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하퍼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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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1997 | 1998 | 2000 | 2001 |
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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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5A24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등번호 4번}}} | ||||
캠피 러셀 (1984) | → | 론 하퍼 (1986~1989) | → | 스티브 커 (1991~1993) |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등번호 4번 | ||||
에니스 워틀리 (1989) | → | 론 하퍼 (1989~1994) | → | 마이클 스미스 (1995) |
시카고 불스 등번호 9번 | ||||
조니 바움 (1969~1970) | → | 론 하퍼 (1994~1999) | → | 존 스탁스 (2000)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등번호 4번 | ||||
바이런 스캇 (1996~1997) | → | 론 하퍼 (1999~2001) | → | 루크 월튼 (2003~2012) |
로널드 하퍼 Ronald Harper | |
출생 | 1964년 1월 20일 ([age(1964-01-20)]세) |
오하이오주 데이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마이애미 대학교 |
신장 | 198cm (6' 6") |
체중 | 97kg (214 lbs) |
윙스팬 | 불명[1] |
포지션 | 슈팅 가드 / 포인트 가드 |
드래프트 | 1986 NBA 드래프트 1라운드 8순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지명 |
소속 팀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986~1989)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1989~1994) 시카고 불스 (1994~1999)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99~2001) |
지도자 |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코치 (2005~2007) |
등번호 | 4번 - 클리블랜드 / 클리퍼스 / 레이커스 9번 - 시카고 |
가족 | 아들 론 하퍼 주니어, 딜런 하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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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하이오 출신의 NBA 선수. 클리블랜드와 클리퍼스의 에이스 가드였다가 시카고 불스 왕조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2000년대 왕조를 거치면서 5개의 반지를 손에 넣었다.2. NBA 커리어
마이클 조던을 직접 상대하던 캐벌리어스 시절인 89년 개막전 하이라이트.
캐벌리어스에 1라운드 8픽으로 지명되어 인상적인 활약을 하면서 80년대 후반 강팀이었던 캐벌리어스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캐벌리어스는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게 전성기임에도 가로막혀버렸고[2][3] 하퍼는 1989년 플레이오프에서 불스를 만나 조던을 수비하다가 감독이 막판에 수비선수를 바꿔버리는 바람에 마이클 조던의 전설의 ' The Shot'에 팀이 박살나는 것을 눈 앞에서 지켜보고 만다.[4]
The Shot으로 시즌이 끝난 이후 하퍼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로 트레이드되었고 NBA 사상 최악의 팀이었던 90년대 클리퍼스에서 나름 에이스 역할을 하면서 팀을 지탱해냈다. 하지만 1989-90시즌 그의 커리어 전체를 내리막으로 끌고간 부상을 당하게 된다. 클리퍼스에서 하퍼는 7위로 2번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5] 2번 다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그 뒤에 클리퍼스는 또 바닥을 기기 시작했고 하퍼는 93년 은퇴한 조던의 자리를 메꾸고자 했던 과거의 원수 시카고 불스로 1994년 트레이드 되었다.
당시 불스는 은퇴한 조던의 빈자리를 피트 마이어스란 지극히 평범한 슈팅가드로 교체한 채 93-94시즌을 치렀다. 이때는 조던이 야구하러 떠난 후 피펜과 그랜트가 우리도 스타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라면서 열심히 뛰고 있던 시기였고, BJ 암스트롱, 피펜, 그랜트가 모두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3명이나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쾌거를 거뒀다.[6] 특히 정규시즌에선 55승이나 거두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에이스 득점원의 부재로 인해 플레이오프에서는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이 와중에 영입한 선수가 바로 론 하퍼였던 것이다.
하퍼는 당시 꽤나 거물급 선수였다. 93-94시즌 당시 클리퍼스 소속이던 그는 리그에서 7번째로 많은 399만달러의 연봉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샤킬 오닐 (389만달러) 패트릭 유잉 (382만달러)보다도 많은 액수였으며 현역 가드 중에선 가장 높은 연봉이었다. [7] 어쨌거나 당시까지 하퍼는 당시만 해도 (비록 올스타 선정은 없었지만) 올스타급 가드로 인정받았으며, 실제로 불스 시절 한 해설자는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부분인데 하퍼는 올스타였죠"라고 잘못 해설할 정도였다. 그만큼 올스타 선정 한번이 없다는게 이상할 정도로 좋은 선수였던 것이다. 당시 불스와 하퍼의 계약은 계약 직후엔 "연평균 3백만 달러 이상의 장기계약"으로 알려졌으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총액 1천9백만 달러 이상의 5년 계약이었다.
하퍼의 계약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94-95시즌 당시 불스는 피펜과 연봉으로 인한 갈등이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돈 아까워하는 불스 프런트는 피펜을 트레이드하고 리빌딩을 시작하는 걸 고려하고 있었다. 시카고는 93-94시즌 당시 야심차게 영입한 토니 쿠코치가 NBA에서 당초 기대대로 가드를 보는 건 (키가 너무 커서) 불가능하고, 파워포워드를 보기엔 너무 연약하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된 상황이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들어갈 포지션은 스몰포워드였으나 문제는 여기엔 팀 내 최고의 선수인 피펜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당시 불스는 피펜을 매물로 파워포워드를 찾고 있었다. 이 중 불스가 가장 군침을 흘린 건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젊은 슈퍼스타 숀 켐프였으나 워싱턴 불리츠(현 위저즈)의 루키 주완 하워드, 마이애미의 로니 세이컬리의 이름도 오가던 상황.
만약 피펜을 떠나보낸다면 당장 우려되는 것은 백코트 수비의 약화이자 슬래셔의 부재. 이 상황에서 돌파능력과 긴팔을 잘 활용하는좋은 수비력을 지니고 다재다능한 하퍼는 (피펜보다야 못하지만) 피펜의 대체자 역할로 기대받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시카고 트리뷴의 샘 스미스 기자는 "불스가 드디어 하퍼를 얻었다. 문제는 이 (영입이) 과연 그들이 스카티 피펜을 트레이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의미냐는 것이다"란 기사를 썼다. http://www.chicagotribune.com/news/ct-xpm-1994-09-17-9409170144-story.html 피펜 트레이드가 이뤄졌다면 B.J. 암스트롱-하퍼-쿠코치-숀 켐프-윌 퍼듀란 공격라인업을 이루게 됐을 것이다.
문제는 하퍼가 그리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 클리퍼스 시절엔 공동 주장까지 하고, 93-94시즌엔 20.1점 6.1리바운드 4.6어시스트 1.9스틸을 기록하던 하퍼는 불스 소속이 된 첫 경기에 주전 가드로 출장해 31분동안 야투 12개를 던져 3개를 성공, 8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에 6파울 퇴장당하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다. 두번째 경기에서는 야투 6개를 전부 실패, 세번째 게임에서는 21분만 뛰며 야투 3개를 던져 1개 성공, 그가 두자리수 득점을 넣기까지는 6경기가 걸렸다. 이후에도 그는 지속적으로 들쭉날쭉한 야투와 득점을 선보였다.
마이클 조던이 복귀하기 전까지 하퍼는 65경기동안 52경기에 주전으로 출장했지만 출전시간은 22분, 기록은 7.5점 2.6리바운드 2.3어시스트 1.4스틸에 그쳤다. 이는 조던의 대체자로서도, 피펜의 대체자로서도 전혀 적합한 기록이 아니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하퍼는 불스 시스템과 그리 맞지 않았다. 일단 하퍼는 운동능력과 센스가 뛰어나고, 슛거리는 짧지만 중거리슛까지 득점감각이 뛰어났지만, 장거리슈팅력은 약한 전형적인 80년대 슈팅가드였다. 그런데 90년대로 접어들며 NBA는 페이스가 느린 하프코트 오펜스 위주의 리그가 되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20피트 이상 장거리 슛엔 약점이 있는 하퍼는, 안 그래도 모션 오펜스 중심인 불스에서 그다지 효용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는 젊은 시절부터 겪은 무릎부상으로 기동력과 운동능력이 예전만 못했다.
그나마 하퍼만 있었다면 그 위주로 시스템을 다시 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능력이 예전만 못하다고 해도 그는 직전 시즌에 평균 20점을 기록한 스코어러였으니. 그러나 그는 스카티 피펜과 행동반경이 겹쳤고, 주 볼핸들러 자리를 피펜이 꿰차고 있는 상황에서 캐치앤슛 능력이 필요한 불스의 가드 자리에서 전혀 적응을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불스는 당시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주전 빅맨들 중 빌 카트라이트는 은퇴, 호레이스 그랜트는 올랜도 매직으로 떠났으며, 원래 스몰포워드를 봐야할 쿠코치가 주전 파워포워드로 나가 수비에서 발리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쿠코치가 없으면 래리 크리스트코비악(Larry Krystkowiak)이란 이름도 난감한 허접한 선수가 주전으로 나가나는 상황이었다. 센터진은 윌 퍼듀가 주전으로 나섰지만, 그는 그의 백업인 룩 롱리보다 미세하게 나은 정도였다.
에이스 피펜은 실력은 건재했지만 시즌 내내 입이 튀어나와 불만을 토로했고, 경기 도중 열 받아서 의자를 코트 위에 던지는 대형사고까지 쳤다. 이런 상황이니 팀은 3월 17일까지 34승 31패, 5할을 조금 넘는 성적을 찍으며 지지부진했으며, 별 다른 전력보강이나 움직임 없이 트레이드 마감일을 허무하게 보내고 만다.
그러나 조던이 복귀했고, 제 컨디션이 아닌 조던이었음에도 17경기동안 팀을 13승 4패로 이끌며 플레이오프에선 4번 시드 샬럿 호네츠를 업셋했으나 2라운드에선 동부 챔피언 올랜도 매직에게 2승 4패로 석패하게 된다.
문제는 "황제의 귀환"에서 황제의 포지션이 슈팅가드였다는 것이다. 결국 거액을 받으며 기대주로 입단한 하퍼는 시즌 마지막 12경기에서 고작 한 경기 주전, 출전시간 평균 8.6분에 3.6점 0.8리바운드 0.8어시스트란 처참한 성적에 그친다. 그나마 주전 출장한 경기도 결장한 피펜 대신 출전한 것. 플레이오프에서도 별 비중이 없던 하퍼는 그렇게 시즌을 마무리한다.
95년 오프시즌에 불스는 변화를 맞이한다. 주전 포인트가드 BJ 암스트롱이 신생팀 토론토 랩터스의 확장 드래프트에서 지명이 되어 떠나게 된 것이다.[8] 암스트롱이 떠난 불스 로스터에 포인트 가드라곤 사실상 슛 하나 보고 기용하는 스티브 커, 그리고 새롭게 합류한 운동능력을 제외하면 별볼일 없는 랜디 브라운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스의 코치진은 비록 슛거리가 짧고 득점력이 많이 사라졌지만 농구 이해도 및 센스가 훌륭하고 수비력이 좋은 론 하퍼를 포인트 가드로 올리게 된다.
사실 주전 PG라곤 해도 하퍼가 공격 면에선 그리 큰 역할을 맡지는 않았다. 불스 시스템은 PG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고, 어차피 볼 핸들링을 맡는 건 피펜과 조던이었기에 3순위 볼 핸들러인 그가 다른 팀의 주전 PG들만큼 볼을 만질 일도 없었기 때문. 하퍼는 좋은 움직임으로 수비를 교란시키거나 컷인, 킥아웃해주는 볼을 받아 중거리에서 득점 정도는 해주었지만 기본적으로 중장거리 슈팅이 그렇게 뛰어난 선수는 아니라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좋은 사이즈와 긴 팔,[9][10] 뛰어난 센스를 이용한 압박으로 상대 PG에게 큰 부담을 주며 수비에서 좋은 역할을 했고, 단독으로 톱급 수비수까진 아닐지언정 전체적으로 운동능력이 좋고 도움수비가 뛰어난 불스의 팀 수비력에 적잖이 기여하는 선수였다.[11]
단점은 그가 무릎이 그리 좋지 못하며 기본적으로 키가 크기 때문에 작고 재빠른 선수들에게 약했다는 것이다. 위에 나온 스탁턴은 30대 중반이라 전성기에 비해 스피드가 느려져서 그나마 괴롭힐 수 있었고, 앨런 아이버슨의 경우 하퍼와 매치업될 때마다 폭발을 하곤 했다. 비슷하게 털린 케이스가 95-96시즌에 리그 꼴찌팀 주제에 불스에게 1패를 안긴 랩터스의 신인 데이먼 스타더마이어.[12]
어쨌거나 새 역할을 맡은 하퍼는 큰 부담 없이 안정적으로 주전 포인트가드로서 23~28분 가량만을 뛰며 조력자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이 새로운 변신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하퍼는 98-99시즌 이후 은퇴를 하고자했으나, 필 잭슨 감독의 설득으로 그가 취임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해 비슷한 역할로 주전 PG를 맡게 된다.
슈퍼스타가 아니고, (불스시절엔) 그리 화려한 선수가 아니라 많이 간과되고, 특급 식스맨이었으며 사실상의 주전이나 다름없던 쿠코치에 밀리는 감이 있지만, 하퍼 역시 불스의 후반 3연패 당시 빼놓을 수 없는 조력자 중 하나였다.
98-99시즌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먼, 필 잭슨, 스티브 커 등이 모두 떠나버린 황무지 불스는 토니 쿠코치가 분발했으나 급격하게 내리막을 타버렸고 하퍼도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불스를 떠나게 되었다.[13]
하퍼가 향한 곳은 불스 시절 은사 필 잭슨 감독이 취임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스티브 커가 불스에서 떠나자마자 1999년 반지를 손에 넣었듯이 하퍼도 불스를 떠나자마자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가 리그를 휩쓸고 있던 레이커스에서 반지 2개를 얻었다. 우승 운은 확실히 있었던 선수.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던 하퍼는 기록상으론 평균 7점(야투율 39.9%), 3.4어시스트 4.2리바운드 1.1스틸로 초라한 모습을 보였지만 특유의 리더십과 수비력으로 팀의 주전 포인트가드로 공헌했다.[14] 99시즌만 해도 젊은 팀이었던 레이커스는 베테랑 리더십을 위해 주전이었던 피셔(25세), 릭 폭스(30세), 로버트 오리(29세)를 벤치로 내리고 새로 합류한 하퍼(36세), 글렌 라이스(32세), AC 그린(36세)를 주전으로 올려 젊은 코비-샤크 콤비를 돕게 했으며, 여기서 오는 외곽의 부재를 당대 최고의 슈터 중 하나였던 라이스로 메운 것.[15] 하퍼의 레이커스 커리어 최고 하이라이트는 포틀랜드와의 서부결승전 3차전이었는데, 로스앤젤레스에서 2차전을 지며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빼앗긴 레이커스는 4쿼터 막판까지 91대91로 비긴 상태였다. 이 때 코비 브라이언트의 패스를 받은 하퍼가 사이드에서 롱2를 적중시키며 앞서나가고, 이는 그대로 게임위닝샷이 되며 레이커스가 시리즈 전적 2승1패로 앞서나가게 된다.
그러나 하퍼는 레이커스에서 오래 뛰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나이(64년생)에 비해서도 몸상태, 특히 무릎이 안 좋았기 때문. 하퍼는 주전 PG였던 시카고 시절부터 이미 출장시간이 20분대로 떨어졌을 정도였다.(로스터가 처참해진 99시즌에는 다시 31분을 뛰긴 했지만) 이 때문에 그가 레이커스에서 첫 시즌 80경기 중 78경기를 주전으로 나왔음에도 출장시간은 25.5분이었고, 백업으로 내려온 데릭 피셔가 23.1분으로 별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16] 그나마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는 하퍼가 전경기 출장하며 꾸준히 뛰어줬고, 특히 상대팀이 베테랑팀+로우페이스 농구를 하는 포틀랜드와 인디애나 시리즈에선 96년 이후 처음으로 두자리수 평균득점 (10.7점, 10.8점)을 해주며 야투율도 46.8%, 46.4%를 기록했다.[17]
그러나 01시즌이 되자 끝이 가까워졌다는 것이 더욱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는 47경기만 출장했으며(이중 46경기 주전 평균 24.2분), 플레이오프에선 시즌 막판에 입은 부상 때문에 그해 레이커스가 치른 16경기 중 고작 6경기, 그것도 전부 벤치에서 나와 7분만 뛰며 2.2점 1.3리바운드 0.7어시스트 0.7스틸에 그쳤다.[18]
선수 은퇴 이후에는 2005년에서 2007년까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로 근무했다.
2.1. 89년 트레이드
4년차를 맞은 하퍼는 시즌 초반 도허티와 프라이스가 부상으로 빠졌을 때 보다 공격적인 모습으로 개막전부터 36점을 기록하는 등 여느때와 같이 좋은 활약을 보였으며, 올스타 선정과 함께 한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일 것이란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1989년 11월 15일, 쌩뚱맞게도 하퍼는 1990년 1라운드 픽, 1991년 2라운드 픽, 1992년 1라운드 픽과 함께 당시 NBA 최악의 프랜차이즈였던 클리퍼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 반대급부로 캐브스가 받은 건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대니 페리'에 대한 권리와 벤치 포워드 '레지 윌리엄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캐브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 중 하나였다.그도 그럴게 하퍼는 루키시즌에 전경기를 출전하며 평균 22.9득점을 기록한 바 있고, 88-89시즌에도 평균 18.6득점(FG% 0.511), 5.3어시스트, 5.0리바운드, 2.3스틸, 0.9블록을 기록한 전도유망한 선수였다. 즉, 당시 하퍼는 이미 캐브스 올스타 3인방인 마크 프라이스-브래드 도허티-래리 낸스와 더불어 사실상 빅4나 마찬가지였던 것. 또한 89-90 시즌에도 좋은 활약을 이어나가며 첫 7경기에서 22점 6.9리바운드 7어시스트 2스틸 1.3블럭을 기록하는 등 이제 막 전성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심지어 하퍼는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여기서 나온 완전 토박이, 프로 데뷔까지 오하이오 주에서 해버린 홈타운 보이였다. 또한 시카고 시절에도 Fan Favorite이었던 좋은 인품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였고, 좋은 리더이기도 했다.[19] 즉, 당시 하퍼는 (1) 20-5-5를 능히 기대할 수 있는 올스타급 가드이자 (2) 수비력까지 수준급인 공수겸장이었고[20] (3) 로컬 스타인데다 어리고 착하기까지 한, 구단 입장에선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해도 부족할 선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반면 캡스가 받아온 윌리엄스는 약체 클리퍼스에서 20분대를 뛰며 10점대를 기록하고 있는 선수였으며, 이후로도 평범한 선수로 커리어를 보냈다. 대니 페리는 듀크대학교의 슈퍼스타로 89년 드래프트 전체 2위로 지명될 정도의 유망주였지만, 약체 클리퍼스에서 뛰는 걸 거부하고 이탈리아 리그에서 뛰는 걸 선택했으며 아직 첫 NBA계약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나이도 하퍼와 겨우 두 살 차이. 이제 막 4년차에 들어가는 올스타 캘리버에 1라픽 두 장, 2라픽 한 장을 태우면서까지 받아온게 고작 저거였다는 소리. 그나마 2픽 페리가 잘 커주기라도 했다면 훗날 재평가라도 받았겠지만, 그는 캐브스에서 10시즌 뛰는 동안 주전급이었던 기간이 겨우 두 시즌에 그칠 정도로 버스트였다.
당연히 캐브스 팬들은 GM 웨인 엠브리에 대해 격분했으며, 이후 엠브리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그가 2004년에 발간한 책 "The Inside Game: Race, Power and Politics in the NBA"에서 단순히 "The Trade"라고[21] 밝힌 이 트레이드에는 뒷사정이 있었다.
당시 엠브리는 NBA의 보안 담당인 호러스 벌머란 남자로부터 "하퍼가 마약 거래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과 밤에 어울려다니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상태였다. 또한 마약단속국 역시 하퍼의 친구 중 하나에 대한 하퍼의 증언을 받으려고 하던 상태. 물론 하퍼 본인이 마약 거래와 얽힌 것은 아니었고, 벌머는 "론한테 친구들하고 거리 좀 두라고 하세요"란 충고를 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는 하퍼 본인도 94년 자서전에서 인정했으며, 그는 "쥐뿔도 신경쓰지 않았다(I didn't give a crap)"며 자신의 친구들에 대해 판단할 능력이 있으며 남들이 신경쓸 바가 아니라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캐브스에게 마약과 관련된 문제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선수인 돈 로저스는 86년에 코카인 남용으로 사망했으며, 하퍼 본인이 드래프트된 해의 전체 2순위 지명자 렌 바이어스 역시 코카인 때문에 목숨을 읽었다. 브라운스의 러닝백인 케빈 맥은 하퍼의 트레이드가 이뤄진 바로 그 해에 코카인 거래 때문에 체포되기도 했다. 감독 레니 윌킨스는 당시 보안 담당자에게 문의해 '하퍼가 나이트클럽에 있었지만 그 자리에 다른 선수들도 있었으며, 하퍼는 마약을 거래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확인된바 없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윌킨스도, 엠브리도 하퍼가 마약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진 않았지만 이미 소문이 돌고 있었으며, 클리블랜드에 살고 있던 하퍼의 친구 역시 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하퍼가) 체포될 수 있으니 거리를 좀 두라'는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하퍼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조심할 것도 없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집에 좀 더 일찍 가는게 좋겠다"는 엠브리의 조언에 "난 1년차들보다 더 열심히 뛰고 있으며 기록도 이전과 같은 선수란 걸 보여주는데 뭐가 문제인가?"라고 했으며, 자신의 여가 시간에 나이트클럽에 가며 즐기는 것을 통제할 권리가 팀에게 없다며 반발했다.
결국 엠브리는 트레이드 옵션을 알아보기 시작했으나, 이 소문이 가라앉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문제는 당시 구단주 고든 건드가 개입되었다는 것.[22] 건드는 클리블랜드 토박이로서 엠브리와 더불어 캐브스의 구세주로 여겨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건드, 윌킨스, 엠브리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벌머는 마약단속국(DEA)가 하퍼가 마약거래상들과 친분이 있다는 것과 당국에서 그의 차가 거래에 사용되었다고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밝혔다.
이 말을 들은 건드 구단주는 벌머가 떠난 직후 엠브리에게 "씨X 당장 녀석을 팀에서 쫓아내게!("I want him the F - - - off my team -- NOW!")"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윌킨스는 당시 이들 앞에서 한번도 욕설을 한 적이 없는 건드 구단주가 이와 같이 얘기했다는 것에 대해 놀랐다고...
- 다만 여기에 대해선 각자 의견이 갈리는데, 하퍼가 자서전에서 밝힌 위 버전이 가장 잘 알려져있지만 엠브리는 본인의 책에선 건드가 윌킨스에게 침착하게 "레니, 우린 녀석을 트레이드하고 싶지 않아요. 생각을 바꾸게 할 순 없을까?"라고 물어보았고, 윌킨스는 "그러고 싶진 않지만 보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답을 들은 건드는 "녀석을 당장 여기서 쫓아내시오!"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 반면 윌킨스는 건드가 "이건 하퍼 문제에요. 그를 보냅시다"라고 했지만 윌킨스 본인이 트레이드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건드는 "난 그 망할놈이 여길 떠나길 바란단 말이오!"라고 소리를 질렀으며, 여기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하퍼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윌킨스는 그가 전에 없이 욕을 하며 흥분한 것에 놀랐다고...
상세내용이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건드 구단주가 하퍼 건으로 매우 분노했으며 '하퍼를 무조건적으로 트레이드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고, 이 시점에서 엠브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2.1.1. 여파
트레이드의 여파는 처참했다. 엠브리의 증언에 따르면 언론과 팬들은 그를 죽일 듯이 욕했으며, 선수들 사이에서도 여론이 안 좋았다고 한다. 당시 벤치 가드였던 스티브 커의 증언에 따르면 트레이드 이후 첫 연습 때 윌킨스 감독은 마치 병에 걸린 것처럼 얼굴을 양손에 파묻고 선수들이 와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고 한다. 일로는 "가족이 죽은 줄 알았다."면서 걱정스럽게 안부를 물었다고 했으며, 윌킨스가 고개를 들었을땐 안색이 창백했다고 한다.하퍼를 트레이드한 캐브스는 전 시즌보다 15승이나 떨어진 42스에 그쳐야했으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긴 했으나, 1라운드만에 탈락하고 만다. 최종전 이후 하퍼 트레이드가 시리즈에 영향을 미쳤냐는 질문에 래리 낸스는 간단히 "작년에 우리가 몇 경기를 이겼죠? 올해는 몇 승 거뒀나요?"란 말로 답했다. 그 다음 시즌엔 프라이스가 장기결장하며 33승에 그쳤고, 그 다음 91-92시즌에는 다시 컨텐더로 올라왔으나 이때는 조던의 시카고 왕조가 넘을 수 없는 벽으로 군림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니 밝혀진 것이지만 하퍼는 마약거래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하퍼는 어린 시절 죽마고우였던 마크 존스란 남자가 나이트클럽을 열려고 할 때 1만8천달러를 빌려주었고, 존스가 '거래를 위한 코카인을 구입하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 때문에 증언을 했으나, 존스 본인도 혐의가 확정되지 않았으며, 하퍼 본인은 마약의 사용이나 거래와 관련된 그 어떤 혐의도 받지 않았다. 즉, 하퍼에게 클럽 연다고 돈을 빌린 친구가 그 돈을 마약 거래에 썼을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조사를 받았으나 실제로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하퍼는 현재까지 마약이나 어떤 범죄와도 상관없이 잘 살고 있으며, 결국 뜬소문 때문에 프랜차이즈 하나가 엄청난 타격을 입은 것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르브론 등장 이전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당시 캐브스의 우승 도전에 제동을 걸어버린 사건이다. 사실 따지고보면 당시 캐브스의 빅4는 슈퍼팀이 대중화 된 최근 NBA를 기준으로 봐도 재능의 합이 상당히 높은 팀이었는데, 우선 르브론 등장 이전 최고의 캐벌리어인 마크 프라이스는 슈팅과 픽앤롤의 장인으로 퍼스트팀 선정 이력이 있을 정도로 리그에서 알아주는 포인트 가드였다. 또한 브래드 도허티는 하킴-로빈슨-유잉이라는 MVP급 센터 삼대장에 밀렸을 뿐 00~10년대라면 All-NBA Team을 다회 수상을 노릴 수 있었을 센터였고, 래리 낸스의 경우 오프 볼 무브가 매우 뛰어난 동시에 디펜시브팀을 세 번이나 수상할 정도로 수비력까지 좋았다. 즉, 프라이스-도허티-낸스에 하퍼까지 더하면 올스타급 선수만 네 명인 빅4 구성이었고, 서로의 영역을 그다지 침범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더해 사실상 주전급 선수였던 핫로드 윌리엄스가 벤치에서 출전하면서 힘을 보탰고, 'The Shot'의 희생자인 크렉 일로는 스타급은 아니었지만 탄탄한 핵심 벤치멤버였으며 하퍼 트레이드 이후 주전으로 올라왔다.[23] 이렇듯 좋은 선수들이 많은 덕분에 당시 캐브스는 여러명의 선수들이 고르게 활약했고, 실제로 89시즌에는 프라이스 18.9점, 도허티 18.9점, 하퍼 18.6점, 낸스 17.2점을 기록했다. 야투 시도 갯수도 하퍼 14개, 프라이스 13.4개, 도허티 13개, 낸스 12.6개. 그만큼 레전드 감독인 레니 윌킨스가 이끌던 캐브스는 뎁쓰가 엄청난 좋은 팀이었다.[24] 89-90 시즌에 동부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었을 팀이, 엉뚱한 트레이드로 인해 급격히 약화되어버린 것.
덕분에 하퍼 본인도 이 트레이드에 대해 아쉬워했으며, "만약 내가 트레이드되지 않았다면 캡스에서 반지 하나 이상 챙겼을 것 같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캐브스에 계속 남아 로컬 스타이자 에이스로서 활약했다면 훗날 영구결번도 노릴 수 있었을테니, 당시 캡스 선수들과 팬들은 물론이고 하퍼 개인에게도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트레이드였다고 볼 수 있다.[25]
3. 기타
동료 선수들의 레벨을 올리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갈궈대던 마이클 조던이 터치하지 않는 드문 선수였는데 클리블랜드 시절부터 상대팀 선수로 만난 하퍼를 직접 상대해보면서 조던이 그에 대한 파악을 다 끝냈기 때문이라고. 조던의 갈굼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였는데 '열심히 안 하는 놈'을 갈구는 것과 '이 선수는 나와 함께 뛸 만한 선수인가?"를 파악하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강도를 시험해보는 것이었다. 이미 몇 시즌동안이나 서로 상대해보면서 파악이 끝난 베테랑 하퍼를 굳이 조던이 다시 시험해 볼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26]1997-98 시즌을 다룬 라스트 댄스에서 BJ암스트롱이나 빌 카트라이트에 비해 인터뷰 분량이 적은데, 말을 조리있게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다가 살짝 언어장애가 있어서였다고 한다.[27]
WNBA 시카고 스카이의 캔디스 파커가 학창시절 가장 좋아했던 선수다.
전성기 때 누구나 인정하는 올스타급 실력자였지만, 실력에 비해 개인 수상실적이 올 루키 퍼스트팀 뿐일 정도로 개인으로선 상복이 없는 선수이기도 했다. 물론 그 대신 시카고와 레이커스 왕조의 일원으로 5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일단 루키 시즌에 22.9점 4.8어시스트 4.8리바운드 2.5스틸 1블럭, 야투율 45.5%란 좋은 기록을 남겼지만, 18.8점 8.3리바운드 3.6어시스트 1.1스틸, 야투율 46.8%를 기록한 인디애나의 척 퍼슨에 밀려 2위로 신인상 수상에 실패했다. 두 선수 모두 팀내 득점 1위를 기록했고 개인기록은 대동소이하거나 하퍼가 근소하게 앞서는 수준이지만[28] 인디애나의 경우 전 시즌 26승에서 41승으로 오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반면 캐브스는 29승에서 31승으로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 컸다. 팀 성적 차이로 인해 윈셰어는 퍼슨이 5.4대 4.2로 앞섰다.
루키 시즌에 팀의 에이스였던 하퍼는 그 다음 시즌 자신보다 재능이 더 뛰어난 브래드 도허티가 신인으로 입단하고, 베테랑 래리 낸스가 트래이드로 합류하고, 포인트가드 마크 프라이스가 성장하면서 팀내 입지가 밀리게 된다. 사실 수상 실적으로 보면 저 셋은 올스타 이력이 있고 프라이스는 퍼스트팀까지 있기 때문에 하퍼가 단순한 조력자로 보일 수 있으나, 당시 저 세 선수의 위상은 서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빅4 정도의 위치였다. 그러나 도허티가 확실한 에이스에 낸스는 이미 피닉스에서부터 쌓은 네임밸류가 있고 프라이스는 PG로서 팀의 공격을 이끄는 와중에 하퍼는 올스타 선정에서 저 셋에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컨퍼런스 1위를 다툴 정도로 호성적이 아닌 이상 웬만해선 한 팀에서 네명의 올스타가 선정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올스타 선정이 없었던 것.
클리퍼스 트래이드 이후에는 대니 매닝과 원투펀치를 이루는데, 클리퍼스가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93,94시즌 당시 하퍼는 18점, 20.1점을 기록했지만 당시 클리퍼스 정도 성적으론 올스타 두명을 배출할 수가 없기에 이번에도 밀렸다. 물론 이후 시카고 시절엔 기량 하락으로 애초에 올스타를 노릴 수준이 아니었다.
하퍼의 전성기를 전반적으로 보면 올스타급 실력과 기여도를 기록한 시즌이 여러번 있었지만, 에이스나 다른 주축 선수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조력자 위치였기에 매번 애매하게 밀렸음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뛰어난 실력과 좋은 기록에도 매번 밀렸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 하퍼는 18~22점 사이를 기록하며 어시스트는 5개 정도, 리바운드는 5~6개 정도를 기록해주던 좋은 선수였고, 최소한 한두번 정도는 올스타에 오르는게 이상하지 않을 선수였음에도 매번 아깝게 미끄러졌다..[29]
[1] 신체검사가 공표되던 시기 전에 뛴 선수라 팔이 NBA선수치고도 매우 긴 편이란게 확실할 뿐 공개된 윙스팬 수치는 없다. 참고로 키가 비슷한 아들 론 하퍼 주니어의 윙스팬은 7피트1인치가 넘는다.[2] 당시 캐브스가 얼마나 좋은 팀이었냐면 루키 시즌부터 평균 22점을 넣은 하퍼를 제외하고 세명의 올스타를 배출했다. 사실 하퍼 정도면 충분히 올스타에 선정될만했으나, 당시 캐브스에서는 마크 프라이스-래리 낸스-브래드 도허티가 확고한 상황이었고, 팀의 No.1 가드이자 드림팀 2 멤버인 프라이스조차도 마이클 조던,아이제아 토마스라는 동부 가드 올스타 고정출연진에 가로막혀 팬투표로는 뽑히지 못할 정도로 올스타 가드자리가 철옹성이라 하퍼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과거 팀의 수가 적었을때면 몰라도 80년대 이후 NBA에서 한 팀에서 올스타가 네명 배출되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어졌기 때문. 이후 클리퍼스에서도 딱 중위권 정도 성적이었는데 에이스 대니 매닝에 밀렸다. 하퍼는 실력으로 보나 기록으로 보나 88년 올스타였던 대니 에인지나 닥 리버스보다는 확연히 한 수 위였는데, 여러모로 상황이 애매했다. 캐브스에선 실력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네명이 팀의 중심이었고, 그 중 하퍼가 애매하게 밀렸기 때문.[3] 하퍼와 비견될 만한 선수는 샘 카셀이 있는데, 카셀은 하퍼에 비해 전성기 구간동안 득점과 리바운드 수치가 낮고 어시스트 수치가 더 높아 스탯라인이 조금 다르지만 (커리어 평균으로 보면 수비스페셜리스트로 오래 뛴 하퍼가 더 낮다), 하퍼와 비슷하게 "올스타급이었으나 애매한 팀내 위치로 매번 미끄러진" 선수였다. 카셀은 전성기이던 밀워키 시절 글렌 로빈슨, 레이 알렌과 함께 빅3를 이룬 선수였으나, 개인기록이 더 좋은 둘에게 밀렸고 벅스가 올스타3명을 배출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매년 밀렸다. 하퍼와 차이점은 말년이던 03-04시즌에 소속된 미네소타가 서부1위를 하며 올스타로 선발되었다는 점. 또한 전성기 구간 입지는 비슷했으나, 카셀은 하퍼와 달리 건강문제로 기량이 급락하는 일은 없었다.[4] 라스트 댄스에서도 하퍼는 이 작전에 여전히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그래요 이제 됐수다. XX 감독님 말이 통하나 한 번 해보시든지요."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고 고백했다.[5] 로스앤젤레스 연고이전 이후 첫 포스트시즌 진출이었다.[6] 특히 피펜은 MVP투표에서 3위에 올랐고,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했다. 조던의 사이드킥에서 리그에서 손꼽힐만한 슈퍼스타로 인정받은 시기가 바로 이때.[7] 굳이 왜 현역이란 단서를 붙혔냐면 당시 가드 중 연봉 1위는 은퇴상태였으나 시카고 구단주가 연봉을 지급하기로 했던 마이클 조던 (400만달러)였기 때문. 당시 연봉 순위는 좀 이상했는데, 리그 1위가 573만달러를 받던 데이비드 로빈슨, 2위가 전성기가 지난 벅 윌리엄스(503만 달러), 그 외에 존 윌리엄스나 블라디 디박같은 선수도 조던보다 많이 받았다. 유잉은 뉴욕 선수였는데도 하퍼보다 적게 받을 정도였으니. 왜 이렇게 되었냐면 당시는 계속해서 NBA규모가 크게 성장 중이었기 때문에 샐러리캡 변화가 계속 일어나던 시기라, 계약 당시엔 거액의 장기계약이었던 것이 몇 년지나면 노예 계약이 되곤 했다. 당장 94시즌만 해도 상위권이던 조던은 바로 다음 시즌부터 중상위권으로 떨어질 정도. 연도별 최고연봉자들의 계약 액수는 이 영상을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SP0nSFjf2x0.[8] 그는 팀 합류 거부 이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자리잡는다.[9] 불스 주전들은 다들 팔이 길었는데 그 중에서도 하퍼의 윙스팬은 돋보였다. 하퍼 윙스팬의 정확한 수치는 불명이지만 조던의 윙스팬은 6피트 11인치 (211cm)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하퍼는 육안으로 봐도 조던보다 명확히 길었다. 게다가 어깨가 좁아서 더 길게 보였다. 불스 경기를 보다보면 속공시 하퍼가 레이업을 할만한 높이에서 팔만 슥 올라가 덩크을 하는 기묘한 장면이 가끔 나왔다.[10] 하퍼는 신체검사 결과가 공표되던 시기의 선수가 아니라 정확한 스펙은 불명이지만, 그의 아들이자 아버지와 키가 똑같은 198cm인 론 하퍼 주니어의 경우 2022년 드래프트 컴바인 측정결과에 따르면 윙스팬이 무려 7피트 1.25인치(216.5cm)였다.[11] 대표적으로 2년 연속 불스와 붙은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은 2대2 플레이로 미스매치를 창출해내 재미를 보는 선수들이었는데, 불스 주전은 센터 롱리를 제하면 198~203cm 정도의 사이즈에 긴 팔과 단단한 몸, 좋은 운동능력을 겸비했기에 스위치를 유도해도 별 재미를 보긴 힘들었다.[12] 당시 불스는 30대 중반이 가까워지는 조던의 체력 안배를 위해 상대팀의 에이스 수비를 하퍼나 피펜에게 맡길 때가 많았는데, 하퍼가 지나치게 털리면 리스크를 감수하고 조던이 붙는 형식이었다. 때로는 조던이 아예 처음부터 PG 수비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97년 1라운드 2차전으로, 워싱턴의 로드 스트릭트랜드를 틀어막으며 본인은 51점을 넣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됐다시피 많은 시간을 뛰고 득점 부담이 높은 노장 조던에게 수비까지 맡기는 건 리스크가 굉장히 높다.[13] 이 때 하퍼는 은퇴를 결심했으나 잭슨의 설득으로 이를 번복하고 레이커스에 합류했다. 실제로 우승 후 세러모니 장면에서 보면 하퍼가 잭슨에게 "이제 은퇴해도 되는거요? 그만둬도?"라고 웃으며 묻자 잭슨이 "자네 원하는거 뭐든지 하게"라고 하고 하퍼가 "내년에 다시 돌아올 겁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14] 같은 감독에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에 하퍼는 하던 역할을 계속하면 되었다. 그러나 레이커스의 팀 구성상 조던이 하던 주득점원 역할을 샤크가 하고, 코비는 조던과 피펜의 역할을 반씩 섞은 볼핸들러+보조 득점원의 역할을 하고, 글렌 라이스가 슈터 역할을 하는 등 디테일한 차이는 있었다. 사실 트라이앵글은 포스트맨이 강할 수록 유리하고, 외곽에 슈터 한명이 있어 수비를 분산시켜주는 것이 이상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불스에서 쓰던 트라이앵글보다 원안에 더욱 가까운 버전이었다. 불스에서는 포스트맨의 공격력이 빈약한 약점 때문에 오프가드인 조던을 종종 포스트맨으로 쓰고, 2차 3연패 당시엔 주전 외곽선수들은 전부 중장거리슛보단 돌파나 포스트업이 더 강하던 선수들이었다.[15] 다만 원래 롤플레이어였던 그린과 하퍼는 역할에 만족했지만 원래 팀의 에이스였던 글렌 라이스는 적어진 롤에 불만을 가졌고, 패트릭 유잉 트레이드에 끼어서 다음 시즌 닉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활동반경이 더욱 겹치는 앨런 휴스턴, 라트렐 스프리웰 듀오 때문에 역할과 성적이 더욱 떨어지고, 부상으로 인한 기량저하까지 겹쳐 전성기의 명성에 비해 초라한 말년을 몇년간 보내다가 04년에 은퇴한다.[16] 다만 피셔는 부상으로 결장이 잦았던 (16경기 결장) 코비가 빠지면 주전으로 자주 올라왔다.(22경기 주전 출장).[17] 초라한 수치긴 하지만 당시 하퍼는 1,2라운드 모두 3할대였다. 애초에 하퍼에게 기대하는 것은 수비와 리더십인만큼, 전혀 기대하지 않던 득점에서 저 정도 해주는 것만 해도 대박에 가까웠다.[18] 그나마 저 중 3경기는 무득점, 새크라멘토 시리즈는 2경기 뛰는 동안 통합 10분 남짓 뛰며 야투 1개 실패, 1리바운드 1스틸, 1파울에 그쳤다. 그가 기록한 모든 득점은 필리와 파이널에서 나왔으며, 16분 출장한 4차전에서 8점(야투 3/5), 4리바운드, 2어시스트 1스틸을 기록한게 하퍼가 마지막으로 보인 좋은 모습이었다. 최종전에선 2쿼터에 2분 출전한게 전부지만 이때 낸 기록은 문자 그대로 전무했다.[19] 론 아테스트처럼 실력과 별개로 라커룸 분위기를 해쳐서 팀들이 꺼리는 선수들이 있는 반면, 하퍼처럼 좋은 성격과 리더십 덕분에 실력과 별개로 팀들이 찾는 선수들도 있다. 실제로 필 잭슨이 99년에 은퇴를 선언한 하퍼를 굳이 찾아온 것도, 하퍼만큼 실력을 지닌 PG는 얼마든 찾아볼 수 있으나 라커룸 리더로서 큰 역할을 할 선수였기 때문. 실제로 하퍼와 인간적인 갈등을 겪은 선수들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성격 까다롭기로 유명한 마이클 조던과도 캐브스 시절부터 친분이 있을 정도였다.[20] 대인수비, 스틸에 능했고 가드 포지션 기준으로는 최상급의 블라커였다. 실제로 89-90 시즌에는 주전 빅맨급 수치인 1.2블록을 기록했을 정도.[21] 조던의 The Shot이나 The Finals와 마찬가지로 정관서 the가 붙은 것은 세상의 유일무이한 것이거나 그만큼 누가 들어도 '아 그거'라고 할 정도로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을 지칭한다. 가장 위대한 슛하면 바로 '그 슛'이라고 통한 것처럼 엠브리가 욕먹는 이유라고 하면 바로 '그 트레이드'라고 누구나 알 정도인 것. 참고로 엠브리는 전임 구단주 테드 스테피엔이 토론토로 팀을 옮기려고 하는 과정에서 수년간의 드래프트 지명권을 연속으로 팔아먹고 바닥까지 꼴아박은 (이 때문에 NBA는 연속되는 해의 드래프트 지명권을 모두 트레이드해버릴 수 없다는 'Stapien Rule'을 지정했다) 팀을 우승가시권까지 끌어올린 1등 공신이었다. 그런 엠브리도 하퍼 트레이드 때문에 욕을 먹을 수 밖에 없었던 것.[22] 현재 캐브스가 쓰고 있는 홈경기장 로켓 모기지 필드 경기장의 오리지널 이름이었던 건드 아레나의 그 건드가 맞다. 클리블랜드 출신 사업가 고든 건드는 형 조지와 함께 83년에 캐브스를 인수했고, 캐브스가 이전까지 쓰던 리치필드 콜리세움에서 새로 개장한 경기장으로 94년에 이사했을 때 네이밍 권리를 사들여서 자기들 이름을 따 "건드 아레나"라고 붙혔다. 이후 2005년에 팀을 인수한 댄 길버트가 자기 회사 이름을 따 퀴큰론즈 아레나, 2019년에 퀴큰론즈 사의 로켓 모기지 서비스 이름을 따 저 이름이 된 것.[23] 마이클 조던의 주 매치업은 론 하퍼였으나 윌킨스는 공격부담이 적은 일로를 조던의 저격수 꼴로 기용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상당히 효과를 본 전술이었다.[24] 실제로 캐브스는 91-92시즌 초반에 마이애미 히트를 148대 80으로 박살을 내며 역대 최고 점수차 승리 기록을 세웠는데, 이때 캐브스에는 놀랍게도 전 로스터를 토틀어 20점을 넘긴 선수가 단 한명도 없고, 주전과 벤치까지 무려 7명이 두자리수 득점을 기록하는 고른 활약을 펼쳤다.[25] 굳이 따지면 클리퍼스는 훗날 버스트로 드러난 대니 페리 대신 젊은 준척급 스타를 영입해 대니 매닝과 원투펀치를 이뤄 짧은 부흥기(92,93에 2년 연속 위닝시즌)를 이뤘으니 승자라고 볼 수 있겠지만, 클리퍼스 답게 94년 오프시즌에 (매닝을 보내고 데려온) 도미니크 윌킨스와 하퍼, 포인트가드 마크 잭슨까지 모두 잃었다.[26] 마이클 조던은 선수레벨과 상관없이 동료가 자신의 100%를 끌어내서 뛰기를 원하는 선수였다. 이 때문에 모든 면에서 한계가 명확했던 존 팩슨은 그리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외곽 지원 및 볼핸들링 보조)를 항상 알아서 해주는 선수였기에 조던이 상당히 좋아하는 동료였고, 반면 호레이스 그랜트는 팩슨과 비교도 안되는 실력이었으나 본인을 강하게 몰아붙혀 성장하는 선수가 아니었기에 계속 자극을 준 것이다. 그랜트보다 레벨이 떨어지지만 마찬가지로 느긋하게 농구를 즐기는 성격이었던 룩 롱리도 마찬가지. 하퍼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었고, 알아서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만한 선수이니 애초에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27] 말을 더듬는 증상이 있다고 한다. 귀 관련으로 장애가 있다고 한다.[28] 하퍼가 밀린 것은 리바운드, 야투율, 3점슛성공률 정도인데, 야투율 차이는 1.3%로 근소했고 3점슛 성공률의 경우 퍼슨도 경기당 0.6개 성공일 정도로 공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었기에 큰 차이는 아니었다. TS%의 경우 하퍼는 50.3%, 퍼슨은 51.8%로 역시 근소한 차이이다. 반면 다른 주요 수치에서 득점에서 4.1점 어시스트에서 1.2, 스틸에서 1.4, 블럭에선 0.8앞섰으며, 두 선수 모두 전경기, 비슷한 수준의 출장시간을 기록했음에도 PER 수치에서 하퍼는 17.2, 퍼슨은 15.6을 기록했다.[29] 하퍼는 최소한 전성기 기록이 17점을 넘기지 못하고 15.7점이란 기록으로 1988년 올스타전에 출전한 대니 에인지보다 훨씬 좋은 선수였다. 이 시즌 하퍼는 하필 부상에 시달리며 52경기 출전에 그쳤고, 15.4점 기록에 그쳤다. 하퍼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시카고에 합류하기 전까진 항상 에인지보다 월등히 높은 기록을 냈다. 이 때 동부 가드 후보진은 전성기가 지난 모리스 칙스가 마지막 올스타, 에인지와 닥 리버스가 생애 유일한 올스타에 오를 정도로 유독 경쟁력이 낮았는데, 하퍼가 바로 전 시즌 정도 기록만 냈어도 무난히 선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