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2:49:33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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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
James Joseph Dresnok
파일:external/koreafilm.ro/BBC4-North-Korea-Crossing-The-Line4-e1313422286673.jpg
북한명 홍철수[1]
출생 1941년 11월 24일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
사망 2016년 11월 (향년 74~75세)
북한 평양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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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장남 테드(홍순철), 차남 제임스(홍철)
직업 군인, 영화배우

1. 개요2. 생애
2.1. 미국에서2.2. 주한미군 시절2.3. 월북2.4. 소련중국 망명 시도2.5. 찰스 로버트 젠킨스의 합류2.6. 영화 출연2.7. 말년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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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이후에 한국에 파병된 주한미군 출신으로 탈영월북한 종북주의자. 북한에 정착하여 영화배우로서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일을 하다가 2016년 11월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생애

2.1. 미국에서

1941년 11월 24일 버지니아주 노퍽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부모는 개와 고양이처럼 매일 싸워 댔다. 결국 어머니는 그와 형제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어머니가 술집에서 일하는 동안 차 트렁크에서 자면서 아무거나 먹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쫓아와서 형제들을 도로 집으로 데려왔고 다시 고모네 집으로 보내져서 지내다가 아버지가 재혼하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고모네 집에서도 괄시당했고 새어머니는 그를 보자 아들이 하나라더니 왜 하나가 더 있냐고 화를 냈다. 결국 그를 친척집에 보내져 사실상 고아가 되었다. 그는 20달러와 자전거를 훔쳤는데 법원은 그에게 소년원 대신 집행유예 6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오갈 데 없는 드레스녹을 오버스트리트란 목사가 거둬들였는데 오버스트리트는 오갈데 없는 아이들을 받아들여 키우고 여러 아이들을 위탁받는 봉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나이를 먹은 뒤 미 육군에 입대했는데 곧 철저한 규율과 빡빡한 군생활에 환멸을 느꼈다. 입대 이후 드레스녹은 교회에서 만난 캐서린 링우드란 여자와 결혼했다. 혼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레스녹은 서독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2년간 그 곳에서 아내를 생각하며 과거에 비해 성실하게 복무를 끝내고 돌아왔지만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통보했다.[2] 드레스녹은 크게 상심했고 둘은 자연스레 이혼했다. 드레스녹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때를 회상하며 부모 없이 자란 과거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캐서린 링우드와 아이가 없던 것이 다행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2.2. 주한미군 시절

완전한 실의에 빠진 그의 마음에는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가득찼다. 그는 이젠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심정에 육군에 재계약[3]하여 1962년 5월에 육군 일병의 신분으로 주한미군에 배치되었다. 그때는 DMZ를 경계로 주한미군과 조선인민군 육군 사이에 정기적으로 충돌이 일어났고 더불어 북한군은 자주 매복하고 함정을 설치하여 당시의 DMZ는 사실상 전쟁터였다.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군사개입을 하기 이전까지는 한반도가 가장 군사적 충돌이 많은 아시아 지역이었다. 이 시기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1976년에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DMZ를 포함한 휴전선 일대는 기나긴 기간 동안 굉장히 살벌한 지역이었다.

1주일에 순찰만 60회를 도는 고된 근무가 이어지자 지친 드레스녹은 군부대 근처의 사창가를 오가기 시작했다.[4] 사실 이는 드레스녹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미군들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드레스녹 본인도 이때부터는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사창가를 가는 데 돈을 썼다고 증언했다. 이에 미군 지휘관들은 "저 놈들 얼마 안가서 죄다 성병에 걸릴 것"이라고 혀를 찼다고 한다.

자신의 모든 급여를 그곳에서 다 썼는데 호감이 가던 한국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주가 넘는 강도높은 경계 태세가 내려진 가운데 드레스녹은 중대장에게 애인을 만나게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했지만 중대장은 "다들 고생하는데 너만 빼 줄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에 드레스녹은 부사관의 서명을 위조하여 허락 없이 외출하였는데 당시 휴가를 나갈 수 있던 중대중사가 부대 바깥에서 드레스녹을 보고 이를 윗선에 보고했고 본부로 송환된 드레스녹을 중대장은 강하게 추궁했다. 이에 드레스녹은 당당히 허락받고 나간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드레스녹의 거짓말에 대노한 중대장은 허락 없이 부대를 나간 것에 상관에게 거짓말을 한 죄를 보태어 드레스녹을 군사재판에 넘기려고 했다.

드레스녹은 무단 외박 1번 했다고 자신을 군사재판에 넘기려는 상관의 모습이 자신이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이라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분노했다. 삶 전반에 회의를 느끼던 드레스녹은 월북을 결심해 1962년 8월 15일 정오에 다른 부대원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북으로 넘어갔다.

2.3. 월북

까짓거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거침없이 경계를 넘어 북으로 나아갔지만 지뢰밭 사인을 만났을 때는 겁에 질렸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에 가면 새 삶이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 무작정 넘어가기 시작했다. 드레스녹의 부재를 눈치챈 동료들이 그의 뒤를 따라와 돌아오라며 권고하였으나 그는 "지옥에나 쳐 가라, 개새끼들아!"라며 욕을 퍼부으며 산탄총을 동료들을 향해 발포했다. 한편 조선인민군 육군 민경부대도 이 소동을 눈치채고 키 큰 자[5]가 넘어오고 있다는 보고에 즉각 병력을 출동시켰다. 드레스녹은 조선인민군 초소를 보고는 바로 그 초소로 걸어들어갔는데 초소를 지키던 조선인민군6.25 전쟁 참전자로 전쟁 중에 미군에게 가족을 잃은 인물이 있었다.[6] 따라서 미군에 큰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사관 한 명이 웬 키가 장대한 미군을 보고 크게 당황하며 "원쑤 미국놈이구나!"라며 그를 죽일까 고민 했지만 체포됐으니 건드리지 말라며 인민군 중대장이 명령을 내려서 드레스녹은 처형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 당시 드레스녹의 중대장과 인터뷰를 했는데 "나는 드레스녹이 월북했을 때 며칠 뒤에 "사냥갔다가 길을 잃었다"는 둥 이딴 핑계를 대면서 돌아오면 재판에 그를 회부하여 총살시켜 버리려고 했는데[7]지금은 40년도 넘었지, 아마?"라며 당시의 일을 회고했다.

한편 북한으로 간 드레스녹은 하루 뒤에 평양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지만 일개 육군 보병 병 신분이었던 드레스녹이 군 기밀을 알고 있을 리는 없었으므로 북한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었다.[8] 심문이 끝난 다음에 드레스녹은 먼저 월북했던 또 다른 미 육군 병사 래리 앨런 앱셔를 만났다. 이후 1963년 12월에는 제리 웨인 페리쉬가 합류했고 다시 1965년에 찰스 로버트 젠킨스 병장이 합류하였다. 드레스녹이 주한미군들에게 북한이 지상낙원이니 얼른 넘어오라며 월북을 종용하는 방송을 하여 옛 동료들로 하여금 세뇌빨갱이 새끼라며 격분하게 만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장병들은 드레스녹의 조국을 배반한 비겁한 행위에 분노했으므로 드레스녹을 힐난하며 선전 내용을 무시하였다.

다른 한편 미국 정부는 드레스녹의 월북 사실,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사실이 확인된 이후 그의 미국 국적을 박탈시켰다.[9]

2.4. 소련중국 망명 시도

하지만 북한에서 그들은 조선민족이 아니었고 언어도 달랐으므로 주변 북한 사람들로부터 이질감에 시달렸고 차별을 당해야 했다. 거기다 북한은 전쟁이 끝나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전쟁 당시 경험한 미군 폭격이나 신천 대학살과 같은 민간인 학살로 인해 반미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다. 결국 북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1966년에 같은 백인들이 많은 소련이 좀 낫겠다는 생각에 소련 대사관망명 요청을 했는데 젠킨스 회고록에 이때의 일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젠킨스는 애초에 월북 후 소련으로 망명할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나머지 세 명을 설득하여 소련 대사관으로 갔고 대사관에서는 처음에 커피를 주면서[10] 매우 주의깊게 그들의 말을 경청해 주긴 했지만 모스크바에서 이들을 돕지 말라는 훈령이 내려오면서 계속 북한에서 살라며 그들을 설득하여 돌려보냈다. 화가 난 드레즈녹은 "개같은 이반들, 이거나 먹어라!"고 중지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망명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소련 대사관이 북측에 통보하는 바람에 '이제 죽었다' 싶었는데 북한 당국은 그들을 이용한 선전활동을 중단하고 외부 접촉을 금지하는 수준에서 처벌을 마무리지었다. 이들은 답답한 마음에 중국 대사관에도 가서 도움을 청했지만 중국도 이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그들은 이제 우리가 쓸모없다고 여겨 처분하는 것 아닌가 하며 굉장히 불안해했다. 이후 북한 당국은 조선인민군 육군 소속 관리인들을 그들에게 배정하여 북한 사회에 적응할 사상교육에 주력했다. 월북 미군들이 북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해서 불편함이 없도록 살게 하겠다는 것이 생활 방식의 제한과 교육의 목적이었다. 몇 년동안 별다른 일을 갖지 못한 채 그저 원하는 게 있으면 당에서 보낸 관리인에게 청하는 식으로 낚시, 수영, 음주, 독서[11], 잡담[12]으로 소일하며 말 그대로 먹고 놀았다.

드레스녹, 앱셔, 페리시 등은 바깥 소식이 매우 궁금했지만 북한 당국은 그들에게 바깥 소식을 가르쳐 주는 데 그다지 열성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바깥 소식에 대해서는 모두 다 기계적으로 무시하게 되었다.

2.5. 찰스 로버트 젠킨스의 합류

1965년 미 육군 보병병장 찰스 로버트 젠킨스가 북한에 체류하던 미국인들에게 합류했다. 드레스녹의 주장에 따르면 젠킨스는 제멋대로인 사람이라 마음대로 행동했고 그 때문에 미국인들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사관 출신인 젠킨스는 계급을 내세워서 병 출신이었던 나머지 미국인들에게 명령을 하며 이래라저래라 부렸는데 앱셔와 페리시는 그러려니 하면서 젠킨스와 친해졌지만 성질이 괴팍하고 괄괄한 드레스녹은 크게 반발했다. "탈영 후 월북한 주제에 무슨 군인이냐, 어디서 감히 명령질이냐?"며 드레스녹은 늘 불만을 토로했는데 앱셔와 페리시는 드레스녹을 늘 따돌렸다.

드레스녹은 그들이 곧 젠킨스의 본성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이 젠킨스에게 복종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는데 그 '본성'을 깨닫기 전에 그 둘은 죽었다. 결국 젠킨스가 또 계급 부심을 부리자 화를 참지 못한 드레스녹은 젠킨스에게 주먹질을 했다. 드레스녹은 젠킨스에 비해 신체적으로 월등했으므로 젠킨스는 한 방에 고꾸라져서 덤비지 못했다고 한다. 드레스녹은 젠킨스 얘기는 하기만 하면 짜증이 난다며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잇지 않았다. 반면 젠킨스는 "드레스녹이 체구를 이용해서 나머지 셋을 함부로 대했고, 결국 참다 못한 우리 셋이 어느 날 작정하고 힘을 합쳐 그에게 덤벼들자 그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그들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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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유일한 월북 미군들이라며 늘그막에 같이 사진을 찍었지만 BBC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는 같이 있을 때에는 수십 년을 지낸 친구라고 해 놓고 막상 둘이 떨어져 있을 때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2.6. 영화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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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북한 당국은 이들에 대한 사상 교육이 충분히 됐다고 판단하여 그들에게 공민증을 주고 북한 공민으로 인정했으며 집, 배급권, 승용차를 지급했다. 이후 북한 당국은 선전에 활용하기 위해 1978년부터 그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영화 애호가이자 선전 수단으로서의 영화의 가치를 중시하던 김정일의 사고에 의한 것이었다.[13] 덕분에 그를 비롯한 미국인 월북자들은 전국적인 대스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연기에 재능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선전영화에 등장시킬 서양 배우가 북한에 없었으므로 그들이 동원[14]되었고 촬영장에 나가 보니 자신이 의외로 연기에 소질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본인뿐 아니라 현장의 북한 감독과 스태프들도 별 기대를 안 했는데 그가 예상보다 연기를 잘해서 놀랐다고 한다. 당시 그는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총 20부작으로 제작된 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에서 인민군 포로들을 심문하고 괴롭히며 처형하는 포로 수용소 소장인 ‘아서 콕스터드 중령’을 연기했고 그의 호연에 북한 당국은 그들이 진정으로 인민을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으며 적잖은 북한인들이 그를 아서 선생으로 기억하게 됐다.[15][16] 1982년에는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다룬 영화 《대결》에도 음모와 흉계를 꾸미는 미합중국 해군 장교로 출연하였다.

2.7. 말년

북한을 떠나기 직전까지 조선어를 거의 못 하던 찰스 젠킨스나 래리 앱셔와는 달리 드레스녹과 페리쉬는 조선어도 빨리 배우고 북한의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드레스녹은 자신의 고향에 사는 것처럼 편안하다고 BBC 방송국 기자들 앞에서 몇 번에 걸쳐서 이를 강조했을 정도였다. 본인은 군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다가 은퇴하였으며 자식은 평양외국어대학에 다녔다고 한다.[17] 본인은 "내가 미국에 있었으면 잡일이나 했을텐데, 내가 자식들을 대학 근처나 보낼 수 있었겠냐?"며 북한 정권을 찬양했다. 드레스녹이 살아온 배경 자체가 불우하였던 것을 볼 때 이는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대학 입학률은 50%가 채 못 되며 드레스녹이 살았던 농촌 지역은 30%마저도 안 된다. 미국 변두리의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마을 생활 수준을 생각하면 되려 미국에서는 북한에서 받은 대우나 생활 수준을 영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북한의 경우 대학 교육 자체가 무상이기 때문에 드레스녹은 자식 3명을 돈 한 푼 내지 않고 대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18]

2001년에 제임스 드레스녹이 60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 김정일은 환갑 축하한다고 그에게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하사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평양에서 굶지 않고 유복한 삶을 살았으며 드레스녹은 이 일에 대해서 김정일을 찬양하며 미국과 서방을 비난하는 북한의 프로파간다를 열심히 반복했는데 매일 800g의 쌀 배급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한국 식당에서 사 먹는 공기밥이 200g이 채 안되는 것을 생각하면 하루 세 끼 공기밥을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양이며 한 달에 24킬로그램이다.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 나온 드레스녹은 현지인 수준의 유창한 문화어를 선보였는데 자신을 "아서 선생"이라고 부르는 평양 시민들과 농담도 유창하게 주고받을 정도였다. 살도 꽤 찐 것으로 봐서는 북에서 받은 대우는 좋은 것 같다. 되려 폭식과 폭연으로 인하여 건강을 해칠 정도였는데 특권층인 평양 시민들조차 비만으로 인한 성인병에 걸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후한 대우를 받고 산다는 것인지 알 수 있다.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을 찍는 와중에도 기침을 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잠시 인터뷰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고 드레스녹의 주치의가 드레스녹의 건강이 영 좋지 않다고 설명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래도 76세까지 생존해 UN 통계에 의한 북한 남성의 평균 수명인 70세보다 오래 살았다. 드레스녹은 엄연히 김씨 일가가 직접 챙겨준 특권층으로, 의료 혜택도 꽤 잘 받은 편이라 오래 살았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찰스 로버트 젠킨스와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젠킨스가 북한에서도 계급을 내세워 선임 노릇을 하려 하자 그를 주먹으로 후려갈긴 이후 서로 눈치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젠킨스는 너무 늙어 기운이 없어진 데 반해 그의 아내는 성관계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지만[19] 눈치가 없었던 젠킨스는 그걸 몰랐고 이에 본인이 젠킨스의 아내를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20] 그것을 젠킨스가 봤다고 한다. 이후 다시는 젠킨스네 가족이 드레스녹의 집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젠킨스가 일본에서 펴낸 자서전에 서술한 자신에 대한 묘사를 읽고는 '어따 대고 사기를 쳐? 젠킨스를 죽여버리고 싶다'며 화를 냈다. 드레스녹은 "그 자식이 나한테 서른 번이나 맞았다고? 개자식! 탈영죄로 30년형에나 처해져라!"라며 그를 저주했는데 미 육군은 고작 젠킨스 병장을 30일간 영내 대기(외출 금지) 처분했고 이후 고령을 이유로 퇴역시켰다.[21] 법적으로 육군 보병병장 계급을 유지했던 젠킨스는 새 육군 피복과 그간 밀린 급료 일체를 지급받고 얼마 뒤 퇴역할 때까지 보직도 받아 그에 따른 급여와 수당까지 받으며 사실상 영내에서 생활하는 것 빼고는 다른 군인들처럼 근무했다고 한다. 거기에 육군 사병들이 3년에 한 번씩 일정 수준의 징계를 받지 않으면 자동으로 받는 "Army Good Conduct Medal"이라는 메달도 받았다. 다만 탈영에 대한 벌로 계급은 이병(private)으로 강등되어 퇴역했다.

@JamesDresnok이라는 해시태그를 쓰면서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트위터 계정이 있으나 평양의 일반 인터넷은 외부와는 연결되지 않으므로 드레스녹 본인이라기보다 일부 장난기 있는 유저들이 만든 드레스녹을 사칭하는 유령 트위터 계정일 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애당초 이 양반이 70대에 사망했는데 그 나이에 IT에 크게 관심이 없다면 쓰기 힘든 트위터를 폐쇄 사회에서 수십 년간 있던 사람이 쓸 리가 없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런 장난 계정은 페이스북고려항공 계정 및 김정은, 김정일 등도 있다. 하지만 1970년 요도호를 납치했던 적군파 일원들이 평양에서 살면서 SNS 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을 보면(해당 트위터 계정[22]) 드레스녹도 죽기 직전까지 SNS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아들을 인터뷰했던 재미교포 노길남"예전부터 드레스녹과 나는 잘 알던 사이고, 친한 사이다."라고 주장한 걸 봐선 트위터를 했을 가능성을 완벽히 배제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결국 중풍으로 한동안 투병한 끝에 2016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평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일부 인사들을 통해 들은 대북매체가 밝혔다.#

2017년 북한 당국이 그가 중풍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고 그의 아들 두 명이 재미 언론인 노길남이 생전에 그와 대담하기도 했다. 그의 두 아들은 순수 백인 외모임에도 완벽한 서북 방언으로 미국을 비방하며 김정은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여러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엘리트 대우를 받으면서 성장한 만큼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3. 가족 관계

1978년 이탈리아에서 납북루마니아 출신의 도이나 붐베아라는 여자와 결혼했으나 도이나는 1997년 1월에 폐암으로 사망했다.[23] 1996년 폐암 선고 이후 6개월간 투병했는데 드레즈녹이 직접 모르핀을 놓아주면서 간호했다고 한다. 이후 1999년 토고 외교관[24]+북한인의 혼혈 여성 다다와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 아들은 아래 설명할 테드나 제임스.Jr와는 달리 나이가 워낙 어린 관계로 아직 공직에 있지 않아 언론에 노출하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도이나 붐베아와 결혼하기 전에 북한 여자와 잠시 결혼생활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납북 외국인들끼리만 결혼시킨 것은 외국 혈통의 유입을 기피하는 북한의 순혈주의 때문으로 추정되는데 김정은 대에는 이런 순혈주의가 누그러졌는지[25] 드레스녹의 아들들인 테드와 제임스.Jr는 각각 북한인 여성과 결혼해서 아이를 두었다고 한다. 제임스와 테드도 가끔씩 아버지 드레스녹처럼 선전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파일:external/historynewsnetwork.org/159858-twlpl.jpg

왼쪽은 납북되어 북에서 그와 결혼한 도이나 붐베아. 오른쪽은 드레스녹이 붐베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차남 제임스 가브리엘 드레스녹(제임스 드레스녹.Jr)이다.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 인터뷰하던 모습. 여기서 미국 출신 아버지를 둔 제임스 드레스녹.Jr이 어눌하게 영어를 배우고 있는 어색한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외교관이 되어서 전쟁과 테러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아들이 세 명 있는데 도이나 붐베아와의 사이에서 테드와 제임스.Jr를, 이후 재혼한 토고인 혼혈 여성에게서 토니를 낳았다. 귀화인 자손임에도 장남 테드(북한명 홍순철, 1980년 출생)는 북한 외무성 관료, 차남 제임스.Jr(북한명 홍철, 1982년 출생)는 푸른눈의 평양시민을 찍던 시점까지만 해도 대학생이었고 졸업 후 군사교육기관에서 일하다가 2014년에 군에 입대하여 인민군 육군 군관(푸른 눈의 평양시민 촬영 당시 계급은 상위)으로 근무한다고 한다. 본업 외에도 서양인 배우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영화에 상당히 출연하는 모양이다. 2013년에 개봉한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에서 이들 형제가 출연하는데 테드는 함장 버처 중령역을, 그리고 동생 제임스.Jr는 부하 역을 맡아서 나오는데 성격이 괄괄한 리관암 감독이 독기가 없다, 연기를 못한다고 계속 닦달하고 구박하는데, 리관암 감독이 북한 배우들에게도 온갖 구박을 다 하긴 하지만 관객이 보기에도 연기에 힘이 없는게 발연기가 맞긴 하다.(...) 정작 북한 감독과 스태프들은 안나와 허물없이 잘 어울리면서 같이 술도 마시고 농담도 하는데, 테드는 안나가 인터뷰를 시도하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대화를 거의 하려 하지 않는다. 북한말이 더 익숙한지 연기도 북한말로 하고 영어도 어눌한 티가 난다.

북한이 홍보하기 딱 좋은 이들이라 여러가지로 우대하고 있다 보니 이들도 북한 사회에 딱히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어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사는 듯하다. 기사 아들 둘이 모두 아버지에 비해 건강 관리를 잘 하는지 호리호리한 편이며 꽤 미남이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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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드레스녹.Jr​(홍철) 테드 드레스녹​(홍순철)

외무성 관료였던 테드는 인민군 육군 군적을 받았는지 2017년 인터뷰 때는 육군 군관복을 입고 나왔다. 북한은 문관에게 군관 계급을 주거나 반대로 군관에게 문관 직책을 주는 일이 빈번하다. 푸른 눈의 평양시민 및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에 출연했을 때에 비하면 살도 찌고 외모도 그 사이에 꽤 삭았다.



위는 둘의 인터뷰 보도 영상. 풀버전은 여기서 볼 수 있다.
[1] 홍은 한자(붉을 홍/紅)자인데 북한에서 좋아하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의 홍씨는 洪을 쓰지 紅을 쓰지 않는다.[2] 드레스녹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창녀든 여친이든 여자랑은 절대로 안 잤다고 한다.[3] 미군은 결격 사유 없는 예비역들을 선발해 재계약 형식으로 예편 당시의 계급부터 다시 군생활을 시작하게 해 주는 제도가 있다.[4]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미군 중대보다 매춘부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때는 미군 주둔 지역 근처에 형성된 기지촌에 포주들이 납치한 여성과 이미 잡혀온 미성년자들을 인신매매로 데려와 가둬 두고 미군 '위안부'로 성착취를 당하게 했다. 이들은 소위 양공주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었다. 한때는 GDP의 25%를 차지하기도 해서 공무원들이 방문해 피해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여기서 탈출해 봤자 경찰이 도로 잡아서 기지촌에 넘겨줬다. 낙검자 수용소 문서 참고.[5] 드레스녹은 키가 196cm로 매우 큰 데다 덩치도 큰 사람으로, 드레스녹의 중대장은 그에 첫인상에 대해 "굉장히 크구만" 하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중대장은 나중에 월북자가 덩치 큰 사람이라는 보고를 듣고 "드레스녹 이 새끼가 또 사고쳤구만" 하며 월북자가 드레스녹인지 바로 알아챘을 정도였다고 한다.[6] 아마도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7] 그러나 미국 군법에 따르면 무장탈영이라고 해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한 총살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1976년 이래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도 한 번도 집행한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법이 달라서 군대에서는 연방법이 적용된다. 아마 드레스녹에 대한 강한 증오를 드러내며 '죽여버리려고 했는데'와 같은 수사적인 표현으로 추정된다.[8] 드레스녹 스스로도 자신이 아는 정보라고 해 봐야 한국 어딘가에 전술 탄도 미사일, 핵무기가 배치된 것이 고작이라고 말했다.[9] 세계인권선언 제15조에 따라 복수국적자가 아니면 국적을 박탈할 수 없지만 미국은 자국의 막강한 힘으로 이를 무시하고 자국민의 국적를 박탈한 사례가 있다. 또 드레스녹이 월북한 이후 북한 국적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0] 월북한 이후 처음으로 먹는 제대로 된 커피라서 미군들이 감격했다고 한다.[11] 김일성의 저서나 소설 등이었다고 한다.[12] 주로 고향, 즉 미국 얘기였다고 한다.[13]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은 한국 영화계 최고의 스타들이었던 최은희와 신상옥을 납치해올 정도로 영화에 환장해 있었다.[14] 웬만한 북한 영화에서 미국인 역할로 흑인도 아니고 히스패닉도 아닌 해괴한 분장을 한 북한 배우들이 즐비한 모습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고립된 북한이 서양인 배우를 섭외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한데 북한 체제에 순응하는 미국인들의 존재란 이런 면에서 단비라고 할 수 있었다.[15]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월북 미군 4명 중에서 본인이 가장 연기를 잘 했다고 한다.[16] 드레스녹의 연기력도 준수했지만 당시 미국인을 볼 기회가 거의 없던 북한 주민들이 보기에 드레스녹이 미남이었기 때문에 특히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농담 좀 보태서 드레스녹이 선전영화에 출연하는 날이면 아내들이 남편한테 밥도 안 해 줄 정도였다고 한다.[17] 북한에서 외국어대학을 졸업하면 즉시 외교관으로 임용된다.[18] 물론 유상이고 무상이고를 떠나서 체제선전에 이용된 인물이었던 만큼 학비가 유상이었더라도 북한 정권에서 지원했을 것이다. 북한의 대학 진학률은 미국보다 높은 것도 아니고 현저히 낮은 15% 수준이다.[19] 젠킨스의 아내 소가 히토미는 젠킨스보다 19세나 어렸다.[20] 소가 히토미의 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고 한다.[21] 젠킨스의 형이 선고되기 직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워커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젠킨스에게는 천운이었다. 일본 정부에서 부시에게 젠킨스를 선처해 달라고 부탁했고 부시는 젠킨스에게 선처를 베풀었다.[22] 꼬꼬무에서 통일부측에 허락을 받고 직접 트윗을 보내 확인했다.[23]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 드레스녹은 도이나의 이름이나 국적에 대해서도 언급을 회피했다. "유럽에서 왔다고는 들었는데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는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물어보니까, 입 닥치라고 하더니 다신 묻지 말라더라."며 어물쩡 넘어갔는데 아무래도 북한 정부에서 부부 중 하나 혹은 둘 다 입막음을 시킨 듯히다. 다만 젠킨스의 자서전에 도이나의 이름과 유언까지 다 서술된 것을 감안하면 북측에서 드레스녹에게만 주의를 준 모양이다.[24] 토고 부통령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1967년 토고에서 쿠데타가 벌어지자 다다와 그 어머니를 버리고 달아나 버려서 북한으로 돌아왔다고 한다.[25] 김정은은 혼혈이 널리고 널린 서구권에서 유학한 사람인 데다 본인부터가 북한 사회에서 사실상 외국인 취급받는 재일 한국인어머니를 둔 터라 실질적으로 혼혈인이나 다를 바 없는 처지다. 당연히 순혈주의에 대한 반감이 어떤 식으로든 있긴 할 것이다.[26] 전형적인 미국인처럼 생긴 두 명이 나와 한국어로 북한의 체제선전을 하는 것이 충격적이었는지 북한 전문가가 나와 "쟤네는 태어날 때부터 외부와 격리되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다."라고 맥락을 해설해 주기도 했다. CNN 2017년 8월 21일 사실 혈통만 미국 백인이지 저들은 태어나던 순간부터 쭉 북한인이었던 사람들이니 여느 북한인과 똑같은 존재로 대우하면 된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로버트 할리의 세 아들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심지어 할리의 세 아들들 역시 미국계 한국인이다. 하일의 장남과 차남인 하재선(로버트 할리 주니어)과 하재욱(케빈 할리)는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병장이다.(다만 하일의 세 아들들은 홍철수의 두 아들들과는 달리 한미 혼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