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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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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3. 즉위 후4. 녹읍 부활(757)5. 한화 정책(757)6. 적극적인 백제 유민 회유 조치7. 전면적인 군제 개편 및 축성 사업8. 사회와 문화9. 후계자10.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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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경덕왕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출생

제33대 성덕왕의 3남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제34대인 효성왕의 동복 동생으로 원래대로라면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적었지만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태자로 책봉되었고 왕위에 올랐다.

3. 즉위 후

왕비로 사량부인(沙梁夫人)[1][2]과 만월부인(滿月夫人)[3]이 있다.

나당전쟁 이후 당나라와 소원해졌다가 부왕인 성덕왕 대에 다시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정립한 후 경덕왕 시대에는 당나라와의 교류가 크게 늘었다. 신라의 제도, 지명, 관직 등을 당나라식으로 개편하는 한화정책(漢化政策)[4]을 펼쳤다.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쓰는 수많은 한자 지명들이 대부분 경덕왕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덕분에 이에 대한 기록이 대거 남아 있어 고구려어백제어, 신라어 등의 고대 한국어 재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산업 발전에도 힘을 기울여 신라 중대의 전성기를 이뤘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때부터 신라는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원인은 전제 왕권 구축에 대한 진골 귀족들의 반발이었다.
"742년 10월에 일본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753년에 다시 왔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752년 윤 3월 22일, 신라 왕자 대아찬(大阿飡) 김태렴과 공조사(貢調使) 김훤(金暄), 왕자를 호송하는 김필언(金弼言) 등 700여 인이 7척의 배를 타고 와서 하카타(현재의 후쿠오카 시)에 입항했다.
6월 14일 신라 왕자 김태렴이 신라 국왕의 사명을 받들어 인사를 올리고 예물을 올렸다. - 《속일본기》

한편 일본과의 사이는 계속 좋지 않았다. 성덕왕 즉위 후 신라가 왕성국이라며 일본보다 높은 위상을 주장하자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752년에 잠시 김태렴이라는 인물이 신라의 사신으로 일본을 방문했지만 다음해인 753년에 신라는 일본측 사절이 무례하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했다. 이에 대해 나당전쟁 이후 이어져 온 친일본파와 친당파와의 오랜 싸움에서 친당파가 승리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사신이 문전박대 당한 이후 일본은 신라 침공 계획을 세우고 500여 척의 배를 동원하는 등의 준비를 했지만 최종 책임자였던 권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역모죄로 참수당하면서(764) 흐지부지되었다. 일본이 침공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발해 문왕(737~793 재위)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해는 적당히 일본의 비위만 맞춰 주면서 신라 침공 계획을 차일피일 미루는 식으로 회피해 버렸다. 자세한 것은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문서 참조.

이무렵 경덕왕은 전면적인 군제 개편도 단행했는데 이는 뜻밖에 후삼국시대후백제에게 밀리던 신라를 지켜주어 서라벌 함락을 무려 7년이나 늦추게 했다. 자세한 부분은 군제 개편 문단 참조.

4. 녹읍 부활(757)

흔히 그가 녹읍 부활을 들어 귀족 세력에 대한 견제에 실패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최신 학설을 싣는데 가장 보수적인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이나 교과서를 따르는 각종 시험에서는 그 정도로 간단히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반박설도 많이 제기되고 있어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가 진골 귀족의 힘을 이기지 못해서 녹읍을 부활시킨 것으로 이해되지만 정작 《삼국사기》 <경덕왕 본기>의 녹읍 부활 이후를 보면 그는 이후에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정치를 펼치고 있다.

지방 행정의 한화 정책이나 관직 한화 정책은 모두 녹읍제를 부활시킨 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녹읍 부활은 757년 3월이고 지방 행정 한화 개편은 757년 12월부터 시작했으며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개편한 것은 759년 정월부터다. 만약 녹읍 부활이 진골 귀족들의 압박으로 수행된 것이라면 그가 이런 정책들을 펼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거꾸로 이는 그의 왕권이 여전히 강력했음을 시사한다.

경덕왕 대에는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났고 이전 왕들 대부터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보니 국가 재정이 말이 아닌 것은 당연지사였다. 조부인 신문왕 대에 제정된 녹봉제가 확실히 진골 귀족에게 경제적 타격을 입힌 것은 사실이지만 녹봉제는 국가에서 일일이 지급에 신경을 써야 하니 관리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족한 국가 재정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도 귀족들이 자기 몫 땅을 알아서 관리하니까 유지 비용이 덜 드는 녹읍제를 시행했다.

녹읍 부활이 진골 귀족에게 이익인 것을 그도 몰랐을 리는 없지만 이후에도 자신의 정책을 계속 시행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왕권은 충분히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녹읍제를 실시해도 왕권이 강력하므로 자신이 관리를 잘 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국가 재정 문제까지 합쳐져서 녹읍을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758년 2월에 그는 "중앙 관리나 지방관이 휴가를 청한 것이 만 60일이 되는 사람은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시대 당나라는 관리가 1년을 기준으로 약 100일까지 휴가를 쓸 수 있었고 후대의 고려 시대에는 관리가 받았던 공식적인 휴가일만 60일이었으며 개인이 임의로 쉴 수 있는 날까지 합치면 1년에 100일에서 120일 정도였다. 그러므로 60일은 밑에서 일하는 관리 입장에서는 굉장히 가혹하고 힘든 조치였다.

동국대학교 윤선태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녹읍제와 관련된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데 당나라는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급여가 반 정도로 축소 지급되었다. 신라도 마찬가지로 공식 휴가 기간을 빠듯할 정도로 줄여서 녹읍을 포함한 보수를 줄여 국가 재정을 절약하려는 의도가 담긴 조치라고 해석했다.

오늘날 직장 생활로 비유하자면 회사가 허용하는 휴가 일자가 절반이나 줄었으며 휴가 신청 횟수가 줄어든 허용 일자를 넘어가면 자동으로 회사에서 잘라 버린 거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조치에 신라의 귀족이나 관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 것은 당연했겠지만 이런 불만을 안고도 그는 자신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 만큼 왕권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문•무 관료전 체제를 붕괴시켜 오히려 문•무 관료전을 통한 무인들에 대한 토지 지급이 끊기는 바람애 혜공왕 때는 규모가 큰 반란이 일어났다. 문•무 관료전은 무인들에게도 토지를 지급하는 것이었으나 이것을 뺏긴 것에 불만을 품어 96각간의 대란이 터지기 시작했다. 왕권의 강화가 되려 무예에 능한 귀족이나 관리들의 불만만 폭발시킨 셈이 되었다.

흔히 통일신라문치주의가 가장 강했던 시기라고 하는 것도 실은 그가 만들고 열조 원성왕이 최고조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반란은 거듭되었지만 반란을 완전히 해결한 사람들은 신무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장 세력이었던 장보고와 그를 돕던 신무왕이 반란을 일시적으로 종식시켰지만 애석하게도 신무왕은 단군 이래 재위가 가장 짦은 왕이 되었다. 신무왕은 본시 무장 세력들을 돕던 왕이었는데 문무왕 이후 '신무'라는 '무'의 시호가 붙은 것도 결국 이 때문이다.

상대등 김사인이 왕의 정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도 귀족들이 경덕왕을 압박한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김사인은 태종 무열왕의 3남인 김문왕의 손자로 성덕왕이찬을 지냈으며 김사인의 아들인 김유정 역시 경덕왕에게 중용되어 중시까지 지냈으니 김사인은 왕을 반대하는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근왕 세력이었다.

이 날의 기록을 보면 김사인이 상소를 올리자 왕이 무시한게 아니라 '가납'(간언을 받아들임)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그가 비판을 수용하는 유교적 군주상을 지향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사인이 상소를 올리고 이듬해 병으로 물러났다는 것도 그가 성덕왕 때부터 활약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나이가 들어서 물러났을 가능성이 크다.

상대등 김신충과 시중 김옹이 진골 귀족들의 압박으로 물러났다는 것도 잘못된 설명이다. 김신충은 김사인의 후임으로 상대등이 되었으며 선왕 효성왕의 측근이었던 인물이고 김옹은 경덕왕의 첫 장인인 김순정의 손자다. 본래 상대등은 시중과 달리 매우 길게 재임할 수 있었고 종신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김신충은 6년째 재임 중이었고 김옹은 3년째 재임 중이었는데 그런 관직이 교체된 것은 오히려 왕이 이런 관직들까지 교체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강한 권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 맞다.

후임으로 김양상(훗날 선덕왕)을 시중으로 임명한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김양상의 부계는 내물왕계지만 그 어머니는 경덕왕의 이복 누나인 사소부인이므로 경덕왕의 외조카가 되기 때문에 근왕 세력으로 보는 것이 보다 이치에 맞다.

김양상도 원래 혜공왕의 근왕 세력이었다가 그가 시해당하자 훗날 열조 원성왕이 되는 김경신의 강압으로 임금이 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더욱이 선덕왕 사후 그의 아내가 원성왕에 의해 출궁당하는데 사실 선덕왕 본인이 주도하여 직접 권좌에 오른 것이라면 사후에 이러한 장면이 나오기 힘들다. 선덕왕 본인 역시 재위 기간 동안 자주 왕위를 넘기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도 위의 의심을 부추기는 부분.

이전에 김양상은 제6위 아찬이었는데 신라에서 시중은 제5위 대아찬 이상부터 임명될 수 있었던 관직이다. 김양상을 시중에 임명한 것도 경덕왕의 정치적 안배다.

이로 볼 때 그가 진골 귀족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으며 견제에 실패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진골 귀족의 반발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정책을 그대로 밑어 붙인 것을 보면 오히려 그는 통일신라의 국왕 중 신문왕과 더불어 가장 강한 왕권을 자랑했던 국왕이라고 할 수 있다.

5. 한화 정책(757)

경덕왕 시대에 펼쳐진 한화 정책은 말 그대로 중국화 정책이다. 757년 전국 9주의 명칭과 군•현의 지명을 모두 당나라식으로 바꾸어 한자화했는데 한국사 최초의 지리덕후가 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금의 읍면 단위까지 전국에 그가 건드리지 않은 지명이 드물 정도로 대대적으로 바꾸었다.[5] 759년에는 중앙 관직명도 한자화하여 집사부 중시를 시중, 국학을 태학으로 명칭을 바꾸는 등 많이 바뀌었다.

이렇게 경덕왕이 한화 정책에 신경을 쓴 이유는 그가 한화하기 전의 고유 지명 중에는 의미가 좋지 않은 한자를 사용하는 지명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주검 시'()자가 들어가는 고시산군(古尸山郡, 충청북도 옥천군)이나 우시산(于尸山, 울산광역시), 저족현(猪足, 강원도 인제군, 족발이란 뜻이다.)처럼 한자 뜻으로 읽을 때 이상하거나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야 음차하는데 바빠서 발음만 맞으면 대충 갖다붙였지만 이후 중국에 맞먹는 한문 능력을 갖춘 지식인이 늘고 이두향찰도 보급되어 사회 전반에 한자가 널리 퍼진 신라 중대에 이르면 놔두기 껄끄러운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기에 경덕왕은 마침 한문 능력이 좋은 지식인들도 늘어나는 등 한문 저변도 확장되었겠다 이러한 안좋은 의미의 한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을 지시한 것이다.

이 때 모든 지명을 뜬금없이 완전히 다른 중국식 지명으로 바꿔 버린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원래 고유어 지명의 음과 한자의 뜻, 어감까지 고려해서 바꾸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경덕왕이 바꾼 이래로 지금까지 사용하는 지명인 전라남도 보성군이 있는데 보성군의 백제 대의 지명은 복홀군(伏忽郡)이었다. '복홀'은 "보라는 이름의 성"이라는 의미의 지명을 음차한 것으로 '-홀' 지명은 미추홀의 사례에서도 보이듯 전국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경덕왕은 이중에서 옛 지명의 '보'라는 음을 살려놓았다. 원래 해당 음을 표기하던 '' 자는 엎드리다, 머리를 숙이다, 굴복하다, 숨다 같은 뜻이 있는데 그냥 음차인 걸 아니까 여태껏 써오긴 했지만 한자를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 지명으로 쓰기 좋은 글자는 아니라 엎드릴 복을 의도적으로 '보배롭다'(寶)라는 좋은 뜻의 한자를 끼워맞춰 보성군(寶城郡)으로 고쳤고 이는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계속 쓰이게 된 것이다.

이 때 처음 시도되었던 지명 한화 정책은 고려 시대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현재까지 내려오는 한자어 지명의 기초가 되었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사용되는 전국 각지의 지명들은 경덕왕 대에 지어진 이름 그대로거나 경덕왕 버전에서 도중에 약간 바꾼 것이 상당히 많다. 나무위키에서 xx시, yy군 문서 아무거나 들어가서 역사 문단을 보면 십중팔구는 지명 변천에 대한 서술 대부분에 경덕왕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혹 그의 지명 한화 정책 때문에 고유 지명이 잊혀지고 중국과 비슷해져 버렸다고 그를 까는 경우도 있지만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가 고치기 전의 고유어 음차 지명들도 전부 기록에 남아 있다. 즉, 그가 고쳐서 고대의 고유 지명이 잊혀졌다는 것은 오해이고 그가 건드린 지명의 원래 이름들은 지금도 기록에 남아 있다. 단지 후손들이 이전 이름과 경덕왕 버전 지명 중 후자를 주로 사용하는 것일 뿐 옛 지명들도 그가 남겨 놓은 기록을 통해 당시 신라가 지배하고 있던 범위 안에서 시군 단위로는 모두 고증이 가능하다.

이러한 한화 정책이라고 하지만 상당수의 행정구역 이름은 한화 이전의 토착 지명을 본떠서 만들었거나 어원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사례는 그외에도 많은데 상주는 한화 이전의 명칭을 '사벌' 혹은 '상락'이라고 하는데 대고을을 뜻하는 '주'를 더했을 뿐 이전의 고유 지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안동도 '고타야'에서 '고창'으로 바뀌어 고유 지명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하동은 '한다사'라는 고유 명칭과 발음이 비슷하며 의성은 '소문'이라는 고유 어원을 '문소'로 바꿨을 뿐이다.

그의 한화 정책은 행정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책의 일환이었던 탓에[6] 많은 진골 귀족들의 반대를 샀고 결국 혜공왕 시기에 많은 지명이 원상복귀되면서 신라는 고유어로 된 왕호나 관직명, 관등 체계(갈문왕, 매금, 파진찬 등)와 같은 토착적인 문화를 하대까지도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렇게 일시적인 것에 그쳤던 한화 정책은 고려가 다시금 시작한다. 신라와 달리 새롭게 새 국가를 건설해야 했던 고려는 토착문화 대신 당대의 최신 시스템이었던 당제(唐制)를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운용했고 그나마 고유 문화도 어느 정도 반영했던 경덕왕 대의 한화 정책과 달리 철저히 중국식 문화를 반영해서 진행되었다.

실제로 고려 시대에는 지명을 새로 지을때 신라 시대와 달리 철저하게 중국식 어원을 가지고 지었다. 예를 들어 경주, 진주, 안동, 의성 등이 고려 시대에 지어진 지명인데 이러한 이름은 전술한 상주, 고창, 하동, 문소 등과 달리 고유 지명과 단절되어 있어서 경덕왕 시기의 한화 정책과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래도 경덕왕대에 처음 시도된 한화 정책은 고려가 다시 되살려 본격적으로 시행한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조선 시대까지 쭉 이어지게 된다.[7]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의 지명 개혁을 마치 이전에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작업인 것처럼 착각해 신라중심주의적인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지명은 경덕왕이 완전히 새로 창조한 것이며 후대에도 계승했으니 신라 문화만이 남았다고 여기고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경덕왕은 삼국의 전통을 소멸시킨 사대주의자[8]에 불과하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일단 한자식 지명은 삼국시대에도 한자문화가 완숙해지면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9] 경덕왕도 무작위로 새로 창조하여 작명한 게 아니라 이전 삼국시대 지명의 뜻과 전통을 계승하여 한자화한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이미 중국문화 도입을 통해 이런 식의 중앙집권화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고 권력과 기존 전통을 유지하려 했던 기성 귀족들의 반발도 시시각각 터졌다는 건 기록으로도 많이 남아 있다. 게다가 이런 개혁 및 교류로 인해 후기 삼국의 문화는 이미 무덤양식까지 같아질 정도로 서로 유사한 형태로 수렴 중이었고 따라서 그의 개혁은 완전히 새로운 신라중심주의적이거나 기존 전통을 깡그리 소멸시킨 독자적인 작업이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이미 진행되어 오던 중앙집권적 개혁의 전통을 계승한 것에 해당하며 종합적으로 보면 고려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 일련의 작업이 완성된 형태를 띠고 있다.

한화 정책은 녹봉제와 더불어 왕권 강화를 위해 시작된 그의 야심찬 정책이었지만 결국 지명, 제도, 관직이 임금의 의지로 바뀌었어도 귀족 세력의 약화는 뚜렷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재위 내내 여러 자연 재해가 일어났는데 대략 이상 기후나 이상 현상에 대한 기록이 있는 해가 없는 해보다 적은 정도로 천구성이나 혜성, 초신성, 폭풍우, 벼락, 지진, 가뭄 등이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그래서 이를 핑계삼아 귀족들이 한화 정책을 추진하는 왕을 비판하기도 했다.

6. 적극적인 백제 유민 회유 조치

그는 문무왕 때부터 신라 왕실이 진골들의 꾸준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추진했던 백제 유민 회유 정책 기조를 이어간 임금이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치적은 백제계 고승 진표에 대한 적극적 회유 조치 및 익산 미륵사 지원이다. 백제가 망한 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옛 백제 지역의 백제 유민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이는 부친과 본인의 성이 대성팔족 중 하나였던 진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로부터 5두품 대우를 대대로 받아 그래도 백제 유민 중에서는 가장 좋은 대우를 받은 바 있었던 진표에게서도 드러난다.

진표는 백제 불교의 전통을 주로 계승하면서 미륵 신앙을 강조했고 백제인 정체성을 워낙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송나라에서 펴내는 《고승전》에도 '백제인'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즉, 아직 통일신라 무열왕계 왕실 힘이 막강했을 때 '백제인'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얘기다. 막나가는 견훤조차도 900년 후백제 건국 전까지는 백제 왕이 아닌 신라 대장군 행세에 그쳤을 뿐이었다.

진표의 태도는 신라 왕실에게 대놓고 탄압받아 죽고 싶다는 얘기밖엔 안 되는 행각이었음에도 경덕왕은 분노하긴커녕 오히려 진표를 서라벌로 초청해 계를 받고 선화공주 전승이 내려오는 익산 미륵사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어 옛 백제 유민의 정서를 달래었으며 신라 왕실이 옛 백제 불교 문화를 존중하고 있으며 신라와 백제 사이의 옛 우호 관계를 기억하고 있다는 정치적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하였다.

진표의 의도가 진정 어디에 있는지 간파한 경덕왕의 통찰력과 통 큰 결단력을 볼 수 있다. 이후 옛 백제 지역의 민심은 무열왕계 왕실이 축출되기 전까진 상당 부분 신라 왕실에게 순응하는 쪽으로 돌아섰던 것으로 판단된다.

7. 전면적인 군제 개편 및 축성 사업

그는 일본의 신라 침공이 예상되자 대대적인 군제 개편을 단행하였다. 당시 신라는 통일전쟁 당시 대폭 확충했던 군부대들이 경덕왕 때 당시에는 상당 부분 형해화되거나 담당 영역이 중복되어 있었고 다름아닌 서라벌 방위 부대들 체제도 상당 부분 해이해진 바가 있었는데 그걸 전면적으로 바로잡은 임금이 바로 그다.

그는 당시 여러 자연 재해로 인력 동원이 어려워 관리 및 백성들의 원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부산으로부터 경주로 침입해 올 경로의 일대 성들에 대해 보강 사업을 밀어 붙여 끝내 완료해냈다.[10] 혹시 서해로부터 당나라를 비롯한 외적이 침공해올 가능성도 고려하여 오늘날 공주인 웅주의 주둔군 편제도 확대 개편하였다.[11] 신라 지방 10정 정규군단 명칭도 전부 한화된 명칭으로 개칭했는데 명칭은 당시 부대들이 쓰던 깃발에 유교의 충효 원리에 기반한 한자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지었고 주둔지 명칭도 그 명칭으로 바꾸었다. 예컨대 당시 완산주 거사물현에 주둔하던 거사물정은 그들의 부대깃발 색인 청색에 '영웅 웅'자를 붙여 "청웅정"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청웅정이 주둔하던 군현 이름도 청웅과 관계된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의 10정 군단 개명 작업은 어쩐 일인지 지명 개명 때와는 달리 별다른 반대를 받지 않아 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한편 유명무실화된 서라벌 방어 부대도 대폭 손보아 뭉뚱그려 훗날 '6기정'으로 불린 수도방어 부대 여섯을 창설하여 서라벌로 진입하는 주요 경로 여섯 곳에 고정 주둔시켰고 각지 지방 동원 체제도 손을 보아 9주마다 아홉 지방군이 창설될 수 있도록 개편을 단행하였다.

다만 일본의 침공을 대비한 그의 조치는 당대에는 괜히 했다는 식으로 생각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실제로는 일본이 침공해오지 않았기에 부산~경주에 축성한 성곽이나 부대들은 당장엔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이 조치는 후삼국시대에 선견지명을 입증했는데 후백제가 신라를 침공할 때 경남에서 찌르고 들어가기 대단히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견훤이 920년에 신라로부터 옛 대가야 일대를 빼앗은 후 쾌속 진공해오다가 어쩐 일인지 부산 일대에서 갑자기 군대를 되돌려 당시 후백제 수도 전주로 회군했던 일이 있었다. 이 판단 미스는 임용한 박사의 저서에서도 크게 비판받았는데 이유는 경덕왕 때 이뤄졌던 부산 일대에서 경주까지 진공로 방어 태세 완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그는 서라벌 함락을 무려 7년이나 늦춘 것이다.

그가 창설한 6기정 부대가 없었더라면 원종·애노의 난적고적의 습격 때 서라벌 방어 자체가 어려워졌을 것이고 경명왕이나 경애왕이 독자적으로 나름대로 군사작전을 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후삼국시대 신라가 927년 서라벌 함락 전까진 후삼국시대 삼국 중 하나의 당당한 주체로 활동했던 건 당시의 군제 개혁에 힘입은 바가 크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에게도 도움을 준 임금이다. 경덕왕 당시에 동북 방면 국경에 대대적으로 성을 수축하고 쇠뇌수 부대들을 배치했는데 사실 태봉고려가 의외로 여진족에게 꽤 시달렸던지라 그의 유산은 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8. 사회와 문화

아버지 성덕왕 대에 건설한 물시계(漏刻) 관리 부서인 누각전에 천문학자를 추가 배치하고 당시의 대학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배치하는 등 학문적 진흥도 이뤄졌다.

국력이 강대했는데 경덕왕 시대에 실질적으로 신라는 옛 고구려 남부 핵심 영토였던 패서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전의 패서는 나당전쟁 승리와 성덕왕 시대에 당나라에 영유권을 인정받은 뒤 느슨한 형태로 옛 고구려 계통의 토호들을 통해 간접 지배하고 있었는데 경덕왕 시대에 들어 여러 성을 새로 쌓고 주민을 이주시켜 많은 군현을 설치했다.

당나라 제8대 대종 황제에게 만불산을 보내는 등 외교 관계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잘 유지되었던 시대였다. 다만 일본과의 관계는 의전 문제로 여전히 투닥투닥했지만 크게 충돌이 있진 않았다. 아직까지는 하지만 그의 치세는 차츰차츰 신라 전성기의 마지막 시대이자 쇠망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시대였다. 황금기의 마지막이란 점에서 훗날 조선정조와 비슷한 위치인지도.

성덕대왕신종의 건립이 진행된 시기이기도 했으나 계속 실패하다가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 재위 때인 771년 완성되었다. 아버지 성덕왕이 전제 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를 기리는 종의 주조도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외에도 754년 황룡사 대종(皇龍寺大鐘)을 주조하고 석굴암(石窟庵)의 축조를 비롯하여 불국사(佛國寺) ·굴불사(掘佛寺) 등을 창건하였으며 각 사찰의 수축과 탑·불상의 제작에 힘쓰는 등 불교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진골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화랑들을 지도하던 승려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는데 이 때 향가가 발전하기도 했다. 월명사, 충담사가 이 때 활동했던 대표적인 승려이다.

중국에서 발견된 묘지명에 의하면 김일성이라는 사촌형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대로 치면 외교관격인 숙위로 당나라에 파견된 후 평생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평생 동안 당나라에서 살면서 현지 여성 장씨와 결혼하였으며 거기서 죽어 묻혔다. 이로 미루어보아 왕위 계승권에 근접한 방계 왕족으로서 동시기 경덕왕의 신라 조정으로부터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도 관련 설화까지 있을 만큼 아들을 늦게 보았기 때문에 후계 구도가 불안정했다는 주장의 정황적 근거가 된다.

9. 후계자

사량부인 김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폐비했다. 사량부인을 폐한 것은 단순히 아들을 못 본 것 뿐 아니라 일본 기록에도 등장할 정도로 위세를 떨치던 대귀족 김순정 쪽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존재한다.

만월부인 김씨를 새로 들인 후 만월부인과의 사이에서 다음 왕인 혜공왕을 낳았는데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의 탄생에 대한 설화가 전해진다. 표훈대덕 문서도 참조.

아들을 너무 늦게 낳은 탓에 후계자인 혜공왕은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설화에 따르면 신라 쇠퇴의 원인 제공자다. 이 설화에 의하면 경덕왕의 음경 크기가 8촌(약 24cm)이었다고 한다. 당시 척단위인 당척의 29.6cm로 환산하면 24cm가 된다.

그런데 경덕왕이나 지증왕을 비롯한 몇몇 왕의 거대한 음경 크기에 대한 기록은 그 왕들의 권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사실을 은유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에는 왕이 직접 전쟁터에 나가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에 남성다움이나 건장한 육체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강해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왕에 대해 실제 크기가 어떻든지 간에 음경 크기를 과장하는 방법으로 그 왕을 받드는 경향이 었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아들을 못 본 건 부인의 탓으로 돌아갔고 그래서 사량부인도 폐비됐는데 만월부인은 누구보다도 음기가 가득한 기운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 양기가 넘치는(?) 경덕왕과 적격이었다.

그리하여 아들을 보기 위해서 표훈대덕 스님을 불러 "짐이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께서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주시오"라고 요청했다. 이에 상제한테 갔다온 표훈대덕이 아뢰기를 딸은 얻을 수 있지만 아들은 안 된다고 대답했다.

그가 다시 표훈대덕에게 딸을 아들로 바꿔달라고 부탁하자 표훈대덕이 하늘을 갔다와서 상제가 바꿀 순 있지만 그렇게 아들을 얻으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비록 나라가 위태로워져도 아들을 얻어 왕위를 계승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만월부인이 임신해 아들을 낳았지만 혜공왕은 원래 딸이었던 것을 아들로 바꾼 운명이기 때문에 여자아이 놀이를 좋아하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혜공왕이 젊은 나이에 시해되면서 경덕왕의 대는 끊기고 무열왕 계통은 왕위에서 멀어지며 신라도 약 200년에 걸쳐 쇠락기로 접어든다.

10. 사망

재위 24년째인 765년 6월 승하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모지사(毛祗寺) 서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덕왕릉 문서 참조.


[1] 김순정의 딸로 삼모부인(三毛夫人)이라고도 불린다. 사량부인의 어머니는 유명한 미녀 수로부인으로 추정된다.[2] 梁은 통일신라까지 '돌'이라고도 읽는 관습이 있었으며 毛도 '털'로 훈독할 수 있어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돌', '사덜' 정도의 이름을 지녔을 것이라 추정된다.[3] 743년(경덕왕 2년)에 맞이한 후비(차비)다.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 경수왕후(景垂王后), 경수태후, 경목왕후(景穆王后)라고도 불린다.[4]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상용화했다.[5] 물론 백제 시절부터 지명이었던 아산시 탕정이나 임실군처럼 고구려, 백제, 초기 신라 때 사용한 지명을 안 건드리고 그대로 놔둔 경우도 아주 드물지만 있기는 있다.[6] 즉, 중앙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지명을 통일함으로서 호족들에게 질서를 강요하고 행정을 통일하는 작업의 일환이다.[7] 또한 지금까지 전해진 관직명만 살펴봐도 삼국시대고려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발해도 나라가 한 번 망하고 새로 건국했다는 점에서 고려와 비슷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이로 인해 고려와 비슷한 관제가 상당히 많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계국이라고 주장한 두 나라는 당제를 기반으로 삼게 되었다.[8] 이에 따르면 기존 신라의 전통도 말살된 것이 된다.[9] 고마나라(固麻那羅)->웅진, 소부리->사비, 벌나->평양, 국내, 요동, 한성(황해도 재령군), 국원 등의 수많은 한자식 명칭.[10] 각종 축성 사업 및 관문 신설, 대규모 쇠뇌수 부대 창설 및 배치 등[11]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발간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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