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
데스티니 가디언즈의 지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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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I: 스파키와 대서인
고스트는 작은 모닥불 위 몇 미터 지점에 떠올라 다시 한번 규칙을 설명하려 했다. 빛의 운반자는 질긴 회색 뿌리를 씹고 있었다. 불에 올려 부드럽게 만들어 보니 뿌리의 시큼한 맛이 어딘가 후추에 가까운 것으로 변해 있었다. 놀랍게도 꽤 맛이 있었다.그가 고스트의 말을 끊었다.
"넌 네가 원하는 바를 얘기했고, 난 거기 관심이 없다고 얘기했어." 그는 장난스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얘기한 이름은 하나도 마음에 안 들어.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새로운 이름을 생각해 내거나, 아예 그만두자고."
고스트가 눈높이로 내려왔다. 불빛이 비친 의체가 무지갯빛으로 반짝였다. "제가 벌써 괜찮은 이름을 몇 가지 제시했잖아요." 고스트가 대답했다. "몇 가지는 정말 훌륭했다고요."
빛의 운반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에는 내게 다른 이름이 있었다면서. 그게 뭔지는 얘기하지 않았잖아."
"그건 말할 수 없어요." 고스트가 단호하게 말하자, 빛의 운반자는 입을 다물었다.
고스트는 잡음 같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가상으로 한번 해 보죠." 고스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절 뭐라고 부르실래요?"
"너는… 어둠 속의 빛이지." 빛의 운반자가 말을 시작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의 무게에 짓눌려 그는 잠시 비틀거렸다.
처음부터, 그를 움직이게 한 건 그의 꼬마 고스트뿐이었다. 그가 만나 본 모든 수호자는 전부 다 알 수 없는 과거의 죄악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 외에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견디기 힘들 만큼 성실한 이 고스트는 그를 끝없이 치료해 주었다.
고스트는 격려의 말과 이유 없이 고집스러운 믿음으로 그를 북돋워 주었다. 그에게 연민을 보여 주었다. 때로는, 그가 배 속을 가득 채운 이름 모를 근심과 열기로 몸부림치며 잠에서 깨어나면, 고스트는 그의 가슴에 가만히 앉아 그가 잠이 들 때까지 나지막이 윙윙 소리를 내주었다.
빛의 운반자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니, 스파키라고 부르겠어."
고스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방출하고는 공중에서 의체를 작게 오그린 후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나뭇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빛의 운반자는 웃었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 스파키."
고스트는 아주 희미하게 맥동한 후 나뭇잎 위에서 몸을 굴렸다. 느릿느릿 게으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고스트는 희미한 빛을 깜빡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끔찍해요."
"까다롭긴." 빛의 운반자는 코를 훌쩍였다. "좋아. 다시 해 볼게." 고스트는 조심스럽게 다시 떠올랐다.
"글림은 어때?" 그가 물었다. "플래시? 아니면 글린트?"
"글린트?" 고스트의 눈에 무지갯빛 색이 반짝였다. 이건 아주 복잡한 적의 행동을 계산할 때나 전투의 결과를 분석할 때, 혹은 수백 발의 탄환과 백만 가지 궤도를 계산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오, 글린트 좋은데요!"
빛의 운반자는 불가에서 일어서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스터 글린트."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글린트의 각진 모서리 하나를 흔들었다.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꼬마 고스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네 이름이 생겼으니," 빛의 운반자가 말했다. "나도 조금 더 마음을 열고 내 이름 후보를 들어 보겠어." 글린트는 파트너의 달라진 태도에 감사하듯 공중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불을 껐다.
다음 날 아침, 지나가던 행인이 빛의 운반자가 헬멧을 쓰고 있지 않은 모습을 보았다. 행인은 불타는 망치로 잔인하게 그를 두들겨 패서 쇄골을 부러뜨리고 골반을 짓뭉갰다. 그는 내출혈로 몇 시간 후 죽었다. 글린트는 그를 되살렸고, 둘은 한동안 아무 말없이 걸었다.
3. II: 정체
거미의 소굴에 새롭게 도착한 사람을 환영하듯, 에테르 파이프에서 불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그는 주저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황금색 두 눈이 잔뜩 긴장한 짐승처럼 방안을 이리저리 떠돌았다. 그의 복장은 배신자의 것이었다. 장례식에 어울릴 듯한 하얀색 숄이 무거운 짐을 짊어진 듯 축 늘어진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굶주림, 그리고 자신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증오하는 얼굴 때문에 많이 지치고 여윈 모습이었다. 오직 "연민" 때문에 그에게 쉴 자리가 마련되었다. 덜컹거리는 파이프 사이, 우스꽝스러울 만큼 작은 공간이었다.
거미는 한 손을 입에 대고 왕좌 앞쪽에 걸터앉아, 바닥으로 떨어질 듯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고?" 그는 부관 중 한 명에게 물었다. 상대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한가? 이거 뭐 그런 거 아니야? 그…" 거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달라는 듯 한 손을 허공에 흔들었다. "영리한 계략?" 상대의 침묵은 큰 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흥미롭군." 거미는 미끄러지듯 왕좌를 벗어나며 중얼거렸다. 그는 놀랍도록 우아하게 바닥에 내려섰지만, 걸음걸이는 느릿했다. 약한 척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만하게 손을 내저어 부관들을 내보내고 근처 저장고를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그 안쪽은 파이프가 조금 조용했지만, 사실 큰 차이는 없었다.
수의였던 다 해진 하얀색 천에 감싸인 한 남자가 바닥에 앉아 있었다. 한때 울드렌 소프 대공이라 불렸던 자가 고개를 들어 거미가 문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를 바라봤다. 그는 일어선 후 고개를 숙였다. "남작님." 그는 뭔가 착각한 듯 그렇게 말했다. 거미는 그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럴싸한 가문을 이끌고 있지도 않았다. 거미는 자기도 모르게 떠오른 웃음을 감추려 말했다.
"드렉의 장화 발바닥 같은 꼬락서니군." 거미는 구부정한 자세와 불규칙한 걸음걸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님인 빛의 운반자는 잠시 당황한 듯 고스트를 바라봤다.
"최상의 상태는 아니죠." 고스트가 대답했다. 거미는 무례하게 끼어든 고스트를 꾸짖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의도적으로 그의 말을 무시했다.
"우리 애들이 우주에 떠 있던 널 찾아냈다. 네 우주선이 무슨… 잔해와 충돌했다고 하던데." 거미는 말했다. "이렇게 건져 주다니… 참 착한 녀석들이지." 거미는 방안을 천천히 빙빙 돌았다. 푸른 눈이 어두침침한 공간을 밝혔다. 가까이에서 그는 빛의 운반자의 자세와 표정, 내밀하고 은은한 체취까지 신중하게 평가했다. "진공에 얼마나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거야?"
빛의 운반자는 몸을 움츠렸고,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 듯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영원이 어떤 시간인지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에테르가 주입되어 빛나는 거미의 눈을 바라봤다.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그랬겠지요."
"그래, 내가 원래 그래." 거미가 당당히 말했다. "남을 돕고 사는 사람이지." 빛의 운반자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확신하게 되자, 거미는 새로운 손님에게 느긋하게 다가가 자세히 살펴봤다. "네 이름은 아직 못 들은 것 같은데." 그가 덧붙였다. 마지막 시험이었다.
"저는…" 빛의 운반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고스트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름이 없습니다." 거미는 터져 나오려 하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흠, 그러면 안 되지." 거미는 빛의 운반자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내가 '보살피는' 사람이라면…" 거미는 그 말을 상당히 강조하여 말했다. "괜찮은 이름이 있어야 해."
거미는 조금 더 다가서며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이름을 하나 만들어 보는 게 어때? 임시로라도 말이야. 우리끼리 부르는 이름…" 그가 자갈밭을 밟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까마귀라고 해 볼까?"
빛의 운반자의 두 눈에는 알아들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거미의 눈에 포식자의 강렬한 눈빛이 떠올랐다.
4. III: 그냥 친절함일 뿐
워록은 전쟁 야수를 다룰 줄 알았다. 기갑단 군단병은 워낙 느려서 전면전으로도 충분히 적의 수를 줄일 수 있었다. 거대한 백인대장도 혼자 있을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위쪽 마루에 있는 사이온 세 명이 소총으로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바위 뒤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그녀는 끝장이었다.드루이스는 거친 붉은색 모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욕설을 뱉었다. 적의 저항이 이렇게 거셀 줄은 몰랐었다. 에너지가 부족하여 순간이동을 할 수도 없었다.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손 위에 소용돌이치는 공허 수류탄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산등성이 어딘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총성도 들렸다. 기갑단 납탄 소총의 펑펑 터지는 오존 소리가 아니라, 구식 화약이 불꽃을 튀기는 달콤한 소리였다.
백인대장이 군단병들에게 소리쳐 명령을 내렸지만, 공포가 지휘 계통을 압도했다. 드루이스는 적이 미지의 상대에게 한 명씩 쓰러지면서 내지르는 외마디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폭발과 함께 으르렁거리던 전쟁 야수도 침묵했다.
총성이 가까이 다가왔다. 백인대장이 거칠게 포효하고… 곧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드루이스는 조심스럽게 바위 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계곡 주위에 기갑단 부대의 사체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산등성이에는 사이온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짙은 연기와 함께 검은 기름 냄새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학살의 현장 한가운데에 헌터 한 명이 무기를 집어넣은 채 사체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헌터라는 점을 고려해도 유독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드루이스는 엄폐물 밖으로 나서 손을 들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수호자님!" 그녀가 소리쳤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드루이스라고 해요. 덕분에 살았네요."
헌터의 표정은 묵직한 헬멧 안쪽에 감춰져 있었다. 그는 형식적으로 손을 흔들고는 무릎을 꿇고 백인대장의 무기를 살폈다.
일어서 보니 드루이스의 키가 헌터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컸다. 겁에 질려 바위 뒤에 숨어 있을 때는 누구나 커 보이는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드루이스는 헬멧을 벗고 회색빛이 도는 푸른 피부를 상쾌한 바람에 노출시켰다. 머리 위에 모아 두었던 검은 머리카락이 축 늘어졌다. 그녀는 황금색 눈을 헌터에게 고정하고 미소지었다.
"그냥 단순한 회수 작업이라고 듣고 왔어요." 그녀는 말했다. "보급품을 좀 전송해서 도시로 보내 주라고요. 아침 내내 두통에 시달렸더니, 시끄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헌터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납탄 소총에서 반짝이는 촉매제를 끄집어냈다.
드루이스는 키득키득 웃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장화로 쓰러진 군단병의 사체를 쿡쿡 찔러 보며 말했다. "그렇게 총을 잘 쏘면 얘기할 필요도 없죠."
헌터는 움직임을 멈춘 후 일어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난… 지금은 다들 까마귀라 부른다." 그가 말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헌터는 부드럽고 세련된 목소리였다. 서늘하게 날이 서 있긴 했지만 쌀쌀맞진 않았다.
"나만큼 기쁘진 않겠죠." 드루이스가 말했다. "오늘은 정말 이런 두통을 껴안고 부활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기갑단에게도 그렇게 얘길 했지만 들으려 하지 않더군요. 무례한 녀석들."
까마귀는 정중하게 웃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나도 되살아난 후에는 몇 시간 동안 기분이 언짢으니까."
그는 돌아서서 기갑단의 무기를 더 찾았다. 무언가 워록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헌터는 공격할 채비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 드루이스가 그의 팔을 가리키며 외쳤다. "리프 출신이군요? 전 지구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뿌리는 같아요!"
까마귀가 아래를 보았다. 건틀릿의 가죽이 찢어진 자리로 각성자의 청회색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드루이스는 성큼성큼 걸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손이 엉거주춤 무기를 향해 올라왔을 때, 워록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런 줄 알았어요. 목소리와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더군요." 훤칠한 여자는 장난스럽게 몸을 좌우로 움직였다.
까마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드루이스는 헬멧 속 헌터의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허리띠의 추적기에서 삑 소리가 울렸다.
"이제야 좋은 소식이 있네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가 바로 보급품이 있는 좌표예요." 그녀는 주변 지역을 스캔해서 흘러내린 바위 아래 절반쯤 묻혀 있던 작은 보급선을 찾아냈다. "당신이 이 화물을 기갑단으로부터 지켜 줬으니, 적당히 가져가세요."
"그럴 필요 없다." 까마귀는 말했다. 그는 몸의 중심을 옮기며 노출된 팔을 등 뒤로 감췄다. 드루이스가 본 바로는 그의 첫 번째 어색한 몸짓이었다.
"그럴 필요 있다고는 안 했어요." 그녀가 대꾸했다. "그냥 상냥한 각성자 두 사람이 서로에게 친절을 베푸는 거죠. 금방 끝날 거예요."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작은 보급선의 모래가 들어찬 화물실로 들어가 상자를 찾았다. 상자의 패널에서 빨간색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봉인은 이미 오래전 파괴된 듯했다. 그녀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상자 뚜껑을 뜯어냈다. 그 안에는 때가 잔뜩 묻은 병들이 들어 있었고, 그 안에 담긴 액체는 은은한 주황색으로 빛났다. 그녀는 병을 하나 꺼내 코르크 마개를 열고, 병목을 옷에 문질러 닦고는 한 모금 마셨다. 꿀과 소금 맛이 느껴지는 청량하고 달콤한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운이 좋은데요!" 드루이스는 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헌터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드루이스는 술병을 납작한 돌 위에 올려놓고 그 옆에 앉았다. 친구가 돌아올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기다렸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옷단에서 마른 핏자국을 뜯어내며 괜히 시간만 죽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내리쳤다. 그리고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까마귀를 위하여."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5. IV: 토성
처음에는 경멸자가 두렵지 않았다.여분의 총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까마귀도 개활지에서 그들을 만나면 몇십 명 정도는 멀리서 처리했다. 글린트는 그들도 엘릭스니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움직임이 엘릭스니를 닮은 걸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무지 죽어 있지 않았다.
습격 부대가 남작의 창고를 공격했을 때, 그는 즉시 까마귀에게 지시하여 적을 추적했다. 그는 경멸자가 "사업에 좋지 않다"고 했지만, 까마귀는 후원자의 음습한 어조에서 그가 복수를 갈망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까마귀는 몸을 숨겼다. 신중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경멸자는 후각 덕분인지 그의 기척을 눈치챘다. 그는 적이 자신을 찾아 헤매는 동안 우주선 선체를 납땜해 만들어 낸 경멸자의 영토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그를 도살장으로 밀어 넣었다. 출구가 하나뿐인 버려진 우주선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우주선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까마귀는 자신이 적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싸우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경멸자는 금속판 아래에 썩어가는 육신을 꽉꽉 채워 넣은 존재 같았다. 그들의 몸은 흉터와 부스럼으로 가득했다. 어색하게 붙여 놓은 것만 같은 살점이 군데군데 펄럭거렸고, 헝겊을 뭉쳐 진물이 줄줄 흐르는 구멍을 막아 놓은 곳도 많았다.
까마귀는 리볼버를 재장전하고 작은 적 세 명을 쓰러뜨렸다. 그들은 헬멧이 얇고 뼈 구조가 물렀다. 어느 쪽이든 한 발만 맞추면 충분했다. 놋쇠 아래에서 썩어가는 상처의 시큼한 악취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왼쪽에서 사슬을 금속판 위에서 끄는 소리가 들려 까마귀는 홱 돌아섰다. 거대한 형체가 우주선 선체의 갈라진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까마귀는 총을 쐈다. 생물의 어깨를 뒤덮은 파란색 고름집 일부가 터졌다. 상처에서 희미하게 가스가 새어 나왔고, 냉각수의 매캐한 냄새가 번졌다. 그는 적의 몸에 총알을 박아 넣고 그 사체로 터널을 막았다.
추적자 두 명이 또 다른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의 측면으로 다가왔다. 그는 뒤로 물러나며 재장전했다. 우주선의 통로 안쪽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때마침 불타오르는 향로가 날아오고 있어 재빨리 허리를 숙였지만, 피하지 못하고 머리 옆쪽에 충격을 받았다. 귀가 왕왕 울리고 리볼버는 바닥에 떨어졌다.
추적자가 기쁜 듯 삐익 소리를 내고, 무언가 그를 덮쳐 쓰러뜨렸다. 커다란 약탈자 중 한 명이었다. 너덜너덜한 팔 네 개를 더러운 허리띠로 묶은 모습이었다. 그는 발버둥을 치면서 적의 팔뚝을 묶은 가죽 띠가 뒤틀려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띠는 말라붙은 체액으로 덮여 있었다.
약탈자가 그를 타고 눌렀다. 밋밋한 금속 면갑 아래의 입이 거칠게 포효하고 있었다. 적은 커다란 팔들로 그를 땅에 찍어 눌렀고, 작은 팔 두 개로 소총을 들어 발사하려 했다.
온몸을 있는 힘껏 꿈틀거리며 발버둥치다 보니 약탈자의 비뚤비뚤한 발톱이 까마귀의 볼에 상처를 냈다. 그는 턱에 와 닿은 소총을 두 명의 추적자를 향해 억지로 돌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 총을 더듬거려 방아쇠를 찾았다. 탄환이 연속으로 발사되며 추적자들이 새된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약탈자는 다시 포효하며 까마귀의 손에서 소총을 빼앗아 옆으로 던져 버렸다. 무기가 사라진 약탈자의 작은 팔들이 까마귀의 배를 마구 할퀴었다. 까마귀는 적의 발톱이 자신의 가죽 방어구를 꿰뚫고, 미끌미끌한 피가 복부를 뒤덮는 것을 느꼈다.
미치광이처럼 횡설수설하며, 약탈자는 그를 뒤틀린 치아 쪽으로 끌어당겼다. 금속 면갑 아래 어딘가에서, 그 생물의 입술 없는 입으로부터 까마귀의 얼굴을 향해 점액이 가느다랗게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까마귀는 상대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 공포가 지나간 후, 순수한 혐오감이 찾아왔다. 아무 생각이 없는 광기의 생물에게 갈가리 찢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까마귀는 빛이 약탈자의 팔들보다 더 단단히 그를 둘러싸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물속에서 발을 놀리듯 그 생물을 강하게 차냈고, 배에서 무언가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약탈자의 팔이 허공을 그러쥐었다. 그것은 분노에 찬 시선으로 까마귀의 아른거리는 형체가 비틀거리며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한 손으로 우주선의 녹슨 갑판을 짚고, 까마귀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빛이 수증기처럼 그의 온몸에서 피어올랐다. 칼, 그가 생각하자 발산되는 에너지 중 일부가 그의 손에 모여 칼이 되었다.
그는 일어섰다. 약탈자가 발톱을 세운 손으로 땅을 박차며 돌진해 왔다. 까마귀는 왼쪽으로 피하는 척하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으며 칼을 날렸다.
칼이 생물의 가슴에 박혔다. 그 빛의 칼날이 환하게 타오르고, 생물은 불길에 휩싸였다.
연기는 순수하고, 재는 깨끗했다.
빛이 까마귀의 무기였다. 그가 우주선을 빠져나오고, 빛은 그의 손 위에서 다시, 또다시 포효했다.
글린트가 밤을 가르는 불의 기둥 같았던 까마귀에게 이끌리도록 해준 게 바로 그 빛이었다.
그 생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던 순간, 까마귀가 광기에 휘말리지 않도록 지켜 준 것도 그 빛이었다.
"아버지아버지아버지아버지아버지"
6. V: 테라포사
글린트는 좌표를 다시 확인하고는 거미의 지하 선적소에 들어섰다.그는 비틀비틀 날아 높다랗게 쌓인 상자의 탑 사이 좁은 길을 통과했다. 꿀렁거리는 튜브 코일 아래를 지나고, 깨진 위상 유리 더미를 넘어갔다. 라벤더 향을 짙게 풍기는 연기 너머로 흐릿하게 양자 오팔 같은 것이 보이는 환풍구를 통과했다. (하지만 양자 오팔처럼 불안정한 동위 원소를 개인이 소유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는 행위였으므로, 글린트는 그게 복제품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거미는 창고의 연결부에서 줄지어 선 콘솔을 조작하고 있었다. 섬세하게 연결된 중력 광선의 흐름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그 위에서 화물이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이동했다. 조리개를 닮은 녹슨 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동안, 거미는 자기 영지의 보이지 않는 구석 여기저기로 물품을 보냈다.
"까마귀에 대해 얘기해 봐라." 거미는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글린트는 작은 모니터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경비 카메라 영상이 모자이크처럼 표시되고 있었다. 뒤엉킨 해안의 통로, 기이한 작업장, 까마귀의 숙소까지. 거미는 이내 그 영상을 닫고 글린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친구는 현장에 잘 적응하고 있나?"
"아주 잘하고 있어요." 글린트가 대답했다.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아요. 그런데—"
"좋아." 거미가 말을 끊었다. 그는 지나가는 공기의 흐름에서 갈라진 세라파이트 덩어리 하나를 꺼냈고, 그걸 발톱으로 살며시 만져 본 후 다시 광선 안에 놓았다. "누가 얘기해 준 사람 있나?"
글린트도 무슨 이야기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직접적으로 얘기해 준 적은 없죠. 그도 자기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건 알아요. 수호자들이 자기를 죽이는 걸 보며 그 정도는 알아낸 것 같아요. 하지만 예전 이름을 듣진 못했어요."
거미는 만족스럽다는 듯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뭐든 실수를 한 적은 없고?"
글린트가 두 눈을 반짝이며 희미하게 처리하는 소리를 냈다. 거미가 몸을 기울여 다가왔다. "뭔가 얘기해야 할 게 있나?"
"사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글린트가 말했다. "워록을 한 명 만났는데요, 그가 각성자라는 걸 알아냈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들켰다고?" 거미가 지나가던 상자의 모서리를 강타하며 소리쳤다. 가냘프게 찍찍 울부짖는 소리가 상자 안에서 들려왔다. 글린트는 공중에 뜬 상자가 멀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들킨 건 아니에요." 글린트가 말했다. "그 여자가 건틀릿 아래의 피부만 본 거죠. 그는 자기 신분이 더 노출되는 게 싫어서 그냥 그 자리를 피했다고 얘기했어요."
"그 녀석이 너한테까지 거짓말을 하는구나, 글린트." 거미의 두 눈 속 빛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가 작은 손 하나로 성가시다는 듯 옆구리를 긁었다.
"어차피 시간문제예요." 글린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그의 등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어요. 찰코라는 사람이 그를 미행하기도 했어요. 경멸자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고 해요. 언젠가는 그도 알게 되겠죠."
"내가 다 이유가 있어서 규칙을 정해 둔 거라고."
"규칙을 따르는 것이 그의 본성과 어긋나서요." 글린트가 태평스럽게 이야기했다. 그제서야 거미가 비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만스럽다는 건 알아요. 그가 다음에 또 수호자를 만나면 뭐든 물어볼 수 있는데, 그런다고 제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거미가 으르렁거렸다. "막아야지."
"문제는," 글린트가 말했다. "언젠가 그도 과거의 모습은 아무 상관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지금의 모습이 중요한 거니까요."
"지금의 모습은," 거미가 씩씩대며 말했다. "내가 투자한 거야. 너라도 그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라고." 손상된 상자가 곁을 스쳐 날아가며 중력 광선 속에 아른거리는 미광체를 흩뿌렸다.
작은 고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공중에서 잠시 흔들리다가, 거미의 눈높이까지 올라왔다.
"거미 남작님," 글린트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지 않은 새 삶에서 까마귀는 이미 충분히 잔혹한 대우를 받았어요.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지 충분히 배웠다고요."
글린트는 거미의 경멸을 사색으로 오해하고 말을 이었다.
"그는 이제 다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를 곁에 머물게 하고 싶다면," 고스트는 거미를 돕고 싶다는 투로 말했다. "위협보다는 더 의미 있는 걸 제안해야 할 거예요."
거미는 무례한 작은 구체를 바라보며 가슴 속에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많았고, 또 경험이 많았다. 그는 분노가 흘러나와 주위를 가득 채우게 한 후, 그 검은 물에 몸을 가라앉히고 눈만 수면 위로 내밀었다.
"고맙다, 글린트."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르지."
글린트는 기쁜 듯 삐빅 소리를 내며 공손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겹겹이 쌓인 밀수품 사이를 지나 멀어져 갔다.
7. VI: 망령의 스위치
에테르 파이프가 비명을 질렀다.왕좌 한쪽에 구부정하게 앉아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거미 앞에, 전장에서 돌아온 까마귀가 나타났다.
"남작님." 까마귀가 겉으로만 자애로운 후원자에게 인사했다. 거미는 빛의 운반자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손짓으로 불렀다. 왕좌 앞에 다가선 까마귀는 무릎을 꿇었다.
"네가 떠나기 전에 무슨 얘기를 했었지?" 거미의 수사적 질문이 묵직한 돌덩이처럼 까마귀의 어깨를 짓눌렀다. 까마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대답하려 하자, 거미가 그의 말을 잘랐다.
"수호자는 믿을 수가 없어." 거미가 다시 말했다. "쓸모 있고 강하긴 하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니까."
"남작님, 제 생각은 그저—"
"아니!" 거미가 소리쳤다. "아니야! 네게 생각이라는 게 있었다면 정체를 드러내지도 않았겠지…" 거미는 애써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는 다시 왕좌에 기대앉았고,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듯 투덜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네가 일을 망쳤다."
까마귀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거미가 불만을 품을 때, 화를 낼 때, 격노할 때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다시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 일에서…" 거미는 주저하듯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배울 점이 있을 것도 같구나. 네가 반항하는 모습을 보니 떠오른 게 있어. 수호자는 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자원이지. 특히 우리 둘에게는, 음, 전문 분야라는 게 있잖아."
그제서야 까마귀는 고개를 들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다. 아주 잠깐, 그는 겸허한 자부심을 느꼈다. 어쩌면 이번의 반항을 통해 까마귀가 단순히 편리하게 써먹을 수 있는 빛의 운반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거미에게 전해진 건지도 몰랐다.
거미는 한 손을 내밀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널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야." 그의 목소리는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당연히 까마귀를 한 명의 사람이 아닌 자신이 투자한 상품으로 보고 한 이야기였다. "글린트를 보내라."
까마귀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렇게 빨리 또 한 번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현명하지 않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글린트가 그의 옆에 나타났다. 고스트는 긴장된 눈빛으로 까마귀를 바라본 후 거미를 향해 날아올랐다.
"뭐가… 필요하시죠?" 글린트가 물었다.
아무런 대답 없이 거미는 공중의 글린트를 한 손으로 낚아챘다. 글린트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까마귀는 벌떡 일어섰지만 그와 동시에 거미의 경호원이 그를 향해 전기 창을 뻗었다. 거미는 목 뒤쪽에서 끌끌 소리를 낸 후, 옆에 있던 도구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죽은 고스트의 의체를 뜯어내는 데 사용하는 도구들이었다. 살아 있는 고스트에게도 충분히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뭐 하는 거예요?!" 글린트가 공포에 사로잡힌 목소리로 물었다. 까마귀는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거미의 처벌은 전에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벌을 받는 건… 그의 고스트였다. 한편으로는 지금 자신이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미는 그를 영구적으로 손상시킬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미가 작은 바늘 같은 도구로 충격을 줘서 글린트를 마비시키자, 꼭 그렇게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 거미가 납작한 도구를 글린트의 의체 판 사이에 밀어 넣자 까마귀가 외쳤다. "안 됩니다!"
찰칵, 소리와 함께 거미는 외부 판 하나를 열었다. 그리고 까마귀를 바라보며 도구를 바꿨다.
"걱정하지 마라." 거미는 상대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말은 얼음처럼 차갑게 까마귀의 핏줄을 타고 흘렀다. "그냥 조금… 바꿀 게 있어서 말이야." 그는 절단 토치에 불을 붙였다.
"널 보호하려는 거다… 이 세상으로부터."
8. VII: 부러진 날개
글린트의 의체에는 거미의 삽입물이 남긴 흉터가 보였다."미안하다." 까마귀는 희미하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빛의 운반자로서 막대한 힘을 소유하고 있는 그였지만, 하나뿐인 등불의 창백한 빛으로 밝혀진 작은 은신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무척 자그마해 보였다. 까마귀는 오목하게 모은 손으로 글린트를 보듬고 있었다. 고스트의 외눈이 그를 올려다보며 미약하게 깜빡거렸다. "정말, 정말 미안해."
"괜찮아요." 글린트는 까마귀를 탓할 수가 없었다. "전, 음, 괜찮을 것 같아요. 거미는…" 그는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골라야 했다. "…고스트의 구조를 변경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거든요."
"네 안에 폭탄을 심었잖아!" 까마귀의 새된 목소리가 마구 갈라졌다.
"전 아직 여기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다고요." 글린트가 까마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당신에겐 아직 빛이 있어요. 그게 중요한 거죠."
까마귀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고스트가 입은 손상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입을 다물었고, 방은 침묵에 잠겼다. 오직 그 파이프에서만 빌어먹을 덜컹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까마귀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어쩔 수 없었어요. 과거는 바꿀 수 없어요." 글린트는 조금 갸우뚱한 모습으로 둥실 떠올라 까마귀의 손에서 벗어났다. 날개를 다친 새를 보는 것 같았다. "미래만 바라봐야죠."
까마귀는 억지로 글린트의 깜빡거리는 하나의 눈을 바라봤다. "내 미래는 너야. 내겐 너뿐이라고. 오직 너만이…"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거미가 그의 말을 엿들을까 봐 두려웠다. "너만이 나를 생각해 주니까."
"누가 당신을 생각해 주는지, 직접 만나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거예요." 글린트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까마귀의 얼굴 가까이로 날아왔다. "당신은 포로가 아니에요." 그는 덧붙였다. "당신은… 떠날 수 있어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고요. 빛만 없을 뿐이잖아요."
까마귀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니."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널 버리진 않겠어. 너도 그러진 않을 테니까."
고스트는 시선을 돌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위아래로 까닥거렸다. "맞아요." 그는 다시 돌아서서 빛의 운반자를 바라봤다. 글린트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까마귀의 코에 부드럽게 의체를 맞댔다. "전 당신 곁을 떠나지 않아요."
까마귀는 손을 뻗어 부드럽게 글린트를 감싸 쥐었다. "우리에겐 우리뿐이야." 까마귀가 그렇게 속삭이며 무릎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글린트를 품에 더 꽉 보듬었다. "거미는 우릴 놓아주지 않겠지…"
"…그래도 우리에겐 서로가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