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5:00:00

쇼다 코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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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다 코우조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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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A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17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7~1988년 센트럴리그 수위타자
1986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389
1987
쇼다 코우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노즈카 카즈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333
1988
쇼다 코우조
(히로시마 도요 카프)
.340
1989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자이언츠)
.378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7~1991년 센트럴리그 2루수 골든글러브
1986
시노즈카 카즈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쇼다 코우조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2-1994
와다 유타카
(한신 타이거스)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8~1989년 센트럴리그 2루수 베스트나인
1986-1987
시노즈카 카즈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쇼다 코우조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0-1991
타카기 유타카
(타이요 훼일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9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1986-1988
야시키 카나메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쇼다 코우조
(히로시마 도요 카프)
노무라 켄지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오가타 코이치[1]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일본프로야구선수회 로고.png 노동조합 일본프로야구선수회 역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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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초대 2대 3대 4대 5대
나카하타 키요시
1985~1989
하라 타츠노리
1989~1992
오카다 아키노부
1992~1995
쇼다 코우조
1995~1998
후루타 아츠야
1998~2005
<rowcolor=#ffffff> 6대 7대 8대 9대 10대
미야모토 신야
2005~2008
아라이 타카히로
2008~2012
시마 모토히로
2012~2017
스미타니 긴지로
2017~2021
아이자와 츠바사
2021~
}}}}}}}}} ||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4번
팀 아일랜드
(1983-1984)
쇼다 코우조
(1985-1998)
효도 히데하루
(1999-2002)
SK 와이번스 등번호 88번
반재륭
(2008)
쇼다
(2009)
세키가와
(2010)
한화 이글스 등번호 81번
이선희
(2013~2014)
쇼다
(2015~2016)
나카시마
(2017)
KIA 타이거즈 등번호 87번
조경환
(2015~2016)
코우조
(2017~2019)
나성용
(2020)
}}} ||
파일:쇼다코조.jpg
쇼다 코우조
[ruby(正田, ruby=しょうだ)] [ruby(耕三, ruby=こうぞう)] | Kozo Shoda
[2]
출생 1962년 1월 2일 ([age(1962-01-02)]세)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와카야마 상업고등학교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양타
프로 입단 1984년 드래프트 2라운드 (히로시마)
소속팀 신일본제철 히로하타 경식 야구부 (1980~1984)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5~1998)
지도자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수비·주루코치 (1999)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군 수비코치 (2000~2004)
한신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2005~2007)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09)[3]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09)[4]
오릭스 버팔로즈 1군 타격코치 (2010~2011)[5]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5)
한화 이글스 육성군 수비코치 (2016)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2017~2019)[6]
KIA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2019)[7]
교토 세이쇼 고등학교 어드바이저 코치 (2021~)
프런트 오릭스 버팔로즈 본부장보 (2011)
해설위원 데일리 스포츠·선 TV 야구 해설위원 (2008)
응원가 듣기[8][9]

1. 개요2. 선수 경력3. 연도별 성적4. 지도자 생활5. 기타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본 국적의 前 야구선수. 현역 시절엔 히로시마 붉은 헬멧군단(아카헬 군단)의 핵심 멤버였다.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로 활동했고, 김성근 감독이 팀을 이끌었던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에서도 코치로 활동했다 보니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일본 야구계 인물 중 하나다. 그 외 짧게나마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던 적도 있다.

2. 선수 경력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6b9623c5-s.jpg
선수 시절에는 데뷔부터 은퇴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2루를 지킨 레전드이자 프랜차이즈 선수였다.

NPB 역대 최고의 강타선을 논할 때 빠짐없이 언급되곤 하는 90년대 히로시마의 붉은 헬멧 군단, 이른바 아카헬 타선[10]의 일원으로 아카헬의 주전 2루수이자 2번 타자였다. 유망주였던 대타자 가네모토 도모아키하위타선으로 많이 나올 정도로 장타력이 빵빵했던 팀에서[11] 주루력과 작전 수행 능력, 교타력을 보태며 감초같은 역할을 했던 타자이다. 여담으로 비교적 성공적인 NPB 커리어를 쌓았던 선동열 국가대표 감독도 일본에서 선수 시절 이 히로시마 아카헬 타선만 만나면 맥을 못 추곤 했었다. 아웃카운트 1개를 잡는 동안 7실점을 하는 등 일본생활 흑역사의 대부분은 아카헬 타선 때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고교 졸업 후 일본의 사회인야구 팀인 신일본제철 히로하타 경식야구부(現 일본제철 히로하타 경식야구부)에서 뛰며 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었고, 팀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12] 1984년 드래프트 2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한 후 곧바로 주전 2루수를 차지하여 프로 3년차인 1987년에는 타율 .333을 기록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시노즈카 토시오와 공동으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런데, 정작 타율 1위를 기록할 동안 홈런은 단 1개도 치지 못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양대리그 체제로 들어선 이후 유일한 무홈런 수위타자 기록이다.[13] 당시 카프의 홈구장인 히로시마 시민구장의 작은 크기[14]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며, 컨택과 빠른 발을 앞세운 그의 플레이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다.

이듬해인 1988년에도 타율 .340으로 2년 연속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고, 1989년엔 34개의 도루를 기록하여 데뷔 후 처음으로 도루왕에 등극했다. 이 해의 도루왕 수상에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당시 시즌 최종전 직전까지도 쇼다는 도루 1위였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토마시노 켄지(32도루)에게 4개 차로 밀렸었으나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최종전에서 일본프로야구 1경기 최다인 6도루를 기록하여 극적으로 토마시노를 제치며 2개 차이로 도루 1위에 올랐고, 현재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15][16]

이외에도 1988년과 1989년에 2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 1987년부터 1991년에는 5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아카헬 타선을 대표하는 2루수로써 활약했다. 이후 점차 기량이 하락하는 와중에도 꾸준히 뛰어오다 1998년 시즌을 끝으로 통산 1546안타, 146도루, 타율 .287, 44홈런의 기록을 남기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1995년 12월부터 은퇴할 때까지 일본프로야구 선수회의 제4대 회장을 역임한 적이 있다.

3. 연도별 성적

통산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출루율 장타율 OPS
1985
57 50 .180 9 1 0 0 0 8 5 11 .339 .200 .539
1986 90 219 .288 63 8 1 1 11 28 10 14 .339 .347 .686
1987 123 393 .333 131 20 4 0 26 55 30 24 .387 .405 .792
1988 104 394 .340 134 8 7 3 23 49 16 29 .389 .419 .808
1989 128 498 .323 161 19 7 1 25 74 34 50 .387 .396 .783
1990 124 462 .301 139 18 6 3 39 48 9 36 .354 .385 .740
1991 132 481 .291 140 17 5 8 52 66 9 45 .350 .397 .747
1992 89 359 .301 108 21 1 4 68 49 15 37 .366 .398 .764
1993 121 443 .257 114 13 0 7 24 60 4 36 .315 .334 .649
1994 122 464 .280 130 6 0 5 34 55 3 35 .331 .325 .656
1995 124 449 .274 123 17 2 3 38 62 7 54 .352 .341 .693
1996 124 480 .235 113 13 0 2 35 50 4 30 .283 .275 .558
1997 117 324 .241 78 11 2 6 34 34 0 19 .282 .343 .625
1998 110 376 .274 103 9 0 1 17 44 0 31 .330 .306 .636
NPB 통산
(14시즌)
1565 5392 .287 1546 181 35 44 391 682 146 451 .345 .358 .702

4. 지도자 생활

4.1. NPB 시절

은퇴 후 이듬해인 1999년부터 친정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수비코치로 선임되었지만 1년만에 그만두었다. 이후 2000년부터 오사카 긴테츠 버팔로즈의 수비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2004년 말 킨테츠가 오릭스에 합병되는 과정에서 팀을 떠났다. 이후 2005년부터 한신 타이거즈의 타격코치로 자리를 옮겨 2007년까지 재직하는 등 현역 은퇴 후 여러 팀에서 코칭스태프로 활동했다.

2008년에는 1년동안 선TV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4.2. SK 와이번스 시절

파일:external/www.sportsq.co.kr/207651_198941_2713.jpg

그러다가 2009년부터 SK 와이번스의 2군 타격코치로 부임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시즌 중이던 7월 16일, 1군 타격코치로 승격되었다.

SK에서는 1년만 있었고 1군 선수단을 지도한 건 시즌 절반에 불과하지만 SK 특유의 끈질긴 타선을 만들어낸 데다 팀 타선이 역대급으로 강력했다 보니 평가가 무척 좋았다. 시즌 후 SK와 재계약하지 않고 오릭스 타격코치로 옮겨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이에 아쉬워하는 팬들도 있었을 정도.

4.3. 오릭스 버팔로스 시절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1082700339_0.jpg
[17]

2009년 시즌 종료 후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이 이끄는[18] 오릭스 버팔로스의 타격코치로 자리를 옮기며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1군 타격코치를 맡은 2010년 오릭스는 퍼시픽리그 5위에 그쳤으나 팀 타율은 0.271로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2011년부터 이승엽이 오릭스에서 뛰는 게 확정되면서 다시 한국 선수와 인연을 이어나가게 됐다.

그러나 2011년 8월 26일에 팀의 타격 침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고, 남은 시즌 동안 본부장보를 맡았다.

4.4. 한화 이글스 시절

2014년 11월에 SK 시절의 인연으로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한화 이글스의 코치로 합류하면서 5년만에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보직은 김재현과 함께 1군 타격코치를 맡는다. 과거 SK 타격코치 시절 평가가 좋았다 보니 한화 팬들은 대부분 환영하는 편.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01411080603773356_545d33e52ae74_99_20141108100106.jpg

2015년 8월 한화 타선이 극도로 식물화되자 어느 정도 비판받은 건 있으나, 한화로 부임한 이후 팀의 타격 성적을 보면 확실히 나아졌다. 특히 팀 사사구 갯수가 리그 독보적인 1위로 뛰어올랐는데, 여태까지의 한화 타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타자들의 인내심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얘기. 덕분에 낮은 팀 타율과 적은 홈런 갯수에도 불구하고 팀 OPS는 시즌 초부터 꾸준히 중위권을 유지중이다.

이같은 성과 때문인지 시즌 후 니시모토 다카시 투수코치, 후루쿠보 겐지 배터리코치 등 대다수의 일본인 코치들이 해임되는 와중에도 한화에 남아 2016년에도 코치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1군 타격코치가 아닌 육성군 수비코치라는 다소 의아한 보직을 맡았다.

그런데 총액 130만 달러에 영입한 외국인 타자 윌린 로사리오가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육성군 코치였던 쇼다 코치를 1군으로 불러 곁에 붙여줬다.# 그리고 5월 들어 로사리오가 약점으로 지적받던 변화구에 대한 대처능력이 나아지는 기미를 보이더니, 6월 이후 타격이 대폭발하면서 한화 이글스에서 6년 만에 나온 30홈런 타자이자, 송지만 이후 14년만에 나온 30홈런 100타점 타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에도 보직은 육성군 코치지만 여전히 1군 선수단과 동행하면서 타격 지도를 하고 있다.

파일:external/www.xportsnews.com/1465000177846.jpg
사진은 화제를 불렀던 빨간 의자 노란 밴드 훈련.

시즌 후반기부터 김성근 감독이 살려조 문제와 성적 부진으로 거센 비판을 받는 가운데, 콘무원이라 불리는 김성근 사단 코치들 중 쇼다 코치는 비교적 좋은 평을 받았다. 그런데 2016 시즌이 끝난 뒤 재계약하지 않고 바바 토시후미, 오키 야스시 코치와 함께 팀을 떠났다. 단순히 코치 한둘의 이탈이 아닌 김성근 사단이라 불리는 이들이 일제히 사의를 표하면서, 시즌 내내 불거진 김성근 감독의 독단적인 팀 운영에 회의를 느끼고 떠났다는 기사가 떴다.# 당연히 한화 팬덤은 발칵 뒤집어졌다.

4.5. KIA 타이거즈 시절

한화에서 나온 뒤, 2016년 10월 26일 KIA 타이거즈의 코치로 영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보직은 1군 타격코치로, 기존 박흥식 코치와 함께 2인 타격코치 체제로 간다고 한다. KIA 팬들은 능력있는 코치를 잘 영입해왔다며 쇼다 코치 영입에 대해 대환영을 했다.

2016년 11월 19일에는 이런 기사도 떴다. 쇼다 코치, "선수들 생기발랄, KIA 미래 밝다"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017020101000101200004791_99_20170201143004.jpg

KIA로 와서는 등록명이 '쇼다'가 아닌 '코우조'로 변경되었다. 같은 일본인 코치인 나카무라 타케시의 등록명이 '타케시'인 것과 관련이 있는 듯.

KIA로 와서는 공동 타격코치인 박흥식 코치와의 시너지 효과가 합쳐지면서 KIA의 공격력 상승에 큰 공을 세우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김기태와 박흥식, 쇼다 코치는 모두 하체와 손목을 강조하며 같은 이론을 가지고 선수들을 가르치니 불협화음이 없어졌다는 것. 기사 5월까지 타율 2할대에서 헤메던 로저 버나디나를 살려내고 2016년 SK 타선을 말아먹었다는 평가를 들었던 이명기를 타이거즈의 선두타자로 부활시키는 데도 한몫하였다. 그리고 박흥식 코치와 함께 팀타율 .302, 규정타석 3할타자 7명 등, 팀의 타선을 강화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며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타격연습에서 효율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2018년 스프링캠프 중 가진 일본의 데일리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100번의 연습타격을 대충 하는 것보다 10번의 연습타격을 집중하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견해를 표하기도 하였다.[19] 기사 또한 스포츠호치와의 인터뷰에서도 선수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코치가 만족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을 남겼다. 기사

2018 시즌부터는 코치진 개편에 따라, 박흥식 코치가 2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고, 코우조 코치가 단독으로 타격코치를 맡게 되었다. 동시에 타격 보조코치로는 2군에 있던 홍세완 코치가 올라오게 되었다. 기사

2018 시즌은 팀타율 .295, 타점 2위, 중요상황 OPS 1위[20]로 2년 연속 최상위권 급의 타선을 만들었다. 하지만 단점으로는 전년도에 비해 병살이 상당히 증가했다. 그래도 팬들의 반응은 만족하는 분위기.

2019 시즌, 주전들의 부진과 줄부상으로 나지완, 해즐베이커, 황윤호, 김선빈(허벅지), 김주찬(허리)을 2군으로 내렸다. 2군에서 홍재호, 박찬호, 신범수, 유재신, 임기준(투수)이 올라왔다. 기존 최원준, 류승현, 이창진, 박준태 등 젊은 타자들과 2군에서 올라온 타자들을 이끌고 공격을 이끌어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그러나 5월 들어 KIA 타선의 몰락에 따른 책임이 불거졌고, 5월 17일 김기태 감독이 퇴진하자마자 동시에 코칭스태프 개편이 이뤄졌고 이에 코우조 코치 역시 2군 타격코치로 내려가게 되었다. 반대로 정성훈 2군 타격코치가 1군으로 올라왔다.

2019 시즌 종료 후 맷 윌리엄스 감독 체제가 들어서며 KIA와 재계약에 실패했고, 3년만에 팀을 떠나게 되었다.

KIA 코치를 그만둔 2020년 현재 팬들에게 갑자기 소환돼서 까이는 중인데 이유는 20시즌에 신들린 타격을 보여주는 최원준에게 타격폼 수정을 제안했다가 18~19시즌 극심한 부진에 빠지게 만든 원흉으로 지목되었기 때문. 안 그래도 전임 감독인 김기태가 최원준을 수비가 애매하단 이유로 내외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기용했는데 타격폼까지 본인에 안 맞는 것으로 수정했으니 부진할 수 밖에 없었다.

4.6. 이후

KIA 코치를 그만둔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고, 2020 도쿄 올림픽을 대비해 대한민국 대표팀에 대한 전력분석에 나섰다. 2019 프리미어 12 대회에서 호투한 두산 베어스이영하에 대해서는 '향후 일본 킬러가 될 수 있다' 고 평가하기도 했다.

대다수 일본 매체들이 병역특례 혜택이 걸린 대한민국 대표팀이 올림픽 메달에 더욱 사활을 걸 거라고 예상하자, 병역특례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러한 의견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또한 한국에서는 대표팀이 성적을 내지 못하면 역적이나 매국노로 취급한다며 이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KIA 코치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야구와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밝히며 야구와 잠시 거리를 두고 회사 일을 시작했다. 그후 아마존 재팬에서 파견 직원으로 근무중이다. 여담이지만 2020년 9월경 KBO 모 구단에서 타격코치로 영입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던 2021년 2월 아마추어 야구 지도 자격을 다시 취득하여 교토 세이소 고등학교에서 어드바이저 코치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아마존 일을 그만둔건 아니고 4일은 아마존, 3일은 학교의 그라운드에서 일하는 사이클로 활동하고있다.

5. 기타

  • 일본인이다보니 통역이 선수들에게 그의 말을 전하게 된다. 통역[21]이 기아 선수들보다 나이가 어리기에 그의 말을 직설적으로 전하면, 선수들이 "미안한데, 이건 아닌 것 같다" 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통역이 쇼다 코우조 코치 말에 존댓말을 붙여서 전했더니 코우조 코치가 "그것도 이상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쇼다 코우조 코치가 기아 선수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통역은 나의 분신이니까 반말을 해도 이해해라"라고 해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기사

6. 관련 문서


[1]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인물이 아니라, 쿄진에서 활동했던 선수로 이름도 '緒方耕一'로 다르다.[2] KBO 등록명은 '코우조'. 다만 SK와 한화 코치 시절에는 '쇼다' 라는 등록명을 썼다.[3] ~7월 15일[4] 7월 16일~[5] ~8월 26일[6] ~5월 17일[7] 5월 18일~[8] 土にまみれて 戦え勇ましく 走れ風のように 進めいざ進め 。(흙 투성이가 되어 싸워라 용맹하게 달려라 바람처럼 나가자, 자 나가자!)[9] 멜로디도 좋고, 가사도 좋아서 히로시마 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상당히 많았던 응원가이다.[10] 赤ヘル打線. 아카헬은 일본어로 붉은색아카(赤)와 헬멧(ヘルメット)의 가타카나 표기 중 발음인 ヘル를 합친 조어이다. 연고지인 히로시마시에서 카프의 애칭 중 하나가 아카헬이기도 하다.[11] 1996년 기준 오가타 고이치 - 쇼다 코우조 - 노무라 켄지로 - 에토 아키라 - 마에다 토모노리 - 루이스 로페즈 - 가네모토 도모아키 - 니시야마 슈지 - 투수라는 후덜덜한 라인업. 이중 오가타와 노무라는 카프, 가네모토는 한신 감독이 되었다.[12] 미국이 은메달, 대만이 동메달을 차지했다. 대한민국은 준결승전에서 미국에 2-5로 패했고, 동메달 결정전에선 대만에게 연장 14회 초에 3실점 하는 바람에 0-3으로 패했다.[13] 단일리그 시절의 원년 시즌인 1936년 추계리그의 나카네 스스무(나고야군, 타율 .376)와 1944년 시즌의 오카무라 토시아키(킨키닛폰군, 타율 .369)와 더불어 단 3명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희대의 진기록이다. 더군다나 앞의 2명이 수위타자를 탔을 땐 리그 경기수가 40경기도 안 되던 때(이중 1944년은 한창 전황이 악화되던 상태라 경기수가 적었고 결국 시즌 도중에 아예 프로야구 리그가 중단)였다.[14] 물론 1980년대 코라쿠엔 구장, 메이지진구 야구장, 나고야 구장, 후지이데라 구장 등 대다수 프로야구 홈구장들의 크기는 지금보다 더욱 작았으나 당시에도 히로시마 시민 구장은 크기가 작은 데다 펜스까지 낮은 극 타자친화적 구장으로 소문났었다.[15] 여담으로 당시 쇼다에게 혼자 5도루(마지막 6번째 도루는 교체 출장한 나카무라 타케시가 허용했다.)를 허용한 포수가 당시 막 1군에 올라온 신인 시절의 야마사키 타케시로, 이 경기에서의 자동문 수비(...) 때문에 수뇌진에게 포수로썬 못 써먹겠다고 찍혀서 이후 1루수, 외야수에 전념하게 되었다.[16] 쇼다에게 도루왕을 빼앗긴 토마시노 켄지는 이해 센트럴리그 신인왕을 수상했지만 이후엔 신인 시즌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준주전, 백업 정도로만 머무르다 1998년 히로시마로 이적하여 쇼다와 같은 팀에서 뛰게 되었고, 여기서도 백업에 머물다 다음 해에 은퇴했다.[17] 여담이지만 타격 지도를 받는 선수가 이승엽이다. 사진 왼쪽의 3번 선수가 이승엽.[18] 오카다는 쇼다의 선수협 회장 전임자이기도 하다.[19] 예전 김기태 감독과 같이 있던 전설적인 타자 훌리오 프랑코의 지론과 일맥상통한다.[20] 0.970, 2위 두산 0.896[21] 이진우. 통역을 하기 전에는 팀 내 불펜 포수였으며, 전역을 한 뒤 다시 팀에 합류하여 통역을 소화 중.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자라서 일본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진우의 친형도 2군에서 일본어 통역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