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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준/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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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수 데뷔 전2. 가수 활동 및 예능 활동
2.1. 가요 프로그램 수상내역
3. 병역기피4. 병역기피 이후5. 해외 활동6. 의외의 나비효과

1. 가수 데뷔 전

1976년 12월 15일 서울특별시 강남구[1] 잠실동(現 송파구 잠실동)에서 태어났다. 가족으로는 어머니와 아버지 유정대, 형 유승환(1975년생)이 있으며 조카는 유한나(女)가 있다. 본관은 강릉 유씨(劉씨 32세손 승(承)자 항렬.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성씨는 모화사상으로 중국 성씨를 빌린 것이라 중국 유씨하고는 관련이 없다.[2])이다.

한국 출생 후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89년 겨울, 가족 모두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가게 된다. 미국에서 현재 그의 아내인 크리스틴 오와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한국에서 촬영 온 연예인[3]을 크리스틴이 응원하는 것을 보며 유승준은 질투를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유승준은 가수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졌고, 그의 크리스틴 역시 유승준에게 가수가 되라고 힘을 실어줬다. 크리스틴은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하게 된 후 방황하던 유승준에게 충격 요법으로 헤어지자 하기도 했다. 크리스틴과 헤어진 유승준 본인도 크리스틴의 빈 자리를 크게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미국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며 혼자 춤과 노래 ​연습을 하다 여자친구의 권유로 한국 연예 기획사 면접을 봤으나, 너무 미국 스타일이라는 이유로 탈락을 하게 된다. 그렇게 몇 번의 오디션을 보던 중 가위를 만든 이윤상과 만나게 되어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데모 테이프를 한국에 있는 기획사 50여 곳에 보냈다.

드디어 한 기획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1996년 겨울, 혼자 커다란 배낭을 메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에 의하면, 이민 온 당시 미국 생활의 기틀을 잡느라 아들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했고 가수가 되겠다는 아들의 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피아노 학원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피아노 연주를 배웠고 태권도 체육관에서 대리사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댄스를 하기 위한 몸을 만들어갔다. 가수가 되겠다며 혼자서 한국으로 갈 때도 부모는 고생 좀 하고 오라는 생각으로 아들에게 단돈 10달러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데뷔하기 전, 소속사에 뿌렸던 데모 테이프

그의 댄스 실력을 엿볼 수 있다. 곡명은 'Black Street - Baby Be Mine'

1997년, 만 20세의 나이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후 2002년 초반까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뒤 해외로 건너갔으며,[4] 2004년 크리스틴과 결혼해 4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 2006년과 2010년에 득남, 2018년 10월에 쌍둥이를 득녀했는데, 장남과 쌍둥이 자매의 나이 차이가 상당하다.

2. 가수 활동 및 예능 활동

그의 인식이 매우 부정적으로 돌아선 현재까지도 대중들은 그가 전국민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갖춘 음악인이자 예능인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여전히 공감하는 편이다. 오히려 유승준이 이렇게 큰 사랑과 인기, 특출난 실력을 두루 갖췄던 그 시대의 아이콘이자 국민적인 멀티 엔터테이너였기에 그의 병역 기피 사건에 대해서 대중들이 더욱 실망하고 분노하는 여론이 커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도 한국 가요계 역사상 노래, 댄스 두 마리 토끼를 깔끔하게 다 잡은 몇 안되는 능력자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박남정 - 현진영 - 박진영 - 유승준 - - 싸이 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시대별 솔로 댄스 가수 계보에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극초반을 대표하는 남성 솔로 댄스가수였다. H.O.T., 젝스키스를 비롯한 1세대 아이돌들이 점령한 당시 가요계에 조성모, 임창정과 더불어서 유승준[5]만이 거의 드물게 남성 솔로 가수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현재까지도 상기한 가수들 이후 남성 솔로 댄스 가수로 데뷔해서 시대의 아이콘격으로 성공한 사례가 2010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전무한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커리어와 실력을 보유했던 남성 댄스 가수였다.
신인소개 <가위> 무대 1997년 06월 14일 [6]

파일:가위_(2).gif
1997년 데뷔곡 가위가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각종 방송사에서 1위를 여러 번 차지하는 등 단숨에 메이저급 반열에 올라섰다. 가위춤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따라췄고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당시 1990년대의 칼군무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굉장히 현란했다. 지금 다시봐도 굉장한 칼군무인데, 그 당시에는 그야말로 파장력이 엄청났다.
인기가요 컴백무대 <나나나> 1998년 04월 26일
음악캠프 <열정> 1999년 05월 15일
관객석 난입 레전드 무대 <비전> 1999년 11월 28일
음악캠프 <연가> 2000년 01월 29일

1998년 출시한 2집 타이틀곡인 나나나, 내가 기다린 사랑 1999년 3집 열정[7], 1999년 4집 비전, 연가 2000년 5집 찾길 바래 어제 오늘 그리고 2001년 6집 WOW와 같은 곡들도 연속으로 히트시키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 중 한 명으로 군림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시트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 다양한 장르의 방송계를 섭렵했다.
음악캠프 <찾길 바래> 2000년 12월 16일

그는 춤꾼 스타일의 옷을 입긴 했지만, 안무 자체가 기본적으로 굉장히 격렬했고[8], 대중성을 꽤나 의식했기 때문에 원타임이나 지누션과 같은 당대의 동료 가수들과 비교해 보면 옷차림이 단정한 편이었다. 더불어 항상 미국식의 짧은 남자머리(Buzz Cut) 혹은 반삭을 고수했기 때문에 중장년층 이상의 어른들에게도 큰 호감을 샀다.

그 당시에는 음성적으로 유행하던 일본 비주얼계의 간접적 영향으로 머리를 길게 하는 게 유행이어서 지저분해 보이고 그래서 당연히 두발 제한을 두었지만, 유승준과 같은 경우에는 머리도 짧은데다 깔끔하고 깨끗하고 얼굴은 물론 두상까지 멋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잘 어울렸고, 유행도 순식간에 뒤바뀌기도 했다. 당시 중고교들은 두발 규정이 엄격했던 터라 학교에서 두발 단속 문제도 꽤 심각했지만, 유승준의 반삭머리가 남학생들에게 유행을 타면서 알아서 단정한 머리를 만드니 이때만큼은 학생부가 두발 단속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였다.

또한 보컬 부분에서도 유승준은 댄스 가수 치고도 상당히 호평을 받았는데, 당장 당시의 여느 발라드 가수들과 비교해봐도 전문 장르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뛰어난 가창력을 보여주었다. 유승준은 호소력 있는 타고난 미성에다 발성적으로 파워풀함까지 겸비한 보컬이었다. 심지어 라이브 무대에서도 그 격렬한 댄스와 빠른 랩을 선보이면서도 후렴부에서는 흠 잡을 데 없이 가창력이 매우 안정적이고 좋았다. 심지어 대부분의 곡들이 빠를뿐만 아니라 2옥타브 시 ~ 3옥타브 레의 높은 음역대였고 <Wow> 처럼 도입부부터 2옥타브 후반대의 음으로만 채워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당연히 유승준 본인도 가창력이 정말 좋은 가수로 평가 받았으며, 김종서, 김건모, 김경호 등 높은 음역대를 자랑하는 선배 가수들의 노래 커버도 역시 잘 소화했다. 노래 퀄리티나 음반 구성은 지금 들어봐도 역대급이고, 요즘 나오는 곡들과 비교해봐도 정말 세련된 편이다. 오히려 댄스 가수가 비교적 저평가되었던 시절에 활동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가창력에 엄청난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평가가 높지 않았지만, 현재 관점에서 본다면 장르 상관없이 가수 중에서도 가창력이 매우 우수한 사기 유닛이었다. 지금은 유승준이 병역기피 사건 때문에 부정적인 여론이 많은데도 "그래도 그 놈이 재능만큼은 진짜배기였고 춤이랑 노래는 기깔나게 잘하던 놈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도 당시 만인의 슈퍼스타같이 같은 연예인들조차도 우러러 보는 위치인 듯하면서도, 나름대로 웃기고 재미있는 모습과 더불어 입담도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무대에서는 카리스마 포지션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예능에서는 오히려 무게 있는 이미지를 버리고 자주 망가지기까지 하면서 친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2020년대인 현재로 비교히면 이승기의 허당 이미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 흔하던 드라마 타이즈 계열의 예능에서 바보 연기 같은 코믹 연기도 종종 할 만큼 오락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서슴지 않아서 성별과 세대를 가리지 않고 사랑받았다.

1990년대 당시의 남자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인기 원탑이었던 건 자명하나, 여자 어린이들도 학교 장기 자랑에서 S.E.S., 핑클 같은 인기 여가수들의 춤을 커버하는 것이 아니라, 유승준의 가위 춤을 추는 경우가 엄청 흔했으니 말 다한 것이다. 실제로 유승준이 활약하던 시절의 영상을 보면, 남자들의 환호도 엄청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유승준 노래와 흉내를 개인기로 삼는 연예인들도 많았다.[9] 가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도 하고 진행도 했었는데 그야말로 친근한 웃음과 카리스마가 있는 멋이라는, 남들은 하나도 얻기 힘든 두 마리 토끼를 완벽하게 잡은 역대급 스타 중의 스타였다. 실제로 병역 기피 논란직전까지 해피투게더 - 쟁반노래방에서 신동엽과 함께 투톱 체제로 초대 MC로서 활동하기도 했다.[10]

그래서, 슈퍼스타처럼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와 무게잡고 우러러보는 위치가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는 마치 옆집에 사는 친근한 동네 형같이 망가지는 이미지도 있었고 특유의 끼와 재주는 물론이고 탄탄한 춤 실력과 격렬한 안무 속에서도 고음의 곡을 깔끔하게 소화해 낼 수 있는 수준급 가창력까지 겸비했었다. 농담이 아니라, 유승준이 없어진 이후 훗날 남성 솔로 가수로 유명해진 비나 세븐한테도 "장난함? 걔네들은 유승준한테 안 된다."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정도다. 지금도 유승준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은 안티들까지 이렇게 말을 할 정도였으면 유승준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유승준은 1990년대에 활동하던 댄스가수들 중에서도 누가 뭐래도 단연 독보적이었고 발군의 재능을 뽐냈었던 가수였다.

게다가 잘생긴 외모에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도 역시 그의 인기 요인 중의 하나였다. 요즘에야 워낙에 몸이 좋은 가수들이 많지만, 1990년대 그 당시에는 한때 의류모델이었던 듀스김성재와 더불어 가요계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뮤직비디오만 봐도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이나 각종 인터뷰를 통해서 데뷔 초기부터 성실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였던 터라 대외적인 그의 이미지 역시 상당히 좋았다. 더불어 출발 드림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면서 건강한 스포츠맨 이미지를 잘 쌓았다.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에서도 전반적으로 멋있으면서도 마이크웍이나 입담도 좋아서 코믹한 옆집에 사는 동네 형 같은 이미지도 잘 보여줬고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잘생긴 팀의 주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우승까지 하면서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다. 동거동락 시절 메인MC였던 유재석이나 다른 출연진들과 뛰어난 예능감으로 합을 잘 맞춘 영상들은 지금도 유튜브에서 클립으로 볼 수가 있다.

게다가, 담배를 끊고 금연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금연 캠페인 이러한 좋은 이미지가 최고조에 달한 전성기 시절에는 아름다운 청년[11]이라 불렸고, 다른 연예인들에게는 흔한 안티조차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광범위하였다. 심지어 댄스에 큰 관심이 없거나 낯설은 중장년층 ~ 노년층도 그의 대표곡과 얼굴 정도는 대부분 기억하면서 호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더하여, 나이도 어린 인기 연예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연애 스캔들도 없이 사생활도 무척 깨끗한 편[12]이었고, 무대 뒤에서도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던 터라 선후배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매우 좋았다. 또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점을 여러모로 어필한 점도 이에 한 몫 했는데, 당시 개신교 신자라면 ", 담배를 안 하거나 적게 하고 검소하게 사는 등 자기 절제를 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지금보다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의 앨범 마지막 곡은 항상 직접 부른 찬송가였는데, 이는 테이프CD 재킷에는 써 있지 않았기에 이에 게재되어 있는 마지막 곡을 들은 뒤 테이프나 CD가 꺼질 걸 생각하던 감상자들이 뜬금없이 찬송가가 나왔으니 크게 당황하기도 했다. 그리고, MBC에서는 그의 데뷔 스토리와 데뷔 이후의 삶을 취재한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했을 정도였는데 그 당시에는 서태지와 아이들같은 톱스타가 아니라면 절대로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주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한 마디로, 유승준의 전성기 시절에는 대중적인 호감과 건전, 건강한 흠잡을 데가 없이 세대를 막론하고 좋은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다. 사실, 당대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와 관련된 잡음이나 루머가 존재하긴 했는데, 로스앤젤레스한인 갱단 출신이라는 루머였다.[13] 하지만, 유승준이 갱단 출신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전무한데 정말로 갱단에 들어갔었다면 쉽게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2001년이 어찌보면 그에겐 인기 최전성기이자 가장 이익이 많았던 해인데, 2000년대 당시의 쟁쟁한 라이벌들이었던 H.O.T.젝스키스가 해체된 이후였다. 또한 CF도 10편 이상 찍었고, 당시 잘 나가던 음반회사와 무려 37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를 가진 돈을 받고 전속계약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유승준에게는 인생이 탄탄대로를 달리고 엄청난 최고의 전성기를 보여줬던 한 해였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그 인기 덕택에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조추첨식의 축하공연같은 거대한 무대도 서게 되었다.
파일:StebeungYoo.jpg
2001년경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프로필이다. 한때 유승준의 과거 프로필 사진이기도 했으며, 당시 유승준의 카리스마와, 멋스러움이 배어있는 그러한 단면적인 모습이다.

2.1. 가요 프로그램 수상내역

날짜 곡명 음악 방송 비고
1997. 08. 09. 가위 인기가요베스트50 첫 1위
1997. 08. 16. 인기가요베스트50 2주 연속
1997. 08. 20. 가요톱텐
1997. 08. 24. TV가요20
1997. 08. 27. 가요톱텐
1997. 09. 03 가요톱텐 3주 연속
1998. 06. 06. 나나나 쇼 뮤직탱크
1998. 06. 07. 인기가요
1998. 06. 13. 쇼 뮤직탱크
1998. 06. 14. 인기가요
1998. 06. 20. 쇼 뮤직탱크
1998. 06. 21. 인기가요
1998. 06. 27. 쇼 뮤직탱크
1998. 06. 28. 인기가요 4주 연속, 왕중왕
1998. 07. 04. 쇼 뮤직탱크 5주 연속, 최강자
1998. 06. 16. 내가 기다린 사랑 뮤직뱅크
1998. 06. 23. 뮤직뱅크
1998. 06. 30. 뮤직뱅크 3주 연속
1999. 04. 14. 열정 뮤직뱅크
1999. 04. 17. 쇼 뮤직탱크
1999. 04. 20. 뮤직뱅크
1999. 04. 24. 쇼 뮤직탱크
1999. 04. 27. 뮤직뱅크
1999. 05. 01. 쇼 뮤직탱크
1999. 05. 04. 뮤직뱅크
1999. 05. 08. 쇼 뮤직탱크
1999. 05. 09. 인기가요
1999. 05. 11. 뮤직뱅크
1999. 05. 15. 쇼 뮤직탱크 5주 연속, 최강자
1999. 05. 16. 인기가요
1999. 05. 18. 뮤직뱅크 6주 연속, MVP
1999. 05. 30. 인기가요 3주 연속, 왕중왕
1999. 07. 06. 슬픈침묵 인기가요
1999. 07. 11. 인기가요
1999. 12. 14. 비전 뮤직뱅크
1999. 12. 19. 인기가요
1999. 12. 21. 뮤직뱅크
1999. 12. 26. 인기가요
2000. 01. 02. 인기가요 3주 연속, 왕중왕
2000. 01. 04. 뮤직뱅크
2000. 01. 11. 뮤직뱅크
2000. 01. 18. 뮤직뱅크 5주 연속
2000. 02. 13. 연가 인기가요
2000. 02. 20. 인기가요 2주 연속
2000. 12. 21. 찾길바래 뮤직뱅크
2000. 12. 23. 음악캠프
2000. 12. 24. 인기가요
2000. 12. 28. 뮤직뱅크
2001. 01. 04. 뮤직뱅크 3주 연속, 골든컵
2001. 01. 06. 음악캠프
2001. 01. 07. 인기가요
2001. 01. 13. 음악캠프 3주 연속, King of the Camp
2001. 01. 14. 인기가요 3주 연속, 왕중왕
2001. 10. 05. Wow 쇼 뮤직탱크
2001. 10. 07. 인기가요
2001. 10. 21. 인기가요 2주 연속
총 56회 수상

3. 병역기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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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하나로 인해 유승준은 더 이상 한국인 유승준이 아닌, 미국인 스티브 유로 불리게 되었으며, 한국에서의 입지가 사실상 소멸했다.

4. 병역기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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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외 활동

성룡이 제작·각본·주연을 맡은 영화 '대병소장(大兵小將: Little Big Soldier)'에 출연했을 때에도 그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는 여전했고 결국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든 채 영화는 스크린 뒤편으로 사라졌다. 영화 개봉에 앞서 국내 영화잡지와 인터뷰를 했다.
유승준은 "이전에 갖고 있던 경험과 스스로에 거는 기대까지 다 내려놨다. 이전의 나를 부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벽하게 신인의 자세로 시작해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비하 발언으로 논란이 된 2PM박재범에 대한 말도 했는데 "일단 참 마음이 아팠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 지는 모르겠지만 한 젊은이의 실수를 안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면 실수도 할 수 있다. 기회를 주면 훨씬 더 크게 성장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는 병역 사태와 관련, 8년 전 자신을 비난했던 여론에 대해 "그 정도로 크게 사회적 파장이 일어날 지 몰랐다. 시민권을 따고 나서 바로 한국에 들어와 7집 앨범을 내려고 했다. 왜 내 마음이 변했는지 충분히 설명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입국 금지를 당하게 됐다"며 당시의 상황을 해명했다.

또 "한국에서 다시 활동하고 싶다. 방송을 보기만 해도 내가 예전에 거기 있었기 때문에 가슴이 참 많이 뜨거워진다. 아직도 한국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가서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다. 다만 국민 여러분께 용서 받고 싶다"고 용서를 구했다.

대병소장의 경우 중국 현지에선 1억 위안을 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했는양 기사가 나오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사실 1억 위안이 수치는 개봉 2주차에 1억 위안 돌파라는 이야기고...한국 돈으로 170억 원 정도 된다. 그 정도면 최종으로 약 2억 위안 정도는 될것으로 보이며, 한국 돈으로 350억 정도란 이야긴데...성룡이라는 이름으로 따지면 흥행이 그럭저럭인 셈이다. 게다가 해외가 실패라서 전반적으로 보면 상업적으로는 실패에 가깝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의 흥행은 성룡 영화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참패를 기록했다. 이는 그야말로 성룡의 굴욕이라고 할 만한 결과였다. 관련 기사

이는 역대 한국 성룡 영화 관객 동원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성룡이 주연을 맡은 극장 개봉작 중 전국 관객 10만도 모으지 못한 영화는 이 대병소장이 처음이었다. 차이니즈 조디악이 다시 10만명 이상을 넘었으나 예전만 못한다. 게다가 성룡과 제이든 스미스[14]가 주연으로 등장한 베스트 키드는 30만도 못 채웠다. 그렇다고 단순히 유승준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대병소장의 해외 흥행을 보면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망했으며 가라테 키드의 해외 흥행 또한 한국에서만 흥행을 못한게 아니라 스웨덴, 우크라이나, 폴란드, 터키등에서도 흥행 실패를 하였으며 중국은 평가가 좋지 않았고 박스오피스 집계 기록도 없다. 해외 국가들 중에서도 2천만달러 이상을 기록한 나라가 한곳도 없기 때문에 한국만 망하게 아니라 미국을 제외한 해외 흥행이 전부 망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베스트 키드는 저예산 영화(제작비 4천만달러)라서 해외 흥행을 제외 하더라도 미국 흥행(1억 7천 8백만달러)이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 속편 제작을 하고 있다. 요악하자면 유승준이 한국에서의 흥행에 영향에 미쳤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한국 뿐만 아니라 유승준을 모르는 해외 국가에서도 흥행이 기대 이하였던 것으로 보아 단순히 유승준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 취권(1979): 서울 89만(국도극장 1개관)
    이 흥행은 당시 역대 흥행 1위 격인 초대박 흥행이었다. 참고로 단관 상영관에 2001년 이전까진 서울 관객만 집계하는 체제였고, 지금의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치면 1000만 관객 쯤 되는 엄청난 관객 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저 기록을 서울 관객 90만으로 깨기 전까지 무려 22년이 걸렸으며, 지금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너의 이름은. 등이 그 기록을 연이어 깨버리며 비영어권 외국 영화 흥행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아니 그냥 더 갈 것도 없이 중화권 영화 중에 서울에서만 89만을 동원한 영화는 현재까지 하나도 없다. 한국영화 기준으로 봐도 14년 뒤인 1993년에 서편제가 서울 관객만 103만 명을 동원하며 초대박을 치기 전까지 약 14년 가까이 역대 흥행 1위를 오랫동안 유지했던 영화인 셈.
    훗날 2004년에 개봉한 1978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막바지에 20살이 된 현수와 햄버거가 극장 앞에서 햄버거가 취권을 안 봤다는 현수에게 "아직 취권도 안 보고 뭐했냐"며, 이소룡빠인 현수를 도발하는 대사가 나오기도 했다.
  • 용형호제(1987): 서울 20만
    지금 보아도 서울 관객 20만은 꽤 대박난 수준이다.
  • 홍번구(1995): 서울 30만
    성룡의 할리우드 성공적 진출작. 이미 성룡은 80년대에 프로텍터를 비롯한 영화로 미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흥행이나 평은 참혹했다. 버라이어티 지로부터 아시아에서 온 D급 배우라고 비아냥을 받았으나 11년 뒤 홍번구가 미국에서 3239만 달러 대박을 거둬들이며 버라이어티 지는 그 D급 배우가 이젠 A급으로 돌아왔다라고 호평했다.
  • 폴리스 스토리4(1996): 서울 35만
    1996년 구정 연휴에 개봉했다. 은행나무 침대와 함께 설 연휴 최강자로 군림할 거라는 예측이 대세였으나 은행나무 침대가 초장기상영을 하며 초대박을 치는 동안 이 쪽은 상당히 부진했다. 은행나무 침대가 대략 50만쯤 찍었다고 하니...
  • 턱시도(1998): 서울 33만
  • 러시아워 2(2001): 전국 76만
  • 턱시도(2002): 전국 170만
    이 당시 흥행한 영화의 척도는 대개 100~150만 정도였다.
  •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2005): 전국 47만
  • 러시아워 3(2007): 전국 80만
  • 포비든 킹덤(2008): 전국 100만
  • 대병소장(2010): 전국 9만
  • 베스트 키드(2010): 전국 29만
  • 차이니즈 조디악(2013): 전국 31만

파일:external/www.imaeil.com/20130218_144936000.jpg

차이니스 조디악에 출연한 유승준.

이후 경한 2(硬漢2奉陪到底)에 악역으로 출연, 개봉 10일만에 6천만 관객을 기록했다고 기사가 떴으나 결국 오보로 판명났고 <중국영화보>에 의하면 약 40만 명의 관람객을 모았다고 한다. #[15]

2012년에는 성룡의 용형호제 3편 격인 차이니즈 조디악에 권상우를 비롯한 다른 한국 배우들과 같이 나올 예정이라고 했지만... 정작 출연자 명단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밖에도 맨 오브 타이치(2013)라는 키아누 리브스가 첫 감독을 맡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해당 영화는 imdb 평점 6.1, 로튼토마토 관객점수 50%를 기록하는 등 평론가에게서나 관객에게서나 혹평을 받으며 흥행에서 참패했다. 사실 키아누야 워낙에 커리어 기복이 심한 편인데다 유승준 역시 주연도 아니고 출연진 목록 끄트머리에나 보일 정도의 단역으로 출연한 탓에 영화가 흥행했어도 커리어에 큰 이득은 되지 않았겠지만, 할리우드에 얼굴도장을 찍는 데에 실패한 셈이다.

유승준의 성룡 영화 두 편의 정확한 흥행 수치는 찾기 어려우나 차이니즈 조디악 같은 경우 최근 성룡 영화 중에서 가장 대박난 영화이지만, 대병소장은 외국 흥행은 망했고 중국 흥행에서도 그럭저럭이다. 차이니즈 조디악은 중국에서 8억 위안, 한국 돈으로 약 1400억원 내외의 극장매출을 올렸고, 역대 랭킹에서도 10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대박이지만, 대병소장은 최종 약 2억 위안 내외의 흥행으로 나쁘지는 않으나 성룡을 생각한다면 그럭저럭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가 성룡 영화 흥행의 큰 변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국내 흥행만으로 따지자면 성룡 영화가 나오면 의리로라도 극장에 들어가던 골수 남성팬들의 이탈을 가속화시킨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개봉한 성룡 영화 드래곤 블레이드는 아예 홍보물 전반에서 유승준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꽁꽁 감추었다. 그는 비중있는 단역 정도로 짧게만 출연했으며, 이와 상관 없이 이 영화는 한국에서 흥행에 실패했다. 2018년에 재개봉했는데도 마찬가지.

2020년 2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주인공 샹치를 뽑는 오디션에 참가하여 최종 후보군에까지 들었다가 결국 시무 리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2020년 성룡 제작 드라마 '성화 14년'에 출연했는데, 작중 등장하는 의상들이 너무나 한국 사극 복장과 비슷하여 논란이 되었다. 시기상 명나라 복식이 한복과 비슷할 때가 있긴 했지만, 이건 중국 내에서조차 조선 고려 스타일과 지나치게 흡사하다며 한드 따라하기냐는 지적이 나올 정도니 말 다 했다. 최근 중국 드라마 동궁, 드라마 태자비승직기, 드라마 연운대(원작가 미월전 제작), 드라마 치아문단순적소미호 작가 혐한 논란 등 현대에도 문화적 침범 형식으로 동북공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보니 한국 내 여론은 더욱 싸늘하다. 안 그래도 논란이 많은 판에 이런 작품에 출연하면서 자신이 한국인이고 입국시켜 달라는 요구를 하는 모습이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평.

6. 의외의 나비효과

유승준의 병역기피는 실로 어마무지하게 크고 오래가는 파장을 일으켰다. 유승준의 후견인이 된 성룡은 야심차게 보이그룹 JJCC를 데뷔시켰고 성룡 본인의 이름을 걸었지만 이 '성룡의 이름'이 희한하게 '유승준의 이름'으로 전환되면서 JJCC 멤버들은 생판 유승준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승준의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이 데뷔시킨 보이그룹'이라는 이상한 악명 아닌 악명이 붙어버렸다. 그 바람에 대형 신인으로 데뷔한 것과는 대조되게 폭망했는데 JJCC 자체가 딱 소나무의 남자 버전이 되었다. 소나무 역시 성별만 여자일 뿐 JJCC와 모든 게 닮았다. 결국 JJCC는 모든 걸 포기하고, 산청 이외의 한국인 멤버 전원이 군대에 입대했다.


[1] 당시 잠실은 서울 강남구에 속했다가 이후 강동구로 편입되었고 1988년 송파구 분구와 함께 송파구에 편입되었다.[2] 참고로 제19대 대통령 선거바른정당 후보로 나섰다가 4위로 낙선한 정치인 유승민과 같은 항렬이며, 유재석의 손자 항렬이기도 하다.[3] 듀스의 김성재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김성재도 병역기피 목적으로 국적포기를 해 수사를 받다가 사망했다.[4] 해외로 건너간 사유는 아래에서 후술. 이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5] 공교롭게도 셋 다 당대 최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출발 드림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셋 다 운동을 특출나게 잘 했기 때문이다. 단, 임창정은 가수임과 동시에 배우라서 연기 활동과 가수 활동을 병행했기에 꾸준히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지는 못했고, 가수 활동 시기에만 나왔다. 여기에 전진김종국을 포함해 드림팀에서 무술인 이미지의 배우 이상인의 시대를 지나 가수 에이스 전성기 시대를 만든 인물들이다. 중간에 배우 박용하의 에이스 시기도 잠깐은 있었지만. 그리고 앞에 언급된 인물들 모두 드림팀 왕중왕전에 출전하였는데, 유승준이 병역기피 사건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도 왕중왕전에 초대받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김종국과 팔굽혀펴기 시합을 벌였을 정도니까 말이다.[6] 참고로, 이 방송분에서 유승준은 안재욱의 대타로 출연한 것이었는데 (그래서 가사의 자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란한 을 추면서도 훌륭한 가창력을 보여주면서 그가 스타로 발돋움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영상을 본 사람들의 대부분의 반응은, 화려한 춤실력과 빼어난 가창력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것을 보고 "욕하러 들어왔다가 감탄하고 돌아간다", "누가 타임머신을 타고 저 때로 돌아가서 유승준한테 무조건 군대 가야 한다고 말 좀 해주고 와라", "유승준, 너만 많은 걸 잃었다는 착각하지 말아라. 우리도 너를 잃었다." 라고 말할 정도다. 훗날 그의 행보에 비난을 하는 대중들조차도 그의 재능만큼은 안타까워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7] 40초 부근에 스타크래프트 마린의 'gogogo' 효과음이 샘플링되는 등, 시류를 상당히 잘 타는 감각이 있었다.[8] 실제로 그 당시의 유승준은 동아시아 최고로 손꼽히는 춤꾼이라 평가받기도 했었다.[9] 당시 예능 단골 유승준 흉내 드립은, 유승준의 노래 '열정' 도입부에 나오는 영어 가사를, 한국말처럼 바꾼 '김밥에 김이 없대'.[10] 이후 후술할 사건으로 인한 부득이한 하차 이후 그의 공석은 이효리가 꿰차게 된다.[11] 당시 방송가에서 주로 사용하곤 했덩 전성기의 유승준에 대한 대중들의 이미지를 한 줄로 표현한 캐치 프레이즈였다.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호칭 자체의 원조는 노동 운동가인 전태일 열사, 그 시기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홍경인 주연의 한국 영화가 개봉했었다.[12] 현재 아내인 크리스티나 오(한국명 오유선)와 무려 그가 데뷔하기 7년 전인 1990년도부터 교제 중에 있었고 그가 국내 활동 공백기 동안에는 영주권 유지를 위해 미국에 머무르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병역 기피 사건과는 별개로 당시 방송국 관계자들이나 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사생활적으로는 문란하지도 않고 터치할 부분이 별로 없던 인물이었다는 게 중론이다.[13] '코리안 프라이드'라는 갱단 출신이었다는 루머다. 1992년 초반에 결성되었다가 1990년대 중반 전성기였으나, 이후 더 거대한 세력의 아시안 프라이드에 흡수되었다.[14] 윌 스미스의 친아들이다.[15] 또한 경한 2에서는 유승준보다 칠협오의의 주인공인 초은준(焦恩俊), 유엽(劉燁), 장쯔린(張梓琳) 등이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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