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9:09

황교익/비판과 논란/일본 유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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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근본적 원인3. 한국 음식의 기원은 일제강점기 발언4. 불고기 어원과 유래 논란
4.1. 반박
4.1.1. 김윤경 주장의 검토4.1.2. 불고기, 야키니쿠(焼肉)에 대한 문헌과 증언4.1.3. 주영하의 반박4.1.4. 야키니쿠의 현실4.1.5. 맥적, 설하멱, 샤슬릭과의 비교
4.2. 황교익의 반론과 재반론 국민일보 해명4.3. 결론과 근황4.4. 여담: 원조 불고기4.5. 여담: 원로 국어학자 이기문에 "아무말 대잔치"4.6. 여담: 불고기가 우리 게 아니면 어때? 동영상4.7. 결말: "나는 '왔다'가 아니라 '왔을 수도 있다'고 했다"
5. 어묵, 회 논란?6. 멸치육수 논란7. 장어 논란8. 감자면 논란9. 을지로 골뱅이 무침10. "궁중 음식은 친일 음식."11. 피해자 코스프레12. 일제의 조선 침략이 형제의 나라라고 여겼기 때문?13. 연미복은 일본 정치인의 제복?

1. 개요

"35년 동안 지배당했다고 반만년 이어왔던 우리 입맛까지 팔아먹은 줄 알았어? 어림없는 소리!
(중략) 낯선 곳을 여행할 때에 그곳 공부를 하고 가야 시간낭비가 없고 이해를 빨리 할 수 있듯이, 한국 음식을 알고자 왔으면 사전에 콩나물이 밭에서 자라는지 시루에서 자라는지[1] 정도는 알고 와야 할 것 아닌가!
(중략) 가라! 다음에 올 때는 김치의 맛이라도 익숙해진 다음에 오도록 해라!"
- 식객 12권, 오성길 숙수[2]
"그 소리는 르 카냘의 주인도 하고 싶었을 거에요, 오리 요리(프랑스식)는 피로 만든 소스로 먹는 게 규칙이라고, 하지만 이런 자리(승부)가 아니라면 가이세키를 마요네즈로 먹는 짓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유는 전통과 문화 속의 규칙을 존중하고 싶으니까요. 이와 똑같은 위대한 문화 중 하나인 프랑스 요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오리 요리를 와사비 간장으로 먹는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하지 않고 비웃거나 파괴하려는 건 비열하고 야만스러운 짓이니까요!
- 맛의 달인 3권, 야마오카 지로[3][4][5]

황교익은 한국의 전통 음식 문화를 부정하며, 현대 한국의 식문화가 모두 일본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이런 모습을 두고 윤서인에 빗대어 온라인에서 맛서인이라 불리다가, 황교익이 활발한 방송 활동 등으로 더 높은 지명도를 확보한 탓인지 주객전도되어 이젠 윤서인이 만화계의 황교익이란 뜻의 '만교익'이라 불릴 지경이 되었다. 아예 이름을 일본식 발음 비슷하게 '교이쿠'나 '교이쿠상'이라고 부르면서 "사실 황교익(교이쿠) 이름은 일본에서 유래됐거든요."라 패러디하면서 비꼬는 사례도 생겨났다.

한때는 황교익의 망언이 '불편한 진실' 혹은 '정치적인 일침'으로 여겨진 적이 있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맛 칼럼니스트라는 칭호가 주는 권위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헬조선 열풍이 그의 정치병혐한 성향을 정당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허나 황교익이 백종원을 부당하게 비난한 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황교익이 그간 내뱉은 망언에 대해 전면적인 검증이 이루어졌고, 그의 실상이 까발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자신은 친일이 아니라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2. 근본적 원인

황교익이 이런 식의 주장을 펴는 이유를 알아보려면 그의 이야기에 깔려 있는 몇 가지의 전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 일제강점기와 개발독재 시대를 거쳐 전통 문화는 완전히 죽었다. (혹은) 조선 시대부터 전해진 전통 문화라는 건 다 저질이다.
  •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온 식문화가 현재 한국 식문화의 원류이다.
  • 개발독재 시대를 거쳐 이 일본에서 온 식문화도 퇴화가 되었다.

이와 같은 논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

일제강점기와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전통 문화가 상당 부분 소실된 것은 사실이고, 한국 문화가 20세기 초 일본 문화에 영향을 받은 부분들도 많고, 개발독재 시대를 거쳐 식문화가 단순화된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에 개발독재 세력을 매우 싫어하는 황교익 본인의 정치적 성향과 맞물리니 '한국의 식문화는 이미 개발독재 세력에게 희생당했다'는 소설을 쓰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 하지만 한국 식문화가 얼마나 변했는지, 또 정말로 현대 한국인들의 식문화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인지는 좀 더 깊은 연구를 통해 증명해야 할 사실인데, 황교익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만의 역사관을 밀어붙인다.[6]

이렇게 생각하면 황교익이 자꾸 일본을 끌어오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 어차피 현대 한국에서 전통 한국 음식을 한다는 것은 1970년대·80년대에 단순화되고 뒤틀린 가짜 문화를 잡고 있는 일에 불과하고, 그런 사회 속에서 일반인들의 입맛에 맞춘 대중적인 음식을 하는 것은 개발독재 시대의 잘못된 문화를 고착화시키려는 반동적 조치에 불과하다.
  • 그리고 이런 '잘못된' 문화에 경도되어 있는 대중들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 식문화의 원류이며, 퇴행을 겪지 않았던 일본 식문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허나 황교익의 주장에는 몇 가지 큰 문제가 있다.
  • 현재 한국 식문화의 원류가 일본의 식문화라는 근거가 없다. 관련 음식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한국 음식 문화는 상당 부분이 과거로부터 충실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소실된 한국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고수들의 노력들도 꾸준한데, 황교익은 이를 깡그리 무시한다.
  • 또 하나의 문제는 1970·80년대를 거쳐 자리잡은 문화를 완전히 부정하려는 태도이다.[7] 이미 한번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은 문화를 감싸고 가거나 끌고 가려는 시도 없이 무조건 없애려고 하다보니 해당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험악한 말이 나오고, 그 시절에 나타난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가짜 정보가 등장하고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8]
  • 가장 심각한 문제는 황교익 본인이 가진 조선시대에 대한 편견이다. 그는 조선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한심한 국가란 전제 하에 자신의 망언을 늘어놓고 있다.[9] 그러니 황교익은 본인 관점에서 존재할 리가 없거나 원래부터 잘못되어있던 한국의 식문화를 복원하려는 한식 전문가는 멸시하고, 대신 지금 한국 식문화에 시초가 됐다고 생각하는 일본 식문화를 찬양하는 것이다.[10][11]

황교익의 식문화 내선일체론은 그가 정확히 어디서 꼬여있는지 매우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정확한 지식과 꽉 막힌 정치적 신념이 만난 결과 사람이 더 이상 수정이 안 되는 것이다. 그와는 정치적 신념이 반대편에 있지만 비슷한 취급을 받게 된 윤서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마침 윤서인도 진한 일뽕 성향으로 추정되므로, 진짜 있긴 한지도 의심되는 정치적 신념과 달리 개인적 신념은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3. 한국 음식의 기원은 일제강점기 발언

백종원에 대한 비난을 일삼다가 그간 쌓였던 논란이 터지면서 해명한답시고 2018년 10월 4일 신문기사에서 한국 음식의 기원은 일제강점기…부끄러워할 일 아니야라고 발언하여 황교익의 역사관에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났다.

그는 "일본 음식의 영향을 받은 한국 음식이 숱하다. 이 일에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자존심 상할 것도 아니다"라면서, 민족주의를 들먹이며 지금의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라며 이런 사고관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했다.음식 문화가 민주주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의문

여기에 황교익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음식에 애국애족의 감정을 붙이기 시작한 사람은 박정희"라고 주장하며 "한국음식의 전통 조작은 이 때에 시작되었다. 박정희 시대를 온전히 끝내기 위해서는 우리 머릿속에 있는 박정희를 내쫓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돌려 말한 것이지만 결국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머릿속에 박정희가 들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글의 요점. 결국 황교익의 이러한 발언들은 순수하게 요리 그 자체에 대한 게 아니라 정치적 진영논리가 뒤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서는 "한국 음식, 외식 문화 발달사를 보면 일제강점기 때 많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에는 외식 문화가 없다"고 주장했다. 즉, 일제강점기 이전의 역사와 문화를 모조리 부정한 것이다.

황교익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는 조선 시대에 쓰인 요리 서적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 음식이 일제 강점기에 시작되었더라면 그 이전에는 요리법이라는게 제대로 발달되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책으로 써서 남길 요리법도 없었을 것이다. 황교익이 조선은 한국이 아니니 조선의 요리는 한국의 요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모를까[12], 황교익의 주장은 입이 열개여도 변명할 수 없는 망언에 불과하다.

황교익은 한국 음식이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것을 인정하는 건 친일이 아니라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막상 그는 일본 요리에 영향을 받은 한국 요리의 예시를 제시한 적이 없다. 황교익은 붕어빵, 풀빵, 단팥빵, 오뎅, 우동 등을 언급했지만, 이 음식들은 일본 음식에서 비롯된 한국 음식이라기보단 그냥 일본 음식이 한국에 전파된 것이다. 황교익 본인 빼고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단 현재까지도 국립국어원은 우동을 가락국수로 표기하라며 강요하고 있다. 면발이 굵은 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아예 다른 요리임에도 말이다.) 이것을 무슨 '한국 고유의' 무엇으로 여겼다가 연원을 알고 나서는 배신감을 느꼈다는 황교익이 이상한 거다.

한반도에서 외식 산업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가 일제강점기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제 이전에는 요리 문화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 식재료를 최소한의 가공만을 거쳐서 섭취했다는 뜻은 아니다. 외식이 없어도 가정식이 있었고 잔치 음식이 있었고 궁중 요리가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 사료를 들고 오지 않아도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기존의 조선 요리, 즉 한식을 연구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1920년대의 신문 기사가 남아있기 때문. 한식이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다면 '기존의 조선 요리'라는 표현을 썼을 리가 없다.

또 외식 산업이 발달하지는 않았어도 아예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해장국이나 냉면 같은 것은 이미 18세기부터 배달이 되었을 정도이고 주막에서도 국밥같은 음식을 팔았다.[13]

이에 대해서 "그러한 전통적인 외식 문화는 양반이나 일부 상인 계층에 한정된 것일 뿐, 서민들이 보편적으로 향유하던 것이 아니다"고 하지만, 이는 전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다. 서구 사회조차 17·18세기까지 멜서스적 한계에 시달리고 있었고, 서민들은 자식 생일이라고 케이크를 사준다거나 그런 거 없었다. 서민들에게 외식 문화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이고, 일상화된 것은 헨리 포드대량생산 체제를 정립하고, 공기 중 질소 고정법의 개발로 질소 비료를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되어 농업 혁명이 일어난 20세기 초 이후부터다.

그리고 20세기에서야 본격적으로 발달했다는 한반도의 외식 문화도 일본 음식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운수 좋은 날에서 김첨지의 아내가 먹고 싶어하던 음식이 무엇이던가? 외식, 배달, 테이크 아웃까지 현대 한국인도 즐기는 음식 산업의 원형은 설렁탕, 냉면같은 한식이 주도했다.

1945년 해방 후 2020년 현재까지 72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사회가 미국 등 서구 문화에 받은 영향은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일본에 받은 영향을 훨씬 능가한다. 식문화도 엄청난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식문화는 지금도 구미권과 크게 다르다. 은 여전히 간식으로 취급받고 있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 김치, 국수, 나물, 부침개, , 찌개 등의 음식은 부대찌개같은 퓨전 형식을 제외하곤 '서양 요리화'되었다고 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다.

이러한 음식들이 현대에 겪은 변화들도 더욱 풍성해지고 다양해진 재료, 조리 및 보관 편의성의 향상, 달라진 입맛 때문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지, 단순히 '서양 요리의 영향으로' 달라졌다고 해석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현대 한식은 고유 전래의 한식에 비해 설탕이 훨씬 많이 들어가고, 그렇게 된 데에는 근대 서구 사회가 설탕의 대량 생산에 성공한 덕이 크지만, 그렇다고 "한식이 서양 음식에 가깝게 변화한 거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다. 요새 한국 사람들이 음식에 설탕을 많이 넣어 먹는 것은 다른 모든 인류와 마찬가지로 원래부터 단맛을 좋아했기 때문이지 '서양을 따라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냉면에 아지노모도를 사용하는 것 같은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이는 기존에 맛을 내기 위해 사용하던 식재료들을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조미료로 대체한 것이지 '일본 음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순 없다.

심지어 부대찌개양념치킨과 같이 서양 음식의 영향을 받아 현대에 탄생한 음식들조차 기원이 짧은 한식으로 취급받지 단순히 '서양 요리의 아류'로 폄하되지는 않는다. 아예 서양 요리가 로컬라이징 돼서 조합된 한국식 치킨+맥주인 치맥은 아예 한국 고유 음식으로써 인정받는 등 딱히 어느 것이 원류인지 따지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서양 음식이야말로 한식의 과거이자 미래"니 하는 말은 어떤 서양인이나 프랑스·이탈리아 요리 전문 셰프들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국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황교익이 주장하는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고유의 식문화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주류 문화로, 당시 주세령으로 많은 전통주가 단절되거나 변질되었다. 그 결과가 희석식 소주가 주를 이루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황교익은 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4. 불고기 어원과 유래 논란

불고기우랄알타이어족의 한글을 쓰는 민중의 머리에서는 직관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조어가 아닙니다.
- 황교익, 자신의 페이스북
경향신문-황교익이 불지른 ‘불고기’ 어원 논쟁···학자들 “‘야키니쿠’설은 엉터리”

4.1. 반박

페이스북의 황교익의 반박.루리웹[14]

불고기가 일본의 야키니쿠의 번역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박 그런데, 저 1줄짜리 짧은 문장 전체가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오류들로 범벅되었다.

첫 번째로, 한국어우랄알타이어족[15]이라는 가설 자체가 현대에 와서는 폐기에 가깝게 사장되었고, 현재 언어학계에서는 아직 논의가 진행중이긴 하나 한국어는 고립어내지는 독립된 한국어족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고립어로 보는 시각과 한국어족으로 보는 시각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제주말을 제주어로 보느냐, 제주 방언으로 보느냐의 차이. 그러니까 우리 말은 어족 분류상 꽤나 다른 언어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세르게이 스타로스틴이 '우랄 알타이제어 개념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고 학계에 발표한 시점이 1990년대 후반이고, 현재는 알타이 제어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다. 즉, 이미 사장된 지 20년도 더 된 낡아빠진 가설을 근거로 들어 팩트인 마냥 주장하는 것부터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황교익은 한국어는 우랄아타이어족이라고 교육받은 세대고, 언어학이나 국문학 전공자도 아니니 학설이 바뀐 걸 모른 것 자체는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본인이 언어에 대한 주장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불고기의 어원에 대해 어족을 근거로 들 거였다면, 그 때는 학설을 확인할 책임이 생기므로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두 번째로, 설령 한국어가 우랄알타이어족이라고 하더라도, 우랄알타이어족 설에서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둘 다 같은 어족에 포함되기 때문에 한국어만 불고기가 안 되고 일본어는 야키니쿠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 알타이 제어 문법으로도 불고기의 조어 방식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황교익이 다른 모든 분야에 대하서 그렇듯 언어학에 대해서도 정말 무식하다는 증거인데, 한국어는 물론, 알타이제어라고 분류되었던 모든 언어에서 '일반명사+일반명사=새로운 일반명사'가 되는 경우는 예를 들 필요조차 없이 널리고 널렸다. 아니 애초 이런 조어가 없는 언어 자체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세 번째로 황교익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조리방식+재료의 조어법은 불고기 말고도 여러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쓰인 '군고기', '잰고기' 등 단어들은 모두 조리방식 + 재료의 조합으로 황교익의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흔한 비빔밥 역시 비벼먹는+밥이고 볶음밥도 볶은+밥이다. 물회는 아예 불고기와 조어법이 동일한데 이것도 일본의 영향인가? 그 외에도 정말 많다. 군고구마, 군밤, 찐빵, 튀밥, 불닭 등등.

네 번째로, 황교익의 말에는 '민중'이 아니라 다른 권위있는 자가 고안한 번역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또다른 문제가 생기는데, 그 고안자 역시 (황교익 주장에 따르면) 우랄알타이어족을 사용하는 자일 텐데 왜 우랄알타이어족 사용자가 스스로 이런 직관에 어긋나는 조어를 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대학교수들의 비판에 대한 반박에 보면 막연하게 누군가의 창의적 고안일거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1. 창의적이라고 해서 다 해결되는게 아니라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만든 사람이나 그 '창의적'인 이유를 말이다. 2. 어떤 학자가 고안한 신조 번역어가 오늘날처럼 인터넷도 없는 시기에 어떻게 그렇게 널리 전파되어 쓰일 수 있는지 그 근거를 제시해야한다. 3. 스스로가 우랄알타이어족 사용자인 민중이 직관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단어라고 했는데 그런 비직관적인 단어가 민중들에게서 전폭적 지지를 받아 전파,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모순 또한 설명해야 한다. 4. 야키니쿠에 대응되는 한자(焼肉)어는 이미 1639년 승정원 일기에서 인조의 조반상에 나오는 기록이 있으며 1920년대 신문기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던 단어인데 굳이 번역어를 만들어 낼 필요가 없었음에도 직관에 어긋나는 신조 번역어를 창안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또한 일어 역시 우랄알타이어족인데 마찬가지로 우랄알타이어족 사용자의 직관에 어긋나는 '야키니쿠' 단어가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게다가 그의 주장대로라면 일어의 야키니쿠 역시 바베큐의 번역어로 시작되었을 것이므로, 동일 어족의 두 가지 언어에서 직관에 어긋나는 번역어가 두 번 연속으로 발생해야 한다.[16][17]

나머지 것들보다는 사소한 문제지만 마지막으로, 한글이 아니라 한국어라고 써야 옳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기도 한데 문자와 언어는 다르다. 간단한 예로 '음식'은 한글로 쓴 한국어이며, 'eumsik'은 라틴 문자로 쓴 한국어이고, '푸드'는 한글로 쓴 영어이고, 'Food'는 라틴 문자로 쓴 영어다.

우랄 알타이어족이라는 수십 년 전에 역사 언어학계에서 폐기된 이론을 사용하면서 해당 어족에 속한 한국어에선 과학적으로 나올 수 없는 단어라고 주장하는 점부터 신뢰도가 매우 떨어지며, 심지어 일본어가 한국어와 같이 우랄 알타이어족 가설에 포함되었던 언어라는 점을 간과한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황교익의 주장이 충분한 근거와 탄탄한 배경지식을 통해 이뤄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1.1. 김윤경 주장의 검토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한글은 역시 세계적으로 훌륭한 글이라고 찬양하는 그는 "처음에는 생소하고 듣기 어색했지만 벤토 대신에 도시락이, 돔부리 대신에 덮밥이, 야키니쿠 대신에 불고기라는 말이 성공한 것은 얼마나 좋은 예냐"고 지적한다.
- 김윤경, 1965년 12월 20일자 경향신문
황교익의 관련 글에 따르면, 1965년 한글학자 김윤경의 위 인터뷰를 근거로 불고기의 야키니쿠 어원설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30년대 이전에는 '우육구이'라는 단어가 쓰여졌다고 한다. 반면에 야키니쿠라는 음식명은 육식금지령이 해제된 이후인 1870년대에 등장했고, 야키니쿠라는 단어는 영어 바비큐의 번안어였다고 주장한다. #참고

그렇지만 황교익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반박된다.

첫째로 김윤경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무분별한 일본어 사용을 절제하자는 의미에서 야키니쿠의 사례를 언급한 것이지 불고기가 야키니쿠의 번역어라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교익은 "야키니쿠 대신에 불고기라는 말"이라는 문구를 "야키니쿠를 번안해 불고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했지만, "야키니쿠에게 밀려 사용빈도가 낮아진 불고기라는 우리말이 다시 언중에게 흔히 쓰이기 시작했음"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김윤경의 발언에 나와 있는 우리말 '도시락'도 이미 기존에 있었던 말이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벤또라는 일본어로 대체당하고 사어가 되다시피 하다가, 해방 이후에야 부활할 수 있었다.

설사 김윤경이 불고기를 야키니쿠를 번역한 단어라고 간주하고 인터뷰 하였다고 하더라도 김윤경은 경기도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했던 사람이고, 이기문 교수에 따르면 불고기는 해방이후에나 널리 퍼졌다고 하였으므로 김윤경이 불고기를 신조어라고 여겼다고 하더라도 무리는 아니다. 동일한 문장에 나타나는 '도시락'은 그 어원이 추적가능한데, 이는 확실하게 '벤또'의 번역어가 아니다. '덮밥' 또한 돈부리의 번역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돈부리는 돈부리모노(덮밥) 돈부리바치(돈부리그릇)의 줄임말이며 덮밥 형식의 음식은 고대 중국부터 존재해왔고 조선에서도 사반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세 가지 단어 중 두 가지가 번역어가 아닌 이상 불고기만 번역어의 예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논리가 빈약하다. 애초에 벤또나 돈부리는 불(야키)고기(니쿠)처럼 글자 그대로 일대일 대응 번역을 할 수도 없는 형식의 단어다.

게다가 일본에서 유래된 음식 이름은 아직도 한국에서도 일본식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다꾸앙, 스시, 우동 등의 단어는 각각 단무지, 초밥, 가락국수 등의 순화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쉽게 들을 수 있고 또 들어 왔으며, 위에서 언급된 벤또 역시 도시락으로 순화되었다고 해도 그 후로 꽤 오래도록 들을 수 있었던 단어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불고기를 굳이 야키니쿠라고 불렀던 경우는 일반인들에게는 생각하기조차 힘든데, 만에 하나 불고기가 야키니쿠에서 시작된 말이라고 해도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이상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저 논리와 같은 근거로 똑같이 왜곡시키면 한국에는 도시락이란 물건이나 식습관 자체가 없었고 일제강점기 때 넘어왔으며 벤또의 번역어일 뿐이란 주장도 가능하다.

4.1.2. 불고기, 야키니쿠(焼肉)에 대한 문헌과 증언

두 번째로 문헌적으로 한반도에서의 불고기라는 단어 사용이 한반도 내의 야키니쿠 단어의 사용보다 이르다는 점이다. 야키니쿠가 1870년대에 만들어 졌다고는 하나 한반도에서의 등장은 1930년대에나 비로소 등장하고, 불고기라는 단어는 1922년에 출간된 현진건의 소설 '타락자' 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황교익의 주장대로라고 하면 단어가 들어오기도 전에 번역어부터 생겼다는 소리다.

황교익은 1920년대에도 야키니쿠(焼肉)이라는 한자어가 등장한다며 이것이 야키니쿠의 사용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해당 단어는 한식 때 제사에 쓰는 음식을 나열하는 가운데 건육, 훈육 등과 함께 언급되고 있어 일본어 야키니쿠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단어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실제로 焼肉이라는 한자로 검색을 해보면 조선 초기의 세조실록에서부터 승정원일기 등까지 비슷한 맥락의 관련한 내용이 줄줄이 뜬다. 황교익 본인에게 1차 사료를 해독할 능력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자 자폭일 뿐이다.

세번째로 야키니쿠 문화를 만든 재일교포들의 증언과는 정 반대라는 점이다. 재일교포들은 불고기라고 표기하면 손님이 들지 않아 한자로 야키니쿠라고 바꾸어 불렀다고 증언했는데, 애초에 야키니쿠라고 불렀다면 처음부터 야키니쿠로 표기하지 왜 불고기로 표기한단 말인가. 실제로 초창기 야키니쿠 거리는 '불고기 상가'로 불렸고, 이후 불고기는 야키니쿠라는 단어로 대체되어 가는 것이 확인된다.#[18]

불고기라는 단어가 어떻게 최초로 형성되고 그 의미가 변화해 가는지에 관해서 연구한 논문[19]도 존재한다.[20] 해당 논문에 따르면 불고기는 평안도 지역의 방언으로, 기록 문헌에선 1922년에 최초 등장하고 이후 쓰임새가 넓혀져가 193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폭넓게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 의미상으로는 단순히 불에 구운 고기를 지칭하는 말에서 너비아니를 대체하고 이후 독립된 음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야키니쿠 문화는 해방 이후 1940년대 후반경부터 관동의 명월관과 관서의 식도원 이후에 탄생한 것이므로 일제시기 야키니쿠가 불고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시기상으로 불가능하다. 정작 황교익은 야키니쿠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공부하지 않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국에서의 중화요리 짜장면이 그렇듯 야키니쿠는 정작 일본에서 '한국 요리', 적어도 '한국에서 영향을 받은 한국풍 일본 음식'으로 인식되어 있으며, 실제로 일본의 한식 음식점에서도 주요 메뉴로 자리잡고 있다.

4.1.3. 주영하의 반박

[음식을 공부합니다]의 저자 주영하는 책에서 이같이 쓰고 있다.
제가 주목한 점은 당시 봄만 되면 평양 사람들이 모란대에서 불고기를 굽고 놀았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평양은 ‘평양우(平壤牛)’로 불릴 만큼 소고기가 유명했습니다. 서울을 넘어서는 공업도시였던 평양인지라 자본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것이 소고기 붐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봄만 되면 평양의 모란대 숲에서는 불고기 굽는 냄새와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모양입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산과 들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한 일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결국 1935년 5월 5일자 《동아일보》 석간 5면에는 ‘모란대 명물 불고기 금지’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평양 모란대 송림 속을 놀이터 삼는 주객에게는 매우 섭섭한 일이나 모란대 송림의 명물인 ‘불고기’는 옥외에서 굽지 못하기로 되었다 한다. 모란대는 풍치가 좋은 곳이라 부민의 유람지요 또한 유원지인데 이 ‘불고기’ 굽는 연기로 말미암아 청청한 솔나무가 시들시들 마를 뿐 아니라 고기 굽는 냄새는 유람객 혹은 산보하는 이에게 불쾌를 주어 말썽이 많았던바 대동서(大同署)에서는 부당국과 협의하여 풍치림(風致林)을 보호하는 의미에서 불고기 옥외 영업은 일절 금지하기로 되었다 한다.

오기영 기자의 한탄이 들렸던지 1935년 5월 평양 대동경찰서에서는 옥외 불고기 금지 조처를 내렸습니다. 옛날 신문에서 음식의 역사와 관련된 기사를 조사할 때 유의할 점은 그 기사가 ‘사건의 기록’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신문에 기사로 날 정도의 사건이면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건 뉴스는 새로운 일, 곧 사회 전반의 양상과는 달리 새로 생긴 일이라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모란대 불고기 금지’ 기사는 당시 평양의 주당들에게 큰 충격을 준 뉴스였을 것입니다.
‘모란대 불고기 금지’ 관련 기사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도 실렸습니다. 《매일신보》 1935년 5월 5일자 4면에는 개인이 모란대 숲속에서 불고기를 구워 먹었던 것이 아니라, 을송정과 봉황각, 기림정 같은 음식점에서 그랬다고 하는 정보를 제공해줍니다. 당시만 해도 숯불 화로를 개인이 마련해서 숲속으로 가져가는 일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심지어 1941년 7월 30일자 《매일신보》 석간 3면에는 불고기를 아예 일본어인 ‘야끼니꾸(燒肉)’라고 썼습니다.
몇 년 전, 한국의 불고기가 일본의 ‘야키니쿠’에서 왔다는 주장을 펼친 음식 칼럼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裵說, 1872~1909)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조선총독부에서 사들여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 두 자를 떼고 ‘매일신보’로 신문 이름을 바꾸어 직접 운영한 어용신문입니다. 1930년대부터 논조로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식민지기 일본이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구호)’를 내세워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그러니 일본어에도 능통했던 이 신문사의 조선인 기자들이 ‘평양 명물 불고기’를 ‘야끼니꾸’라고 쓰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평양의 불고기는 ‘야키니쿠’라는 이름으로 일본에도 전해집니다. 평양의 자본가 중에 조선요리옥을 오사카와 도쿄에 개업한 사람도 있었는데, 메뉴 중에 평양의 명물 불고기도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에서 요사이처럼 불고기를 ‘푸루코기’, 군고기를 ‘쿤코기’라고 불렀을 리가 결코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불고기와 군고기를 가리키는 한자 ‘소육’을 ‘야키니쿠’라고 불렀습니다. 2000년대 일본에서 한류 붐이 일어났을 때, 일본인들은 불고기를 ‘푸루코기’라고 부르면서 이미 일본화된 ‘야키니쿠’와 구분했습니다.

4.1.4. 야키니쿠의 현실

이는 일본 야키니쿠집의 실제 사이드 메뉴판을 봐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육회, 생고기/뭉티기, 상추, 구운 마늘, 김치, 백반, 국밥, 비빔밥, 냉면같은 전형적인 한국 요리들이 일본 현지의 야키니쿠 가게에서 버젓이 사이드 메뉴로 판매되고 있다.

파일:후쿠오카 야키니쿠.jpg

그리고 위의 이미지를 얼핏보면 서울 근교의 고깃집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위 사진은 일본의 유명 고급 야키니쿠 고깃집 체인점인 <조조엔(叙々苑)>의 기본 상차림이다. 이 가게는 창립자부터가 재일 한국-조선인인 박태원씨가 만든 가게로, 보면 알겠지만 누가봐도 김치와 한국식 나물들이 세팅으로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일본 야키니쿠 고깃집들의 거의 보편적인 상차림이다.[21]

만약 야키니쿠가 일본으로부터 한국에 전래된 일본풍의 음식문화라면 당연히 한국의 고깃집 대부분이 일본풍에 맞게 돈부리, 소바, 라멘, 니쿠쟈가 등을 사이드 메뉴로 판매하고 있어야 한다. 짜장면이 상당히 한국화 되었음에도 우리는 그걸 파는 식당을 '중국집'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허나 불고기를 비롯한 한국의 고깃집들 중에서는 일본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식당들이 존재하지 않았고, 2010년대 이후에서야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일본풍의 야키니쿠 음식점들이 점차 생겨나고 있다. 오히려 일본 현지의 야키니쿠 집에서 김치, 냉면, 국밥 등을 판매하고 있으니, 불고기와 고기구이 문화가 일본 > 한국이 아니라 한국 > 일본 순으로 전래되었다는 게 유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황교익 본인도 일본의 고기 도축을 조선인들이 하고, 그것을 구워먹으면서 고기 구워먹는 조리법이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방송에서 나온 야키니쿠의 어원

황교익이 불고기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에 분명히 서로 관여하고 분화하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인들조차 '현대 일본 요리로서 야키니쿠'가 한국 음식에서 유래되었거나 적어도 재일 한국인들이 주도해서 개발한 요리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焼肉 문서의 起源 항목 참고. 황교익의 방식으로 주장한다면, 중국 짜장멘의 원조는 한국의 짜장면이고, 일본 스시의 원조는 캘리포니아 롤이다.

한일관은 1939년에 차려졌는데, 여기서 파는 대표적인 한식이 바로 불고기이다.

4.1.5. 맥적, 설하멱, 샤슬릭과의 비교

과거 황교익은 불고기가 전통요리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맥적은 요리를 만든 적족이 고구려와 상관없으니 고구려의 요리가 아니며, 설하멱과 샤슬릭이 불고기보다 공통점이 많다고 주장하며 불고기와 스키야키, 야키니쿠가 공통점이 있으니 갈라져 나온 요리라 주장한다.

그러나 황교익이 인용한 문헌에서의 적족은 '적'이라는 특정한 민족을 지칭한게 아니라 북적이라는 사례처럼 이민족 오랑캐들을 통칭하는 말과 같은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반론1반론2이 있다.[22] 황교익은 한국식 발음의 비슷함과 단순히 물에만 넣고 식힌다만 보고 설하멱을 샤슬릭과 같은 굵은 덩어리의 꼬치구이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고기가 타지 않게 식히는 조리법은 고기의 두께가 대패삼겹살이나 차돌박이, 샤브샤브 수준으로 앏지 않은 한 식히는 방법만 다를 뿐 비슷한 원리를 쓰는 조리법은 많으며 심지어 이런 원리는 굽는 게 아닌 물에 끓이는 요리에도 적용되기에 맞는 반박도 아니다.

설하멱이라는 이름은 현재 알려진 이름 유래를 보면 샤슬릭의 한자 음차에서 온 게 아니라 겨울에 눈에 담아서 식혔다 굽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되어 있다.

마지막 글에서는 스키야키와 야키니쿠를 같은 뿌리라고 주장하는데 정작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야키니쿠는 직화구이, 스키야키는 나베요리로 조리법 자체가 아예 다른 음식이다. 황교익은 조선요리제법에 나온 불고기 양념법에서 한국 요리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마늘이 빠졌다는 이유로 불고기가 스키야키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 요리인 설하멱에도 마늘 양념은 안 들어간다. 게다가 불고기 중 서울식 불고기를 제외한 다른 불고기들은 석쇠 직화구이 조리법에 더 가깝다.

황교익은 마지막 글에서 스키야키, 야키니쿠, 불고기의 유사성과 이들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자료를 더 찾아보고 보충 글을 올리겠다고 썼으나 정작 자신의 주장을 보강하겠다는 보충 글은 2021년 현재까지도 올라오지 않았다.

4.2. 황교익의 반론과 재반론 국민일보 해명

황교익은 소원대로 상기에 링크된대로 경향신문에 전문가인 국어학자들의 반론이 보도되자, 자신에게 이미 검토되고 버린 것이라며 반론했다. 그렇게 한 주장이 불+고기라는 조어가 생겨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며, 한국어에는 접두어+재료라는 파생으로 된 조어는 있어도 조리 수단+재료로 합성된 조어는 없다는 주장을 했다. 이를테면 '군만두'나 '튀김만두'는 있어도 '불만두'는 없다는 식이다.[23]

그러나 이러한 반론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식이라면 물에 삶아먹는 '물만두'[24]나 숯불에 구워 먹는 '숯불갈비'라는 조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불고기에 대해선 국어학자들은 '1945년 광복 이전 평양 지방에서 쓰이던 방언'이라 주장하면서 ' 광복 이전까지 서울과 그 이남의 지역에는 숯불에 고기를 구워먹는 관습이 없었기에 당시 서울말에는 ‘불고기’가 없었을 뿐'이라고 하고 있다. 정리하면 '평양 일대에서 숯불에 구워먹던 고기'를 '불고기'라 불렀으며, 이것이 음식과 함께 표준어로 편입되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즉, 평양/평안도라는 특정 지방에서, 숯불에 구워 먹는다는 특정 방식으로 요리한 고기를 가리킨 것이 불고기라는 것이니, 그렇다면 '숯불'과 '평안도'라는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 군고구마, 군만두 같은 음식에 '불'이 붙지 않는 것도 설명된다.

또한 국어학자들의 반론에는 알타이어족에 대한 부분도 들어가 있다. 황교익의 말대로라면 이것도 '이미 검토되고 버린 것'에 들어갈 텐데, 이미 학계의 주류 학설이 뒤집혔는데 황교익은 얼마나 천재적이기에 그걸 다시 뒤집을 수 있는지, 여기에 대한 설명은 전혀 하지 않는다.

결국 황교익의 주장을 따르자면 물만두와 숯불갈비는 일본에서 유래된 음식인 셈인데, 만주족을 일본인으로 만들고 숯불갈비도 일본 음식으로 만드는 궤변을 순간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늘어놓는 것과 다름이 없다.

황교익의 주장은 잘못된 전제로부터 출발한 건전성이 부족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원 주장은 '불고기는 불+고기인 합성어다. 이는 우랄알타이어족 사용 민중에게서 나올 수 없는 조어이다. 따라서 불고기는 우랄알타이어족인 한국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번안어이다'라는 주장이다.

이는 '우랄알타이어족의 조어형식'이라는 대전제를 둔 연역론에 가깝다.[25] 그런데 우랄알타이어족이란 대전제가 잘못 되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부당한 전제로부터 출발한 거짓인 명제인 것이다.
‘불+고기’가 언중의 자연스런 조어 방식이면 (그게 재료이든 조리법이든 뭐든지 간에) ‘불’을 붙이는 방식의, 그와 유사한 음식명도 존재해야 한다. 그들의 주장이 합리적이라면 불로 조리하는 무수한 음식의 이름에 ‘불’이 붙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불고기 외에 조리법이나 도구로서의 ‘불’을 붙인 음식명을 우리말에서 발견할 수 없다.
군고구마 대신에 불고구마, 군만두 대신에 불만두, 군옥수수 대신에 불옥수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갈비구이도 불갈비, 삼겹살도 불삼겹살, 고갈비도 불고등어, 가래떡구이도 불떡이라 불리는 경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불+고기’는 언중의 자연스런 언어 생활에서 얻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고기 등장 이전 혹은 그 즈음에 불고기 외 ‘불+ㅇㅇ’의 음식명을 발견하였으면 내게 가져와보라. 어원 연구는 아무말 대잔치가 아니다. 1920년대에 문득 등장하는 불고기라는 신조어는 언어학자 정도의 창의적 번안 작업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불+고기가 부자연스럽다는 황교익의 근거는 '우랄알타이어족'이었다. 그런데 비판을 당하니 '우랄알타이어족'은 사라지고 '그 조어방식이 자연스럽다면 '불'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다른 요리가 있어야 한다. 없으므로 번안어다.'라고 주장의 근거를 바꾼다. 그러면서 그는 군고구마, 군옥수수는 있지만 왜 불고구마 불옥수수는 없다고 하는데, 이는 허수아비 치기에 가깝다. 애초에 번역어라고 주장한 사람은 황교익이므로 그에게 입증책임이 있는데, 자연스러운 조어방식이라고 꼭 다수의 단어가 존재할 필요도 없으며, 애초에 자연스러움 여부는 번역어 여부를 추리할 수 있는 단서일 뿐이고 논리적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주장에 내가 요구하는 반례를 들지 못하면 내 주장이 옳은 것이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못한데다가, 그가 없다던 불갈비는 실제 쓰이는 단어라는 점에서 벌써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장 말미에서 은근슬쩍 '불고기 등장 이전 혹은 그 즈음'으로 반례의 허용범위를 좁히는 것을 알 수 있다.[26] 존재했는지도 모를 '언어학자'의 '창의적 번안'을 주장하는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참 많다.

하필 고갈비를 예로 들었는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갈비는 고갈비 골목 등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신조어이고 숯불갈비에 착안해서 지은 이름이므로 적절한 예도 아니다. 그런데 황교익의 논리대로라면 생선 이름 첫글자에 갈비를 합성해 요리 이름을 만드는 것은 고갈비가 거의 유일하므로 이 또한 자연스럽지 못한 조어방식이라 언어학자가 창조적으로 고안한 번안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꽁갈비, 삼갈비, 가갈비 같은 것은 없지 않냐면서 말이다.

그의 논리대로 짚어보자면, 반대로 군고기라는 말은 오늘날 거의 쓰이지 않는다.[27][28] 생선구이라고 하지 군생선이라고 하지 않고 군옥수수를 옥수수구이, 군고구마를 고구마구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표현도 대상과 상황에 따라 전혀 사용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언어는 인공언어가 아닌 이상에야 완벽한 연역적 구조로 작동하지 않으며, 따라서 단순히 불이라는 접두사가 나오지 않으니 불고기가 번안어라는 주장은 이러한 언어의 특성을 무시하는 논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불갈비, 물만두 등의 반례가 있다는 점에서 주장 자체도 틀렸다.[29] 주장이 참이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근거가 필요하며, 특히 그는 번안어라는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언어학자가 창의적으로 만든 조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논리뿐만이 아니라 학문에서 극도로 기피되는 논리적 비약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일본음식 중 '야키(焼き)'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수많은 음식들이 '불'로 번역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야키우동(볶음우동), 야키토리(닭꼬치), 야키교자(군만두), 타코야키(문어빵) 등 '야키'가 들어가는 일본음식 중에 '불'로 번역된 단어는 단 하나도 없다.[30] 이 음식들은 모두 해방 전부터 존재하던 일본 음식인데, 왜 불우동, 새불, 불만두, 도미불로 번역이 안되었을까? 비슷한 궤변으로 닭도리탕 일본어 기원설이 있다.

그래서 국어학자들도 불고기의 어원에 대해서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하여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추측의 영역으로 남겨 두는 것이다. 하지만 황교익은 제대로 된 근거도 제시 못하면서 단언하여 태도에 큰 차이를 보인다. '개인적인 추측'이나 '가설'이라는 표현만 썼어도 이같은 비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 자신의 블로그에 동일한 주장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논리적 흠결이나 빈약한 근거를 보완하는 대신 반론을 반박하는 식으로 자기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틀린 주장을 해놓고 반론이 나오면 동등한 지위에서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반론을 '심사' '평가' 하며 꼬투리를 잡아 니가 틀렸으니 나는 옳다고 하는, 팟캐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장방식이다.

김무림 교수의 물+회 주장에 대해 물은 여기서 재료로 쓰인 것이라서 조리방식으로 쓰인 불+고기와 다르다며 냄비우동의 냄비는 먹지 말라거나 손칼국수의 손은 재료라고 우기지 말라며 대놓고 비꼬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그렇다고 자신의 불+고기가 번안어라는 주장이 강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또 불옥수수, 불삼겹살은 왜 없냐 드립을 치면서 동일하고 무의미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불삼겹살이 없다는 사실은 불고기가 번안어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 후 소육에 대해 불고기가 소육의 번안어인지 자신도 고민했다며 또 한 번 '내가 검토하고 버린 주장' 특기를 들고 나온다. 그런데 소육의 존재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황씨가 착각한 원조 야키니쿠가 소육의 일제강점기 발음이라는 주장에 가까울 뿐 불고기가 소육의 번안어라고 말한 적은 없다. 번안어라는 주장은 황씨처럼 쉽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번안어라는 판단을 내린 근거로 또 이효석과 김윤경을 가져오는데, 이쯤되면 확증편향에 의한 순환논증에 가깝다. 다른 사료는 배제하고 이효석과 김윤경만을 근거로 불고기=번안어라고 확증편향에 의한 결론을 내린 뒤, 증거가 뭐냐고 하면 이효석과 김윤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고기 논란은 '사료의 부족'이라는 근본적인 한계점이 있기 때문에 황씨로써는 계속 본질을 피하면서 이런 식의 주장이 가능한 것이다. 그가 틀린 것이 분명했던 석쇠나 오버런 등의 사례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보면 끝장토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황씨가 이런 주장을 굽힐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논란이 지속되고 있을 때 황씨는 허수아비치기와 함께 그의 주요 논법 중 하나인 '일부만 골라서 반론하기'로 현진건 소설의 '불고깃덩이'에 대한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그런데 읽어보면 알겠지만 현진건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불고깃덩이'라는 단어가 나타난 과정을 자신의 주장에 끼워맞춘 후 그걸 또 자신이 옳다는 근거로 쓰고 있어서 그런지 2018년 11월에 올라온 글이 2019년이 되도록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놀랄 만큼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압권은 글의 태그인데, '창의적 번안이란 이런 것이다'란다. 자신이 과거 현진건에게 빙의한 듯 혼자서 그의 사고를 상상하여 불고깃덩이를 번안어로 만들어놓고 이것이 창의적 번안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현진건이 아니라 자신의 발상이 창의적 번안이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우랄알타이 드립 시절부터 '일반 대중이 아닌 언어학자의' 창의적 번안을 주장했는데, 현진건은 (황씨의 상상에 불과하지만) 언어학자가 아니라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소설가에 불과하고, 황씨 자신 역시 언어학자가 아니다. 물론 진짜 언어학 박사에게 황씨가 어원연구를 가르치려드는 것을 보면 그에게 언어학자라는 권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또다시 자신의 기존 주장과 모순되는 행태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글이 놀랄 만큼 아무 반응을 얻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승복해서가 아니라 이쯤되면 너무 황당해서 반박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황교익은 설하멱을 폄하하면서 조선은 1800년대까지 철사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기에 대나무 꼬치로 구웠다는 식으로 폄하했는데 정작 한국에서 발굴되는 고려시대와 조선 초 사슬 갑옷들만 봐도 황교익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드러난다. 황교익은 현대식 석쇠의 형태에 대한 기록이 1800년대에 나타난 걸 보고 1800년대 철사가 들어온 게 아닌가 착각했을까 싶을 정도. 국어사전과 조선왕조실록 등을 근거로 황교익의 주장을 반론하는 글. 또한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은 뭘로 만들고 놓고 다녔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황교익은 연강철로 만든 철사는 산업혁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반박을 했으나 이는 논지에 어긋나는 반박일 뿐만 아니라[31] 사실관계에도 어긋난다. 철사는 그 형상을 가지고 정의하지 연강철 여부와 제작방식은 들어있지 않으며 현대에는 연강철(mild steel)을 탄소함량이 0.15~0.25%인 탄소강으로 정의하지만 이 구분법 자체가 1880년대에 만들어진 방식이고 그 이전에는 0.02~0.25%는 모두 연철(wrought iron)로 불렀다. 조선시대에도 연철을 당연히 만들어 썼을 뿐더러 주철은 두들겨서 뭘 만들기 위한 쇠가 아니다. 메진 성질이 강해 두들기면 그냥 깨지기 때문. 鑄鐵은 말 그대로 주물성형을 위한 고탄소강이다.

그리고 10월 23일날 국민일보에서 해명을 하였는데[32] 현재 나온 지적들을 궤변으로 논점을 피하고 그냥 변명을 하는 수준이다.
황교익 “불고기, 우리 고유의 음식 아냐”(현재 삭제된 상태)

2018년 11월 블로그를 다시 하면서 또 논란을 지폈다.

김지형 경희사이버대 교수가 국립국어원 위에 있는 사람인가

4.3. 결론과 근황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서 "단지 이름이 야키니쿠에서 왔다고 한 것뿐"이니 하면서 논점을 흐리기도 하지만, 황교익의 기본적인 관점은 불고기가 일본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황교익은 불고기가 야키니쿠가 도입되어 성립한 음식이며("그 관여와 분화의 시발 음식이 무엇이냐...논란을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한테 별로 이득이 안 된다...우리에게 불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고기는 엄연한 의미에서 한국 요리라기보다는 일본 요리의 아류("불고기가 우리 거 아니면 어때?")라 주장하고 있지, 특정 방식에 대해서만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다든가, 불고기가 일본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던 한국 고유의 음식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 요 영상을 보면 본인은 한번도 불고기가 일본음식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으며 1:00대를 보면 소고기를 구워먹는 요리법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라고 얘기한다.
차라리 그렇게나 일본과의 연관성을 믿고 싶었다면 "불고기가 일제 시기를 거치며 일본 국물 요리의 영향을 받아 육수 불고기가 되었다" 정도로만 얘기해도 누가 그렇게 아득바득 절대 그럴 리 없다며 부정을 하겠는가. 그런데 황교익은 꼭 한 발 더 나아가서 "불고기는 우리 게 아니고 일본 음식이다. 이걸 인정 못 하면 국뽕이다."는 식으로 쓸데없는 선민의식을 부리며 민중을 깎아내려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황교익은 궁지에 몰리면 대응 전략이랍시고 '국뽕' 타령을 한다. 10월 1일의 페이스북 글에서는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쇠고기구이가 한민족이 발명한 불고기라고 주장해도 됩니다. 아시겠지요, 국뽕 여러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황교익의 이러한 대응은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에 해당하는 논리적 오류다. 황교익의 불고기/야키니쿠 설을 반박하는 이들은 "불고기가 세계 모든 쇠고기 구이의 기원"이라고 주장한 바가 전혀 없다. 사람들은 단지 1. 불고기란 단어가 언어학적으로 자연스러운 한국어가 아니므로 야키니쿠의 번역어라고 봐야 하며, 2. 따라서 불고기가 야키니쿠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음식이라는 황교익의 주장이 무리수임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같이 언어학자, 국문학자 등 진짜 전문가들의 지적이 계속되자#1 반박문을 올렸다.#2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황교익의 입장에서 위와 같은 국문학 교수들의 주장은 이미 검토하였고 버린 이론이라는 것. 하지만 포스팅을 자세히 보면 국문학자들의 의견을 기존의 고찰을 반복하는 것이라 비난하면서도, 자신 역시 자신의 의견을 반복했을 뿐이다. 즉, 제대로 된 연구나 고찰은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이 맞다고 우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33] 1931년 동아일보에서 연재된 대도전(大盜傳)#에서 불고기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것과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댓글에 '바비큐의 번안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럴려면 일상의 언어로 바비큐가 문헌에 자주 보여야 하는데.. 야키니쿠만 하지는 않습니다.'라는 것으로 근거 없는 의견만 달아 놓은 것은 덤.

이렇게 각론에서 밀리면 본인의 오류, 지식 부족을 인정하기보다는 선동으로 만회하려는 태도는 황교익이 비단 불고기 논쟁만이 아닌 거의 모든 논쟁의 국면에서 보여주는 모습이다. 단 한번이라도 자신의 실수를 흔쾌히 인정했다면 이렇게까지 논란이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파일:황교익불고기발언.jpg
(TVN 수요미식회, 팟캐스트 밥 한번 먹자 11화)
황교익 본인의 지식수준이 낮음으로 인한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다른 방송에서 다시 검증되지 않은 잘못된 지식을 추가로 전파하고 있다.

2018년 11월 초 한동안 쓰지 않았던 블로그를 다시 글을 게시하였는데 불고기에 대한 썰과 당시 황교익의 주장을 부정한 기사에 응답해준 국어학자들에 대한 글이 과격하다.

김무림 강릉원주대 교수에게 사전적 개념이 없어서 자격이 없으니 빠져라 라고 꼰질을 부리는데 정작 김무림 교수는 사전을 만든 사람이다. 황교익(이)가 김무림(을)를 사전으로 공격했다이쯤이면 공수반의 집 앞에서 도끼질 한 꼴이다. 공자에게 논어 가르치는 황교익

이기문 서울대 명예교수, 김양진 경희대 교수, 김지형 경희사이버대 교수에게

2019년 3월 28일에 헤럴드경제와 뷰어스 기사가 허위라고 주장하는 블로그 글을 올렸다. 자신은 불고기가 일본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34], 국어학자들은 불고기 어원 논쟁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망언하는 황교익과 변명하는 황교익은 다른 사람인가보다

일본에 거주중인 재외 국민 어느 회원이 황교익의 주장을 거의 대학 논문급으로 반박했다.

4.4. 여담: 원조 불고기

예전에 불고기에 대해 문헌적 고찰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옛날 우리 민족의 고기 굽는 방식은 "꼬챙이에 궤어 숯불에 굽는다"가 일반적임도 확인을 하였었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꼬치구이인 "설하멱"이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사슬릭"의 음차일 것이라는 힌트도 있었다.
또 우리가 현재 불고기라고 부르고 있는 "동판에 굽는 물기 있는 고기 구이"가 일본 스키야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다고 하였다.

몇 년 전부터 중국의 조선족들이 가져온 꼬치구이가 유행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음식에다 "원조 불고기"라는 이름을 달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싶다.

원조 불고기

황교익도 처음에는 단순히 현재의 불고기가 일본의 스키야키에 영향을 받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설하멱이 사슬릭의 음차라고 생각하며 이를 원조 불고기라고 이름 붙여줘야 하지 않겠냐는 하는 말로 보아 사실 처음부터 불고기가 야키니쿠의 번안어라는 생각을 한건 아닌걸로 보인다. 또한 조선 통신사가 일본의 고기 문화에 영향을 주고 일제강점기에 다시 한국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정도의 얘기는 덤. 물론, 이 시절에도 민족우월주의를 운운하던 것에서 그 징조가 보이지만 말이다.

4.5. 여담: 원로 국어학자 이기문에 "아무말 대잔치"

학술원 회원이자 국어발전에 기여하여 학술원상까지 받고 한국어와 우랄알타이어를 제대로 비교할 수 있도록 연구의 방향을 만드신 언어학자 이기문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황교익은 제대로 된 근거 없이 "아무말 대잔치"라고 비난하고 있다. 참고로 이기문 교수는 국내 국어학계의 거두이자 비교 대상이 거의 없는 수준의 권위를 가진, 그야말로 한 분야에서 대성한 원로 학자이신 분이다. 아래는 경력 비교.

파일:이기문교수경력.jpg
황교익 : 불고기가 평안도 사투리라는 주장.. 이기문 교수가 자기가 어디서 그렇게 들었다고 '자가발전의 증언'만 할 뿐 문헌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말 대잔치이다. 이효석 선생이 평양에 머문 적이 있다. 평안도 중심 지역이 평양이다. 그때에 선생이 썼던 글이있다. 여기에서 야키니쿠가 일상의 언어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어원 연구는 근거를 가지고 해야한다.[35]

황교익 : 이효석 선생이 1939년 <여성>이라는 잡지에 쓴 글이다. 평양 음식에 관한 글인데, 당시 평양에는 '야키니쿠'가 인기 음식이었던 듯하다. 이효석 선생도 김윤경 선생처럼) 야키니쿠라는 말이 듣기 싫었던 모양이다. 고쳤으면 좋겠다는 토를 달았다. 야키니쿠를 대신하는 불고기라는 말이 만들어진 시기가 1939년보다는 앞서는 것으로 파악이 되는데, 평양시민과 이효석 선생은 불고기라는 신조어를 아직 몰랐던 것이다.

황교익이 불지른 ‘불고기’ 어원 논쟁···학자들 “‘야키니쿠’설은 엉터리”

게다가 이기문 교수는 1930년생 평안북도 출신으로 이미 2006년에 불고기의 어원에 대한 글을 기고한 적이 있고 이에 대한 확고한 관심과 연구를 한 바가 있다. 그런데 황교익이 이 안건에 대해 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다. 심지어 일평생 언어학 연구를 한 언어학자에게 일개 맛칼럼니스트가 어원 연구를 가르치려 들고 있다.
짐승의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일은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 온 일이다. 그러나 양념을 한 고기(주로 쇠고기)를 숯불에 직접 구워 가면서 먹은 일은 예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서울과 그 이남의 지역에서는 이런 관습이 없었기에 서울말에 ‘불고기’란 말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바로 위에서 말한 음식과 그 이름 ‘불고기’는 1945년의 광복 이후에 평양(넓게는 평안도)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온 것이다. ‘불고기’는 광복 이전에는 평안도 방언에서만 쓰인 단어였다.
나는 이 사실을 내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다. 내가 고향(평안북도)을 떠나 서울에 온 것이 1947년 봄이었는데 그때에는 서울 장안에 ‘불고기’ 음식점이 없었다. 남대문 시장 같은 데서 평안도 피난민들이 하는 허술한 음식점에서나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한두 해 사이에 이것이 온 장안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뒤 ‘불고기’는 서울 피난민을 따라 부산, 대구로 내려갔고 서울이 수복된 50년대에는 이미 온 나라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제는 국제적으로 내놓을 만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위에 말한 일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나 사사로운 경험만으로는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사실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하여 왔다. 옛 문헌을 대할 때마다 이 말이 있는가를 살펴보았고 사전들을 들추어 보기도 하였다. 그중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두 증언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광복 이전에 서울에 ‘불고기’란 이름의 음식이 없었던 사실에 대한 증언이다. 이숭녕 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1933년에 평양으로 가서 교편을 잡게 되었는데 취임 축하 모임에서 ‘불고기’를 처음 보셨다는 말씀을 몇 번인가 들은 일이 있다. 커다란 양푼에 그득 담은 쇠고기를 보고 놀랐고 상 위에서 지글지글 타는 고기 냄새와 연기에 놀랐다고 하셨다. 서울 태생인 선생님은 어려서 쇠고기를 많이 먹어 보지 않은 탓으로 그 뒤로도 ‘불고기’를 많이 먹을 수는 없었다고 하셨다.
둘째, 광복 이후에 서울에서 ‘불고기’가 널리 퍼진 사실에 대한 증언이다. 김기림 시인이 1947년에 잡지 「학풍」(2권 5호)에 발표한 ‘새말의 이모저모’란 글은 광복 이후에 일부 학자들이 만든 ‘새말’에 대하여 비판한 것으로 그때 내가 매우 흥미 깊게 읽은 글인데 그중에 ‘불고기’의 놀라운 전파력에 대하여 쓴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화석이 숨을 쉴 수가 없으며 종이꽃에서 향기가 날 리 없듯, 옛날 말 학자의 먼지 낀 창고에서 파낸 죽은 말이나 순수주의자의 소꿉질 대장간에서 만든 새말이 갈 곳은 대체로 뻔하다. 이윽고는 대중의 냉소와 조롱 속에 잊어버려지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물론 간혹 그중에는 대중의 필요와 입맛에 맞는 것이 있어서 국어 속에 채용될 적도 있으나 그것은 실로 어쩌다 있는 일이다. ‘초밥’(‘스시’)과 같이 비교적 잘 되어 보이는 순수주의자의 새말조차가 얼른 남을 성싶지도 않다. 거기에 대하여 ‘불고기’라는 말이 한번 평양에서 올라오자 얼마나 삽시간에 널리 퍼지고 말았는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이 증언을 찾았을 때 나는 마음이 여간 뿌듯하지 않았다. (이 글은 「김기림 전집」(1988) 제4권에 수록되어 있음을 덧붙여 둔다.)

– 이기문, ‘불고기’ 이야기

그리고 이미 1930년대 기사와 노래가사에 '불고기'라는 말이 나오므로 1939년에 평양에서 불고기라는 말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옛날 뉴스에 나오는 '불고기' 표현들

2018년 10월 19일 김어준 뉴스공장에 출연해서 또 불고기 야키니쿠 설을 주장했다.군고구마, 불떡, 불오징어 등을 언급하며 무의미한 소리를 늘어놓고 최근에 왜 욕을 먹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면서 친일도 언급한다.[36]
물론 권위에 의한 지식은 오류 가능성이 명백하나, 국어학자로서의 권위가 현대사회에서 가장 엄격하고 신뢰도 높은 지식 획득 방법인 학문적 방법으로써 논문을 통해 구축된 것을 고려한다면 황교익이 권위 있는 학자를 비판하고자 할 때는 논문을 작성해 비판한다던가 하다 못해 논문을 비판하여야 할 것인데 그러지 않고 오로지 방송에서 자극적인 "썰"만을 풀고 있다. 폐쇄된 적폐 학계가 내 논문을 받아주기라도 하겠냐는 변명도 없는 것으로보아 황교익의 행동이 진리 추구가 아닌 아전인수 격의 자기가 옳다는 아집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4.6. 여담: 불고기가 우리 게 아니면 어때? 동영상

19:08부터
탁현민(이하 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불고기도 그렇다면서요.
곽현화(이하 곽): 히에엑! 불고기 우리나라 거잖아!
탁: 저기... 너무 그러지마. 나도 한국 사람이야.
황교익(이하 황): (설명) 숯불에 굽는 직화구이~ 고구려 설하멱~ 조선시대 너비아니~ 직화구이 형태는 우리나라만 아니고 다른 나라도 있었으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죠. 우리가 먹는 불고기 중에 물이 자작하게 있는 불고기.
탁: 네네 그 보통 황동판 위에.
황: 달콤한 간장 맛. 일단 달콤한 간장이라는 게 우선 일본의 간장이죠. 일본사람들은 나베라고 해서 달작지근 간장에 소고기를 달작지근 나베를 해먹어요. 그 음식이 스키야키로 발전을 하고 그게 우리의 지금 먹는 자작한 불고기에... 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곽: 하아아.. 충격인데요.
탁: 글쎄 그게 왜 충격일까. 우리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사례는 이것 외에도 많아요. 닭꼬치 같은 거~사실 야키토리에서 유래한 것이고 라면 오뎅, 단무지, 돈까스, 카레, 짬뽕이 다 일본에서 들어와서 한국화 과정을 겪은 거.
곽: 근데 선생님 그런 음식들도 다 일본이 외국에서 받아들인 음식이잖아요.
황: 그렇죠. (설명 어쩌구저쩌구) 화혼양재라고 외국에서 들여온 건데 우리식으로 해석해서 혼을 입혔다. 재창조의 과정을 거친 자랑스런 일본의 음식으로 설명을 하죠. "외래의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일상음식으로 받아들이면 그건 우리 음식이다." 하는 일본의 관습이 있어요.
탁: 근데 일본은 그러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한 게 오늘 황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나라 음식들로 알고 있던 것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 가지고 언짢아하시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황: 그~렇죠. 이 불고기가 스키야키의.. 그..그거일 수 있다. 그리고 불고기라는 말 자체가 일본의 야키니쿠의 번안언어니까...김밥이 일본에서 온 것이다, "후토마키 변형이다." 라고 이런 얘기하는 순간 친일 얘기가 나와.
곽: 선생님 그 얘기 한 적 있으시죠.
탁: 있죠. 그래서 "황은 친일이다." 얘기 있었어요. 검색하면 다 나와 ㅋㅋ 근데 요즘 황교익 친일 + 좌파까지 나와ㅋㅋ 친일좌파 새로운 영역이야 ㅋㅋ
황: 껄껄껄껄 일본에 가면 한국음식의 영향을 받은 일본 음식도 많아요. 서로 영향을 미치는 걸 솔직하게 인정을 해야지.
탁: 그니까.. 나는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어.
곽: 그냥 맛있게 잘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탁: 너, 여태까지 깜짝깜짝 놀라놓고 ㅋㅋㅋ
곽: 하하하
황: 불고기가 우리 거 아니면 어때?
탁: 뭐 어때?
황: 우리가 맛있게 먹으면 되지.
곽: 그...그러니까요.

야키니쿠였다가 스키야키였다가 하는 등 주장의 일관성조차도 없다[37]. 애당초 일본에서 간장은 기록될 전국시대나 에도시대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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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발언에 관한 불고기의 형태변화 이야기

4.7. 결말: "나는 '왔다'가 아니라 '왔을 수도 있다'고 했다"

자신의 주장이 너무나도 많이 반박되었음에도 자신이 틀렸다는 건 인정하기 싫은 모양인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주장을 언론이 친일 프레임으로 왜곡했기 때문에 조롱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간 황교익이 남긴 글이나 말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런 주장을 한다는 건 그가 대중을 멸시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5. 어묵, 회 논란?



다음의 인용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인용문에서 황교익은 어묵이나 회 문화가 일본의 고유한 문화라고 성급히 일반화한다'는 해석이 있고, '인용문만으로는 황교익이 어묵이나 회가 일본 문화라고 여기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해석이 있다. 해석의 차이에 따라서 해당 인용문을 '황교익의 전통 부정, 일본 유래설 예찬'의 적합한 근거로 인정하는 의견도, 인정하지 않는 의견도 발생하였다. 이에 해당 주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을 모두 명시한다.
"한국인은 묘한 민족 감정을 드러낼 때가 많다.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일본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작업을 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음식 이름이었다. 오뎅을 어묵, 우동을 가락국수, 사시미를 생선회, 다꾸앙을 단무지로 바꾸는 식이었다. 어떤 것은 한국어로 정착했고, 또 어떤 것은 일본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대체 가능한 좋은 한국어가 있다면 이는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한국어로 바꿔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옳지 않다."
(주간동아)소금에 절인 매실 끊기 힘든 치명적 중독, 황교익

1)해당 인용문이 '논란의 요소가 있다'고 보는 입장

여기서 황교익의 전문가라고 할 수 없는 얕은 지식을 다시금 엿볼 수 있다. 첫번째로 "어묵을 오뎅이 아니라 가마보코라고 표현해야 황교익의 주장이 맞는 거다."라는 말이 있다. 오뎅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오뎅은 가마보코(어묵)가 들어간 냄비요리의 총칭이고 또 어떤 오뎅에 따라서는 가마보코가 들어가지 않는다.[38] 하지만 오뎅을 순화할 때 방송 등지에서는 어묵을 쓴다. 관용으로 굳어져서 지적하기 어려운 부분.

두번째로 (膾)에 대한 편견이다. 아마도 황교익은 회와 관련된 모든 것을 일본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였는지는 몰라도, 중국이나 한국 모두 회와 관련된 언급이 사료에 남아 있을 정도로 자주, 오래 먹어왔다. 즉, 회는 일본만의 요리가 아니며 동아시아 국가들이 오랫동안 먹어온 요리다. 회자(膾炙)되다'라는 말이 여러나라에서 쓰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여러 문인들이 회에 대한 감상을 읊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실학자 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도 여러 가지 물고기를 회로 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홍만선은 생선회를 먹은 후 소화가 안 될 때 생강즙이 좋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는 기록을 보아서 생선회를 사시미(회)로 바꾼다는건 꽤 큰 무리가 있다. 게다가 육회 육사시미까지 생각하면 꽤나 복잡해진다.[39] 차라리 간장에 고추냉이에 찍어먹는 생선회를 사시미로 분류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을지는 모르나[40] 라는 개념을 편협한 사고로만 알아둔 채 민족감정의 고집을 들먹이며 올바른 것으로 바꾸라고 훈계한 꼴이다. 그리고 전문가라는 사람이 음식 문화와 그 유래에 대해서 여지껏 제대로 맞춘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 본인 스스로의 밑천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일본도 포크 커틀릿을 돈가스, 커피를 코히라고 발음하는 것처럼 민족감정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억지다.

2) 해당 인용문이 '논란의 요소가 없다'고 보는 입장

위의 '인용문은 논란의 요소가 있다'라는 주장은 회는 동아시아 전반적으로 공유하는 문화이다, 황교익은 그것을 감안하지 않고, 민족감정의 고집을 들먹이며 (회라는 말을) 올바른 것으로 바꾸라고 훈계한다를 주요 비판점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용문에 대한 곡해이다. 인용문의 핵심 논지는 마땅한 한국식 명칭이 없음에도 일본식 명칭을 억지로 순화하려는 행위는 민족감정적 고집이며 지양해야 할 바이다이지, '일본의 식문화와 한국의 식문화의 뿌리가 같으므로 두 문화적 명칭을 동일시하여 순화하는 행위를 권장한다'가 아니다. 인용문 전문을 보아도 황교익이 '한국의 전통 회문화는 없고, 회문화는 일본으로부터 전래된 것일 뿐이다'라는 내용은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후술할 '멸치육수 논란' 주제가 <한국은 전통적으로 멸치육수를 낸 적이 없다. 현재의 멸치육수는 철저한 일본식 요리법에 근거한 것이다>라고 명시된 텍스트를 비판하는 것과 비교된다.

혹자는 '오뎅, 우동처럼 일본 음식임이 명확한 사례와 회를 동일한 반열에 놓고 비교하는 데에서부터 황교익은 회 또한 일본 음식이라고 생각함을 알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친 비약이다. '오뎅, 우동, 사시미'는 2000년대 한국 방송계에서 '어묵, 가락국수, 회'로 순화하기를 강요당한 대표적 대상들이다. 한 예로, 1박 2일 시즌1 방영 당시 '사시미와 회'와 관련된 표현 문제로 1박 2일 제작진이 곤혹을 겪은 적이 있다. 방영분 중 MC몽의 스태프가 "이모! 육사시미"라는 말을 하였는데, 제작진은 이를 '육회'로 순화하지 않고 '육사시미' 표현 그대로를 자막으로 표기하였다. 육사시미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육사시미'와 '육회'는 조리법이 미묘하게 달라 같은 음식으로 취급하기 어렵다. 번역의 당위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방송 자막으로 '육사시미'를 언급하였을 뿐인데, 이에 대해 다수 시청자가 '어떻게 사시미라는 일본 표현을 여과 없이 방영할 수 있냐' '육회라는 대체 가능한 표현이 있지 않느냐'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결국 제작진은 '사시미' 자막표기에 대하여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만 했다. 이는 일본식 어휘를 대체할 마땅한 한국어가 없음에도, 당시 방송계와 대중은 일본식 어휘를 무조건적으로 순화하기를 바랐음을 확인 가능한 부분이며, 황교익이 인용문을 통해 '모든 일본식 어휘를 한국식으로 순화하려는 민족적 고집'의 예시로 사시미와 회의 관계를 언급한 것의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황교익은 음식에 대한 배경지식이 얕거나 선입견이 있어 '오뎅, 우동, 사시미'라는 대상을 동시에 언급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그것들이 과거에 순화 논란을 특히 자주 일으켰던 요소이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6. 멸치육수 논란

멸치육수가 그동안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가 일제강점기 때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전에는 우리의 전통적인 멸치 육수 우리는 법은 황태처럼 말려서 쓰는 것이었고 지금은 일본식을 따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멸치 육수에는 대체로 말린 멸치를 쓴다. 냉장고도 없던 당시에 삶은 멸치를 어촌이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멸치는 보관상의 문제로 빨리 썩어서 이를 말리고 유통하는 방법이 개발되기까지는 멸치 육수 자체가 주류가 되기 어려웠고, 대략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 기술이 전래되어서 멸치 육수가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가다랑어(가쓰오) 육수가 확고한 주류로 자리잡고 있지 멸치 육수가 대세가 아니다.

주의할 부분은,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멸치국물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육수를 의미하는 것인지 국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아 양측 다 쉽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말하기 어려우며, 다른 기록들에서 보더라도 조선시대에는 멸치를 먹는 방법은 말려서 먹는다거나 젓갈을 해먹는다거나 이외에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어서 멸치라는 생선을 이용한 다른 조리법이 존재했는지 단언할 수 없다. 즉, 공식적인 기록에는 없으나 존재하는 사건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조선 시대에 멸치육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려면 자산어보에서 사용하는 "갱"이라는 단어가 명시적으로 국만을 가리키는 것임을 입증해내야 하고, 더 나아가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멸치국물을 요리에 쓰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심지어 황교익은 (멸치) 어업도 일제강점기에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멸치를 잡아 가공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반의 일로, 한국사에서는 대략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 시대에 해당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조선 순조 대에 저술된 김려의 우해이어보에는 멸치는 식용으로 쓸 수 없다는 내용이 있으나[41],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의하면 멸치를 가지고 국(갱), 젓갈, 포로 만든다는 기록이 있다. 자산어보가 저술된 시기는 정약전이 1801년 유배를 당하여 1814년까지이고, 어디까지나 당시 널리 퍼진 사실을 "기록"하는 책이니만큼, 이미 그 전부터 멸치를 가지고 국을 만들거나, 젓갈을 담그거나, 말려서 포로 만드는 방식이 존재했던 것이다. 즉, 아무리 늦어도 순조 시절인 19세기 초에는 이미 멸치는 말린다는 가공법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또한 뒤이은 헌종 대에 저술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멸치는 날것은 먹을 수 없으나, 살아 있는 채로 탕제하고 말리면 반찬이 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는 정확히 현대의 멸치 가공법과 일치한다. 다만 이렇게 멸치잡이와 가공이 가능해진 이유 중 하나로 일본 어민들의 영향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이는 멸치 어업이 아예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는 황교익의 주장과는 명백히 다른 학설이며, 고구마가 조선 후기에 일본을 통해 전해졌고 현대에도 타코야키오코노미야키 등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파된 요리인 것처럼 문화권 간 교류의 한 사례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도 상당한 규모의 멸치 어업이 있기는 했지만, 멸치라는 어종이 구체적으로 확립되고(이전에는 작은 물고기는 다 멸치라 부름) 대형 멸치 선단이 등장해서 삶아 말리는 형태의 니보시를 대량 가공하게 된 것은 일본 어민들의 이주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했다.[42] 일본은 이렇게 만든 마른 멸치를 대부분 비료로 사용했다. 해방 이후 일본과의 교역이 중단되어 일본으로 수출하던 어마어마한 양의 멸치가 내수용으로 전환되고, 해방 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혼란기가 거듭되면서 멸치가 육수, 볶음 등의 식재료로 '재발견'된 것.

이렇듯 황교익은 일본의 영향만을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인들에 의한 변용이나 재발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황교익의 '한국-일본의 음식사'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영향을 끼쳤고 한국을 이를 수용하기만 했다는 제국주의적 담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뚜렷하다.

7. 장어 논란

한국인은 장어를 거의 먹어오지 않았고 기껏해야 약으로 달여먹는 것이 전부였는데 후에 일본의 문화가 들어와 먹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시대엔 장어를 먹는 조리법이 없었다고 주장한다기사.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의 연속으로 위 링크를 들어가면 알 수 있지만 이미 조선 초기 1460년도에 발행된 식료찬요에서 장어탕, 장어죽 그리고 장어된장구이라는 요리법과 효능까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황교익의 주장과는 다르게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의 장어요리가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기록된 사실이다.

그 외에도 야사이긴 하나 선조때 차식이라는 사람의 일화에서 장어가 나오며 고서에만 봐도 최소한 조선 전기부터 임금들부터 백성까지 장어를 먹었다는 기록이 여럿 보인다. 야사이므로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닌 허구일 가능성도 높지만, 일단 장어를 먹으니까 지어낸 이야기라도 등장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이 장어를 먹어 정력을 보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어느 기록인지 언급된 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 사실이 아닐 확률이 크다.

적어도 보편적으로 장어하면 떠오르는 일본식 장어덮밥이나 여수, 군산에 유명한 하모(갯장어)를 쓰는 유비키(데침, 샤브샤브)가 유행해 한식에서 쓰이는 장어가 이미지가 약해 보일 뿐이지 식재료로 아예 안쓰는 것과 100만 광년 차이가 있다. 황교익은 말로만 주장만 할 뿐 객관적이고 정확한 자료를 내놓지 않는다. 그리고 불고기, 멸치 육수는 생떼를 부리면서 장어에 대해 그저 재반박하지 못하고 무시로 대응하고 있다.

더 비약하자면 "갯장어는 다른 장어에 비해서 잔가시가 심할 정도로 많아 잡어 취급을 했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에 수출하다 보니 수출하던 지역에서는 갯장어를 하모라고 쓰고 있다." 수준인데 갯장어 가지고 마치 한국은 역사적으로 장어를 냅두고 일본이 갯장어 유비키를 전하지 않았더라면 먹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꼴이다.[43]

8. 감자면 논란

함흥냉면은 애초 감자 전분으로 면을 뽑았다.
감자 전분 면의 출발은 일제강점기로 보아야 한다.
조선에도 감자가 있었는데?
맞다.
1800년대 초중반에 감자가 이 땅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리 많이 심은 것은 아니다.
조선의 교통 사정과 문물 전파 속도로 보면 감자는 극히 일부 지역에 재배되었을 것이다.
또 일부 지역에서 감자가 심어졌다 하나 그 감자로 국수를 내려 먹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먼저, 감자로 전분을 만드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다.
몇 달을 삭히고 내리고 말리고 빻고.. 국수 하나 먹자고 이 일을 감당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또 당시의 나무 국수틀도 감자 전분 면을 뽑기에 적당하지 않다.
대체로 물렁한 메밀로도 장정 서넛은 붙어야 면을 내릴 수 있는데 '돌반죽'이라도 불리는 감자 전분 반죽으로 면을 뽑는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감자는 쪄서 먹고 갈아서 부쳐 먹으면 맛있는데, 뭔 중뿔나는 일이 있다고 힘들게 국수를 뽑겠는가.
그 당시 메밀은 흔했고, 국수 먹자면 그 메밀로 다들 국수 내려 먹었다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생각을 하면, 조선에서는 감자로 전분을 만드는 기술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다.
감자 전분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감자 전분이 필요하였던 것은 일제였고, 그들에 의해 감자 전분 만드는 법이 보급되었다.
이래저래 일제 이전에 감자 전분 면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제는 함경도에 감자를 집중적으로 심었다.
특히 개마고원 개발에 나서 그 땅에 온통 감자를 심었다.
조선 신민의 먹을거리를 위해 심은 것이 아니다.
이를 전분으로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어디에 쓸려고?
알코올 뽑으려고.
비행기, 탱크 등등의 원료로 쓰려고.
감자 전분은 그 외에도 철강공업, 섬유공업에도 쓰인다.
개마고원을 비롯해 함경도 전역에서 생산된 감자 전분은 함흥, 흥남 등의 항구로 집결되어 일본으로 실려나갔다.
감자 전분이 흔해지니 누군가 면을 뽑아봐? 하고 생각하였을 것인데, 마침, 그러니까 1920년대에 기계화된 냉면기가 개발된다.
유압이나 공압으로 힘 안 들이고 면이 쑥쑥 뽑히는, 요즘 냉면집에 가면 볼 수 있는 그 냉면기이다.
그렇게 하여 공업용 감자 전분이 면 재료로 등장하게 된다.
애초 이 감자 전분 면을 농마국수라 하였다.
농마는 녹말의 함경도 사투리이다.
녹말은 원래 녹두 분말을 뜻하였는데, 감자 전분을 처음 접하는 이들의 눈에 녹말처럼 보여 그리 부른 것이다.

감자 전분 면을 뽑기는 하였는데, 이게 아무 맛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밀과 메밀의 면에는 곡물의 향이 있다.
감자는 그게 없다.
단지 쫄깃한 듯 질길 뿐이다.
그렇게 하여 아무 맛이 없는 이 감자 전분 면에 맛을 더하기 시작하였다.
달고 짜고 맵고 시고 하는 온갖 양념이 추가되었다.
감자 전분 면이 주로 비빔인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이 감자 전분 면을 두고 함흥냉면이라 이르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는 농마국수라 불렀다.
감자국수, 감자농마국수라 불리지는 않았고?
감자의 그때 이름은 마령서였다.(김동인의 소설 [감자]도 감자가 아니고 고구마이다.)
그냥 농마국수라 불렀다.

요즘은 함흥냉면을 감자 전분으로 뽑지 않는다.
고구마 전분이 더 싸 고구마 전분으로 면을 뽑는다.
고구마 전분으로 뽑든 감자 전분으로 뽑든 큰 의미는 없다.
둘 다 특별난 향이나 맛이 없고 단지 쫄깃한 듯 질긴 조직감만 줄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함흥냉면@

감자면 또한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감자가 전래된 것은 그 이전이지만, 조선의 열악한 교통 운송 환경상 퍼지는 데 느렸을 것이라는 논리.

우선 감자의 전래에 대해서 말하자면, 감자는 19세기 초반에 조선에 전래되어 들어왔고, 18세기 후반에 먼저 들어온 고구마처럼 조세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급속도로 퍼졌다. 다만 고구마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감자는 고구마를 키울 수 없었던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또한 감자와 고구마는 그 특성상 주로 물빠짐이 심하고 황폐한 곳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쌀과 보리 등의 작물이 자리잡기 어려운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고, 그 지역 주민들이 겨울과 보릿고개를 버티는 구황작물로 소비되었다. 감자의 재배 자체는 감자를 필요로 하는 일부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서울에서 최초로 재배된게 19세기 후반에 외국인 선교사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일제시기 전에는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작물이 아니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감자를 키울 필요가 없었거나 필요를 못느꼈기 때문이지 교통 탓에 전파가 안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감자나 고구마가 아니더라도 쌀, 보리, 밀, 수수와 같은 곡물과 줄기/뿌리식물으로부터 전분을 추출하는 기술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다양하게 존재했다. 도토리묵도 힘든 과정을 통해 얻은 도토리 전분으로 만들어 먹는 것인데 감자 전분을 못얻을 이유가 있을까? 심지어 한국인의 밥상에서 나온 것처럼 썩은 감자로부터 전분을 추출해내서 쓸 수 있기 때문에 황교익 말대로 쪄먹기 바빴다고 해도 썩은 감자가 나오면 그걸로 전분을 만들면 되고, 황교익이 말한 갈아서 부처먹는다는 게 감자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감자전의 조리방법이나 감자떡을 생각하면 정말 엉뚱한 소리이다. 그리고 전분은 요리에 사용하는 것 이외에도, 풀을 만들어서 옷에 먹이거나 도배, 공예 등에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얻어야할 이유가 많다.

마지막으로 함흥냉면 자체는 일제강점기 때 감자를 이용한 산업과 함께 크면서 발달하긴 했어도 감자나 고구마 전분을 이용한 면은 있었다. 감자면 자체의 유행은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이라 볼 수 있고 오늘날 볼 수 있는 기계식으로 제면된 감자면 또한 시작은 일제강점기가 맞겠지만 고작 그거 하나를 위해서 조선을 감자에서 전분 하나 못얻어내는 나라로 취급하는 모습이다.

9. 을지로 골뱅이 무침

(생략)

옛날에 골뱅이는 동해에서 흔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이를 쉽게 접할 수 없었다. 여느 고둥류에 비해 쉬이 상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골뱅이를 맛있는 고둥으로 여기는데, 1960년대에 이를 통조림으로 만들어 일본으로 수출하는 업체들이 생겼다. 서울 을지로 골뱅이 골목에서 최고의 골뱅이로 여기는 ‘동표’의 공장 설립연도도 1962년이다. 골뱅이 통조림 업체들이 일본 수출만 한 것은 아닐 터이니, 그즈음부터 골뱅이가 통조림에 담기어 서울에 입성했을 것이다.

(생략)

애초 골뱅이 통조림은 일본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그 조리법은 일본인의 입맛에 맞추어졌고, 따라서 들척지근한 맛이 난다.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가 구멍가게 주인에게 매콤한 양념을 부탁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파채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으리라. 고춧가루와 마늘 정도만 넣고 이를 안주로 삼다가, 서비스로 파채도 넣고 통조림 국물이 아까우니 여기에 북어포를 더하고 하면서 지금의 을지로 골뱅이 조리법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생략)

을지로 골뱅이는 언제부터 유명했을까

한때 한국에서 골뱅이를 수출했던 것도 사실이고, 일본에 수출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골뱅이 통조림이 일본 수출용이기 때문에 조리법이 일본인의 입맛에 맞춰져 있어서 한국인의 입맛이 맞지 않았다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1969년 5월 8일 매일경제#에 의하면 65년에 700상자, 66년에 1200상자를 미국에 수출하였고, 69년에 오키나와에 200상자를 처녀수출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골뱅이의 대일 수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70년대 일본의 태양어업에 골뱅이를 수출한 것#으로 보이며, 동남아시아 등 다양한 국가에 조사단##2#3을 보내면서 적극적으로 판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말은 골뱅이 무침의 유래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골뱅이 통조림은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졌고, 한국인들은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여 양념을 올린 것이라는 그럴듯한 썰일 뿐이며,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 썰에 일본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일본에 주로 수출된 것은 냉동 골뱅이였다.##2

결정적으로 일본에서 골뱅이는 인기있는 음식이 아니며 아이치현이나 미에현 일부 지역에서나 먹는 정도이다.

10. "궁중 음식은 친일 음식."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일본 왕가에 편입된 조선 왕가의 음식이 궁중음식이므로 조선 궁중음식도 친일 음식이라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이 주장은 '조선 왕실의 어떤 행위는 친일이다. → 모든 궁중음식은 조선 왕실의 행위다. → 따라서 궁중음식은 친일'이라는 결론으로 흐르게 된다. 이런 식이라면 조선 궁중은 한국어를 썼으니 한국어는 친일 언어, 조선 궁중은 한복을 입었으니 한복은 친일 복장,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조선 왕실의 모든 행위가 친일이라는 말이 된다. 논리적으로도 비약이 심한데다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 궤변이다.

11. 피해자 코스프레

2018년 11월 18일 황교익은 자신의 블로그에 친일분자에 부역하는 자들이라는 게시글을 올리며 자신은 조리돌림의 피해자라며 해명하고 있다. 오히려 "자신을 친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야 말로 친일분자 부역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라며 주장하고 있다.#

12. 일제의 조선 침략이 형제의 나라라고 여겼기 때문?

황교익에게 차단당한 사람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의하면, 황교익은 2014년 11월 오키나와에 갔을 때 같이 갔던 사람들한테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은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에 빡이 친 여러 사람들이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나중에 황교익은 자기가 형제의 나라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지만, 그날 함께 있던 스태프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다 형제의 나라라는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현지인한테 안 얻어터진게 다행이다.#

13. 연미복은 일본 정치인의 제복?

친일 의혹을 되돌려 준다면서 이낙연이 연미복을 입고 일본 인사와 어울렸으니 이낙연은 일본 총리에 더 어울린다고 주장했다. # 이낙연이 천황 즉위식에 참석했을 때를 말하는 것인데, 연미복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이랑은 전혀 연관이 없고 그냥 최고 격식을 갖춘 서양 예복이라 와교 행사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행사에 참여한 각국 국빈들을 보면 연미복이나 자국 전통복을 입은 걸 볼 수 있는데 그럼 이 사람들이 전부 친일인사일까? 서양의복에까지 일본 기원론을 주장하냐는 네티즌의 반응이다.

[1] 참고로 콩나물은 시루에서 자란다. 다만 농업 기술의 발달로 밭에서 키운 뒤 옮길 수도 있다.[2] 외국 유명 평론가인 '에드워드 케빈'이 비공식적으로 운암정을 방문한 자리에서, "운암정의 음식은 위선의 맛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니 음식에 일본의 냄새가 남아있어야 하는데 일본에서 머물면서 먹었던 일본음식과 다르다"며, 본인이 온다고 평소대로 조리하지 않았다는 비평을 하자 불같이 화를 내고 그를 내쫓으며 한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허영만 작가가 식객 만화 제작 당시 황교익 측에서 조언을 해준 바가 있다.[3] 프랑스 유명 요리점 '르 카냘'이 일본에 개업했는데, 개업식 날 초대받은 우미하라 유우잔은 대접받는 프랑스 요리가 버터생크림을 자주 쓰는 것을 비하하고 계속 나오는 프랑스 음식을 터무니없이 비하하고 생선먹을 줄 모른다며 일식 기법과 대조하며 치켜세웠다. 나중엔 메인디시로 나온, 피소스(통째로 구운 오리의 일부 살과 뼈를 전용 압축기로 압착해서 만든 피소스)와 함께 먹는 오리 요리를 와사비와 간장을 가져와서 먹으며 일식을 찬양하자, 결국 보다 못한 야마오카 지로가 우미하라와 승부하는 대목이다. 우미하라의 논리는 '가이세키 요리는 완성도가 만점이라서 이런 오리요리처럼 소스로 먹어도 되고 간장으로 먹어도 되는 애매함이 없다'라는 것이었고, 지로는 우미하라가 직접 지휘해서 만들어오는 가이세키 요리 중 맘대로 먹을 수 있는 여지를 찾아내기 위해 생강과 간장으로 먹는 가다랑어를 마요네즈로 먹어 보인다.[4] 이 내용은 작가가 우미하라의 모티브인 도예가, '기타오지 로산진'의 일화를 소재로 쓴 것이다. 해당 인물이 프랑스 요리집에서 프랑스 요리 전체를 비하한 것은 불확실하나 소스가 어울리지 않다며 간장과 와사비를 먹은 것은 기록에 남을 정도로 유명하다. 즉, 로산진을 신격화하는 작가마저 이 일화만큼은 야마오카 지로의 입을 빌려 비판한 것이다.[5] 한편, 맛의 달인은 한국요리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일본 불고기 대 한국 불고기" 에피소드에서 일본요리는 재료 고유의 맛을 극대화한 '바이올린 솔로' 같은 요리라면 한국요리는 여러 재료의 맛을 한데 어우러지게 하여 전혀 새로운 독창적인 맛을 창출해내는 '오케스트라' 같은 요리라며 우열을 가릴 바 없이 양측 모두 고유의 장점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했다.[6] 결국 황교익의 이런 발언들은 순수하게 음식 그 자체가 아니라 박정희를 혐오하는 자신의 정치관에 입각한 논리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정치관을 그의 입장에서 이씨가 대대로 해먹던 조선 왕조=능력은 없는데 기득권빨로 대대로 해먹는 보수정권, 양반=친일,친미 기득권으로 치환하여 대입하다 보니 조선 식문화=독재정권 식문화=열화되거나 존재하지 않는 문화 라는 일종의 만물독재정권설에 빠져 답을 정해놓은 논리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그가 논란에 휩싸일 때 마다 실력 운운하기 보단 기득권 언론, 친일 기득권들이 친일로 몰고간다 등의 조직된 거대 세력 공작이 들어와 탄압 받는다는 투의 변명을 자주 한다. 알겠지만 거대 기득권이 이런 뻔뻔한 좆문가 하나 공작 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 시간에 다른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하고 말지..[7] 이는 1970~1980년대 한국이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황교익은 박정희-전두환 같은 독재 정권을 극단적으로 증오하다 보니, 아예 그들의 지배를 받았던 한국 사회에서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8] 비슷한 예로 서양의 중세시대에 대한 평가가 있다. 계몽사상가들은 중세는 인류 문명이 후퇴된 시기라고 까고 있는데 실제로 몇몇 문화는 로마 제국보다 후퇴한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당연히 과거보다 발전한 시대였고 현재 중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계몽사상가들이 자신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과도하게 중세를 저평가했다고 비판한다.[9] 조선엔 석쇠가 없었다. 조선엔 외식문화가 없었다. 조선엔 멸치국물 문화가 없었다. 조선 왕실은 썩은 간장을 먹었다 등등...[10] 검색 엔진 또는 각 온라인 서점에서, 궁중음식 전수자 무형문화재 황혜성 교수의 딸이자 본인도 궁중요리 전수자 무형문화재인 요리연구가 한복려가 본인이 이끄는 궁중음식연구원 이름으로 펴낸 한국 요리에 대한 책이 얼마나 많은지만 봐도 한식 전통과 연구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11]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거의 모든 문화가 (선사시대부터) 중국을 중심으로 한 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흘러갔는데, 섬이라 식재료가 제한적이었던 일본에서 음식 문화만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그게 맞다 하더라도 그게 성립하려면 한반도에는 기존 음식 문화가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황교익 본인은 정말로 이렇게 생각하는 듯하다.[12] 물론 이것도 개소리인 게 대한민국이 조선의 후예인지는 정권의 좌우에 따라 갈리는 게 없잖아 있지만 문화는 확실히 계승되었음으로 한국=조선의 여부와는 상관 없다.[13] 참고: 황교익의 "조선시대에는 외식 문화가 없었다."에 대한 반박글.[14] 참고로 그가 없다고 주장한 불갈비는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쓰이는 단어이며 '숯불갈비'라는 단어는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록되어 있다.[15] 사실 '우랄알타이 어족'이란 표현은 반세기도 더 전 언어학자인 포페의 분류에서 쓰인 것이다. 지금은 학자들 사이에서조차 그저 옛날 이야기를 할 때만 우랄알타이 어족이란 표현을 쓰는 정도. 그와는 별개로, '알타이 어족'이란 항목에서 '우랄-알타이 어족'의 개념을 90년대 후반에 출간한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황교익의 지식 수준이 어떤 시간대에 머물러 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16] 그런데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이라는 일어에는 타코야키, 오코노미야키도 있지만 야키니쿠, 야키토리, 야키소바도 있다!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인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17] 물론 이를 아무리 설명해봐야 우랄알타이에서 탈락이지만, 최소한 주장의 형식이라도 갖추려면 이 정도의 논리적 근거와 일관성, 주장의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18] 단, 불고기라는 단어도 전혀 안 쓰이는 건 아니고 가타가나 표기로 쓰이는 경우도 있는데, 그 경우에는 니쿠쟈가에 가까운 국물이 우러나는 고기 볶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19] 이규진, 「근대 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0.[20] 이 논문을 보면 일제강점기의 일본, 조선 기록에 모두 소육(명칭은 일제강점기라서 야키니쿠를 혼용)이나 불고기가 평양명물로써 조선요리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학문적 주장을 할 때 가장 기초 중 하나가 기존 연구를 찾아보는 것인데, 이를 읽어보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황교익은 우선 이 논문부터 논파하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21] 조조엔 말고도 야키니쿠 챔피언이나 도라지 같은 야키니쿠 고깃집들도 기본적으로 한국식 야키니쿠를 서비스한다. 규카쿠 같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가게 역시 야키니쿠라는 이름을 걸고 한국식 메뉴명의 상차림을 제공한다.[22] 우연일지는 모르겠으나 황교익이 적족≠고구려임을 유추해내는 과정은 역갤 일뽕들이 원문을 보지 않고 번역문만 보고 먼저 비슷한 방식으로 결론을 내린 것과 유사하다.[23] 황교익의 이 주장도 웃긴 게 정작 일본어의 야키는 불사른다는 뜻이지 불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24] 여기서 황교익의 주장이 병크라는 것이 한 번 더 드러나는데, 물만두는 일단 알타이어족으로 분류되었던 국가들에서 모두 '물+만두'라는 조합으로 사용된다. 알타이어족 언어를 사용하는 민중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조어법이라면서?[25] 물론 더 세세히 들어가자면 특이한 조어라고 무조건 번안어라고 할 수 없다. 이 빈틈을 야키니쿠가 어쩌고 국어학자가 어쩌고 하는 썰로 보충하는 것에 가깝다.[26] 불갈비나 물만두를 주장해도 '내가 불고기 등장 이전이나 그 즈음의 예를 가져오라고 했지 현대 단어를 가져오라고 했나? 그러니까 내가 옳다.'라고 정신승리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27] 근거 바꿔치기를 하면서 예로 든 군고구마, 군옥수수가 기존 근거인 우랄알타이어족과 모순되는 건 덤이다.[28]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는 검색하였을 때 과거 군고기, 소우육(燒牛肉), 소육(燒肉), 구운고기, 구은고기 등의 다양한 표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저육, 돈육, 우육, 고기 뒤에 구이를 붙이는 건 생각보다 적다. 물론 이것들이 불고기라는 단어가 야키니쿠의 번안이라는 증거는 아니다.[29] 아니면 불갈비 역시 번안어라고 조어의 자연스러움 따위가 아닌 다른 근거를 들어 증명하면 된다.[30] 스키야키, 오코노미야키 등은 원어 그대로 쓰인다.[31] 당연히 요점은 석쇠를 만들었느냐 안 만들었느냐가 중요하지 뭔 석쇠 재질이 어떻고 산업혁명이 어쩌고는 논점에 벗어난 회피에 가깝다.[32] 석쇠논란은 없다.[33] 참고로 페북 추기라고 써있는 글을 보면 “엉터리”. 명색이 공부하는 사람이 반론을 제기하며 상대에게 하는 말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게 놀랍다. 당신의 인격을 드러내는 말이란 것을 알기 바란다.라고 추가로 썼는데. 그럼 황교익은 자신이 자주 남발하는 단어 '세뇌,미개'라는 자극적 단어와 분별없다. 하대하는 태도에 자기평가를 해야한다.[34] "'불고기'라는 단어가 야키니쿠의 번역이라고 주장했지, 불고기가 일본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인데, 정작 위에 보면 불고기가 일본에서 건너왔다고 대놓고 주장하고 있다.[35] 이 '자가발전의 증언'이란 표현도 비학술적이며, 토속학 등에서 개인의 체험담이나 구전 역시 일반적으로 학술적 자료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누가 아무말 대잔치를 하고 있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특히 위 문헌 항목에 보면 문헌적 기록 또한 이기문 교수의 말과 일치하며, 이효석 선생의 글과 모순되지도 않는다.[36] 친일은 평소 행태에 대한 얘기인데 언급도 안한다.[37] 당연히 야키니쿠와 스키야키는 완전히 다른 음식이다.[38] 명칭에 관한 건 오뎅문서와 어묵 문서 참고. 훗날 어묵의 관한 기사를 냈을 땐 어묵을 가마보코라고 내놓긴 했다. 다만 과거의 기사의 오류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39] 대체로 한국에서는 회라고 하면 날고기 요리를 총칭하고(막회, 물회, 사시미 등), 사시미는 그중 일식회칼(사시미칼)로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썰어낸 요리를 뜻하는 것으로 구분한다.[40] 우리나라에서 생선회를 대할 때 간장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초장까지 찍어먹고 쌈장도 먹는다. 게다가 상추는 물론이고 깻잎 그리고 마늘 등 오히려 일본사람들이 독특하다고 평할 정도. 이쯤이면 사시미로 분류하기에는 크게 문제가 있는 셈.[41] 여담으로, 이 책에는 멸치가 말라리아의 원인이라는 현대 기준으로는 틀린 정보가 들어 있다.[42] 김수희 저, 근대의 멸치, 제국의 멸치 참고.[43] 세계적으로 보면 장어 요리는 일본에만 있는 게 아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독일 등 장어가 서식하는 지역마다 찜이나 볶음 등 형태가 다를 뿐 아예 먹지 않는 게 아니다. 그 악명높은 장어젤리는 바로 영국 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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