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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초상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문서이다.2. 역사
2.1. 삼국시대 이전
안타깝게도 현재 삼국시대 전에 만들어진 인물의 정확한 이목구비를 그린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고 선사시대에 그려진 인물의 이목구비를 안 그리거나 이목구비를 대충 그린 암각화만 전해진다.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되거나 전쟁 중에 소실된 것으로 파악된다. 단군의 영정이 전해지나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2.2. 삼국시대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고구려인의 무덤벽화.[1] |
조각상까지 포함한다면 당태종의 무덤인 소릉에서 발견된 진덕여왕 석상[5]과 위덕왕이 성왕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일본 호류사 몽전 소장 목제 구세관음상 또한 해당된다. 한국인이 외국인을 그린 초상화까지 범위를 확대하면 백제 아좌태자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도 있으나, 에도 시대의 이모본만 현전할 뿐이며 정말로 아좌태자의 작품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2.3. 통일신라
경순왕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원본은 아니나 원본을 훌륭하게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는 궁예가 부석사에 있던 신라 왕의 초상화를 칼로 베어버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단속사에 경덕왕 초상화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7] 통일신라 시대에도 왕의 초상화를 꾸준히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헌덕왕 대에 제작된 이차돈 순교비에는 290년 전 인물인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상상화가 새겨져 있는데, 현전하는 한국의 인물 상상화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2.4. 고려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안향의 모습을 담은 초상이다. 후대에 원본을 모사한 것이기는 하나, 원본의 양식을 그대로 모사하여 고려 시대의 초상화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작품이다. |
고려시대에 제작된 초상화를 후대에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숭유억불의 영향으로 불교와 관련된 상징물을 제거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조년과 그의 아들 이포(李褒, 1287~1373)의 초상화에는 본래 염주가 그려져 있었으나 조선 후기의 이모본에서는 먹으로 지워지거나 아예 생략되었다. # #
북송의 사신 서긍이 1124년 편찬한 《고려도경》 〈인물편〉에는 이자겸, 윤언식, 김부식, 김인규, 이지미 5명의 초상화가 실렸지만, 정강의 변을 전후로 책 내의 다른 삽화와 함께 소실되었다. # 만일 전해졌더라면 고려 중기 문벌귀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2.5. 조선
이채(1745~1820)의 초상화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
한때 여성들의 초상화도 그려지기도 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성리학이 교조화된 탓에 보기 드물어졌다. 무슨 상관이 있는지 싶을 수도 있지만 그리는 화가가 대부분 남성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자. 그런 화가가 사대부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앞에 앉혀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긋이 살펴보면서 그려야 하는데 완전히 남녀칠세부동석에 위배되는 것이다. 공민왕 문서와 노국대장공주 문서에서 볼 수 있는 부부를 같이 그린 초상화도 조선시대에는 드물어진다. 조선시대 부부 초상화가 없는 이유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여성의 초상화로는 조반의 부인 계림 이씨, 하연 부인 성산 이씨, 경신공주와 강세황이 그린 복천오부인의 것, 그리고 신정왕후 조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궁궐 여인의 것이 있다.
조선시대는 초상화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초상화들을 제작했다. 현재 남아있는 초상화의 갯수는 1000여 개 안팎으로 추정되고, 중복되는 인물을 제하면 500명 내외로 추정된다.[9] 안타깝게도 조선시대 이전 인물들의 초상화는 수십 점도 되지 않고 그마저도 대부분 불교에서 자신들의 유명한 승려들을 상상으로 그린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조선시대 초상화는 많이 살아남았다. 특히 양란 이후에는 조선에서 크게 혼란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시기 이후의 초상화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존재한다.
많은 초상화들이 사라졌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 혹은 한국 전쟁 중에 사라지거나 도둑맞은 경우도 많으며, 외국으로 유출된 초상화도 많이 존재하고[10], 현대에도 후손들이 공개하기를 꺼려서 공개를 하지 않거나 관리를 소홀히 해 훼손이 되거나, 도둑맞은 초상화도 많이 존재한다.[11] 북한에 있는 초상화도 지금 얼마나 있는지, 상태는 어떤지조차 알 수 없다. 수많은 초상화가 지금도 경매 시장과 지하시장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다.
의외로 16세기 성리학이 교조화되었을 때는 일호불사 편시타인의 기준조차 굉장히 빡빡해졌기 때문에 초상화제작이 오히려 줄어든다. 이 때 초상화 대용으로 사용한 것이 신주. 이 때문에 조선 인종 이후로 실록에서도 어진의 제작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이이나 이황 같은 인물들은 초상화를 하나도 남기지 않게 된다.[12] 이후 송시열이 초상화를 그려도 괜찮다고 하면서 3개의 초상화를 솔선수범해서 남기자 이 때부터 초상화가 폭발적으로 그려지게 된다. 오늘날 현대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초상화는 송시열 이후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2.6. 근대
채용신이 제작한 고종의 어진이다. 구한말의 초상화 특징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
2.7. 현대
채용신을 이은 김은호가 사망하면서 전통적인 초상화법은 사라지게 된다.3. 관련 문서
[1] 피장자는 대체로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계 귀족 동수라 보는 편이다. 다만 북한 학계에서는 미천왕 혹은 고국원왕이 무덤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안악 3호분 문서 참고.[2] 이마저도 안악 3호분과 덕흥리 고분을 제외하면 명문이 남아있지 않아 묘주의 신원조차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다.[3]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묘에(明惠, 1173~1232)의 주도로 모사된 것이며, 화공이 보고 그렸을 원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원효와 의상은 7세기에 활동하던 사람으로, 무려 600여 년 동안 두 명의 초상이 훼손되지 않고 후대에 잘 남겨져서 일본에 그 모습이 옮겨졌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묘에 본인을 비롯한 당시 일본 승려들은 대부분 초상화에서 정좌한 모습으로 그려진 반면, 원효와 의상의 초상화는 한국식 승려 영정처럼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그려진 작품을 이모했다는 점만큼은 확실해 보인다.[4] 그림의 소재와 출처는 알 수 없다.[5] 하반신만 남아있다.[6] 이마저도 원본은 실전되었으며 17세기 이후의 모사본들만 남아있다. # 문서에 실린 이미지는 그 중 1794년 이명기 화백이 모사한 버전이다.[7] 김일손의 속두류록에도 "벽에 면류관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사는 중이 말하기를, 신라 신하 유순(柳純)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설하자 단속(斷俗)이라 이름을 짓고, 그 임금의 상(像)을 그린 판기(板記)가 남아 있다고 한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 조선 전기까지는 경덕왕의 어진이 단속사에 전해지던 것으로 보인다.[8] 다만 모든 초상화가 결함을 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9] 물론 아직 신원도 안 밝혀진 초상도 많이 존재하고, 해외에 있는 초상화의 존재도 고려해보아야 한다.[10] 일본의 덴리대학교에 200여점 이상의 초상화가 담긴 초상화첩이 존재한다고 한다. 조만영, 조인영 형제가 조 대비를 통해 권력을 잡으면서 전국의 수많은 이름난 재상들의 초상화들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조영하의 손자인 조중구가 이 책을 일본으로 들고 가서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해당 초상화첩의 인물들 중 상당수는 원본이 국내에 존재하지만 국내에 없는 인물들의 초상화 또한 다수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기사[11] 대표적인 예로 익안대군의 초상화는 도둑을 맞았다가 18년 만에 되찾은 일이 있다.[12] 그럼에도 이 시기 초상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보통 공신초상화이거나 아님 정계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인 경우가 다수다. 재야에 있던 사람들 중 성리학 교조 분위기에서 좀더 자유로웠던 사람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남긴 것[13] 실제로는 명나라 사람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14] 당대에는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