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arkslategray><colcolor=#fff> 윤부길 尹富吉 | |
출생 | 1912년 12월 31일 |
충청남도 보령군 | |
사망 | 1957년 6월 8일 (향년 44세) |
경기도 인천시 남구 숭의동 | |
본관 | 파평 윤씨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가족관계 | 2남 6녀 중 차남(셋째) 전처 밀양 박씨(사별), 장남 윤영기, 장녀 윤수현 후처 성경자[1](재혼), 차남 윤항기, 차녀 윤복희 손자 주노[2] |
활동기간 | 1933년 ~ 195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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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성악가, 작사가, 배우, 극작가, 코미디언.가수 윤항기, 윤복희 남매의 아버지이다.
2. 생애
2.1. 연예계 활동
1912년 12월 31일 충남 보령의 부농 집안의 차남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성한 후 일본 도쿄의 도요(東洋)음악전문학교[3]로 유학하여 성악을 전공했으나 1933년 중퇴 후 조선으로 돌아왔고, 박용구, 황문평 등과 함께 컬럼비아 가극단[4] 에 입단하면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윤부길은 전공이었던 성악 외에도 기타, 피아노 등의 악기 연주도 능했고 컬럼비아 가극단에서 상연한 오페레타에 출연하여 뛰어난 노래 솜씨와 연기를 뽐내면서 컬럼비아의 인기 스타로 발돋움 했으며, 직접 여러 편의 연극 각본을 집필한 바 있다.
그가 출연한 오페레타는 콩쥐팥쥐, 견우와 직녀, 춘향전 등이 있는데 특히 방자 역으로 출연한 춘향전에서는 광한루에서 그네를 타던 성춘향에게 이몽룡의 명으로 수작을 걸다 몸종 향단이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은 방자가 이몽룡에게 도움을 구한답시고 갑자기 바지춤에서 전화 수화기를 꺼내어 징징대며 통화하는 연기[5]로 관객들을 포복절도 시켰다. 그리고 윤부길은 복화술[6]을 이용한 코믹 연기에도 능하여 후일 한반도 최초의 개그맨 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자신의 캐리커처를 직접 그려서 공연 광고에 삽입했던, 말 그대로 팔방미인의 만능 연예인이었다.
윤부길이 그린 자신의 캐리커처를 넣은 부길부길 쇼 광고(1953년)[7]
광복 이후 윤부길은 자신의 이름을 딴 악극단 부길부길 쇼를 결성하여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으며 그 외에 대중가요 작사가로 1953년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 1957년 심연옥의 시골버스 여차장 등을 작사했고, 영화 인생 역마차, 안개 낀 서귀포에 출연하였다.[8]
2.2. 가족관계
1933년 5월 밀양 박씨 부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9]를 두었지만 1939년 3월에 박씨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며 사별하였다.3년 뒤인 1942년 윤부길은 같은 라미라(羅美羅)가극단[10] 소속의 고향선 이란 예명으로 활동하던 무용수 성경자(1923~1952)[11]와 재혼하였는데, 그녀는 전설의 무용가이자 안무가로 이름을 남긴 최승희의 수제자였다. 성경자는 1남 1녀를 낳았고 그 남매가 이후 대한민국의 유명한 가수로 이름을 날린 윤항기와 윤복희 였다.
3. 사망
1950년대 들어 6.25 전쟁 등의 여파로 부길부길 쇼단의 공연은 계속 흥행에 실패하며 윤부길은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힘겨운 현실에서 도피하려다 그만 아편에 손을 대면서 심한 중독에 빠져 마약중독자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윤부길의 아내 성경자는 남편의 아편 중독 치료비용을 마련하고자 아이들과 헤어져 유랑 악극단 소속 무용수[12]로 전국을 순회하다가 1952년 10월 29일 강원도 삼척군 묵호항에서 공연 도중 무대 위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향년 29세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13]졸지에 두 번째 상처라는 아픔을 겪은 윤부길은 거의 고아 신세가 되다시피한 윤항기, 윤복희 남매를 위해 아편 중독을 떨치고 극단 운영을 재개했지만 다시 아편에 빠지면서 건강이 악화되었고, 목사이던 형이 충남 천안에서 운영하는 교회에 의탁했다가 1957년 4월 인천 소재의 요양원에 들어가 요양하던 중 그 해 6월 8일 심장마비로 급사하였다. 향년 44세.
4. 여담
- 막내딸 윤복희는 어린 시절 범상치 않은 끼를 선보이며 젖니도 빠지지 않은 네살 때부터 아버지가 이끌던 부길부길 쇼 무대에 올라 노래와 춤을 선보였고 여섯살 이던 1952년 뮤지컬 크리스마스의 선물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데뷔, 이후 세계적인 재즈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 에게 발탁되어[14] 해외에서 활동하였다. 1967년 대한민국으로 귀국한 윤복희는[15] 가수와 뮤지컬 배우로 크게 이름을 남겼다.
- 윤복희는 상술한 바와 같이 윤부길이 직접 무대로 이끌었지만, 윤항기는 그래도 아들이라고 자신의 뒤를 이어 연예인이 되겠다는 것을 절대 반대하여 부길부길 쇼가 공연 중이던 극장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피는 속일 수 없었는지 윤항기는 조실부모 후 힘든 유년시절을 버텨낸 끝에 1959년 작곡가 김희갑이 단장으로 이끌던 에이원 쇼[16] 소속 가수로 기어이 연예계에 투신하였고, 해병대 군악대에서 병역을 마친 뒤 1963년 대한민국 최초의 록 밴드인 키보이스[17]의 창단 멤버를 거쳐 1974년 솔로 가수로 데뷔하여 별이 빛나는 밤에, 장미빛 스카프,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행복합니다[18] 등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86년에 돌연 가수를 그만둔 윤항기는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고 장로회 소속 목사로 안수를 받아 이후 목회자로 시무하였다. 2014년, 70세 정년으로 목사 직에서 은퇴한 윤항기는 연예계로 복귀하여 예능프로 출연과 함께 가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 무용수로 활동할 때의 예명은 고향선이었다.[2] 윤항기의 아들. 본명은 윤준호. 1975년생 이며 현재 작곡가 겸 작사가이자 CCM 음악가로 활동 중이다.[3]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코미디언 구봉서도 같은 학교 출신이다.[4] 서항성, 설의식 등이 주축으로 창립한 민족색이 짙은 예술단체 였으며, 일제강점기 시절 여러 차례 일본으로 원정 공연을 가서 한민족의 혼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5] 휴대전화는 당연히 있을 리 없었고 일반 유선전화마저 웬만큼 부유한 집안이 아니면 지극히 보유하기 힘들었던 일제강점기 였는지라 윤부길의 이 연기는 좌중을 빵 터뜨리고도 남을 개그 소재였다.[6] 우리나라에 최초로 복화술을 도입한 사람은 악극단 막간 무대 MC 출신의 희극배우 전방일(1916~1999) 이었으며 윤부길은 전방일의 다음으로 복화술을 활용한 연기자인 셈이다. 해방 이후에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복화술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렸다.[7] 한동안 아편 중독에 시달리다 회복한 윤부길이 부길부길 쇼의 공연 재개를 선언하는 내용이었다.[8] 안개 낀 서귀포는 윤부길 생애 유일한 영화 주연작이며, 딸 윤복희와 같이 극중 부녀 역할로 출연했다.[9] 1935년 생 장남 윤영기, 1937년 생 장녀 윤수현.[10] 컬럼비아 가극단의 후신.[11] 오페레타 콩쥐팥쥐에 성경자는 콩쥐, 윤부길은 황소 역할로 출연하면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12] 남편 치료비 명목으로 악극단에서 상당한 금액을 선불로 당겨 받았다고 한다.[13] 선술했듯이 성경자 자신의 급여를 미리 당겨받고 거의 무급으로 일하면서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영양실조에 걸렸고, 연이은 공연으로 인한 과로까지 겹친 결과였다.[14] 1963년 워커힐 개장기념 리사이틀에 초대되어 윤복희와 같이 공연하면서 그녀가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졌음을 캐치했다고 한다.[15] 그녀가 귀국할 때 입고 온 미니스커트가 한동안 선풍과 물의를 일으키며 유행하기도 했다.[16] 당시 미8군에서 주로 활동하였다.[17] ADD 4가 그 전해인 1962년에 결성하였지만 키보이스, 코끼리 브라더스를 통틀어서 한국 최초의 록 밴드로 꼽히고 있다.[18] 현재 한화 이글스의 대표적인 그 응원가로 불리고 있는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