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어진
1. 개요
고려시대(918년~1392년)에 제작된 어진과 어진 제도의 운영 등에 대해 소개하는 항목이다.2. 상세
이전 삼국시대나 남북국시대와는 달리, 고려시대부터는 어진과 어진 제도의 운영에 대해 상대적으로 풍부한 기록이 확인된다. 고려에서도 태조부터 마지막 왕인 공양왕 어진까지 계속 그려진 것으로 보이며, 이는 조선왕조 건국 후에도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3. 진전 제도
고려시대 진전 제도는 크게 두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개성에 경령전(景靈殿)을 설치하는 방식이고, 둘은 개성 부근에 원찰을 두고 영전(影殿)을 각각 부설하는 방식이다.개성의 경령전은 중국의 송나라가 경령궁(宮)에 황제의 초상을 걸던 제도를 본떠 만든 것이다. 경령전 안에는 5개의 방이 있어 첫 번째 방에는 태조 왕건의 초상을 영구히 봉안[1]하였고, 나머지 네 개의 방에는 현재 왕 이전의 선대 4대조의 어진을 걸어놓는 방식이었다. 이때 현재 왕위에 있는 왕이 죽게 되면 두 번째 방(태조 다음으로 오래된 왕)에 있던 왕의 초상화를 꺼내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꺼내진 초상화는 원찰의 영전에 모셔지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각 왕마다 원찰(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 왕과 왕비의 초상을 봉안하는 방식이다. 물론 경령전에서 꺼내진 초상 외에도 추가적으로 그려서 봉안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찰에 봉안된 어진에 기일마다 불교식 재(齋)를 올려 명복을 빌었다.
4. 조선 시대 고려 어진의 수난
고려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에 어진을 상당히 활발히 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어진들은 조선시대를 넘기지 못했다.세종대왕은 1426년 도화원에 소장되어 있던 고려 왕조의 왕과 왕비의 초상과 정릉에 보관되어 있던 신성왕후의 반신상을 불태우라 명했다.# 또 1428년에는 고려 태조와 혜종의 어진을 각 왕릉 옆에 묻었고#, 이후 1433년에는 마전현(麻田縣)[2]의 땅에 총 18축의 역대 왕의 어진을 묻었다#.
이렇게 묻거나 불살랐음에도 세종 이후 조선 중기까지 몇몇 고려 왕의 어진이 남아있었다. 1437년에 세종은 경기도 안성군에 봉안되어 있던 공양왕의 어진을 고양의 한 암자로 옮기라고 명하기도 했고#, 선조 때는 용천사에 있던 고려 태조의 어진을 숭의전으로 옮기라고 명하기도 했다.[5] 그 외에도 목종 어진과 문종, 선종 어진에 대한 기록이 있어 이 왕들의 어진들도 세종의 고려 어진 분서 과정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5. 목록
기록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어진은 다음과 같다.대수 | 묘호/칭호 | 봉안처 | 비고 |
01 | 태조 (太祖) | 경령전[6], 봉은사[7], 평양 성용전[8], 영통사[9], 양산사[10], 양산사→용천사[11], 봉업사[12], 대안사[13], 수창궁[14], 수창궁 남경신궐[15], 고려 태조묘(천안)[16], 영유 태조영전[17] | 태조의 청동상이 남아 있다. |
02 | 혜종 (惠宗) | 나주 혜종사[18] | - |
03 | 정종 (定宗) | 봉안 기록 없음 | - |
04 | 광종 (光宗) | 봉안 기록 없음 | - |
05 | 경종 (景宗) | 봉안 기록 없음 | - |
06 | 성종 (成宗) | 건원사→개국사[19] | - |
07 | 목종 (穆宗) | 광명사[20] | - |
08 | 현종 (顯宗) | 현화사[21] | 원정왕후의 어진과 같이 봉안 |
09 | 덕종 (德宗) | 봉안 기록 없음 | - |
10 | 정종 (靖宗) | ?→대안사[22] | - |
11 | 문종 (文宗) | 경령전[23], 소재 미상의 진전[24], 영통사[25] | 인예태후의 어진은 국청사[26]에 봉안 |
12 | 순종 (順宗) | 봉안 기록 없음 | - |
13 | 선종 (宣宗) | 봉안 기록 없음 | - |
14 | 헌종 (獻宗) | 봉안 기록 없음 | - |
15 | 숙종 (肅宗) | 개국사[27], 개국사→천수사[28], 경령전→안화사[29] | 명의태후의 어진은 개국사[30]에 봉안 |
16 | 예종 (睿宗) | 경령전[31] | - |
17 | 인종 (仁宗) | 경령전[32], 경령전에서 영통사로 이안[33], 영통사[34] | 공예태후의 어진은 영통사[35]에 봉안 |
18 | 의종 (毅宗) | 해안사[36], 해안사→선효사[37], 해안사→불효사[38] | - |
19 | 명종 (明宗) | 경령전[39], 경령전→영통사[40] | - |
20 | 신종 (神宗) | 봉안 기록 없음 | - |
21 | 희종 (熙宗) | 봉안 기록 없음 | - |
22 | 강종 (康宗) | 경령전[41], 현화사→숭교사[42], 현화사→왕륜사[43] | - |
23 | 고종 (高宗) | 경령전[44] | - |
24 | 원종 (元宗) | 안화사[45], 경령전[46] | - |
25 | 충렬왕 | 경령전[47], 명인전[48], 경령전[49], 묘련사[50] | 제국대장공주의 어진은 묘련사[51]에 봉안 |
26 | 충선왕 | 묘련사[52], ?→해안사[53], 흥천사[54], 티베트 샤카사원[55]. | 티베트 샤카사원 탱화에서 묘사된 충선왕 |
27 | 충숙왕 | 천수사[56] | 복국장공주의 어진은 순천사[57]에 봉안 |
28 | 충혜왕 | 경령전[58], 신효사 | 덕녕공주의 어진은 신효사[59] |
29 | 충목왕 | 귀산사[60] | - |
30 | 충정왕 | 보제사 선명전[61] | - |
31 | 공민왕 | 혜명전(왕륜사 부근)[62] | 기록에는 없으나 화장사에 봉안되어 있던 공민왕의 어진도 전한다. 노국공주의 어진은 인희전(왕륜사 부근)[63]과 광암사(운암사?)[64]에 봉안 |
32 | 우왕 | 봉안 기록 없음 | - |
33 | 창왕 | 봉안 기록 없음 | - |
34 | 공양왕 | 안성군 청룡사에서 고양현 암자로 이안[65] | - |
5.1. 고려 태조
경기도 연천 숭의전[66]에 있던[67] 태조 왕건의 영정(좌우 반전) | 얼굴 확대 | ||
왕씨 족보에 실려있는 왕건 초상화 |
위쪽의 왕건 어진은 고려 왕씨 족보에 실려있는 왕건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왕씨 족보는 1992년 9월 개성시에 살고 있던 태조 왕건의 31대 후손인 왕지송 노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개성시 당위원회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단군묘도 만들어내는 북한인지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위의 어진을 보고 배낀 것이든 아니면 그 반대로 왕씨 족보에 그려진 왕건의 모습을 바탕으로 우측의 어진을 그려낸 것이든 두 초상화가 매우 닮았고, 연관이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왕씨 족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 져야 알 수 있을 듯싶다.
한편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기자의 상이 위 어진과 꽤 비슷해 궁금증을 더한다. 근데 역시나 비슷한 상이 따로 고려 태조의 상으로서 실려 있다는 게 포인트(?).
현릉에서 발굴된 왕건 동상 |
왕건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는 어진은 없지만 신기하게도 동상이 남아있다. 그것도 왕건 당대와 가까운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사이에 만들어진 동상으로 왕건 당대와 매우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만큼 왕건의 어진을 직접 보고 만들거나 왕건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의 증언들은 토대로 충실히 재현 했을 확률이 높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동상은 북한에서 1992년 왕건의 현릉을 확장 공사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불상으로 오인되었으나 고려 왕실 제례 때 사용되던 고려 태조상을 조선 세종 11년(1429)에 현릉에 묻었다는 기록과 교차 검증되어 왕건상임이 밝혀졌다. 이 청동상은 왕건의 젊은 시절을 모사한 것이라 한다. 나체상이지만 원래부터 벌거벗은 임금님마냥 저렇게 되었던 것이 아니라 나체 동상을 만든 후 그 위에 실제 옷을 입혔던 것이다. 실제 청동상 발굴시 발 쪽에서 비단조각이 나왔고 허리띠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기록에도 왕건 청동상에 입힐 비단옷과 옥대를 봉헌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유물과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된다. 남북 관계가 비교적 원만했던 2006년에 국내에서 전시된 적도 있다. 왕건의 청동상은 왕건의 제대로 된 어진이 전무한 상황에서 왕건의 외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과거 왕건의 어진은 3곳의 사찰에 봉안되었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한 곳인 개태사가 위에 나온 왕건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어진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박시백 화백의 '박시백의 고려사' 제 1권 표지에 등장하는 왕건의 모습도 이 동상을 바탕으로 그렸다.
그밖에 기록에 남아있는 왕건의 외모는 다음과 같다.
용모는 용안(龍顔)과 일각(日角)이며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 기우(氣宇)와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컸으며, 너그럽고 후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용안(龍顔) 일각(日角)에 턱은 모나고 이마는 넓으며, 기우(器宇)가 크고 깊으며, 말소리가 크며,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 동사강목
- 동사강목
얼굴은 일각(日角)의 상에 턱이 모나고 이마가 넓었으며 간국(幹局)이 크고 깊었다. 음성이 우렁차고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제세(濟世)의 도량(度量)이 있었다.
- 삼국사절요
- 삼국사절요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툭 튀어나왔으며(일각) 넓었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히 후덕한 풍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저 청동상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다.
불교사회였기에 왕의 동상을 부처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5.2. 현종(고려)
강감찬에게 금꽃을 꽂아주는 현종 |
5.3. 충선왕
티베트 샤카사원 탱화에서 묘사된 충선왕[68] |
5.4. 공민왕
고려 공민왕 어진으로 전해져 오는 그림 |
이러한 부부 병좌상은 원나라에서 넘어온 것으로, 고려 말기에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부 병좌상은 박연 부부 초상, 하연 부부 초상, 조반 부인 초상 등의 조선 초 초상화 양식에 영향을 준다.
종묘에 모셔진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71] | 경기도 박물관에 모셔진 공민왕과 노국공주 어진. 경기도박물관 소유. |
개성 인근 화장사에 보관되고 있었던 원본 어진.# | 조선 후기 영정 (작자 미상) |
공민왕 어진으로 추정된 그림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중종 때 화장사에 있던 정종 부부 추정 초상화를 궁으로 이안했다가, 당시 도화원에 소장되어 있던 어진들과 비교해보니 모습이 달라 화장사로 다시 돌려보낼 때 딸려 돌아왔다고 한다.[72] 이유는 망한 나라 임금 초상따위 있어서 뭐하냐는...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초상화는 불교의 양식이었다고 하는데, 이 초상화는 불교의 양식과는 거리가 멀어 그 초상화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 초상화는 현재 행방이 묘연한데 한국 전쟁 당시 화장사가 폭격으로 파괴되어 소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공식 복원본[73] |
6. 참고 문헌
- [어진, 왕의 초상화] 조선미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9
[1] 제사에 있던 불천위 제도와 유사하다.[2] 현 경기도 연천군 일대[3] 실제로 태조 왕건의 청동상은 능 곁에 묻혀 있다가 발굴되었다.[4] 그런데 정작 조선 왕조 국왕들의 어진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대부분 소실되고 그나마 남아있던 후기 어진들도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싸그리 날려먹은 걸 보면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비극을 보여주는 듯 하다.[5] 단, 숭의전은 한국 전쟁 때 전소되어서 태조 어진은 이때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6] 경령전 제1실에 항상 봉안[7] 고려사 세가 광종 2년[8] 고려사 세가 현종 9년[9] 고려사 세가 명종 2년[10]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5 풍기군[11] 무릉잡고 용천사 고려태조 화상[12] 고려사 세가 공민왕 12년[13] 고려사 세가 명종 10년[14] 고려사 세가 고종 21년[15] 고려사 세가 고종 22년[16]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5[17]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2[18] 세종실록 세종 10년 8월 1일[19] 고려사 세가 고종 4년[20]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 개성부(상) 유송도록[21] 현화사 비문[22] 고려사 세가 명종 10년[23] 고려사 세가 선종 2년[24] 고려사 세가 인종 16년[25] 신증동국여지승람[26] 고려사 세가 숙종 1년[27] 고려사 세가 예종 1년[28] 고려사 세가 예종 11년[29] 고려사 세가 원종 2년[30] 고려사 세가 예종 8년[31] 고려사 세가 인종 2년[32] 고려사 세가 의종 2년[33] 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34] 고려사 세가 명종 2년[35] 고려사 세가 명종 14년[36] 고려사 세가 명종 5년[37] 고려사 세가 명종 11년[38] 고려사 세가 명종 26년[39] 고려사 세가 원종 6년[40] 고려사 세가 충선왕 2년[41] 고려사 세가 고종 2년[42] 고려사 세가 고종 4년[43] 고려사 세가 고종 4년[44] 고려사 세가 원종 2년[45] 고려사 세가 충렬왕 1년[46] 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47] 고려사 세가 충선왕 1년[48] 고려사 세가 충선왕 2년[49] 고려사 세가 충선왕 2년[50]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 개성부(하)[51] 고려사 세가 열전2[52] 묘련사 비문[53] 역옹패설습유[54] 공민왕 시대에 왜구에 의해서 흥천사에 소장된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영정이 탈취되었다.[55] 'KBS HD역사스페셜 – 고려 충선왕, 티베트로 유배된 까닭은'에서 나온 수 많은 탱화 중에서 주지스님 옆에 있는 제후 복장을 한 인물을 충선왕으로 추정하고 있다[56] 고려사 세가 공민왕 22년[57] 고려사 세가 충숙왕 2년[58] 고려사 세가 충목왕 2년[59] 고려사 열전46 신우 3년[60] 목은집[61] 고려사 세가 공민왕 1년[62] 고려사 열전 신우 2년[63] 고려고도징 7[64] 고려사 열전 신우 1년[65] 세종실록 세종 19년[66] 팔전 중 하나로, 고려 태조와 일곱 명의 고려 왕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67]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됨[68] 주지스님 옆에 있는 제후 복장을 한 인물을 충선왕으로 추정하고 있다.[69] 이외에도 수많은 탱화들이 자물쇠에 잠겨 보관 중이다.[70] 전설에 의하면 종묘를 세울 당시 공민왕의 어진이 날아서 들어왔다고 한다.[71] 이성계가 종묘를 세울 당시 바람결에 날아들어온 그림이라 전해진다. 바람결 운운이 정치적 은유임을 고려해 보자면,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고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임금이 어디까지나 공민왕임을 내세우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꽤 높다. 우왕과 창왕은 아예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손인 신씨라는 것이 조선 왕조의 공식적인 입장이었고, 공양왕은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에게 공손히 양위한 임금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당대 작품이 아닌 이모본(移模本)으로 보인다. 공민왕은 복두를 쓰고 홍포단령에 홀을 들고 있다. 관복이 송나라 것에 가까운데 실제로 익선관을 쓰는 형식의 명나라 관복은 우왕 때나 들어왔다. 노국대장공주는 복잡한 머리 장식에 남편과 마찬가지로 송나라 양식의 복제를 하고 있다. 최근에 역사저널 그날에서 원나라 복식을 하고 있다는 해석을 전했는데, 저 복제는 송나라 시대의 것이 맞다. 몽골식 복장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72] 중종실록 중종35년 10월 12일; 10월 16일[73] 대한민국의 역사 만화가 겸 블로거 우용곡이 위에 있는 화장사에 보관되어 있던 공민왕 어진을 찍은 사진을 보고 작업한 어진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