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4:25:35

마이클 조던/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마이클 조던
1. 출생과 성장기2. 고등학교3. 대학과 NBA 드래프트
3.1. 그는 왜 3순위에 그쳤나?
4. NBA 초기 시절
4.1. 루키 시즌4.2. 1985-86 시즌과 그 이후
5.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의 악연, 그리고 극복6. 첫 번째 3연패, 전설의 시작7. 첫 번째 은퇴와 야구, 그리고 첫 번째 컴백
7.1. 음모론?
8. 두 번째 3연패와 두 번째 은퇴
8.1. 1995-96 시즌8.2. 1996-97 시즌8.3. 1997-98 시즌
8.3.1. 라스트댄스
9. 두 번째 컴백과 세 번째 은퇴
9.1. 2001-02 시즌9.2. 2003년 올스타전 당시 일화
10. 명예의 전당 헌액, 그 이후11. 구단주 마이클 조던12. 그 후의 조던13.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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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성장기

1963년에 뉴욕 브루클린에서 정비회사 부장이던 아버지 제임스 R. 조던 시니어(1936~1993)와 은행원이던 어머니 들로리스 피플스(1941~) 사이에서 5남매중 넷째이자 3남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아직 아기였을 때 아이들을 안전하고 조용한 곳에서 키우고 싶었던 그의 부모는 조던이 5살이었을 때 노스캐롤라이나 주[1] 윌밍턴으로 이사갔다. 조던은 같은 주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로 진학하기 전까지 쭉 그곳에서 살았다.[2]

그는 다른 형제들이 새 옷이나 운동화를 사려고 아르바이트를 뛸 사이, 운동장이나 농구 골대로 가서 야구나 농구를 즐기며 운동선수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선 이런 낙천적인 모습을 걱정해왔다.

2.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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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AA우승을 확정짓는 위닝샷을 날린 UNC신입생 마이클 조던[3][4]
그는 레이니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 2학년이 되어 1군팀(Varsity)에 뽑히기를 기대했으나 당시 178cm의 그리 뛰어나지 않은 선수였던 조던은 1군 선수 선발에서 탈락했고, 프레드 린치 코치는 201cm의 키를 가진 동급생 리로이 스미스(Leroy smith)를 주전선수로 발탁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첫번째로 그는 농구에 그리 집중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당시 3개의 스포츠 (야구/농구/풋볼)을 동시에 할 정도로 농구는 취미로만 여겼었다. 물론 대부분의 특급선수들은 여러 스포츠를 동시에 하지만 다수의 스포츠에서 동시에 정상급인 선수는 별로 없다. (풋볼과 농구에서 동시에 주 챔피언에 오른 앨런 아이버슨 정도) 그런데 조던이 가장 좋아하고 열심히 한 스포츠는 아버지 제임스도 좋아했던 야구였고, 당시 조던은 투수이자 중견수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5] 두 번째 이유는 당시 고등학교 농구부에는 무려 11명의 4학년과 3명의 3학년이 있었다. 더 노련한 상급생들이 많은데 실력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고 키도 작은 조던을 굳이 뽑을 이유가 없었던 것. 게다가 이들 중 8명이 가드였기에 저학년 가드인 조던은 더더욱 필요없었다. 마지막,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위에도 언급된 키였다. 레이니 고등학교는 당시엔 그리 잘 나가는 학교가 아니었고, 장신도 거의 없었다. 스미스는 201cm로 98년 시카고 트리뷴 기사에 따르면 1군팀에서 가장 큰 선수들보다도 족히 4인치(10cm)는 더 컸다고 한다.[6]

이 사건 이후 조던은 자존심에 굉장한 상처를 입었으며 상당한 좌절감과 질투심에 한 인터뷰에서는 "집에 가자마자 통곡을 했다."라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이후 바로 풋볼을 그만두고 야구도 1년만 더 하다 그만두면서 농구에 올인한다. 뒤에 서술되는 급격한 실력 향상은 이 덕분. 여담이지만 조던은 농구에 올인하기 시작한 이후 2군(Junior Varsity) 소속이면서 1군 연습까지 뛰었으며, 1군에 올라간 이후에도 1군/2군 연습에 전부 참가할 정도로 독하게 연습했다고 한다.

2학년이 끝나고 3학년으로 넘어가는 여름 (미국은 가을에 학기가 시작한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데 조던이 무려 6인치(약 15cm)나 자란 것이다. 193cm의 장신이 되고 피나는 훈련으로 뛰어난 실력자가 된 조던은 바로 1군에 합류, 첫 경기에서 35점을 포함해 3학년 시즌동안 25.4점 12리바운드 5.3어시스트를 기록하게 된다. 이어 4학년 시즌에 무려 26.8점 11.6리바운드 10.1어시스트로 평균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레이니 고등학교를 노스캐롤라이나 주 랭킹 1위로 이끌지만, 주 챔피언십 파이널에서 아쉽게 뉴 하노버 고등학교에 56대 52로 패하고 만다.

이후 조던은 4학년의 신분으로 1981년 맥도날드 올아메리칸 게임[7]에서 무려 30점을 올리는데, 이 기록은 1999년 MVP 조나단 벤더가 31점으로 깨기 전까지 18년동안 남아있었다. 이 경기에서 야투 19개 중 13개를 성공시킨 조던은 경기 종료 11초를 앞두고 자유투 두개를 성공시키며 동부가 96대 95로 승리하게 되는 결승점을 기록함과 동시에 6개의 스틸과 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와 같이 괴물같은 활약을 했음에도 그는 MVP를 수상하지 못했는데, 당시 MVP는 24점을 기록한 당시 198cm 슈팅 가드 애드리언 브랜치와 19점을 올린 193cm 오브리 쉐로드에게 갔다고 한다. 당시 야투율이 탁월하게 높지도 않고, 득점 외 공헌도가 높지도 않았던 둘이 조던을 제친 것은 아직도 이해못할 결정으로 꼽힌다. [8]

3. 대학과 NBA 드래프트

유망주로서 점점 두각을 나타내던 조던은 결국 1981년 여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들어간다.[9] 참고로 고교 시절 조던을 탈락시킨 린치 코치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그는 심심찮게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내가 탈락시킨 것은 지금의 조던이 아니었다.. 특히 키가.." 를 시작으로 왜 탈락을 시켰는지에 대해 변명해야 했다. 참고로 리로이 스미스는 UNC 샬럿 캠퍼스 진학 후 전국구로 두각을 못 드러내 NBA에선 뛰지 못했지만 1985~1990년까지 영국, 일본 등지에서 프로 농구선수로서 여러 리그에서 뛰었다. 다만 프로 경력자체는 그리 길지 못했다. 은퇴 후 스포츠 마케팅에 전념하여 NBC유니버설 세일즈&마케팅부사장, HLS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 당시 조던은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고등학교 선수가 되어 UNC를 포함한 여러 일류대학교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당시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고교선수 랭킹은 Parade지에서 선정하는 올아메리칸 팀이 있었는데(1957년부터 2015년까지 제공), 조던은 여기에서 올아메리칸(전국)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주에는 아직 고교 미스터 바스켓볼(MVP) 제도가 없었으나,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노스캐롤라이나 선수가 바로 조던이었기 때문에 만약 있었다면 선정됐을 가능성이 높다.

여담으로 이때 퍼레이드지 전국 최고의 고등학교 선수로 선정된 선수가 바로 평생의 라이벌이 되는 패트릭 유잉이었고, 같은 퍼스트 팀 멤버 중 훗날 시카고 불스에서 동료로 뛰게 되는 가드 샘 빈센트(미시건 주), 그리고 4th 팀에 불스 왕조 동료인 빌 웨닝턴(뉴욕 주 출신)[10]도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조던이 원래 가고 싶어했던 대학은 UNC가 아닌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NC스테이트 울프팩)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NBA에서 내로라하는 덩커였던 데이비드 톰슨을 좋아하던 조던은 그의 모교인 NC스테잇에 들어가고 싶어했다.[11] 그러나 조던에게 NC스테잇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대신 조던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의 딘 스미스 감독이 열과 성을 다한 덕에 조던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조던의 입학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사건으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는 당시 조던이 사인한 입학 서류를 대학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로 마이클 조던이 졸업 후 몇년 뒤인 1988년에 모교 체육관을 찾아서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순찰 중이던 체육관 직원이 조던이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쫓아냈다.

신입생이던[12] 1982년 그는 패트릭 유잉이 뛰고 있던 조지타운 대학을 상대로 한 NCAA 파이널에서 결승 점프 슛을 터트려 루키 신분으로 일거에 전국구급 스타가 되었다.

이 당시에 함께 우승을 일궈낸 팀동료&선배들 중엔 대표적으로 제임스 워디가 있다. 파이널 후 1982 드래프트에 참가해 1순위로 뽑히게 되는 워디는 전국 최고의 대학선수 중 하나였다. (다만 그와 동기 중 최고는 4학년 시즌까지 다니고 다음 해에 프로에 진출하는 랄프 샘슨이었다) 당연히 팀의 에이스였고, 당시 팀의 2인자는 조던보다 1년 선배였던 2학년 샘 퍼킨스였다.(훗날 1984 드래프트에서 조던 바로 다음 순위로 댈러스에 뽑힘) 당연히 조지타운 역시 이를 알고 있었기에 워디를 최우선적으로, 그리고 그 다음으론 퍼킨스를 어느 정도 견제하고 있었다.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 조던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감독이었던 딘 스미스는 이를 노리고 워디를 중심으로 한 플레이를 짜면서 그에게 "자네가 공을 잡으면 공을 돌리게. 그러면 마이클에게 찬스가 날 걸세"라고 지시하고 마이클에겐 "자네에게 찬스가 나면 바로 쏘게"라고 지시했다. 즉, 전미 최고의 선수 중 하나를 제치고 이제 갓 19세가 된 1학년 애송이에게 결승 슛을 맡긴 것. 이 때문에 조던에게 오픈 찬스가 났고, 그가 이를 주저하지 않고 쏨으로서 역전할 수 있었다. 물론 오픈샷이라곤 하나 당시 기준 농구 역사상 최다 관중 앞에서 넣으면 천국, 놓치면 지옥인 상황에서 주저않고 쏴서 넣은 건 어마어마한 강심장이 맞다. 보통 그런 상황에선 경험 많은 상급생들도 긴장할텐데, 1학년 애송이가 에이스를 제치고 바로 쏴버린 것. 괜히 조지타운 수비수들이 이 게임에서 워디에 이어 타힐스에서 두 번째로 많은 득점을 하고 있던 그를 내버려둔게 아니다. 설마 쏘겠냐한 것.

그 다음 해에는 올해의 대학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때의 추억이 가슴 깊이 남았는지, 그는 프로진출 후에도 저지 밑에 UNC시절 입었던 스패츠를 같이 입었다고 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럼 한 벌을 해질 때까지 입는거냐'고 생각하는데(실제로 '스페이스 잼'에 출연했을 때 벅스 바니가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때 입었던 스패츠를 계속 입은 건 아니고 프로 데뷔 후 스스로 부진하다고 느꼈을 때 학교에 가서 왕창 구매해서 계속 돌려 입었다고. 조던이 가진 몇 안되는 징크스중 하나. UNC museum의 조던 관의 비디오를 보면 조던이 "I've always worn UNC shorts, I can't go anywhere whithout having them on, No matter how successful I become, you know, it all started at UNC"라고 말하는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1984년 여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NBA 드래프트에 참가, 3순위로 시카고 불스의 지명을 받아 시카고 불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저는 시카고 불스가 레이커스나, 세븐티식서스나, 보스턴 셀틱스처럼 존중받는 프랜차이즈가 되길 원합니다.. 다행히 제가.. 이 팀이.. 이 조직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고 봐요.."[13]

그해 마이클 조던은 신인왕과 올-NBA 세컨드 팀에 뽑혔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농구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이때 1위는 휴스턴 로키츠가 지명한 센터 하킴 올라주원 이었고, 2위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가 지명한 샘 보위라는 센터였다. 당시 포틀랜드는 클라이드 드렉슬러라는 레전드 슈팅 가드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드를 지명할 생각이 없었던 포틀랜드의 지명은 당시로서는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법 했으나, 그 후 샘 보위가 부상으로 몇 해 뛰지 못하고 은퇴하는 바람에 드래프트 역사에 손꼽히는 바보같은 결정 순위에서 항상 1순위로 꼽히고는 한다. 일명 Sam bowie Picks. 그리고 포틀랜드는 23년 후 비슷한 짓또 한다. 참고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미국 농구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인디애나 대학의 바비 나이트 감독이 포틀랜드 프론트에게 조던을 추천했는데 우리는 센터를 뽑을꺼라고 하니깐 "조던을 센터로 쓰면 된다"라고 말한 일화가 유명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조던과 드렉슬러가 커리어 동안 보여주었던 다재다능함을 생각하면 두 선수의 공존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드렉슬러는 큰 키로 인해 SG라기 보다는 SF에 더 가까운 선수였고 두 선수 모두 득점은 물론이고 리딩, 리바운드, 수비까지 수준급 이상이었던 선수고 (물론 수비같은 경우 차이가 많이 난다) 조던은 1988-89 시즌엔 포인트 가드로 출장하며 32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라는 기록을 낸 적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두 선수의 엄청난 실력과 겹치는 스타일을 생각하면 동시에 기용하는 게 낭비기 때문에, 만약 이때 조던이 뽑혔다면 훗날 레이커스의 에디 존스-코비 브라이언트 케이스처럼 드렉슬러가 트레이드되는 결말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바보같이 조던 트레이드하고선 나중에 후회하거나

스타일은 다르지만 드웨인 웨이드르브론 제임스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둘 다 득점과 리딩이 가능한 스타일이라 히트 시절 르브론이 좀 더 볼을 많이 쥐고 플레이하면서 공존했고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였으나, 둘 다 온볼플레이어 성향이 강했던 지라 아무래도 시너지가 약간 떨어지긴 했다. 조던과 드렉슬러가 뛴다면 더 득점력이 뛰어난 조던이 주득점원으로 활용될 확률이 높지만 조던은 웨이드만큼 온볼성향이 강한 선수는 아니기에 좀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물론 그래도 두 에이스가 함께 뛰는건 낭비고, 당시는 슈퍼스타들이 여럿씩 뭉치는 시기가 아니었기에 공존은 힘들었을것. 슈퍼스타들이 한 팀에 여럿 있는 경우 압둘자바-매직처럼 세대교체의 형태로 이뤄지거나 매직-워디나 버드-멕헤일의 케이스처럼 에이스와 조력자로 우열이 명확한 경우. 참고로 매직과 압둘자바의 경우 매직의 루키 시즌 리그 MVP였던 압둘자바와 우열이 명확했고, 매직의 실력이 역전할 때쯤 압둘자바는 이미 30대 중반으로 노화로 인한 실력 저하인데다 그의 전성기 실력 자체와 업적은 누구라도 인정할 정도로 엄청났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이상적으로 세대교체가 일어난 경우.

3.1. 그는 왜 3순위에 그쳤나?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포지션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 최고의 선수였으나 가드, 그것도 슈팅 가드였기에 대학 시절 압도적인 활약에도 불구하고 기대치가 낮았고, 이 때문에 밀린 것.

20점 언저리에 불과한 스탯 때문에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는데 조던은 당시 올라주원과 보위, 심지어 유잉까지 능가하는 대학 최고의 선수였다.[14][15] 이를 위해선 당시 NCAA "올해의 대학선수상"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다.

2020년대인 현재 NCAA에서 웬만큼 뛰어난 유망주들은 1, 2년만 뛰고 NBA에 직행하는 경우가 많아 1, 2학년부터 괴물같은 활약을 펼친 케빈 듀란트블레이크 그리핀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대학최고의 선수들은 JJ 레딕이나 지머 프레뎃, 타일러 핸스브로같이 유망주로서는 가치가 떨어져서 대학에 오래 남는 선수들이 많다. 잠재력이 떨어져도 대학에서 오래 뛴 선수들이 적어도 대학무대에선 더 잘할 확률이 높기 때문.[16]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선수들은 최소 대학에서 2, 3년을 뛰었으며[17] 팀 던컨, 엘튼 브랜드[18], 그랜트 힐, 데이비드 로빈슨같은 특급 유망주들도 4년을 다 뛰었다. 이 때문에 당연히 NCAA의 전체적인 기량 수준이 지금보다 높았으며 프로에 진출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도 비교적 많았다. 이 때문에 당시 올해의 대학선수상을 수상하는 선수들은 그야말로 특급 유망주들이자 진짜 실력자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물론 라이오넬 시몬스처럼 평범한 선수들도 가끔 있었지만) 권위있는 상들은 네이스미스, AP, 아돌프 럽, 존 우든, 오스카 로버트슨, NABC, 스포팅 뉴스상을 모두 석권하는 건 그야말로 레전드 뿐이었다. 그 대단한 패트릭 유잉조차 석권엔 실패했으며 조던에 앞서 모든 상을 석권한 랠프 샘슨은 1라운드 1순위였다. 그리고 조던은 1983-84 대학시즌 당시 이 모든 상을 싹쓸이했다.

그러나 조던은 가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센터 선호도가 엄청나게 높았다. 빅맨 선호도를 그나마 완화시킨게 조던을 필두로 한 슈퍼스윙맨들의 성공이었으니... 실제로 1980년대에 1순위로 뽑힌 10명의 선수들 중 7명이 센터였으며 나머지 세 명은 포워드였다. 1979년에 가드 매직 존슨이 1순위로 뽑히긴 했지만 매직은 그 중요도가 입증된 포인트 가드였으며 무엇보다 피지컬이 빅맨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매직이 뽑히던 해에는 압도적인 센터가 없었으며[19] 반면에 조던이 뽑힌 1984년엔 특급 센터 유망주가 하킴 올라주원, 샘 보위까지 두 명이나 있었으니 이들을 제치고 슈팅 가드인 조던이 뽑힐리가 없었다.

실제로 유망주의 잠재력에 대한 기대치로 보면 슈팅 가드는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가장 낮다. 21세기 들어서도 선호도가 높은 포지션은 센터와 포인트 가드이며, 그 다음이 포워드 포지션이고 마지막이 슈팅 가드이다. 조던이 드래프트되던 1984년에는 NBA 역사가 이미 40년에 가까웠음에도 모든 포지션 중 슈팅 가드만 유일하게 MVP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였다.[20]

또한 그 이전까지 팀을 우승으로 이끌던 리그 최고수준의 에이스들은 센터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PG나 SF, 이들보다는 적게 파워 포워드도 있었지만 슈팅 가드는 없다시피 했다.[21] 제리 웨스트의 경우 커리어 랭킹 등에서 슈팅 가드로 주로 분류되고는 있으나, 게임리딩을 팀에서 가장 많이 했으며 플레이스타일상 공격형 포인트 가드나 듀얼 가드에 가까웠다. 실제로 백코트 파트너도 슈팅 가드였던 게일 굿리치였다. (굿리치는 웨스트 곁을 떠난 이후 리딩가드로 변신한다.)

그외에 레전드로 꼽히던 슈팅 가드를 보면 길거리 출신으로 화려한 플레이를 자랑하던 얼 먼로, 윌트 체임벌린 이후/마이클 조던 이전까지 가장 압도적인 득점기계였던 조지 거빈, 현란한 볼핸들링과 패스/강력한 득점력을 겸비한 피트 매러비치 등을 꼽을 수 있으나 개인기량에 비해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은 다른 레전드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평가받은바 있다. 실제로 조던 이전까지 "득점왕은 우승을 못한다(A scoring champion doesn't win championships)"란 속설이 있었고, 이를 깬 선수는 역사상 조던 외에 조지 마이칸, 카림 압둘자바, 샤킬 오닐 뿐이었으며 모두 센터였다.[22]

실제로 ESPN의 포지션별 랭킹을 보면 # 역대 톱10중 조던시대 이전 선수는 단 두 명, 웨스트와 거빈 뿐이다. 사실 ESPN 랭킹이 신빙성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미국 언론의 평가도 조던 이후 슈팅 가드들이 조던 이전 슈팅 가드들보다 전반적으로 훨씬 높다. 게다가 웨스트의 경우 위에 언급된 것처럼 포인트 가드로 주로 뛰었었고, 거빈도 후대에서나 슈팅 가드로 분류되지 실제론 스몰 포워드로 거의 출장했다. 이런 상황이니 비록 부상이 있다고는 하나 최고의 대학 센터 중 하나였던 보위를 제치고 조던을 뽑을 팀이 있을리가 없었다.

Jordan Rules를 써냈으며 "조던 전문 기자"로 유명한 샘 스미스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로 조던을 드래프트한 불스의 로드 쏜 단장도 조던을 뽑고선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 당시 불스는 "올해의 대학선수" 조던 대신에 모든 팀들이 그랬듯이 센터를 원했으며, 쏜이 조던을 뽑고 나선 "그(조던)가 매우 뛰어난 공격수이지만 압도적인(overpowering) 공격수는 아닙니다. 그는 이 팀을 확 바꿔놓진 못할 겁니다.", "그가(조던이) 7피트였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센터가 없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라고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23] 전설적인 대학농구 감독이자 1984 올림픽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바비 나이트는 올림픽 당시 조던이 보여준 기량에 매료되어 친구인 포틀랜드 단장 Stu Inman이 센터가 필요하다고 하소연을 하자 "그냥 조던을 뽑아서 센터로 써"라고 할 정도로 조던을 높게 산 것과 대조적. ESPN 물론 바비 나이트가 드래프트 당시 198cm/85.5kg이던 조던을 정말 센터로 세우라는 허황된 말을 하려던 건 아닐테고, 센터고 나발이고 조던이라는 최고의 실링을 뽑을 것을 종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결정적인 이유는 포지션 때문이라도 타이밍 탓도 있었다.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 그를 뽑은 로드 쏜은 "우리에게 행운이었던 건 드래프트가 올림픽 전에 열렸다는 겁니다. 마이클은 올림픽 덕분에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많은 아마추어 운동선수가 됐으니까요"라고 했듯이 드래프트는 NCAA 토너먼트 후, 올림픽 전에 열렸다. NCAA 토너먼트는 전세계 스카우트들이 지켜보며, 여기에서 활약은 드래프트 순위에 영향을 주게 된다. 여기서 네 개 지역으로 나뉘어 각각 시드를 받으며, 각자 토너먼트를 치러 승자 네 팀이 Final Four이 되어 토너먼트를 이어가는데, 동부 지역 톱시드팀인 노스캐롤라이나가 16강에서 인디애나에게 업셋을 당하며 탈락하고 만 것. 단판적인 토너먼트에서 종종 나오는 충격의 업셋이었다. 참고로 여기서 우승팀은 패트릭 유잉이 이끄는 조지타운대학, 준우승팀은 바로 1순위 하킴 올라주원의 휴스턴이었다. 2순위 샘 보위의 켄터키 대학은 4강까지 진출해 조지타운에 패배. 올해의 대학선수상은 시즌 전체 활약을 보기 때문에 조던이 싹쓸이했지만, 정작 중요한 토너먼트에서 팀의 탈락이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올림픽에서 맹활약으로 주가를 회복했을 수 있으나, 정작 올림픽 전에 드래프트가 열린 것. 올라주원이 워낙 주가가 높았기에 조던이 1순위를 노리는 건 무리였지만, 만약 토너먼트에서 선전했거나 (시간상 불가능하긴 하지만) 올림픽 이후 드래프트가 열렸다면 부상 병력이 심한 보위까지는 제칠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조던은 순위가 밀려 3순위로 뽑히게 된다.

4. NBA 초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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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루키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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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역사상 가장 화려하면서 폭발력 있는 데뷔를 보여준 슈퍼루키 시절의 마이클 조던

비록 3순위라곤 해도 대학 최고의 선수였던 조던에 거는 시카고의 희망은 엄청났다. 실제로 커리어 첫 경기는 워싱턴 불리츠(현 워싱턴 위저즈)를 상대로 한 홈경기였는데, 조던이 소개될 때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하고 해설자들도 그가 엄청난 기대를 받고 있다고 언급을 하며 조던이 공을 잡을때마다 관객들이 환호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24][25]

데뷔 경기에서 조던의 첫 슛은 실패했으며, 당시 경기에서 조던은 슛 16개를 던져 고작 5개 성공하며 7어시스트 6리바운드 5파울로 기대치에 비해 평범한 경기를 선보였다. 다만 어마어마한 운동능력을 선보이며 블록을 4개나 했다. (실제로 득점보다 블록을 먼저했다. 또한 첫 득점을 보면 조던스러운데, 헤지테이션 드리블 후 크로스오버, 스핀무브 후 더블클러치 점프슛이란 엄청난 동작으로 성공시켰다.)

그러나 조던은 세 번째 경기에서 37점, 9번째 경기에서 무려 45점을 터뜨리며 두각을 나타냈다.[26] 당시 그의 임팩트를 잘 나타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척 데일리 감독의 코멘트: "그는 너무 잘해서 리그 전체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어요. (He's embarassing the league, he's that good)." 올스타 브레이커 전까지 평균 27.4점 6.2리바운드 5.5어시스트 2.4스틸 1블록 필드골 성공률 52% 자유투 성공률 85.5%를 기록한 조던은 당연한 듯이 올스타에 주전으로 선발됐다.[27]

루키 시즌 리그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사소한 실수를 하기도 했는데, 원래 슬램덩크 콘테스트 참가자들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공개연습에 참가하게 되며 이 때는 각자 소속팀의 연습장비를 착용하는 게 불문율이다. 그러나 신인이라 물정을 몰랐던 조던은 스폰서 나이키의 요청대로 순진하게 나이키 물품을 차고 나섰다. (당시만 해도 나이키는 지금같은 독보적인 1위 기업이 아니라 컨버스, 아디다스, 리복과 비슷한 선에서 경쟁하던 회사였기 때문에 공격적인 마케팅을 선호했다.) 게다가 슬램덩크 콘테스트는 이때 2회에 불과해 더욱 조던이 상황을 몰랐던 것. 당시 영상을 보면 실제로 조던은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혼자만 나이키 운동복을 입고 1라운드를 치렀다가 아차 싶었는지 2라운드 때부터는 팀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머지 대회를 치른다.

이 때문에 올스타전 당시 조던의 부진에 대해 뜬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이에 조던이 건방지다고 생각한 선배들이 작당해 그를 왕따시켰다는 설이며, 이는 현지에서 'Freeze-Out' 사건이라 불린다. 게다가 토마스는 볼분배를 책임지는 포인트 가드다. 이 경기 직후 불스와 디트로이트가 붙게 되는데, 이 경기서 조던은 무려 49점을 넣으며 디트로이트를 박살내는 "복수"를 한다. 다만, 당시 동부 올스타 선수들이[28] 조던과 마찬가지로 23살에 불과했던 아이제아 토마스의 뒷공작에 합세할 이유는 전혀 없으니 판단은 알아서. 또한 팀 내 MVP 급 선수들 외 다른 선수들의 슛 갯수와 비교해 9개의 슛 시도는 심각하게 적은 것이 아니었으며[29], 마이클 조던과 아이제아가 서로 패스를 주고 받는 장면도 있다.[30] 아이제아 토마스 본인도 이를 근거로 부정한 적이 있으며 실제로는 근거가 부족한 낭설일 가능성이 높다. 올스타전에서 건방진 신인 골려주기?

즉 실제 있었던 슬램덩크 콘테스트 당시 조던의 실수와 후반기 있었던 조던의 디트로이트 맹폭, 훗날 배드 보이즈와 조던이 겪은 악연이 겹쳐져서 이런 설이 나돌았을 가능성이 있다.[31] 조던 자체도 그 1984년도 당시에는 "그랬던것 같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후에 명예의 전당에서는 오히려 그랬을 것이라는 것은 믿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듣고 동기부여가 되었다" 라고 표현함으로 이 낭설이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했다.

어쨌든 조던은 후반기에 Rookie Wall[32]에 부딪히기는 커녕 여전한 활약으로 후반기에 29.3점 7리바운드 6.5어시스트 2.4스틸로 오히려 더 좋은 활약을 보이며 시즌 통합 28.2점 6.5리바운드 5.9어시스트 2.4스틸 0.8블록 필드골성공률 51.5%, 자유투 성공률 84.5%란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였다.[33] 팀은 전 시즌 27승에서 11승 오른 38승을 거두며 동부 컨퍼런스 7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조던은 올랜도 울리지[34]를 제치고 확고부동한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았다.

그는 NBA 평균 득점 3위, 스틸 4위, 총득점 1위를 차지했으며 올-NBA 세컨드 팀에 올랐다. 또한 드래프트 동기이자 신인임에도 20점 10리바운드를 넘기고 올스타에 선발됐던 하킴 올라주원을 제치고 신인왕에 올랐다. 즉, 데뷔와 동시에 NBA 슈퍼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것이다.

첫플레이오프 상대는 당시 동부 컨퍼런스의 강호 밀워키 벅스였다. 여기서 불스는 현저한 전력차이로 인해 1승만 거두고 4경기만에 탈락해야 했지만 조던은 평균 29.3점 8.5어시스트 5.8리바운드 2.8스틸 1블록을 하며 제몫을 해줬다. 다만 필드골성공률이 다소 부진(43.6%)한 것은 아쉬운 부분. 특히 2, 3차전에서는 30점, 35점으로 두 경기 연속 30점을 넘기는 맹활약을 했다.

4.2. 1985-86 시즌과 그 이후

큰 기대를 안고 시작한 소포모어 시즌, 조던은 홈 개막전에서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29점을 넣으며 1점차 승, 이후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33점을 넣고, 이후 골든스테이트를 이기며 산뜻하게 3연승으로 시즌을 시작한다. 그러나 문제는 세 번째 경기에서 일어났다. 당시에 만들어진 농구화를 신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때 농구화는 쿠셔닝이라고 할만한 게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조던, 줄리어스 어빙, 데이비드 톰슨 등 고공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들은 덩크 슛 시도를 지금만큼 자주 하지 않았으며, 착지할 때 발가락으로부터 발등까지 무게를 분산시키며 사뿐하게 착지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앨리웁을 위해 점프했던 조던은 이걸 깜빡했는지 그냥 발 전체로 쾅 착지해버렸고, 바로 발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고 만다.[35]

그 대가는 처참했다. 조던은 이후 64경기를 결장해야 했고 시카고는 바로 4연패, 1승 후 다시 4연패를 하는 등 21승 43패로 32.8%란 처참한 승률에 그쳐야했다. 그러나 조던은 재활 끝에 일정보다 더 빠르게 복귀를 해냈다. 훗날 밝혀진 일화에 따르면 조던은 학업을 끝마친다는 핑계로 UNC에 복귀해서 불스에 알리지 않고 1대1, 2대2 시합을 거쳐 5대5 시합까지 뛰었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36] 제리 라인스도프 구단주가 의사로부터 똑같은 자리를 다칠 확률이 10%인데 그때는 선수경력 끝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이유 + 어차피 시즌 망했다는 이유로 조던을 남은 시즌에도 출전시키지 않으려 했으나 조던의 황소고집을 못이기고 출전시간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복귀를 허락한다.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 나온 바에 따르면 조던은 재발 확률이 10%밖에 안된다는 소리를 듣고 빡쳐서 "90% 확률로 안 다치는 거잖아요"라고 당장 뛴다고 나섰으나 구단주는 "마이클. 자네는 지금 위험-보상 비율(risk-reward ratio)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것 같네. 만약 자네가 끔찍한 두통이 있는데 내가 약통을 줬다고 치세. 그 중 9개 약은 자넬 낫게하고 하나는 자네를 죽인다고 한다면, 약을 먹겠나?"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조던은 "그 두통이 얼마나 염병할 정도로 심한지(f---king bad)에 따라 달렸죠"라고 답했다. 농구를 향한 조던의 갈증을 엿볼 수 있는 부분.

복귀 이후에도 한동안 불스는 조던의 출장시간을 조절했다. 초반에는 전/후반당 최대 7분씩이었다. 실제로 코치진이 스톱워치를 들고 시간을 칼같이 쟀고, 시간이 지나면 바로 뺐는데 당시 경기를 보면 교체 당한 뒤 벤치에 앉아 씩씩거리며 울분을 참는 조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조던은 부상이나 체력 회복을 핑계로 경기를 쉰다는 개념을 납득하지 못했는데, 부상 전까지 고등학교/대학교/프로 때까지 단 한경기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거의 결장을 하지 않았고[37], 1차 은퇴 후 복귀하고서는 2차 은퇴전까지 프리 시즌이나 시범경기를 포함해 모든 경기에서 뛰었으며, 워싱턴에서 30대후반 나이에 복귀했을때도 무릎이 나가고 나서도 통증을 참고 7경기나 더 뛰다가 수술했으며, 수술 이후에 시즌아웃될거란 예상을 깨고 조기복귀했다가 부상이 재발해 결국 아웃되었다. 그 다음 시즌은 전경기 출장...이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고 뛰는 선수니 출장시간 제한이 답답했던 것.

조던이 조금 뛰었던 첫 네 경기에서 불스는 4연패를 당한다. 조던의 시카고 시절 유일한 한 자리 득점(8점)도 이때 나왔다. 그러나 출장시간을 19분으로 조금 늘린 뉴욕 닉스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불스는 눈에 띄게 나아진 모습을 보인다. 조던의 출장시간이 20분대 이상으로 늘어난 이후부터 불스는 5승 4패, 조던은 28.9분 동안 27.3점 3.8리바운드 3.4어시스트 2.3스틸 1.6블록에 필드골 성공률 49.5%를 기록한다. 조던 치곤 아쉬운 수치지만 조금씩 감을 찾아가는 걸 알 수 있었다.[38]

이후 시작된 보스턴 셀틱스와의 플레이오프, 당시 셀틱스는 래리 버드 시절 셀틱스 중 단연 최고 전력이며 당시 기준으로 역대 4위의 승률을 자랑하던 팀이었다.[39] 이 팀을 상대로 정규 시즌 30승에 그친 불스는 패하는 게 당연한 경기였다. 그러나 조던은 이 최강 셀틱스의 최대 장점인 수비진과 리그 최고의 외곽 수비수 중 하나였던 데니스 존슨 등을 상대로 1차전에 적지에서 무려 49점을 퍼붓는다. 그러나 경기 자체는 셀틱스가 무난하게 19점차로 이긴다.

파일:1985년 마이클 조던 63득점 경기_in 보스턴.jpg
그리고 펼쳐진 2차전에서 조던은 더욱 놀라운 일을 해낸다. 지금까지도 플레이오프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는 63점을 퍼부은 것![40] 아무리 막아도 비집고 들어가고, 잡아 끌어도 슛을 성공시키는 조던의 플레이에 질린 래리 버드는 경기 후 "신이 마이클 조던으로 변장한 것 같다(I think it's God disguised as Michael Jordan)"라는 농구계에 길이 남는 명언을 남겼다. 1차전 49득점, 2차전 63득점을 기록했고 게다가 그 과정에서 알고도 못 막을 움직임을 통해 상대 선수들을 따돌리고 넣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막고 잡아당겨도 결국 뿌리치고 슛을 넣으니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41]

경기 자체는 2차 연장 접전 끝에 135:131로 보스턴이 이겼지만, 조던이 보스턴 측이나 농구계 전반에 준 충격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조던이 3차전에는 77득점을 올리는 게 아니냐 하는 반농담성 예측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

참고로 두 팀의 전력을 생각하면 2차 연장까지 몰고 간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이 해 셀틱스는 아직도 1987 레이커스, 1996 불스 등과 함께 역대 최고의 팀을 논할 때 거론된다.[42] 게다가 이 시즌에 셀틱스는 정규 시즌에 홈에서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는 40승 1패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단 1패도 하지 않았다.

즉, 1986 보스턴을 홈에서 꺾는다는 건 레이커스를 센세이셔널하게 꺾고 올라온 트윈타워의 휴스턴 로키츠도, 슈퍼스타 도미니크 윌킨스가 이끌었고 배드 보이즈를 제압했고 올라왔던 애틀란타 호크스도, 수비의 달인이던 폴 프레시와 시드니 몽크레프, 20-10에 가까운 기록을 내던 빅맨 테리 커밍스 등이 버티며 4년 연속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오른 밀워키 벅스 등 강팀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근데 이걸 플레이오프에 턱걸이로 올라온 불스가 거의 해낼 뻔한 것이었다. 1986 불스는 이 해 조던의 공백을 이겨내지 못하고 30승에 그쳤다. 당시 우승권 팀은 동부 컨퍼런스가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50승 이상이 서부 컨퍼런스는 2팀, 동부 컨퍼런스는 4팀) 중위권 이하 팀부터는 동부 컨퍼런스가 약세를 보였는데, 시카고가 기록한 30승은 서부 컨퍼런스 꼴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동급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23팀 중 16팀이나 플레이오프에 나가는 널널한 기준이었다. 즉, 바닥에 가까운 전력의 팀이 압도적인 최강의 팀과 붙었는데, 한 선수가 미친듯이 날뛰어서 역대급 업셋을 이뤄낼 뻔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버드의 해당 코멘트가 비꼬는 말이거나 정신승리라는 게 국내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마치 사실처럼 퍼지고 있는데, 정작 미국에서는 그런 시각이 전혀 없다. 참고로 당시 버드의 인터뷰 전문은 "마이클이 우리한테 한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는 오늘 경기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기가 막힌 선수였습니다. 그냥 신이 마이클 조던으로 변장한 것 같았습니다."이다. 원문을 확인하고 싶으면 여기서 확인해보자. 앞뒤 문장을 살펴봐도 비꼬는 발언이라고 하기 힘들다. 이런 엄청난 활약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자기 팀이 이겼으니, 김응용 감독이 김성근 감독을 "야구의 신"이라고 불렀다는 얘기처럼[43] 결과적으로 자기 팀을 띄우는 발언이 될 수 있긴 하지만, 이때 버드의 인터뷰는 순수하게 조던의 엄청난 기량에 감탄하는 뉘앙스에 가까웠다.

참고로 이때 버드는 조던의 활약에 대해 얘기하면서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는데, 1년 후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에 패하고 "매직은 내가 본 최고의 선수였다."라고 할 때도 이렇게 고개를 흔들면서 인터뷰했다. 버드가 이빨이 상당히 신랄하기로 유명한 선수긴 했지만 그렇다고 융통성 없는 양반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버드는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말과 함께 압도적인 실력으로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걸 즐기는 선수였다. "내가 저기서 공을 잡아서 저기로 이동해 위닝샷을 넣을 거야"라고 친절히 알려준 다음에 그대로 실행한다던지... 비록 저 상황에서 셀틱스가 이기긴 했지만 당시 모든 포커스는 조던에게 있었고, 게다가 역대 최강의 팀이자 역대 최강의 수비팀 중 하나가 2년차 가드에게 플레이오프 한 경기 역대 최다 득점을 내준 상태에서 67승이 30승 팀을 이기는 건 전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쪽팔린 일이었지. 위에 언급된 파이널 패배 이후 인터뷰처럼 버드는 상대방을 인정해야 할 경우 시원하게 인정하는 편이다.[44]

1987-88 시즌에는 든든한 조력자 찰스 오클리를 필두로 팀이 점점 짜임새를 갖추게 되면서 50승 32패를 하며 생애 첫 MVP를 수상한다.[45] 이때 불스는 조던의 탁월한 운동능력을 활용하는 독특한 전략 몇개를 사용했는데, 그 중에 얼리오펜스 중 하나로 상대 수비가 짜여지기도 전에 조던이 전광석화같이 골밑으로 질주하면 빅맨들이 그에게 롱패스를 찔러주는 것이다. 이는 조던의 기동력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 또 슈퍼스타 센터들을 상대할 때 시카고의 빅맨들이 버티고 있으면 조던이 기습적으로 뒤나 옆에서 블록을 해버리는 전술도 있었는데, 당시 불스의 빅맨들은 블록 능력이 평범한 편이었기 때문에 조던의 센스와 높이를 활용해 이와같은 전술을 한 것.

1987 드래프트에서 불스는 호레이스 그랜트스카티 피펜이란 좋은 원석들을 발굴해내는데, 이들은 루키 시즌에 20여분을 벤치멤버로 뛰며 기량을 갈고 닦게 된다.[46]

그러나, 1988년 오프 시즌에 불스는 변화를 겪게 된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찰스 오클리가 뉴욕의 빌 카트라이트와 맞트레이드된 것. 카트라이트는 데뷔 시즌에 20-9에 올스타도 올랐던 선수였지만 당 만 31세로 전성기가 지났고[47] 거듭된 부상으로 1984-85 시즌을 통째로 쉬고 그 다음시즌도 2경기, 1986-87 시즌도 58경기만 뛰는 등 기량이 완연히 하락한 상태였다. 초창기의 패트릭 유잉과 한때 트윈타워를 결성했으나 이미 1987-88 시즌에 벤치로 밀려난 상태로 기록도 11.1점 4.7리바운드로 형편없었다. 그런 카트라이트와 만 25세로 이제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면서 12.4점 13리바운드를 기록한 오클리가 트레이드된 것.

당시 조던은 자신과 친한데다 기량도 좋고 호흡도 잘 맞으며 거친 수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던[48] 오클리를 버리고 퇴물에 가까운 카트라이트를 데려온 것에 대단히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제리 크라우스의 사무실까지 쳐들어와 따지기 시작했고 이에 제리는 조던을 달래느라 쩔쩔 맸다고...[49] 이 때문에 초창기에는 카트라이트의 실력을 못 믿고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트레이드에는 당시 GM 제리 크라우스의 큰 그림이 있었는데, 오클리는 좋은 선수였지만 206cm의 키로 골밑을 수호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7피트 1인치에 달하는데다 수비센스가 여전했던 카트라이트를 데려온 것. 또한 전 시즌에 드래프트한 그랜트가 성장하면 오클리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이는 실제로 이뤄졌다. 이를 바탕으로 1988-89시즌엔 그랜트가 풀타임 주전, 피펜이 초중반 이후부터 주전으로 올라오게 된다.[50] 포인트 가드의 경우 아직 샘 빈센트가 주전으로 많이 나왔지만 점점 1차 3연패 당시 주전라인업이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불스는 아직 실험단계였으며 어떤 시스템이 가장 좋을지 모르는 상황. 이 상황에서 감독 콜린스는 시즌 후반에 조던을 아예 포인트 가드로 기용하게 된다. 조던은 이 상황에서 32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란 좋은 성적과 연속 트리플더블을 쏟아내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하지만, 시카고는 전 시즌보다 떨어진 47승 35패에 그치며 6번시드를 받게 된다. 이 상황에서 1라운드 상대는 얄궂게도 전 시즌에 맞붙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전 시즌에 불스가 3번 시드, 클리블랜드가 6번 시드로 붙었으나 시드가 맞바뀐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 클리블랜드는 마크 프라이스, 브래드 도허티, 래리 낸스의 올스타 3인방에 론 하퍼까지 있어 당시로서는 프랜차이즈 사상 최고 기록인 57승을 거두는 성과를 거뒀다.

이 시절 젊고 유망한 팀이었던 클리블랜드는 나이대가 비슷하고 비슷하게 떠오르는 팀이었던 조던의 불스에게 88~93시즌까지 네 번 붙어 네 번 모두 패배하는 등 아주 처절하게 당했다. 하지만 많이들 간과되는 것이 마크 프라이스가 이끌던 당시 클리블랜드는 89시즌과 92시즌에 57승을 거두며 르브론 제임스 시절 이전까지 팀 역사상 가장 강한 전력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됐다시피 다소 불안한 불스의 전력과 반대로 당시 클리블랜드는 도허티가 두 번째 올스타 선정, 무명의 유망주였던 프라이스가 생애 첫 올스타와 올-NBA 서드 팀에 오르며 전성기가 시작되었고, 베테랑 래리 낸스는 역시 여전한 기량을 보이며 생애 첫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오른 참이었다. 이 팀의 전력이 얼마나 좋았는지 당시 시카고 불스가 원정을 떠날 때는 시카고 지역 신문의 기자 세 명이 동행했는데 이들도 전부 클리블랜드의 시리즈 승리를 점쳤다. 이 중 한 명이었던 시카고 트리뷴의 유명기자 샘 스미스가 ESPN Sports Century 다큐멘터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운명의 5차전을 앞두고 조던이 기자 세 명에게 다가와서, 불스가 3차전만에 스윕당할 것이라고 예상한 기자를 툭 치며 "우리가 당신은 이미 처리했고요(We took care of you)"라고 하고 4차전을 예상한 기자를 치며 "당신도 처리했고요"라고 하고, 5차전 만에 클리블랜드 승리를 예상한 스미스를 툭 치며 "오늘 당신을 처리할 겁니다"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홈에서 열린 1, 2차전에서 1승 1패씩, 시카고에서 열린 3, 4차전에서도 1승 1패를 나눠갖게 되고 운명의 최종 5차전(당시 1라운드는 5전3승제)을 맞게 된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맹활약을 한 크레익 일로가 (벤치에서 출전해 24점) 역전 레이업을 넣으며 종료 직전에 1점차로 앞서게 된다. 시리즈 전부가 3초만에 결정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불스는 조던에게 어렵사리 공을 건네고 조던은 두 번 공을 튕긴 후 3점 라인 한발짝 앞에서 점프했다. 일로가 공중에서 그에게 붙었으나 조던은 특유의 체공력으로 더블펌프를 하며 일로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음 슛,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슛은 림을 두 번 앞뒤로 튕기더니 그대로 들어갔다. 바로 전설로 남은 The Shot이었다.[51]

조던은 시리즈 평균 39.8점 5.8리바운드 8.2어시스트에 야투율 51.8%를 기록한다. 다음 시리즈인 닉스 전에서 2번시드 뉴욕 닉스를 또 업셋한 불스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2-4로 패하고 만다. 그러나 불스는 이 시즌에 최강 전력을 뽐내던 디트로이트에게 패배를 안긴 유일한 팀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괴물같은 기량을 선보였음에도 계속해서 우승에 실패하는 조던에 대해 '혼자 잘할 뿐 우승할 능력이 없는 게 아닌가'란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52] 당시 매직 존슨 vs 래리 버드 라이벌리를 통해 NBA의 양대 왕조로 군림하던 셀틱스나 레이커스를 포함해 대부분 농구인과 관객들 대부분이 스타플레이어 1명의 득점보다는 전체적인 팀 밸런스를 맞추는 공격과 수비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득점왕은 이기적인 플레이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셀틱스나 레이커스나 스타플레이어 집합소였다는건 일단 제끼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도 그랬었지만 조던의 우승 전까지 매번 나오는 말 또한 "득점왕은 우승할 수 없다"였을 정도. 물론 조던은 이런 인식을 박살내고 양자를 공히 독식함으로써 그를 따라잡고자 하는 이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다. 실제로 조던 이후로도 득점왕과 챔피언을 독식한 건 샤킬 오닐 1명, 그것도 한 시즌뿐이다.

계속해서 플레이오프에서 좌절을 겪으며, '혼자만 아는 선수이고, 득점왕은 팀을 우승시키지는 못한다'는 악평을 많이 듣던 중 1988년 필 잭슨 감독과 텍스 윈터스 코치를 만나고, 그들이 도입한 트라이앵글 오펜스로 인해 그의 공격 부담이 줄고 조던도 그 영향을 받아 팀플레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필 잭슨이 감독으로 부임한 것은 1989년이고(그 전에 1년간 코치로 재직) 텍스 윈터가 코치로 부임한 것은 1985년이다. 잭슨 이전에 불스의 감독은 덕 칼린스였는데 당시 그는 윈터와 팀 전술을 두고 의견 충돌이 있어서 윈터가 사임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스 구단은 오히려 윈터의 사임을 만류하고 칼린스를 해임하면서 잭슨을 감독으로 올리게 된다.

이전까지의 공격방식은 좋게 말해 스윙 오펜스, 나쁘게 말하면 '조던에게 공을 줘!'. 실제 배드 보이즈라고 불리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상대로 승리한 뒤에 덕 칼린스는 "우리의 전술은 하나다. 조던한테 공 주고 다 꺼져(...)"라고 말 한 적 있다. "다같이 조던을 족친다(...)"로 일관하던 피스톤즈를 만나면 쩔쩔매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니 에이스 대접은 당연했고 그 때문인지 조던은 처음에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도입을 반대했다. 당시 조던은 "노마크에서 동료가 던지는 것보다 내가 수비를 하나 둘 달고 던지는 게 성공률이 높은데 왜 내가 볼을 돌려야 하나?"라고 반발했다고 한다.[53] 그러나 일단 시켜보니 자신이 집중 견제를 덜 받고 부담이 덜 가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즉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반강제로 도입한 것이 아니었으며 조던과의 합의하에 도입한 것이다. 필 잭슨의 첫 번째 자서전 'Sacred Hoops'를 보면 당시 조던이 본인의 공격부담을 줄일 수 있는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흥미를 가졌다고 나와있다.

이러던 도중 1989-90시즌에 웃지 못할 해프닝이 생겼는데, 조던이 그의 전매특허인 23번이 아닌 12번, 그것도 이름 마킹조차 되어있지 않은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른 것이다. 이 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은데, 1989-90시즌 당시 원정6연전 중이던 시카고 불스는 5경기동안 고작 1승만 거두는 부진에 시달렸고, 백투백 두 번째 경기였던 올랜도 매직과의 원정 경기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당시 첫 시즌을 보내고 있던 올랜도는 확장팀답게 형편없는 전력이었다. 그런데 발렌타인 데이였던 이날, 경기 전에 누군가가 라커룸에서 조던의 23번 져지를 훔쳐간 것이다. 직원들은 경기장을 샅샅히 뒤지고, 심지어 원정팀 라커룸에 들어갈 수 있었던 직원들까지 전부 수색되었지만, 유니폼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시카고의 장비 담당 직원은 관중석에서 조던의 팬을 발견하고 그가 입고 있던 져지를 빌렸지만 이는 조던에게 맞지 않았다. 결국 당시 팀이 여분으로 들고 다니던, 이름도 없는 12번 져지를 조던이 입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조던의 경기력엔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그는 47분을 뛰며 49점 7리바운드 2어시스트 0 턴오버를 올렸다. 아이러니한건 당시 스틸 1위에 오른 조던이 경기내내 공을 한 번도 훔치지 못한 것. 그러나 당시 약팀이었던 올랜도의 막판 역전극으로 경기는 올랜도의 135-129 연장전 승리로 끝난다. 조던은 경기 이후 인터뷰에서 "내가 어떻게 플레이했든 관심없다. 우리는 이겨야할 경기를 이기지 못했다."라고 패배에 대해, 그리고 유니폼 도난에 대해서도 분노했는데, 이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시절 반바지를 커리어 내내 유니폼 아래에 입을 정도로 징크스를 중시하는 조던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올랜도에서 굴욕적인 사태는 조던의 승부욕에 불을 붙혔는지 이후 불스는 9연승을 달렸으며, 이 기간동안 조던은 33.2점 6.9어시스트 6리바운드 2.3스틸 필드골 성공률 53% 3점 슛 성공률 47.1% 자유투 87.8%를 기록했다. 또한 유니폼 도난 경기까지 29승 20패로 6할이 채 안되는 승률을 기록하고 있던 불스는 이후 26승 7패, 8할에 가까운 승률을 올린다. 조던 본인의 경기력으론 도난 이전/이후로 나누어볼때 조던은 도난 경기(...)까지 33점 6.3어시스트 6.8리바운드 필드골성공률 51.2% 3점 38.2% 자유투 84.1% 2.5스틸과 0.6블록을 기록했지만, 도난 이후 34.4점 6.3어시스트 7.1리바운드 필드골성공률 54.9% 3점 슛 36.6% 자유투 86% 3.2스틸과 0.8블록을 기록했다. 보다시피 어시스트가 그대로고 3점 슛 성공률이 소폭 떨어진걸 빼면 주요항목 모두 기록이 올랐는데, 보통 후반기에 선수들이 체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

어쨌거나 당시 불스는 다소 부진한 시즌 전반기를 딛고 후반기에 78%에 달하는 고승률을 올리며 당시 기준으로 팀 역대 2위였던 55승을 기록하는 쾌거를 올렸는데, 이는 조던을 포함한 이들의 폭발적인 페이스 덕분이었다. 또한 이 때는 전 시즌까지만 해도 동기 호레이스 그랜트에게까지 미세하게 밀리던 입지와 실력의 스카티 피펜이 첫 올스타에[54] 선정되며 훌륭한 조력자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시즌이기도 했다.

5.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의 악연, 그리고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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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던과 신생강호로 거듭나고 있던 불스를 가장 괴롭힌 것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이른바 배드 보이즈였다. 강력한 팀워크와 수비, 거친 플레이로 악명과 명성이 동시에 높았던 디트로이트는 조던 외에는 사실상 별볼일 없던 1980년대 후반까지의 불스를 상대로 이른바 "조던 룰"을 적용해 불스를 무력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스는 1989년에 이 해 우승을 차지한 디트로이트에게 2패를 안기며 선전했고, 1990년에는 7차전까지 끌고 갔지만, 알 수 없는 두통으로 슛 10개 쏴서 1개 성공시킨 피펜과 17개 던져서 3개 넣은 그랜트 덕분에 아쉽게 패하는 등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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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룰”

마이클 조던 문서에서 언급되어 있듯, 조던 룰이란 맨투맨을 가장한 한 선수에 대한 집중 수비로[55], 역사상 가장 더티하고 악명이 높은 수비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전술은 조던을 맨투맨으로 막는 선수가 조던이 공을 잡고 중앙으로 돌파해오도록 유도하면, 주변의 수비수들이 조던을 둘러싸면서 거칠게 막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비슷한 전술로는 슬램덩크에서 북산이정환을 상대로 한 4대1 전술, 그리고 2000년대에 보스턴 셀틱스가 르브론 제임스를 상대로 한 걸 들 수 있는데, 이 전술들보다 조던룰이 더 극악했던 것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NBA는 신체접촉에 관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상을 보면 수비수가 핸드체킹[56]을 자유롭게 하는 것과, 2000년대 농구 같으면 플래그런트 파울[57]을 받을 만한 것도 그냥 파울로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게 그냥 파울 이었다.[58]

조던룰은 기본적으로 조던이 돌파하면 페인트 존에서 둘러싸는건데 그렇게 둘러싸면서 툭 치는 건 양반이고 아예 목을 잡아 거꾸러뜨리거나 밀어 내동댕이치거나, 주먹으로 때리는 게 보통이었다. 유명한 한 사진에서는 디트로이트 세 명이 조던을 둘러싼 가운데 아이제아 토마스가 조던의 고간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것도 있다. 그렇게 해봤자 그냥 파울이니까. 현대 NBA와 달리 플래그런트 파울이 그냥 파울 취급받던 시절이다. 정확히 말하면 플래그런트 파울은 1980-81시즌에 도입되어 해당파울을 할 시에 파울을 당한 팀 감독이 자유투를 던질 선수를 지정할 수 있었다. 문제는 페널티가 그뿐이었다는 것. 어차피 조던을 파울해봤자 정확한 자유투 실력을 지닌[59] 조던이 쏠게 뻔했기에 부담없이 그냥 파울하듯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문제점을 깨달은 NBA는 1990-91시즌부터 자유투 2개+공격권+공이 아닌 선수를 공격할 의도가 강할 시 심판 재량에 따라 퇴장(현재로 치면 플래그런트2)으로 페널티를 매우 강력하게 도입했고, 이후 몇차례의 개정을 걸쳐 현재와 같은 규정[60]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한 팀이 작정하고 한 명을 거의 두들겨 패다시피 막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다른 선수들은 프리가 된다. 그렇지만 1989년까지의 불스의 부실한 선수진으론 어차피 도움이 안됐기 때문에 조던만 막은 것.

조던 룰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것은 1989년으로, 이듬해에는 본격적으로 성장해 위협이 되기 시작한 스카티 피펜까지 거친 수비의 대상이 된다.[61] 조던룰이 얼마나 효과가 좋았는지는 수치로도 증명이 된다.

1989년 당시 조던은 정규 시즌에서 32.5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와 필드골 성공률 53.4%를 기록했다. 또 플레이오프 1, 2라운드에서는 37.5점 8.3어시스트 7.8리바운드 53.4% 성공률을 기록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시즌을 치르는 동안에 소모된 체력과, 플레이오프에서 더 강력해진 상대의 수비 때문에 기록이 정규 시즌에 비해 떨어졌던 반면에, 조던은 커리어 대부분의 기간동안 플레이오프에서 정규 시즌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했다. 그러나 정작 이 해 디트로이트를 상대로는 29.7점 6.5리바운드 5.5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특히 필드골 성공률이 46%에 그쳤다.

또한 1990시즌에는 더 심한데 정규 시즌에는 33.6점 6.3어시스트 6.9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52.6%를 기록하고, 플레이오프 1, 2라운드에서는 40.2점(!) 7.2어시스트 7.2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54.4%를 기록한 괴물이 디트로이트전에서는 32.1점 6.3어시스트 7.1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46.7%에 그친다. 근데 플레이오프 시리즈 내내 32점 넣고 실망스럽다는 말도 조던 아니면 안나오지.[62]

디트로이트의 피지컬한 수비에 지친 조던은 1989년 패배 이후 개인 트레이너 팀 그로버를 고용해 벌크업에 나선다. 그 전까지 조던은 근육을 늘리면 스피드가 떨어질까봐 근육 트레이닝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트로이트의 거친 플레이에 맞서 파워를 키울 필요성이 워낙 커졌고, 이에 그로버는 파워를 늘리면서도 운동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며 조던을 설득했다. 실제로 90시즌 이후에도 조던의 운동능력은 리그 최정상급을 유지했다.

이런 조던의 개인적인 노력에다가 스카티 피펜, 호레이스 그랜트 등이 본격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팀으로서의 완성도가 더해지면서 결국 아이제아 토마스를 필두로 한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즈들의 집요한 견제를 가장한 폭력을 특유의 근성으로 헤쳐나간 결과 결국 그는 1990-91 시즌 디트로이트를 4-0으로 스윕하고 파이널에 진출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때 시카고가 플레이오프에서 디트로이트를 맞아 1승 4패 - 2승 4패 - 3승 4패 - 4승 0패로 성적이 한 계단씩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준 점이다. 조던이 지금까지 신화적인 선수로 남아있는 데는 결국 자신의 힘을 키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는데, 배드 보이즈는 분명 그 어려움 중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조던은 훗날 디트로이트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언제까지 악의적인 감정을 가질 수는 없잖아요. 어쨌든 디트로이트에서 그 커다란 벽을 넘지 못했으면 여섯 번의 우승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라고 하면서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던 데 디트로이트가 큰 영향을 주었음을 인정하였다.[63]

여담으로, 4차전은 디트로이트에서 펼쳐졌는데 경기가 기울자 토마스 등 디트로이트 주전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경기장을 빠져나가버렸다. 대개 지는 팀에서 주전 선수를 벤치에 앉히더라도 경기종료 후 상대방 팀을 축하해 주는 것이 매너인데, 심지어 상대방 팀 벤치 앞을 가로질러서 가버렸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를 까는 사람들이 있고 조던 본인부터도 '우리는 2년 연속으로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졌지만 나는 그들 모두와 악수했었다. 그게 스포츠맨십이다.'라며 아직도 디트로이트를 까고 있으며 아이제아 토마스도 "저때 저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랬다."라고 항변하면서도 "그래도 우리가 어쨌든 바른 행동(high road)을 했어야 했다."라고 후회하고 있다.[64]

이외에도 조던이 처음 올스타전에 출전했을 때 토마스가 같은 팀원들과 작당해 조던에게 공을 주지 말자며 따돌렸다는 풍문도 있으며[65][66] 꼭 그 설이 아니더라도 조던과 토마스는 원수까지는 아니라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67] 이는 결국 드림팀 1기가 조던을 주축으로 꾸려질 당시 토마스가 드림팀에 승선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68]

6. 첫 번째 3연패, 전설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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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우승”
1990-91 시즌 매직 존슨이 이끄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4-1로 꺾고 시카고 불스에 우승컵을 안겨주며 MVP에 오르게 된다. 락커룸에서 우승컵을 소중히 껴안고 펑펑 우는 조던의 모습이 지상파를 타며 모두가 '저놈도 인간이었군' 류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때 조던은 펑펑 울면서 거의 흐느끼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처음에 왔을 때,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닥부터 시작해서 우승한 거에요. 너무 길었어요. 7년이나 걸렸다구요. 한 계단 한 계단, 조금씩 조금씩. 희망을 포기한 적 없어요. 전 언제나 믿고 있었어요.

그전까지 "득점왕은 우승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실제로 1971년 카림 압둘자바(당시 이름은 루 앨신더) 이후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차지한 선수는 조던 전까지 20년동안 없었으며 NBA 역사 전체로 확장해봐도 조지 마이칸(2회), 카림 압둘자바 (1회), 조던 (6회), 샤킬 오닐 (1회) 뿐이다. 조던 역시 자기만 잘한다는 오명을 썼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에 래리 버드나 매직 존슨보다 못하다"는 소리도 단골로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러한 편견과 속설을 깨고 우승한 것이니 눈물이 나올 수밖에.

다만 표현상 득점왕이라고 표현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피트 마라비치조지 거빈 등 센터가 아닌 선수 중 득점이 주특기인 선수(즉, 조던과 유사한 스타일이던)는 우승을 못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확률높은 공격을 하는 센터가 아닌 이상, 득점왕을 할 정도로 한 선수에게 공격이 집중되는 팀은 공격성공률이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으며 (수비 또한 집중되므로) 이런 팀의 전력엔 한계가 있다는 논리이다. 실제로 센터 득점왕들은 우승을 조던 이전에 이미 했었고. 근데 이 의미로 보면 아직까지 유일한 예외는 조던으로 남아있다. 조던과 가장 유사한 선수인 코비 브라이언트도 조차 득점왕에서 거리가 멀어진 이후에야 우승했다.

파이널에서 중요한건 그 유명한 포인트 가드 매직 존슨과의 대결이었는데, 조던은 득점 욕심만 내는 선수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인진 모르겠지만 평균 11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물론 그래놓고 득점은 평균 31점이나 했으며[69] 수비에선 매직 존슨의 주 매치업이었다.[70]

1991-92 시즌에는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이끈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4-2로 꺾고 2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경기 1차전에서 조던은 3점 슛 6개를 성공시켜 파이널 기록을 남겼다. 여섯 번째 3점 슛을 성공시키고 본인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어깨를 으쓱하는 장면이 이 시리즈의 대표 장면이었다.

추후 인터뷰 시 "3점 슛이 마치 자유투 같은 느낌이었다"고... 사실 조던은 이미 90시즌에 3점 슛을 37%의 확률로 경기당 한 개 이상 성공시키며 어느 정도 옵션으로 추가했지만, 본인이 워낙 3점 슛을 좋아하지 않아 경기당 시도수가 1개 정도일 때가 많아 성공률이 들쭉날쭉했다. 이에 클라이드 드렉슬러는 조던에게 의도적으로 공간을 주면서 3점 슛을 유도하는 수비를 했는데, 이에 빡친 것인지 조던은 연달아 3점포를 쏴서 적중시킨다. 이때 조던의 3점 슛 성공률은 10개를 쏴 6개를 넣어 60%였는데, 더 임팩트가 컸던 것은 6개를 연속으로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처음 2개를 쏴서 연달아 놓치자 해설자들이 "마이클이 외곽포를 연달아 쏘고 (bombing away) 있는데 평상시와 다르네요"라고 하다가 3점 슛을 하나하나 성공시키면서 결국 당시 NBA 기록이었던 한 경기 6개 성공과 타이를 이루자 해설자가 외쳤던 "조던이 3점 슛이라뇨!!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Three pointers for Jordan!! What in the world is going on!?"은 유명한 멘트다. 여담이지만 이때 파이널을 앞두고 언론이 "리그 최고의 슈팅 가드가 누군지 가리는 무대"라고 했는데[71] 자존심이 상한 조던은 맹활약을 하고 나서 "그들이 (나와 드렉슬러의) 차이를 알았겠죠"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자존심과 무시무시한 승부욕을 볼 수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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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lls First Three-peat”
1992-93 시즌에는 그 해 최고승률을 세운 찰스 바클리피닉스 선즈를 4-2로 꺾었다. 이 시리즈에서 조던은 평균 41점을 기록했다.[72] 특히 4차전에서는 55점을 기록했다(아래 영상 항목에 하이라이트가 있다). 6차전 4쿼터에서는 질식수비로 막힌 팀의 모든 득점(9점)을 넣으며 팀을 끌고 갔고, 마지막에 조던-피펜-골밑의 그랜트-외곽의 팩슨으로 이어진 패스를 통해 역전에 성공했다. 이 장면은 슬램덩크의 권준호의 과거회상(...) 3점 슛이 오마주했다는 의견도 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미국 농구 대표팀, 소위 말하는 드림팀의 제 1회 멤버로 참여, 상대팀과 평균 점수차를 40점 내면서 두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건다. 이때는 세계 농구계가 지금처럼 평준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미국 대표팀은 문자 그대로 넘사벽. 상대편 선수들조차 기념촬영에 더 의미를 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경기 종료 직전에 기념촬영을 위해 타임아웃을 부르기도 했다나. 또한 경기 도중에 매직 존슨에게 파울을 한 선수가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7. 첫 번째 은퇴와 야구, 그리고 첫 번째 컴백

그러나 한창 새 시즌 준비로 바빴던 1993년 7월 23일, 조던에게 비극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그의 멘토이자 아버지인 제임스 조던이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고속도로 노상에서 2인조 강도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범인은 17살 소년 래리 디메리(Larry Demery)와 18살 소년 대니얼 그린(Daniel Green)으로, 더욱 충격적인 건 검거 직후 제임스 조던의 금품을 노리고 그를 살해했다고 자백한 이 범인들이 바로 다름아닌 마이클 조던의 열렬한 광팬이었고, 그들이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바로 조던의 신발을 사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범인들은 제임스 조던을 고의적으로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아무나 잡아서 쏴죽인 건데 죽이고 보니 마이클 조던의 아버지였다고 한다.[73] 이 비극적인 운명의 장난 앞에서 조던은 큰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일 때문에 조던은 크게 상심하여 농구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최전성기에 은퇴를 선언한 그에게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지만,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조던의 제2의 인생으로 결정한 것은 야구였다. 원래 유년기에 농구와 야구를 두고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했을 정도였고, 사별한 아버지 역시 농구를 시작하기 전엔 조던에게 야구선수로서 소질이 있다고 자주 언급했다. 1994년 2월 15일, 등번호 45번과 함께 시카고 화이트삭스스프링캠프 훈련에 참가함으로써 야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하필 화이트삭스였던 이유는, 불스의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가 시카고 화이트삭스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던의 마이너 리그 데뷔전에 1만여명의 관중이 입장했는데 마이너 리그 치고는 이례적인 규모였다. 하지만 경기성적은 좋질 못했다. 첫 경기에서 삼진 2개와 파울플라이 1개를 기록했고, 다음 경기에서도 여전히 안타는 없었고 수비 에러까지 나왔다.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저조한 성적이 계속되자 "에어 조던이 아니라, 에러 조던", "짐 싸, 마이클!" 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농구선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조던은 실력을 높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애썼다.[74] 노력의 결과인지 4월에는 11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냈고, 7월엔 생애 첫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시즌의 마지막 3주 동안은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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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짐 싸, 마이클!"편 표지.
[75]
어쨌든, 마이너 리그에서 뛰게 된 야구선수 조던을 취재하기 위해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250명의 기자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조던이 야구에서는 엄연한 루키[76]임에도 불구하고 더 낮은 수준이 아닌 더블A 팀부터 시작하게 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에 따르면 더블A보다 아래의 팀들에 조던을 넣으려 해도 그 팀들이 가진 구장에선 앞서 말한 규모의 취재진을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스프링캠프 훈련 후 화이트삭스 산하의 더블A 팀인 버밍햄 베론스로 배정됐다. 여담으로 당시 베론스 감독이 테리 프랑코나 감독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듣보잡 감독이었지만 알다시피 훗날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이 되어 2004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86년 묵은 밤비노의 저주를 깨버리며 전설이 된 그 감독이다.

시즌을 마친 뒤 애리조나에서 가을 리그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타율은 .251로 올라갔다. 당시 시카고 트리뷴의 유명 기자로, 조던 전문가로 이름이 높았던 샘 스미스는 메이저리그 구단 관계자들을 인용하며 조던이 다음 시즌에 메이저로 콜업될 확률이 높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사실 성적이 꾸준히 나아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다고 기대는 해봄직 했지만, 당장의 마이너 리그에서의 성적은 안 좋았고, 현실적으로 연령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했으므로 일반적인 유망주라면 메이저 리그 진출 확률은 없다고 봐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던은 엄청난 네이밍덕에 벤치에만 앉아있어도 구단의 흥행에 충분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마케팅 특수를 생각하면...
또한 1차원적으로 나이만 보자면 만 31세의 유망주라 발전 가능성이 낮아보이지만, 저 성적이 그가 야구를 다시 시작한지 1년도 안되어 낸 성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발전 속도가 상당하다고 보는 게 맞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나이라 리스크가 크긴 했지만, 포인트는 그가 다른 31세 마이너 유망주와 달랐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마이너에서 31세 유망주는 마이너에서 10년 정도 구르고 저 정도 성적이기에 발전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조던은 마이너에서 1년 뛰고 저 정도 성적이기에 실력향상 속도 면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것이고 메이저 팀들이 관심을 보인 것이다. 단순히 마케팅 특수 때문만은 아니다. 단순히 흥행 때문에 메이저 팀들이 관심을 보인 거라면 왜 그의 인지도가 절정이었던 농구에서 은퇴 직후에 그와 계약한 화이트삭스가 그를 메이저에서 데뷔시키지 않았겠는가?[77] 일단 메이저급 실력은 지녀야 마케팅 특수고 뭐고 메이저 리그 로스터에 넣을 수 있는 것이고, 당시 가을 리그 성적을 보고서야 메이저 팀들이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이들이 그의 성장세를 보고 "메이저급 실력을 지닐 가능성이 있구나"라고 판단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당시 샘 스미스의 글을 보면 파업사태가 터지기 전 화이트삭스는 조던을 트리플 A로 올려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케팅 특수를 노리고 무리해서 메이저로 보내지 않은 시카고 입장에서도, 조던은 단계별로 착실히 성장 중인 유망주였던 것이다.

실제로 위에서 "짐싸 마이클(Bag it Michael)" 기사를 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스티븐 울프(Steven Wulf) 기자는[78] ESPN에 2019년에 조던의 야구 커리어에 대해 자세히 짚어보는 기사를 올리면서 # 사람들이 조던의 야구 커리어에 대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도 잘못 생각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기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울프는 조던의 초반 실력을 보고 신랄하게 까는 기사를 썼으나, 8월달에 조던의 경기를 직접 보러 간 후 그의 스윙과 배트 스피드가 메이저급이며 밤 늦게까지 노력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정정기사를 썼으나 SI의 편집자들이 이걸 킬했다고 한다.[79]

또한 리그 최하위권이던 타율 .202에 묻히는 부분인데 그는 팀 내 3위에 해당하는 51타점과 리그 전체 5위에 해당하는 30도루도 기록했다. 물론 18도루자를 기록한 부분을 생각하면 훌륭한 성적은 아니다. 성공률이 62.5%인데, 세이버매트릭스에서는 도루 성공률 76%를 넘기지 못하면 팀에 마이너스라고 평가한다.[80] 이 항목에서 언급되다시피 시즌 전체의 모습을 종합하면 별로 좋은 성적은 아니다.

사실 시즌 전체로 보면 .202에 불과한 타율이지만, 조던은 꾸준히 실력이 늘어 마지막 달에는 2할6푼 타율, 특히 마지막 40타석에서 12안타를 기록(3할)했으며, 더블A보다 살짝 높은 가을 리그에서도 .251의 타율을 기록했다. 당시 가을 리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리그 수준에 대해 오해들이 있지만 당시 기사들을 보면 # 애리조나 가을 리그에선 더블A~트리플A급 선수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1994년에 트리플A에서 "올해의 마이너 리그 선수 상"을 받은 데릭 지터나 훗날 메이저 리그에서 슈퍼스타가 되는 노마 가르시아파라, 제이슨 지암비 같은 톱급 유망주들도 있었다. 특히 가르시아파라는 조던과 같은 팀인 스콧스데일 스코피언스 소속이었으며, 또한 지터는 메이저로 콜업되기 직전이었다.

이 가을 리그에서 활약이 특히나 중요한 것이, 만약에 조던이 후반 40타석에서, 그것도 시즌 내내 봐온 더블A에서 3할 기록한 것만 본다면 "잘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다"고 치워버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 더블A와 트리플A급 선수들이 주로 있는 가을 리그에서 평균 2할5푼의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은 이게 플루크 수준이 아니라 실제 실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평상시 상대하지 못한 선수들이 다수 있는 리그라면 상대 선수들에 익숙해져서 낸 성적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애리조나 가을 리그는 보통 30경기 정도 치르기 때문에 30경기 동안 보여준 모습을 "운이 좋았다"고 폄훼하는 건 불합리하기 때문.

한 마디로 더블A보다 수준이 더 높은 가을 리그에서도 2할5푼을 기록한 것. 게다가 조던은 초반에 (투수들이 직구로 승부할 때) 13경기 연속 안타를 친 것 이후 투수들이 구종을 다양하게 던지기 시작하자 연이어 1할대의 타율을 기록했다. 실제로 5월에 1할6푼대를 기록했다가 불과 3~4달만에 2할5푼 타자가 된 것이다. 즉, 처음에는 더블A급도 아니었던 선수가 몇달만에(그것도 야구를 그만둔지 14년만에 처음 시작하면서) 더블A에서 제법 쓸만한 선수가 된 것. 한마디로 시즌 초반엔 1할급 타자가 시즌 후반엔 3할급 타자가 된 것이다. 위 기사에서도 나오지만 조던이 애리조나 가을 리그 참여 당시 리그 전체적으로 조던이 다음 시즌을 트리플A에서 시작할 것이란 예상이 돌았다. 당시 이 예상이 적힌 기사는 시카고 최대 언론매체인 시카고 트리뷴에서 나왔으며, 화이트삭스 매니저인 론 슐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나온 보도이다.[81]

정리해보면 조던의 1994시즌 성적은 조던이란 이름을 떼놓고 보면 형편없는 것이 맞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조던은 시즌 내내 저 성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장했다는 것. 한마디로 시즌 초반의 조던과 시즌 후반의 조던은 전혀 다른 선수였다. 시즌 초의 그는 메이저는 커녕 마이너에서도 버티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시즌 후반의 조던은 트리플A 승격을 앞두고 있는 선수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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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 기록
연도 소속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도루자 4사구 삼진 에러 장타율 출루율
1994 버밍햄 배런스 127 436 .202 88 17 1 3 51 46 30 18 55 114 11 .266 .289
AA 통산
(1시즌)
127 436 .202 88 17 1 3 51 46 30 18 55 114 11 .266 .289

이러한 측면에서 이때까지만 해도 다소 희망적인 분위기로 다음 시즌을 기대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터졌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파업은 232일이나 지속됐으며 90년만에 월드 시리즈조차 치르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사태로 치닫고 만다. 결국 1995년 3월 5일 조던은 화이트삭스를 떠났고, 1년 26일만에 야구를 그만두게 된다.

이때 조던은 단순한 파업의 피해자가 아니라 일종의 캐스팅 보트를 쥔 선수이기도 했는데, 1995시즌 개막 전에 연방법원으로부터 승인된 대체선수(replacement player)의 존재 때문이었다. MLB 선수 노조가 시즌 참가를 거부하자 리그는 마이너 리그 및 다른 리그 선수들을 동원해 스프링캠프와 정규 시즌을 치르려고 했고, 당연히 노조는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실제로 백명이 넘는 마이너 선수들이 대체선수로 콜업되었다. # 그리고 마이너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선수는 마이클 조던이었다. 조던은 메이저 경험이 없는 노땅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Harris Poll의 "가장 좋아하는 운동선수" 항목에서 전 종목을 통틀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고 웬만한 메이저 리그 스타들은 씹어먹는 티켓 파워를 자랑했다. 이 때문에 조던은 대체선수 1순위였다.

조던은 선수노조 편에 서겠다고 말하고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스프링 캠프를 이탈해버린다.[82] 조던은 단순한 마이너 리거 중 하나로 여겨지길 바랬지만,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운동선수였던 만큼 이는 불가능했다. 선수노조와 구단주 양측에서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이 마당에 조던이 원래 목표했던 것처럼 순수히 자기 실력으로 얻어낸 메이저 리그 진출은 불가능해졌다.[83]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대체선수로서 메이저 리그에서 뛰며 구단주들의 광고판으로 활용되거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파업에 동참하며 신체적 전성기를 하릴없이 보내거나. 결국 조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것.

하지만 그와 별도로 그가 활약하던 시절 마이너 리그는 조던을 보고자 관중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한다. 더불어 그가 야구선수로 활약하면서 받은 연봉은 겨우 1만 달러였다고. 하지만 그는 배런스 구단에 당시 최고급 버스까지 사다주었는데 이 버스에는 바텐더 석까지 달려있고 TV만 6대나 달려있었다. 이걸 56만 달러를 주고 사온 다음 팀에 아예 기부해버렸다. 자기 전용 비행기도 쓸 수 없고 팀원들과 함께 낡고 좁은 버스로 이동해야 하니까 빡친 조던이 아예 자기 돈으로 버스 두 대를 샀다. 한 대는 앞에서 얘기한대로 선수용이고 나머지 한 대는 바와 음식 조리실까지 갖춰진 자기 전용(...). 나중에 자기 전용버스도 야구를 그만둘 때 구단에 기부했고, 그 덕분에 한동안 배런스는 모든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꿈의 구단이었다(...).

부가설명을 하자면 NBA나 MLB 선수들은 전부 구단 전용기 혹은 팀이 전세낸 비행기를 이용하고, 이 전세/전용기는 전좌석이 일등석 자리에 TV, 코치진이 회의할 수 있는 공간이나 선수들이 카드 게임 등 사교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기종에 따라 뷔페식 식당이 있는 경우도 있다. 1998년 당시 시카고 불스의 비행기 NBA 선수들이 버스를 이용하는 건 공항에 도착해서 호텔까지 가거나(이 때도 버스가 활주로까지 들어온다) 호텔에서 경기장까지 가는 짧은 거리 뿐이고, 이 버스도 당연히 거구인 NBA 선수들의 덩치에 맞게 커서 226cm 거구인 숀 브래들리도 편하게 일반좌석에 앉아있을 수 있을 정도. 그런데 마이너 리그에서는 정말 장거리 여행이 아니면 거의 무조건 버스로 이동한다. 그것도 NBA/MLB처럼 고급버스도 아닌 일반 버스... 저런 비행기만 이용하던 선수가 갑자기 장거리 버스에 적응하려니 힘들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미국 스포츠에서 메이저와 마이너의 대접 차이는 불합리하다 싶을 정도로 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전 미국의 언론사들에 한통의 팩스가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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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조던의 “I‘m back” 팩스 화면[84]
전세계의 농구팬들은 열광했으며, 그렇게 조던은 농구판을 떠난지 정확히 18개월만에 농구 코트에 복귀했다. 단 아버지 제임스 조던이 마지막으로 본 아들의 유니폼 등번호는 ’23번‘이었다며, 조던은 이를 기리기 위해 더이상 23번 유니폼을 입지 않기로 결심했다면서 45번을 달았지만...

그리고 1995년 3월 19일, 조던은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원정경기에 출전했다. 비록 복귀전에서 조던은 19점(FG 7/28, 25.0%)으로 부진했지만, 복귀 후 다섯 번째 경기에서 55점을 폭발시키며 팀 승리를 주도, '농구황제'의 부활을 알렸다. 그래도 그간의 연습 부족과 팀원들과 손발이 잘 맞지 않아[85] 결국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올랜도에게 패배한다. 상대 선수가 조롱조로 "23번이 더 나았어"라고 말하자 리그 규정을 어기고 23번 유니폼을 입고 나오기까지 했다. 45번 유니폼을 무진장 찍어내었던 리그에서는 재고를 떠안는 사태를 막기 위해[86] 매 경기마다 천만원대의 벌금을 물렸지만 조던은 꿋꿋이 그걸 입고 나왔다. 하긴 뭐 돈이 모자랄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도 떡실신당했다. 닉 앤더슨에게 마지막에 중요한 스틸을 당했고, 현역 때처럼 마지막 슈팅 찬스를 맡겼지만 손발이 맞지 않아 날려버렸다.

그러나 동료들과 손발이 안 맞고, 골밑이 휑해진[87] 상황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다. 당시 불스는 조던 복귀 전까지 34승 31패(52%)로 지지부진하고 있었으나, 조던의 합류 이후 13승 4패 (76%)로 쾌속행진하며 동부 컨퍼런스 5위까지 오른다. 특히 후반부 갈수록 조던이 감을 잡아가며 6연승만 두 차례 거두고, 동부 컨퍼런스의 강호들이던 뉴욕 닉스와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모두 잡는 쾌거까지 올린다. 이 와중에 조던은 닉스를 상대로 올린 55점, 그리고 애틀란타 호크스를 상대로 한 게임 위닝 버져비터까지 터뜨린다.

5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안착한 불스의 상대는 떠오르는 젊은 팀 샬럿 호네츠. 그러나 불스는 시드 이상의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고, 1차전을 따내며 샬럿 원정을 1승 1패로 마친 불스는 3승 1패로 호네츠를 정리한다. 조던의 기록은 32.3점 6.5리바운드 5.8어시스트에 야투율 49.7%.

2라운드에서 맞붙은 상대는 동부 컨퍼런스 1위인 올랜도 매직이었는데, 사실 당시 조던은 31점 6.5리바운드 3.7어시스트에 야투율 47.7%로 제 역할을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불스는 원정에서 열린 1차전 종료 직전까지 1점차로 오히려 올랜도를 리드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던은 늘 하던대려 경기 막판에 스스로 공을 몰고 하프라인을 넘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공백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인지 감이 떨어진 그는 뒤쪽에서 접근하던 닉 앤더슨(올-디펜시브 팀 이력도 없는 평범한 수비수였다)을 못 보고 스틸을 허용했으며, 이를 페니 하더웨이가 재빨리 잡아 하필 전 불스동료 호레이스 그랜트에게 패스, 그랜트가 덩크 슛을 찍으며 역전당한다. 그럼에도 아직 역전의 기회는 있었지만 조던은 자신감을 잃었는지[88] 갑자기 피펜에게 패스했고, 당연히 조던이 던질 줄 알고 리바운드 참여를 위해 골 밑으로 쇄도하던 피펜이 이를 놓치면서 허무하게 경기가 끝난다. 아무리 조던이라도 18개월의 공백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난 경기.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스는 2차전과 4차전을 승리하며 시리즈를 6차전까지 몰고 갔는데, 상술된 대로 전력이 열세였으며, 주전급 골밑요원조차 한 명도 없었다는것과 상대팀에 올스타급 파워 포워드와 샤킬 오닐이 있었단 걸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객관적 전력의 열세는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 불스가 보여준 저력을 생각하면 1차전 승리 시 업셋도 꿈은 아니었지만 절대적 에이스의 실수는 컸다.

7.1.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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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은퇴 전해에 조던은 고액의 도박 스캔들에 연루되었고, 또 마피아들이 피닉스 선즈에 돈을 걸었다는 루머도 있었다. 이런 점들이 엮여 그의 아버지가 분노한 마피아에게 보복살해 당했다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다만 이것은 리그 최고의 선수가 최전성기에 갑자기 은퇴하는 너무나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때문에 떠도는 음모론에 가깝다. 현실적으로 보면 조던 아버지의 살해 사건은 범인들도 명확히 드러났고 이들은 모두 형사처벌을 받을 정도로 구성이 명확한 사건이었다.[89] 결정적으로 조던이 만약 협박 때문에 은퇴한 것이었다면 이들이 조던이 은퇴 후 복귀하는 것을 묵인했을까? 애초에 이런 협박론은 찌라시에서 가십성으로 언급됐을 뿐이지 실질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 그냥 헛소문이다.

실제로, 조던이 첫 은퇴를 선언할 당시 농구계, 아니 전 세계의 반응은 위의 잡지 표지와 같았다. "....왜??" 당시 조던은 NBA에서 딱 9년을 뛰었을 뿐이었다. 비유하자면 2017-18 시즌의 스테판 커리나 2012-13 시즌에 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며 MVP/우승/파이널 MVP까지 거머쥔 르브론 제임스가 갑자기 은퇴한다고 생각해보자. 게다가 조던은 이미 "역대 최고의 선수"론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평가가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 정도였다. 한국 팬덤에서는 실력 외에 업적을 두고 선수를 평가하는 성향이 있어 아무리 뛰어나도 커리어가 낮으면 낮게 평가받지만, 미국은 해당 선수가 얼마나 뛰어나고 리그 내에서 지배력을 발휘하느냐를 두고 평가하기 때문에 겨우 9년 뛴 조던이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게다가 빌 러셀 이후 최초로 3연패를 달성했는데, 빌 러셀의 경우 개인으로선 체임벌린에 밀리지만 "팀의 힘"으로 우승을 거뒀다는 평을 듣는 반면에 조던은 개인으로서도 팀으로도 완벽히 최고였기에 "영웅"에 환장하는 미국인들이 보기엔 그야말로 최고였던 것. 물론 이후 복귀하면서 업적 면에서도 조던이 역대 최고로 인정받기 부족함이 없는 선수로 거듭났다.

또한 여전히 낮은 연봉과 별개로 천문학적인 광고수익으로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던 시점. 일과 돈, 명예 모두 거머쥔 상태에서 난데없이 은퇴하니 당황스러운 것. 그러나 뒤집어 보면 이렇게 이미 절정에 있었기에 더 뛸 동기를 찾기 어렵기도 했다.[90] 이미 역대 최고선수 평가를 찍은 시점에 MVP를 타봤자, 우승해봤자 본전일 뿐이었다. 게다가 당시 조던은 너무나 엄청난 인기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고, 그의 말 하나하나가 기사화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안 그래도 지긋지긋해 때려칠까 싶던 참에 존경하고 사랑하던 아버지까지 사망하니 결정타가 된 것.

당시 조던은 도를 지나친 미디어의 광란에 가까운 관심, 자신에 대해 높아지는 기대감, 이미 리그 최고의 자리에서 몇년간 지난 매너리즘에 지쳐 아버지 사망 전부터 필 잭슨과 은퇴에 대해 논할 정도였다.

90-91시즌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샘 스미스의 Jordan Rules에느 91시즌 당시 조던이 이미 은퇴를 고민하고 있다고 언급된다. 당시 그는 "다들 나를 이용하려 든다"면서 NBA에 질렸다고 했는데, 첫 우승을 하고 1960년대 셀틱스 이후 아무도 못한 3연패를 하면서 도전할게 생겼지만, 더 이상의 도전거리가 없게 되자 미련 없이 은퇴한 것. 조던은 잭슨에게 "내가 뭐에 도전할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라고 했으나 그도, 잭슨도 생각해내지 못했다고...그러나 은퇴한 이후 복귀 후 우승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다. 또한 그가 복귀계획이 없다는 게 명확한 점이 불스는 당시로선 거액을 들여 슈팅 가드 론 하퍼를 영입하고, 피펜을 매물로 숀 켐프를 영입하려고 했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BJ암스트롱-하퍼-토니 쿠코치-숀 켐프-윌 퍼듀 라인업으로 조던이 복귀시 첫 올스타에 오르고 전성기를 달리는 암스트롱, 거금을 들여 영입한 하퍼 중 하나를 벤치로 보내야 한다. 하퍼가 1996년부터 포인트 가드로 뛰어서 장신 포인트 가드란 인식이 있지만 그는 엄연히 슈팅 가드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자신의 멘토인 아버지[91]가 사망하자 충동적으로 은퇴해버린 것으로 한국팬들은 알았으나 최근 라스트 댄스에서 1992년도 당시부터 아버지와 함께 상의하며 진지하게 은퇴를 고려, 쓰리핏 달성시 미련없이 농구를 그만두고 야구에 도전할 계획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한 충동적인 은퇴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계획했던 미래 목표였던 셈.

사실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마피아 연루설은 위에 언급했다시피 애초에 말이 되지 않고, 서양에서는 데이비드 스턴이 조던의 도박 중독 때문에 그에게 비밀리에 징계를 내렸다는 설이 널리 퍼졌는데 이것도 라스트댄스에서 언급됐다시피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작중 조던의 전기 작가 입으로 언급되었지만 스턴은 궁극적인 자본주의자(ultimate capitalist)인데 리그 최고의 인기스타이자 리그 최고의 인기팀을 송두리째 뽑아내 리그 전체의 가치에까지 악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한다? 게다가 조던이 너무 쉽게 해서 사람들이 잊는 것인데, 그 이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정상에 있는 선수가 은퇴하고 쉬다가 복귀해서 다시 정상에 오른 케이스는 최소한 농구에서는 없었다. 심지어 조던은 그냥 쉰 것도 아니고 야구를 했는데, 조던의 트레이너도 지적했지만 야구는 농구와 전혀 다른 근육을 사용하기 때문에 농구에 적합하게 몸을 만든 조던이 야구용으로 몸을 만들고, 다시 복귀할 때 농구용으로 몸을 만드는 걸 해야된다. 그가 돌아올 예정이었으면 다른 스포츠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가장 피해야 할 것 중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작가에 의해 지적된 사항이지만 그렇게 큰 건에 대해 30년 가깝게 아무 증거도 안 남을 정도로 완벽하게 숨기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애초에 NBA는 거대한 리그이지만, NBA 사무국은 그리 크거나 힘이 강한 조직이 아니다. NBA에서 가장 규모와 영향력이 큰 것은 돈자루를 쥐고 있는 구단주들이며, NBA는 말 그대로 구단들의 연맹(association)으로 리그를 꾸려나가는데, 누군가 리그 꾸리는 걸 담당해야 되니 그걸 조직하는 역할을 하는 게 구단들이 고용한 사무국이다.[92][93]

8. 두 번째 3연패와 두 번째 은퇴

8.1. 1995-9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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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 후 치른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올랜도에 패배를 당한 이후 와신상담한 조던은 신인 시절보다 더 빡센 트레이닝을 거쳤다.[94] 당시 연습에 대해 "전쟁이었다"는 후문이 전해질 정도. 美 농구협회에 공식 등록한 등번호가 45번이라, 조던은 시즌 중반까지 45번을 달고 뛰었다. 시즌 중반에 들어서자, 시카고 불스 구단은 혹독한 훈련을 견딘 조던의 기량이 전성기 시절과 다름없다는 걸 확신하고, 시즌 종료 및 플레이오프 시즌까지 O억원 단위의 벌금 납부를 감수하며, 다시 예전 등번호(23번)를 조던에게 돌려준다.

95-96 시즌, 팀은 FA로 이적한 호레이스 그랜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당시 감독과의 불화로 팀에서 겉돌고 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데니스 로드먼을 영입한다. 당시만 해도 로드먼을 잘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걱정과 주전 라인업이 너무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냐 하는 우려가 많았지만, 이 해 이들은 72승 10패라는 당시 NBA 역대 최고 승수를 기록[95]하였다. 조던이 득점왕, 로드먼이 리바운드왕에 토니 쿠코치가 식스맨상을 수상했고,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조던, 피펜, 로드먼 세 명이나 올라가기도 했다.

이 해 파이널에서 만난 것은 숀 켐프게리 페이튼이 이끌던 시애틀 슈퍼소닉스였는데, 당시 조던은 등 부상을 입어 제 컨디션이 아니었으며 평균 득점도 가장 낮았다.[96] 그럼에도 3연승 이후 두 경기 내주고 다시 시카고로 돌아와 우승한다. 조던이 우승을 결정지었던 파이널 6차전은 아버지의 날에 펼쳐졌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공을 껴안고 코트에 쓰러져 흐느끼는 조던의 모습은 그의 하이라이트 중 빠지지 않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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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날”
여담이지만 이때 함께 공을 껴안고 있는 랜디 브라운이 함께 공을 꽤 오래 잡고 있었는데,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공을 놔줬다. 자세히 보면 베테랑 존 샐리가 빨리 비키라고 브라운의 등을 계속 치는 걸 볼 수 있다. 하도 어이없는 행동이라 왜 브라운이 이런 바보짓을 했는지 미국에서도 수수께끼였는데, 2020년 5월에 랜디 브라운이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그 사연을 밝혔다.

# 브라운 왈,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거지만 마이클이 절 받아줬고 제게 '첫 우승은 시카고, 고향에서 시켜줄게'라고 했어요." 당시 무명의 가드였던 브라운은 비록 기량은 형편없었지만 탁월한 운동능력으로 작고 재빠른 가드를 막는다는 나름 중요한 했다. 원문에서 take under one's wings라고 하면 마치 제자처럼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가르쳐줬다는 소리이다. "그(조던)은 제가 비록 그처럼 재능은 없지만 그만큼 승부욕이 강하다는 사실을 맘에 들어했어요. 그래서 제가 파이널의 게임볼을 서로 잡고 있었던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쟁심을 불태우는 거였죠. 결국 제가 정신을 차리고 경기가 열린 날이 아버지의 날이라는 거, 그리고 마이클이 그 순간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종합하자면 브라운은 6차전 경기일이 아버지의 날이라는 걸 몰랐고 경기가 종료되고 마이클이 게임볼을 부여잡자 게임볼을 차지하려는 것인 줄 알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승부욕을 불태우며 공을 뺏으려고 장난으로 덤벼든 것이다. 실제로 옆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조던은 감정에 북받혀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데 브라운은 웃고 있다. 조던이 일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에 감정이 폭발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오열하는데 후배가 상황 파악 못 하고 눈치없이 장난을 건 셈이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고 비켰으니 망정이지 끝까지 안 비키거나 그 이상의 사고를 쳤다면 보싱와 이상의 진상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보싱와의 빅이어 사건도 프랜차이즈의 역사에 남을 순간을 망친 거지만 브라운은 프랜차이즈 역사를 망친 것도 모자라 마이클 조던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를 망칠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던은 모든 결정을 아버지와 함께 하고 어디든 함께 다닐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1차 은퇴 당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제 마지막 경기를 보셨다는 겁니다"라고 할 정도로. 그만큼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야구하면서 극복하고, 결국 돌아와 새로운 도전과제(복귀해 우승)에 성공했는데 하필 그걸 아버지의 날에 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었고, 이 때문에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를 보면 라커룸에서 조던이 쓰러져 정신 못 차리고 오열하는 걸 들을 수 있다. 관중들이 MVP 챈트를 하는 가운데 조던은 울먹이며 "아버지께서 보고 계실 거다. (이 승리를) 아버지께 바친다(I know he's watching. This is for dad)"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8.2. 1996-97 시즌

조던은 96-97시즌을 앞두고 불스와 1년 3천만달러에 계약하며 한 시즌 연봉으로는 역대 최고액 기록을 세운다. 이건 불스의 삽질 탓으로, 시카고 프런트의 뜨뜻미지근한 태도에 빡친 조던과 에이전트 포크스는 당시 그에게 2500만달러를 오퍼한 뉴욕 닉스를 거론하며 한 시간 안에 닉스보다 좋은 계약을 안 하면 뉴욕과 계약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이때 만약 뉴욕으로 갔다면 절친 패트릭 유잉과 같이 뛰었을텐데, 당시 뉴욕의 전력과 올-NBA 세컨드 팀에 오른 유잉의 실력, 이해부터 로드맨이 본격적으로 노화가 심해졌다는 것[97]을 생각하면 불스에서보다 닉스에서 더 무서웠을 가능성이 높다.[98]

1996-97 시즌에도 69승 13패라는 고승률을 거두며[99] 1997 파이널에 진출, 칼 말론존 스탁턴이 이끄는 유타 재즈를 상대하였다.

이때 MVP투표에서 근소한 차이(63표vs52표)로 잠깐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69승팀의 에이스이자 리그 최고의 선수였음에도 MVP를 타지 못했기 때문. 조던이 뛰어났지만 전 시즌에 비해 개인기록과 팀성적에서 소폭 하락했고, 당시 유타를 역대최고인 64승으로 이끈 말론이 한 번쯤 탈 때가 되었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실제로 언론인들로 이뤄진 MVP 투표단은 해당 선수의 실력 뿐 아니라 성과, 전년도 대비 성적을 크게 보며, 이 때문에 3연속 MVP를 수상하기는 굉장히 어렵다.(1985-86 시즌 래리 버드가 마지막)[100] 당시 투표는 오직 둘만의 레이스였는데 실제로 당시 둘을 제외하고 1위표를 받은 선수는 아무도 없었으며, 1위자리에 둘 중 하나를 써넣지 않은 투표단 대부분이 2위 자리엔 둘 중 하나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실제 점수는 986vs957로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원래 1위표 득표수만 공개되지만, MVP투표는 1위부터 10/7/5/3/1점을 주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추산해보면 말론은 1위표 63표에 나머지 투표단 52명 중 50명으로부터 2위표(350점),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3위표를 줬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또한 조던을 1위로 뽑지 않은 투표단은 63명인데 이 중 62명에게 2위표를 받았다고 가정하면 남는 점수는 3점이 된다. 즉, 조던은 62명에게 2위표를 받고 나머지 한 명은 조던에게 4위표를 줬다고 추정할 수 있다.[101]

여담이지만 MVP투표단은 리그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이기 때문에 아무 기자나 투표권을 얻는것도 아니고 미국의 수많은 스포츠 언론인 중에서 수십년의 경험과 그에 맞는 전문성, 신뢰도가 있는 사람들만이 투표권을 얻는다.[102] 그런데 이 권위자들이 가끔 가다 이상한 투표를 하는 경우가 있다. 2004-05시즌 당시 투표단 중 두 명은 커리어 통틀어 단 한 번의 올스타 이력도 없는 PJ브라운과 마커스 캠비에게 5위표 하나씩을 선사했으며, 00-01시즌 당시 39세가 가까워 경기가 29분 밖에 못 뛰면서 11.5점 8.7어시스트를 기록한 존 스탁턴도 5위표 하나를 받았다. 99-00시즌 당시 샤킬 오닐이 만장일치 MVP가 못 된 이유가 "팀 내에서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이유로 1위 자리에 오닐이 아닌 앨런 아이버슨 이름을 써넣은 웬 기자 때문이란 건 유명한 얘기. 97시즌의 예로 들면 누군가는 53경기 밖에 출정하지 못한 찰스 바클리에게 5위표 한장을, 좋은 선수긴 했지만 올스타에도 못 뽑힌 앤서니 메이슨, 마찬가지로 올스타가 아니었던 루키 아이버슨도 5위표 한장을 받았다.[103] 물론 스포츠에서 완전히 객관적인 선수평가란 있을 수 없으며 평가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NBA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을 수여할 때는 그나마 가장 납득할 만한 결과를 내야하며, 이 때문에 투표단의 기준을 높게 잡아 가장 권위있고, 전문성이 높은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객관성을 유지해야 할 투표단이, 아무리봐도 개인취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기준으로 투표를 하는 것에 대해선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 밖에 없다. 97시즌 마이클 조던의 활약상이 리그에서 4번째였다거나, 99-00시즌 아이버슨이 오닐보다 더 잘했다고 하는 건 전문적이거나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보기 힘들다.

불스 홈에서 열린 1차전부터 양 팀은 박빙의 접전을 벌였는데, 4쿼터 종료 직전 82-82 동점상황에서 칼 말론이 중요한 자유투를 얻게된다. 이때 칼 말론의 절친한 친구 스카티 피펜이 슬며시 다가와 말론의 별명이 우편배달부이고 경기가 열리는 날이 일요일이라는 점을 이용해 "우편배달부는 일요일에 배달하지 않는다고~(The mailman doesn't deliver on Sundays)"라는 트래시 토크를 날렸고, 거기에 흔들렸는지 말론은 자유투 2구를 모두 놓치며 동점 상황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불스의 작전타임 후 마지막 공격에서 조던은 간단히 미들 점프슛 게임위닝 버저비터를 성공시키며 팀에게 승리를 안긴다. 버저비터 성공 직후 당연하다는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오른주먹을 불끈 쥐는 장면은 많이 회자되고 있다. 2023년 현재 기준으로 NBA 파이널에서 게임 위닝 버저비터가 나온 것은 이 경기가 마지막이다. 이후 불스가 2차전 홈 경기마저 잡으며 2-0으로 앞서가지만 재즈 홈으로 장소를 옮긴 3, 4차전에서 재즈가 반격에 성공하며 시리즈 스코어 2-2로 균형이 맞춰졌다. 역시 재즈 홈에서 열리는 5차전이 시리즈의 분수령이 되는 상황.

이 해 파이널 5차전은 일명 Flu Game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조던이 유니폼도 제대로 입지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심한 독감에 걸린 채로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훗날 조던의 트레이너였던 팀 그로버에 따르면 감기가 아니고 식중독이었다고 한다. 유타 원정을 떠나 유타 원정때 늘 이용하던 Park City라는 소도시의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밤에 배가 고파서 룸서비스를 시켰으나 9시가 지난 시각이라 룸서비스는 종료된 후였다. 그래서 야식으로 피자를 시켰는데 피자 한판 배달하는데 배달부가 다섯 명이나 온 것도 이상하고 맛도 이상해서 버리자고 했는데 마사장님은 처묵처묵...그로버는 2020년에도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서 그렇게 빨리 증상이 오는 독감은 없고 식중독이 확실하다고 말했으나 'food poisoning game' 보다는 'flu game'이 어감상 멋있긴 하다고 말하기도. 다큐멘터리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 9화에 해당 내용이 나온다.

여담이지만 숙취라고 보도한 언론사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스카티 피펜은 이후 인터뷰에서 숙취설에 대해 일축한 바 있다.

이것도 여담이지만 2017년 플레이오프에서 유타 재즈의 고든 헤이워드가 식중독으로 경기에 뛰지 못하면서 조던의 대단함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사실 헤이워드가 정상인게, 식중독에 한 번 걸리면 농구는 커녕 제대로 걷기도 힘들다. 특히 조던처럼 가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고열까지 있는 경우는 더더욱...이걸 안고 그 빡센 NBA 경기를 소화했다는 건 부상투혼 수준이 아니라 상식 밖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록은 38득점 7리바운드 6어시스트 3스틸 1블록에 동점 상황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3점 슛까지 성공시켰다. 아픈 인간이 웬만한 농구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에서도 하기 힘든 기록을 냈다. 더욱 더 대단한 것은 기사나 경기 전 영상에는 조던의 컨디션이 분명 개판인 게 눈에 보였고, 플레이 중 쉬는 시간에는 분명 죽을 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때 플레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몸이 확실히 무거워 보인다. 공격할 때도 날카로운 돌파보다는 중, 장거리슛에 의존하는 성향도 있었다. 실제로 조던의 평상시 파이널 평균인 33.6점에 비하면 이 경기 기록은 그냥 평타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고 필드골 성공률도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조던은 투혼을 불사르며 경기를 승리로 이끈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만약 다른 선수가 파이널에 38-7-6에 위닝샷을 성공했다면 역대급 MVP 활약이라고 칭송받았을 정도의 기록인데, 이것을 명백히 아파 보이는 선수가 하니 다들 감동한 것. 어찌되었건 당시 조던은 경기 시작 전부터 땀을 비오듯 흘리고 벤치에 앉기만 하면 수건을 덮고 정신을 못 차리는 등 최악의 컨디션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파일:MJ_FluGame.jpg
“Flu Game”

결국 5차전 승리로 우세를 잡은 조던과 불스가 6차전까지 따내며 우승반지를 차지한다. 6차전 마지막 동점상황에서 조던은 스티브 커에게 "나에게 더블 팀을 들어오면 패스할 테니 준비해라"라고 말하고, 말한 그대로 경기종료 8초 전 커를 막고 있던 스탁턴이 조던에게 더블팀을 들어오자 조던이 커에게 패스, 커가 자유투라인에서 점프 슛을 성공시킨다. 둘의 사이가 상기한 대로 썩 좋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의미심장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104]

8.3. 1997-98 시즌

마지막이 된 97-98 시즌, 팀 프런트와 불화에 시달리던 피펜이 연봉에 대한 불만도 더해져서 오프 시즌 중이 아닌, 시즌 개막 직전에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면서[105] 시즌 절반 가까이(38경기)를 결장했고, 이에 따라 조던의 공격비중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또한 데니스 로드맨이 전 시즌 플레이오프로부터 계속되는 부진과 노화문제로 신뢰를 잃으며 첫 한달간 16경기 중 6경기를 벤치에서 출장하며 팀이 위기를 겪기도 했다.[106] 이 때문에 불스는 11월 한달 간 9승 7패에 그치며 90-91시즌 이후 (조던이 뛴 시즌 중에) 최악의 스타트를 끊어야 했다. 불스는 원래 우승권 팀 중 공격옵션이 제한적인 팀이었는데, 트라이앵글 오펜스가 막히면 마이클 조던의 1대1 공격에 의존하는 팀이었기 때문에 2옵션이자 메인 볼핸들러인 피펜이 빠지자 수비가 조던에게 집중되었던 것. 스티브 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조던은 팀 부진에 분노하며 '복귀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답답해하는 등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시즌의 조던의 득점이 28.7점으로 10번 득점왕 시즌 중 가장 낮았고 야투율이 46.5%로 떨어진 것 때문에 노화가 심했다고 인식하기도 하는데, 실제 그의 경기력은 97시즌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여전히 확고부동한 리그 최고의 선수였다.[107] 초반에 피펜이 빠져서 상대의 수비집중도가 높아지고 수비부담이 늘어난 것 때문에 야투율이 하락한 것 뿐이다. 실제로 피펜이 복귀하기 전까지 야투율 44.9%, 복귀 이후론 47.8%로 야투율이 올라갔다. 또한 출장시간도 37.9분에서 38.8분으로 늘었다. 96-97시즌 29.6점/48.6%에 비하면 기록이 다소 하락하긴 했지만 노화를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고, 플레이오프에선 97시즌에 기록한 31.1점/45.6%에서 32.4점/46.2%로 오히려 기록이 올라갔다. 다만 나머지 기록은 7.9어시스트 4.8리바운드 1.6스틸 0.6블록에서 5.1리바운드 3.5어시스트 1.5스틸 0.6블록으로 떨어졌고, 8할대를 상수로 유지하던 자유투도 이 시즌에는 7할대로 하락하긴 했다. 즉, 나이에 따른 소폭의 기량 저하는 있어도 예년과 얼추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피펜이 결장하면서 부담이 쏠려 기록이 떨어졌다고 정리할 수 있다.
  • 실제로 97-98 시즌 피펜의 결장 당시 조던의 야투율이 크게 하락했으며, 특히 3점 슛 성공률은 23.8%로 폭락했다. 물론 짧아진 3점 라인이 이 시즌에 원상복구 되었으니 95-96이나 96-97에 비해 3점 지표가 떨어지는 것 자체는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최초로 경기당 3점 슛 1개 성공을 넘긴 89-90시즌부터 92-93시즌까지 평균 0.7개 성공, 34.3%를 기록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극단적으로 떨어진 것.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3점을 많이 던지지 않았던 불스의 공격시스템 때문이기도 한데, 간단히 말해 불스는 3점을 위한 스크린 세팅은 거의 활용하지 않았으며 조던의 3점은 대부분 수비를 달고 던지거나 오픈 상태에서 킥아웃을 받아 던지는 스팟 업 점퍼였다. 그런데 그나마 수비를 몰아주던 피펜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트라이앵글 오펜스로는 조던에게 오픈 3점 기회가 거의 나지 않는다.[108]
  • 피펜의 공격력이 늘어나면서 조던이 3점 슛을 하나의 옵션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특급 스코어러는 아닐지언정 나름대로 먹어주는 득점원으로 성장한 피펜 덕분에 조던도 어느 정도는 오픈찬스를 누리며 3점을 경기당 1개씩은 시도해 나쁘지 않은 성공률을 기록했고, 은퇴 번복 후에는 짧아진 3점 라인 덕분에 두 시즌 동안 경기당 1.3개 성공, 40.4%를 기록했다. 그러나 피펜이 장기간 결장하고, 복귀 후에도 오프시즌 발목수술과 고질적인 등부상으로 인해 수비를 득점원으로서의 위력이 확 줄어들었기에 조던의 오픈 3점 옵션이 사실상 봉인되다시피 하고 야투율 역시 하락하게 된 것이다.[109]

그러나 주전라인업에 복귀한 로드맨이 (재계약 문제로 인한 불만을 억누르고) 성실히 뛰어주고, 피펜이 빠진 라인업에 선수들이 적응하면서 12월에는 11승 3패, 8연승을 연달아 달리는 등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최악의 스타트에도 불구하고 올스타 주말 전까지 동부 컨퍼런스 1위이던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턱밑까지 추격하는 등 성적을 회복했고, 이후 후반부에 페이스가 떨어진 인디애나를 제치고 62승으로 3년 연속 동부 컨퍼런스 1위를 수성하는데 성공했다. 이 와중에 자신의 12번째 올스타전에 출전한 조던은 당시 올스타 통산 스틸 1위기록을 아이제아 토마스로부터 뺏어오며 자신의 통산 3번째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다.

그러나 성적과 별개로 불스 왕조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GM 제리 크라우스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대놓고 "필(잭슨 감독)은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다"라고 공언할 정도였으며, 조던 역시 잭슨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밝힌 상황. 시즌이 진행되고 성적이 호전됨에도 잭슨과 크라우스, 조던 간의 갈등은 봉합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이미 자신의 연봉에 수년간 불만을 표한 피펜, 오프 시즌에 재계약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다가 오프 시즌 종료 직전에야 사인한 데니스 로드맨 역시 팀 프런트를 곱게 보지 않고 있었다. 당시 불스 팀원들 간의 케미스트리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110], 프런트와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팀 자체가 유지되기 힘든 상황. 잭슨, 조던, 피펜, 로드맨, 거기에 룩 롱리스티브 커 등 주요 롤플레이어들 역시 시즌 이후 자유계약 선수가 되는터라 불스 왕조가 더 이상 유지되는 건 불가능해보였다.[111]

여차저차해서 맞이한 98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상대인 뉴져지 네츠에게 의외로 1차전 접전을 허용했지만 연장전 마지막 네츠의 공격권에서 조던이 케리 키틀즈의 공을 스틸하고 결승 덩크 슛을 성공시키며 승리했고 이후 스윕으로 2라운드에 올라가게 된다. 2라운드는 조던의 옛 동료 BJ 암스트롱이 버티는 샬럿 호네츠로, 암스트롱이 위닝샷을 터뜨리며 2차전을 뺏기지만 이후 어렵지 않게 나머지 경기들을 승리하며 불스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오른다.

상대는 인디애나 페이서스. 사실 레지 밀러는 조던의 라이벌 중 하나로 꼽히지만 이들이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러나 클러치 대마왕으로 유명한 밀러의 명성은 불스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시리즈는 특이하게 모든 경기가 홈팀의 승리로 끝났는데, 시즌 후반부 페이스를 끌어올려 인디애나로부터 뺏은 홈코트 어드밴티지가 그만큼 더 중요했다. 시리즈의 터닝포인트는 4차전, 불스가 홈에서 어렵지 않게 2승을 한 가운데 3차전은 2점차 페이서스의 승리였고, 불스는 종료를 앞두고 1점차로 앞서고 있었다. 이때 레지 밀러는 마크맨 론 하퍼를 더블스크린으로 떼어내고 커버 들어온 조던을 양팔로 강하게 밀쳐낸 후[112] 클러치 3점 슛을 성공시키며 시리즈를 원점으로 만들었다. 사실 이 플레이 이후 0.4초가 남아 불스의 역전 기회가 있었는데, 어렵사리 공을 건네받은 조던이 페이서스의 집중수비를 더블클러치로 떼어내고 던진 3점 슛이 백보드를 맞고 림을 한 바퀴 돌아 아깝게 빗나가는 바람에 패배하게 된다.[113]

6차전을 불스가 3점차로 석패한 이후 맞이한 7차전, 조던을 포함한 불스는 빈공에 시달렸고, 불스는 4쿼터 중반까지 끌려다니며 팬들이 '이제 불스왕조가 끝이 아닌가'란 생각이 강하게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야투 11개 중 7개를 넣은 토니 쿠코치, 슛감은 안 좋았지만 리바운드와 수비에서 활약하며 팀을 이끈 조던과 피펜[114], 그리고 4쿼터 중반에 천금같은 역전 3점 슛을 넣은 스티브 커 등의 활약으로 불스는 기어이 승리를 따낸다.

마이클 조던은 슛이 안 들어가자 집요하게 골밑돌파를 하며 양팀 통틀어 최다인 15개의 자유투를 얻어내면서 양팀 최다인 28점, 8어시스트를 거의 쥐어짜듯이 뽑아내고 9리바운드를 겻들여 거의 트리플 더블급 활약을 한다. 특히 수비에서 더욱 빛나는 모습을 보였는데, 평상시 잭슨 감독은 공격에서 부담이 큰 35세 노장의 체력안배를 위해 밀러 수비를 론 하퍼에게 맡겼다. 그러나 이 경기에선 조던이 수비를 번갈아가며 했고, 승부처가 된 4쿼터에선 아예 조던이 전담해 막았다. 밀러는 이 경기에서 22점을 기록했지만 조던이 막을 때는 필드골 단 하나만을 넣었고, 조던이 전담수비한 4쿼터에선 9분27초나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득점, 3점 슛 단 한개 시도/0개 성공이라는 초라한 기록을 남겼다.[115] 어쨌거나 35세의 노구를 이끌고 양팀 최다인 42분을 뛰며 (슛감은 안 좋았지만) 골밑돌파, 리바운드, 어시스트, 수비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조던은 마침내 팀을 파이널에 올려놓는다.

1998 파이널 상대는 유타 재즈였지만, 선수들의 노쇠화와 필 잭슨 감독과 제리 크라우스 GM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홈 코트 어드밴티지는 유타 재즈의 것이었다.[116] 게다가 정규 시즌에 유타 재즈 에게 모두 패했다. 평균연령이 리그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들던 불스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래리 버드 감독과 레지 밀러가 이끈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만나. 4차전에서 레지 밀러에게 역전 3점 슛을 얻어맞고 지는 등 7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올라왔다. 반면 상대였던 유타 재즈는 2라운드에서 4-1,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4-0으로 승리를 거두고 푹 쉬어 체력 충전까지 완전히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117]

결국 1차전을 연장 끝에 88-85로 패해 체력소진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가 했지만, 이후 내리 3연승을 거두며 오히려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왔다. 특히 3차전[118]은 상대의 득점을 54점에 묶었는데 이는 파이널 최소 득점 기록이다. 그러나 홈에서 우승을 차지하려는 계획이 말론의 39점 활약에 힘입어 막히고 마지막 6차전을 유타 홈에서 치르게 된다.

마지막 1998 NBA 파이널 6차전은 체력이 한계에 달할 대로 달한 데다가 게임 초반에 스카티 피펜이 등 부상을 입어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역시 조던이 경기를 캐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던은 45점을 득점했는데, 팀 전체 득점의 절반 이상일 뿐만 아니라, 두 번째 다득점자인 토니 쿠코치는 15점에 그쳤을 정도. 박스스코어만 보면 원맨팀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피펜 역시 상기한 대로 경기 초반에 덩크 슛을 하다 등을 삐끗해 평상시 강력한 수비를 보여주지 못했고, 다른 선수들은 존 스탁턴을 필두로 젊고 빠른 가드들이 포진한 유타의 수비에 고전했다. 마지막 동점상황에서 역시 클러치로 유명한 존 스탁턴에게 3점 슛을 얻어맞고 3점 뒤지고 있던 상황, 시간은 40여초 남아있었다. 조던은 작전타임 후 혼자 공을 몰고 레이업[119] - 갑작스러운 더블팀으로 칼 말론의 공을 스틸 - 당연하다는 듯이 결승 점프 슛 성공을 통해 혼자 4점을 넣는 활약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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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seconds from game 7 or championship number 6."

마지막 장면에서 크로스 오버 드리블로 수비수의 균형을 무너뜨려 따돌린 후 점프슛을 한 조던의 슛폼은 유난히 여운이 남는 장면이라고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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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t Shot

결국 조던과 불스는 두 번째 3-peat을 달성했다.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 굉장히 말이 많고,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아이제아 토마스도 "팔로 허벅지를 밀었지만 심판이 못 봤다. 조던은 저런 작은 테크닉도 부리는 선수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논란거리이다. 이 장면 이외에도 아이즐리의 3점 슛이 24초 바이얼레이션에 걸려 취소되거나, 하퍼의 24초 바이얼레이션 미지적, 피펜의 골텐딩도 오심 논란이 있다. 이에 당사자인 브라이언 러셀은 수없이 많은 질문을 받았지만, 심판은 파울을 부르지 않았고, 이제 그 일은 과거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농구 역사에 남을 위대한 플레이의 한부분으로 남을수 있어 자랑스럽다." 고 말했다.

사실 NBA에서 돌파하는 선수가 오프 핸드, 즉 공을 드리블하지 않는 손을 슬쩍 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120] 조던은 물론이고 코비, 르브론, 웨이드 등 슈퍼스타들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손장난(?)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이 하필 왜 이슈가 되느냐면 이 샷으로 인해 우승이 결정났기 때문이며 수십, 수백번이나 슬로모션으로 반복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뒤에서 보지 않고 풀샷으로 보면 조던의 손이 분명 러셀의 엉덩이에 닿았지만 러셀은 이 손에 밀려 넘어진게 아니라 조던의 돌파를 따라가다 그가 갑작스레 멈춰서자 똑같이 방향을 전환하다가 미끄러졌다. 조던이 밀어서 넘어졌다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앵클 브레이킹"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121]

무엇보다 조던이 샷을 성공시킨 직후 유타는 타임아웃을 불렀지만 러셀을 포함한 유타 선수들 누구도, 감독인 제리 슬로언도 심판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NBA선수들은 심판에 대한 항의가 일상화된 양반들이다. 오죽하면 2000년대 중반에 심판판정에 심하게 어필하면 자동으로 테크니컬 파울을 주도록 규정을 바꿨겠는가. 어떤 선수들은 항의하다가 실점하기도 하고, 특히 이처럼 타임아웃이 불린 상태에서는 급히 수비하러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벤치로 가면서 억울하다는 제스쳐와 함께 항의하는 것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착 밀쳐진(?) 당사자조차 심판에게 어필하지 않았다는 것은 본인도 자기가 미끄러진 이유가 조던 때문이라고 느끼지 않았다는 얘기다.

8.3.1. 라스트댄스

이 당시 은퇴는 첫 번째 은퇴만큼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NBA가 파업으로 치닫고 있었고, 조던과 필 잭슨의 계약이 만료됨으로 인해 공공연하게 3-peat 후의 정점에서 은퇴할 것이란 추측이 이미 산처럼 쌓여있었기 때문이다.[122] 실제로 조던은 농구에 대한 의욕과 승부욕, 상승욕을 상실한 상태였다고 한다. 3년 연속 우승 후에, 은퇴해서 다른 일 하고 왔음에도, 또 다시 3년 연속 우승을 이룬 이라면, 당연히 찾아올 더 이상 무엇을 이루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권태감에 시달렸던 것이다. 특히나, 병적일 정도로 승부욕이 강했던 그라면 권태감은 더 심했을 거라고 추측된다. 팀 내부 분위기에서도 제리 크라우스 단장과 필 잭슨의 대립이 절정에 달하는 등 '이 시즌이 우리의 마지막이다'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다. 좋은 예로 필 잭슨이 시즌을 시작하며 선수단에 나눠준 다이어리에는 Last Dance라고 적혀있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은퇴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을 표한 것과는 다르게, 두 번째 은퇴에 관해서는 팬이나 농구관계자, 스폰서 모두가 정점에서 멋지게 퇴장하는 그를 위해 박수를 보내주었고, 세계 각지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심지어 MBC에서 그의 은퇴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 방영할 정도였다면 그 분위기는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우리나라를 위해, 혹은 우리나라에서 뛴 적 한 번 없는 운동선수의 은퇴기념 다큐를 지상파에서 제작 방영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조던의 위엄. 3-peat → 은퇴 → 3-peat이라는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업적을 쌓은 그는, 더 이상의 기록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듯이 그렇게 떠났다.

다만 이때 당시 조던은 선수로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확고히 굳힌게 아니고, 시카고 불스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뉴욕 닉스로 팀을 옮기는 방안과 선수 은퇴 두가지 방안중에 고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23] 뉴욕 닉스패트릭 유잉 항목에도 있듯 조던은 근 10여년간 닉스를 가로막은 장본인이었지만 뉴욕 팬들은 97 - 98시즌 조던의 MSG 마지막 경기에서 자기 팀을 박살내고 나가는 조던에게 기립박수를 쳐줄 정도로 조던에게 굉장히 우호적인 팬들이었고 조던 본인도 브루클린 출신인데다가 패트릭 유잉과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닉스행을 고려했지만 조던이 시가를 자르다가 오른손 손가락 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으며, 무엇보다도 97 - 98시즌이 끝나고 선수 노조 파업으로 인해 다음 시즌이 어떻게 될 지 불투명해지면서 그냥 깨끗하게 은퇴를 선언했다는 것인데, 물론 조던이 명확히 밝힌 바는 없다.
  • 사실 닉스와의 루머는 좀 걸러들을 필요도 있는 게, 닉스행 루머는 2차 3연패 기간 내내 있었다. 95년 72승 시즌 중에도 시즌 종료 후 이적할 가능성이 있다며 기사화되고 한국에 보도되기도 했다.당시기사 'NBA최고의 상품성을 지닌 조던이 NBA최고 마켓인 뉴욕에서 뛰면 어떨까'라는 많은 NBA팬들을 설레게 한 상상이었으며, 2020년 현재는 좀 덜하지만 90년대~2000년대까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자유계약 선수로 풀릴때가 되면 별 계기나 건덕지가 없어도 닉스행 루머는 기본으로 깔고 갔다. 게다가 닉스가 96년 당시 조던에게 계약을 오퍼한 적도 있으니 이런 차원에서 루머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당시에도 조던이나 관계자들은 이와 관련된 멘트를 한 적도 없고, 후술되는대로 라스트 댄스 당시에도 전혀 얘기가 없었던 것을 보면 실체는 빈약한, 말 그대로 루머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닉스와의 루머와 상관없이 애초에 조던이 1차 복귀할 때부터 3시즌만 뛰고 은퇴하겠다고 밝혔고 그 약속을 그냥 지킨거라는 말도 있다. 단적으로 앞서 언급된 98시즌 MSG 원정에서 조던은 프로 초창기 이후 처음으로 데뷔 시즌의 에어 조던 1을 신고 출전했었다. 뉴욕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부분인데, 당시 미디어들과 팬들은 이걸 보고 조던이 은퇴 전 마지막 뉴욕 원정을 기념하고 뉴욕 팬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신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 데뷔 당시의 신발이라 작기도 하고, 쿠셔닝도 없어서 불편한데도 신고 경기에 출전한 것인데, 누가 봐도 작별인사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이런 퍼포먼스를 벌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스트 댄스 다큐멘터리 10화에서 마이클 조던의 자신의 정확한 의향을 보였는데, 시카고 불스가 자신을 포함한 주축멤버들과 재계약한다면 7번째 우승을 위해 1년 더 뛰고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팀의 주축 멤버를 남기기 위해서 보다 많은 계약금을 지불해야 했던 제리 라인스도프 구단주로서는 리빌딩으로 방향을 선회. 또한, 결정적으로 팀의 융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필 잭슨이 제리 크라우스와의 관계가 파탄나 계약하기 힘든 과정이 됨으로서, 조던으로써도 여러 상황상 은퇴를 결정하게 되었던 듯 하다.[124]

제리 라인스도프 구단주의 인터뷰를 본 조던은 시즌 초반부터 구단이 "필 잭슨 감독은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다 리빌딩이다"라며 쓸데없는 소리들을 했고 마지막 7번 째를 목표로 1년 짜리 계약을 제시 했으면 다들 계약하고 성공하던 실패하던 도전은 해봤을 거라고 말하며 아쉽게 회상했다. 자기는 7번째도 가능했을거 같다고.

실제 장면을 보면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라인스도프의 인터뷰를 보자마자 울컥하며 순간 말을 잇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인스도프는 "필에게 재계약 오퍼를 했지만 그가 리빌딩 팀을 맡기 싫다고 했다"고 은근히 책임회피를 했는데, 저건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헛소리기 때문. 구단은 개막 전부터 제리 크라우스의 입을 통해 "이번 시즌이 필 잭슨의 마지막 시즌이다"는 걸 수차례 언급했고 (루머나 입장 발표가 아니라 크라우스 본인이 기자들 앞에서 몇번이나 얘기한다) 심지어 크라우스는 본인 딸 결혼식에 불스를 전부 초청하면서 감독 필 잭슨만 빼고 후임 감독으로 내정한 팀 플로이드를 초대했다. 근데 저 상황에서 잭슨과 재계약하면 크라우스가 엄청난 바보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터뷰에서도 잭슨은 "크라우스의 입장 때문에 계약할수가 없었다"고 한다. 받아들이면 안 그래도 안 좋은 사이가 최악이 될테니까. 심지어 크라우스는 "82연승해도 재계약 없다"고 한 상황. 중요한 건 라인스도프는 이 모든 걸 묵인했다는 것이다. 구단주의 묵인 없이 고용인에 불과한 단장이 감독과 재계약이 없네마네 떠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라인스도프는 91년 쿠코치 영입 전 당시 시즌 중 유고슬라비아에 쿠코치를 보러갔다가 빡친 피펜이 언론 인터뷰로 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자 귀국하자마자 피펜과 면담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단장이 "감독과 재계약 없다"고 개막부터 시즌 내내 떠들고 다니는데 아무 제재가 없다? 당연히 본인의 뜻이란 소리다. 팀의 감독이 떠난다는 소식을 통해 시즌 내내 팀을 흔들다가 시즌 끝나고 재계약을 하자고 한다? 당연히 면피용 오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조던은 당시 리그 최고의 선수였는데 이 상황 때문에 은퇴했고, 라스트 댄스에서 은퇴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근데 이 상황을 만든거나 다름없는 인간이 "어 난 또 하고 싶었는데 재계약 안한다고 하더라고?"하면서 책임회피하니 열이 안 터질 수가 없다.[125]

사실 이쯤 되면 잭슨과 재계약을 하자는 소리 자체가 진심인지도 알 수 없다. 위에 나왔지만 잭슨이 남으면 조던은 무조건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불스 왕조의 주축들은 전부, 최소한 대부분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시카고 불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돈을 물 쓰듯 써서 우승을 노리는 전략은 비지니스 적으로 그리 옳은 선택은 아니고, 라인스도프는 철저한 비지니스맨이자 짠돌이이다. 피펜을 싸게 잡아둘 때야 좋았지만 피펜에게 고액연봉을 줘야하는 상황에서는 팀 전체의 연봉이 부담이 됐을 것이다. 그가 리빌딩을 노골적으로 원한 게 이것 때문. 불스는 시카고라는 마켓 때문에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흥행이 되는데, 리빌딩용 선수들이면 연봉을 적게 줘도 되기 때문이다. 라인스도프 입장에선 장사가 되는 조던 한 명만 잡고 리빌딩하는 게 좋았겠지만, 조던 입장에서 말년에 원맨팀에서 고생하는 걸 바랄리가 없다. 이걸 생각하면 원래부터 라인스도프는 왕조를 해체시킬 마음이 굳건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애초에 시즌 전부터 안 잡는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닌 상황에선 잭슨 재계약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니...

사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99년 CBA 협상의 결과로 인해 라인스도프는 1997-98 시즌보다 적은 돈으로 왕조를 유지할 수도 있었다. 당시 CBA로 선수 연차에 따라 한 선수에게 줄 수 있는 연봉의 상한선이 정해졌는데(기존 계약이 무효화되는 건 아니었다) 새롭게 계약할 수 있는 최대액수가 연 1천4백만이었다.(다만 단축시즌이라 그만큼 수입이 줄어든 건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피펜이 새로 한 계약도 천만 달러 수준이었으니, 아무리 넉넉하게 봐도 두 선수가 받아갈 돈은 98시즌 조던의 연봉보다 적다. 물론 1997 오프 시즌 당시 이걸 예측할 수 있을리 없으니 새 시즌에도 조던을 잡으려면 3천만불 넘게 써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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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가 6개~~”[126]

9. 두 번째 컴백과 세 번째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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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조던의 40세 생일을 축하하는 잡지의 표지. 여기서 40세인 선수들 중에서 존 스탁턴[127], 로저 클레멘스[128], 론 프랜시스[129], 제리 라이스[130] 역시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려한 농구인생을 정점에서 마무리한 조던은 2000년 1월 19일에 워싱턴 위저즈의 주식을 매입해 주주 겸 사장으로 재직했다가, 구단주 에이브 폴린의 권유로 38세의 나이에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가 복귀한 사실에 대해 팬들은 당시 떨어져만 가던 NBA의 인기를 회복시키고자 데이비드 스턴이 복귀를 종용했다 어쨌다 말이 많았고, 후에 조던 또한 자의로 복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는 뉘앙스의 인터뷰로 이를 어느정도 긍정했다. 실제로는 스턴이 아니라 당시 워싱턴의 지분을 갖고 있던 조던이 팀 가치를 끌어올리고 싶었던 구단 수뇌부의 종용으로 복귀한 것이다. 선수는 구단의 지분을 소유할 수 없는지라 그는 일시적으로 자신의 지분을 양도하고 은퇴 후 돌려받고자 했는데 여기에 관해선 후술하겠지만 끝이 안 좋았다.

당시 워싱턴은 강팀이 아닌지라 복귀 후 플레이오프 진출 정도를 목표로 삼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게다가 더 이상 실력도 예전의 그만큼은 아닌지라 팀내에서는 조던 중심으로 돌아가는 팀에 대한 불만도 꽤 많았다고 한다. 다만 반론을 하는 사람들은 당시 조던은 젊은 선수들의 서포트에 충실하겠다며 스스로 식스맨을 자처하고 나섰는데, 시즌이 지나가다보니 팀 수준이 너무 떨어져 스타터로 나올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한다. 실제로 워싱턴은 조던이 오기 전에 19승팀이었으며, 그나마 팀 성적을 좀 끌어올렸더니 볼 맨 소리가 나오니 조던도 빡칠 노릇. 게다가 당시 멤버들 보면 조던 말고 딱히 득점할 사람도 없었다. 끽 해야 아직 신인이였던 리차드 해밀턴, 후에 트레이드되어 온 제리 스택하우스 정도.

참고로 당시 조던은 불스 시절의 제왕적 리더십과도 거리가 있었으며, 실제로 당시 신인이던 에탄 토마스는 2020년에 인터뷰를 통해 조던은 워싱턴에서 동료들을 몰아붙이는 스타일도, 콰미 브라운을 그렇게 엄청 갈군 것도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군기를 잡은 건 찰스 오클리같은 다른 베테랑이었고, 콰미를 갈군 것은 감독 덕 콜린스였으며, 자신은 콰미가 망한 게 조던 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쨌든 나이 마흔에 몇 년씩 딴짓을 해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20점-5리바운드-5어시스트라는 리그 엘리트 스윙맨의 지표급의 활약을 보여주어 열심히 그를 따라잡으려 하는 후배들의 목표를 한층 상향시켜 주었다. 조던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에 높아서 그런지 가끔 이 시절을 흑역사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전성기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이 때 조던만 해도 리그를 주름잡는 슈퍼스타들에게 맞불을 놓던 스타였다. 02시즌의 경우 초반엔 리그 득점 3위까지 올랐으며 20여경기를 소화할 때만 해도 평균 25점을 상회했다. 또한 탁월한 기본기로 저하된 스피드를 커버했으며, 수비에서도 전성기처럼 수비왕급은 아니라도 준수한 수준을 유지했다. 득점 뿐 아니라 게임리딩과 리바운드 능력도 수준급이었으며, 무릎문제로 고생하면서도 02시즌엔 34.9분, 03시즌엔 전 경기를 뛰면서 무려 37.1분을 뛰는 등 체력도 준수했다. 사실 조던이니까 둔하다, 점프력 낮아졌다 소리 듣는 거지 이때만 해도 웬만한 30대 초반 스윙맨들에게 밀리지 않는 운동능력이었다.

이때 워싱턴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는 조던이 팀에 합류하기 전후의 성적을 보면 나온다. 조던이 합류하기 전 워싱턴은 19승밖에 못 하던 팀이었다. 그러나 조던 한 명의 합류로 워싱턴은 2001-02 시즌, 2002-03 시즌 동안 각각 37승씩을 기록했다. "젊은 선수들이 성장한 결과인 것 아니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그가 떠난 직후에 팀 성적이 25승으로 무려 12승이나 떨어졌다. 심지어 이때 조던만 떠난 게 아니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새로운 에이스 길버트 아레나스를 공수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떨어졌다. 아레나스 영입이 없었다면 얼마나 떨어졌을지 모르는 일. 즉, 바닥을 기던 팀이 조던 한 명의 합류로 성적이 거의 두 배로 뛰면서 플레이오프 경쟁에 합류했고, 조던이 떠나자 또 다시 성적이 추락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워싱턴 시절 조던은 노쇠해도 MVP급이던 시카고 시절만큼은 못해도 당시 리그를 주름잡던 스윙맨들, 즉 코비 브라이언트,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빈스 카터, 레이 앨런, 앨런 아이버슨, 폴 피어스와 비교해 말석 정도는 충분히 차지할 만했다. 정확히는 리그내 최고선수 반열에 들던 코비, 맥그레이디, 아이버슨과의 비교는 무리고 두 시즌동안 평균 26점을 기록했던 피어스와 비교해도 딸리지만, 1차 스탯만 놓고 봤을 때에는 조던과 마찬가지로 당시 All-NBA Team에는 뽑히지 못한 카터나 알렌과는 얼추 비할법하다. 두시즌 통합 기록을 내면,
  • 조던: 142경기 출장 평균 36.1분을 뛰며 21.2점 5.9리바운드 4.4어시스트 1.5스틸 0.5블록, 필드골 성공률 43.1% 3점 슛 24.1% 자유투 80.5%
  • 카터: 103경기출장 평균 37.4분을 뛰며 23점 4.9리바운드 3.7어시스트 1.4스틸 0.8블록, 필드골 성공률 44.2% 3점 슛 37.4% 자유투 80.1%.
  • 앨런: 145경기 출장, 평균 37.3분을 뛰며 22.2점 4.8리바운드 4.2어시스트 1.3스틸 0.2블록 필드골 44.9% 3점 슛 40.5% 자유투 89.8%

이렇듯 셋의 기록을 비교하면 전반적인 볼륨스탯과 야투율은 서로서로 비슷하게 뽑혔다. 단, 야투율이 아닌 TS%로 넘어가면 조던은 48%, 카터는 52.1%, 앨런은 58%로 조던이 밀린다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으며, PER의 경우 앨런이 21.5, 카터는 21.1, 조던은 19.9였다. 윈셰어수치나 박스스코어 +/-수치의 경우 팀전력에 크게 영향을 받는 수치이므로 개인의 기량을 비교하는데는 한계가 있으니 일단 생략. 여기서 효율이 비교불가 수준인 알렌은 논외로 치고, 카터의 경우 01-02 시즌에 60경기 뛰고 시즌아웃을 당한 후 02-03 시즌의 약 절반 정도를 날려먹었기에 해당 구간에는 조던보다 좋은 에이스였다고 보긴 무리가 있다. 정리하면 그 2시즌 내 리그 스타급 스윙맨들 중에서는 조던과 카터가 비교적 말석에 가까운 위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단짝이었던 피펜과 서로 포틀랜드-워싱턴의 저지를 입고 만나는 명장면이 벌어지기도 했으며[131], 친정팀인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에서는 개인통산 3만 득점을 기록하며 팬들에게 멋진 기억을 선사해주었다. 그리고 그를 그리워하던 팬들이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보기위해 전국 모든 경기장으로 모여들면서 매 경기가 farewell 세레모니화되는 재밌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지막 유나이티드 센터 방문과 시즌 고별경기는 그 중 백미. 마이클 조던/영상 문서를 참조.

이 유나이티드 센터 마지막 경기에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NBA에서는 경기 시작 전에 장내 아나운서가 각 팀의 선발 출전선수 소개를 할 때, 자기네 팀 선수에 대해서는 조명을 끄고 레이저 쇼를 벌이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하지만, 원정 팀 선수에 대해서는 그냥 담담한 톤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미 조던은 이 곳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지만 이 때는 시카고 불스 입장에서 조던이 원정 팀 선수였고, 때문에 구단 측에서는 아나운서에게 보통 원정 팀 선수들과 똑같이 소개하라고 일렀지만 아나운서는 이를 거부하고 조던을 시카고 시절과 마찬가지로 흥분된 목소리로 소개했고 당연히 시카고의 팬들은 열광하였다.[132] 이후 그의 마지막 경기였던 필라델피아전에서도 원정팀이었지만 필라델피아는 친히 잘렸던 불스 아나운서 레이 클레이까지 초청해서 레이저쇼에 제대로 세레모니를 해주었다.

조던은 비록 전성기에 비해 현저한 능력 저하를[133] 보임에 따라 팬들을 안타깝게 했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그의 운동능력과 센스는 그가 누구였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134] 참고로 조던은 40세가 넘은 상태에서 40점을 한 번(43점), 30점을 세 번 넘겼는데 (39, 35, 30) 40살이 넘어서 30점을 넘긴 선수는 NBA역사상 조던이 유일하다. 만 40세 이상 선수들이 한 경기에서 기록한 최다득점 순위를 보면 1, 2, 3, 4, 6위가 조던이다. 40세를 넘어서 20점 이상을 넣는다는 것 자체가 쉬운일이 아니며[135] NBA 역사에서 총 61번 있었는데, 그런데 이 중 3분의 1인 20경기가 조던이다. 심지어 조던은 40살 넘어서 30경기 밖에 치르지 않았다. 이 중 3분의 2에서 20점을 넘긴 것이었다.[136] 2위는 40살 넘어서 154경기나 치른 카림 압둘자바로 16경기이고, 이들을 제외하면 10경기 이상 20점을 넘긴 선수는 없다. 현역 최다는 위에 언급된 카터.

조던은 2003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공식 은퇴했다. 상술했듯 필라델피아는 불스의 장내 아나운서였던 레이 클레이를 초빙하여 선수소개 때부터 조던에 초점을 맞췄고, 조던의 이름이 호명되자 전 관중들이 기립하여 박수쳤다. 이후 조던은 경기 종료 4분여를 앞두고 교체되어 벤치로 들어가며 자켓까지 입는다. 종목 불문 자켓을 입는다는 의미는 명백했다. 이에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기립하여 We want MIKE를 연호한다. 농구황제의 마지막 경기에 대한 팬들 최고의 찬사. 그리고 이를 본 조던은 결국 자켓을 벗고 다시 교체 투입되어 마지막으로 코트에 나선다. 그런 농구황제에게 필라델피아의 에릭 스노우는 고의적으로 가벼운 파울을 범한다. 조던에 대한 악감정이 아니라, 위대한 농구황제에게 마지막 득점 기회를 주기 위한 후배 선수의 존경어린 배려였다. 그렇게 얻은 자유투를 조던은 깔끔하게 성공시켰고, 그렇게 조던의 농구 선수 일생이 마무리된다.[137]

9.1. 2001-02 시즌

마이클 조던은 두 시즌 모두 준수한 성적을 거뒀으나, 2002-03 시즌은 무릎이 크게 망가진 이후 성적이기 때문에 이 때 조던의 기량과 2001-02 시즌 조던의 기량은 다소 차이가 있다. 또한 2001-02 시즌 조던은 최종 22.9점 (야투율 41.6%) 5.7리바운드 5.2어시스트를 기록했으나[138][139], 이 성적은 조던이 무릎부상을 당한 이후 수술을 미루며 뛴 경기와, 수술 이후 무리하게 조기복귀를 했을때 수시로 물이 차는 무릎으로 뛰면서 엄청 깎아먹은 수치이다.

조던은 2002년 2월 7일, 팀의 47번째 경기이자 본인이 46번째로 출장한 경기인 새크라멘토 킹스전 당시 동료 에탄 토마스와 충돌하며 무릎부상을 입었다. 이때 이후 매 경기 무릎에 피와 고름이 차기 시작해 경기 중에 주사바늘을 갖고 이걸 빼내야 했으며, 버티고 버티다 수술을 결정한 2월 24일 마이애미 전 당시는 무릎이 너무 부어 4쿼터 절반 가량을 뛰는 게 아예 불가능했다. [140],

그가 무릎부상을 당하던 킹스전까지 포함해 46경기동안 성적을 보면 그가 리그에서 손꼽히는 윙플레이어였음을 알 수 있다.
  • 무릎부상 전까지 첫 46경기동안 그의 평균 성적은 25.1점 6.2리바운드 5.3어시스트 1.5스틸 야투율 42.1%였고, 팀 성적은 26승 20패였다.[141]
  • 무릎부상 이후 그는 수술을 미루고 다친 무릎으로 평균 35.9분씩 7경기를 뛰었는데, 이때 성적은 19점 4.7리바운드 6.3어시스트 야투율 40.3%였고, 팀 성적은 1승 6패였다.
  • 수술을 하느라 그는 2월 27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전부터 3월 18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전까지 12경기를 결장했는데, 이 기간동안 워싱턴은 4승 8패를 기록했다.
  • 수술 이후 그는 완치가 되지 않은 상태로 복귀해 7경기를 더 뛰었는데, 이 기간동안 그는 평균 12.4점 2.9리바운드 3.3어시스트 야투율 37.5%를 기록했다. 결국 그는 7번째 경기이던 레이커스전(패배)에서 12분밖에 못 뛰었으며 시즌아웃되었다. 팀성적은 3승 4패.
  • 조던이 시즌 아웃된 이후 3승 5패를 기록했다.

위에서 보면 알 수 있지만 워싱턴은 조던이 건강하게 뛸때 좋은 성적을 거두다가, 조던이 무릎부상을 당한 이후로 성적이 추락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부상당하기 전까지 워싱턴의 승률은 56.5%였는데, 이는 82경기 환산시 46승 페이스이다. 부상 이후 제대로 못 뛴 경기를 포함하더라도 워싱턴은 조던이 라인업에 있을 때 30승 30패, 라인업에서 빠졌을 때 7승 15패로 31.8%를 기록했다. (82경기 환산시 26승 페이스) 실제로 워싱턴은 조던이 복귀해 뛴 두 시즌동안 37승을 기록했다가, 조던이 은퇴하고난 2003-04 시즌에 딱 25승을 거뒀다.

종합하면 무릎부상 당하기 조던은 평균 25점씩 올리며 자신의 존재만으로 디비전 꼴찌권 팀을 5할 이상으로 이끌던 선수였던 것이다.[142] 즉, "건강한 38-39세의 조던"은 오랜 복귀가 무색할 정도의 에이스 스코어러였고, 리그에서 손꼽히는 윙플레이어 중 하나였던 것.[143]

사족으로 "워싱턴의 선전은 조던이 아닌 리처드 해밀턴 덕분이다"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144], 이는 두 선수들이 뛴 경기 성적만 봐도 간단히 반박된다. 일단 경기별 성적을 보면 워싱턴의 초반 25경기 중 24경기는 해밀턴과 조던이 둘 다 건강하게 뛰었다. (리처드 해밀턴이 뛰고 마이클 조던이 결장한 12월 4일 스퍼스 전은 패배) 여기서 팀은 13승 11패를 했다.

해밀턴은 이후 12월 21일 올랜도 매직전에서 8분만에 부상으로 아웃되고 (팀은 18점차 승리) 이후 12월 22일 닉스전부터 1월 29일 디트로이트전까지 결장을 하게 되는데, 이 기간동안 치러진 17경기에서 워싱턴은 8승 9패를 한다. (조던은 28.1점 6.2어시스트 5.3리바운드 야투율 44.1%) 이후 해밀턴이 복귀한 클리블랜드전부터 팀은 5연승을 달리고, 5연승의 마지막 경기에서 조던이 무릎이 나가며 워싱턴이 추락하게 된다. 이후 조던이 결장하고 해밀턴만 뛴 것은 2월 20일 디트로이트 전(패배), 그리고 무릎 수술하면서 아웃된 2월 27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전부터 3월 18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전까지였다. 중간에 3월 3일 올랜도 매직전은 해밀턴도 결장한다. 조던이 수술받고 회복하느라 해밀턴만 뛴 11경기동안 워싱턴은 3승 8패에 그치는데, 희한하게도 팀내 두 기둥인 조던과 해밀턴이 둘 다 결장한 올랜도 매직전에서는 연장접전 끝에 107대 102로 신승한다.[145] 그리고 3월 20일 덴버 너기츠 전부터 4월 2일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전까지는 두 선수 둘 다 뛰었고, 4월 3일 밀워키 벅스전부터 4월 14일 인디애나 페이서스 전까지는 조던이 아웃되고 해밀턴만 뛰었다. 이때 해밀턴만 뛴 경기 성적은 7경기에서 2승 5패였다.

종합하면 해밀턴이 결장하고 조던만 뛰었을 때 팀의 성적은 8승 9패[146], 조던이 결장하고 해밀턴만 뛰었을 때 성적은 5승 15패이다. 즉, 두 선수 중 해밀턴만 아웃되고 조던 혼자 팀을 이끌 때는 승률 47%, 조던만 아웃되고 해밀턴 혼자 팀을 이끌 때는 승률 25%이다. 그런데 조던이 입단하기 전 해밀턴이 이끌던 워싱턴의 승률이 23%이다. 한마디로 조던이 없을때는 해밀턴이 있건 없건 큰 차이가 없다.

게다가 위에서 보면 알겠지만 두 선수 같이 뛴 경기라고 해도 조던이 무릎부상을 당하기 전과 부상 이후 성적이 확 차이가 난다. 조던이 무릎이 나가기 전에는 위에 언급했듯 두 선수가 뛸 때 18승 11패였지만, 조던이 무릎부상을 당한 이후에는 둘이 같이 뒤어도 4승 10패에 불과했다. 즉, 당시 워싱턴의 성적은 해밀턴의 존재와 상관없이 조던이 건강할 때는 좋았고, 그가 몸상태가 안 좋을때는 추락했다.[147]

9.2. 2003년 올스타전 당시 일화

조던의 마지막 올스타전이었던 2003년 올스타전은 거의 노골적으로 황제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하프타임 당시 초대가수로 초청받은 머라이어 캐리는 조던의 시카고 불스 유니폼과 워싱턴 위저즈 유니폼이 반반씩 섞인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공연을 했으며, 두 번째 곡인 'Hero'를 부를 때 전광판에는 조던의 하일라이트 비디오가 상영되었고 캐리가 마지막 가사인 '...that a hero lies in you"를 부를 때 조던을 가리키는 방식으로 마무리되었다. 공연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힌 조던이 이후 짧게 연설을 하면서 마무리가 됐을 정도.

이에 걸맞게 경기가 접전으로 흘러가자 동부는 조던에게 공격권을 몰아주었는데, 이날 조던은 슛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경기 최다인 27개의 야투를 시도했고 20점을 넣었다. 특히나 1차 연장 마지막 공격권에서 그는 숀 매리언과 1대1 상황이 되었고 페이더웨이를 던져 성공시켰는데, 이대로 경기가 끝났다면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MVP가 유력한 상황이었다.[148] 그런데 시간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코비 브라이언트가 막판에 무리한 페이더웨이 3점 슛을 그냥 던져본 것을 저메인 오닐이 무리하게 막으려다가 파울, 자유투 3개를 쏘는 뻘쭘한 상황이 나와버렸다.[149] 커리어 성공률이 80%가 넘는 코비가 일부러 자유투를 놓치는 작위적인 일을 할리도 없고(코비 본인이나 조던의 승부욕을 생각하면 그런 식의 떠먹여주는 승리를 바랄리도 없다), 결국 3개 중 2개를 넣어 경기는 2차 연장에 돌입하게 된다. 여기서 서부는 10점차 승리, MVP는 야투 24개 중 17개를 넣으며 37점을 올린 케빈 가넷에게 돌아가게 된다.

사실 가넷이 이때 받은 트로피의 디자인을 보면 NBA가 얼마나 조던에게 MVP를 주고 싶어했는지가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원래 NBA 올스타전 MVP 트로피는 우승 트로피나 정규시즌, 파이널 MVP 트로피에 비하면 비교적 소소한 디자인인데 1986년에 하단부에 글씨가 세겨지고 상단부에 NBA로고가 있는 원형의 구조가 있는 형태로 디자인이 바뀌었으며, 이는 2014년에 역대 최다 수상자인 브라이언트의 이름을 따 "코비 브라이언트 MVP트로피"로 바뀔 때 NBA로고가 컬러로 바뀐 것을 빼면 2021까지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가 2022년 올스타전부터 새롭게 바뀌었다. 그런데 30년이 넘는 역사에서 단 한 번 전혀 다른 디자인의 트로피가 수여된 적이 바로 2003년 올스타전이다. # 이 때 트로피를 보면 NBA우승트로피보다도 거대하고 말도 안되게 화려한 디자인이다. 원래 NBA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트로피는 당연히 우승 트로피(래리 오브라이언 트로피)이고, 컨퍼런스 우승 트로피는 그보다 좀 더 작다. 개인상 중엔 최대의 영예인 정규시즌 MVP가 가장 크고 화려하며, 파이널 MVP는 원래 우승트로피와 크기는 비슷하지만 좀 더 투박한 디자인의 트로피가 수여되다가 2006년부터 현재의 더 작고 화려한 트로피가 수여되었다. 원래 올스타전 MVP 트로피의 형태를 보면 알겠지만 이벤트 전에 불과한 올스타전 최우수 선수에게 저렇게까지 크고 화려한 트로피를 줄 이유가 없다.[150]

그런데 유독 조던의 마지막 올스타전이 확실한(고로 팀에서 조던을 밀어줄 것으로 예상되는) 경기에서 저런 말도 안되는 트로피를 준비해놓은 것이다. 당연히 NBA측에서 별다른 코멘트를 남긴 적은 없으나, 당시 올스타전의 분위기를 보면 이렇게 추정해볼 순 있겠다.

또 하나의 웃지못할 일화가 있는데, 당시 동부 올스타 팀의 주전은 아이버슨-조던-맥그레이디-오닐-벤 월러스였다. 그런데 원래 투표로 선발된 주전은 조던이 아닌 빈스 카터였다. 여기에 또 비하인드가 있는데, 당시 조던은 팀 내에서 스몰 포워드로 출전하고 있었으나 올스타 투표에선 가드로 분류되었다.[151] 문제는 이 때 동부 올스타들 중 백만표 넘게 득표한 5명 중 3명이 가드였다는 것. 올스타 투표는 팬들이 컨퍼런스당 가드 2명/포워드 2명/센터 1명씩 해서 총 10명의 이름을 적어내는 것으로 이뤄지는 만큼 같은 포지션에 인기스타들이 몰려있으면 득표에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152] 그런데 포워드에선 경쟁자가 앤트완 워커(52.8만표) 부상으로 뛰지 못하던 그랜트 힐(82.7만표) 정도라 원래 인기가 많던 카터가 130만표를 얻었고 별로 인기가 없는 저메인 오닐(94만표)로 주전이 되었다.

문제는 당시 카터가 부상으로 15경기밖에 못 뛴 상황이었다는 것. 원래 올스타 선발은 팬들의 권한이라 거의 못 뛰거나 실력이 모자란 선수가 선발되어도 별 문제 없이 넘어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하필 밀린 대상이 마이클 조던이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조던은 당시에도 독보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며[153] 전경기에 출전해 워싱턴을 이끌고 있었고, 무엇보다 NBA의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그가 커리어 최초로 올스타 후보로 출전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여론이 형성된 것.[154] 찰스 바클리는 대놓고 빈스가 주전 자리를 양보해야한다고 했으며, 이런 목소리가 높아지자 카터는 "이는 팬들의 권한이므로 나를 투표해준 사람들을 위해 뛰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사실 이상적으로라면 조던이 포워드로 득표를 얻어 맥그레이디-아이버슨-조던-카터-월러스가 선발되었다면 깔끔했을 것이기 때문에, 따지보고면 포워드로 뛰고 있던 조던을 굳이 가드로 분류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155]

어쨌든 계속해서 잡음이 이어지던 와중에 카터는 결국 주전자리를 선배에게 양보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 시점이 올스타 경기 직전도 아니고 선수 소개 도중이었다는 것. 실제로 조던이 후보들 중 마지막 순서로 소개되고 나서 "이제부터 올스타 주전을 소개하겠습니다"라고 아나운서가 언급한 후에 갑자기 "다음 올스타는 방금 자신의 주전자리를 마이클 조던에게 양보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This next all-star has just asked to be replaced in the starting line-up by Michael Jordan)"라고 하고, 조던이 당황해하는 표정을 확인할 수 있다.

10. 명예의 전당 헌액,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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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은퇴 이후 6년이 지나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을 얻었고, 09년 4월 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선정되었으며, 09년 9월 12일 헌액식을 가졌다. 명예의 전당 헌액 시 보통 파트너를 지목할 수 있는데, 여기에 피펜이다 필 잭슨이다 말이 많았지만 결국 조던이 지명한 것은 어릴 적 우상인 데이비드 톰슨이었다. 톰슨마저도 "너님 나한테 전화한 거 맞음?" 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편 이때의 연설은 시카고[156]의 팬들에게 감사하지도 않았고 전체적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자기를 무시, 비아냥한 사람들을 하나씩 이름 들어가면서 까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조던은 감동적인 분위기에 처음에는 울먹거리기도 했고 북받쳐서 연설을 수 차례 멈췄다 이어가기도 했는데, 그 후에 이어진 내용이 저런 내용이었으니까.

사실 대놓고 욕한 건 아니고 가벼운 디스 수준이었고, 유머를 곁들인 비아냥, 즉 평상시에 하던 트래시 토킹에 가까웠다. 악의가 있다기보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가볍게 긁는 농담에 가까운 것. 위에도 나와있지만 조던의 트래시 토킹은 인격 모독이라기 보다는 살살 약올리는 수준이고 따라서 트래시 토커로서 조던의 악명을 익히 알던 많은 NBA 팬들과 같이 뛴 선수들은 "Michael being Michael"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사이가 좋지 못했던 제리 크라우스 당시 시카고 GM을 연설 도중에 "누가 저 사람을 여기 불렀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아니거든요."라고 까는 등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좀 거슬릴 발언이 포함되어 있어 "좋은 자리에서 굳이 그런 얘길 하냐?" 하는 지적도 있었다. 명예의 전당 헌액식인데다 마이클 조던은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다 보니, 그런 과거사들을 모두 웃으며 포용하는 대인배의 풍모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기대가 깨진 데서 오는 실망감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조던은 현역시절 이미지메이킹에 철저한 편이었기 때문에 더욱 괴리감이 느껴졌을 것. 그간 그의 성격을 몰랐던 사람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조던의 악명 높은 승부욕과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가 굉장히 많은지라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는 그의 엄청나게 공격적이며 집요한 성격이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던에 대해 광고나 이미지로만 접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그의 성격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 결국 그만큼 경쟁심이 강한 이유가 소심하고 공격적인 성격이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드러났고 나이키나 NBA가 그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얼마나 쉬쉬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어버린 경우. 물론 농구 실력과는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성격 덕에 그렇게 농구를 잘했다는 말이 되기는 한다. 오죽했으면 이 때부터 우리나라 커뮤니티에서는 '세계 최고의 소인배'라는 별명이 하나 추가됐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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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때 명예의 전당 연설 도중 중간중간 울먹였던 그 표정은 이후에 'Crying Michael Jordan'이라는 인터넷 이 된다. 현역 은퇴 이후 구단주로서 활동 중이다. 은근히 굴욕도 자주 당한 편이고, 현역 때의 황제다운 이미지가 와장창이 된 기폭제다보니 농구 관련 밈에서 누가 망신을 당할 때 자주 합성되는 편. 크라잉 마사장 제조기도 있다. 가장 최근 크라잉 마사장 사건으로는 2016년 모교 노스캐롤라이나가 오랜만에 NCAA 파이널에 진출해서 기쁜 마음으로 직관을 왔다가 모교가 빌라노바 대학교에 지는 걸 지켜보면서 그 무기력한 관중 마사장의 모습이 이런 식으로 합성 되는 것이다. (...) 조던 역시 이 밈과 드립을 잘 알고 있어서 후일 코비 브라이언트 추모연설을 하던 중 울먹이다가 또 인터넷에서 이거갖고 놀리겠다는 식으로 말했다.[157]

11. 구단주 마이클 조던

이후 워싱턴 위저즈의 구단주로 복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좀 안 좋은 뒷소문이 있는데, 어느 종목이건 사실 현역 선수가 해당 리그의 구단 지분을 매입하는 행위는 악용될 소지가 너무 많으므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즉, 원래는 워싱턴 위저즈의 주식을 매입한 주주였던 조던은 선수 복귀가 불가능했지만, 선수로 복귀하기 위해 주식을 당시 워싱턴 위저즈 이사회에 임시로 양도하고 선수 활동 종료 후 주식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주식 양도 후 선수 복귀를 했는데, 이게 어쨌든 편법이라 구두계약으로밖에 할 수 없다 보니 워싱턴 위저즈에서 2시즌 뛰고 나서 다시 구단주로 복귀하려는 찰나 당시 대표이사였던 에이브 폴린 등이 구두합의를 깨고 조던의 복귀와 원 지분 양도를 거부한 뒤 아예 조던을 해고해버린 것. 관련 기사

법적으론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구두로 합의한 걸 깼다는 점에서 2015년 디안드레 조던의 이른바 'D통수 사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구두합의를 저버리고 유타 재즈와 계약하며 배신자 소리를 들었던 카를로스 부저 만큼이나 워싱턴 위저즈 구단이 도의를 어겼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던은 애초에 2년 동안이나 운동계를 완전히 떠난 훈련부족 상태에, 선수시절 마일리지 누적으로 인해 물이 수시로 차는 망가진 무릎을 가지고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으며 그 나이에 후배들 독려하면서 개고생을 했다. 그런데 구단 보드진들이 걸레 마지막 물 쥐어짜듯 조던을 짜내고선 뒤통수를 친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조던은 완벽주의자인만큼 선수복귀를 회의적으로 봤으나[158] 구단이 이를 종용했고, 그 목표는 팀의 가치 향상이었다고 한다.

그후 조던은 케이블 채널 BET 창업주 로버트 L. 존슨, 래퍼 Nelly 등과 함께 샬럿 밥캣츠 창단에 참여했다. 초기에는 소액주주였으나, 2010년에 존슨 대주주로부터 한국 돈으로 3120억 원에 이르는 값을 치러 사들이는 데 성공하며 구단주가 되었다. 간간히 선수들과 연습도 함께 하는 듯. 실제로 샬럿 밥캣츠의 훈련 영상이 떴는데 슈팅 게임에서 조던이 승리했다.

이후 50살 생일인 2013년 2월 17일을 전후로 이런저런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현재 샬럿 밥캣츠의 유망주인 마이클 길크리스트를 상대로 1on1을 해서 승리를 거뒀다는 기사가 떴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접대농구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한국과 달리 미국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접대하면서 게임하는 분위기는 아니다보니 조던이 50세까지도 연습경기 선에서 펼치는 1대1이라면 현역 선수들 못지 않은 것 아니냐며 놀라워하는 의견들도 많았다.

당장 미국의 교육부 장관 Arne Duncan만 하더라도 무려 장관인데도 NBA 올스타 번외경기 격인 Celebrity Game[159]에 몇번이나 출전하면서 개그맨, 가수들과 동등하게 부대끼면서 농구를 했다. 다만 던컨은 그냥 농구 좋아하는 고위 공무원이 아니라 실제로 젊은 시절에 호주에서 4년간 프로선수로 뛴 적이 있는 선수이고, 64년생으로 다른 연예인들보다 훨씬 많은 나이라곤 하나 잠깐이나마 프로 물을 먹은 사람이 연예인들 상대로 펼친 플레이라 결이 다르다는 건 감안하자.[160]

사실 1 대 1농구는 체력 소모가 3 대 3이나 풀코트 농구에 비해 훨씬 적기 때문에 늙은 조던이라도 이기는 게 가능하다. 이때 조던은 260파운드에 달하던 체중을 현역 시절에 가깝게 줄인 상태라 몸 상태가 매우 좋았다. 또 5점 내기 같은 짧은 경기에서는 얼마든지 이변이 가능하다. 농구는 공격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슛하나 놓치고 "어? 어?"하는 사이 5점 정도 먹을 수 있다. 실제로 조던이 은퇴 후 주최한 농구 캠프에서 조던과 나이가 비슷한 일반인이 무리한 페이더웨이를 연속으로 성공시켜 3점 내기 1 대 1에서 조던을 이긴 적이 있다. 하물며 한때 역대 최고 수준의 기술을 자랑했던 조던이야... 조던을 상대한다는 긴장감, 약간의 운이 따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다.[161]

여하튼 조던이 50세에 복귀하겠다고 나섰을 땐 농구계가 발칵 뒤집어지면서 그가 복귀할 수 있느냐를 두고 진지하게 토론이 이뤄졌다. ESPN의 전문가들인 스티븐 A 스미스와 스킵 베일리스는 이를 갖고 치열한 토론을 했는데, 조던빠 성향을 지닌 베일리스는 조던이 복귀하면 코비 브라이언트 같은 선수들을 위협하는 스타급 활약을 할 거라고 지나치게 오버스런 분석을 했고, 스미스는 나이가 나이니만큼 크게 활약하기는 힘들 거라고 주장했다. 중요한 건 두 사람 모두 만 50세였던 조던의 복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전제하에서 얘기를 했다는 점.

사실 조던의 경우 만 40이 넘었을 때 NBA에서 전 경기 평균 37분을 뛸 정도로 몸상태가 비상식적으로 좋았다. 시카고 불스 시절 조던이랑 비교하니까 늙었다, 느리다, 둔하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거지 사실 워싱턴 위저즈 시절만 하더라도 웬만한 30대 스윙맨들 못지 않게 잘 움직였다. 조던과 체격조건이 비슷하고 몸관리가 상당히 잘된 빈스 카터의 경우 만 40세가 된 2016-17 시즌에 평균 24.6분을 뛰면서 고작 평균 8점을 기록했다는 걸 생각하면 조던의 몸은 일반 상식으로 생각하면 안되는 수준(...)이란 걸 알 수 있다.[162] 또한 실제로 조던의 드래프트 동기인 케빈 윌리스 역시 만 45세를 목전에 앞둘 때까지 뛴 적이 있다.

2022년 12월에 샬럿 소속 선수였던 스티븐 잭슨이 밝힌 바에 따르면, 2010년 당시 구단주 조던이 연습경기에서 후보들 팀에 합류해 주전들을 꺾어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팀이 패배하고나서 조던이 팀을 다그치자 리더인 잭슨이 받아쳤는데, 다음날 연습경기에 합류해 저렇게 했으며 심지어 나가는 길에 마무리로 덩크까지 했다고...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 잭슨은 이걸 보고 "저래서 GOAT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63] 이렇듯 40대 후반 ~ 50대 초반 당시 조던이 연습경기 수준에서는 현역들을 놀라게 할 기량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신빙성 있는 근거들이 꽤 있다.[164]

물론 조던이고 뭐고 50세의 나이에 NBA에서 적은 출전시간이라도 유의미한 롤을 받으며 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아예 말이 안된다고 보는 시각도 많으니 판단은 알아서. 날고 기는 NBA 선수들 사이에서 50대가 활약한 사례는 애초에 표본 자체가 없는데다, 길크리스트와의 1대1이나 샬럿 내 연습경기 모두 딱히 풀영상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라 조던에게 구체적으로 어느정도의 기량이 남아있는지를 판단할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 20대의 팔팔한 올스타급 플레이어라도 프로를 그만두고 10년 뒤에 복귀를 시도한다면 뛸 수 있을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데, 신체적 전성기가 훌쩍 지나 40세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선수가 10년만에 복귀한다는 가정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상식적으로는 논할 필요가 없는 수준의 주제이나, 조던이라는 인물 자체가 워낙 상식선을 벗어난 인물이다보니 '조던이라면 혹시?' 하는 기대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기에 의외로 진지하게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는 정도만 알아두자.

구단주로 팀을 운영하면서 켐바 워커 정도를 제외하면 드래프트에서 계속 실패하며, 바클리에게는 운영이 엉망이라고 까이고 이래저래 선수 때보다도 많은 굴욕을 겪고 있다. 승부욕이 장난 아닌 사람인지라 은퇴 후 나오는 칼럼에서는 호네츠의 부진에 고통받는 모습도 나온다. 2020 드래프트에서 라멜로 볼을 뽑으면서 드디어 드래프트 잔혹사를 탈피. 공격에 모든 것을 올인하는 재밌는 팀을 구성해나가고 있다. 2022년 즈음에는 플레이오프 막차 정도는 탈 수 있을 정도로 팀이 완성되어가고 있었지만, 결국 샬럿 호네츠는 마일스 브리지스의 가정폭력 사태로 인해서 다시 리그 꼴찌권으로 무너지고 말았고 조던조차도 지쳐버렸는지 적극적으로 구단 매각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2023년 6월, 샬럿 호네츠가 매각되었다. 이로서 13시즌의 조던의 구단주 도전도 막을 내렸다.# 호네츠는 30억 달러에 매각되었고 마이클 조던은 소수의 지분만 보유하게 되었다.# 조던 다음 구단주는 릭 슈날, 게이브 플롯킨 2명의 공동 구단주 체제로 운영된다고 한다. 본인이 13년전 한화로 약 3000억원에 구입하고 약 3조원에 매각했으니 이익이 어마어마한 셈. 이 외에도 투자자 댄 선드하임, 래퍼 제이 콜, 가수 에릭 처치 등이 소수 지분으로 참여했다.

2023 드래프트와 FA까지는 팀을 운영하기로 하면서 드래프트에서 2픽으로 브랜든 밀러를 뽑았다. 그런데 거른 선수인 3픽 스쿳 헨더슨(포틀랜드)의 재능이 더 뛰어나다는 평가가 많아 구단주로는 많이 부족했던 조던이 마지막까지 드래프트에서 삽질을 했는지도 주목받고 있다.[165]

이후 2023년 8월 3일을 끝으로 구단주로서의 임기가 완전히 종료됐다.

12. 그 후의 조던

13. 참고 자료


[1] 부친 제임스의 고향이면서 고조부 딕 조던(1862~1926)부터 5대에 걸쳐 같은 주에서 자리잡았으며, 증조부 도슨(1892~1977)과 조부 윌리엄 에드워드 조던(1915~1990)은 펜더 카운티에서, 부친 제임스는 월러스에서 각각 태어났다.[2] 5살 때부터 시카고 불스에 지명되기 전까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살았으니 사실상 노스캐롤라이나 토박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사투리를 고쳤지만 대학 시절까지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노스캐롤라이나 특유의 (심하지 않은) 남부 사투리가 묻어있는 걸 들을 수 있다. 82년 우승 후 기념행사에서 1학년 조던의 목소리(1:51부터) https://www.youtube.com/watch?v=6GREWj0mYq8. 뉴욕 출신인 샘 퍼킨스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억양이 다르다. 3학년 시절의 인터뷰(https://www.youtube.com/watch?v=uSPLMiH7tqQ)를 보면 사투리가 많이 옅어졌지만 억양이 약간 남아있는 걸 들을 수 있다. 여담으로 팀 에이스인 제임스 워디도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인데, 워디 역시 나중에 사투리를 고쳤다.[3] 참고로 조던은 이 때를 현재까지의 인생에서 지금의 자신을 만든 가장 중요한 순간이였다고 회상했다.[4] 조던은 대학 진학때까지 프로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스스로 인터뷰에서 "고향에선 늘 제가 노스캐롤라이나에 가서 벤치에 4년동안 앉아있다가 돌아와서 주유소에서 일하거나 할거라고 생각했죠."라고 말할 정도. 다만 이 건 본인이 약간 과장한 것으로 후술되다기시피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최고의 유망주이자 전국구 유망주였고 전미의 유망주들이 뽑히는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에도 뽑혔다 당시 전미에서 미스터 바스켓볼 (MVP)로 뽑힌 선수는 훗날 절친이 되는 패트릭 유잉. 여담이지만 이때 올아메리칸 팀에 뽑힌 고교 동기 중에는 훗날 불스 동료가 되는 샘 빈센트 (퍼스트 팀), 그리고 2차 3연패 팀의 백업 센터였던 빌 웨닝턴 (서드 팀)도 있었다.[5] 만 12세 당시 유소년 야구 리그인 Dixie Youth League의 Mr.Baseball(MVP)로 뽑혔다. 물론 유소년 리그긴 하지만 노스캐롤라이나 주 전체의 MVP기 때문에 무시못할 성과다. 그의 운동신경과 센스, 근성을 생각하면 야구선수로 갔어도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6] 당시 그를 탈락시킨 프레드 린치 코치는 (후술되는 헤링 감독과 다른 사람. 당시 클리프턴 헤링(1952~2019) 감독은 1군, 린치는 1군을 맡았고, 2학년 중 2군으로 올려보낼 선수를 결정한 건 바로 린치였다.) 저학년들 중에서는 조던이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고 여러번 밝혔으나, 어차피 고학년들이 팀의 주축인 상황에서 조던이 고학년들을 압도하는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리로이 스미스 정도 사이즈면 고등학교 레벨에선 상당히 경쟁력이 있기 때문에 키만으로도 뽑을 만하긴 하다. 린치가 어느 정도 미화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가 탈락 사건 이후 2년도 안되어 전미 최고의 유망주 중 하나가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무리 급성장과 노력을 감안해도 2학년 당시 조던은 2군에서 돋보이는 선수였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조던 집안은 173인 형 래리 조던이 덩크 슛을 자유자재로 하고 조던의 아들들도 실력과 별개로 운동능력 하나는 발군일 정도로 운동신경이 뛰어난 집안이다.[7] 전미의 훌륭한 고등학교 선수들을 초청해 서부/동부 형식으로 치르는 올스타전. 1977년에 초대 경기가 치러졌다.[8] 쉐로드는 이후 고향에 있는 위치타 주립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입학하기 전 해에 8강까지 가던 팀은 하필 이때 몰락해 3학년까지 NCAA 토너먼트 진출도 못하다가 1985년 겨우 진출, 1라운드 탈락에 그친다. 브랜치의 경우 상황이 훨씬 나아서 농구명문 메릴랜드 대학교에 입학해 2, 3, 4학년 때 토너먼트를 경험해 16강까지 간다. 브랜치의 경우 다행히 1986-87 시즌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합류해 32경기를 벤치에서 뛰며 4.3점 1.7리바운드를 기록, 놀랍게도 플레이오프 로스터에 합류해 11경기동안 1.3점을 넣으며 우승반지를 챙긴다. 그는 통산 네 시즌동안 총 130경기(주전출장 7경기)에 뛰고 CBA, 호주 NBL 등 여러 리그를 전전하다 1995년 이스라엘 구단 하포엘 라맛 간 기바타이임 BC를 끝으로 커리어를 마무리한 후, 한동안 스포츠 선교에 전념하다 2004년 샬럿 밥캣츠 중계 해설위원으로 전직하여 2007년부터 ESPN 대학농구 중계 해설위원을 맡고 있다. 이후 의도치 않게 조던이 둘에게 복수(?)하게 되는데, 비교적 평범한 유망주인 둘은 1985년에 시카고 불스에 쉐로드는 2라운드 34번, 브랜치는 46번으로 뽑히게 된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 불스엔 방금 역대급 루키 시즌을 치르고 난 조던이 이들과 같은 슈팅 가드 포지션에 버티고 있었다. 프리 시즌에 눈에 띌 만한 활약을 못 보인 두 선수는 둘 다 시즌 시작 전에 잘리고 만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조던은 개막 이후 3경기만에 부상으로 장기 결장을 했기 때문에 개막 후 일주일 정도만 더 버텼으면 후보로서 출장시간을 얻을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방출 이후 쉐로드는 하부리그인 CBA에서 뛰다가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1986년 계약했지만 마찬가지로 개막 전 방출, 하부리그와 호주 리그 등에서 뛰다가 단 한 경기도 NBA에서 뛰지 못하고 농구 커리어를 마무리했고, 2016년에 모교인 위치타 주립대 농구부의 특별 해설위원도 맡았다.[9]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Chapel Hill. UNC, 채플힐 또는 운동부 마스코트인 타힐스(Tar Heels)라고 한다. 한국으로치면 82학번에 해당한다.[10] 크리스 멀린의 세인트 존스 대학교 동창.[11] 정확히 말하면 조던은 유년기에 NBA에 별다른 관심이 없이 대학농구팬이었으며, 톰슨의 대학시절 그의 플레이에 매료되어 농구선수를 꿈꾸게 됐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전통적으로 대학농구가 엄청난 인기를 끌던 지역으로, 조던이나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청소년 대부분은 지역 팀도 없던 NBA를 많이 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조던의 청소년 시기인 70년대 NBA는 인기 면에서 많이 떨어져, 신생리그인 ABA와도 경쟁이 잠깐 될 정도였다.[12] 여담이지만 신입생 때 인터뷰나 우승 후 팬들 앞에서 조던이 말할 때 목소리를 들어보면 10대라 어려서 그런지 의외로 하이톤에 경박한 목소리인데다 남부지방 특유의 사투리가 묻어난다. (다만 노스캐롤라이나가 지역적으로 아주 남쪽 지방은 아니라 심하진 않다) 3학년을 마치고 드래프트 선언 기자회견 당시에는 현재 팬들이 알고 있는 중후한 목소리에 가까운 목소리가 나오는데, 성장이 끝나며 목소리가 변한 것으로 보인다.[13] 드래프트 되고 난 후의 인터뷰이다. 그리고 훗날 이 청년은 두 번의 쓰리핏을 이룬 불스 왕조를 만든다.[14] 딘 스미스는 절대로 선수의 개인플레이에 의존하지 않고 팀농구를 강조하는 감독이다. 참고로 조던이 1학년 때 팀의 에이스였으며 3학년 마치고 NBA진출해 1982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뽑힌 제임스 워디의 3학년 성적이 15.6점이었다. 사실 선수 성장 측면에선 이런 식의 지도방식이 효과적인데,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 당시 점프슛이고 기본기고 완성이 되지 않았으나 탁월한 개인기와 운동능력으로 시즌 트리플더블을 할 정도로 혼자 북치고 장구치던 마이클 조던은 스미스의 지도 하에서 완벽에 가까운 기본기와 팀플레이를 익힐 수 있었다. 조던이 원맨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실제로 그의 경기를 보면 볼 없을때 움직임 (스크린을 활용해 수비 를 떼어내거나 기습적으로 골밑으로 쇄도하는 백도어 컷인 등), 도움수비를 통해 기습적인 블록이나 스틸을 하는 등 팀 시스템 내에서 움직이는 플레이가 매우 훌륭한 것을 알 수 있다.[15] 전혀 반대방향의 지도를 받은 것이 바로 피트 마라비치로, 그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감독 프레스 마라비치는 찬란한 재능을 지닌 아들을 원하는대로 공격하게 해주었고 그는 대학시절 통산 44.2점이라는 무지막지한 기록을 냈다. 그러나 마라비치의 팀은 한 번도 NCAA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프로시절에서도 그는 레전드급 개인기량과 눈부신 개인기록과 별개로 한 번도 뛰어난 팀플레이어였던 적이 없으며, 커리어 통틀어 단 두 번의 위닝시즌만을 경험했다.(마지막 시즌이 은퇴 전 래리 버드의 셀틱스에 합류했고 시즌 절반 이상 결장한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한 번이나 마찬가지다) 또다른 예로 대학에서 30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1994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지명된 글렌 로빈슨 역시 개인기량과 별개로 팀플레이는 미미했다. 그만큼 아마추어급에서 팀플레이를 가르치지 않고 한 선수의 압도적인 개인기량에 의존하는 것은 성장세에 지장을 줄 수 있다.[16] 이 때문에 야구의 트리플 A에서 지나치게 오래 뛴 선수들은 아무리 잘해도 메이저에서 외면을 받는다. 그 선수의 재능보다 그 경험치 덕분에 잘하는 거라고 보기 때문.[17] 조던이 다니던 1980년대엔 더했다. 1980 드래프트~1990 드래프트까지 1라운드 1순위들을 보면 11명 중 8명이 대학 4년을 다 다니고 NBA에 왔으며 나머지 선수들은 3년을 다녔다. 1979년에 뽑힌 매직은 2학년이었지만 그 전 1970년대 1순위들은 전부 3, 4학년들이었다. 실제로 1993 드래프트에서 2학년으로 1라운드 1순위로 뽑힌 크리스 웨버는 매직 존슨 이후 최초로 1순위 지명된 저학년(underclassman)이었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13년동안 3학년, 혹은 4학년만이 1순위로 지명되었다는 것.[18] 다만 브랜드의 듀크 대학은 2000년대 초반까지 전원 졸업이란 방침을 고수했다.[19] 사실 이 해에 매직과 버드란 슈퍼루키들 때문에 은근히 부각이 안되는데 1979 드래프트는 흉작까진 아니지만 은근히 스타가 없었다. 1라운드 2순위로 뽑힌 선수는 데이비드 그린우드로 올-루키 퍼스트 팀에 오른 것을 빼면 수상이력이 하나도 없는 평범한 선수였으며, 그외에 1라운드에선 시드니 몽크리프만 레전드급이고 3순위로 뽑힌 1회 올스타 빌 카트라이트 2회 올스타 짐 팩슨, 1회 올스타 캘빈 냇 정도만 눈에 띌 뿐이었다. [166] 이 정도 클래스였다면 조던 역시 1라운드 1순위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올라주원과 보위란 특급 유망주와 함께 나왔다는 것(보위는 부상 위험 때문에 올라주원에 밀린것 뿐이지 대학 시절 위상은 올라주원과 맞먹었다).[20] 조던 이전 세대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낸 슈팅 가드는 사실상 듀얼 가드로 활동했던 '로고맨' 제리 웨스트가 거의 유일했다.[21] 스테판 커리케빈 듀란트같은 3점 킬러들이 SG가 아닌 것도 같은 이치다. 클레이 탐슨이나 제임스 하든은 정말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슈팅 가드 포지션의 현역 선수는 딱 저 둘만 안다. 아니, 오히려 저 둘도 모를 수도 있겠다....[22] 여담이지만 이 셋이 득점왕+우승 콤보를 이뤄낸 횟수를 모두 합쳐도 조던이 혼자 해낸 횟수보다 적다.[23] 조던이 신인 시절에 총득점 1위/평균득점 3위를 기록하며 1987 시즌은 윌트 체임벌린 이후 최초로 시즌 3000점을 넘기는 등 NBA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가 된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24] 아이러니 하게도 시카고 구단 자체는 조던에 대한 기대가 적었다. 위에도 언급되었고, 당시 조던이 처음 시카고에 도착한 날 구단 관계자 누구도 마중을 나가지 않아서 조던이 당황했고, 본인이 알아서 트레이닝 캠프로 찾아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이 해프닝 과정에서 조던은 후일 친한 친구가 된 조지 콜러, 조던을 트레이닝 캠프로 데려다 준 리무진 기사를 만나게 된다. 조지 콜러는 이후로도 조던의 경기가 끝나면 공항에서 집까지 데려다주는 실질적인 전속 운전기사였고, 조던 가족이 시카고를 방문할 때도 그렇게 해주었다.[25] 여담이지만 이 첫 경기 상대는 조던 커리어의 마지막 소속팀이었다.[26] 조던 본인도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 이 경기를 기점으로 팀원이 자신을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27] 이후 그는 1987년부터 통산 최다인 9회나 올스타 투표에서 전체 1위에 오른다. 이는 오랜 기간 역대 최고기록이었으나 기나긴 커리어를 보내고 있는 르브론 제임스가 2022년에 동률을 이뤘고, 2023년에도 1위에 오르며 현재 기록을 보유중이다.[28] 81년 MVP 줄리어스 어빙, 82-83년 MVP 모제스 말론, 84년 MVP 선수 래리 버드가 동부 올스타 팀이었다![29] 당시 조던처럼 서부의 슈퍼 루키였던 하킴 올라주원의 슛 시도는 2회에 불과했다.[30] 실제 올스타전 Top 10 패스라고 모아놓은 것 중에는 아이제아가 조던에게 한 패스가 포함된다.[31] 사실 1985년 올스타전 때의 디트로이트는 아직 배드 보이즈로 올라서기 전이다. 레임비어의 영혼의 듀오 마혼도 합류하기 전이며 디트로이트도 제대로 부상하기 전이다.[32] 보통 대학선수들은 30여경기를 소화하기 때문에 첫 시즌에 다소 체력이 딸리는 경우가 많다. 이게 드러나는 게 보통 50여경기쯤 소화한 후반기이며, 이걸 rookie wall라고 부른다.[33] 다만 3점 슛 성공률은 17.3%란 처참한 성공률을 보였는데, 이때는 그가 아예 3점 슛을 거의 던지지 않는 시기라서(경기당 시도횟수 0.6개) 시간에 쫓겨 던지는 삼점슛이 대부분이라 별 의미는 없다. 사실 NCAA는 조던이 프로데뷔한 이후에야 3점 슛을 도입했기 때문에 조던은 삼점슛 자체에 대한 경험이 없었으며 이 때문에 초창기에 외곽슛 능력이 떨어졌었다.[34] 조던 이전에 주득점원이었던 선수로 득점력은 좋았지만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은 현저히 부족했다. 실제로 그가 이끌던 84승 불스는 꼴찌권이었으며, 1985-86 시즌에 조던이 부상으로 결장하자 울리지는 게속 건강히 뛰며 20점을 올려줬음에도 팀성적은 곤두박질쳤다. 한마디로 울리지의 활약여부는 팀성적과 별 상관이 없었으며 이후 뉴져지 네츠, 레이커스, 덴버, 밀워키, 필라델피아를 돌아다니는 저니맨이 되어 커리어를 마무리했다.[35] 당시 해설자가 "발목에 문제가 있는 듯 보인다"고 해서 발목부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있는데, CAT 검사 결과 발에 금이 갔다고 보도가 났으며 다큐 라스트 댄스에선 당시 불스 팀닥터가 발 골격 모형을 들고 구체적으로 발의 어디가 금이 갔는지 설명까지 한다.[36] 이 사실은 팀에 비밀로 했다가 복귀하면서 "내 발 다 나았다"는 근거로 본인이 밝혔는데, 이 말을 들은 크라우스 단장은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37] 조던은 2년차 시즌 이후 불스에서 뛴 11시즌동안(95년은 시즌 막판에 복귀해 실질적으로 10시즌) 총합 7경기를 결장했고 그 중 2경기는 리그 징계로 인한 결장이었다. 88-89시즌에 사타구니 부상으로 1경기를 결장하고, 91-92시즌에 유타 재즈와의 경기 중 심판에게 항의 도중 심판을 들이받아 1경기 징계를 받아 결장, 92-93에는 발 부상으로 총 3경기, 그리고 인디애나의 레지 밀러와의 싸움으로 1경기 징계를 받았다. 플레이오프에선 커리어 내내 단 한 경기도 결장하지 않았다. 즉, 10시즌간 부상으로 쉰 경기가 총 5경기이다.[38] 동부 9위 클리블랜드를 단 한 경기 차이로 제친 불스는 조던이 전후반 14분씩으로 출장시간을 조절받고 있던 시기에 페이서스와 붙어 치열한 접전을 펼쳤는데, 당시 스탠 알벡 감독은 매니지먼트로부터 "허용된 출전시간보다 단 1초라도 더 출장시키면 당신은 당장 해고"란 말을 들었다. 당시 조던은 28분동안 야투 19개 중 12개를 넣으며 26점, 팀공격을 앞두고 있었는데 역전찬스를 코앞에 두고 교체당하자 답답해하며 "제발 좀 뛰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감독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때 극적으로 위닝샷을 넣은 게 당시 벤치에서 출전하고 있던 가드 존 팩슨이었다. 조던은 팩슨을 상당히 신뢰했는데, 이렇듯 실력 자체는 모자랐지만 깡다구 있는 플레이를 종종 보였기에 신뢰가 깊었을 지도. 단 한 경기 차이로 포스트시즌 막차를 탔기에 만약 시카고가 이 경기를 졌으면 탈락했을 수도 있다.[39] 2018년 기준으로 역대 7위.[40] 바로 이 경기. # 49초 짜리 하이라이트 영상이다. 조던이 크로스 오버 연타로 래리 버드를 농락하며 점퍼를 집어넣는 모습은 17초부터 나온다.[41] 참고로 이때 마이클 조던이 신고 있던 에어 조던 1의 경우에는 치료를 위한 발목 지지대가 결합된 에어 조던 1 스트랩 버전을 장착하고 뛰었다. 전세계에 단 두족만 제작 되었고 둘다 마이클 조던이 실착했다.[42] 이외에도 1971년 벅스, 2017년 워리어스가 거론된다.[43] 실제로는 저 정도로 극찬하는 뉘앙스가 아니라 그냥 나름대로 친분이 있는 편인 동년배를 적당히 립 서비스로 띄워주는 느낌이었다. 당장 김성근 본인도 김응용의 저 발언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내가 신이면 신을 이긴 자기는 뭐가 되는 거냐'라고 말하면서 웃어넘긴 바 있다.[44] 2004년 핸드체킹룰 개정 이후 60점 이상 초고득점 경기가 예전에 비해 잦아지면서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공감을 못하는 이들도 있는데, 플레이오프에서 60점을 넘긴 선수는 아직도 조던과 엘진 베일러(62년 파이널/61점) 뿐이다. 마이클 조던이 97년 플레이오프에서 55점을 넘긴 이후 지난 25년간 플레이오프에서 55점을 넘긴 케이스는 2003년 앨런 아이버슨(55점), 2020년 도노반 미첼(57점), 2021년 데미안 릴라드(55점), 2023년 지미 버틀러(56점)까지 단 네 번 뿐이다.(조던은 커리어 통틀어 5번 넘겼다) 저 외에는 윌트 체임벌린(56점/62년), 찰스 바클리(56점/94년), 릭 베리(55점/67년) 뿐이다. 즉 2020년대 공격농구 트렌드가 열리기 전까지 60년대 2번, 70년대 0번, 00년대 1번, 10년대 0번이었던 55+경기를 80년대에 혼자 2번, 90년대에 3번 한 게 조던이다. 조던을 제외하면 90년대에 55점을 넘긴 선수는 바클리 뿐이고, 80년대엔 아무도 없다. 80년대는 리그 전반적인 페이스가 빨라 전체득점 자체는 높은 편이었지만, 선수들의 전반적인 사이즈가 커지고 기술이 발전한 것에 비해 아직 선수보호를 위한 룰이 도입되기 전이라 굉장히 피지컬한 시대여서 초고득점 경기의 빈도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정규시즌까지 통틀어도 80년대에 조던 외에 60점을 넘긴 선수는 래리 버드 한 명/한번 뿐이다.(조던 5번).[45] 조던의 이 시즌은 일반적으로 역대 최고의 단일 정규시즌 퍼포먼스로 불린다. 전 경기 선발 출장에 평균 야투 시도가 25개에 가까웎음에도 야투율 53%의 효율로 무려 평균 35.0득점을 몰아넣었고, 수비에서도 자그마치 평균 3.2 스틸에 가드가 평균 1.6 블락을 기록하여 수비왕에도 올랐다. 아직까지도 수비왕과 득점왕을 한 시즌에 석권한 경우는 조던의 87-88 시즌이 유일하다.[46] 그러나 하필 피펜이 입단한 이후에야 1라운드를 통과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조던 안티들의 유서깊은 개드립인 "조던은 피펜 없이는 1라운드 통과도 못했다"는 생억지가 나오게 됐다. (한국보다 미국에서 이런 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고, 아직까지도 유튜브에 조던 경기가 나오면 달리는 단골 댓글 중 하나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루키 시즌인 87-88시즌 피펜은 1라운드 5차전이 되어서야 주전으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플레이오프 통틀어 10경기 중 6경기만 주전, 평균 29.4분을 뛰며 평균 10점 5.2리바운드 2.4어시스트를 기록하는 평범한 롤플레이어였다. 심지어 88-89시즌 초반엔 주전도 아니었다가 샘 원래 주전 포워드로 낙점되었던 브래드 셀러스가 형편없는 기량을 보이자 초중반부부터 주전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989년까지 아무런 수상이력도, 심지어 올루키 이력도 없던 피펜이 팀 전력에서 차지하는 지분은 미미했다.(다만 1988년까진 올-루키 퍼스트 팀까지밖에 없긴 했다. 물론 올-루키 팀이 세컨드 팀까지 있다고 해고 루키 시즌 당시 평균 20분 좀 넘게 뛰던 피펜이 선정되진 않았을 것이다)[47] 1980년대에는 선수생명이 전체적으로 짧았다.[48] 후술될 디트로이트의 '조던 룰' 만큼은 아니라도 80년대 NBA는 지금보다 훨씬 거칠었고 전술도 외곽보다는 골밑위주로 돌아갔기 때문에 자연히 돌파하던 조던이 거친 파울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잦았는데 조던이 그렇게 나뒹굴때마다 상대에게 경고해주고 때로는 싸워주던 문자 그대로 보디가드 역할을 해주던게 찰스 오클리였다.[49] 그 외에 사족이지만 사실 조던은 시카고 GM인 제리 크라우스를 상당히 싫어했다. 비만으로 고생하는 제리가 버스에 올라탈 때마다 짐승 울음소리를 흉내냈다는 일화도 있으며 명전 연설에서는 제리를 지목하면서 저 양반은 내가 안 불렀는데 왜 왔냐고 까기도 했다. 물론 조던만 제리와 사이가 개판이었던 건 아니고, 스카티 피펜 역시 항목에 언급되어 있듯이 연봉 관련해서 짠돌이 제리와 대립한 적이 있으며 필 잭슨도 구단과의 마찰이 심해 두 번째 쓰리핏을 달성한 후 반강제로 나가버렸다.[50] 시즌 극초반에 불스의 스몰 포워드 주전은 브래드 셀러스란 선수가 차지했는데, 무려 7피트에 달하는 스몰 포워드였으나 외곽플레이를 하기엔 기술이 부족하고 골밑에서 뛰기엔 파워가 부족한 트위너였다.. 나름 상위픽으로 뽑힌 기대주였으나 이 시즌 이후 트레이드, 이후 NBA에서 조금 더 뛰다가 버티지 못하고 유럽으로 넘어간다.[51] 영어에서 the ~라고 하면 별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대단한 뭔가를 뜻한다. 이는 NBA 역사상 최초로 시리즈 최종전에서 나온 시리즈를 결정짓는 버저비터였으며, 이 기록은 30년간 유지되다가 2019년 토론토 랩터스카와이 레너드가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한 7차전에서 버저비터로 승리하게 된다. 7차전에서 나온 최초의 시리즈 위닝 버저비터. 다만 지고 있는 상태에서 최종전에서 버저비터로 승리한 것은 아직도 조던의 더 샷이 유일하다.[52] 물론 생각해보면 쓸만한 조력자 하나 없이 우승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며, 위에 언급됐다시피 불스는 엄청난 전력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던의 존재만으로 디트로이트의 가장 버거운 도전자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언론이나 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데뷔하자마자 뛰어난 기량을 보였던 유잉에게도 뉴욕 팬들은 바로 팀을 우승권으로 못 이끈다며 야유를 퍼부었다.[53] 이 말은 비유가 아니었다. 실제로 1987-88 시즌 당시 집중수비에 시달리던 조던은 53.5%로 35점을 넣었는데 받아먹기만 하던 동료들을 제치고 팀 내 야투율 1위였다. 그 다음 시즌에도 53.8%로 팀내 1위는 조던이었다. 그 다음 시즌엔 2.3점 넣은 닐리가 0.3% 높았지만... 진짜로 조던이 더블/트리플 팀 제치고 던지는 게 와이드 오픈 상태의 동료들보다 성공률이 높았던 것이다. 90-91시즌이 되어서야 팩슨, 그랜트, 벤치에서 윌 퍼듀 등 공격 성공률이 높은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하나 이때도 조던은 가장 성공률 높은 공격수 중 하나였다.[54] 그러나 이때 피펜은 아직 확실한 올스타는 아니었던지라 90-91시즌에는 선정되는데 실패한다.[55] 일종의 지역방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핵심적인 요소가 다르다. 지역방어는 각 선수가 한 지역을 맡아 수비하고 공격수가 자신의 지역에 근접하면 견제하는 정도이다. 실제로 지역방어는 NBA급으로 운동능력과 돌파가 뛰어난 선수들이 있으면 막는데 거의 효과가 없으며, 지역방어 도입 전후로 앨런 아이버슨같은 단신 돌파형 선수들의 득점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조던룰은 오직 한 선수인 조던만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선수들에 대한 수비를 상당부분 포기하면서까지 조던 한 명만 막으면 된다는 전술이다. 후술되듯이 돌파할 때마다 더티하기로 유명한 디트로이트 선수들에게 한대씩 돌려맞는건 기본이다.[56] 손으로 밀고 당기면서 공격수를 견제하는 것.[57] 상대에게 부상을 입힐 수도 있는 도를 지나친 신체접촉에 주는 파울로 플래그런트 1을 두 번 받으면 퇴장, 2를 받으면 즉시 퇴장이다. 90년대에 도입.[58] 기사에 나오지만 대놓고 레슬링무브 (크로스라인)을 해서 선수를 거꾸러뜨린 멕헤일이 벌금도 징계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앤드류 바이넘이 J.J. 바레아에게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비슷한 행위를 했을때 5경기 출장정지에 2만5천달러 벌금, 거기에 팬들로부터 거의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참고로 멕헤일은 이렇게 거친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원래 아니라 얌전한 선수였다. 물론 멕헤일의 파울은 당시 기준으로도 심한 파울이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조던은 이런 파울을 거의 일상적으로 당했다는 것이다.[59] 주전 중 팩슨은 자유투가 조던과 비슷했고, 크렉 하지스는 성공률이 조던보다 훨씬 높았지만 후보라 출장시간이 매우 적었다.[60] 뉴저지에 위치한 리플레이 센터에서 경기장의 심판들과 함께 리플레이 판독 후, 한 경기 플래그런트 두개면 무조건 퇴장, 강도가 심한 플래그런트 파울이면 즉시 퇴장, 시즌에 걸쳐 일정 갯수 이상 플래그런트 파울하면 누적형 징계, 벌금 강화 등[61] 물론 주된 대상은 당연히 조던이었다. 조던이 받는 견제와 피펜이 받는 견제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피펜은 돌파만 견제하면 됐지만, 조던은 공 잡기 전부터 물고 늘어져야 했다.[62] 당연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활약이다. 다만 그 전까지 조던은 대괴수급 활약을 펼쳤는데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한 점. 또한 플레이오프에서 안 그래도 그닥 수준이 높은 편이 아닌 동료들이 단체로 버로우한 것(피펜은 이때 첫 올스타에 오르긴 했지만 우승을 노리는 팀의 2옵션으로는 많이 모자란 감이 있었다.)을 생각하면 저 정도로 디펜딩 챔피언을 꺾긴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이 시즌 우승한 디트로이트를 7차전까지 물고 늘어진 유일한 팀이란 점에서 불스가 디트로이트에게 얼마나 버거운 도전자였는지 짐작이 가능하다.[63] 실제로 위의 설명처럼 다소 가벼운 몸을 가지고 있었던 조던은 이 이후로 근육을 본격적으로 불리면서 포스트업 등 힘을 쓰는 면에 있어서 더 강해졌고, 정신적으로도 디트로이트의 거친 수비를 이겨냈기에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64] 물론 디트로이트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자세한건 아이제아 토마스(1961) 항목 참조[65] 일부 농구팬들 사이에선 토마스가 부인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건 명백한 거짓이다. 아이제아 토마스 항목에도 나오지만 토마스는 조던을 따돌렸다는 낭설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부인한바있다. 가장 최근인 22년 7월 7일에 토마스는 트위터로 조던에게 "거짓말 좀 그만하고 사실을 말해." 라고 직접적으로 조던을 비판했다.#. 요지는 그런 낭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확실하게 사실이라는 근거 역시 딱히 존재하지 않고, 토마스가 그것에 대해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토마스의 견해는 아이제아 토마스 항목에도 잘 나와있다.[66] 물론 조던 본인은 라스트 댄스에서 아이제아가 자신을 따돌렸다고 주장했으나, 이전 인터뷰에서는 그런것 같지 않다고 이야기 한적도 있으니 본인 역시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꾼 경력이 있다.[67] 사실 80년대 NBA의 스타플레이어 치고 디트로이트에 좋은 감정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찰스 바클리는 배드 보이즈의 센터 빌 레임비어의 은퇴소식에 'Dear Bill, Fxxx You. Love Charles'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68] 조던 때문에 승선 못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아이제아 토마스의 동료이자 절친인 존 샐리가 토마스의 드림팀 1기 합류를 막은 것은 조던이 아니라 매직이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69] 웬만한 선수의 커리어 하이라고 할 법한 수치고, 실제로 7회나 파이널을 밟은 코비 브라이언트는 이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한 적이 딱 한 번 뿐이지만 정작 조던은 6번의 파이널 중 두 번째로 낮은 평균득점이다.가장 낮은 평균 득점은 1996 파이널 27.3(...),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 10번의 파이널에서 평균 31점을 넘은 적은 3번이다.(15, 17, 18)[70] 2차전에서 조던이 파울 트러블에 걸리자 불스가 피펜을 매직에게 붙히고 그가 훌륭히 막은 것 때문에 주 매치업이 피펜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스카티 피펜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2차전을 제외하고 매직을 막은 건 거의 조던이었다. 피펜이 매직을 막는다면 조던은 워디를 막아야하는데, 워디 역시 공격력이 좋은데다 신장과 체급도 매직 못지 않아 매치업을 바꾸는 게 크게 의미가 있지는 않았기 때문.[71] 실제로 두 선수는 둘 다 해당시즌 퍼스트팀에 들었으며 MVP투표에서 나란히 1, 2위를 했다.[72] 당연히 파이널 역대 최다[73] 이후 범인들은 1996년 1급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23년 8월 6일 디메리는 가석방되었으나 그린은 가석방 심사에서 탈락하여 지금도 복역 중이다. 둘은 지금도 총을 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며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74] 매일 200~800회의 스윙 연습을 했다고 한다.[75] 조던은 이때 실린 비난기사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이후 SI 표지 모델로 서는 것을 거부했다. 이후 SI의 50주년 기념 커버는 수락했지만 특집 인터뷰는 거절했다고.[76] 그 이전에 조던이 야구에 힘을 쏟은 건 17살 고등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농구 은퇴를 선언하고 다시 야구를 시작한 1993년 여름에 그의 나이는 30살이었다.[77] 사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조던이 데뷔한 직후에 메이저 리그 로스터 자리를 오퍼하긴 했다. # 이건 말 그대로 조던 특수만을 노린 계약인데,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했던 조던은 이를 거부했고 화이트삭스는 그가 마이너에서부터 과정을 밟아가게 했다.[78] 조던은 라스트 댄스에서 이 기사에 대해 열받았던 이유가 SI가 자신을 인터뷰 하지도 않고 지 맘대로 기사를 쓴 것이었다고 하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면 될 것을 속된 말로 뇌피셜로만 기사를 썼다고 했다.[79] 사실 이 정정기사가 정상적으로 발행됐으면 조던의 야구실력에 대한 오해가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예나 지금이나 자극적인 얘기를 원한다. "영웅의 추락"이란 소재가 "농구영웅이 노력해서 그럭저럭 쓸만한 프로 야구선수가 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눈길을 끌기 때문.[80] 일반적으로 도루의 가치는 성공 시 +0.2, 실패 시 -0.4로 간주하며 도루 성공률이 64% 미만이면 음수 가치, 64% 이상이면 그나마 양수이기는 하나 최소 70%는 넘겨야 도루를 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81] 마이너 리그에서 선수의 실력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게 성장세다. 서두에 언급됐듯이 조던의 원래 실력은 더블A 미만, 즉 루키 리그나 잘해봐야 싱글A급이었다. 그런데 더 높은 수준인 더블A에 넣어놓으니까 혼자 독하게 훈련하더니 시즌 끝날 때쯤 더블A에서도 수준급 선수가 됐다. 그렇다면 그냥 더블A에서 무난히 뛰게 하는 것보다는, 수준이 더 높은 트리플A에 투입해서 얼마나 성장할지 보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심지어 이 모든게 불과 1년만에 이뤄졌다. "1년만에' 싱글A 레벨에서 트리플 A레벨로 올라가는 선수라면 굉장한 성장세다. 나이가 많이 커리어가 짧고 부상위험이 더 크다는 게 걸릴 뿐. 사실 부상 위험이 크다는 것도 단순히 비슷한 나이의 선수들의 경우에 대입해 한 추측일 뿐이고, 조던은 2년차 이후 한 번도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며 이후 농구로 복귀해 농구에 적합한 몸으로 몸을 바꾸는 과정+만 32~35세까지 3시즌 넘게 뛰고 경기당 40분 가까이 뛰면서도 단 한경기도 부상으로 결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상위험이 큰 것도 아니다. 실제로 당시 조던의 메이저행을 논하는 기사들 중에 부상 위험을 언급한 기사는 없었다. 30대 중반까지의 조던은 10~15살 어린 선수들보다도 부상을 적게 당하는 선수였다.[82] "조던은 선수들이 피켓을 들고 있는 선을 지나고 싶지 않았으며, 또한 그는 구단주들이 티켓을 팔기 위한 방법인 "대체선수"로 여겨지는 걸 꺼렸다. # "조던은 화이트삭스에 대체선수로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기사도 있다.[83] 만약 조던이 단순히 메이저 무대를 밟는게 목표였다면 앞서 언급된 오클랜드의 오퍼를 받아들여 94년에 바로 MLB선수로 데뷔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조던은 순수히 자신의 실력만으로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고 싶었기에 마이너행을 택한 것이다. 인정받는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 1년간 고생을 했고 트리플A행을 앞두며 메이저가 가시권에 들어왔는데, 이제와서 대체선수로 메이저에 간다는 건 그동안의 고생이 헛게 되는 셈이다.[84] 사진의 출처는 ’더 스코어‘ 공식 트위터. 해당 자료는 조던의 에이전트인 데이비드 포크가 운영하는 페임사가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인데, 이를 통해 조던이 직접 밝힌 말은 단 한 마디이다. "I'm back".[85] 이때 불스의 로스터 중 조던과 오래 뛴 선수들은 스카티 피펜과 B.J 암스트롱, 월 퍼듀 정도였고 나머지는 그냥 초면이나 다름없었다. 필 잭슨이 자서전에서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피펜이나 암스트롱, 퍼듀는 조던과 1차 쓰리핏을 함께했기 때문에 조던에 대해 잘 알았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조던의 경기만 봐왔지, 함께 뛴 적은 없었으므로 팀이 막상 위기에 닥쳤을 때 조던만 바라보았다고 회고했다. 물론 조던도 새로운 동료들의 성향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기상황에 이들과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86] 물론 이건 당시의 사태일 뿐, 조던이 23번으로 복귀하고 더 이상 발매되지 않게된 45번 유니폼들은 이후 미친듯이 프리미엄이 붙었다. 지금은 구하기도 어렵고, 구하려면 가격대는...[87] 1차 3연패 당시 골밑을 지키던 센터 빌 카트라이트와 파워 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 모두 팀을 떠났으며, 당시 주전 빅맨은 노화한 카트라이트도 못 밀어내고 백업을 맡던 윌 퍼듀, 그리고 유럽에서 가드 겸 포워드였던 토니 쿠코치였다(쿠코치는 NBA에서 스몰 포워드를 주 포지션으로 삼게 된다).[88] 조던도 인간인지라 클러치슛을 놓친 적도 여러번 있지만, 최소한 클러치 순간에 자신감을 잃고 폭탄 돌리기를 할 선수는 아니었다. 3점 슛으로 버저비터를 넣은 적도 있고, 몰려드는 수비 때문에 더블클러치로 던지더라도 항상 자신감 있게 마지막 슛을 던지던 선수였고, 그가 마지막 슛을 양보할 때는 1997 파이널 6차전처럼 아예 전부터 다른 선수가 던지도록 작전을 짰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생뚱맞게 슛을 잘 쏘는 것도 아닌 피펜에게 준 건 감을 잃었다는 소리. 사실 95시즌 막판 조던의 기량은 (비록 농구용으로 몸을 만들기 전이었지만) 95-96시즌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8개월동안 농구공을 놓은 영향이 없을 순 없었고 이게 심리적인 악영향을 미친 게 바로 이 플레이.[89] 만약 마피아가 보복살해했다면 당연히 이들은 경고를 위해 살해 이후 조던에게 메시지를 남겼을 텐데, 조던의 아버지 제임스가 실종된 지 며칠동안 조던 가족은 실종신고를 했고 경찰도 실종사건으로 처리했을 정도로 이들은 제임스가 살해됐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90] 당시 조던은 실력에 비해 낮은 연봉을 받은 시즌이 많았지만 연봉에 별다른 불만을 표한 적이 없었다. 조던 역시 피펜과 마찬가지로 장기계약 체결 당시엔 후했던 대접이 샐러리캡이 올라가면서 노예연봉이 된 케이스인데, 예를 들어 96시즌에는 만장일치를 간발의 차이로 놓친 MVP가 고작 리그 32위에 해당하는 385만달러를 받고 뛰었다. (제리 크라우스 단장을 싫어한 건 개인적 비호감과 전력보강에 인색한 태도 때문이었다) 물론 조던이 돈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광고수익으로 이미 NBA선수들 중 독보적인 수입을 올리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이 말은 뛸 동기가 없는데도 뛸 이유 굳이 돈 때문에 계속 뛸 이유도 없었던 것. 실제로 조던의 재산은 연봉과 크게 상관이 없었으며 1998년 은퇴할 때 5억 달러 정도였던 재산이 은퇴 후 한때 20억 달러 이상까지 불어나기도 했다.[91] 조던이 집중할 때 혀 내미는 버릇은 아버지를 따라하다 얻은 것이다. 실제로 제임스 조던은 조던의 친구들 모두와 친분이 있을 정도로 조던과 각별한 사이였으며, 정신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92] 실제로 사무국장(총재로 흔히 번역됨)는 구단주들의 투표로 인해 짤릴 수 있지만, 구단주들은 (도널드 스털링처럼 대놓고 인종차별같은 미친 짓 하지 않는 이상) 철밥통이다. 당연히 자기 돈으로 산 자기 회사(구단) 운영하는 거니까...스털링 사태에 대해 더 설명하면 스털링에 대한 반발이 리그 차원으로 번지자 NBA는 그에게 NBA 리그 참여에 관한 모든 권한을 금지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구단 판매를 강제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구단에 개입하는게 불가능해진 그가 마침 접근한 스티브 발머에게 당시 기준 역대 최고 액수로 팀을 판 것이다. 스털링 입장에서도 손해보는 일이 없는 비지니스 디시젼이었으며, 만약 그가 '니들은 떠들어라. 나는 죽어도 안 판다"는 식으로 강짜를 부릴 경우 NBA가 이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없다. 최대한으로 하면 클리퍼스의 리그 참여를 금지하는 초강수를 둘 수는 있겠지만, 연방정부도 아닌 NBA사무국이 휘하 조직도 아닌 클리퍼스의 소유권을 두고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93] 법적으로 따지면 조던은 제리 라인스도프의 피고용인이자 계약직 사원이지 데이비드 스턴의 피고용인이 아니다. 구조상으로 보면 제리 라인스도프가 대주주로 있는 법인(시카고 불스)이 다른 법인들과 공동 사업(리그 운영)을 하는데 중립적인 입장의 중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고용한 것이 사무국이다. 조던 같은 근로자 입장에서는 리그에서 뛸 때는 사무국이 정한 규칙을 따라야하지만, 퇴직하는데는 고용주인 구단주와의 합의만 필요할 뿐 제3자인 사무국이 애초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 구단주들이 리그 운영에 대한 전권을 사무국에 맡겼기에 사무국은 규정을 어긴 선수에게 리그에 참여할 수 없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고용-퇴직은 당연히 구단주와 근로자 사이의 계약인데 여기에 무슨 권리로 사무국이 개입하겠는가? NBA 사무국-구단주의 구조가 일반 조직과 다르다보니 막연하게 총재를 구단주들보다 위에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혀 다르다.[94] 그의 개인 트레이너 팀 그로버는 6차전 패배 이후 평상시처럼 조던이 휴식기간을 가진 거라 생각해 "언제부터 훈련할 건지 얘기해줘요"라고 말했는데 조던은 바로 "내일 봐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후 95 오프시즌에 그는 계약에 따라 스페이스 잼 영화를 촬영했는데, 오히려 그는 이걸 기회로 삼아 제작사가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에 지어준 체육관에 NBA정상급 선수들을 초청해 매일 픽업게임을 하며 경기 감각을 되찾고 . 레지 밀러 회고에 따르면 조던은 하루 종일 촬영, 픽업게임, 그외 별개 개인훈련을 매일같이 했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뱀파이어 같았다"고 평했다.[95] 15-16시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73승 9패로 이 기록을 경신하였으나 우승은 하지 못했다. 1995-96 시즌 시카고 불스가 플레이오프 포함 87승 13패를 했으나 15-16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화려한 정규 시즌에 비해 플레이오프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진해 그 해 88승 18패를 하였다.[96] 이 시리즈 평균 득점이 27.3점이었다. 조던의 파이널 평균 득점은 33.6점.[97] 리바운드가 최대 강점인 선수가 플레이오프 통틀어 평균 한자리수 리바운드를 기록했을 정도.[98] 현실적으로 이해 합류한 앨런 휴스턴, 래리 존슨은 영입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차피 존슨은 이때 부상 이후 기량 저하와 애매한 롤로 큰 역할은 못했고 (12점 5리바운드), 휴스턴이 조던으로 대체되는 꼴. 게다가 평생 위력적인 2옵션 스코어러, 최상급 골밑 공격수와 뛰어보지 못한 조던이 유잉과 뛴다면 수비가 분산되어 물만난 고기처럼 골밑을 휘저을 수 있고 당시 짧은 3점 슛 라인에서 외곽을 퍼부을 수도 있다. (조던은 96시즌에 3점 슛 성공률 40%, 97시즌엔 38%를 기록) 반대로 유잉은 2옵션으로 조던에게 수비가 몰린 틈을 타 장기인 중거리슛이나 포스트업 득점으로 편안히 득점 가능하다.[99] 1995-96 시즌 그들이 최고 승률 기록을 세우기 전의 기록인 윌트 체임벌린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동률의 기록이다.[100] 역사상 통틀어 버드와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세 명이 전부인데, 러셀과 체임벌린은 선수들이 MVP 투표를 하던 시기 수상자들이기 때문에 현 시스템(스포츠 언론인들의 투표)으로 바뀐 후 3연속 수상자는 버드 뿐이다. 압도적인 선수가 있을 경우 보통 MVP 2연패까지는 많이 가는데, 버드는 세 번째 해에 개인기량도 압도적이었고 셀틱스가 67승을 거두며 그의 커리어 최고 팀성적은 물론 1980년대 통틀어 최고 성적을 거뒀기 때문에 안 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이 때 획득가능 1위표 78표 중 73표를 받으며 무난히 수상했다. 즉 3연속 MVP를 타려면 독보적인 실력을 지닌 선수가 3년 연속으로 건강히 뛰며 뛰어난 실적을 올리고, 3년 연속으로 팀이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특히 세 번째 해에 유독 돋보이는 성적을 내야한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를 반복한 선수는 없는 것이다. 조던 본인의 경우 93시즌엔 팀성적이 삐긋(67승->57승)했고, 2000년대에 팀 던컨과 스티브 내쉬는 애초부터 그렇게까지 독보적인 MVP는 아니었으며, 2010년대 르브론 제임스도 마찬가지로 팀성적이 크게 떨어졌고(66승->54승), 2021년의 야니스 아데토쿤보도 승률이 떨어졌다(단축시즌이라 승률로 대신/승률 76.7%->63.9%)[101] 참고로 선수들의 투표로 이뤄진 스포팅 뉴스 '올해의 선수' 투표에선 조던이 102표, 말론이 27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조던이 승리했다.[102] 예를 들어 수십년간 스포츠 언론인 생활을 해왔으며 ESPN에서 이빨을 열심히 터는 스킵 베일리스나 스티븐 A 스미스는 투표권이 없다. 반면 터너 스포츠의 터줏대감 어니 존슨이나 NBA 2K시리즈로 익숙한 도리스 버크는 투표권이 있다. 참고로 79-80시즌까진 선수들의 투표로 뽑았다.[103] 물론 위에 언급된 선수들은 모두 좋은 선수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해당 시즌 활약이 MVP 투표 5위 안에 들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스탁턴은 좋은 선수지만 저때 그는 은퇴가 가까웠으며 올스타에 못 뽑힌지도 4년째가 된 하락세의 노장이었고, 브라운과 캠비는 커리어 롤플레이어, 1999-00 시즌의 아이버슨은 올-NBA 세컨드 팀에 든 슈퍼스타였지만 이때 그가 역사상 최고의 퍼포먼스 중 하나로 거론되는 1999-00 시즌 오닐의 활약보다 좋은 시즌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104] 스티브 커의 회상에 따르면, 조던은 4차전에서 비슷한 상황이 있었을 때 커를 마크하고 있던 존 스탁턴이 자신을 더블팀하기 위해 달려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자신에게 그렇게 지시했다고 한다.[105] 제리 크라우스 단장이 피펜의 비시즌 자선경기 출전을 반대했는데, 이 과정에서 크라우스의 구단의 재산 운운한 발언에 빡 돌아버린 피펜이 자선경기를 기어이 치르고 수술하면서 시즌 절반의 결장이 불가피해졌다.[106] 개막전부터 중위권 팀도 안되던 보스턴 셀틱스에게 7점차 패배를 당하기도 했는데, 이때 주전라인업은 조던-론 하퍼-토니 쿠코치-제이슨 캐피-룩 롱리였다. 로드맨은 벤치에서 24분 뛰며 10점 9리바운드를 기록.[107] MVP투표에서도 116표 중 92표를 얻으며 무난히 수상했다.[108] 트라이앵글 하에서 조던은 볼핸들러(피펜)에게서 볼을 받는 스트롱사이드 윙과 포스트맨(꼭지점)의 역할을 번갈아가면서 하게 되는데, 공격력이 무서운 선수가 조던밖에 없는 불스 특성상 이렇게 되면 오픈 찬스가 나는 선수는 위크사이드에서 윙플레이어나 조던이 꼭지점에 있을때 빅맨들이다. 반면 조던은 기본적으로 수비가 몰리게 된다. 조던은 다른 선수들이 꼭지점 위치에 들어가 볼을 돌리는 동안 스크린을 활용해 수비를 떼내면서 오픈찬스를 노리게 되는데, 당연히 다른 선수에게 수비가 몰려야지 조던에게 오픈찬스가 더 많이 나게 된다. 그런데 피펜이 빠지면 팀 내에서 secondary ball-handler인 조던이 메인 볼핸들러를 하면서 당연히 스트롱 사이드에서 윙과 포스트맨의 역할까지 해야하고, 당연히 킥아웃 찬스가 나기 힘들다. 스크린을 타고 오픈을 만들더라도 3점 라인 밖에서 오픈 찬스는 거의 없는데다, 괜찮은 득점력이 있는 동료가 거의 없으니 수비가 몰리는 상황에선 필드골 성공률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109] 이런 면에서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토니 쿠코치인데, 사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쿠코치의 위력을 잘 살릴 수 있는 전술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한달동안 쿠코치는 12.9점 야투성공률 43.2%에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피펜이 복귀하던 1월 10일 전까지 쿠코치는 15.4점/47.2%로 (아직 위력이 모자라지만) 조금 더 안정적인 2옵션 역할을 해줬다. 작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저 정도의 수비 분산으로도 조던의 경기력엔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첫 한달동안 조던은 27.6점에 야투 42.8%를 기록했으나, 저 두 번째 구간동안은 29.7점/46.8%를 기록했다. 위에 언급된대로 팀성적이 올라간 것은 덤. 계속 설명되는 부분이지만 팀에서 단 한 명만 슛이 들어간다면 트라이앵글은 절대 돌아갈 수가 없다.[110] 오히려 대다수가 노장인 불스 멤버들은 "이번이 마지막"이란 의식을 갖고 열심히 뛰었다. 좋은 실력과 별개로 꾸준히 사고를 쳐온 데니스 로드맨은 (시즌 중반에 휴가 가겠다고 억지 부려서 빠진 것을 제외하곤) 불스 이적 이후 가장 성실히 뛰었다.[111]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제리 라인스도프 구단주였다. 마이클 조던-라스트 댄스에서도 나온 내용이지만 라인스도프는 큰 돈을 써가며 불스 왕조를 유지할 계획이 없었고, 98년을 마지막으로 자유계약 선수가 되는 33세 노장 피펜에게 거대장기계약을 쥐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미 노쇠화 기력이 역력했던 로드맨도 마찬가지. 그가 무조건 잡고 싶어했던 선수는 조던 뿐이었지만, 조던은 조던대로 잭슨, 피펜, 로드맨이 다 떠난 리빌딩 팀에서 말년에 고생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조던은 우승권인 불스왕조를 유지하고 싶어했지만, 스포츠 매니아기보다는 비지니스맨은 제리 라인스도프는 큰 돈을 써서 우승을 노리느니 차라리 리빌딩을 원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라스트 댄스"에서 "나는 사실 잭슨을 잡고 싶었다"는 라인스도프의 립서비스를 듣고 조던이 울컥한 게 이 때문. 진짜 그가 잭슨을 잡고 싶었다면 시즌 내내 크라우스가 "이번 시즌이 잭슨 마지막"이라고 하고 다니는 걸 용납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112] 밀러가 자기보다 훨씬 무겁고 강한 조던을 밀쳐내기 위해 대놓고 양팔로 밀어 오펜스 파울 논란이 있는 플레이인데, 당시 밀러는 "클러치 상황에선 웬만해선 오펜스 파울을 불지 않는다는 것을 노렸다"고 언급한바 있다.[113] 당시 골밑에 있었던 레지 밀러는 "어라? 들어가잖아?"라고 생각했다고 훗날 회고했다.[114] 둘은 공격적으로 골밑싸움을 하며 각자 공격리바운드를 5개, 6개씩이나 잡아낸다. 피펜은 양팀 최다인 12리바운드 기록.[115] 조던은 밀러같은 선수에게 거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선수였다. 밀러는 운동능력이 비교적 평범하고 1대1 공격력이 떨어지는 대신 동료들의 스크린을 활용하는 능력이 천재적이었는데, 조던은 역사상 스크린을 가장 잘 깨는 선수 중 하나였기 때문. 스크린을 피할 때는 상대가 스크린을 거는 위치와 타이밍을 읽고 예측해 피하거나, 민첩성을 살려 기습적인 스크린을 피하거나, 어쩔 수 없이 부딫혀야 되면 힘으로 (오펜스 파울이 안될 정도로) 밀치고 나오는 것이 중요한데 조던은 세 가지 모두 역대급으로 잘하는 선수였다.[116] 재미있는 점은, 1차 3연패 때도 마지막 92-93 시즌에는 상대였던 피닉스 선즈가 홈 코트 어드밴티지를 갖고 있었다.[117] 딱 이틀 쉰 불스에 비해 재즈는 무려 열흘을 쉬었다. 일주일이 넘는 기간동안 아무 부담없이 시카고가 혈투 벌이는 걸 말 그대로 구경한 것. 두 팀 모두 주축들이 노장들이라 체력적 어드밴티지는 매우 중요했다. 게다가 재즈는 파이널 전까지 6연승을 거두며 모멘텀 측면에서도 최고조에 이르렀다.[118] 98-99시즌 모델인 에어 조던 14 라스트 샷을 처음 착용했다. 지금이야 케빈 듀란트, 스테판 커리 등 후기 시즌 모델을 미리 공개하여 당기 플레이오프에서 신고 나오지만 당시 시그니처 모델을 가진 선수는 당해시즌에만 착용했다. 즉 조던은 이미 이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생각했기때문에 14 매출하락을 미리 대비하여 1998 파이널에 신는 마케팅 능력도 보여주었다. 물론 1995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1995-96 시즌 모델인 에어 조던 11을 착용했지만 당시 조던은 페니, 오닐의 올랜도에 꽤 고전하였 등번호를 45에서 다시 23으로 바꾸는 등 분위기전환 용도로 사용했다.[119] 공격시작 후 4초만에 득점을 성공시켰다. 설령 재즈가 다음 공격에서 24초를 모두 소모해도 마지막 공격권이 불스에게 있었을 상황이었기에, 재즈에게 '반드시 공격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을 줄 수 있는 플레이였다.[120] 특히 상대 손질을 뿌리치는 용도, 스핀 무브를 할 때[121] 농구는 원칙적으로 신체접촉을 금지하는 스포츠이지만, 실제론 몸과 몸이 부딪히는 과정에서 크고작은 접촉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스포츠이다. 바로 전 득점 장면인 마이클 조던의 레이업만 보더라도, 러셀이 핸드체킹을 하는 것 외에(핸드체킹은 당시 룰로선 합법이었다) 손을 뻗어 리치인하는 모습이나 레이업을 하는 순간 왼팔로 조던의 왼팔(슈팅핸드인 오른손은 공의 일부로 간주되지만 그 반대팔)을 살짝 쳤다가 흠칫 손을 빼는 걸 볼 수 있다. 작은 접촉이었기에 실시간으로 봤을 때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슬로모션으로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분명 컨택이 있었다. 조던의 라스트샷도 마찬가지다. 티가 나지 않을 정도의 작은 컨택이었지만(이 때문에 재즈 선수단도 항의를 안 한 것이다. 러셀 본인도 항의 안 한 것을 보면 느끼지도 못했을 수 있다), 슬로모션으로 보니까 컨택이 있었다는 게 밝혀진 케이스. 이런 것까지 전부 잡으면 다이나믹한 농구 진행은 불가능하다. 핸드체킹룰이 금지된 현재에도 저런 미세한 접촉을 다 잡진 않는데, 하물며 당시엔 핸드체킹이 합법이라 현재(2020년대)보다 외곽 공격수와 수비수가 훨씬 신체접촉이 잦던 시점이었다.[122] 1998 파이널 중계만 보더라도 "The Last Shot"을 본 NBC의 밥 코스타스가 "몇 달 후의 일은 누구도 모르지만, 저 슛이 조던의 마지막 슛일 수도 있다." "만약 저게 조던의 마지막 이미지라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스포츠 방송에서 공공연하게 언급될 정도로 다들 예상은 하고 있었다는 것.[123] 97-98시즌 초반 피펜이 부상으로 거의 시즌 반을 날려먹고 로드맨도 자주 결장하면서 팀 성적이 이전 2시즌보다 많이 하락하던 와중에 뉴욕 닉스와 루머가 떴다. 당시 조던은 95-96 시즌에 장기계약이 끝났고, 그 이후 2년은 단년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떨어진 성적이 62승 20패라지만 시즌 중후반에 승률을 끌어올린 것이지, 시즌 초중반엔 진짜 좋지 않았다.[124] 라인스도프가 인터뷰에서 노골적으로 밝혔다시피, 그가 잡고 싶었던 선수는 (비싸지만 돈값을 해주는) 조던 밖에 없었다. 그는 등 문제가 점점 심해지는 33세 노장 피펜을 거액을 주고 잡을 생각이 없었고, 이는 37세 노장 로드맨도 마찬가지였다. 즉 조던이 재계약했더라면 (실제 99로스터보단 보강을 하긴 했겠지만), 거의 원맨팀에 가까운 로스터에서 36세 노구를 이끌고 뛰어야 했을 것. 이 팀은 91년, 조던의 전성기 당시에도 벤치 보강에 돈을 아까워했던 팀이다.[125] 현재도 몇몇 팬들은 제리 라인스도프와 제리 크라우스를 짠돌이 행각에 미쳐서 역사상 위대한 선수의 말년을 초라하게 만든 사람 이라고 까대고 있다.[126] 참고로 위의 장면은 1998년이 아니라 97년에 5번째 우승을 차지한 직후의 장면이다. 홈에서 우승한 후 카메라를 향해 '6번째 우승을 향해 ㄱㄱ'라는 식으로 장난친 거였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127] 이 시즌을 마치고 은퇴하게 된다.[128] 마찬가지로 이 시즌을 마치고 은퇴하는 듯 했지만 앤디 페디트와 함께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가서 팀의 상승세를 돕다가 2007년에 완전히 은퇴했다. 그러나..[129] 해트포드 웨일러스 - 피츠버그 펭귄스 - 캐롤라이나 허리케인스를 거친 센터로, 2004년에 은퇴한 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캐롤라이나 역사상 최고의 센터였다. 이후 그 계보는 에릭 스탈이 이어받게 된다.[130] 라이스는 2004년 시즌을 마치고 2005년에 은퇴하게 된다.[131] 여담이지만 위에 나온 식으로 피펜의 01-02, 02-03 두 시즌의 기록을 통합해보면 10.7점 5.1어시스트 4.8리바운드 1.6스틸 필드골 42.7% 3점 29.7%, 자유투 79.6%가 나온다. 조던과 비교하면 거의 전 항목에서 현저한 열세이며 특히 득점은 두배 정도 차이가 난다. 애초에 올스타급 선수들과 대등하게 맞서던 조던과 달리 당시 피펜은 지극히 평범한 주전급 선수 정도의 위상이었다. 피펜이 조던보다 두살이나 (생일을 생각하면 2년 7개월 차이다) 동생이란 걸 생각하면 조던이 얼마나 사기적으로 몸관리/실력 관리가 됐는지 알 수 있는 부분.[132] 해당 아나운서는 스티브 스캇(Steve Scott)으로 2005-06 시즌 후 물러났다. Public Address Announcing 문서 참조[133] 확실히 저하된 것이 시카고 시절과 달리 수비를 달고 뛰는 점프슛이 상당히 늘어났다. 응? 단적으로 2차 복귀 이후로 이상하게 2단 점프슛을 자주 시도했는데, 그 이유가 스피드와 점프의 약화로 인해 한 번에 다른 선수를 제칠 수 없어서(…)[134] 당시 나왔던 소인배복수[135] 빈스 카터가 2016-17시즌에 24점 경기가 있었는데, 이는 2004년 칼 말론 이후 13년만에 일이었다. 카터는 다음 시즌에 두 차례 20점을 넘겨서 40세 이후 20점을 넘긴 경기가 총 3경기다.[136] 참고로 조던이 40살을 넘기고 난 뒤 30경기 동안의 평균 기록은 39.9분 출장 22.4점 필드골 성공률 46.2% 7.2리바운드 3.4어시스트 1.3스틸 0.5블록 자유투성공률 83.9% 턴오버 2.2개였다. 추가로 당연히 이 30경기는 시즌 후반부였다. 즉, 이 시즌에 조던은 주전출장과 벤치 출장을 오갔던 전반기엔 18.6점 5.4리바운드 4어시스트 필드골 성공률 43.3% 자유투 성공률 81.1% 1.6스틸 0.5블록 턴오버 2.2개를 기록했지만, 일반적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후반기에 오히려 페이스를 끌어올려 평균 득점, 리바운드, 야투성공률, 자유투성공률까지 끌어올리며 더 좋은 활약을 보인 것이다. 게다가 조던은 이 시즌에 전경기를 출장했다. 시즌 평균 출장시간은 37분.[137] 이 득점으로 조던은 윌트 체임벌린을 소수점 둘째자리에서 제치고 역대 최고 평균 점수를 기록할 수 있었다.(소수점 한자리까지 하면 30.1로 동률) 그러나 애초에 이 경기에서 평균보다 낮은 15점을 넣었기에 그냥 나오지 않았다면 이 기록이 위협받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이 경기는 워싱턴 홈도 아닌 원정경기였고 워싱턴은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된 이후였다. 워싱턴은 79경기째인 4월 11일에 37번째 승을 거뒀으나, 같은 날에 동부 컨퍼런스 8위 올랜도가 41승째를 거둠으로서 남은 3경기에서 워싱턴이 전승/올랜도가 전패를 하더라도 역전이 불가능해 플레이오프에 탈락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조던은 40세 노장이 기록을 깎아먹으면서까지 아무 의미가 없는 잔여 3경기에 전부 출전해 그의 생애 9번째 시즌 전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그의 프로의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138] 출장경기수가 60경기 뿐이라 인정되지 않았지만, 만약 인정됐다면 득점 리그 9위에 해당할 기록이었다.[139] 밑에 언급되다시피 부상 전까지는 리그 7위 수준의 기록이었는데, 수치상으론 25.1점/22.9점으로 현재 기준으로 보면 조금 낮아보이지만 당시는 핸드체킹 개정 이전에 지공농구 시절이라 리그 평균 득점이 2020년대보다 훨씬 낮은 시점이었다. 참고로 2021-22시즌 득점 7위는 26.9점을 올린 제이슨 테이텀, 9위는 25.9점을 올린 도노반 미첼임을 감안하면 3년간의 공백을 가졌던 38-39세 조던의 득점력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무릎이 완전히 나가고 무리해 전경기 출장했던 39-40세 구간인 02-03시즌 당시 조던의 20점은 리그 25위.[140] 사족으로 이때 조던이 결장하기 시작한 게 마이애미 전 이후이기 때문에 이때 부상을 당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조던은 킹스전에서 무릎을 다친 이후 수술을 미루고 7경기를 더 뛰다가 아웃당한 것이다. 당시 킹스전을 보면 알 수 있고, 경기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마이애미 전 직후 기사 http://www.espn.com/nba/news/2002/0225/1340423.html를 보면 조던이 무릎이 부어서 경기 마지막 6분 27초동안 출장할 수 없었고, 조던이 2주 반 전에 토마스와 부딫히면서 부상을 당했으며, 그 전에 컴백 준비하면서부터 무릎에 문제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141] 이 평균 득점이 유지될 경우 조던의 기록은 리그 7위에 해당되었을 것이다. 당시 조던은 11월 25.9점, 12월 23.3점, 그리고 1월 26.8점 (부상당했던 킹스전까지 치면 1-2월 26.3점)을 기록했다. 즉, 그는 부상 전까지 안정적으로 25점 언저리를 기록하고 있다가 부상당하고 기록이 15.7점으로 추락했다.[142] 2001-02 시즌 당시 NBA에서 평균 득점 25점을 넘긴 선수는 6명 뿐이다. 또한 조던이 최종적으로 기록한 22.9점보다 높은 평균점수를 기록한 선수는 8명에 불과했다. 다만 조던은 출전경기수가 적어 공식기록으로 인정받진 못했다.[143] 게다가 조던은 오랜 공백 때문에 초반에 기량이 들쭉날쭉했고, 조던은 시즌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감을 찾고 기록이 향상되고 있었다. 조던이 부상을 당하기 직전에 완전히 감을 찾고 10경기동안 29.7점 6.6리바운드 6.1어시스트 야투율 47.2%를 기록했는데, 이 기간동안 조던은 2경기 연속 40점 이상 기록하기도 했다.[144] 당시 워싱턴에서 두 선수 다음으로 높은 득점을 기록한 선수는 평균 10.2점을 넣은 크리스 위트니란 선수로, 30세 포인트 가드였던 그는 워싱턴에서 커리어에서 유일한 두자리수 득점을 했으며 통산 6.5점 2.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 외에 두 자리수 득점을 기록한 선수는 없었으며, 조던을 제외하면 어시스트 4개 이상을 기록한 선수도 없고, 리바운드는 파파이 존스의 7.3개가 팀내 1위였다. 한마디로 팀 성적의 공을 억지로라도 돌릴 수 있는 선수는 해밀턴 외엔 전무했다.[145] 여러모로 신기한 경기인데, 당시 올랜도는 44승을 거둔 중위권 팀으로 워싱턴보다 한 수 위 전력이었다. 그리고 에이스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야투율이 낮았지만 30점으로 어느 정도 제 몫을 해줬다. 그런데 워싱턴에서 코트니 알렉산더란 선수가 무려 32점 7리바운드(야투율 59.1%)를 기록하며 활약한 것. 참고로 알렉산더는 저런 호성적을 낼 만한 선수가 전혀 아니었다. 2000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은 그는 루키 시즌에 댈러스에서 4.2점을 올리다가 가드진이 처참했던 워싱턴으로 와 중용받으면서 17점, 그러나 조던 복귀 이후 벤치롤로 밀려나며 2001-02 시즌엔 평균 9.8점, 2002-03 시즌에는 뉴올리언스로 트레이드되어 7.9점을 올린 뒤 데뷔 후 3시즌만에 NBA에서 사라진 선수다. 이 때 워싱턴은 알렉산더 외에 6명의 선수가 두자리수 득점을 기록했는데, 한마디로 잃을게 없는 선수들이 똘똘 뭉쳐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둔 것. #.[146] 사실 이것도 해밀턴이 8분만에 아웃된 12월 21일 올랜도 매직전을 뺀 것이다. 이때 해밀턴은 경기 극초반에 아웃되어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팀은 18점차 대승을 거뒀다. 이때까지 포함하면 9승 9패가 되지만 어쨌건 해밀턴이 뛰긴 했으니 제외한다. 만약 조던이 12분 뛴 레이커스전도 제외한다면 해밀턴의 성적도 5승 14패가 된다. (승률 26%) 물론 어떻게 보더라도 '해밀턴보다 조던이 팀성적에서 차지하는 지분이 막대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147]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설명을 덧붙히면 리처드 해밀턴이 형편없는 선수란 뜻이 전혀 아니다. 해밀턴은 훌륭한 커리어를 보냈으며 당시에도 유망주 수준을 넘어선 뛰어난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3년차인 해밀턴이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은 조던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는 의미. 실제로 해밀턴이 당시 평균 20점 (2005-06 시즌의 20.1점 다음으로 해밀턴 커리어에서 높은 수치이다)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던과 같이 뛸 때가 아니면 팀성적이 형편없었던 걸 보면 알 수 있다. 반면 조던은 초반에 해밀턴이 장기결장할 때도 5할 승률 언저리로 팀을 이끌었다.[148] 사실 객관적인 활약상을 보면 앨런 아이버슨이 팀내 최다 득점자로 35점,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역시 29점이나 넣어 조던보다 월등히 잘했다. 그러나 애초에 이벤트전인 올스타전에서 객관적인 활약만으로 상을 줄 필요는 없었고, 올스타전 자체가 노골적일 정도로 조던의 트리뷰트 분위기였기 때문에 아무도 불만을 표하진 않았을 것이다.[149] 이것 때문에 당시 저메인 오닐이 엄청 욕을 먹었다. 3점슈터를 파울하는 것은 농구에서 대표적인 본헤드 플레이 중 하나이기 때문. 산술적으로 봐도 3점슛 성공률이 40%인 고감도 슈터라고 해도 기대득점은 1.2점에 불과하며, 코비 브라이언트는 성공률이 40%에 미치지 못하는데다가 시간에 쫓겨 무리하게 던진 페이더웨이였기 때문에 들어갈 확률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자유투 성공률 80%인 선수에게 자유투 3개를 내주면 총 기대득점은 2.4점(0.8X3)에 달하게 된다. 이 때문에 골밑에 비해 성공률이 낮은 점프슛은 웬만해선 파울하지 않는 게 상식인데, 3점 페이더웨이를 파울해서 자유투 3개를 던졌으니 정말 바보짓인 것. 이때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주전으로 출전한 오닐이 의욕이 넘쳐 무리한 것으로 보인다.[150] 여담으로 예전에는 이랬지만 각종 개인상에 MVP상에 선수들의 이름이 붙은 2022-23시즌 기준으로는 좀 달라졌는데 새로 바뀐 트로피들에 붙은 이름을 보면, 각 개인상에 그 분야에서 상징적인 선수들의 이름이 붙었기 때문. 예를 들어 역대 블럭 1위인 하킴 올라주원의 이름이 올해의 수비수상에 붙고, 신설된 클러치 플레이어상에는 제리 웨스트의 이름이 붙고, 최다우승자인 빌 러셀 이름은 파이널 MVP에 붙었다. 다만 여기서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정규시즌 MVP는 역대최고의 선수로 인정받는 조던의 이름을 따 마이클 조던 트로피가 되었다. 또한 원래는 수수한 디자인이었던 올스타 MVP는 2022년부터 유독 크고 화려한 디자인이 된 것을 볼 수 있는데, 2020년에 헬기 사고로 비극적으로 사망한 코비 브라이언트의 이름을 땄기 때문이다. 코비에 대한 추모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예전과 달리 매우 화려한 디자인의 트로피가 된 것. 포인트는 올스타전 MVP가 크고 화려하다면 꼭 그럴만한 이유가 있단 것이다.[151] 조던은 평생 가드로 분류되었으나 그 상징성을 감안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2002년에도 그는 스몰 포워드로 뛰고 있었지만 올스타 투표에서 그는 가드로 분류되어 동부에서 득표 2위에 올랐다. 각 선수가 실제 경기에서 어떤 포지션에서 출전했냐를 보여주는 play-by-play 자료는 1996-97 시즌부터 있는데, 조던은 1996-97 시즌엔 87%, 1997-98 시즌엔 83%의 출전시간을 슈팅 가드 포지션에서 뛰었지만 2001-02 시즌엔 스몰 포워드로 77%, 2002-03 시즌엔 79%를 뛰었다. 어쨌거나 당시 그의 주 포지션은 명확히 3번이었는데, 이는 당시 두 시즌 같이 뛴 선수가 둘 다 슈팅가드인 리처드 해밀턴과 제리 스택하우스였고, 조던은 저 둘과 키가 비슷했으나 힘이 더 좋아 포워드 수비가 더 용이했기 때문이다.(조던은 불스 시절에도 피펜이 결장할 때 스몰포워드로 종종 뛰었다).[152] 실제로 전 시즌 가드 포지션에서 최다득표를 한 조던은 시즌 초반에 식스맨으로 역할이 줄어든 여파에 전성기를 맞이한 맥그레이디와 아이버슨의 인기에 밀려 108만 표를 얻었고, 맥그레이디는 131.6만표로 동부 1위, 아이버슨은 115만표를 얻었다.[153] 팬투표에서 밀렸어도 당시 설문에서 선호도 조사나 조던 관련 상품 판매, 조던이 뛰는 모든 경기에서 매진이 이어졌다는 것을 보면 여전히 NBA에서 가장 인기있는 선수는 조던이었다.[154] 이상하게 국내에선 그가 워싱턴 복귀 이후 올스타전에서 후보로 출전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2002년에 그는 98.5만표를 얻어 동부 선수들 중 카터(147만표)에 이은 2위, 가드들 중엔 1위였으며 분명히 주전으로 뛰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10rEhoXq98 그는 3경기만에 시즌아웃된 86년에도 팬투표선발되었기 때문에 그가 올스타 팬투표로 톱5에 선발되지 못한 적은 2003년이 유일하다.[155] 즉 스몰 포워드인 조던을 굳이 가드로 분류해 가드 3위로 투표에서 밀리게 되었고, 정작 가드로 득표한 조던은 결과적으로 카터의 양보로 스몰 포워드로 출전하게 된 희한한 상황이었다. 올스타 투표는 당시 한 사람 당 가드 2명-포워드 2명-센터 1명에 후보진에 오르지 못한 와일드카드 한 명의 이름을 선택해 제출하는 형태였는데, 처음부터 조던이 포워드로 분류되었다면 훨씬 인기가 많던 티맥-아이버슨이 아닌 저메인 오닐-그랜트 힐을 제치면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득표수 자체도 더 높았을 가능성이 높다.[156] 시카고 불스와 조던의 계약은 프로구단 역사에 유례가 없을 노예계약이다. 이때문에 그는 연봉에 대한 불만이 꽤나 많았으며 농구화 판매 등의 가외활동을 엄청나게 많이 했다. 정확히 말해 노예계약까지는 아니었으나, 계약 당시에는 연봉이 고액에 속했지만 90년대 초반 엄청난 연봉의 상향이 이뤄지면서 기존의 장기계약자들이 본의 아니게 노예계약이 되어버린 것. 사실 당시 연봉 인플레는 이후 너무 극심해서 개나소나 1000만이라는 분위기였다. 대표적인 것이 워싱턴 불리츠의 주원 하워드. 그리고 조던보다 더 피를 본 것이 다름이 아닌 피펜이다.[157] 사실 조던은 원래부터 눈물이 적은 편이 아니다. 첫 우승을 할 때도 펑펑 울었고, 1차 은퇴 후 다큐멘터리에서 사망한 아버지에 대해 논할 때는 항상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4번째 우승을 할 때는 거의 감정을 주체못하는 수준으로 울고, 2003년 올스타전에 자신을 위한 트리뷰트 무대 때에도 눈물을 흘렸다. 기뻐할 때도 첫 우승 당시 우승 세러모니가 끝난 후 유니폼을 입은 상태로 시가를 피며 피아노를 치거나 홈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두 번째나 다섯 번째 우승 때 팔짝팔짝 뛰고 관객들의 환호를 유도하는 등 감정표현이 풍부한 편이다. 다만 저 순간캡쳐 표정이 좀 묘하게 나온지라 밈이 된 것.[158] 조던은 1차 은퇴 당시엔 야구선수로 활동 중이었기에 몸관리를 하고 있었고, 2차 은퇴 후에도 초반에는 몸관리를 하며 가끔 시카고 불스 연습장에 나타내 불스 선수들을 1대1로 농락하는 등 여전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은퇴 후 세 시즌이 지나는 동안 40이 가까워지던 조던은 나이도 있고 복귀할 가능성도 희미해졌기에 몸무게도 늘고 골프 외엔 운동을 거의 놓은 상황이었다. 복귀하긴 거의 최악의 상황이었던 셈인데, 실제로 워싱턴 첫 시즌에 무릎이 완전히 나갔다.(조던은 그전까진 무릎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몸무게가 갑자기 늘은 농구선수들은 특히나 하체 부상에 취약하다. 계속 달리고 점프하는 스포츠에서 몸이 익숙한 것보다 더 큰 하중을 감당하기 때문.[159] 연예인 등 유명인사들이 하는 경기다.[160] 여담이지만 던컨의 경기를 보면 자기가 돋보이는 것보다 패스를 주로 하면서 다른 선수들을 살려주는 플레이를 하는데 2014년에는 맘먹고 나오셨는지 20점 11리바운드 6어시스트라는 엄청난 기록을 내면서 (20점은 Celebrity Game 사상 최고 득점. 참고로 이때 최종 스코어는 60:56) MVP에 선정됐다.[161] 조던의 개인 트레이너 역시 지금 당장 복귀해도 "평균 20득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상식적으로 립서비스라는 건 감안하자.[162] 거기다 조던은 은퇴하고 3년이나 농구와 떨어져 살았음에도 저정도의 기량이 나온거니 그야말로 엄청난 일이다.[163] 잭슨에 대해 좀 더 첨언하면, 젊은 시절부터 롤플레이어로서 훌륭한 기량과 더불어 깡다구와 성깔로 유명한 선수다. 05년 팰리스 오브 오번 힐즈 폭력사태 당시 론 아테스트 다음으로 팬에게 주먹을 휘두른게 바로 잭슨이며, 이후 라커룸에 가면서 당당하게 "We ride together! (우린 함께 간다!)"라고 카메라에 외칠 정도. 이렇듯 직선적이고 에고도 굉장히 강한 선수이기 때문에 위 연습경기 일화 자체는 제법 믿을만 하다. 당장 위에서 자신들을 갈구는 조던에게 지지 않고 받아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양반은 조던이 47살 먹고(...) 후배들에게 한 수 보여준답시고 연습경기에 꼈다가 시원찮은 모습을 보였다면 대차게 까면 깠지, 선수와 구단주라는 것 외엔 별다른 인연도 없는 조던을 위해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내면서까지 스스로를 낮출만한 성격은 못 된다.[164] 한국의 불세출의 축구스타 차범근도 국가대표 감독 시절 보통 선수들도 아닌 국가대표 선수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온갖 개인기를 선보였다고 한다...[165] 라멜로 볼의 존재로 인해 브랜든 밀러를 뽑았다는 의견도 보인다. 일단, 1년차 시즌에서는 스쿳 헨더슨이 기대치보다 훨씬 심각한 모습을 보이면서 첫 시즌만 보면 조던이 옳았다.

[166] 재밌는건 오히려 하위 라운드에서 스타들이 나왔는데 그 유명한 빌 레임비어가 3라운드 출신이며, 유타 재즈는 레전드급 수비수 마크 이튼을 무려 5라운드 107번에 주워왔다. 아이러니한 건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이 둘이 이 드래프트 최고의 센터들이었다는 점. 재즈가 팀의 기둥이 된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을 각각 14번, 13번으로 뽑았다는 걸 생각하면 유타 프런트의 안목이 정말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