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만주 관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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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 중국 | 러시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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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과 만주 지역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조선시대 4군 6진 개척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조선의 국경선은 해방 그리고 분단 이후 북한과 중국, 소련과의 국경선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한편 고대사와 중세사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한반도 북부의 식생과 만주 남부의 식생은 다소 유사한 편으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등 한국사의 고대사와 중세사에 해당하는 국가의 영토는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 일부 지역에 걸쳐 있었다. 북한은 민족주의 고취 차원에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계승의식을 강조하는 상황으로, 이러한 북한의 역사관은 북한의 국가 정체성, 국민 정체성 외에도 국경을 접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2. 만주 역사를 둘러싼 북중러 3국의 해석 차이
2.1. 고조선 관련
20세기 초반 한반도가 일제강점기를 겪던 시절 중국과 일본은 고조선을 신화 속의 국가 정도로 생각하였고,[1] 당연하게도 고조선 유적 발굴이나 연구 관련해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소련의 학자 유리 미하일로비치 부틴은 해방 이후 북한과 협조하여 비파형 동검문화가 고조선의 기반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고[2] 이를 배경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다룬 서적을 출간한다.부찐의 노력으로 당시까지 지도 위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던 한국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이 러시아어로 부활할 수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권에서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한동안 그의 저서는 세계적으로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일한 책이었다. 지금도 고조선에 관해서는 러시아권에서 중국 대신에 한국의 견해가 통설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정보원 부찐의 마지막 임무는 바로 2000년 전 동아시아 한 귀퉁이에서 사라져버렸던 고조선을 둘러싼 역사 전쟁인 셈이었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고조선의 존재 자체를 축소하거나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하다. 그런데도 사회주의권 대부분의 나라는 한국의 견해를 따른다. 부찐의 음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의 정보원 리하르트 조르게가 보이지 않게 2차대전 때에 소련을 구했다면, 또 다른 정보원 부찐은 고조선을 구한 셈이다.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바람처럼 사라진 부찐에 대한 고마움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조선을 둘러싼 역사 전쟁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6·25 때 소련 스파이 부찐, 2000년 전 고조선 밝히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고조선의 존재 자체를 축소하거나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하다. 그런데도 사회주의권 대부분의 나라는 한국의 견해를 따른다. 부찐의 음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의 정보원 리하르트 조르게가 보이지 않게 2차대전 때에 소련을 구했다면, 또 다른 정보원 부찐은 고조선을 구한 셈이다.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바람처럼 사라진 부찐에 대한 고마움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조선을 둘러싼 역사 전쟁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6·25 때 소련 스파이 부찐, 2000년 전 고조선 밝히다.
중국에서 2002년부로 시작한 동북공정으로 인해 중국은 고조선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동북공정 사업이 종료된 이후에도 바이두 백과 등에는 고조선이 중국의 지방 정권의 일부라는 서술이 유지되고 있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에서는 연해주에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것도 아니고, 북한에서 고조선 계승 의식을 보이다보니 굳이 중국과 고조선 역사 관련해서 역사 분쟁까지는 가지 않는 편이다.
2.2. 고구려 관련
중국은 소련 해체 이후인 2002년부터 진행된 동북공정 프로젝트 과정에서 북한의 반발을 암묵적으로 제한하기 위해 북한 학자들이 중국 영내 고구려 유적 방문을 제한하는 상황이다. 2004년에는 중국에서 북한으로 고구려 유물을 반출하려던 조선족 2명이 중국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케이스도 있었다.KBS 뉴스SBS 뉴스2.3. 발해 관련
자세한 내용은 발해/역사귀속과 계승인식 문서 참고하십시오.3. 상세
청나라 건국 이후 만주족들은 훗날 자신들의 국가가 멸망할 때 다시 돌아가려는 계획과 자신들이 발원한 고향이자 신성한 곳으로 여겨 다른 민족들은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버들나무로 쌓은 목책으로 요새를 둘러쌓아 막았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배고픔 및 농경지 개척으로 몰래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농경지와 마을들을 개척해 수많은 조선인 마을들이 생겨났었다.공식적으로 조선의 영토는 아니었지만 조선인들 입장에서는 사실상 조선의 또다른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보니 조선인과 만주인의 갈등,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간도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숙종과 강희제는 이를 해결하려고 하여 토문강 일대를 국경으로 확실히 정했다. 자세한 건 간도 부분을 참조. 하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몰래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훗날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와 아무르 강 유역 등이 러시아령이 되어 조선과 접했다. 처음엔 견제했으나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 외교를 맺으면서 러시아와도 경흥에서 러시아와 무역을 했다. 동시에 러시아는 조선에서 정치적 간섭도 했으며, 녹둔도 역시 러시아에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간섭을 포기하게 되었다.
근대시기인 조선말, 일제강점기까지는 혼란스러움과 관리인들의 부패 등으로 인해 청나라 국경이나 제정 러시아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곳에 수많은 조선인 마을들이 생겼는데, 지금도 연변의 경우 조선족 마을들이 존재하며, 연해주에도 거주하여 훗날 고려인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항일독립운동가들은 중화민국과 소련에서도 활약을 했다.
북한 현대사의 기원 측면에서도 만주는 중요한 지역이었는데 훗날 북한을 주도하게 되는 김일성과 만주파 인물들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만주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천보 전투 등을 통해 쌓은 인지도와 만주 활동 과정에서 쌓은 결속력이 아니었다면 결코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만주는 북한의 형성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3]
일제 패망 후에는 38선 이북에는 소련에 의해 소련군정 통치를 받았고 공산화로 인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만주를 가진 중화인민공화국, 소련과 외교를 맺었다. 그러나 아무르 강, 우수리 강 일대에서 중소국경분쟁으로 중소관계가 악화되자 북한은 이를 계기로 중소분쟁을 빌미로 삼아 주체사상 등으로
1990년대에는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의 경제는 갈수록 심하게 악화되고 대기근, 폭압적 정책까지 나오자 수많은 북한 사람들은 중국 국경을 넘었으며, 만주 지역에 피난을 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중국은 이를 불법이주민으로 여겨 강제북송을 중국 만주를 넘어 다른 곳으로 피난가는 사태가 되었으며, 이는 현재도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소수 사람들은 러시아로 도망치는 경우도 있으나 러시아와는 외모나 인종이 다르다보니 인종차별을 받기도 하고, 무엇보다 문화가 너무 달라서 이질감이 큰 이유도 있다. 더욱이 두만강 하류는 물살이 세고 수심도 깊어서 탈북한다고 해도 위험하다는 탈북자들의 중언도 있다. 그래서 러시아로 탈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고 한다.
현재 북한은 중국 동북 3성, 러시아 연해주나 사할린, 아무르 강 유역 도시들을 통해 무역과 식량, 의약품, 일부 제품에 의존을 하고 있으며, 북한노동자들도 그곳에서 노동자로 파견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과거에는 퉁구스 제민족들도 살았지만 현재는 없다. 조선시대에도 만주어회자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소멸되었다고 한다. 재가승이 한반도에 있었던 여진계열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재가승이 혼혈되었어도 민족집단 아닌 종교집단이며, 이들이 살던 곳이 여진족이 살았던 함경도에도 이주하면서 이들과 혼혈되어 한국과는 사회배경이나 다른 문화도 가진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부터 소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