학살만 당하니까 피난민 신세인 거지!" 텔리아가 흙에 성난 발자국을 남겨댔다. "여기서는 바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필요도 없어. 페트라 벤지 님이 리프를 봉쇄할 거야. 여왕님께서 돌아오실 수도 있지.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살아계실 거로 생각해?" 코로가 손을 깨끗하게 닦으며 말했다. "펠다는 못 살아남았거든. 강한 여자였는데 말이야. 보통 강한 여자가 아녔지. 수호자가 벌떼같이 달려들어서야 오릭스를 죽일 수 있었어. 여왕님은… 그래, 확실히 남다른 분이시긴 했지. 하지만 수호자는 아니시잖아."
"난 아직 그분이 느껴지는걸." 텔리아가 완고한 투로 말했다. "가끔은."
"가끔은 그렇겠지. 요즘은 사람 머리가 어떻게 돼도 이상할 게 없는 시기잖아."
머리 위에서 새로운 별이 밝게 빛났다. 코로가 실눈을 떴다. "수호자 우주선이야." 그가 말했다. "진입하는 방식을 보면 구분할 수 있어. 그 양반들은 조심성이라곤 쥐뿔도 없거든."
"경멸자를 사냥하러 올지도 모르겠네." 언젠가 텔리아가 과학자로 돌아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럴싸한 실험실과 잠자리가 갖춰진 장소에서. "스콜라스 사태 이후처럼…"
"내 바람은 좀 달라." 코로는 무릎을 박차고 번쩍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슨 예언자라도 되는 것처럼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움막으로 머리를 틀었다. "히게이아에 있다던 그 몰락자 얘기 들었어? 원격 망원경 몇 개를 관리해줄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대."
"거미 밑에서 일하는 거야?" 텔리아가 윽박질렀다. "근데 그 자식은-"
"녀석은 보수도 현물로 줘. 사람들의 이주도 도와주고 있지. 한술 더 떠서 보호도 제공해주고 있고." 코로가 움막의 문발을 들췄다. "애들한테 얘기 좀 해줄래? 왜 번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지 누가 설명을 해줘야 할 테니 말이야."
16. 거부
페트라는 자발라를 어떻게 맞아줄지 계획을 다 세워두었다. 우선 자발라가 우렁찬 목소리로 떠들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 인사로 쳐줄 수 있으니까. 그럼 페트라는 그의 말을 잔소리, 생색, 부성애 어린 걱정 중 하나로 골라 받아들일 것이다. 이어서 페트라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자발라에게 능글맞게 웃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노여움을 살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하찮은 관료라는 자각이 생길 수 있도록.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지극히 멀리 떨어진 오르트 성운에서 청산가리가 섞인 파편이 리프의 엉망진창이 된 방어선을 뚫고 날아와 자발라를 강타해야 한다. 그것도 가공할 속도로 날아와 그가 거품 낀 곤죽이 되어 바닥에 흩뿌려지면 금상첨화다. 그리고 자발라의 고스트가 그를 수복하려고 하면 페트라는 끼어들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야, 내가 도와주지!" 그런 다음 대걸레로 닦으리라.해치가 열렸다. 케이드-6가 자발라에게 딱 붙어 떠들어대고 있었다. "당신이 뭘 봤든, 어디서 뭘 읽었든, 상황이 훨씬 더 안 좋아. 여기 사람들은 우리-"
"케이드." 페트라는 반쯤 의식적으로 마라 특유의 거리감을 두고 무관심과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처세술을 견지했다. 그러다 목이 메 갑작스러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실제로 기침을 토하고 말았다. "일행을 데려왔-"
자발라가 터벅터벅 방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이 꼭 도시의 기둥이 페트라의 공간을 침범하고자 태양계를 건너온 것만 같았다. 자발라는 페트라에게 고개를 돌리기에 앞서 매우 점잖게 케이드에게 대답을 내놓았다. "케이드, 사실대로 말하자면 여왕이 리프를 혼돈의 도가니에 남겨둔 덕분에 우리가 반사이익을 본 측면이 크네. 여기서 몰락자들이 서로 죽이고 죽이는 동안 우린 재건할 여유를 얻었으니까." 연이어 그는 페트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 지휘관. 만나서 반갑네."
"마찬가지야." 페트라는 리프를 여행자의 수호자는 아닐지언정 지구와 그 주민의 수호자로 생각하는 여왕의 관점이 진심으로 마음에 와닿았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리프를 유인책으로 취급하는 자발라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케이드가 제안이 있대." 그녀가 말했다. "우리 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더라."
"그럼!" 케이드는 꼭 페트라와 자발라가 주고받는 분노라는 이름의 열추적 유도탄을 유인하려는 플레어처럼 두 사람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도시가 몰락한 이후 케이드의 광대 행세, 천하 태평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아직도 극복을 못 하고 있었다. "잘 들어봐, 페트라. 요즘 지구에서 외로움 타는 양반들이 도시의 품으로 많이들 안기고 있단 말이야. 여기 상황과 관련해서 바릭스랑 얘기를 할 일이 있었는데, 우리 정책을 당신들한테까지 확장하는 건 어떨까 싶었지." 케이드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리프 각성자들을 도시로 불러들이고 싶어. 바릭스, 죽은 궤도, 누구한테든 좋으니까 여긴 포기해. 여긴 생지옥이야, 페트라. 살아남지 못할 거야."
자발라의 시선은 페트라에게 꽂혀있었다. 그는 장엄하고 지고한 힘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대리 지휘관 그대는 철수를 할 수 있을 만큼 리프에 충분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나?"
"너희들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렇지." 순간 페트라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난데없이 쏟아져 나왔다. 분노가 끓어올랐고, 슬픔에 온몸이 뜨거웠다. "하다못해 케이드는 너희가 우리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인정하는 명예라도 있지. 너희가 몰락자 가문을 하나 쳐부수면 뒷감당은 우리 몫이야! 너희 때문에 군체 신에 기갑단 폭군까지 꼬이고 있어. 전부 우릴 거쳐 간다고! 여왕님께서 널 꼴 보기 싫어하셨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해, 자발라. 넌 동포를 버렸으니까."
페트라는 이천 년 전쯤에 어둠이 인류를 황금기에서 끌어내려 천육백 년 동안 야만의 시대를 겪게 했을 때, 아주 조금이라도 더 분발해서 끝장을 내버렸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말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실제로 그렇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지금까지 떠든 건 그녀의 상처 입은 마음 탓이었다. 그래도 언성은 줄어들지 않았다.
"마라는 사기꾼이었네." 자발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자기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전쟁을 치렀잖나. 그러면서 그대들을 끌어들였지. 누구든 그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기꺼이 나의 도시에 받아주겠네. 하지만 여왕이 매듭짓지 않은 음모를 받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우리의 품에 올 생각이면 도시에 녹아들 각오를 해야 할 걸세."
아니. 당치도 않은 소리. 여왕님의 백성이길 포기하라고? 그분의 약속을 그만 되새기라고? "두려운가 보군." 페트라가 타이탄 중의 타이탄에게 말했다. "그래서 여왕님이 널 믿지 않았던 거야. 여행자에게 돌아가, 자발라. 신경 써줘서 고마워, 케이드. 하지만 리프는 고유한 목적이 있어. 우리가 그 목적을 포기하면 되레 너희가 스스로 어리석음에 눈물을 흘리게 될 거야."
"페트라-"
"리프는 엄연한 목적이 있어." 페트라가 으르렁거렸다. "여왕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이."
17. 함대
얼마나 멀리서 조준했는지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큰 소리로 분통을 터뜨렸다. 아무렴 저들도 몰락자나 오릭스를 상대하면서 은폐 기술을 본 적 있을 테니 놀랄 일은 아니긴 했다.그의 우주선으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용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대리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요격하겠다."
직함을 들은 아라크 자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페트라가 탑에서 머물던 시절을 회고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우주로 돌아가고 싶어 발을 마구 동동 굴러댔었다. 소원은 성취한 셈이다. 어쩌면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페트라가 딱 하나는 제대로 짚었다… 우주야말로 중요한 모든 일이 일어나는 현장이라는 진리를. 죽은 궤도가 도시를 다스렸더라면 가울의 세력에 비견될만한 함대를 보유했을 것이다.
"죽은 궤도의 아라크 자랄이다." 그가 활기차게 말했다. "대리 지휘관 페트라 벤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난 도시에서 보낸 사절이 아니다. 함대와 관련해 논의할 사안이 있어 개인 자격으로 왔다."
자랄은 이전에도 리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단지 적절한 경로를 통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페트라 벤지를 자신의 전송 지역에서 만난 자랄은 살짝 놀라웠다. '넌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라는 인상을 심어줄 요량으로 대기실까지 안내받을 줄 알았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페트라는 정치인보단 요원에 가까웠다. 그녀는 단순히 극적 효과를 위해 행동을 미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아라크 자랄 님." 그녀는 자랄의 손을 굳게 쥐고 악수를 하였다. 자랄은 목에 희미한 염동력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지 살폈다. 그 정도 칼재주는 페트라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건 어떨지 몰라도. "선조의 고향에 돌아오신 걸 환영해요."
"대리 사령관. 직책은 수행할 만한가?"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 주었다.
"임시직일 뿐이에요." 그녀는 자랄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함대 이야기를 하러 오셨다면서요. 우린 유능한 인재들은 있는데 그 사람들이 실력을 발휘할만한 안전한 조선소가 없네요. 혹시 장소를 제공해주실 수 있다면-"
자랄은 손을 긋는 시늉을 했다. 우주인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손짓이었다. "난 인양권 때문에 왔네."
"인양권이요?"
"토성 주변 말일세." 그곳 잔해에 남아있는 자재와 입체 뼈대에 대한 인양 허가를 받고 싶네만. 물론, 사망자 시신은 인도할 거야."
페트라는 침묵을 지켰다. 아라크는 그녀가 우주인으로서 실리를 추구하길 바랐다. 리프의 지금 상태로는 이 인양 작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현주소와 태양계가 최대한 많은 우주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면 했다. 또, 오릭스의 병기와 드레드노트가 또 나타난다면 무찌를 수 있느냐와 같은 의문점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페트라는 계속 침묵을 지키기만 했다.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진 않았겠지. 미안하네. 그 많은 자원을 몰락자가 차지하거나 토성으로 그냥 흘러 들어가면 안타깝지 않겠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구 출신이시죠? 당신도 여왕님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나요?"
자랄은 거짓말을 해봤자 페트라가 꿰뚫어 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왕을 존경한 건 사실이야. 다만, 그녀가 우리 모두를… 좌우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은… 혐오스러웠어. 난 이 길을 선택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아. 각성자로서 우리가 먼 옛날 시작한 탐색을 이어나갈 수 있으니까. 우리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세상을 찾는 여정 말일세."
페트라는 돌아서서 발길을 재촉했다.
자랄은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내 그는 페트라의 반응을 이해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거니와 해야 하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를 거부한 것이다. 바꿔 말해 선택을 거부한 셈이다.
자랄은 조금이지만 측은함을 느꼈다. 페트라는 결코 그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18. 지구와 리프
마스터 아이브스에게,지구의 해독단을 대표하여 여왕의 충신으로서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지구 출신 각성자들은 여러분의 상실에 공감하며 이번 비극을 발판으로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린 지구와 그 식민지의 다채롭고 심오한 역사를 밝히는 과업에서 큰 진전을 이뤘습니다. 한낱 평범한 진실들 사이에 묻혀있던 역사를 파헤쳤지요. 물론 본 내용물은 대중에 공개하기에 너무 예민하므로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여왕이 본 서한을 가로채는 불상사가 생기진 않을까 예전부터 고심해왔습니다. 만약 그리되었다면 여왕 본인의 필요에 맞게 내용물이 은폐 또는 조작됐겠죠. 이번 발견 중 일부는 "각성"의 본질과 연관되어있습니다. 개중에는 우리가 겪는 여정과 유사한 현상을 지적한 것들도 있는데… 심란한 결과로 이어진 사례들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이 자료들 모두 여러분이 자체적으로 수집한 기록과 교차 검증 및 비교를 할 수 있으면 더없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부디 이 지식이 한때 우리 종족을 정립했던 분열보다 훨씬 더 중대하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도서관 간의 협력과 학자들 사이의 교류가 이뤄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여 명료함과 진실을 기치로 하는 새로운 지적 황금기가 도래하길 바랍니다.
존경심을 담아,
마스터 라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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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라훌에게,
우리 리프의 해독단은 여러분을 지키는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해 조의를 표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일로 희생된 여러분 측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또한, 여러분의 요청에 응답하는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 대해서도 사죄합니다. 최대한 심사숙고하여 답변을 드리는 것이 마땅히 옳은 일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네가 불쾌한 족속이라는 만장일치에 이르렀습니다. 정말이지 욕심밖에 모르는 악귀가 따로 없군요. 감히 우리의 불행을 이용하여 리프 해독단의 금고와 기록(한마디 덧붙이자면 당신네 반쯤 뜯어먹힌 폐허에서 찾아낸 타락의 찌꺼기보다 당신이 훨씬 더 괴상합니다)에 접근하려는 발상을 떠올리다니 실로 역겹기 그지없네요. 단, 당신들이 보기에 우리가 수고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자료나 기록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검토해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 같아서 알려드리는 건데, 당신네 여행자가 수호자들에게 다시 힘을 불어넣겠답시고 마지막 남은 빛을 쥐어 짜낸 이후로 매일같이 새로운 발견이 무수히 튀어나오고 있답니다. 여러분에게 본 서한을 이해할 지혜가 있기를 빕니다.
최대한의 존경심을 담아,
마스터 아이브스 올림
19. 순례
자발라는 머리를 숙여 이오의 대지에 맞대었다. 그것이 예를 갖추는 방법이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얇은 겉흙 바로 아래에 커다란 암모나이트 화석이 있었고, 이마와 부딪혀버렸다. 통증은 차치하고 유황이 뒤섞인 먼지가 날아온 탓에 자발라는 재채기가 나왔다."일천한 몸이긴 하나," 자발라는 당장에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러 찾아왔소." 아이코라가 여기가 맞다고 했다. 이오. 아직 원숙하지 않은 세계. 여행자와 이어진 탯줄이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소."
자발라는 무심코 목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시 위에 떠 있는 여행자를 보는 게 워낙 습관이 됐던 것일까, 본능적으로 제일 가까이에 보이는 구체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그는 다시 눈을 내리깔고 바닥을 보았다. "가울을 처리해줘서 고맙소."
아이코라는 제대로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여행자가 마지막으로 이오와 나눈 대화를 들을 수 있다고 했었다. 달을 통째로 지구와 같은 중력과 생물권을 가진 땅으로 테라포밍하는 일이 미사여구와 설명으로만 해결되는 일도 아닐 텐데 말이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이런 게 바로 시련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를 할 힘을 모으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설득하는 것. 아닌 게 아니라, 설득이나 강압(필시 여행자도 이따금 유혹을 느꼈을 거로 의심치 않는다)을 떠나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자신처럼 생각하는 법과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를 알아보는 법, 그리고 그 가치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도덕성까지 심어주는 일이니.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내가 곁에서 봐주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내가 할법한 선택을 하리라 믿고 맡길 수 있게 된다.
자발라는 자신의 가르치는 재주가 타이탄으로서의 실력 절반만큼이라도 되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자발라 자신은 약간의 휴식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문제는 그가 저번에 방심했을 때의 일이다. 오릭스가 격퇴되고, SIVA는 격리 상태, 거기에 벡스까지 혼란에 빠져 기갑단마저 벙커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고 있을 때였다. 그런 와중 갑자기 가울이 나타나 도시, 여행자, 자발라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일이 있었다.
"내가 실패했던 걸까?" 자발라가 화석이 박힌 바닥을 본 채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나 때문에 깨어난 거요? 나 혼자서는 가울을 막을 수 없었으니 말이오."
승리에 취해 경솔했던 자발라는 현시대를 새로운 황금기로 선언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발라는 자신이 여행자의 각성을 잘못 이해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태껏 한 번도 용기를 잃은 적이 없었다. 적어도 본인으로선 말이다. 하지만 몰려오는 두려움에 다음 질문이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것도 결국 지나갈 '승리의 시대'일 뿐이오? 아니면 뭔가 더 끔찍한 것이 다가오고 있는 거요?"
화석 때문에 생겼던 머리의 멍이 더 아려왔다. 역사란 인내의 서사다. 일전에 자발라가 누군가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얼마나 오래 살아남고 계속 나아갈 수 있는가? 한 발짝 더 나아가 지금까지 입은 상처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얼마나 더 감내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다음에 닥쳐온 위기가 여행자의 각성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결국 자발라의 잘못이 되는가?
의무란 복잡한 퍼즐이다. 열심히 노력할수록 그 무게는 가중된다. 자발라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시인, 바쇼를 떠올려 보았다. 새와 곤충이 그저 가까이 왔단 이유로 주저 없이 녀석들을 죽여 살생석이라는 이름이 붙은 돌이 있었다. 바쇼는 그 돌을 보고자 온천을 방문했다. 고스트처럼 생긴 파리가 주변을 날아다니는 모습. 바쇼는 이처럼, 여행자 역시 살생석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끔찍한 생각을 갖고 있던 자였다.
"또 그 표정을 지으시네요." 자발라의 고스트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젠 보기만 해도 알아요."
"그러시겠지." 자발라가 말했다. "그냥 걱정돼서 말이야."
20. 고행
거미의 은신처. 페트라는 물 만난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발걸음도, 마음도 가벼웠다. 이 장소에서만큼은 솔직해질 수 있다. 수많은 인파와 기계로 인한 열기와 공기에 스며든 톡 쏘는 에테르가 느껴졌다. 돈, 돈을 주겠다는 약속, 돈이 될만한 현물만 있으면 사람을 회유할 수 있다. 칼을 쓰는 일. 총을 쓰는 일.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게 할 수 있다."놈은 너한테 해만 되잖아." 그녀가 말했다. "나한텐 걸림돌이지만. 녀석을 넘겨주면 좋겠어. 내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겠지, 거미?"
거미가 투덜댔다. "좋네. 생포할 생각이겠지? 장담컨대 에테르를 쌓아두고 있을 걸세. 바릭스가 뭐라 하든 그 에테르는 내 것이야…"
거미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었다. 페트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거미가 이번 생포 작전의 성공을 원하는 것이 그 증거다. 대리 지휘관에 지나지 않는 그녀기에, 자신의 성공 여부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끊임 없는 응대 속에, 역사가들의 손에 명료하게 평가될만한 결정만을 내려오기만 한 그녀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만큼은, 다시 분노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페트라는 용기를 내었다.
"에테르는 일단 녀석을 잡은 다음 처리할게. 정보 고마워." 페트라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인파에 녹아들었다.
인파 속에서 두 드렉이 손톱만 한 크기의 토큰으로 고철을 거래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빛은 갈래로 나누어져, 불순한 에테르로 된 탁한 구름을 뚫고 들어와 깃발이 찢겨나간 몰락자 의복의 술 장식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 한편 한 기갑단 탈영병은 헐렁한 압력 자루를 가지고 웅크린 몸을 기댄 채 붉은 군단의 무기 은닉처 위치를 대량의 미광체를 받고 판매하고 있었다. 페트라는 문턱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그녀는 뒤로 보이는 혼돈을 그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엇이든 좋으니 여기 계속 머물 일이 생기길 바랐다.
그녀는 지상의 암영으로 나아갔다.
간헐적으로 자신을 덮치는 환영처럼, 앞에 무언가가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페트라는 발걸음의 속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그리고 칼과 권총을 점검해 보았다.
"우리 종족도 얼마 안 남았군, 페트라 벤지."
목소리를 듣고 방향을 간파할 수 있었다. 주위의 소음을 뚫고 희미한 형체를 포착했다. 망토의 후드와 입술이 보였다.
"거기 누구야?" 그녀가 엄포를 놓았다.
목소리의 정체는 남성이었다. 움직임은 불규칙적이었다. 혼돈의 본질을 흉내 내는 변칙적인 소음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흡사 무너진 무더기, 가벼운 바람처럼 우연하게 보이는 방법을 체득한 자 같았다.
"페트라… 우리도 옛날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울드렌 님?" 그녀가 숨이 멎을 듯한 소리를 냈다. 울드렌이다! 대리 지휘관 자리를 받아 누이의 의지를 집행하러 왔을 터! 페트라는 다시 행동의 자유를 얻을 것이다. 잔인한 계산을 할 일도, 불확실성 때문에 고통받을 일도 없어질 것이고, 스스로 시련을 만들어 옭아매는 대신 자유롭게 맞닥뜨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건 환상이 틀림없을 거야. 소원이 한꺼번에 다 이뤄질 리 없어. 페트라는 시야를 초월하는 감각을 발휘하여 이런 허상을 자신의 심상에 주입할 능력이 있는 존재를 물색해 보았다. 사이온 피박자? 군체 마법사?
"누님은 자네를 믿고 모든 걸 맡기셨어. 우리 모두를 맡겼지. 그런데 자네는 그 신뢰를 빛의 '자비'에 넘겨버렸군."
페트라는 살의를 느꼈다. 그 살의는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페트라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속도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목표를 물색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길이 닿은 자리에는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
두 개의 심장박동이 느릿하게 고동쳤다. 탄환과 칼이 날아오진 않았기에 그녀는 물러났다.
우주선까지 따라오는 자도 없었다.
21. 젠심 서기
애셔 미르는 가만히 서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의를 벗은 채로 말이다. 곧이어 그는 아직 감각이 남아있는 손을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어깨로 가져갔다. 애셔는 어깨의 단단한 금속 부분을 손톱으로 두드리며 급기야 쇄골까지 그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금속과 피부의 경계는 고르지도, 정갈하지도 않았다. 금속으로 된 부분은 잔주름이 잡혀 경화된 각질 피부와 맞닿아 있었다. 혈색이 돌며 갈라진 것이 마치 허물을 벗는 뱀을 연상시켰다. 그런 각질 피부는 딱딱한 굳은살과 연결됐다. 시퍼런 멍과 지나치게 튀어나온 혈관 때문에 매우 흉해 보였다.그는 손바닥을 활짝 펼쳐 가슴팍 위에 올려놓았다. 덮으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이어서 애셔는 힘겹게 손을 떨구고 억지로라도 거울을 오랫동안 응시하였다.
그는 궁금했다. 만에 하나 폐까지 기계화가 진행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안 그래도 기침할 때마다 고통스러운데 말이다.
"리프로 돌아가지 그래."
애셔는 숨을 확 몰아쉬며 황급히 상의를 낚아챘다. 그는 분투 끝에 상의를 걸치고는 돌아서서 문에 기대어 서 있던 아이코라 레이를 쳐다보았다. "침입은 용납지 않아." 그가 내뱉었다. "다가오기 전에 언질이라도 주라고. 그리고 방문 예약이란 개념은 장식이 아니야. 오늘 온다는 얘기도 없었잖나."
아이코라는 오퓨커스와 짧게 시선을 주고받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타해독가해독가이라는 아이브스나 리프 해독단이 도울 수 있을 거라 하던데."
"어리석은 헛수고일세. 해독가들은 무의미한 이론에 정신 팔린 작자들이야. 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여기 있네. 벡스에 말일세."
"그럼 나와 함께 오시리스를 보러 가는 건 어떤가?"
애셔는 힘겹게 로브를 걸친 다음 빠르게 매듭을 매었다. 어찌나 급했는지 몇몇 매듭을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그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기적인 쓰레기일세."
아이코라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는 가만히 기다렸다. 애셔는 양손으로 복부를 쓸어내려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조소를 지어보였다. "무슨 의도로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알겠네만, 내가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지."
"그럼 테키언은? 내 은신자한테 들었-"
분노가 치밀어오른 애셔의 몸이 뻣뻣해졌다. 그는 고개를 홱 치들었다. "은신자가 뭐!" 고함치는 애셔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맺혀있었다. "자네 은신자가 내 질병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여! 애초에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여왕의 마녀들도 이 질병은 모를 거야. 이 세상에 치료법을 아는 사람은 없어! 애초에 발악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단 말일세!"
22. 해몽
최대한 많은 역사의 진실을 찾는 것을 내 일생일대의 과제로 삼은 만큼 그간 꾼 꿈들을 기록해두고자 한다. 나의 주관적인 이해를 통해 다른 이들이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무한한 슬픔: 나는 뱃머리에 서서 별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며 절규했다. 본디 나는 단 하나의 행성을 찾아 한없이 많은 항성계를 한 번에 기록하려고 했다. 얼굴 없는 동료가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냐고 물었다. 이에 나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공 모양의 덩어리, 혹은 두 개의 고리를 가진 행성으로 비칠 수도 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얼마나 주고 사셨어요?" 그녀가 물었다. "내 모든 것." 내가 답했다. 그러자 별들이 멈춰 섰고, 배는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린 무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틈새의 온기: 나는 좁혀들어오는 푸른 빛의 불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중력이 있는 물체라곤 바위가 유일했기에, 바위에서 바위로 뛰었다. 매 도약이 우주의 차가운 무, 그 자체와 맞서는 전투와 같았다. 그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모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그곳이 내 목적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큰 도약을 한 번만 더 뛰면 될 터였다. 그러나 푸른 불꽃이 내 발목을 붙잡았고,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추락의 충격으로 바위가 두 쪽으로 쪼개져 버렸다. 수백 개의 그러한 존재가 내가 뒤에 만들어놓은 균열 속으로 떨어졌다. 어떻게든 전부 표면 위로 끌어올리려 했다. 더는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까지. 팔꿈치는 굽혀지지 않았고, 팔은 밀어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균열은 점점 더 따듯해졌고, 종국에는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난 잠에서 깨어났다.
분석의 노래: 나는 육신에서 빠져나와 나의 몸뚱어리가 형체 없는 공허에서 또 다른 공허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첫 번째 공허에는 선율이 감미로운 콧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어있었다. 단,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공허를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화음에 새로운 목소리가 더해졌다. 목소리의 수를 세보려 했지만, 점차 희미해져 하나로 합쳐짐에 따라 더해야 할지 빼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혼란 속에서 나는 수에 대한 기억조차 완전히 잃어버렸다. 어느 노끈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돌아보니 나 자신이 작별의 의미를 담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세레나데의 화음이 틀어지며 듣기 안 좋아지는 사이 목소리가 나의 정신에 깊이 파고들었다.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난 잠에서 깨어났다.
피부를 씻다: 난 회색빛을 띤 도자기 개수대에서 소지품을 모았다. 손가락에 비누가 달라붙어 도통 떨어지질 않았다. 소지품을 씻는 동안 내 소지품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세정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법임을 알기에 난 더욱 강한 힘으로 문질러댔다. 그리고 나 자신도 녹지 않게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은이야말로 거짓된 생명과 파란 피부라는 독을 상징하는 원소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내 손톱이 부드러운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산: 나는 펠윈터 봉우리에 있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도시에 있는 동네 잡화점으로 이어지는 급행 모노레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때마침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때 한 수호자가 특별한 엔그램을 가지고 왔다. 난 해독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비밀로 남는 편이 낫다고, 안에 때가 되면 필요해질 무언가가 들어있다고 수호자에게 말해줬다.
타이라: 나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언젠가 타이라 칸을 만날 날이 오길 바란다.
23. 국왕의 분노
딘나는 회로가 닫힐 때까지 비상 응답기를 돌려댔다. 끝내 그녀는 신호기가 '치지직' 소리와 함께 단말마를 내지르며 고장 나는 것을 태어나서 두 번째로 목격했다. PSARA PSARA PSARA여왕의 알현실이 곧 함락될 것이란 의미가 담긴 문구였다.
"다 끝났어." 그녀가 부관에게 말했다. "지원군은 기대하지 말자고."
"최소한 우리 쪽 지원군이 올 일은 없을 거야." 낙하기들은 여전히 감옥에서 내려와 베스티안 전초기지 사방에 꽂히고 있었다. "왕좌는 전술적인 가치가 없지 않습니까. 놈들이 우리를 우회하진 않을까요?"
"어림없는 소리." 딘나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엄밀히 따져보면 여왕 근위대는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늑대의 가문이 저지른 배신은 어디까지나 반역 행위일 뿐, 군사력을 동반한 전쟁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또다시 몰락자가 리프에 창궐하게 될 줄이야… 이번 사태에 반역이 연루되어있지 않다면 딘나는 접싯물에 코를 박을 생각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그녀는 그 끔찍한 날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녀는 소리쳤다. "동작 그만. 멈춰라."
"팔라딘 딘나 맞지?" 각성자의 대공이 응했다. "자네가 지키는 것이 내 왕좌라는 건 잘 알 테지? 들어가도 괜찮겠나?"
"혼자가 아니시군요." 딘나가 큰 목소리로 답했다.
"수행원들일세."
몇몇 딘나의 부하가 무기를 내렸다. "무기 내리지 마." 딘나가 서슬 퍼런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뭘 믿고-"
그 순간 왕실의 수동 명령어가 알현실의 네트워크를 속속들이 헤집었다. 이어서 문이 열림과 동시에 수많은 섬광탄이 눈부신 빛을 내며 행차 곡을 성대히 연주해 주었다. 딘나는 헬멧이 시력을 바로잡아주길 기대하며 두 눈을 크게 뜬 채 무기를 조준했다. 그리고 몰락자 무기의 푸른 총구 섬광이 보이길 기다렸다.
하지만 나타난 것은 대공 울드렌이었다. 그는 공이를 당긴 리볼버를 천장에 겨누고 무도회의 여왕처럼 사뿐히 걸어들어왔다. "쉬어." 그가 가볍게 망토를 휘날리며 말했다. 딘나를 포함한 방에 있던 사람 모두가 그의 명을 따랐다. 찰나의 약점이 노출된 대목이었다. 실로 미묘한 존중심의 발로에서였다. 어쨌거나 울드렌은 대공이고, 왕족에게 알현실을 돌려주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졌다. 방아쇠에 댔던 손가락을 떼고 총구를 옆으로 비틀었다-
엄청나게 강한 충동이 딘나의 자제심과 충돌했다. 그러잖아도 울드렌을 바로 날려버리고 싶은 본능을 억제하느라 한번 자제심을 발휘한 다음이었다. 이상하다. 뭔가 잘못됐다.
평범한 인간은 시각적인 자극에 200밀리 초 내로 반응할 수 있다. 각성자라면 100밀리 초 내로 가능하다. 하지만 딘나를 비롯하여 왕실 근위대 전원이 익히 아는 현상이 하나 있다. 일명 주의 과실이라고 하는 인지 오류다. 가령, 무언가가 나타나길 기다린다고 하자. 적, 총성, 커다란 소음과 같은 것들을 일례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기다리던 것이 나타나면 인지 능력이 오류를 일으킨다. 그럼 첫 번째 자극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두 번째 자극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울드렌의 망토 뒤로 번쩍이는 전기 소총의 푸른 섬광에도 적용된다.
물론, 사건이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도 없진 않다. 하지만 간단히 대공을 겨누고 쏠 수 있는 사람은 이 방에 없었다. 역으로 울드렌은 그런 심리적인 저항을 느끼지 않았다.
24. 사절
현명한 자가 우리의 체스 말을 꿰뚫어 보았군'나는 너희 체스 말이 아니다. 나의 의지는 나만의 것이다. 다만… 최근의 내 행동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장 기 말 은 다 양 한 용 도 가 있 다
'상상 이상으로 그렇지.'
그녀의 계획은 다양한 대비책이 마련되어있었다. 탄탄했다.
'너희는 꼼짝없이 당할 거다. 마라 소프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다.'
현명하고 아니고를 떠나 그녀는 다가오는 폭풍을 막을 것이야
'그래…'
무 슨 수 를 써 도 바 꿀 수 없 다
'너무 장담하진 마라. 내가 심판하는 자들은 너희는 절대 모를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
'…'
아무것도.
'…'
아무도 없지
'…'
그럼 우린 왜 두려워하는가? 우린 아홉이다.
'하. 그러냐?'
그 럴 까
'…'
진실 진실이 목소리의 수를 세어보아라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하.'
시간이 흐르면 그들도 우리의 방식을 이해할 것이다. 우린 동일하다.
'그 누구도 너희 방식을 이해하지 않을 거다. 너희는 우리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만 하지, 듣지는 않지 않더냐.'
아 홉
'다섯이겠지.'
그렇다.
'…'
너의 자신감이 부럽구나
'그래?'
배운 게 없느냐? 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그 단어를 써서는 아니 되거늘.
'뭘 보고 알았지? 리프에서 꿨던 초월적인 악몽? 아니면 피를 흘리는 눈을 가진 헌터?'
닥 쳐 라
'너희 같은 존재도 성질은 있나 보군.'
체스 말은 우리에게 힘을 보탤 것이다 그녀의 목표는 우리의 목표니까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 우리다
'그렇고말고. 거부한다. 너희는 절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렇다. 그들이 오고 있다. 그들이 도착하면 그녀는 늘 해왔던 대로 할 것이다. 심판을 내릴 것이야.
'그 점은 동의한다. 지금 나도 너희를 심판하고 있으니까.'
모든 것은 죽는다. 다가오는 폭풍에 맞서는 자들 조차도.
'독선적이긴.'
모 든 것 은 최 후 가 있 기 마 련 이 다
'독선적이야.'
수호자에게 있어 제일 큰 위협은 또 다른 수호자다.
'독선적이로군.'
세 개의 열쇠
'독선이야.'
안전한 피난처는 아주 멀리 있노라
'독선. 네놈들 독선은 이제 지긋지긋해. 난 좀 더 머무를 것이다, 남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