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제11공수특전여단 63대대장 조창구 曺昌九 | CHO CHANG GU | |||
| 파일:58833.jpg | |||
| 출생 | 1944년 ([age(1944-01-01)]세) | ||
| 경상남도 창녕 | |||
| 본관 | 창녕 조씨 |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조정두 어머니: 방행대 | |
| 배우자 | 김영이 | ||
| 자녀 | 아들: 조미령, 조성욱, 조성호 | ||
| 학력 | 창녕고등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경영학/수료) | ||
| 경력 | 한국보훈복지공단 총무 한국보훈병원 관리실 실장 한국보훈복지공단 영업상무 | ||
| 종교 | 천주교 | ||
| 신체 | 키 176cm / 체중 75kg / O형 | ||
| 군사 경력 | |||
| 임관 | 불명 |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 1965년 ~ 1981년 | |||
| 최종 계급 | 대령 (대한민국 육군) | ||
| 최종 보직 | 제11공수특전여단 63대대장 | ||
| 주요 보직 | 제11공수특전여단 63대대장 | }}}}}} | |
1. 개요
대한민국 육군의 군인이다.2. 생애
2.1. 군인시절
1934년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나 창녕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했다.1965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고 그후로 1978년에 중령으로 진급해 제11공수특전여단 63대대장을 역임했는데 후방지역[1]에 위치해서 1979년 12.12 군사반란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1980년에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제11공수특전여단 63대대장으로서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의 최초 현장 명령자였으며, 24일에 철수작전 지휘 중 시민군의 총탄에 오른팔을 잃었으며 이로 인해 대령으로 전역했다.
5월 20일 23시 15분 주둔 병력에게 실탄 장전 및 유사시 발포 명령 하달(1인당 20발)이라고 작성한 문서가 보도됨.# 이 링크에 있는 사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광주 소요 사태(21-57) 23:00 완전 무장한 폭도가 1만여명에 달하고 있음. 23:15 전교사 및 전남대 주둔 병력에게 실탄 장전 및 유사시 발포 명령 하달(1인당 20발)
(80.5.21 00:20. 505) |
2.2. 예편 후
예편 후 경희대학교 경영학을 수료하고 1985년 5월 한국보훈복지공단 총무로 발령받았고 1986년 12월에는 한국보훈복지공단 영업상무로 발령받았는데 영업상무로 근무하던 당시 1988년 6월 한국보훈복지공단 산하 화랑복지기계조합의 비리를 묵인해주고 납품수주 커미션으로 3,4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수배되었던 적이 있었다.2007년에도 생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 12.12 군사반란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5.18 민주화운동에는 깊게 관여한 점에 최웅[2], 박준병[3]과 최예섭[4]하고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가 있다.
4. 둘러보기
[1] 강원도 화천군[2] 12.12 군사반란 당시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한 11공수의 여단장직을 맡았었다.[3] 육군본부의 진압명령이 하달되어 출동준비로 분주하였던 제26기계화보병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는 다르게 반란을 진압하는 충정부대의 수장이 반란군의 아지트에 상주하고 있어서 부대 자체가 어떠한 출동의 움직임도 없었다. 즉, 반란에 가담하기 위해서 부대가 출동한 것도 아니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부대가 출동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박준병 하나 없어도 12.12 군사반란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부사단장의 부대지휘는 사령관의 사망이나 경질과 같이 지휘관의 부재가 확실한 경우에 행사하는 것이지, 단순한 연락두절과 같은 사유로는 부대를 움직일 수는 없다. 윤성민 계엄사령부 부사령관의 육군본부 지휘권 행사도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불법연행으로 인하여 사령관직이 공석이 되어버린 상태라 군령권을 행사한 것이고, 신윤희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의 경우 사령관이 조홍의 단장직을 박탈하고 정식으로 부단장에게 지휘권을 부여하였으며, 구창회 참모장의 9사단 출동 지휘도 노태우의 육성명령이 하달되어서 부대가 움직일 수 있었던 것. 참고로, 박준병이 사단장이던 1979년 12월의 제20기계화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의 계급과 이름 그리고 하나회 여부는 알려져 있지않다.[4] 최예섭은 1979년 10월 27일부터 1980년 4월 13일까지 중앙정보부 본청이 위치한 남산에서 중앙정보부 감독관으로 파견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최예섭 준장이 12.12 군사반란에 직접 가담한 내역은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