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3 20:46:55

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에바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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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티니 가디언즈의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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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탑에서의 어느 평범한 하루3. 사라진 빛4. 고향에 숨어5. 새로운 규범6. 좋은 싸움7. 마지막 날8. 보호자9. 보이지 않는 흉터10.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1. 개요

이 지식 책은 영웅 이야기 임무를 클리어할 때마다 확률적으로 얻을 수 있다.

2. 탑에서의 어느 평범한 하루

활처럼 휜 눈썹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에바 레반테는 심각한 표정을 지우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주문은 간단해. SIVA 사태의 종결을 기리기 위한 안료가 필요하다는 거지. 그런데, 자발라 씨가 제안한 색상이..."

에바의 동료는 노란 형광색과 피처럼 붉은 색상이 끔찍하게 어우러져, 그 울렁이는 줄무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눈이 아파질 만한 원단을 들어올렸다. 테스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 사람 앞에선 군체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도 벌벌 떨게 생겼네."

두 여성은 탑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서야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둘은 뒤이어 소리가 들려오는 먼 곳으로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렸다. 두 사람 모두 진작 들어본 적이 없는 괴성이었다.

두 사람에겐 훌륭한 휴게실이었던 작은 다용도실에 확성기 소리가 크게 울렸다. "대피 명령 77호 발효 중. 이건 실제 상황이다. 모든 민간인들은 즉시 지정된 대피 구역으로 이동하라."

테스는 황급히 문을 열었고, 곧 보다 가까운 곳에서 다시 폭발이 일어나며 두 사람이 있던 곳이 흔들렸다. 연기와 비명 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에바는 그 후의 일을 드문드문 기억했다. 테스와 함께 헐떡이며 달아나던 기억, 아래 도시에 있는 사촌들의 이름을 되뇌이며 걱정하던 기억 뿐이었다. 한 무리의 군중에 뒤섞인 에바는 밀리다시피 앞으로 나아갔고, 테스는 뒤쳐지고 있었다.

다시 폭발이 일어나며 방화문이 거칠게 닫혔다. 테스의 모습은 없었고, 에바는 자신과 주위 약 30명의 사람들이 탑 북부와 수호자의 전당 사이 격납고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대쪽 문을 열려 애쓰던 남성 하나가 문이 막혔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구체가 충돌해오자 천정이 가라앉았다. 낙하기에서 기갑단이 기어나왔고, 육중한 방어구 때문에 힘겹게 버둥거리며 민간인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 순간 눈부신 에너지가 폭발하며 뒤에서부터 기갑단을 감쌌다. 열 명이 소리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에바가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자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몸집의 수호자 단 한 명이 에바의 키만 한 검으로 기갑단 병사를 마무리하는 모습이었다.

헬멧에 덮인 샤크스 경의 고개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샤크스가 재빠르게 두 걸음 내딛어 에바 옆에 섰다. 에바를 도와 일으켜 세우는 손놀림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대." 샤크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바는 가슴 속에서부터 그 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오."

샤크스의 종용으로 에바는 민간인들의 대표가 되었으며, 샤크스는 그 작은 집단을 이끌었다. 에바의 뒤에 서린 시련의 장 주인의 어렴풋한 존재감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불만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집중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한 대피 현장에 닿았고, 그곳에는 불안해 보이는 매 조종사 세 명이 그들의 매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의 마지막 인원까지 탑승을 마치고, 샤크스는 묵직한 손을 에바의 어깨에 올렸다. 커다란 덩치로 내려다보던 샤크스는 짧게 "동지여."라는 말을 남기고는 전장으로 돌아갔다. 어깨에는 그 거대한 검이 둘러져 있었다. 멀어져 가는 매에서 에바의 눈에 폐허와 불길에 뒤덮인 탑의 마지막 모습이 담겼다.

3. 사라진 빛

"페레그린 구역의 발렌티나와 그 집 아들 루이스! 아파트 10번 블록 4층! 초록색 차양이..." 목소리는 근처 폭발음에 거의 삼켜졌으나, 에바는 통신 장치에 대고 더 크게 소리쳤다. "초록색 차양이 달린 집이라고! 제발!"

반대편 민병대 여성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병력을 보내겠습니다, 에바 님! 하지만 그쪽 구역 전반에 걸친 전투가..."

"내가 탑의 권한 코드를 주지 않았나?" 에바는 분노로 빗발치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다.

상대편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토지, 통신 종료."

에바는 털썩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언젠가는 빵집이었던 곳이리라. 작은 카페 테이블은 이제 문을 막고 있으며, 카운터의 유리 진열장은 반대쪽 벽에 진열용 선반과 함께 뭉개져 있었다.

에바가 통신 장치를 빌린 민병대 엑소들이 매장 외부에 남아있던 반벽 너머로 다시 몇 차례 사격을 가했다. 에바 쪽을 돌아보며 불안한 듯 물었다. "화기 쏠 줄 아십니까?"

대답 대신 에바의 무기력한 모습으로 충분했던지, 통신 장치에 손을 뻗었다. 에바가 바닥으로 밀어 넘겨준 통신 장치를 받은 그들은 재빨리 일련의 코드를 입력했다. 가까운 곳에서 다시 폭발이 일자 민간인들은 두려움에 흐느끼며 신음했다.

엑소가 장치에 대고 외쳤다. "수호자 지원이 필요하다. 앵커 구역 1400번 블록 모퉁이! 많은 민간인들을 보호하고 있다. 우리가 밀리고 있다!" 엑소들은 반벽에 기대어 다시 대여섯 발 사격을 가하는 것으로 통신을 마쳤다. 기갑단은 분노를 담아 짐승처럼 포효했다.

2분도 지나지 않아 에바는 참새 하나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선명한 소리를 들었다. 에바는 몸을 반쯤 웅크린 채로 용기를 내어 건물 밖을 내다봤다. 마침 헌터와 워록 한 쌍이 복수의 천사처럼 침략자들 위로 내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둘은 전문가다, 에바는 생각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의 움직임은 효율적이며 치명적이었고, 병력들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무언가 일어났다. 에바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볼 수 없었지만, 두 수호자 모두 비틀거렸다. 워록은 그를 조종하던 실이 끊긴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었다. 헌터는 머리를 흔들더니 그녀의 손을 허공에 올렸다. 분명 빛을 부르는 신호이리라... 허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갑단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맹공을 퍼부었다. 백인대장 하나가 돌진해와 헌터를 덮치고 짓밟았다. 워록은 회복의 낌새도 보이지 못하다 이내 십여명 병력의 사격을 받아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엑소들은 충격받은 채 서있었다. 에바가 입을 열어 몸을 숙이라고 말하려던 순간, 그들은 저격수의 표적이 되어 쓰러졌다.

그중 하나는 공포에 질린 채 모퉁이에서 구역질을 해댔다. 에바는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통신 장치를 낚아채고 민간인들을 헤치며 반대쪽 창으로 향했다. 강화 케이스를 휘둘러 유리를 깨고 창틀에서 조각을 제거한 다음 어린 아이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에바는 맨 마지막으로 건물을 빠져나왔고, 그 순간 유탄 몇 발이 에바 근처를 지나며 벽에 박혔다.

일행은 추적자가 없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달아났다. 에바는 여기가 어느 구역인지, 이 건물은 무슨 건물이었을지 알 길이 없었다. 에바가 알던 질서 정연한 거리와 잘 닦여진 도로는 이제 잔해로 이루어진 아수라장이었다. 쓰러지고 파괴된 구조물로 만든 미로와도 같았다. 최후의 안전한 도시란.

아이들은 개중 나이 많은 아이가 조용히 말을 돌려 저들끼리 한 무리로 모였다. 모두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치기를 반복했지만, 그 와중에도 숨을 죽이려 애썼다.

에바는 통신 장치에서 나는 높은 알림음에 화들짝 놀라 벽에 뒤통수를 찧었다. 장치를 아직 가지고 있단 사실조차 새삼 깨달은 참이었다. 장치에 손을 뻗어 패드를 조작했다.

숨죽인 목소리가 들려봤다. "에바 님?"

놀랄 만큼 거칠고 낮은 목소리였다. "여기는 에바 레반테. 토지인가?"

순간 정적이 흘렀다. "토지는 죽었습니다. 제가 에바 님께 누굴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만." 보다 긴 정적이 흘렀다. 에바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죄송하지만, 에바 님. 10번 블록은 사라졌어요. 제 생각엔 자동 방어선 일부가 전투 초반에 어떻겐가 작동하면서, 녀석들 사령선 하나가 떨어져 충돌한 게 틀림없을..."

에바는 그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4. 고향에 숨어

에바는 가슴에 안고 있던 통신 장치의 시계를 확인했다. 그럴 리가 없었겠으나, 테스와 앉아 수다를 떨던 때로부터 두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에바의 시간이 늘어났다. 여명의 축제 기간에 상인들이 팔던 엿가락처럼. 최소 며칠,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흘렀을 터였다. 사촌의 아파트에 앉아있던 때, 발렌티나와 포옹을 나누던 때, 루이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던 때로부터...

"에바, 우리가 이들에게 빚을 진 것도 아니잖아요." 민간인 하나가 내는 거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사포를 문지르는 소리와 같았다. 잿가루가 공기를 메웠지만, 헛기침으로 목을 다듬는 사람은 없었다.

에바는 천조각을 쥐어 입에 가져다 대며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걸 말이라고?" 분노에 찬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까지 평생 당신을 지켜줬는데, 이제 와서 이들을 버렸으면 좋으시겠다?"

두 사람 언쟁의 불씨는 창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네 명의 수호자, 각자 부상을 입은 채 화려한 방어구 사이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들 작은 집단의 미래를 저울질하면서도, 에바는 그들의 패션 센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헌터는 물론 최선을 다했다.

에바와 말다툼을 하던 남자는 배불뚝이에 패션이란 말은 들어보지도 못한 것 같은 자로, 특색 없는 유니폼으로 회의의 직원이라는 사실을 잘 대변하고 있었다. 남자는 에바를 노려보다 짜증을 냈다. "우리도 겨우 움직이기만 하는 게 고작인 상황에, 우리는 고사하고 부상당해 힘없는 수호자라니. 왜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

"이들이 당신을 위해 수없이 위험을 무릅쓴 건 모르나 봐요?" 에바는 천조각을 얼굴에서 거두며 기침과 함께 잿가루 섞인 가래 한 덩이를 뱉어냈다. 에바의 어머니가 봤더라면 충격을 받아 다시 세상을 떴을 일이다. "계속 움직여야 해요. 이들도 함께 갑니다. 버텨야만 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든지, 일시적인 걸 테니까요."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에바는 말을 이었다. "수호자들이 빛을 되찾기만 하면, 분명히..."

통신 장치에서 갑작스런 잡음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에바의 공세는 거기서 멈췄다. 소리가 너무 커서 장치를 떨어뜨리고 말 정도였다. 강화 케이스에 그 충격이 전해지며, 자발라 사령관의 굵은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려왔다. "최후의 도시 시민 여러분,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민간인들은 갈증에 죽어가는 자들처럼 통신 장치에 둥글게 모여들었다. 자발라는 모두의 기둥이자 희망의 횃불같은 존재였다. 분명히 그랬다...

"우린 도시를 포기할 겁니다. 대피할 수 있는 인원은 모두 대피를 마쳤지만, 기갑단이 거리에서 수호자들을 사냥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황야 쪽으로 움직이십시오." 에바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기갑단이 여행자에 어떤 장치를 연결했고, 우리는 빛과의 결속을 잃었습니다. 도시를 지킬 수도, 여러분을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자발라가 조심스레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이어지는 자발라의 목소리는 녹초가 된 듯 했다.

"이 행성계 어딘가에 집결 지점을 확보할 겁니다. 소식을 기다려주십시오. 언젠가 도시로 돌아올 겁니다. 단...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몸조심하시고, 굳건히 버티십시오." 자발라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지금까지 그랬듯, 소리를 치거나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단 몇 시간만의 일이었으나, 그들은 현재 위치를 떠나지 않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울음을 참을 수는 없었다. 재로 뒤덮인 얼굴에 눈물이 자국을 남겼다. 그 얼굴들은 각자 상황을 파악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에바는 울지 않았다. 통신 장치를 바라보며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자발라의 어깨뿐이었다. 에바는 자발라와 견갑 크기에 대해, 특히 그 왼쪽 어깨의 커다란 방어 철판에 대해 농담을 자주 주고받았다. 이제는 어째서인가 이해할 것 같았다. 자발라가 어깨에 짊어진 무게를...

에바는 일어섰다. 모든 눈이 에바를 향했다. 약간 주춤했지만,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다들 떠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에바는 수호자들을 가리켰다. "우리가 이들이 살아남게 도와주면, 이들은 우릴 안전하게 보호해줄 수 있을 겁니다." 둘러보니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보였다.

"어디로 가나요?" 한 여성이 물었다.

에바는 고개를 돌려 통신 장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갑단이 이 이야기를 들을 겁니다. 우리가 달아날 걸로 예상하고 벽을 감시하겠죠." 고개를 들어 바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여기 있을 겁니다. 도시의 끝자락으로 향해 기갑단이 예상하지 못할 곳을 찾을 거예요."

재봉사 에바는 바닥에서 통신 장치를 주워 어깨에 매었다. "다들 일어나세요. 황혼의 틈까지는 먼 여정이 될 겁니다."

5. 새로운 규범

도시의 외곽 지역까지 닿는 일만 해도 고역이었다. 사람들은 매일 기갑단의 제어권이 좁혀오는 것을 보았다. 민간인 무리나 특출난 수호자들이 돌파를 시도했으나 살육에 굶주린 함선 무리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거리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찰병들이 줄을 지어 배회하고 구역 중심부에는 탱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수 년 간 수호자들을 도우며 그들의 한담을 들어온 에바의 머릿속은 이 끔찍한 침략자들에 대한 정보로 가득했다. 에바는 상대가 우직하게 블록 단위로 습격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융통성 없고 더딘 움직임이었다. 탑을 습격했을 때도 그랬다.

사람들은 숨어서 동태를 살피고, 기갑단이 움직인 후에만 움직였다. 이렇듯 조심스레 도시의 먼 곳까지 닿았다. 오랫동안 버려져 벽에 인간의 그림자만 간신히 드리우는 곳이었다.

에바는 매일같이 회의에 참석하며 다시 중심부로 향할 수렵 정찰대를 꾸렸다. 저녁에는 앞으로의 전략을 세웠다.

늦은 시간에는 실과 바늘을 들고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만족스러웠다. 생존자들이 이동할 때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수호자들 중 타이탄은 황혼의 틈에 오는 길에 목숨을 잃었지만, 나머지 세 명이 회복했고, 여러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수호자들의 제안에 따라,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루, 또는 이틀 이상 같은 장소에 머무르는 일이 없었다. 밤마다 감시 초소를 마련하고 낮에는 통신 장치를 켜고 소식을 기다렸다. 희망을 담은 메시지가 전송되길 바라며.

수호자들이 자발라의 목소리를 들었고, 에바도 함께 있었다. 자발라의 짧고 간결한 성명이 반복됐다. "이 행성계에 빛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우린 타이탄에 집결합니다."

에바는 다른 민간인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문을 닫고 성명을 들었다. 탐이라는 워록은 자신을 트린의 언니라고 밝히고, 단호하게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 타이탄으로 향해야 한다는 뜻을 비쳤다. 라모스라는 헌터는 그만큼 단호하게 이곳에 남아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논쟁이 가라앉자 세 수호자의 시선은 모두 에바를 향했다. 에바는 두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여러분 모두 옳은 일을 할 것이라 믿어요." 수호자들은 남기로 했다. 그리고 재빠르게 그들의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뜻을 모았다.

단순한 생존으로 시작된 일이 최후의 도시에서 민간인을 구출해내는 커다란 움직임으로 번졌다. 수렵에 나섰던 이들은 결국 남아있던 수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다. 정찰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도시의 끝자락을 탐사하고 탈출 장소를 찾아냈다. 기갑단의 순찰이 느슨한 곳이었다.

에바는 탑에서 휴일을 계획할 때 썼던 기술이 지하 조직 활동을 계획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느꼈다. 옛 교실의 칠판을 그러모아 일정표를 만들고, 오래된 이면지와 소식지 뒷면을 써서 민간인들과 가끔 보이는 빛을 잃은 수호자들의 "운송용 포장"을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것은 에바의 일상이 되었다. 에바는 지하 조직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뒤에서 항상 계획과 이동, 그리고 바느질을 반복했다. 마침내 농장과 연락이 닿고 생존자들이 EDZ까지 가야할 때조차 에바는 늘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도록 자신의 일을 했다.

얼마간 고민을 마치고, 에바는 자신의 역할이 다른 사람들에게 퍼지지 않기를 바랐다. 테스 같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말을 전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도시를 빠져나갈 기회는 열 번도 넘게 있었다.

하지만 그 길로 빠져나갈 생각이 들 때마다, 수송선에 함께 오를까 하다가도 멈춰 물러섰다. 그리고 하던 일을 했다.

에바 레반테의 붉은 전쟁은 그렇게 지나갔다.

6. 좋은 싸움

"할머니? 에바 님?"

속삭임에 가까운 작은 소리였으나, 에바를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방향을 잃고 빙글 도는 듯한 순간, 에바는 자신이 페레그린 구역의 거실에 앉아있는 것처럼 느꼈다. 아끼는 담요가 걸쳐진 소파 끝자락,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를로스... 하지만 그 사람은 카를로스가 아니었다.

헌터 라모스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에바를 바라봤다. 지하 조직에서 함께 지내며 에바를 할머니라 부르는 수호자들 수가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라모스는 몇 달이 계속되는 전쟁 동안 사람들과 쭉 함께 있었다.

때로는 과잉 보호라 느껴질 만큼 보호 정신이 투철했다. 에바는 한숨을 쉬고 눈을 비비며 물었다. "일어났네, 일어났어. 지금 몇 시인가?" 방금 전까지 누워있던 오래된 소파에 앉아 자기 전에 만지던 매듭을 정리하려 손을 놀리던 에바가 움찔했다.

"7시가 다 되었다고?" 라모스의 낮은 목소리가 살짝 멋쩍어하는 느낌이었다.

에바는 라모스를 바라봤다. "자네, 한 시간 전에는 날 깨웠어야 하지 않나."

라모스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다. "좀 주무셔야죠."

에바는 조심스레 일어났지만 떨리는 다리로 휘청였다. 고개를 돌려 곤란한 표정을 감췄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나?"

"이제 막 도착했어요. 그래서 안 깨웠죠. 한 10분은 더 있어야 할머닐 찾을 걸요." 마땅한 일을 했다는 말투였다. 에바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고맙네, 라모스. 자네 말이 맞아. 잠이 모자라긴 했거든. 지난 밤에도 늦게까지 깨어있던 바람에 말이야. 가서 바로 내려간다고 전해주게."

"네, 할머니." 라모스의 목소리가 밝아졌고, 발걸음 소리도 경쾌했다.

에바는 2층 아파트의 거주 구역을 지나 욕실로 향했다. 아침 일과를 마치고 마개를 뺀 싱크대에 식량 용기를 담고 물을 틀며 세수를 했다. 버려진 건물의 낡은 소파에서 잔 듯한 찝찝함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코 끝에 물방울이 흐르고, 에바는 더듬거리며 수건으로 쓰는 천조각을 집어 얼굴을 닦았다. 눈을 뜨자 앞에 낯선 이가 보였다.

에바는 항상 마른 편이었다. 어머니가 음식을 남기지 말라고 꾸짖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지금 에바를 바라보는 낯선 이는 분명 수척해보였다. 처진 눈 밑과 끔찍히도 짧은 머리카락보다 심한 건 복장이었다. 공습이 있던 날부터 입었던 옷은 일부러 거칠게 입은 것도 아니었는데 2주일도 가지 못했다. 자신이 입으려 직접 기워 붙인 남루한 복장은 여기가 탑이었더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겠으나, 이곳에선 그럴 수 없었다. 그나마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숄은 건져낼 수 있었다.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게 해주는 무언가...

어느새 거실에 들어온 에바는 그 좋았던 시절을 생각했다. 아래층에 사람들이 모인 이유도 물론 그것 때문이었다. 지하 조직의 모든 구역 대표가 중요한, 그리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대화를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지하 조직에게 붉은 전쟁은 엄청난 승리였다. 그들은 승리했다. 도시에 남은 민간인과 수호자들은 그들이 원해서, 또는 갈 수 없어서 남은 자들이었다. 에바는 안타까운 마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몇 주에 한 번씩 수호자 무리가 안전할 것으로 예상되던 벙커에서 군단의 공습으로 물러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최초의 공습에서도, 지난 몇 달 사이에도 엄청난 수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판자로 엮은 창 틈 아래로 거리를 내려다본 에바는 만족감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제 남은 건 농장을 향하는 지하 조직과 호손이 이끄는 무리였으며, 그 수는 충분히 안전해 보였다. 에바의 시선은 빈 거리에서 위로 올라가 저 멀리 뒤틀려 폐허가 된 탑으로 향했다.

에바는 머물기로 결정했다. 라모스 같은 수호자가 이따금 자신을 챙겨줄 수 있을 것이나, 누군가는 뒤에 남아 등대 역할을 해야만 했다. 아직 살아남은 피난민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 빠져나갈 길만을 찾고 있는...

에바는 창에서 등을 돌리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 순간 아파트 앞 거리를 폭발이 휩쓸었고, 에바의 세상은 하얗게 변했다.

7. 마지막 날

에바는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 벌써 두 번째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아무런 경고도 없었다. 몇 초 가량 머리 위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거대한 폭발이 지하 주택가 앞 거리를 휩쓸었다.

폭발에 휘말린 그녀는 인형처럼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기갑단 병사들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수호자의 무기가 발사되는 독특한 소리가 거기에 화답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벌떡 일어서서는 산탄총이 놓인 방 구석 협탁을 향해 달렸다. 세 걸음, 네 걸음을 걸은 후에 무기를 손에 들고 확인을 마쳤다. 그 순간 현관문이 날아가고 사이온 둘이 무기를 꼬나든 채 안으로 들어섰다.

탑의 재봉사였던 에바 레반테라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거울 속에 보이는 수척한 여성은 벌써 몇 달째 사격 연습을 해 왔다. 끝없는 훈련을 거치며 이 순간을 대비해 왔던 그녀의 첫 번째 사격은 적 하나의 오른쪽 가슴에 박히며 그대로 상대를 방 밖으로 날려 버렸다. 하지만 고된 훈련에도 반동에 대한 대비는 제대로 되지 않았던 건지, 팔 속의 무언가가 부러지는 느낌과 함께 무기가 흔들렸다.

그 피격 반동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섰고, 덕분에 다른 기갑단 생물이 발사한 탄환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거칠게 고함을 외치며 그녀는 무기를 들어올렸고, 그녀의 응사에 적은 반대쪽 벽에 처박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한 손으로 무기를 재장전했고,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다. 밖에서 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래층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녀가 필요했다. 그녀는 무기를 내밀고 문으로 다가섰다…

군견이 창문을 박살내며 들어오는 소리는 또 한 번의 폭발 같았다. 에바가 뒤로 빙글 돌아서자 비늘로 뒤덮인 야수는 종종걸음으로 옆으로 비켜섰고, 다시 두 마리가 공중에 떠 있는 병력 수송선으로부터 좁은 거실로 뛰어들었다. 야수들은 놀랍도록 우아하게 바닥에 내려섰고, 셋 모두 굶주린 눈빛으로 재봉사를 바라봤다. 송곳니가 불쑥 삐져나온 주둥이 세 개가 입맛을 다시고, 흘러내린 침이 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

에바는 총을 발사했다.

야수가 돌진했다.

8. 보호자

에바 레반테는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헛간 외벽에 기대어 서서 농장의 축구장을 바라봤다. 낡은 그물이 축 늘어져 있었다. 다시 걸어야 했다. 그물을 다시 묶을 만큼 이곳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농장의 현 거주민들은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축구장 너머에는 유럽 데드 존의 구불거리는 언덕이 이어졌고, 지평선에는 폐허가 되어 뒤틀린 여행자의 조각이 돌출된 모습이 보였다. 집에서 공격을 받던 날 다친 상처에서 회복하고 처음 다시 일어섰던 때, 그녀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각 주위로 구름이 느긋하게 맴도는 모습을 지루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에바는 미소를 지으며 벽에 기댔던 체중을 지팡이에 옮겨 실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그 지팡이는 에바가 똑바로 설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루할 만했다.

농장에서 처음 맞이했던 며칠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것처럼 정신 없이 치료를 받으며 지나갔다. 주치의도 황급히 치료를 마치자 마자 농장을 떠나야 했다. 그건 도시를 탈환하기 위한 대규모 작전, 붉은 전쟁의 막바지였다.

지하에서 온 노파는 우선순위가 낮았다. 그리고 그런 소란이 벌어지는 와중에 그녀가 보고 싶어 했던 옛 친구들은 농장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이제 그녀는 혼자였다. 아니, 거의 혼자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해독가 타이라 칸이 농장의 우편 프레임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요 작전이 다시 도시로 무대를 옮긴 후, 다비는 타이라의 비공식 연구 조수가 되었다. 둘은 계속해서 데드 존의 시선으로 인류의 역사를 연구하고 관찰했다. 타이라 칸은 그 모든 소란에서 한 걸음 비켜선 데드 존에 머문다는 사실에 꽤나 기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찰병 데브림도 가끔 한 번씩 들러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장난기가 발동할 때면 그는 찻잔 위로 짓궂게 히죽 웃으며 에바가 속한 작은 무리를 "늙은 전문가 클럽"이라고 부르곤 했다.

물론 두 사람에게는 아직 공식적인 직무가 있었고, 둘 다 자신의 역할에 아주 진지하게 임했다.

에바는 비공식적으로 농장에 머무는 중이었다. 물론 농장에서 그녀의 역할은 작전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시 일을 시작하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었다. 테스와 밴시는 가끔씩 도움을 요청해 왔고, 그래서 그녀도 새로운 공간을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 조언해 주곤 했다.

하지만 에바가 농장에 머무르는 건 길을 잃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둘씩 그곳으로 흘러들었다.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조각이 그들과 소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곳을 찾아와서 멍하니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힘을 잃은 수호자로서 붉은 전쟁을 견뎌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털어놓았다. 그들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한 걸음 옆으로 밀려나 말 그대로 전쟁의 방관자로 살았다.

빛이 돌아왔을 때, 그들 중 일부는 뭔가 느낌이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맞지 않는 양복을 입은 것처럼 피부 아래가 불편하다고 했다.

에바가 가장 똑똑히 기억하는 건 약해진 엑소 여성 한 명이었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키가 작은 엑소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 그 여성은 말을 할 때도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불안한 듯 비틀거리고 꿈틀거렸다.

많은 수호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빛이 왠지 예전처럼 꼭 들어맞지 않는 기분이라는 말을 하자, 에바는 여느 때와 같은 질문을 했다. "그게 빛이 달라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당신이 달라졌다는 뜻일까?"

9. 보이지 않는 흉터

에바의 작은 방에 있는 통신 장치가 요란하게 삑삑거리며 곤히 자고 있던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작은 별채를 데드 존에서 가져온 각종 천과 미술품을 활용해서 편안한 집과 같은 공간으로 꾸몄다. 하지만 요즘 갑작스레 잠에서 깨면 으레 그렇듯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며 침대를 빠져나와서는, 옆에 있는 가구를 붙잡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전쟁 야수가 입힌 피해는 그녀의 몸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다리에서 브레이 기술로 뼈와 힘줄을 결합시킨 부위가 뻐근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통신 장치 앞에 있던 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통은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었을 방이 화면의 빛으로 은은하게 밝아진 상태였다. 그녀가 흐릿한 눈으로 통신 장치를 들여다보자, 테스 에베리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도시는 지금 한낮이었고, 테스는 흠 잡을 데 없는 근무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여기 지금 몇 시인지 알아?" 에바는 짜증스러운 기분을 숨기려 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 알아." 테스의 목소리를 듣자 에바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테스는 긴장한 기색이었다. 마치… 공포에 질린 듯했다.

"테스, 무슨 일이야? 괜찮은 거야?" 에바는 완전히 잠에서 깼다. 그리고 몸을 덮은 청록색 로브를 꼭 여몄다. 갑자기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 그냥… 바로 알려주고 싶었어. 지금쯤 타이라도 라훌의 연락을 받고 있을 거야." 테스는 고개를 숙여 외면했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카메라를 똑바로 들여다봤다. "자기, 케이드가 죽었어. 어제 리프에서 뭔가 일이 생겼어. 나도 아직 자세한 건 모르지만, 다들 그 얘기를 하고 있어."

에바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는 헌터 선봉대의 그 사람을 크게 좋아한 적은 없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그에게 의지해 왔다. 그리고 케이드-6를 죽일 수 있는 막강한 상대라면… "군단인가?"

테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떠도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쪽은 아직 조용해." 그녀는 에바가 연락을 받은 이후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소문의 근원이라는 게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건지는 잘 알잖아. 무슨 일인지는 아무도 몰라."

에바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앉아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유감이야. 당신이 그 친구를 좋아했던 거 알아." 테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러지 마. 시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잖아."

테스는 아무 말 없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식이 열릴 것 같아. 혹시 그때 돌아오지 않겠어?"

이번에는 에바가 화면에서 고개를 돌릴 차례였다. 누군가 그녀에게 돌아오라는 말을 한 건 그게 처음이었다. 게다가 장례식에 참석하라니. 에바가 뭔가 핑계를 대려던 찰나, 테스가 입을 열었다. 걸걸한 목소리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여기 오는 김에 프레임들의 축제 프로그램을 정리해 줄 수도 있겠지."에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프레임들이 나 없이 축제를 열고 있다고?"

테스의 미소가 환한 웃음으로 커졌다. "우리도 놀랐다니까!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축제 장비가 필수 보급품과 함께 포장돼서 새로운 탑으로 배달됐어. 그리고 당신 프로그램이 작동을 시작했을 때, 프레임들이 꼬리표가 달린 상자를 찾아낼 수 있었고." 테스는 통신 장치를 들어올린 후 렌즈의 각도를 조절하여 방 구석에 있는 마네킹의 머리 위에 놓인 '여명' 모자를 비췄다.

에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 빼놓고 여명을 즐기려 하다니."

테스의 얼굴이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 "여름 동안에 아이코라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종전 기념 이벤트를 준비했었지."

에바는 짜증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어땠어?"

테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 잘 알겠지만, 그냥 괜찮았어." 테스는 에바의 입가에 긴장한 표정이 스치는 것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자기 같은 감각은 없었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 웃으니까 기분이 좋네. 탑으로 돌아와! 추모식에만 참가해도 좋아. 널 껴안아 준 지도 몇 년은 된 것 같으니까 말이야."

어두운 방 안에서 에바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지평선에서 희미한 빛을 발하는 조각은 과거의 상징인 일종의 닻 같았다.

에바는 다시 친구를 돌아보며 미소를 떠올렸다.

그 엑소는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 눈을 가늘게 떴다. 농장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보통 그런 식이었다. 때로는 그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수호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농장에서 몇 주를 보내며 에바처럼 멍하니 조각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간혹… 농장을 찾아왔다가 아무 대답도 얻지 못하고, 터벅터벅 걸어서 지평선의 거대한 지형지물을 찾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에바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농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한 삶이었다. 또 하나의 이상한 시간, 그녀가 바란 적 없었던 또 한 가지 역할. 하지만 알고 보니 그녀는 솜씨가 썩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10.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에바 레반테가 창고의 문을 열자 악취에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따라온 두 프레임을 보며 안쪽을 가리켰다.

"먼저 이 구역 전체를 소독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여기가 깨끗해지면 그때 상자를 가져오자고." 두 프레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삑 소리로 긍정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둘은 입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멋대로 빗자루질을 시작했다. 에바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옷에 먼지를 묻히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주위에서 시장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휴식 시간을 맞은 민간인들은 카운터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쇼핑을 하는 사람들은 가판대를 뒤적였다. 프레임은 청소를 하고 정찰을 하고 물품을 전달했다. 사방에 수호자가 있었다. 그들은 눈에 띄는 색으로 무장한 채 이리저리 뛰고 하늘을 날고 도약했다.에바는 얼굴을 찌푸렸다. 테스와 (어느 정도는) 아만다의 꾀임에 빠져 돌아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 어느 것도 옳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 무엇도… 편안하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이 공간에 그녀의 물건을 보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진영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열고 닦았을 물건이었다.

그녀는 시장의 보도 중 하나를 따라 놓인 벤치를 발견하고는 감사한 마음으로 거기에 앉아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도시에서는 늘 그랬지만, 군단이 공격해 온 날 이후로 패션은 아주 빠르게 변화해 갔다. 그녀는 아직도 따라잡는 중이었다.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호흡기 마스크가 사람들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세련된 장식 역할이 더 컸다. 도시를 재건하고 복원하던 시절에 필요했던 물건이 그대로 남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수호자들! 테스는 에바가 돌아온 이후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빛의 운반자 세트와 관련된 패션 트렌드에 대해 알려줬는데, 그건 에바도 깜짝 놀랄 만큼 인상적이었다. 테스와 무기제조사, 심지어 선봉대까지 엄청난 실력을 발휘한 것 같았다. 그녀가 옛 탑에 머물렀던 때에 비해 방어구 디자인과 안료 배합 기술이 극적으로 향상된 모양이었다.

"내가 이제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녀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수호자 한 명이 옆을 지나갔다. 완전한 문장이 헬멧 위쪽에 표시되고, 워록 로브가 산들바람에 하늘거리며 휘날렸다.

"저거야." 에바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간 후 프레임들에게 청소를 중단하라고 말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가죽 트렌치 코트에 반짝이는 검은색 투구를 쓴 수호자였다.

"에바?" 변조된 목소리였다. 헬멧에 비친 에바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장갑을 낀 손이 위로 올라와 투구를 벗었고, 그 자리에 라모스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할머니! 저예요!" 그는 에바를 힘껏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못된 녀석 같으니. 감사 인사를 할 기회를 안 줬잖니." 그녀는 그의 품을 벗어나며 상냥하게 상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여자의 생명을 구해 주고는 그대로 도시를 탈환하러 떠나 버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모스는 웃었다. 그녀가 지금껏 본 모습 중에서 가장 행복해 하는 표정이었다. 빛이 그의 주위에 한가로이 머물러 있었다. 그는 옆에 서서 머뭇거리는 시선을 던지고 있는 두 수호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친구들, 이분이 에바 레반테 님이셔!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하지? 이 여성은 그야말로 전설 그 자체라고!"

그는 두 수호자를 향해 손짓했다. "에바, 이 두 친구는 미광체처럼 반짝반짝해요. 군단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수호자가 됐죠."

에바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 다 만나서 반가워."

한 사람은 어색하게 손을 들어 올려 인사를 했고, 나머지 하나는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시죠?"

에바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사실 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라모스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분은 아주 끝내주는 재봉사셔! 전쟁 영웅이고! 그리고 그 전에는 탑 생활의 기둥 같은 분이셨어. 너희가 그렇게 좋아했던 여명 축제 기억해? 에바가 그걸 탑에 도입하셨다니까!"

두 사람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대체 어떻게 하셨길래 자발라 님이 그렇게… 그러니까…"

에바는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일을 허락했느냐고?" 그녀는 세 명의 수호자가 보인 반응에 웃음을 터뜨리며 지팡이로 땅을 두 번 두드렸다. "아주 재미있는 속사정이 있지. 다들 시간은 좀 있어?"

라모스는 웃었다. "물론이죠! 자, 음식을 가져올게요. 그리고 이 수호자 유치원생들에게 탑의 일원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가르쳐 주시면 됩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에바 레반테는 최후의 안전한 도시의 보루인 탑의 시장 광장을 쉽게 가로질렀다. 여기가 고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