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4:43:06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조에서 넘어옴

파일:한국노동조합총연맹 로고.svg 파일: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로고.svg
최저임금위원회 소속 노동조합만 해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韓國勞動組合總聯盟
Federation of Korean Trade Unions
파일:한국노동조합총연맹 로고.svg
<colbgcolor=#4483c2><colcolor=#fff> 국가 <colbgcolor=#ffffff,#1C1D1F>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약칭한국노총(한), FKTU(영)
창립일1946년 3월 10일
임원진
27대
<colcolor=#fff><colbgcolor=#4483c2>위원장김동명
부위원장서종수, 김현중, 강석윤, 최미영
사무총장류기섭[1]
구성 회원조합총26개 (2024년)
(산별노련 22, 산별노조 4)
산하 노동조합총2,325개 (2022년)
소속 조합원수총1,121,819명 (2022년)
최임위원[2]
5인 / 27인 (18.5%)
위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제금융로6길 26 (여의도동)
기관지 파일:노동과 희망 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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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탄생2.2. 변천2.3. 재편2.4. 현재
3. 역대 위원장4. 한국노총가
4.1. 1961년 ~ 2006년4.2. 2006년~현재
5. 조직구성
5.1. 회원조합
5.1.1. 산업별노동조합연맹5.1.2. 산업별노동조합
5.2. 직가입 조직5.3. 과거 회원조합
5.3.1. 탈퇴5.3.2. 제명5.3.3. 자격상실
5.4. 유관단체
6. 성향7. 논란 및 사건 사고8. 참고 문헌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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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가장 오래되었으며 1953년 3월 8일 노동조합법 제정·시행 이래 첫번째이자 1999년 11월 23일[3]까지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했던 법정 노동조합 총연합단체[4]다. 가입한 노동조합의 활동에 대하여 협조·지원 또는 지도할 수 있는 법적 지위에 있다.

공식 약칭은 한국노총[5]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민주노총을 '민노총'이라고 하듯이 '한노총'이라 부르기도 한다. 더 나아가 민주노총을 '민노'라 하듯이 '한노'라 하기도 하는데 대개 복수노조 사업장에서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이 소수노조인 때에 쓴다.[6]

2000년대 초반까지는 단지 노총이라고 하였는데 1999년 11월 23일 민주노총 설립신고 수리까지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법정 총연합단체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민주노총이 세를 불리고 이와 연대가 잦아지면서 '노총'이라는 약칭은 차차 사장되었지만 내부에서는 여전히 '노총'을 관습적으로 쓰고 있다.[7]

2024년 현황은 2022년 말 기준 집계로 소속 노동조합 2,325개, 총조합원수 1,121,819명[8]으로 이른바 '제1노총'이다. 2019년 창립 이래 최초로 민주노총에게 제1노총 자리를 내준 바 있으나, 이후 소규모 노동조합연맹들과의 합병 등을 통해 다시 제1노총 자리를 탈환했다.

2024년 기준으로 22개 산업별 연합단체와 4개 산업별 단위노동조합이 가입하여 구성되고 16개 지역본부와 56개 지역지부를 둔다.

본부격인 노총회관은 1948년 대한노총 이래 서울 소공동에 있었으나 1974년부터 사직동 체신노조회관을 쓰다가 1976년 여의도에 새로 건물을 세워 둥지를 틀었다. 2002년 새 노총회관 건설로 인해 마포로 옮겼다가 2005년 완공하면서 여의도로 복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상 15층, 지하 6층인 이 건물의 건축물명칭은 '한국노총 중앙근로자 복지센타'[9]이며 도로명주소에 딸린 지번 건물명은 '한국노총'[10]이다.

2. 역사

한국노총의 역사는 참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한국노총이 온건 노선을 띠는 것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46년 3월 10일 결성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모태로 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1948년 8월 26일 대한노동총연맹으로 개편되었다.

1953년 3월 8일 노동조합법 제정으로 노동조합이 법정화되면서 1954년 4월 8일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로 재편되었다.

1960년 11월 25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련)'와 재통합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으로 재출범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제6호」에 의하여 1961년 5월 23일 해산되었다가 「근로자의단체활동에관한임시조치법」에 따라 8월 30일 16개 산별노조 및 1개 연합노조가 가입한 산업별 노동조합 연합단체로 재건되었다.

1980년 12월 31일 「노동조합법」 개정으로 기업별 노동조합이 강행되면서 산업별 연합단체와 전국규모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구성되는 총연합단체로 개편되었다.

2.1. 탄생

해방 직후 노동운동을 좌익 계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우익 계열 인사들이 대한독립촉성협의회 산하 단체로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을 조직한다. 이 때 깊이 관여한 인물이 바로 초대 사회부 장관이었던 전진한이다.

파일:Yesterday_pix_16_086.jpg

대한독촉노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26~27일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대한노동총연맹(대한노총)'으로 바뀌었으며 초대 위원장은 전진한이었다. 이때 새 위원장 선출을 주장한 반대파가 제명되며 '대한노총 전국혁신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이후 분열과 갈등이 계속된다. 초기에는 한독당계, 이승만계, 한민당계 등이 공존했으나, 파벌 대립이 계속되다가 1952년 11월 대한노총 통합대회를 통하여 이승만의 뜻대로 전진한 위원장이 제거되고 조경규 등 3인이 최고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이승만의 노선을 벗어나지 않는 관변 단체로 전락하였다.[11]

2.2. 변천

1953년 3월 8일 「노동조합법」 제정으로 노동조합이 법정화되어 대한노총도 1954년 4월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로 재편된다. 일련의 과정에서 경전노조위원장 정대천과 철도연맹위원장 김주홍을 중심으로 '대한노동조합연합회'를 만들려다 최고위원 이진수와 갈등이 벌어지는 등 내분이 일어나고,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와 '자유노동조합연맹'으로 분열된다.

1959년에는 김말룡 등 김기옥 위원장 반대파가 분립하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련)'이 만들어졌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한 민주화 바람으로 5월 9일 대한노총 간부들이 총사퇴하고, 11월 25일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이 재통합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으로 재출범하였다.

2.3. 재편

파일:한국노총 로고 (1961~2006).jpg

▲ 1961년 8월 30일부터 2006년 3월 9일까지 사용된 로고#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5월 23일 강제 해산되었다가 박정희 정권의 산별노조 정책[12]에 따라 8월 30일 16개 산별노조 및 1개 연합노조 체계로 재건되었다. 1980년 12월 31일 「노동조합법」이 개정되어 기업별 노조인 '사업 또는 사업장단위' 노동조합이 강행되면서 산업별 연합단체인 노동조합연맹(노련)으로 구성되는 체제로 개편되었다.

1991년 2월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대인적 이념'으로서 '민주복지사회 실현을 위한 노동조합주의'를 설정하여 사회개혁과 정치활동을 표방하였다.

1994년 11월 ‘노동운동발전 및 사회개혁을 위한 전국노조대표자대회’ 개최하고 '한국노총 발전 특별위원회' 설치하였다.

2002년 7월 '개혁특위'를 발족하였다.

2.4. 현재

2006년 3월 10일 창립 60주년을 맞아 새로운 운동이념으로서 '평등복지사회 실현을 위한 참여와 사회연대적 노동조합주의’를 선포하고 상징마크[13]와 '한국노총가'[14]를 새롭게 변경하였다.

2014년 12월 3일 '제3노총'을 표방했던 '국민노동조합총연맹(국민노총)'과 통합하고, 2021년 5월 1일 '공공서비스노동조합총연맹(공공노총)'과 통합하며 조직을 확대하였다.

3. 역대 위원장

파일:한국노총 로고.png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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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
초대
홍윤옥
제2대
조시원
제3대
홍윤옥
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 (조선방직대책위원회파) 대한노동총연맹 최고위원 (정화위원회파)
제4대
전진한
제1기
이진수 · 조광섭 · 주종필 · 조용기 · 박중정
제2기
이진수 · 송원도 · 조경규
대한노동총연맹 중앙위원
제1기
정대천 · 김주홍 · 김두한 · 이준수
대한노동총연맹 중앙위원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의장
제2기
하광춘 · 성주갑 · 김기옥 · 이주기 · 김용학
초대
김말룡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의장
초대
김말룡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초대
이규철 (철도)
제2대
김광수 (섬유)
제3대
이춘희 (부두)
제4대
이찬혁 (철도)
제5대
최용수 (전력)
제6대
배상호 (운수)
제7대
정동호 (화학)
제8대
김영태 (섬유)
제9대
정한주 (부두)
제10대
김규벽 (광산)
제11대
김동인 (항운)
제12대
박종근 (섬유)
제13대
송수일 (섬유)
제14대
박인상 (금속)
제15대
이남순 (금융)
제16대
이용득 (금융)
제17대
장석춘 (금속)
제18대
이용득 (금융)
제19대
문진국 (택시)
제20대
김동만 (금융)
제21대
김주영 (전력)
제22대
김동명 (화학)
}}}}}}}}}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 위원장
  • 홍윤옥 (1946년 3월 ~ 5월, 9월 ~ 10월)
  • 조시원 (1946년 5월 ~ 9월)
  • 전진한 (1946년 10월 ~ 1948년 8월)

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
  • 전진한 (1948년 8월 ~ 1952년 11월) 조선방직대책위원회파(이갑성계)

대한노동총연맹 최고위원 (집단지도체제)
  • 이진수 (1952년 5월 ~ 1954년) 정화위원회파
  • 조광섭, 주종필, 조용기, 박중정 (1952년 5월 ~ 11월) 정화위원회파
  • 송원도, 조경규 (1952년 11월 ~ 1954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중앙위원 (집단지도체제)
  • 정대천 (1954년 ~ 1957년)
  • 김주홍 (1954년 ~ 1958년)
  • 김두한[15] (1954년 ~1955년) 오케이! 사딸라![16]
  • 이준수 (1955년 ~ 1957년 10월)
  • 하광춘 (1957년 10월 ~ 1958년)
  • 성주갑 (1957년 10월 ~ 12월, 1960년 5월 ~ 11월)
  • 김기옥 (1957년 12월 ~ 1960년 5월)
  • 이주기, 김용학 (1957년 12월 ~ 1958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의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의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 이규철 (1961~1964)
  • 김광수 (1964~1965)
  • 이춘희 (1965~1967)
  • 이찬혁 (1967~1970)
  • 최용수 (1970~1971[17])
  • 배상호 (1971~1976)
  • 정동호 (1976~1979)
  • 김영태 (1979~1980[18])
  • 정한주 (1980~1982[19])
  • 김규벽 (1982~1984)
  • 김동인 (1984~1988[20])
  • 이시우 대행 (1988)
  • 박종근 (1988~1995)
  • 송수일 (1995~1996)
  • 박인상 (1996~2000)
  • 이남순 (2000~2004)
  • 이용득 (2004~2008, 2011~2012)
  • 장석춘 (2008~2011)
  • 문진국 (2012~2014)
  • 김동만 (2014~2017)
  • 김주영 (2017~2020)
  • 김동명 (2020~ )

4. 한국노총가


2016년 한국노총 창립 70주년 기념식에서 이소선합창단이 공연한 구 노총가와 현 한국노총가.

한국노총의 좌향을 암시라도 하듯이 구 노총가를 부를 때는 박자에 맞춰 작게 하던 손동작이 신 노총가 반주가 나오자마자 팔뚝질로 바뀐다.

구 노총가는 어쩐지 건전가요풍인 데 반하여 신 노총가는 가사·곡조에서 여느 민중가요 투쟁·진군가에 비하여 전혀 손색이 없고 심지어 민주노총가와 비교해도 도리어 이쪽이 정통 노동운동가요 느낌이다.

4.1. 1961년 ~ 2006년

작사는 김광섭, 작곡은 이흥렬이 맡았다.
(1절) 아침에 솟는 해는 우리의 동맥
여명의 종 울려서 지축을 울린다

쉬지 않고 생산하는 영원한 건설자
조국은 부른다 아~ 우리들은 노동자

(2절) 재건과 총력으로 서는 새나라
노동은 광명이다 만백성 앞에서

착취를 분쇄하고 가난을 몰아내
복지사회 이룬다 아~ 우리들은 노동자

(3절) 바다와 하늘까지 우리의 광장
세계의 동지들과 대열을 지어

노동의 투쟁 속에 앞서 나가서
민주통일 외친다 아~ 우리들은 노동자

(후렴) 노총의 깃발 아래 강철 같이 뭉쳐서
민족의 사는 길로 노총은 간다

4.2. 2006년~현재

2006년 설립 60주년 기념으로 대대적인 쇄신 작업[21]을 진행하면서 교체했다.

노동가요의 대부 김호철이 작사·작곡하고 박준이 불렀다. 민주노총가와 같은데, 이들에게 처음에는 거절 당했으나 한국노총에서 이소선 정신을 거론하며 읍소하여 노래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말하라 이땅의 노동자여 역사의 새 주인이여
단결과 연대의 한가슴으로 내일을 노래 하여라
보아라 자유평등평화의 춤추는 통일의 나라
노동과 희망이 넘치는 나라 우리가 건설하리라

한국노총이여 노동세상의 불꽃이여
어둠이 깊어 갈수록 더욱 당당히 타올라
역사를 돌리는 생산의 뚝심으로
진군하라 한국노총이여

한국노총이여 노동세상의 불꽃이여
어둠이 깊어 갈수록 더욱 당당히 타올라
역사를 돌리는 생산의 뚝심으로
진군하라 한국노총이여
진군하라 한국노총이여

악보
음원

5. 조직구성

2024년 기준으로 22개 산업별노동조합연맹과 4개 산업별노동조합이 회원조합으로 가입하고, 광역시도 16개 지역본부와 시군구 단위 또는 인접 시군구 연합 형태로 56개 지역지부를 두고 있다.

12개 산별노조와 4개 연맹이 가맹된 민주노총과 비교하면 기업별 노동조합[22]들이 산업별로 연맹하고 그 연맹들이 연합한 중층 형태인데, 개별 연맹이 내부 요구에 따라 자발적으로 산별노조로 전환하기도 한다. 2000년대 이후 생긴 조직은 대부분 산별노조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실 조합원수 1만명 미만인 경우에는 회원조합으로 가입할 수 없고 다만 직가입 조직은 될 수 있다. 2022년부터 의무금 납부기준 조합원수가 직전 3개월 평균 3천명 미만으로 감소한 회원조합은 그 지위를 상실한다.

전국규모 산별노조에 준하는 직업별노동조합과 전국단위 일반노동조합은 한국노총 직가입 조직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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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회원조합

총연합단체의 구성원으로서 가입이 승인된 산업별노동조합연맹과 전국규모의 산업별노동조합이다.

5.1.1. 산업별노동조합연맹

산업별 단위노동조합 연합단체와 연합노동조합연맹을 아울러 이른다.

5.1.2. 산업별노동조합

전국규모의 산업별 단위노동조합을 이른다.

5.2. 직가입 조직

회원조합에 가입되지 않고 한국노총에 직속된 전국규모의 직업별노동조합 및 전국단위 일반노동조합, 실 조합원수 1만명 미만인 산업별노동조합연맹 및 산업별노동조합이다.
  • 한국노총전국연대노동조합 (연대노조)
  • 레미콘운송노동조합 (레미콘운송노조)

5.3. 과거 회원조합

5.3.1. 탈퇴

5.3.2. 제명

  • 한국교원노동조합 (한교조) : 2004년 7월 20일 제323차 회원조합대표자회의 만장일치[26]
  • 전국예능인노동조합연맹 (예능인노련) : 2004년 7월 20일 제323차 회원조합대표자회의 만장일치[27]
  •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 (건산노조) : 2022년 7월 22일 2022년도 제2차 임시대의원대회 의결[28] 재적 929명 투표 790명(투표율 85.04%) 찬성 742명(93.92%) 반대 48명(6.08%)

5.3.3. 자격상실

규약 제6조 제4항에 따라 직전 3개월 평균 의무금 납부기준 조합원수 3,000명 미만으로 회원조합 자격상실

5.4. 유관단체

6. 성향

상대적으로 강경한 노선으로 정부와 대립하는 민주노총[31]에 비하면 한국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상대적으로 정부에 다소 협조적이며 규모에 비해 정치투쟁력은 적은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나도 온건한 나머지 2024년 7월 11일에 있었던 노동자와 정부의 노사 최저임금 협상 과정에서 사용자측(공익위원)이 내놓은 하한선1만원, 상한선 10,290원을 보고도 아무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하한선 1만원, 상한선 10,290원의 뜻은 290원 내에서만 최저임금 논의를 진행하라는 말이다. 심지어 상한선 10,290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노총은 10,120원을 최저임금으로 제시했다... 결국 10,030원이 최저임금으로 결정되어 실질임금이 깎이는 참혹한 결과가 발생했다. 이러한 한국노총의 온건한 노선은 현실주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어용노총'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특히 민주화되기 전까지 한국노총은 어용노조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1997년까지 노동조합법에 복수 노조 설립 금지에 관한 조항이 있어서 기업별 노동조합은 물론 전국단위 노동조합 연합단체도 복수 설립이 인정되지 않았다. 이는 국가적 효율을 위해 노동조합을 통합해서 하나의 기구만을 두도록 한다는 취지 때문이었다.[32] 이처럼 정부 통제 하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보니, 노조 내부의 민주화 요구에도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노동운동 자체에도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였다.물론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임금인상 투쟁에 어느 정도 조직력있는 움직임을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 한국노총 소속의 개별 사업장 노조의 투쟁에 그칠 뿐이었다. 심지어 당시에는 상급단체가 없는 노조가 많았고, 무엇보다 노조 자체를 구경하기 힘든 시대였다. 그래서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어떻게든 중앙위원회에 들어가 노총을 바꿔 보려는 전술을 쓰기도 했고, 아예 대기업 노조 하나가 통째로 탈퇴하는 일도 있었으며 동일방직 노조처럼 결성 과정에서 도시산업선교회가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을 거치며 생겨난 것이 민주노조 건설운동이다. 1970~80년대에는 각 사업장별 민주노조 건설운동이 일어났고, 1980년대에는 기업별 노조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1980년 사북사태 등으로 노동운동은 다시 활발해졌으나, 5.18 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짓밟은 전두환 정권은 '노동계 정화조치'를 통하여 민주노조 인사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청계피복,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남화전자, 서통 등 민주노조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1980년 12월 31일부터는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이 개정되어 산별노조가 기업별 노조로 바뀌며 노동쟁의 제3자 개입 금지 규정이 신설되었다.

1983년 12월 이른바 유화조치 이후 1984년을 기점으로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로옴코리아 등지에서 민주노조가 다시 생겨나며, 1985년 4월 대우자동차 파업, 6월에는 구로동맹파업이라는 전대미문의 연대파업이 일어났다. 물론 이는 한국노총과는 무관하게 개별 작업장에서 조직된 노조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이로 인해 서울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과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이 생겨났으며,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민주노조 설립이 급격히 늘어나 1987~1988년 마창노련과 서노협 등 각 지역노조 협의회와 업종별 노조연합들, 1990년 전노협 및 업종회의, 대기업 노조연합, 1995년 민주노총까지 이어진다.[33]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총 내부에서 개혁 요구가 높아지면서 어용노조 성향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타협주의와 협동주의적 성격이 만연해 있으며 정책연대를 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에서도 노동인권 관련으로는 한국노총보다 민주노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민주노총이 주로 진보정당과 연대한다면, 한국노총은 양대 정당과 연대하였다.[34] 김대중새천년민주당과 연합하여 비례대표 후보를 내고 당선자를 얻었다.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과 대립, 2002년 한국사회민주당을 만들었으나 망했고, 2004년 17대 총선 당시에는 녹색평화당과 통합하여 녹색사민당으로 고쳐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를 시도했으나 소수점대의 처참한 득표율로 실패하였다.[35]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다만 일부 노조는 정동영, 문국현 후보를 지지했다. 근데 이명박 정부에서 내세웠던 경제 기조가 신자유주의였고 거기에 비정규직 고용기간연장(실패로 돌아갔지만)을 추진했었기 때문에 진보 세력으로부터는 어용노조라는 온갖 비난을 받았다. 뭐, 나중에 와서 이 문제 때문에 관계가 끊어지긴 했지만. 하지만 한국노총은 이명박 정부 초창기부터 노동과 복지 정책에 대한 견해 차이로 정부와 마찰을 빚어왔으며, 결국 지지를 철회하고 민주통합당과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지역 본부별로 지지한 후보가 달랐으나 대체적으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지지가 다수였다.

2013년 12월 23일 경찰의 민주노총 본부 압수수색에 항의하는 뜻에서 정부의 사죄가 있을 때까지 노사정 위원회에 출석하지 않기로 결의한 것을 시작으로, 기사

2014년 12월 3일, 국내 제3노총인 국민노총[36]과 조직 통합을 선언했으며, 민주노총과 규모 격차가 더 커졌다. 기사

2015년 9월 노동개혁과 관련된 내용으로 노사정위원회가 파행을 겪었다. 이를 잘 수습하여 통과 되는 듯하였으나 한국노총 중집위에서는 분신을 시도하는 등 파행이 있었다. 한국노총 전체로 볼 때, 의견이 통합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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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노사정 대타위 파탄을 선언,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은 노동자들을 죽이는 짓이라면서 올해 총선 새누리당 낙선운동을 하겠다고 한다. # 이에 극우단체에서는 한국노총민주노총 2중대란 반응을 보였다. 사실 20대 총선에서 말과는 다르게 새누리당에 비례대표로 한국노총 인사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전태일의 여동생 더불어민주당 전순옥 비례대표 의원은 한국노총의 1960~70년대 흑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도 꺼냈다. 과거 한국노총이 중앙정보부의 통제하에 있었던 이야기, 한국노총이 정부의 어용 노동단체이자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하는 관리 단체, 지도부의 부패에 대한 관용, 그리고 그러한 것을 통제하던 중앙정보부의 행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당시 한국노총은 올라오는 이야기는 막고, 위에서 내려오는 정부 정책을 지부 노조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만 했다고 깠다. 또한, 박정희 정권 시절 노동조합 대표의 선택권도 제한되었고, 그렇게 뽑힌 노동조합 대표는 안기부에 가서 사상교육을 받은 후 보상을 받았음도 밝히고 있다.

2017년 5월 조기대선에서 지지후보를 결정하는 선거를 통해 46%의 득표율을 얻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는데, 정작 20대 총선에서는 지도부 출신 인물들이 새누리당에 비례대표 신청을 하여 앞 순번을 배정받아 무난히 당선되고 현재까지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으로 있는 모습을 보면 상당히 괴리감이 크다. 이는 조합원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한 결과라서 그런 것인데, 민주노총이 지도부가 정의당 심상정 후보와 민중연합당 김선동 후보에 대한 공동 지지 의사를 밝힌 것과 대비된다. 민주노총 중집, 심상정 김선동 지지후보로 결정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거 한국사회민주당을 창당하여 독자노선을 택했을 때에도, 민주노동당을 시작으로 통합진보당을 거쳐 진보정당을 지지하며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공산주의·생디칼리즘 등 온갖 다양한 노선을 택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민주노총과는 달리 형식적으로라도 꾸준히 사회민주주의, 제3의 길을 주요 지향점으로 삼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2020년 3월 10일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실제로 한국노총 출신 더불어민주당 후보 중 6명이 21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21년 용산역 강제징용노동자상 보호를 위해 민주노총과 연대하여 성명문을 발표하였다.#

근 2년만인 2021년 12월 14일 개최한 '노동기본권 강화와 연내 노동입법 관철을 위한 결의대회'[37]를 코로나19 방역지침을 준수해 집회 인원을 499명 이내로 제한해 진행하는 등 민주노총과 다르게 코로나19 방역지침을 잘 준수하는 편이다.

2022년 대선후보 노동정책 평가결과 발표에서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38], 더불어민주당이재명 후보가 그 다음으로 평가가 높았다. 윤석열 후보의 노동정책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었고 안철수 후보는 한국노총의 질의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였다.

2022년 2월 8일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7~8일에 진행된 원격모바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847명의 대의원투표를 진행하여 과반이 넘은 득표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39]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코로나 위기, 기후 위기, 산업전환 위기, 인구 위기가 복합적으로 닥치며 노동자·서민의 생존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며 "이 후보의 치열한 현장 행정 경험과 과감한 돌파력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최적"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한국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지도자로 성장한 이 후보의 인생 역정은 한국노총의 역사성과도 부합한다"며 "앞으로 140만 조합원과 함께 이 후보 당선을 위해 모든 역할을 다할 것임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2022년 2월 9일 대의원투표로 이재명 지지 결정을 한 바로 다음날 한국노총 부산지역본부 1490명이 윤석열 후보 지지선언을 하였다. 기존 관례였던 조합원 투표가 아닌 대의원들끼리의 투표에 불만을 가진 조합원들 중 윤석열 지지 조합원들이 사실상 반기를 든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윤석열이 당선 되면서 한국노총이 지지한 후보가 낙선되는 2번째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2022년 윤석열 정부의 지지율이 폭락하면서 한국노총은 연일 국민의힘과 윤석열을 비판하고 있으며, 한국노총 출신 더불어민주당[40] 이수진, 김주영 의원이 을지로위원회에 소속되면서 실질적으로 한국노총, 민주노총과 연대하여 원내에서 노동 관련 현안을 처리하고 있다.

2024년 제 22대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더불어민주연합 후보 41명을 지원하는 동시에 녹색정의당, 진보당 후보 각각 1명에도 지지선언을 내기로 결정하였으며[41], 국민의힘+국민의미래의 경우 한국노총 출신 후보 4명만 지원하였다. 개표 이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인사들이 나란히 더불어민주연합 당적으로 국회로 입성하게 되었다.

7. 논란 및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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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참고 문헌

9. 관련 문서


[1] 최저임금위원회 근로자위원 겸임.[2] 최저임금위원회 근로자위원[3] 민주노총 설립신고 수리[4] 단위노동조합의 산업별 연합단체나 전국규모의 산업별 노동조합의 상급 연합단체[5] 규약 제1조(명칭)[6] 이때 다수노조인 교섭대표노동조합은 그냥 '노조'라 칭한다.[7] 민주노총은 내부문서에서도 '민주노총' 내지는 '총연맹'이라는 약칭을 쓴다.[8] 「2022년 전국 노동조합 조직현황」, 2024-01-23, 대한민국 고용노동부.[9]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35[10]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제금융로6길 26 (여의도동)[11] 대한노총 간부로 그 유명한 김두한이 있었으니 말 다했다.[12] 이는 미국노동총연맹(AFL)도 채택하고 있다.[13] [14] (악보) (음원)[15]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자 야인시대에 나오는 그 김두한 맞다.[16] 어찌보면 제일 적절한 드립인게 이거 임금 협상 장면에서 나온 거다... 실제로 마지막에 김두한이 노총의 최고위원이라고 언급되는 부분이 있다.[17] 8대 총선 당선으로 퇴임.[18] 당시 섬유노조 위원장 및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도 겸임.[19] 노동부장관 임명으로 퇴임.[20] 13대 총선 당선으로 퇴임.[21] 새 노동조합주의 채택, 상징마크와 노총가 교체[22]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의 노동조합은 본디 지역·산별노조 형태였으나 전두환 정부 시절 노동법 개정으로 기업별 노조가 강행되었다.[23] (옛)전국섬유노동조합연맹[24] (옛)해상노동연맹-전국해원조합-전국해원노동조합-전국해원노동조합연맹[25] (옛)전국사립대학교노동조합연맹[26] "99년부터 2004년 7월까지 단 4개월분의 연맹비만을 납부"[27] "일상사업조차 전무한 휴면노조"[28] “전국건설산업노조는 조합비 횡령 묵인·방조 및 비정상적 회계운영, 조직적 부정선거 지시, 노총의 정상화 요구 불이행, 비민주적 노조운영 등으로 한국노총 조직질서를 문란케 했다”[29] 2021년 12월 31일 기준 1,550명[30] 2021년 12월 31일 기준 800명[31] 보수정권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민주당계 정권과도 관계가 불편한 편이다.[32] 이러한 점 때문에 과거 군사정권의 노동조합 정책을 파시즘협동조합주의적 방식이라 해석하기도 한다.[33] 198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인물로는 전 경기도지사 김문수정의당 대표 심상정, 그리고 훗날 뉴라이트로 전향한 권용목이 있다.[34] 다만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에서 한국노총에 대한 감정은 복잡한데,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인 새정치국민회의를 계승한 정당인 만큼 양 노총과 그간 협력할 때는 협력해 왔으나 민주노총이 정부 노동정책에 태클만 건다고 까인다면 한국노총은 선거 때마다 보수정당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 박쥐같다고 까인다. 물론 민주당, 한국노총, 민주노총이 싸우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 다같이 협력해 비토한 정치인이 있는데 정치를 하면서 저 세 집단에 골고루 엿을 먹인 장기표(...).[35] 현재는 총선 득표율 미만 정당의 해산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났다.[36] 2011년 11월 출범했으며, 통합 전 노동조합원 비율이 전체에서 1%를 간신히 넘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37] 5인미만 사업장 근기법 적용, 사업장 이전시 고용승계,근로자대표제, 노동이사제, 교원·공무원 타임오프, 1년 미만 노동자 퇴직급여 보장, 최저임금산입범위 일원화 등의 연내입법촉구.[38] 한국노총의 정의당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상당히 이례적이다.[39] 다만 일부 산별노조는 윤석열을 지지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래에 언급되는 경북지부나 부산지부다.[40] 2022년 비상대책위원회에서는 한국노총 측 인사가 임명되지 않았다.[41] 한국노총이 녹색정의당, 진보당 등 민주노총 측 지지정당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낸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