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7:11:46

마쓰이 이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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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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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fff> 제2대 상하이 파견군사령관
마쓰이 이와네
松井石根|Matsui Iwane
파일:마쓰이 이와네.png
출생 1878년 7월 27일
일본 제국 아이치현 나고야시
사망 1948년 12월 23일 (향년 70세)
일본국 도쿄시 스가모 형무소
소속 일본 제국 육군 (1904년 ~ 1938년)
최종 계급 대장
학력 육군대학교 (19기)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중국 시절2.3. 중일전쟁2.4. 은퇴2.5. 극동국제군사재판2.6. 최후
3.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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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외교관, 군인이다.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하얼빈 특무기관장을 역임했으며, 최종 계급은 육군 대장이다. 일본 제국이 포츠담 회담을 수락한 이후, 난징 대학살 사건 당시 방관한 책임이 거론되어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당하고, 사형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1][2] 현재는 다른 전범들과 같이 유골이 순국칠사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하지만 마쓰이는 난징 전투는 지휘했지만, 난징 대학살 당시엔 폐결핵을 앓아 병가를 내고 요양 중이었기에, 학살 당시엔 군대를 지휘한 건 아니며 실제 학살을 주도 한 건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마쓰이 이와네는 1878년 7월 27일, 일본 제국 아이치현 나고야시 마키노 마을에서 오와리 번사[3] 출신인 마쓰이 다케쿠니와 마쓰이 히사의 6남으로 태어났다.

세이조 중고등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일본 육군대학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마쓰이는 그 당시 일본이 모토로 내걸던 '일본군의 존재는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이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믿었기에, 육군대학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아베 노부유키, 마사키 진자부로, 혼조 시게루, 아라키 사다오가 있었다고 한다. 육군대학 재학 중 러일전쟁에 참전한 군대를 따라 나섰고, 1906년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2.2. 중국 시절

마쓰이는 열렬한 아시아주의자로 평소 중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으로 가고 싶어해 중국어를 배웠다.[4] 그러던 중, 1907년에 프랑스에서 귀국하고, 청나라에 갈 기회가 생기자 자원해서 가게 된다. 중일관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동아시아의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아시아의 대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그의 생각 때문이었다.

1907년, 장제스가 일본에 유학을 원했을 때 거처를 찾아주기도 했다. 1909년,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 쑨원 등과 만난다. 마쓰이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 사상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신해혁명 지원, 위안스카이 토벌 등 쑨원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중국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그는 중국 전문가가 된다.

1923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고, 일본군의 주요 인사가 된다. 1927년, 북양군벌, 광서군벌, 우한 국민정부의 협공으로 궁지에 몰려 공직에서 은퇴한 장제스가 유학을 이유로 일본을 방문하자 일본 수상 다나카 기이치회담을 성사시켰다. 이후 마쓰이는 장제스에게 동아시아로 밀려 들어오는 서구 열강과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1928년, 제남 사건이 일어난 후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자, 장제스와 마쓰이의 사이도 멀어지게 된다. 같은 해에 일어난 장쭤린 폭살 사건에선 주모자인 관동군 대좌 고모토 다이사쿠의 엄벌을 요구하였다.

1933년에는 대아시아 협회를 설립한다. 멤버로는 고노에 후미마로, 히로타 고키, 스즈키 데이이치, 아라키 사다오, 혼조 시게루 등 거물들이었다. 같은 해 8월에 타이완 대아시아협회 지부의 고문이 되었다. 이후 현역에서 물러나 예비역이 된다. 예비역이 된 후인 1935년 10월부터 12월까지는 중국 전역과 만주국을 여행하고, 중국 정치인과 사업가들에게 범아시아주의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곳에서도 대아시아 협회 지부를 세운다.

2.3. 중일전쟁

하지만 1937년, 결국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마쓰이는 예비역이었지만,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면서 군무에 복귀,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마쓰이는 자신의 임무로 "일본군이 중국의 진정한 친구라는 것을 중국인들에게 인식시켜 주는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적과 싸우지 않고 전진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참모본부와 일본 제국 정부는 상하이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마쓰이 이와네는 상하이 부근으로 한정돼있던 권한을 이탈하고,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하지만 점령한 뒤엔 마쓰이는 부하들에게 난징에 있는 옛날 문화재들을 보존하고, 민간인들 역시 죽이지 말라고 명한다. 하지만 이미 눈이 뒤집혀질대로 뒤집힌 일본군들은 그 즉시 마쓰이의 명령따윈 씹어버리고 황족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의 지휘로 난징에 있던 20만명의 민간인들과 소수의 중국 국민당원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죄다 잡아 죽여버렸다. 하지만 당시 마쓰이는 결핵으로 병가 중이어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상에 있다보니 부하들의 막가파 행동을 저지할 수가 없었고, 결국 일본군들은 그의 명령을 무시하고 난징에 있던 민간인들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능욕과 학살을 저지른다.

이후 병이 안정되어 돌아왔을 때 학살 이후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잔혹 행위는 황군의 불명예다!"

2.4. 은퇴

이후 은퇴하여, 1938년 3월, 일본 귀국 후에 중일전쟁에서 희생되었던 중국과 일본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시즈오카현 아타미 시에 있는 이즈 산의 절에서 머물었는데, 그는 이번에 일어난 중국과 일본 병사들의 희생은 아시아 대부분의 유럽과 미국 열강의 식민지가 머지않아 독립하는 일을 위한 희생이라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뜨거운 범아시아주의적 사상은 계속되었고, 은퇴 이후에도 인도차이나 반도와 중국 대륙에 있는 (자칭 일본의 동맹국) 일본의 괴뢰국들을 방문하였다. 또한 마쓰이는 왕징웨이 정권의 주석 왕징웨이자유 인도 임시정부의 주석 찬드라 보스와도 만났다. 1945년 필리핀 제2공화국에 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쿄가 잿더미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5] 황국은 필리핀에서 절대로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를 결정했고, 8월 6일에 리틀 보이가, 8월 9일에 팻 맨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서 투하되면서 버틸 수 없게 된 일본 황실과 군부는 항복을 결정, 당시 천황 쇼와 덴노옥음방송을 내보내며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전후에도 연합군은 일본 제국을 통치하게 되고, 난징 대학살 사건의 (표면적) 주범이었던 마쓰이에게 연합군 최고 사령관의 명의로 11월 19일, 그에게 체포영장이 날라 온다. 하지만 당시 마쓰이는 폐렴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GHP는 시간을 3월까지 주게 된다. 폐렴이 완치된 후인 3월 6일에 민간인 신분으로 다른 전범들과 같이 도쿄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된다.

2.5. 극동국제군사재판

파일:마쓰이 이와네 군사재판.png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의 마쓰이

전후, A급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었는데, 예비역에 편입 된 상태라 민간인 신분으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난징 대학살 사건 당시에 병석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그는 BC급 전범으로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마쓰이의 사형 판결에 연합군의 조셉 키넌이라는 검사는 "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마쓰이의 죄는 부하들의 죄였다. 종신형(무기징역)이면 충분 했었다" 라고 불만을 표시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검사단 일부는 부하들이 저지른 죄로 독박을 쓴 만큼 굳이 사형을 시키더라도 좀 봐줘서 명예는 존중해 총살형으로 사형을 집행해 줬으면 하는 의견도 있었다. 하다못해 교수형을 하더라도 죄수복이 아닌 원하는 옷이라도 입고 집행하게 해 주었으면 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른 사형수들 처럼 죄수복을 입고 교수형에 처했다.

2.6. 최후

이후 12월 23일, 마쓰이는 도쿄 스가모 구치소에서 기무라 헤이타로, 도이하라 겐지, 도조 히데키, 무토 아키라, 이타가키 세이시로, 히로타 고키 등 다른 A급 전범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죄수복을 입고 사형당했다.

사형 되기 직전 남긴 말로는 "(나는) 고급 장교들을 불러놓고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부하들의 짐승 같은 행위로 단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모두들 나를 비웃었다"고 했다.

이후 시신은 화장되어 유골은 태평양에 뿌려졌으나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였던 산몬지 쇼헤이가 다른 6명의 전범들 유골과 함께 한 항아리 분량을 빼돌려 순국칠사묘에 묻었고[6] 1978년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3. 평가

마쓰이 이와네는 난징 대학살 외에 다른 학살극에도 연루되어 있었으나, 학살이 진행되던 당시에는 병중이라 실제 지휘를 맡지 못했다. 실제로 범행은 대부분 다니 히사오 등 수하들이 저질렀기 때문에 그에게 전적으로 학살 책임이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만, 일본군이 난징에서만 학살을 한 것은 아니고 난징으로 진군하는 와중에도 숱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바 역시 좋게 보기는 뭣하다. 그리고 A급이 아니라 해도 여전히 B, C급 전범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또한 상하이에서 민간인을 가차 없이 사형시킨 이력도 있어서 완전히 무고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다른 전범들에 비하면 억울하다고 볼 수 있다.

4. 기타

  • 이 사람과 비슷하면서 다른 케이스로는 기무라 헤이타로를 들 수 있다. 기무라도 마쓰이와 똑같이 A급 전범으로서 사형에 처해졌고 저지르지도 않은 대량학살 누명을 쓰기는 했으나, 난징 대학살 시점에서만큼은 애초에 병석에 있어서 학살을 막을 수도 없었던 마쓰이와 달리, 기무라는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재직할 당시 부하들의 포로 학대를 인지하고는 겉으로만 군인들에게 포로 학대를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지 실제로는 군인들의 포로 학대를 알면서도 눈감아줬다.[7]

[1] 당시 마쓰이와 함께 처형되었던 전범들은 기무라 헤이타로, 도이하라 겐지, 도조 히데키, 무토 아키라, 이타가키 세이시로, 히로타 고키였다.[2] 다만 그는 난징의 민간인들을 지킬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였다. 그러나 총사령관이였다는 직위때문에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3] 번에 소속된 사무라이[4] 그의 사상인 대아시아주의와 아버지가 중국 고전 학자인 사실에 영향을 받았다.[5] 이러고 있을 때 미군 제21폭격기사령부이미 도쿄를 잿더미로 만들어주고 있었다.[6] 마쓰이의 손자는 이에 대해 내 할아버지가 '이딴 쓰레기 놈들'과 함께 잠들어 계신다면서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고 한다.[7] 게다가 기무라는 영국군이 버마로 진공한다니까 겁을 먹고는 태국 국경지대로 탈영하고는 임팔 작전 사망자보다도 많은 75,000여 명의 아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그러고도 뻔뻔하게 육군 대장으로까지 승진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