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8:14:14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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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의 부대기


1. 개요2. 역사
2.1. 상징성
3. 현재의 예하부대
3.1. 전력수준
4. 그러나 명백한 한계
4.1. 1980년대 수준의 전투장비4.2. 1950년대 수준의 전투교리4.3. 태만한 군기와 낮은 훈련도4.4. 보급 부족
5. 전쟁 범죄6. 기타7. 관련 항목

1. 개요

파일:105divcom.jpg
▲ 105사단 사령부 전경
조선인민군 육군의 기갑부대로 조선인민군 최초의 기갑부대이자 정규 기갑부대의 효시인 부대이며, 조선인민군 최초의 근위부대라고 알려져있다.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운동을 함께 했던 측근인 류경수를 초대 지휘관으로 세운 부대로써 1947년 5월 16일 창설[1]된 조선인민군 최초의 기갑부대인 제15전차연대를 모태로 하여 제9 전차여단으로 개편되었고 6.25 전쟁 당시 서울을 함락시킨 뒤로 현재와 같은 105라는 사단번호를 부여받았다. 사령부 주소는 황해북도 곡산군[2].

조선인민군 전차전력과 역사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거론해야되는 부대가 바로 이 부대이고 이 부대를 소개할 때는 아예 조선인민군 땅크부대 창설의 역사까지 소개해야될 정도로 조선인민군 입장에서 중요한 부대다.

그래서 김일성 시절부터 김정일 시대와 현 김정은 시대에 이르기까지 3대 돼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상군 현지시찰을 나갈때면 거의 필수코스로 들르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선대들은 말할 것도 없고 MiG-29 A/C형같은 구형전투기 30기 남짓으로 공군 강국을 자처하며 비행기 사랑을 뽐내고 인민들의 고혈을 짜서 대외과시용 에어쇼까지 열었던 김정은 역시 땅크는 우리 군대의 상징 이라며 이 부대를 각별히 여길 정도다. 그만큼 타 조선인민군 사단과 달리 최신 전차와 제일 좋은 보급품을 우선적 공급받으며 정말 좋은 대우를 받고 있고 조선인민군 부대 중 가장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중의 점령/진출지를 별칭으로 쓰는 부대는 대한민국 육군에도 있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제26기계화보병여단의 명칭인 혜산진부대는 북한 소재지인 혜산진에서 따왔다.

2024년 3월 8일 현재 확인된 사단장은 오정수.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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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류경수.png
1949년 제9땅크려단장 시기 류경수.[3]
개요에서 짧게 상술한대로 이 105땅크사단의 역사는 곧 조선인민군 전차 보유의 역사와 함께 시작하기 때문에 설명할 것이 굉장히 많다. 1946년 이후 조선인민군이 점점 무장을 시작하면서 김일성은 남침에 가장 우선적인 전차를 포함한 기계화무기들을 소련에게 부탁하였고 소련은 개전 직전까지 T-34 242대와 SU-76M 176대 등을 지원하며 대한민국과 달리 본격적인 전쟁을 위한 무장에 열을 올리던 참이었다.

조선인민군의 땅크전력 창설은 1947년에서 48년 사이로 거슬러 올라가게된다. 류경수라는 인물은 당시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운동을 같이했던 동지로써, 특히 소련군이 운용하던 땅크를 매우 동경하고 있어서 몰래 소련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해가며 전차에 대한 것을 배웠을 정도로 땅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인물이었다. 즉, 탱덕후였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를 지켜본 김일성은 정권 설립 후 조선인민군 최초의 땅크부대 창설을 준비하면서 그를 적임자로 내세우게 된다. 1948년 8월 20일 그렇게 덕업일치조선인민군의 땅크부대 창설을 진두지휘하게 된 류경수는 첫 땅크부대인 제15교도땅크련대를 탄생시켰으며 이 때문에 조선인민군의 기계화군단 명칭인 제820기계화군단(위장명칭 820훈련소)의 단대호가 바로 이 8월 20일에서 따온 명칭이 되었다.

조선인민군은 소련군정이 끝난 1946년 이후 소련군이 남기고 갔던 각종 중화기 특히 T-34-85전차를 기초로 소련군 교관을 초빙해 전차전술과 부대창설에 대한 준비를 시작했고 전차운용에 적합한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을 가려뽑아 부대가 주둔했던 지금의 평양 사동일대 호랑이골에서 고도의 훈련을 거쳐 조선인민군의 첫 전차 승무원들을 배출하였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첫 땅크열병식을 시작한 때로부터 이 교도땅크련대는 교도라는 타이틀을 벗기고 군기를 하달받아 본격적인 야전땅크부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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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땅크부대 군기.jpg
1948년 11월 땅크부대에 하달된 군기.
1949년 4월 26일에는 '제9 땅크려단'[4]이라는 명칭으로 여단급 전차부대로 승격된 이후 6.25 전쟁 때 전투에 투입되면서까지 유지된다.

6.25 전쟁 당시의 제9땅크려단은 현재 우리 대한민국 국군의 제1포병여단같은 군단급 지원부대와 비슷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예하에 있었던 4개의 전차련대인 1땅크련대[5], 2땅크련대[6], 3땅크련대[7], 65기계화보병련대[8]를 독립적으로 운용하지않고 조선인민군 제1군단 예하 1,3,4,6사단에 1개씩 임시배속하여 진격지원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그 결과 1땅크련대와 2땅크련대는 3,4사단의 진격축선을 따라서 대한민국 국군의 제7보병사단을 섬멸시켰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가장 먼저 뚫고 들어가 점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학교병원 인근 산에서 교전이 발생해 조용일 소령과 남 소위, 그리고 선임하사인 민 하사를 비롯한 수비병력 전원이 전사했다. 이후 병동에 난입하여 그곳에 입원해 있던 한국군 부상병과 일반 환자 약 900여 명을 학살했다. 저항을 포기한 포로의 학살도 전쟁범죄인데 민간인까지 죽였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에 대한 서울시민의 반감은 적지 않았다.[9]

어쨌든 서울함락 이후, 제9땅크려단은 1950년 7월 5일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7호에 따라 '제105 땅크사단'으로 승격되었고,[10] 서울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같은 달 27일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54호에 따라 근위 칭호를 수여받아 근위 서울 제105 땅크사단이라는 명칭이 되었다.

105땅크사단은 서울 점령 이후, 오산시에서 미군을 공격한 후 금강, 대전광역시, 낙동강 등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군의 남침 당시, 국군에는 T-34-85를 저지할만한 무기가 거의 없어서 곡사포직사로 사격하여 격파를 노리는 방법, 궤도 집중공격, 수류탄 또는 박격포탄 묶음을 들고 적 전차에 맨몸으로 돌격하는 방법 등이 시행되었을 정도로 북한군 T-34를 저지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전체적인 전세를 바꿀 수 있을 만큼의 피해를 입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05땅크사단은 낙동강으로 진격하는 도중 미군의 네이팜 및 공대지 폭격, 보급선의 부실 및 고장으로 인한 진격 도중의 유기,[11] 자력 집중적인 대전차 사격으로 적지 않은 수를 잃게 되었고,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도 민낯을 드러나게 된 북한군의 저급한 전차운용, M26, M20과 같은 UN군의 강력한 전차와 대전차화기 등으로 인하여 상당수를 잃게 되었다.

당시 다수의 T-34를 손실한 105땅크사단은 부대에 사단이라는 이름만 붙은 상황이었지, 사실상 연대급의 부대였다. 인천상륙작전이후, 퇴로가 차단되기 시작한 조선인민군은 퇴각하면서 남은 T-34들을 모두 집결시켜 수원 부근에서 미군의 포위를 간신히 돌파하였는데, 이때에도 손실을 감수하여야 했다.

결국 105땅크사단은 몇 안 되는 T-34만으로 강계까지 퇴각하였고, 이 이후 10월 말과 11월14일 즈음에는 T-34를 새로이 인계받고 제3군단으로 배속된 후 후방에서 재조직되었다. 완전히 새로 편성 되다시피 한 105땅크사단은 사실상 교도련대 수준을 면치 못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예비물자와 훈련도 부족하여 전선에 투입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1951년 4월 1일 이후에는 최고사령부 관하 제4군단으로 배속 이동되었으며, 미 공군의 공습에 대비해 방공기자재를 운용하는 부대들을 사단에 편제시키게 되면서 근위 서울 제105 기계화사단으로 개칭되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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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설치된 류경수의 흉상
당시 지휘관이었던 류경수는 1958년 사망했는데 부대명칭은 한동안 바뀌지 않고 이어져 오다가 이후 2001년 5월 23일 김정일이 이때의 지휘관 류경수의 업적을 기리고자 최고사령관 명령 0089호를 내려 류경수라는 칭호를 하달하면서 결정적으로 현재와 같은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으로 최종 명명된다.

2.1. 상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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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민군 전차의 상징인 105 숫자가 붙어있는 T-34
윗동네에서는 105라는 숫자가 본 문서의 부대를 상징함은 물론 땅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런식으로 자신들의 기념일이나 특별한 뜻을 내포한 숫자들을 프로파간다에 써먹고 있다. 이를테면, 자칭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일인 1953년 7월 27일을 기념해 고위간부의 차량번호에까지 할당하는 727번호와 EC-121 격추 사건때 공훈을 세웠던 MiG-21 전투기에 사건일자였던 1969년 4월 15일을 기념해 415 전투기라는 금테가 둘러진 삐까뻔쩍한 노즈아트를 수여하는 식이다

개요와 역사 문단에서 짧게 설명한대로 105와 류경수 그리고 820이라는 세 가지 숫자는 조선인민군 땅크부대 창설역사의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북쪽에서 류경수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아주 대단한데 그의 이름을 딴 각종 땅크나 기계화 관련 시설도 존재하고 조선인민군의 첫 땅크부대 지휘관이자 전문가인 동시에 김일성과 빨치산 활동을 같이했다는 것만으로도 후대에 이 자가 얼마나 미화되고 띄워졌을지는 북한이라는 국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뻔해보인다. 어쩌면 김일성의 숙청이 한창 벌어지던 60년대에서 70년대를 보질 못하고 1958년에 지병으로 죽은 게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다.

2014년경 이후에, 북측에서 6.25 전쟁 당시 공훈을 세운 조선인민군 근위부대를 찬양하기 위해 작곡된 조선인민군의 군가인 '근위부대 자랑가'에서 가사의 맨 첫 번째 부대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해당 군가는 작곡 이후 2015년, 2017년 열병식에서 근위부대 열병식을 할 때마다 연주된 곡인 걸로 봐서 북한 정권에서 밀어주고 있는 곡인 듯하다. 우리나라 뉴스에는 '한국 전쟁 당시 서울을 제일 먼저 함락 시킨 땅크 부대를 칭송하는 내용'이라고 소개되었다.

3. 현재의 예하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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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황해북도 곡산군에 주둔하고 있는데 조선인민군의 이름난 정예부대인 만큼 대한민국 육군으로 쳤을때는 거의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나 혹은 제11기계화보병사단과 동일한 성격의 부대라 그런지 최신무기들이 족족 배치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물론 자칭 최신무기고 최신무기 호소일 뿐이지 서방 선진국들은 물론 동구권 출신 국가들이 봐도 거지가 따로 없다선군호가 우선배치되어 최소 복수의 대대급 규모 이상 편제된 상태다.

◆ 사단 본부와 직할대

◆ 제1 땅크장갑보병련대 (선군호)

2017년 1월 선전영상에서 증강한 땅크장갑보병련대 겨울철 도하공격 전술련습 훈련간 식별된 단대호로써 부대 편제개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선군호 전차와 M2010 APC 및 덕천계열 자주포와 도하공병자산이 여럿 식별되었으며 특히 선군호 전차를 운용하는 것이 확인된 유일한 제대이다.

◆ 제106 땅크병려단 (천마-215/216)

2024년 3월 13일 조선인민군 땅크병대련합부대간의 대항훈련경기에서 제106땅크병려단장 심경일 상좌의 지휘아래 천마-215/216(폭풍호)를 이용해 훈련하는 부대원들이 식별되었다.

◆ 제107 땅크병려단

◆ 제923 땅크병려단

◆ 제518 기계화보병려단

◆ 제727 경보병려단

◆ 제731 포병려단

상기 부대는 열병식 및 선전자료 등을 통해 단대호가 확인되었다.


이 105사단은 특정 군단의 소속이 아니라 합참의 성격인 총참모부 직속 부대로써, 전시 전연군단을 백업하며 남진의 기동력을 구현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조선인민군에서 유일한 땅크사단이고, 이러한 조선인민군의 전략적 기동예비부대가 그렇듯, 108,425,806,815,123기보사단과 동일하게 일반적인 3개 려단또는 련대로 구성되는 사단의 형식이 아닌, 7~8개의 려단을 편제하여 매우 과다할 정도로 과편제된 구조를 가진다.

7~8개 려단으로 구성된 사단은 당연하게도 상식적인 편제는 아니고, 규모로만 따져도 군단급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10여년 지난 자료이긴 하지만 실제 해당부대 기갑장교 출신으로 탈북한 강무철이라는 탈북자의 증언에서도 105사단을 명칭만 사단일 뿐, 실질적으로 군단무력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인민군의 이러한 기형적인 편제구조는 전연군단에도 동일한데, 남침의 선봉을 담당하는 휴전선일대 1,2,4,5전연군단의 경우 명칭은 군단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야전군 수준의 부대로써 각 군단에 상비사단만 6개가 넘고 기동여단도 수 개씩 편제하고 있다.

3.1. 전력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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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M2010 APC를 대량으로 배치받아 기존 궤도식 장비보다 우월한 기동성과 관리/유지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선군호를 이용한 하천 도하훈련도 함께 진행했다. 전체적으로 조선인민군의 모든 최신장비를 우선적으로 하달받는 부대이며 6.25 전쟁 때 서울을 가장먼저 무너뜨린 부대라 그런지 6.25 전공부대에 하달되는 근위대칭호가 기계화부대들 중 유일하게 가지고 있다. 물론 당시에 기계화부대라곤 교육용 부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이 105밖에 없었다. 따라서 열병식 때도 해당 최신장비들이 측면에 근위대라 써진 대형 스티커를 붙이고 등장한다.

기존에 보유하는 것으로 추정하던 BMP-1 등은 더 이상 조선인민군에서도 운용여부가 불확실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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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0일 열병식에서 류경수사단 병력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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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5일 열병식에서 류경수사단 병력들의 모습. 이 열병식에서 류경수사단을 비롯한 땅크사단 병력들은 멀티캠 트로픽을 닮은 새로운 위장복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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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3일 조선인민군 전차부대간 대항훈련에서 천마-215/216 전차로 우승을 차지해 김정은의 치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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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에 투입된 선군-915
2024년 3월 24일 김정은이 사단을 찾아 사단 사령부와 제1땅크장갑보병련대를 시찰하고 치하했다고 한다. 제1땅크장갑보병련대에는 선군호 전차가 배치된 것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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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방문 기념으로 고봉밥, 삶은 고기, 붉은 양념이 들어간 국과 과일이 특식(!)으로 나왔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은 이정도도 보여주기식 선전용 호화 식단이라는 반응이다.

4. 그러나 명백한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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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부대 역시 언제 조선인민군이 안 그랬냐만은 실질적인 조선인민군의 현 상황을 볼 때 조선인민군의 최강 정예부대이자 최고의 기갑부대이고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단 3일 만에 밀어버린 전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 꼬라지가 말이 아니라서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당연히 많다.

4.1. 1980년대 수준의 전투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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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전차라던 선군호조차도 공개된 형상과 정황등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60년대 활강포 땜빵으로 나왔던 T-62T-64T-72에 준할 정도로 극한까지 개량하여, 차대를 개조하고 거기에 포탑을 대형화시켜 T-72 수준의 복합장갑을 넣고 125mm 주포를 얹은 것으로 끝난 한계성이 뚜렷한 전차이다. 콘탁트-5와 같은 반응장갑이나 소프트킬, 하드킬 능동방호장치 따위도 제대로 없고 FCS(사통장비)도 갖추지않은 냉전 깡통전차에 불과하기에 오히려 이라크가 보유했던 포탑사출전문가 T-72M 계열보다도 기본기가 떨어지는 물건이다.

하물며 그 아래인 폭풍호를 비롯해 T-62의 조선인민군 제식명칭 계열인 천마호는 모두 한계가 뚜렷하며 경사장갑 채용이나 차대확장 등을 했을 뿐 근본적인 개량과는 관계가 멀다.

전차뿐만 아니라 장갑차나 대공차량 등도 이미 보병전투차개념의 선구자라는 타이틀만 가진 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들어가버려 이젠 중동전장에서도 구식이 된 BMP-1이나 현대에는 아예 저고도 방공망으로도 쓰기 어려운 ZSU-57-2 같은 물건을 운용하고 있다.

수적우세라는 식으로 말로만 떠들어 봐야 더이상 한국군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80~90년대에 K-1 전차가 실전배치 완료된 시점부터 이미 전차교전비는 남한이 압도적으로 유리 해진 것은 물론, 이제는 지속적인 K-1 전차의 개량과 K-2 전차 실전배치로 남한의 기갑군단이 단독으로 북한의 기갑군단을 격파하는 것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압도적인 공군, 야전 육군의 공포의 대상인 아파치헬기 까지 등에 업고 있으며 전차를 따르는 보병을 갈아버리며 원거리에서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 수백수천 문의 곡사포, 자주포로 무장한 한국 육군은 조선인민군 입장에서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 조선인민군 최정예라는 땅크사단은 결국 이라크사담 후세인의 전철을 밟을 확률이 거의 100%다. 당장 걸프전쟁 때만 보더라도 일반 정규군과 비교되고 특혜를 받은 동시에 엄선되어 선발되었던 고도로 정예화된 공화국 수비대 소속의 탈와카나,메디나,함무라비 이 3개 이라크 최정예 기갑사단들의 최후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자. T-72로 무장해봤자 미군 에이브람스 1개 중대(13대 남짓)에게 몇십 분 만에 예하 전차여단(100여 대)들을 통째로 털리고 100시간 만에 완패해버렸다. 그 이라크만도 못 했던 공군력과 경제력을 갖춘 북한이 90년대 미군과는 비교도 안 되는 현재의 미군을 상대한다는 건 차라리 신에게 대적하는 게 더 쉽다고 생각될 정도다.

만약 2020년 10월 10일 열병식에서 공개된 M-2020 전차가 보여주기용 가짜가 아니고 제대로 실전배치되어 정상적 운용이 가능하다면 열약한 조선인민군의 현실을 어느 정도 극복하여, 선군호와는 달리 남한과의 전차전에서 압도적 열세를 극복하고 K-1 전차에 어느 정도 위협적일 것이다. 문제는 북한의 열악한 경제력으로 생산하는 M-2020전차의 수량이 얼마나 될 것인가와, 120mm 전차포를 장비한 K-1A2와 K-2에게는 여전히 압도적 열세라는 점이다.[13]

4.2. 1950년대 수준의 전투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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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대가 더 끔찍한 것은 겉으로는 적화통일만 되뇌일 뿐 전혀 실천이라는 걸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냉전식의 소련군이 주도했던 공격적인 기계화부대와 제파공격을 앞세운 양면 침공교리를 조선인민군은 미군이 최대한 오기전에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을 선제 침공해서 부산까지 다이렉트로 뚫고가는걸 중시했는데 문제는 이런 교리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희생할 물자와 인력을 감수해야하고 무엇보다도 유류체계와 보급체계가 원활해야한다.

나치 독일군만 보더라도 전쟁준비기간이 미흡해 보급 속도가 진격 속도에 못 미쳤고 결국 시원하게 뚫고가다가 42년도와 43년도를 기점으로 탈탈탈 털리고 소련군에게 두들겨 맞았는데 이 수준도 안 되는 조선인민군이 이런 공격적이고 양면에 엄청난 물자를 투입해야 겨우 할 수 있는 짓을 가능케한다면 핵과 치트키를 현실에서 쓴 것이다.

게다가 만약에 선군호 같은 구식 전차들이 K-2 흑표K-1 전차보다 방호력과 공격력이 강한 전차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내부에 현대적인 FCS와 광학장비가 전무하다시피한 깡통에 불과해서 야간전투 수행도 불가하고 한국군 전차들이 기동간 사격을하며 헌터킬러 개념으로 조선인민군 전차를 먼저 발견하고 쏠 때까진 단 몇초도 걸리지 않고 또 이 사실을 C4I체계 등을 통해 아군에게 실시간으로 전송해 지휘통솔을 원활히 하도록 한 데 비해서 조선인민군은 포탑을 돌리고 내부에서 적을 찾으며 역시나 수동으로 모든 전투를 수행해야하기 때문에 대처속도도 매우 떨어질뿐더러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도 않았기 때문에 실전에 효용성은 얼마나 떨어질지는 뻔히 보인다. 당장 최정예로 훈련받고 배급도 짱짱하게 대우받는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도 그렇게 탈탈 털렸고 최정예부대마저 간부들이 배터리 떼다가 TV보고 10년에 기동훈련 할까말까한 군대인데 그게 가능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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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76 등의 구식 경전차를 이용한 정찰, 강행돌파, 험지전투나 전방 알보병을 까부수도록 기획된 땅크 게릴라전술을 현대전에 와서도 버리지 못한 조선인민군은 인력만 낭비하는 꼴이다. 당장 K-21같은 전투장갑차만 보더라도 사통장비가 첨단화되고 원거리에서도 적을 식별해내서 높은 수준의 관통력을 가진 탄환으로 구식전차 측면은 으깨버리는데 2차대전 직후에 등장한 중기관총 철갑탄도 전면으로 겨우 받아내는 구식 경전차 따위로 뭘 할 수 있을지는 조선인민군 수뇌부만이 알 것이다.

4.3. 태만한 군기와 낮은 훈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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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탈북한 조선인민군 105사단 출신의 탈북자 말을 들어보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가장 최정예라는 부대조차 전차 배터리를 간부들이 몰래 뜯어다가 TV볼때 쓸 정도고 조종수는 1년에 기동훈련도 못 하며 소대장이나 전차장이라는 인간들도 정작 전차를 몰아본 경험이 거의 없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것만 봐도 이게 정신력 운운할 자격은 있는지 의문인 군대이다.

구식무기여도 적어도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는다면 2선급이나 예비군용도로는 적합할 텐데 이 나라는 무기도 구식이고 훈련이나 병사들의 사기는 물론이요 자신이 타는 장비가 적어도 무엇인지는 알아야 할 텐데 그마저도 모르는 수준이다.

4.4. 보급 부족

이 문제는 땅크사단만의 문제가 아닌 조선인민군 전군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 참조.

물량이 있으면 뭘 하는가? 기갑부대도 연료와 탄약이 있어야 훈련을 하는데, 군대 자체가 그럴 연료나 탄약이 없다. 사실 위에서 나열한 훈련도와 복무사기가 극악하리만침 낮은 가장 큰 이유가 이유가 보급 부족 때문이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선군호가 세계최강의 전차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보급이 받쳐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깡통이 될 뿐이다.[14]

애초에 식량을 비롯한 기본 의식주조차 제대로 배급되지 않아서 평소에 하는 것이라고는 체계적인 훈련이 아닌 민가를 털어 약탈을 하거나 밭에서 서리를 해가면서 식량을 얻거나 아니면 부대 내의 농장시설이나 협동농장 등에 인력으로 투입되어 농사나 짓고 있다.

5. 전쟁 범죄

105땅크사단은 그 유명세로 인해 전쟁 범죄 역시 잘 알려져 있는 조선인민군 부대이다.
  • 서울의대 부속병원 학살 사건
    1950년, 서울대병원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으로, 제9땅크려단 당시의 105사단이 실행했다. 희생자는 기록 미비로 인해 최소 100명, 최대 1,000명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303고지 학살 사건
    1950년, 105사단이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 일대에서 미군 제1기병사단 포로 42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6. 기타

이 부대의 사령부는 황해북도 곡산군 인근에 퍼져있고 인근에는 최전방 항공부대인 곡산 비행장이 존재하는데 이 비행장에 주둔하고있는 조선인민군 제86 비행연대에선 아직도 MiG-21 초기형이나 굴리고 있다. 사단사령부는 곡산 시내와 외곽 그리고 비행장 사이에 있으며 이 주변 지형을 동서남북으로 쭉 넓게 예하 부대들이 퍼져있다.

따라서 남침전쟁이 시작되거나 반대로 한국군이 올라가게 된다면 철원축선에 자리잡고있는 한국군 제3보병사단제6보병사단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될 부대일 가능성이 높다. 2차로 이보다 약간 뒤쪽에 주둔중인 제8기동사단이나 제1기갑여단등도 이 부대와 전면적으로 전투에 돌입할 가능성이 꽤 높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선인민군에서 최정예라던 105사단도 수준만보면 자기보다 체급이 서너배는 작은 한국군 독립기갑여단에도 그냥 복날에 개 맞듯이 갈려나갈게 뻔한데, 훈련을 하고 안 하고 차이는 심하다. 심지어 조선인민군은 훈련보다 구타를 자주 한다고 조선인민군 출신 탈북자들이 하나 같이 증언한다. 그래서 프래깅 또한 만연하다. 한국군에 투항할 가능성이 엄청 높다. 쌍팔년도 이전의 한국군에 대응되는 수준이니..

대중매체 중 2차 한국전쟁에서 최종보스 포지션으로 등장, 12군단과 강동포병군단, 일부 교도대와 함께 주인공이 속한 육군 80기갑여단과 해병 2사단을 위협한다. 그러나 신의주에 상륙해서 미군 지원도 없이 밀고내려와 평양 북방에 있어서 탄약과 유류보급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페널티까지 가진 80여단에게 사실상 소멸당한다. 물론 80여단은 그 대가로 장비 50%, 병력 30%를 상실했지만.... 정작 주력인 2사단은 80여단의 탱킹으로 멀쩡했고, 결국 조선인민군은 포병탄약만 보충받으면 2사단이 평양에 돌입할 기세를 보이자 황급히 무조건 항복하고 만다.

여담이지만 1998년 송림사건에 무력시위를 위해 투입되었다.

7. 관련 항목



[1] 북한에서는 1972년 11월 4일로 주장(열병식에서 확인 가능)[2] #[3] 군복 가슴팍에 달려있는 것은 국기훈장 제2급이다. 저 사진이 촬영되었을 당시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고, 훈장의 종류 역시 국기훈장 한 종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위 장교임에도 방탄훈장 차림새가 아니었다.[4] 단대호 명칭은 '제105군부대'로 명명되었다.[5] 107군부대[6] 109군부대[7] 203군부대[8] 206군부대[9] 점령지에서 제일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민심을 확보하는 것인데 무장 해제 당한 포로에 비무장 상태인 민간인까지 전부 잡아죽였으니 서울 시민들 입장에선 가족과 친구를 죽인 망할 빨갱이 새끼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10] 제9 땅크려단 시기부터 갖고있던 단대호인 '제105군부대' 의 숫자가 그대로 정식 사단 번호가 되었다.[11] 많은 수의 전차들이 38선 부근에서부터 경상도 부근까지 자력으로 기동했기 때문에, 진격을 거듭하면서 엔진성능 저하, 궤도 마모 등 구동계통의 내구도가 악화되었다고 한다.[12] 이후 다시 기계화사단 이라는 명칭이 땅크사단 이라는 명칭으로 재변경되었다.[13] 이미 국군 파주-문산 축선의 1군단 산하 기갑여단은 모두 K1A2로 무장하고 있으며, 가장 권역이 넓고 도시개발이 덜 되어 군단급 부대가 기동할만한 철원-포천 평야에는 7기동군단의 여단전투단만 7개가 자리잡고 있고 당연히 전량 K2, K21로 무장하고 있다. 이런 장비들로 무장한 부대들에 질로도 밀리고 머릿수로도 밀린다면 압살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14] 전쟁에서 진정한 강함은 보급이며, 거의 대부분의 전쟁 역사에서 승패를 결정한 것 또한 ‘어느 나라가 보급할 여력이 더 많이 남아 도는가’ 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급 체계에 문제는 비단 북한 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에서 일어났다. 소련군과 중국군, 그리고 조선인민군 등이 공산주의 사회 특성상 내부적인 보급체계에서 한계에 직면해 버렸고, 결국 냉전기에 들어서서 단기적이고 공격적인 군사교리를 채택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러한 단기전이 성공한 사례는 동구권에서 단 한번도 없는데, 국공내전의 공산군은 공격적인 성향을 띠긴 했으나 결코 단기적인 성향을 띄지 않았고, 오히려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하기까지 준비한 기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으며, 베트남 전쟁기 북베트남은 오히려 미국을 상대로 악착같이 게릴라(방어전)로 버티며 정치,외교 선전에서 승리 했을 뿐이지 초기에 적극적이었던 공세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단기전을 목표로 한 교리가 없었다. 나치 독일의 전격전은 초기에 무리할 정도로 역량을 쏟아부은 나머지 결과적으로 소련에게 패배 했고, 아이러니 하게도 시대가 지나 독일과 유사한 공격적인 교리를 채택한 냉전기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패배 요인중 하나가 보급 이었다. 소련군은 그 결과로 연방이 해체 됨에 따라 같이 해산 되거나 러시아군이 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지금의 열악한 모습을 갖추었으며, 중국군은 자본주의 체제가 도입 됨에 따라 보급의 한계를 메꾸어 주요 군단의 전반적인 첨단화에 성공했다. 전격전의 전설에서 저자는 이걸 돈키호테에 비유하며, 전격전으로 '전투'는 이길 수 있어도 '전쟁'은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