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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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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초상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문서이다.

2. 역사

2.1. 삼국시대 이전

안타깝게도 현재 삼국시대 전에 만들어진 인물의 정확한 이목구비를 그린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고 선사시대에 그려진 인물의 이목구비를 안 그리거나 이목구비를 대충 그린 암각화만 전해진다.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되거나 전쟁 중에 소실된 것으로 파악된다. 단군의 영정이 전해지나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2.2. 삼국시대

파일:external/pds23.egloos.com/a0053134_4f94614a2e080.jpg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고구려인의 무덤벽화.[1]
현재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초상화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안악군 고분에 있는 벽화를 포함한 고구려 벽화 속 묘주도[2], 일본 교토 고잔지(高山寺) 소장 원효의상의 초상화[3], 조선명현초상화첩에 실린 김유신 장군의 영정[4]이 전부라고 보면 된다. 각주를 보면 알겠지만 기록이 워낙 부족해서 초상이 해당 인물의 얼굴을 실제로 참고해서 제작된 것인지 후대에 창작된 것인지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몇몇 인물들이 민화나 무신도의 형태로 남아있지만 모두 후대에 상상으로 제작된 것으로, 그 인물의 실제 모습을 담았다고 할 수 없다.

조각상까지 포함한다면 당태종의 무덤인 소릉에서 발견된 진덕여왕 석상[5]위덕왕성왕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일본 호류사 몽전 소장 목제 구세관음상 또한 해당된다. 외국인을 그린 초상화까지 범위를 확대하면 백제 아좌태자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도 있으나, 에도 시대의 이모본만 현전할 뿐이며 정말로 아좌태자의 작품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2.3. 통일신라

파일:경순왕 영정.jpg
경순왕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원본은 아니나 원본을 훌륭하게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초상화 중에 현재 전해지는 것은 최치원의 영정과 경순왕의 어진이 전부이다. 선암사에 도선의 영정이 있긴 하나, 1805년에 모사된 것이라서 원본을 제대로 반영했는지 알 길이 없다. 조각상까지 포함한다면 9~10세기에 활동한 신라 승려 희랑대사의 초상 조각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또한 해당된다. 일본 시가현 오츠시에 있는 신라선신당의 신라명신좌상이 장보고의 얼굴을 본따 만든 것이라는 속설도 있는데, 이를 인정하면 사실상 통일신라 시대 초상은 5개만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는 궁예가 부석사에 있던 신라 왕의 초상화를 칼로 베어버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단속사에 경덕왕 초상화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6] 통일신라 시대에도 왕의 초상화를 꾸준히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헌덕왕 대에 제작된 이차돈 순교비에는 290년 전 인물인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상상화가 새겨져 있는데, 현전하는 한국의 인물 상상화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2.4. 고려

파일:안향 초상.jpg
고려 말기의 성리학안향의 모습을 담은 초상이다. 후대에 원본을 모사한 것이기는 하나, 원본의 양식을 그대로 모사하여 고려 시대의 초상화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작품이다.
현재 한국에 고려 시대 제작된 것으로 확인된 초상화는 이제현초상화 하나뿐이다. 안향, 염제신, 이색 등 고려 후기 인물들의 초상화가 몇몇 남아있지만 전부 후대에 모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당시의 화풍을 온전히 모사하여 고려시대 회화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조각상까지 포함한다면 현릉 외곽에서 출토된 태조 왕건의 청동상도 포함되며, 지금은 흑백 사진으로만 남은 화장사 소장 공민왕 어진도 당대에 그려진 것으로 가정하면 고려시대 초상화로 간주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초상화를 후대에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숭유억불의 영향으로 불교와 관련된 상징물을 제거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조년과 이포(李褒, ?~1373)의 초상화에는 본래 염주가 그려져 있었으나 조선 후기의 이모본에서는 먹으로 지워지거나 아예 생략되었다. #

2.5. 조선

파일:이채 초상.jpg
이채(1745~1820)의 초상화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는 조선시대 그려진 위인들의 초상화들이 다수 남아있는데, "털끝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일호불사 편시타인, 一毫不似 便是他人)"라는 정신에 입각해 미화는커녕 이성계의 사마귀, 장만의 안대나 채제공사시, 오명항의 곰보자국, 송창명(宋昌明, 1689~1769)의 백반증, 홍진의 비류(딸기코증) 등 하나같이 대상의 자그마한 흠집까지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그려져있어 그 인물이 생전 무슨 병을 앓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물론 그림체의 한계는 있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최대한 실제에 가깝게 그려야만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7] 현대에도 이런 점을 높이 사 종종 연구가 되기도 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복식도 훌륭하게 묘사했다. 특히 사모의 날개 부분 처럼 얇은 실로 촘촘하게 짜여진 천에는 모아레(Moire)라는 광학현상이 자주 나타나기 일쑤인데, 이것까지 묘사해냈다. 채제공의 초상화의 사모에 나타난 이상한 그물 무늬 같은 것이 그것이다.

한때 여성들의 초상화도 그려지기도 했지만,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쳐 성리학이 교조화된 탓에 보기 드물어졌다. 무슨 상관이 있는지 싶을 수도 있지만 그리는 화가가 대부분 남성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자. 그런 화가가 사대부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앞에 앉혀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긋이 살펴보면서 그려야 하는데 완전히 남녀칠세부동석에 위배되는 것이다. 공민왕 문서와 노국대장공주 문서에서 볼 수 있는 부부를 같이 그린 초상화도 조선시대에는 드물어진다. 조선시대 부부 초상화가 없는 이유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여성의 초상화로는 조반의 부인 계림 이씨, 하연 부인 성산 이씨, 경신공주강세황이 그린 복천오부인의 것, 그리고 신정왕후 조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궁궐 여인의 것이 있다.

조선시대는 초상화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초상화들을 제작했다. 현재 남아있는 초상화의 갯수는 1000여 개 안팎으로 추정되고, 중복되는 인물을 제하면 500명 내외로 추정된다.[8] 안타깝게도 조선시대 이전 인물들의 초상화는 수십 점도 되지 않고 그마저도 대부분 불교에서 자신들의 유명한 승려들을 상상으로 그린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조선시대 초상화는 많이 살아남았다. 특히 이후에는 조선에서 크게 혼란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시기 이후의 초상화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존재한다.

많은 초상화들이 사라졌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 혹은 한국전쟁 중에 사라지거나 도둑맞은 경우도 많으며, 외국으로 유출된 초상화도 많이 존재하고[9], 현대에도 후손들이 공개하기를 꺼려서 공개를 하지 않거나 관리를 소홀히 해 훼손이 되거나, 도둑맞은 초상화도 많이 존재한다.[10] 북한에 있는 초상화도 지금 얼마나 있는지, 상태는 어떤지조차 알 수 없다. 수많은 초상화가 지금도 경매 시장과 지하시장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다.

일호불사 편시타인이라는 정신에 입각해 이이나 이황 같은 인물들은 초상화를 하나도 남기지 않게 된다. 세간에 퍼진 생각과는 다르게 오히려 이러한 정신 때문에 초상화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선조 대부터 현종 대까지 그 긴 시간동안 어진 하나 만들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도 이러한 성리학적 교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1]

2.6. 근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rtrait_of_Gojong_01.jpg
채용신이 제작한 고종의 어진이다. 구한말의 초상화 특징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유화는 박회수의 유화 초상으로 183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80년대부터 조선에 사진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초상화 기법이 많이 쇠퇴하게 된다.

2.7. 현대

채용신을 이은 김은호가 사망하면서 전통적인 초상화법은 사라지게 된다.

3. 관련 문서



[1] 피장자는 대체로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계 귀족 동수라 보는 편이다. 다만 북한 학계에서는 미천왕 혹은 고국원왕이 무덤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안악 3호분 문서 참고.[2] 이마저도 안악 3호분과 덕흥리 고분을 제외하면 명문이 남아있지 않아 묘주의 신원조차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다.[3]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묘에(明惠, 1173~1232)의 주도로 모사된 것이며, 화공이 보고 그렸을 원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원효와 의상은 7세기에 활동하던 사람으로, 무려 600여 년 동안 두 명의 초상이 훼손되지 않고 후대에 잘 남겨져서 일본에 그 모습이 옮겨졌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묘에 본인을 비롯한 당시 일본 승려들은 대부분 초상화에서 정좌한 모습으로 그려진 반면, 원효와 의상의 초상화는 한국식 승려 영정처럼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그려진 작품을 이모했다는 점만큼은 확실해 보인다.[4] 그림의 소재와 출처는 알 수 없다.[5] 하반신만 남아있다.[6] 김일손의 속두류록에도 "벽에 면류관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사는 중이 말하기를, 신라 신하 유순(柳純)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설하자 단속(斷俗)이라 이름을 짓고, 그 임금의 상(像)을 그린 판기(板記)가 남아 있다고 한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 조선 전기까지는 경덕왕의 어진이 단속사에 전해지던 것으로 보인다.[7] 다만 모든 초상화가 결함을 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8] 물론 아직 신원도 안 밝혀진 초상도 많이 존재하고, 해외에 있는 초상화의 존재도 고려해보아야 한다.[9] 일본의 덴리대학교에 200여점 이상의 초상화가 담긴 초상화첩이 존재한다고 한다. 조만영, 조인영 형제가 조 대비를 통해 권력을 잡으면서 전국의 수많은 이름난 재상들의 초상화들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조영하의 손자인 조중구가 이 책을 일본으로 들고 가서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해당 초상화첩의 인물들 중 상당수는 원본이 국내에 존재하지만 국내에 없는 인물들의 초상화 또한 다수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기사[10] 대표적인 예로 익안대군의 초상화는 도둑을 맞았다가 18년 만에 되찾은 일이 있다.[11] 물론 이것도 개인차가 있어서 대충 그려도 자신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초상화로 남길 수도 있고 했을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헌데 류성룡과 기대승 같은 경우에는 공신도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12] 실제로는 명나라 사람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13] 당대에는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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