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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
<colbgcolor=#bf1400> 경복궁 기별청 景福宮 奇別廳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 |
건축시기 | 1867년 (창건 추정) 2001년 (복원) |
<colbgcolor=#bf1400> 기별청[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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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흥례문 서쪽 행각에 있으며 유화문의 북쪽에 있다.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했던 ‘조보(朝報)’를 만들던 곳이다. 조보는 일종의 신문으로 지금의 관보같은 역할을 했다. 과거시험 날짜나 신하들이 올린 상소 및 그에 대한 왕의 답변, 그리고 조정 내 인사이동과, 외국 소식, 심지어 날씨까지 적히는 등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매체였다. 조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보 문서와 웹툰 《조선왕조실톡》의 163화를 참조.
조보를 적은 종이를 ‘기별지(奇別紙)’라 했다. 기별지를 내는 곳이 바로 ‘기별청(奇別廳)’이다. 기별청 뿐 아니라 조보를 담당하는 몇몇의 관리들 역시 직책에 기별이란 이름이 붙었다. 매일 아침마다 각 관청에서 조보를 베껴 쓰라고 보낸 서리들을 ‘기별서리(奇別書吏)’라 했으며 지방에 조보를 배달할 전령을 ‘기별군사(奇別軍士)’라 했다.
즉, 엄밀히 말하면 관청기구의 이름이며 건물의 이름이 아니다. 당연히 다른 궁궐에도 기별청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 사라졌고, 현재는 복원해 둔 경복궁의 기별청만이 존재한다.
현판 글씨는 예서체로, 서예가 현암 정상옥 선생(玄庵 鄭祥玉, 1946~)이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吳玉鎭, 1935~2014)이 새겼다.
2. 역사
언제 처음 세웠는 지는 모른다. 조선 전기에도 조보가 있었으니 그 때도 기별청은 있었겠지만 지금 자리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1868년(고종 5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현 자리에 지은 듯 하다.《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 시기인 1892년(고종 29년) 4월에 딱 한 번 나온다. 하지만 이것도 기별청 건물을 다룬 게 아니고, 도목정사[3] 때에 농간을 부린 죄인 김두형을 문책하던 중 기별청에서 일했다는 진술로만 등장한다.# 《승정원일기》에는 정조와 고종 시기를 합쳐 기별청이 3번 나오는데, 정조 때는 경복궁이 없었고, 고종 때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과 같다. 그러니 공식 기록에 경복궁 기별청에 대한 내용은 저 이외에는 없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조보가 사라지고 근대식 관보가 생겼다. 이 때 기별청이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관보를 발행했는지, 아니면 기별청에서 계속 관보를 내었는지는 모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경복궁에서 열리면서 흥례문 및 주변 행각과 같이 헐렸다. 그리고 공진회 개최 1년 뒤인 1916년에는 일제가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 기별청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졌다.
8.15 광복 후인 1990년대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고, 2001년 10월 26일에 흥례문과 같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특징
- 실내는 북쪽의 방 2칸과 남쪽의 마루 2칸으로 나누어진다.
- 지붕은 맞배지붕, 처마는 홑처마이다. 공포는 초익공 양식으로 되어있으며 창방과 도리 사이에 소로를 놓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했으며 용두는 올리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4]으로 칠했다.
- 정면의 바깥 면 2칸은, 칸 중간에 중인방을 두고 위에는 벽을 두고 아래엔 창문을 둔 모습이다. 다만 왼쪽과 오른쪽 칸의 모습이 다르다. 왼쪽 칸의 중인방 아래는 전부 문이나, 오른쪽 칸은 중인방 아래에 문선을 두어 문선 가운데 안에만 문이고 양 옆은 벽으로 마감한 형태이다. 그리고 중인방의 높이도 오른쪽 칸이 왼쪽 칸보다 더 낮다. 왼쪽 칸에 현판이 달려있다.
- 남쪽 측면(유화문 방향)의 바깥 면 2칸도 역시 칸 가운데에 중인방이 있고 그 위를 벽으로 마감한 모습이다. 정면 방향의 칸은 중인방 아래에 문이 달려있으나 옆 칸은 벽이다. 북쪽 측면(근정전 방향)의 바깥 면도 남쪽 측면과 구조가 유사하나 모든 칸의 중인방 위, 아래가 다 벽이다.
- 뒷면(국립고궁박물관 쪽에서 바라볼 때)의 바깥 면 2칸은, 하단부에 사고석과 벽돌을 쌓은 뒤 그 위에 몸체를 구성한 모습이다. 얼핏 보기에는 주변의 흥례문과 근정문의 행각과 비슷한 형태이나 자세히 보면 약간 다르다. 칸 중간에 중인방과 문선을 두고 문선 사이에 창을, 나머지는 전부 벽으로 마감했다.
4. 여담
- 관리들과 양반들은 기별지를 받아야 조정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서울 거주자들은 매일같이 소식을 전달받았지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며칠이나 몇 주 치, 또는 한 달 치를 한꺼번에 받았다. 그래서 소식이 늦어지면 “왜 소식이 없지? 기별이 없지?”하며 기다렸고, 그러다 어느새 소식과 기별이 동의어가 되었다.# 여기서 나온 표현이 ‘기별이 왔느냐’, ‘간에 기별도 안 간다’[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