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15 19:00:46

환수(환초)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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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桓脩
(? ~ 404)

동진환초의 인물로 자는 승조(承祖). 예주 초국(譙國) 용항(龍亢) 출신. 환충의 아들이자 환겸의 동생이다.

2. 생애

간문제의 딸인 무창공주와 혼인하고 이부랑에 임명되었다가 여러 차례 승진해 좌위장군에 이르렀다.

융안 2년(398년) 7월, 왕공이 초왕(譙王) 사마상지를 토벌하기 위해 참군 하담지(何澹之), 손무종(孫無終)에게 군사를 주고 구용(句容)을 쳤다. 이에 환수는 보국장군 도무기(陶無忌)와 구용으로 달려가 왕공의 반군을 막았다. 이후 왕공의 사망 소식을 들은 손무종이 사자를 보내 투항하니, 환수는 군대를 거두고 수도로 돌아갔다. 당시 왕공에게 호응했던 형주자사 은중감, 양전기 등이 석두성(石頭城)에 이르렀는데, 조정에선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해 경사가 혼란했다. 이때 환수가 나아가 말했다.
"은중감, 환현 등은 왕공을 우두머리로 삼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공이 파멸했으니 실색하여 혼란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환현에게 조서를 내려 회유한다면, 환현은 필시 속으로 기뻐하며 은중감, 양전기도 설득해 조명에 따르게 할 것입니다."
조정은 환수의 말대로 환현을 강주자사로 삼으면서 회유를 시도하자, 환현은 기쁜 마음으로 관직을 받아 진격하지 않으려 했다. 이 공으로 환수는 용양장군, 형주자사, 가절, 권영좌위문무지진(權領左衛文武之鎮)에 임명되고, 유뢰지가 조정의 명을 받아 1,000명을 거느리며 환수를 호송했다. 그러나 졸지에 형주자사에서 광주자사로 좌천당한 은중감은 순순히 조서를 받들려 하지 않았다. 대노한 은중감이 사람을 보내 환현과 양전기를 협박하니, 환현 등은 당황하여 은중감에게로 갔다.

융안 2년(398년) 10월, 환수가 아직 형주로 부임하기도 전에 은중감과 환현이 심양(尋陽)에서 맹약을 맺고, 공동의 이름으로 조정에 상소해 왕공의 억울함을 변명하며 유뢰지 주살을 청했다. 이로 인해 건강(建康) 안팎이 소란스러워지자, 결국 조정은 은중감을 달래기 위해 환수의 형주자사직을 박탈하고 다시 은중감에게 돌려줌으로써 화의를 구했다. 이후 환수는 어사중승 강적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지(王凝之)를 대신해 중호군에 임명되었다.

융안 2년(399년) 12월, 환현이 은중감과 대립하여 서강구(西江口)에서 전투를 벌이고 은중감의 사촌동생 은휼(殷遹)을 격파했다. 은중감은 양전기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지만, 구원하러 온 양전기도 마두(馬頭)에서 환현에게 대패하고 찬성(酇城)으로 달아나다가 환현의 장수 풍해(馮該)에게 붙잡혀 동생 양광과 함께 나란히 참수당했다. 환현은 양전기 형제의 수급을 수도로 보내고 다시 풍해를 보내 강릉(江陵)에서 은중감까지 죽여버렸다. 그렇게 형주자사, 옹주자사 자리가 모두 비게 되자 조정은 조서를 내려 환현을 형주자사로 삼고, 그의 사촌인 환수를 정로장군, 강주자사로 삼았다. 그러나 환현이 강주자사 직책도 요구하면서 다시 박탈되어 중호군으로 강등당했다.

원흥 원년(402년) 정월, 사마원현이 장차 환현을 토벌하고자 도성 내에 있는 모든 환씨들을 죽이려 들었는데, 환수가 말리자 그만 두었다. 노강태수 장법순(張法順)은 사마원현에게 유뢰지로 하여금 환수, 환겸 형제를 죽여야 한다 주장했지만 기각당했다.

원흥 원년(402년) 3월, 환현의 정변이 성공하여 사마원현과 그 도당을 숙청하고 동진 조정을 장악했다. 환현은 스스로 승상에 으르고 여러 친족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때 환수도 우장군, 서연이주자사(徐兗二州刺史)에 임명되었다. 그 후로도 계속 승진해 무군장군에 올랐으며,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원흥 2년(403년) 11월, 환현이 사마덕종을 협박해 황위를 찬탈하자, 무군대장군이 더해지고 안성왕(安成王)에 봉해졌다.

원흥 3년(404년) 3월, 건무장군 유유가 광무장군 하무기 등과 환현 토벌을 모의했다. 당시 환수는 경구(京口)를 지키고 있었는데, 하무기가 조정의 칙사를 사칭하자 그냥 성문을 열어주었다. 하무기와 무리들은 경구성 안으로 진입해 환수를 참수하고, 그 수급을 성 안에 돌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