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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민철의 선수 시절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2. 평가
* 통산 평균자책점 3.51 34위(1,000이닝 기준)[1]- 161승 역대 4위.[2] 2023년 양현종도 161승을 기록했지만 좌완투수이기 때문에 우완투수 1위라는 기록은 계속해서 이어질 전망이다. 2023년 기준 현역 우완 투수 중 161승에 근접한 선수는 한 명도 없다.
- 2,394⅔이닝 역대 3위, 우완 1위[3]
- 1,661 탈삼진 역대 4위(우완 투수 중 3위)[4]
- 61완투 역대 11위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421&aid=0004566077]
- 20완봉승 역대 2위[6]
- 128패 역대 4위, 우완 3위[7]
다음은 일본 진출 이전의 정민철을 메이저 진출 이전의 류현진과 비교한 표이다.
선수 | 활약한 시즌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완투 | ERA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정민철 | 8 시즌 | 219 (시즌 평균 27.4) | 1,503 (1G당 평균 6.8이닝) | 109 (시즌 평균 13.6) | 62 (시즌 평균 7.8) | 10 | 59 (시즌 평균 7.4) | 2.80 | 1,223 (9이닝 당 평균 7.3) | 442 (9이닝 당 평균 2.6) | 1,189 (9이닝 당 평균 7.1) |
류현진 | 7 시즌 | 190 (시즌 평균 27.1) | 1,269 (1G당 평균 6.7이닝) | 98 (시즌 평균 14) | 52 (시즌 평균 7.4) | 1 | 27 (시즌 평균 3.9) | 2.80 | 1,081 (9이닝 당 평균 7.7) | 383 (9이닝 당 평균 2.7) | 1,238 (9이닝 당 평균 8.8) |
피안타, 피볼넷, 자책, 심지어 평균 승-패까지 클래식 비율면에서 완전히 판박이 수준.
7시즌 이상 평균 방어율 2.80을 찍은 에이스들이 13~4승에 7~8패를 찍은 것에서 알 수 있겠지만, 당시 정민철 등판 경기의 모습은 류현진 경기와 분위기가 매우 흡사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팬이 전성기 당시 정민철 등판 경기가 어떤 식이었는지 알고 싶다고? 아주 간단하다. 류현진이 쌔빠지게 고생했던 경기들을 떠올리면 되는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의 투구 스타일은 차이가 있다. 류현진이 완급조절과 체인지업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면, 정민철은 강력한 직구 구위로 강행 돌파했던 타입. 최고 구속이 150을 못 넘겼다는 것만 빼면 야구 만화 주인공같은 스타일이었다는 것. 게다가 류현진은 순수 선발투수였으니 김영덕 - 강병철 시절에 구원투수 알바까지 뛰었던 정민철에 비해 그나마 사정이 좀 낫다.
- 다승
통산 다승에서 송진우 이어 세번째 다승순위.[9] 개인 통산 다승은 송진우에 이어 역대 3위지만, 오른손 투수로는 역대 1위다. 선발승만 따지자면 정민철이야말로 부동의 1위다. 통산 393경기에 등판한 가운데 선발 등판이 무려 370경기나 됐다. 이에 반해 송진우는 672경기에 등판했지만, 이 가운데 선발등판은 377번이었다. 송진우가 팀 사정에 따라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승리를 따냈다면, 정민철은 선발로만 승수를 챙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2년의 일본진출이 아니었다면 더 높은 통산 승수를 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정민철의 전성기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당시 팬들에게 “정민철이 통산 다승 2위한다.”라고 말해준다면 이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위의 표에서 보시다시피 C컵 좌완만큼이나 승수쌓기에서 불운을 맛봤기 때문.
- 다패
통산 다패에서도 역시나 순위권이다. 어차피 전성기 시절 방어율 2점대로 10패, 13패하면서 예고된 비극.류현진도 크보에 남았으면 다패 순위에 이름을 올렸을 게 뻔하다참고로 다패 1위는 당연히 송 회장님이며, 2위는 김원형, 3위는 염종석이다.
- 통산 방어율
방어율은 순위 밖이지만, 다들 알다시피 선수생활 후반부에 오랜 기간에 걸쳐 방어율을 깎아먹었기 때문.[10]
그래도 정신승리 해보자면, 첫째, 통산 방어율 20걸 중엔 구원투수가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선발-구원 오락가락하며 1,000이닝을 빠듯이 넘긴 선수들이 많은 편. 둘째, 80년대 투수들의 경우 당시 투고타저 성향이 컸고, 셋째, 80년대는 전체 경기수가 적어 연투에 대한 부담감이 덜했다는 점.[11] 넷째, 리그 선수층이 얇아 선수 간 실력차가 컸으며 에이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2천년대 이전 세대 선수들은 전성기가 지나면 오래 끌 것 없이 곧바로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런 경우 통산 방어율에서 손해를 덜 보게 되는데, 불행히도 정민철은 위에서 언급한 사항 중 해당되는 것이 없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활약+경력 전반에 걸친 선발 투수 등판”의 기준을 적용하면, 방어율 20위 이내에 해당되는 선수는 류현진, 김광현, 다니엘 리오스, 조계현 단 네 명 뿐이다. 게다가 류와 김은 2022년 현재 현역 선수이고, 리오스는 약물과 짧은 국내 시절 경력 덕분에 통산 방어율에 이득을 보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 이닝
최다이닝 2위는 두 말하면 잔소리.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꾸준히 뛰었으니 당연히 달성한 것 아니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실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정민철은 200이닝 이상 시즌을 4회 기록했는데, 4회 이상 기록한 선수는 최동원, 윤학길, 정민태, 다니엘 리오스, 정민철 5명 뿐이며, 1990년대 이후로 기간을 한정하면 정민태, 리오스, 정민철 단 세 명 뿐이다.[12]
- 완투 및 완봉
다음으로, 정민철의 기록에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완투이다.
완투 순위는 11위로 10위권 내의 인물들이 워낙 화려해서[13] 정민철의 기록이 묻히는 감이 없진 않지만, 정민철의 시대는 이미 체계화된 투수 로테이션이 어느 정도 정착하고 있던 시절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는 투수들의 완투가 이전 세대보다 확실히 줄어들었다.
문제는 정민철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
데뷔 초창기는 아직 투수분업화에 대한 인식이 미약했던 시절인데다가 감독이 김영덕이었으니 그렇다쳐도, 대부분의 팀들이 완투 횟수를 줄여나가던 90년대 중반에 걸린 감독이 하필이면 강병철이었다. 강병철은 최동원과 염종석을 아작낸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한화 이글스에서도 꽤 오랜 기간 감독으로 재임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14]
강병철 시절에 정민철과 구대성에게 가해진 혹사는 굉장한 수준이며, 이들보다 못하지만 한용덕과 송진우의 혹사도 심한 편이었고,한 놈만 패지 않고 두루두루 조진다!투수 운용방식은 한 세대 이전의 구닥다리 스타일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1990년대 중반 이후에도 두 자리 숫자 완투를 밥 먹듯이 시킨 감독은 강병철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5][16]
특히 정민철의 완투 기록이 집중된 1992년부터 1997년까지 6시즌 동안의 평균 완투 횟수는 무려 9.3. 1990년대 투수 중에 5시즌 연속 두 자릿 수 완투 가까이 기록한 투수는 정민철 뿐이다.[17]
다행히 1998년 중반 강병철이 경질되는데, 덕분에 일본 진출 이전 두 해인 1998년과 1999년에는 년 당 1~2회로 완투 숫자가 크게 줄었다.[18]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 당시 정민철이 동시대 일반적인 수준 정도만 관리 받았어도 서른 이전에 팔이 망가지는 비극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한편, 정민철의 완투 횟수 바로 아래 기록은 김상진의 50회. 요컨대 완투 부문의 통산 기록 상한선은 정민철을 기준으로 형성되어 있는 셈.
실력에 비해 패전 수가 많다는 점에서 불운하긴 했으나, 완봉과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다. 일단 정민철은 역대 완봉 2위이다. 게다가 정민철은 61완투 중 20완봉승을 거둬 완투 횟수 중 완봉승의 비율이 약 30%였는데, 정민철보다 완투 횟수가 많은 투수 중에서 30% 이상인 투수는 선동열 단 한 사람뿐이다.[19] 완투 1위 윤학길은 100완투 중 20완봉으로 20%이며, 2위 최동원은 81완투 중 15완봉으로 19%로 크라이 크라이 즉, 완봉에 국한할 경우 수치상으로나 순도면에서나 KBO역사를 통틀어 정민철을 앞서는 선수는 선동열 단 한명 뿐이라는 것.
완투승은 49완투승으로 역대 6위. 완봉 문제와 마찬가지로 완투승 역시 불운한 편은 아니었다. 통산 완투가 60회인데 이중에 49번 승리투수가 되었기 때문에 완투승/완투 비율은 81%로 높은 수치이다. 정민철보다 완투가 많거나 비슷한 투수들은 대체로 완투승/완투 비율이 60% 후반에서 70% 중반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 참고로 이 분야 불운갑은 최동원으로 완투승/완투 비율이 64%밖에 되지 않는다. 강병철이 얼마나 쓸데없이 최동원에게 완투를 시켰는지에 대한 분명한 증거.[20]
그리고 11이닝 완투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 제구력
선수시절 후반부에 제구력 위주의 투수가 되었다는 얘기로 인해, 전성기 시절에는 제구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정민철은 선수 시절 내내 볼넷 허용이 매우 적은 선수였다. 전성기 시절 bb/9(9이닝 당 볼넷)은 겨우 2.6.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수치는 크보 시절 류현진(bb/9 2.7개)보다 약간 더 나은(!) 수준. 참고로, "제구력 좋은 투수"라면 반드시 언급되는 송진우의 1999년 bb/9은 2.94개, 02년 bb/9은 2.21개이다.[21] 이 정도 수준의 bb/9을 정민철은 8년 동안 기록했다. 오히려 선수시절 후반부인 2002년부터 2009년까지의 bb/9이 3.09로 전성기 때보다 높다. 물론 이것도 우수한 수준이긴 하지만.
이러한 모순이 존재 하는 것은, 그만큼 전성기 시절 정민철의 패스트볼 구위가 빼어났기 때문이다. 전성기 시절에는 딱히 코너워크에 신경 쓰지 않아도 헛스윙이나 빗맞은 타구를 유도하기가 쉬웠으며, 정민철 본인도 이런 점을 굉장히 잘 이용해 빠른 카운트에서 볼넷 허용 없이 타자와 승부를 낼 수 있었다.
즉 정민철은 "볼넷을 내주느니 차라리 안타를 맞아라"라는 야구 격언에 가장 충실하고 가장 이상적인 투수였던 것. 이런 성향이 어느 정도였냐면, 훗날 인터뷰에서 "(1990년대 중반에는) 신인급 타자가 내 공을 방망이로 스쳐서 파울이 되면 분해서 잠이 잘 안 오던 시절이었다"고 얘기했을 정도.[22][23]
한편 구속과 구위가 떨어진 2000년대에는, 이런 투구 성향을 유지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제구에 신경썼으나 아무래도 패스트볼이 망가졌다보니 전성기 때만큼의 bb/9은 기록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통산 기록은 정민철의 제구력이 매우 빼어났다는 것을 입증한다. 정민철은 통산 748개의 사사구를 기록했으며 이것은 크보 역대 9위의 기록. 정민철이 역대 최다이닝 2위인 점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볼넷 수치가 낮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통산 bb/9은 2.81이며, 2000이닝 이상 투구한 다섯 명[24] 중 가장 낮은 수치이다.
결론적으로,
- 전성기 시절 정민철은 기본적으로 7이닝 이상을 가정하고 등판했다.
- 강력한 패스트볼 구위를 바탕으로 쉽게 탈삼진을 잡았으며 볼넷을 최소한도로 허용했기 때문에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전 주석 내용과 달리 이닝당 투구수는 1992~99 8년간 15.70개로 평범한 수준. 같은 기간 리그 평균은 16.05개였다.
- 확실하게 승리 투수가 되기 위해선 완투를 해야 했으며, 다행히 완투를 하면 그래도 승리 투수가 된 경우가 많았다.
- 하지만 완투를 못하면 승리 투수가 되기는커녕 패전투수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25] 타자들은 1점도 못 냈으며 분식회계도 심심찮게 일어났다.[26]
선수 시절 후반부는 배영수를 떠올리면 된다. 틈틈이 희망고문 시즌이 있었다는 것까지 비슷하다. 다만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 배영수는 팔꿈치 인대 손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고, 정민철은 팔의 고장으로 인한 구속 저하가 내리막의 원인이라는 것. 게다가 배영수는 팔꿈치 수술 이후에는 꾸준하게 로테이션을 지킨 반면, 정민철은 오히려 뒤늦게 팔꿈치에 본격적인 문제가 생기면서 기복이 심해졌다.[27] 2004년에 불거진 팔꿈치 부상으로 인한 공백이 너무 컸다. 부상 전후 성적을 따져봤을 때 2004년과 2005년의 부상 공백이 그의 성적에 큰 손해를 가져온 것은 분명한 사실. 2003년과 2006년 성적이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리그 평균은 된다고 말할 수준이었고, 심지어 2007년에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
2.1. 저평가된 에이스?
일단 정민철 본인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데뷔 때부터 당시 드물했던 여고생 팬이 존재했으며, 매일 수십 통의 팬레터가 날아 들어왔다. 세련된 외모에 입담까지 갖춘 만 스무 살 에이스 투수. 2000년대 이후에 데뷔했으면, 매일같이 기자들이 인터뷰를 따기 위해 기다렸을 것이다.[28]리그 최정상 투수들에게 약간 모자란 성적을 거두어서 성적에 비해 수상내역이 부실하다.
거듭 지적하지만, 정민철은 승수를 많이 챙기지 못했던 투수였다. 당시의 야구 보도는 승리투수에게 철저하게 맞춰져 있었다. 7이닝 1실점, 8이닝 2실점 등으로 아무리 많이 던지고 실점이 적어도, 승패와 무관하거나 아예 졌다면 그저 기사 말미에 “잘 던졌으나 아쉽게도” 한 줄 설명, 끝. 동시대의 에이스 정민태나 조계현은, 승리투수가 되어 스포츠지 1면 사진을 채웠던 것과는 대조적.
게다가 인터넷이 없어 팩스로 원고를 보내던 시절이다. 해태 타이거즈처럼 매년 우승권이 아닌 지방 팀 경기의 경우, 취재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팀 전담 기자는 커녕 지방경기는 서울에서 경기 결과만 팩스로 받아 기사로 싣는 경우가 태반. 차라리 서울팀 소속이었다면 오고가며 기자들과 접촉하여 흥미 위주 기사라도 따내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언론 보도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선동열 다음 투수”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1990년대 후반부에는 “리그 최고 투수”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그러니까 저평가는 아니었던 셈.
취재 여건이 달라진 1990년대 후반에도 정민철은 여전히 스포트라이트와 거리가 멀었다. 선동열 일본 진출에, 박찬호에, 이승엽까지 50홈런을 때려내던 시절이라 초점이 이들에게 맞춰졌던 것. 즉, 분명 리그 최고 투수로 언급은 되는데, 정작 신문기사의 양은 적었다는 것.
결국 이런 요소들이 겹치면서 일본 진출 이전까지 정민철 관련 언론의 보도내용은 매우 부실해서, 객관적인 경기 결과 외의 내용은 거의 보도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에 두고두고 아쉬움이 많았던 한화팬들이 정민철에 대해 지금까지 “비인기 팀이라 저평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2.2. 1990년대 최고 투수 논쟁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긴 하겠지만, 2000년대 이후 이 문제를 얘기할 때 대부분 1990년대 최고 선발 투수는 정민철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처음에 이 문제에 민감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한화 팬들. 바로 위 대목에서 언급한대로 한화팬들은 정민철이 전성기 당시 저평가 당했다고 인식했었으며, 여기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다. 때문에 가장 먼저 이 떡밥을 꺼내들었고 활발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29]
그런데 한화 팬 여부를 떠나서 이 문제는 많은 야구팬들에게 흥밋거리가 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후보군 중에서 누구 한명 확실히 빼어나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 끗 차이로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내용은 정민태/선수 경력 문서에도 기재되어 있다.
2.3. 일본에서의 실패 요인
정민철이 일본 무대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 2가지 의견이 엇갈린다.2.3.1.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기용 방식 문제
무엇보다도 요미우리는 처음부터 정민철을 땜질용 선발로 써먹을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 요미우리가 정민철을 영입할 이유 자체가 의문투성였는데 정민철의 영입 시점에서 당시 요미우리의 외국인 투수 슬롯은 과포화상태였고, 그중 한 자리는 그 유명한 발비노 갈베스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은 자리는 단 하나 뿐이었다. 문제는 이 한 자리를 놓고 세 명의 투수가 경쟁을 해야 했던 것. 그나마 그 자리도 애초에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럴 메이라는 선수였는데, 98년과 99년에 한신 타이거즈에서 어느 정도 실적을 올린 선수로, 99년 말에 계약금+연봉 1억 5천만엔의 거액으로 정민철보다 앞서 계약한 상태였던 것이다.위키피디아 일본의 메이 항목심지어 남은 경쟁자는 조성민으로 한국인이었다. 그러니까 요미우리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은 선발 자리를 놓고 한국인 두 명을 경쟁하게끔 한 것인데, 실제로 정민철에게 주어진 기회 자체가 달랑 4경기에 불과하며, 뒤의 두 경기는 누가 봐도 말아먹긴 했지만 앞선 두 경기는 누가 봐도 완벽한 호투였다. 2군 성적도 매우 좋았다. 그럼에도 이상할 정도로 기회를 안 준 요미우리의 행보를 볼 때 처음부터 정민철의 영입은 보험용 6선발 내지 로또였고, 정민철이 아무리 호투했어도 기존 투수진이 건재하다면 활용할 생각이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가지 웃긴 건 사실 외국인 투수 중 한명인 갈베스는 6경기 만에 2군으로 쫓겨나 다시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는 것.[32] 정민철이 1군에 올라 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긴 했는데, 이마저도 몇 경기 기회도 안 주고 5선발체제로 전환해 아예 외국인 투수 한 자리 없이 시즌을 보내기로 결정해버린다. 그러니까 선발 자리가 있건 없건 정민철을 쓸 생각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때 당시 요미우리가 정민철과 한국 언론에게 댄 핑계가 그 유명한 “로테이션 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선발 로테이션이 꼬였다고 용병 투수를 한 달씩 2군에 보내는 팀이 과연 어딨을까? 덧붙여서 일본 역시 1군 말소 기간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10일이다. 로테이션이 꼬였다고 2군 보내면 기본적으로 10일은 썩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민철 본인을 비롯, 한국에서 이 얘기를 납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론적으로, 요미우리는 자기들이 쓰지도 않을 남의 나라의 에이스 투수를 다른 팀보다 앞서는 현금동원력을 이용해 영입한 뒤, 성적과 상관없이 2군에서 썩게 했다는 것. 게다가 처음부터 정민철과 함께 정민태도 영입하려고 했으며 실제로 2000 시즌 종료 후에 현대에서 정민태를 영입하는데 성공했다.[33]다시 한 번 말하지만, 외국인 투수 자리는 두 자리다. 한 자리는 이미 채워져 있었고 남은 한 자리를 한국인 투수 세 명이 경쟁해야 한다. 이게 어쩌다보니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요미우리가 처음부터 이런 계획을 세웠다는 거다.
현지 팬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구글에 鄭ミン哲[34]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한 블로그에 따르면,
はっきり言って、投球内容はまったく記憶にないが、この頃の巨人は無駄に韓国人投手があふれていたので、在籍してた事だけはよく覚えている。
資料によると、2年間のレンタル移籍だったとのこと。本人が希望したらしいが、巨人というチームが悪かった。
メイやガルベス、マルティネスなど外国人選手がたくさんいた時期。
完封した翌日に外国人枠の関係で二軍落ちした事もあった。
韓国では実績を残してた投手らしいが、こういうのを飼い殺しというのか。
솔직히 말해서 투구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지만, 이 당시 거인은 쓸데없이 한국인 투수가 넘쳐나고 있었으므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 만은 잘 기억한다. 자료에 따르면 2년 임대 이적이었다는 것. 본인이 희망한 것 같지만,[35] 거인이라는 팀이 좋지 않았다.[36]
메이, 갈베스, 마르티네즈 등 외국인 선수들이 많이 있었던 시기였다. 완봉한 다음날 외국인 할당량 문제로 2군으로 내려가는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실적을 남기고 있었던 투수인 것 같지만, 이런 걸 바로 기르면서 죽이기飼い殺し[37]라고 하는 것이려나.
資料によると、2年間のレンタル移籍だったとのこと。本人が希望したらしいが、巨人というチームが悪かった。
メイやガルベス、マルティネスなど外国人選手がたくさんいた時期。
完封した翌日に外国人枠の関係で二軍落ちした事もあった。
韓国では実績を残してた投手らしいが、こういうのを飼い殺しというのか。
솔직히 말해서 투구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지만, 이 당시 거인은 쓸데없이 한국인 투수가 넘쳐나고 있었으므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 만은 잘 기억한다. 자료에 따르면 2년 임대 이적이었다는 것. 본인이 희망한 것 같지만,[35] 거인이라는 팀이 좋지 않았다.[36]
메이, 갈베스, 마르티네즈 등 외국인 선수들이 많이 있었던 시기였다. 완봉한 다음날 외국인 할당량 문제로 2군으로 내려가는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실적을 남기고 있었던 투수인 것 같지만, 이런 걸 바로 기르면서 죽이기飼い殺し[37]라고 하는 것이려나.
2.3.2. 정민철의 기량 저하
하지만 정민철의 등판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잘 던진 두 경기에서 이닝, 실점, 탈삼진, 볼넷 등 외견상의 수치는 흠 잡을 데가 없으나, 구속 하락이 완연했다. 첫 경기의 최고 구속은 141km/h, 평균 구속은 137km/h이었고, 바로 다음 경기에서는 아예 140km/h을 넘긴 공이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투수라도 기본적인 구속이 나오지 않으면, 몇 경기 지나지 않아 다른 팀들의 분석을 통해 호구 잡힐 것이 뻔하고 (류현진만해도 메이저리그에서 제구력과 변화구로만 평정하는 이미지여도 막상 평균구속이 90마일에 못미치는 날이면 고전하는경우가 부지기수다)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2군에서 잘 던졌다지만,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1군은 1군, 2군은 2군. 이게 한국이었다고 가정해보자. 150km/h를 던질 수 있는 파이어볼러라고 알려진 외국인 투수를 영입했는데 140킬로를 던지는 것도 버거워하고 있다? 5월도 되기 전에 팬들이 스카우터 해고를 주장했을 것이다.애초에 요미우리가 정민철의 계약에 앞서 따로 대럴 메이와 계약한 것도, 정민철의 구속 저하에 대한 우려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정민철의 구속 저하 사실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던 상태인데, 상기한 대로 정민철이 요미우리에 입단하기 1년 전인 1999년 당시 한국 언론의 보도내용을 보면 유별날 정도로 정민철의 구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구속은 안 나왔지만 잘 던졌다”는 식으로. 요미우리 스카우터진이 바보가 아닌 이상 계약 전에 설마 이 사실을 몰랐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입을 결정한 것은 "전성기 정민철"이라는 카드가 그만큼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고, 몸에 특별히 큰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니 구속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일단 영입해서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보기로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요미우리는 2000년 내내 정민철의 구속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민철이 잘 던질 때도 못 던질 때도 패스트볼의 구속에 초점을 맞추었고, 2군에 있을 땐 '성적은 필요없고 구속은 올라왔는가?'라는 식. 하지만 끝끝내 정민철은 전성기 시절의 구속을 회복하지 못했다.
로테이션 문제도 핑계가 아니라 실제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갈베스가 빠져서 한 자리가 났다고 해도 여전히 남은 5선발이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으며, 일본의 6선발은 곧 한국의 5선발과 마찬가지. 즉, 일본이라 해도 일년 내내 6명의 선발을 돌리는 팀은 없다. 남은 다섯 명 중 한 명을 빼면 되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불가능한 일. 당시 요미우리의 선발 다섯 명은, 구와타 마스미, 우에하라 고지, 쿠도 키미야스, 다카하시 히사노리[38], 대럴 메이 였다. 그러니까 레전드만 세 명에, 초특급 신인에, 이미 일본에서 실적을 올린 외국인 투수 까지 있었다는 것. 게다가 시즌 최후반에는 사이토 마사키가 복귀해서 6선발 자리를 메꾼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사이토는 사와무라 상만 3번을 차지한 요미우리를 넘어 당시 일본 야구계의 전설적인 레전드이다. 즉, 시험삼아 올리고 싶어도 자리 자체가 없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도 구단 내에서 정민철을 써 보자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1군 투수코치인 카토리 요시타카[39][40]와 1, 2군 총괄 투수코치였던 미야타 유키노리[41]는 1군에 자리가 빌 때마다 정민철을 천거했다. 하지만 정작 감독인 나가시마 시게오가 구속이 안 오르는 정민철을 탐탁지 않아 했다고...[42][43][44]
[1] 2014년 후 기준. 2015년판 기록대백과 참고. 여담으로 송진우와 통산 평균자책점이 같다.[2] 1위가 전천후로 구른 것 치고는 선발승만으로도 163승이라서 순수 선발승으로 쳐도 2위다. 참고로 정민철의 선발승은 157승. 결국 콩라인[3] 당연히 1위는 송진우.[4] 당연히 1위는 송진우. 역대 2위이자 우완 1위는 선동열...이 아니라(!) 1,749개의 이강철. 선동열은 역대 3위이자 우완 2위이다. 이렇게 된 것은 선동열은 1군에서 뛴 시즌이 11시즌에 불과하지만 이강철은 17시즌간 1군에서 뛰었기 때문에 꾸준함으로 기록을 세운 것이다.[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421&aid=0004566077] [6] 1위는 선동열이며 윤학길과 공동 2위이다.[7] 통산 다패 1위는 송진우, 2위 김원형, 3위 염종석 순이다.[8] 파크팩터를 고려하지 않은 조정ERA는 정민철이 142, 류현진이 147이다.[9] 그러나 통산 승리 1위인 송진우가 계속 승수를 쌓아갔고 정민철은 송진우와 같은 해에 보다 일찍 은퇴를 선언했다. 송진우가 예전에 "내 다승 기록에 가장 먼저 도달할 선수는 정민철이다"라고 한 말과는 달리 결국은 통산 3위에 그치고 만 것이다.[10] 일본 진출 전까지의 ERA는 2.80였는데 복귀 이후의 평균 성적만 따지면 ERA가 4.71로 폭등했다.[11] 다만 정민철도 당시 다른 투수들과는 달리 커리어 내내 보직파괴를 거의 당하지 않고 선발 로테이션은 꾸준히 지켜졌다는 것(393경기 370 선발) 역시 감안해야할 것이다.[12] 다만 윤학길은 200+이닝 시즌 중 3회를 1990년대 이후에 기록했다.[13] 일단 100완투 윤학길이 압도적이다. 2위 최동원(81완투)과 3위 장호연(79완투)도 타의 추종을 불허. 4위인 선동열(68완투)부터는 한 등위마다 불과 1~2개 씩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나뉠 정도.[14] 코치경력을 포함하면, 강병철은 롯데에서 타격코치 1년, 감독 8년으로 도합 9년을 일했고, 한화에서 수석코치 3년, 감독 5년으로 한화에서 일한 기간도 의외로 길다. 다만 롯데 감독 이미지가 더 큰데, 롯데 사상 감독을 세 번씩이나 지낸 유일한 인물인데다가 단 두 번 있는 우승을 유일하게 해낸 인물이기 때문.[15] 김응용은 1995년 전까지 사실상 해태 2군이 없고, 그때까지도 선수단이 소수정예로 운용됐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있다. 2군 체계가 조금씩이나마 잡혀가던 1994년 이후 완투 숫자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게 그 증거.[16] 김인식, 김성근도 유명하다지만 이 두사람은 그래도 혹사에 완급조절이라도 있었다. 1년 혹사하면 다음해 다른 투수로 갈아탄다던가[17] 송진우, 이강철, 조계현등은 단일시즌으로 따지면 정민철을 앞서고 이들도 장기간에 걸쳐 혹사 당했지만, 혹사의 꾸준함에 있어선 정민철이 우위에 있다. 정민태도 만만찮다지만, 이들에 비하면 한발짝 뒤에 처져있고.[18] 다만 투수 분업화가 이뤄져서 완투 숫자만 줄었을 뿐, 전체적인 혹사는 이때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당장 1999년에 200이닝을 넘겼다.[19] 68완투 29완봉으로 무려 43%이다.[20] 한편, 완투머신 윤학길은 75%으로 비교적 높은 편이었고 이상군과 한용덕은 각각 69%, 68%으로 낮은 편이었으며, 송진우는 75%였다. 장명부는 61%로 가장 낮았다. 장명부는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무조건 본인이 안 내려가고 버텼으니 뭐.[21] 송진우는 실제로 젊은 시절에는 제구력이 안 좋은 투수였다. 1989년과 1992년에는 2이닝당 1개가 넘는 볼넷을 내주기도 했고, 환골탈태(?) 직전인 2001년에도 9이닝당 4.18개의 볼넷을 기록했다. 2001년까지의 통산 9이닝당 볼넷은 3.76개.[22] 같은 인터뷰에 따르면, “1995년에 대구 경기였는데 신인 왼손타자가 대타로 나오더라. ‘애송이 쯤이야’ 했는데 계속 내 공을 파울로 쳐내더라. 7구째인가 8구째까지 끈질기게 버티더니 결국 내 공을 쳐서 빗맞은 안타로 만들었다. 허 참. 그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저 녀석 꽤 괜찮은 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23] 그리고 그 신인타자가 이승엽이었다고 한다.[24] 송진우, 정민철, 이강철, 김원형,한용덕[25] 대표적인 게 1994년 방어율 2.15로 10패, 1997년 방어율 2.46으로 14패...[26] 몇몇 정민철빠들은, 1996년 구대성의 18승 중에는 정민철 경기 분식회계승도 제법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27] 정민철 본인은 각종 인터뷰 등에서, 2004년 이전까지 “투수라면 누구라도 있을 법한 수준의 통증”이 있었을 뿐 특별한 부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밝혀왔다.[28] 정민철은 2000년대에 성적이 떨어졌음에도 이글스 팀원들 중 기자들로부터 가장 이야기가 많이 인용된 선수였다.[29] 참고로, 같은 이치로 2000년대 최고 선발 떡밥도 있다. 유력 후보인 손민한에게도 저평가 내지 불운 타이틀이 붙어있기 때문. 하지만 롯데 팬들이 뒤통수치고 달아난 배신자 손민한을 옹호해 줄 이유가 없어 정민철만큼 흥하진 않는다.[30] 정민철은 1999년 18승으로 징크스를 벗어났으나 그 해의 다승왕은 20승의 정민태... 당시 해설자들은 에이스의 상징인 15승을 돌파하지 못하는 그에게 1% 부족하다는 논평을 많이 했다.[31] 평균자책점, 탈삼진, 이닝 3관왕을 쓸어온 1994년이 MVP나 골든글러브에 가장 근접했지만, 이때도 MVP는 크보 최초로 200안타, 100도루, 타율 4할에 도전했던 선수, 골든글러브는 역대 최다세이브를 경신한 투수에게 돌아갔다.[32] 명목상 이유는 6경기 등판 6패에 무릎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어율은 3.26으로 준수했었는데 갈베스는 이전부터 고약한 성질머리로 유명했고, 매년 태업 의혹도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2군행에 불만을 품고 구단과 갈등을 빚어 다시는 1군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33] 2000년 정민태는 말 그대로 미쳤다. 18승 6패를 거두면서 공동 다승왕, 플레이오프 MVP를 거두었다. 다만, 정민태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83승을 거두면서 리그 최강의 선발투수로 군림했으며, 매 해마다 20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심지어 1997~1999년은 이닝 소화율 1위, 2000년은 이닝 소화율 2위를 했다.[34] 일본은 珉(민)자를 쓰지 않는다.[35] 이 부분은 이 사람의 오해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요미우리 쪽이 먼저 영입의사를 밝혔다.[36] 뉘앙스 상 요미우리의 대우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정민철이 팀을 잘못 골랐다는 뜻.[37] '쓸모도 없는 가축을 죽을 때까지 키운다'라는 뜻으로, 무쓸모한 사원을 한직에 앉혀두고 썩힐 때 하는 말이다.[38] 우에하라에 이어 2년 연속 터진 특급 신인 투수였다.[39] 1979~1997년까지 요미우리와 세이부에서 중간계투와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우완투수이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40] 다만 카토리는 이듬해 거인에 입단한 정민태는 굉장히 싫어했다. 2001~2002년 당시 대놓고 언론이 보도할 정도였고, 정민태도 훗날 인터뷰에서 불화가 사실이었다고 증언했다.[41] 선수생활 당시 주로 등판하는 시간이 8시 30분이어서 8시 30분의 남자라는 별명을 가진 구원투수였다. 거인의 일본시리즈 V9 당시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모리 마사아키와 팀메이트였다.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쿠도 키미야스와 궈타이위엔 등을 육성했다. 투구 이론과 투수 육성법이 이름났으며 코치 경력만 24년에 달한다.[42] 당시 거인 내의 보이지 않는 역학 관계도 이를 부채질 한 것으로 보인다. 나가시마 시게오는 자기 팀 선수 이름도 제대로 몰랐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미야타는 과거 나가시마 1차 정권 당시 나가시마와의 불화로 쫓겨난 뒤 니혼햄, 세이부, 주니치 투수코치를 맡으며 그 수완을 인정받아 1999년 요미우리 1, 2군 총괄코치로 금의환향한 케이스이다. 거인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팬이라면 짐작하겠지만, '''요미우리 순혈 vs 평민팀에 빌붙었다가 돌아온 진골의 상황이었다는 것.[43] 실제로 나가시마는 인터뷰에서 대놓고 "그 녀석(미야타)은 밖에서 들어왔으니까"라고 까기도 했다. 덧붙여 훗날 정민철의 코칭 스타일도 미야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기사[44] 또한 나가시마는 베테랑이나 연차가 앞서는 선수를 우선적으로 챙기는 성향이 있었다. 당시에도 '정민철보다 갈베스에게 기회를 주자.' → '갈베스를 퇴출해야 된다고? 그럼 다음 기회는 당연히 먼저 고생한 조성민에게 줘야지.'라는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