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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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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
2.1. 게이의 은어2.2. 게이 포르노2.3. 게이 공간
2.3.1. 게이 공간의 성립조건2.3.2. 게이 공간의 역사
2.3.2.1. 90년대 이전의 게이 공간2.3.2.2. 90년대 이후의 게이 공간
2.4. 게이 디바
2.4.1. 대표적인 게이디바들
2.4.1.1. 한국2.4.1.2. 영미권2.4.1.3. 일본2.4.1.4. 중화권
2.5. 게이 앤썸
2.5.1. 나라별 게이앤썸
2.5.1.1. 한국2.5.1.2. 영미권2.5.1.3. 일본2.5.1.4. 중국2.5.1.5. 그 외

1. 개요

게이의 문화를 정리한 문서.

2. 내용

2.1. 게이의 은어

2.2. 게이 포르노

2.3. 게이 공간

게이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들에 대하여 다룬다. 서울 종로 3가 일대와 이태원 일대가 대표적이다. 그 외 부산 범일동, 대구 동대구역 일대, 대전 대흥동 일대, 광주 대인동 일대 등이 있다. 각 지역의 특징 및 업소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게이바 문서를 참조하자.
  • 게이바: 게이들이 모이는 술집이라고 보면 된다. 말 그대로 게이들이 모이는 '바'이다.[1]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사실 한국 게이들은 "게이바"라고 잘 말하지 않고 그냥 술집이라고 한다. 굳이 나눌 필요가 있을 때나 업체에서 광고할 때는 술집 유형에 따라 달리 부른다.
    • 소주바, 소주방: 소주와 그에 걸맞는 안주가 나오는 술집. 그냥 평범한 의미로의 술집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 원샷바: 칵테일이나 와인 같은 양주를 주로 마시는 술집. 일반적인 의미의 "칵테일바/와인바"라고 보면 된다. 원샷바라는 이름은 양주나 와인을 병이 아닌 잔술로도 판다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일종의 고유명사화되어 잔술은 안 팔거나 칵테일만 파는 곳, 그냥 소주를 주로 파는 곳(…) 등 다양한 경우가 있다.
    • 가라오케: 술집 한쪽에 무대가 있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가격이 비싼만큼 대체로 이용 연령대가 높다.
  • 게이 클럽: 힙합, 일렉트로니카, 재즈음악 위주로 공연 및 DJing, 파티 등이 개최되는 곳으로, 일반적인 클럽의 게이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공연하는 남성 댄서를 "고고보이"라고 부른다.

다음의 업소들은 게이 전용 유흥업소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게이라고 다 이용하는 곳은 아니다. 일단 수요층이 워낙 적어 그 수가 많지도 않고, 대체로 이용 연령대가 높다. 또한 종로3가나 이태원 같은 번화한 게이공간에 이런 업소는 많지 않다(호스트바는 예외). 2-30대 젊은 게이들은 찜방과 호빠 외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업소들이다.
  • 게이 사우나(게이 찜질방): 찜방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인 찜질방과는 많이 다르다. 보통 휴게텔이라는 업종으로 영업한다.[2]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원나잇을 즐기기 위해 가는 곳이다. 그러나 수십명이 이용하는 비위생적인 환경이 문제점으로 꼽히며 각종 성병의 온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극명히 갈린다. 단, 청결성에 있어서 지저분한 가게는 3개월을 버티기 힘들정도다. 사람들 사이에 소문과 이반시티 등 커뮤니티에서 수시로 가게에 대한 평가가 있어 꾸준히 청결함을 유지하지 않으면 금방 손님이 줄어든다. 어쨌건 게이들 사이에서 평가가 나쁜 업소로 꼽힌다.
  • 게이 DVD방: 파고다 극장 같은 게이 극장의 현대화(?) 버전으로, 역시 일반적인 DVD방과는 다르다. 메인 영화를 상영하는 커다란 방에서 크루징하다가 서로 눈이 맞으면 별실로 들어가서 즐기는 방식이다. 휴게텔과 달리 씻을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대단히 불결하며, 게이들 사이에서도 이런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젊은 게이들은 아예 모른다. 중년 이상[3]이 주로 이용한다. 특히 종로 일대는 머리 허연 영감들로 가득하다.
  • 게이 호스트바(준빠, 이반빠, 아빠방): 남성들만을 받거나 여성/남성을 모두 받는 호스트바.
과거에는 성매매를 하는 술집을 의미하였으나 최근에는 많이 이미지가 개선이되어서 올초이스 등 호스트바 홍보 사이트에서 홍보를 하는 게이 호스트바도 나왔다.성매매 금지 서약서를 작성하는 등 성매매 근절 운동을 하기도 하고 호스트바 영업실장들이 유튜브 방송도 하는 등 이미지 개선에 나서고 있다.
호스트바에 경우 1종 유흥 영업허가증과 사업자등록증이 있으면 현행법상 불법이 아니다. 다만, 성매매가 있을경우 불법으로 처벌될수 있다. 단란주점 형태로 호스트바를 이용하는 경우 불법이다. 대표적으로 종로지역에서 유명한 게이 호스트바는 종로구 삼일대로 30길 21 지하1층에 있는 G2, 종로구 낙원동 121-1 번지에 있는 테라가 유명하다.

아래 업소들은 현행법상 불법의 소지가 많다. 성매매가 목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
  • 게이 마사지: 마사지를 하면서 2차 서비스도 받는 그런 곳이다. 일본 특유의 풍속업소인 우리센 비슷한 개념인데 영업은 속칭 '오피'처럼 한다. 안마시술소 문서 참조.

2.3.1. 게이 공간의 성립조건

동성애자 공동체의 성립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두 요소는 익명성과 접근성이다. 이는 동성애자들이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소수자이자, 수적으로도 적은 양적 소수자라는 측면에 기인한다. 정체성이 들어날 경우 실제로 사회적인 악조건에 처할 수 있는 만큼 익명성이 중요하고, 양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도심지에 비하여 보다 많은 인구를 필요로 하게 되는 만큼 더 큰 접근성이 요구된다. 도시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되고 높은 인구 밀도와 각종 교통 인프라로 인해 접근성이 높은 공간이 많다. 따라서 도심지 근처나 기차역, 버스터미널 인근 등 유동인구가 매우 많은 지역은 게이 공간이 형성되기 적합한 장소다.

2.3.2. 게이 공간의 역사

2.3.2.1. 90년대 이전의 게이 공간
1950년대1960년대1970년대1980년대
명동을지로→청계천 청계천→종로3가종로3가
신당동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도 게이들의 공간이 존재했다. 당시 술집이라 하면 일반 가정집에서 술을 내놓고 파는 형태가 많았는데, 알음알음 게이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술집이 몇군데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양복점을 중심으로 많이 모였다고 하는데, 과거에나 현재에나 게이들은 패션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당시의 게이 커플이 꿈꾸는 로맨스는 마카오산 양복을 맞춰 입고 시모노세키행 유람선을 타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국 게이 공간에 대해 신뢰도 높은 기록이 시작되는 것은 1950년대부터이다. 이 역시 주로 그 당시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한 것들이지만 생존해 있는 이들의 증언이고 각종 신문 기사로도 확인된 사실들이어서 신뢰도가 보장되는 편이다. 전후 복구가 시작된 서울에서 가장 세련된 동네였던 명동에 위치한 양장점들을 중심으로 게이들이 모였고 근처 백화점 옥상에 위치한 극장은 게이들이 크루징(Cruising) 장소로 애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버스터미널 화장실 역시 게이들이 크루징 장소로 애용하는 장소였다. 일부 지방도시들의 경우, 특히 기차역 부근이나 버스터미널에 게이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4] 이 당시 사람들은 “버스 터미널 3층 남자 화장실 두 번째 칸에 가면 호모가 검열삭제를 빨아준대”라거나 “OO극장 가장 뒷줄에 앉으면 호모가 검열삭제를 빨아준대” 같은 소문를 듣고 찾아갔다고 한다.

60년대 서울 도심지가 확장되자 양장점을 중심으로 한 공간은 쇠퇴하였고, 인쇄소가 몰려있는 을지로 뒷골목과 신당동으로 옮겨갔다. 을지로 인쇄거리는 시끄럽고 활기찬 장소이지만 밤에는 오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한산했으므로 게이들이 비밀스럽게 모이기에 좋았다. 이 시기부터 양장점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은 점차 보기 힘들어지고 을지로와 신당동 골목에 드문드문 위치한 술집에 모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신당동의 게이 공간은 80년대까지 지속되었지만, 을지로의 공간은 오래지 않아 청계천 변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질투>, <블루>와 같이 지금 보기엔 촌스럽지만 당시로선 꽤나 세련된 이름의 술집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70년대, 청계천 변의 게이 공간이 다시 한 번 이동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박정희 정권의 도시 계획이었다. 1960년대 말, 세운상가 건설을 비롯한 종로 개발 계획을 위해 속칭 ‘종삼’으로 불렸던 낙원동 일대 사창가를 ‘정화’하기로 하면서 이 거리가 비워졌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하나 둘 게이 술집들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종로3가 게이 공간의 시작이다.

파일:종삼.jpg
종로 3가 일대에 있었던 윤락가, '종삼'

7-80년대 종로 3가 동성애자 공간의 중심은 소위 ‘P살롱’ 혹은 ‘P극장’이라고 불렸던 <파고다 극장>이었다. 파고다 극장은 크루징을 하는 장소로 유명했는데, 상영관 뒷편에 서서 크루징 상대를 물색하다가 상대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일을 치렀다. 근처에는 <서있는 사람들>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게이바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시인 기형도는 심야에 파고다 극장에서 영화 <뽕2>를 보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퀴어적 감수성을 담고 있는 그의 몇몇 작품과 함께 이 기묘한 사망 때문에 기형도가 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 파고다 극장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많이 가는 극장이 아니어서 그 의심을 더 증폭시켰다. 물론 그의 친구들과 유가족들은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진실은 고인만이 알 것이다.

파일:파고다극장.jpg
과거 파고다 극장이 있던 건물의 모습


현재 모습

파고다 극장은 당시 게이들의 크루징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고, 혹시나 하여 이곳을 찾은 이들은 크루징으로 만난 상대와 함께 일을 치른 후 그를 따라 근처 술집으로 향하기도 했다. 당시 종로 3가의 게이 술집들은 간판도 내걸지 않고 암암리에 영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어 이런 가이드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술집 주인은 매상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술집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고, 손님들 역시 서로를 ‘가족’으로 여겼기에 의리상 다른 술집을 잘 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 가게들은 섬처럼 분리되어 존재했다. “게이 공간”이긴 하지만 “게이 공동체” 혹은 “게이 커뮤니티”라고 부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80년대까지 게이 공간의 특징을 살펴보면 극장이나 버스터미널에서의 “크루징”과 비밀스럽게 격리되어 존재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당시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그리고 당시 사회가 동성애를 어떻게 대했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80년대까지 게이들 중 스스로를 게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드물었다. 미디어는 해외토픽이나 가십거리처럼 게이와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실었고, 해외로부터 “게이”라는 정체성을 수입해오기에는 너무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였다. 당시 동성애 관련 이야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었던 미디어는 <선데이 서울>이라는 B급 잡지였는데, 본래 이 잡지는 “바람난 유부녀들”, “성관념 자유로운 요즘 여대생들” 따위의 선정적인 기사를 주로 다루는 잡지였다.

해외토픽과 단신의 형태로 서구의 퇴폐한 문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짤막하게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실었던 <선데이 서울>이 본격적으로 한국의 동성애를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후반이었다. 1985년 미국의 유명한 배우인 록 허드슨에이즈로 사망하면서 전 세계가 에이즈의 공포로 떨기 시작했고,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3S정책을 펴면서 B급 잡지로서 그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더 자극적인 소재로 눈을 돌린 것이 동성애였다.

당시 기사를 보면 “때자”와 “맞자” 같은 게이들의 은어도 소개하고 있고[5], 종로 3가에 밀집한 게이 술집들이 어떤지, 어떤 사람들이 주로 드나드는지[6], 게이들의 삶은 어떠한지 성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선정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선데이 서울은 파고다 극장을 "P극장"으로 이니셜 처리했는데, 성정체성을 의심하고 있던 퀘스쳐닝들은 그 기사를 보고 알음알음 "P극장"을 찾아 종로까지 왔으나 피카디리극장을 P극장으로 오인하고 한껏 긴장하고 상영관에 들어갔다가 아무 일 없이 영화가 끝나자 허무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선데이 서울>은 성정체성에 관한 용어도 헛갈리고 있었는데,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Mto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들을 “게이”라 칭하고, 남성 동성애자들을 “호모”라고 칭했다. “호모”들이 에이즈 전염의 주범으로 찍히자 일반 남성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이태원의 트랜스젠더 바 마담들이 “우린 호모가 아니라 게이”라고 변명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이렇다보니 성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는 이들이 제대로 된 성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리 만무했다. 동성애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이고 선정적이며 어둡게 자리 잡았고,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규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그저 '남자와 자는 사람' 정도로 여기거나 동성애자임을 거부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당시 동성애자들을 “동성애자”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면이 있다. 그들은 그저 가끔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남색가” 정도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었고 때문에 게이 공간들 역시 단발적으로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장소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2.3.2.2. 90년대 이후의 게이 공간
종로3가의 변모, 이태원의 부상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환경, 여성, 노동, 소수자 인권 등 운동권이 다양한 방향으로 분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3년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 “초동회”가 설립되었다. 초기 동성애자 인권 단체들은 “게이”와 “레즈비언”, “호모”, “트랜스젠더”와 같은 용어 정립에 가장 신경썼으나 2000년 홍석천커밍아웃 이전까지 대중을 상대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1989년 등장한 PC통신은 이들에게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게이 공간이 형성되기 위한 조건인 익명성과 접근성 모두를 가진 기술적 진보였을 뿐 아니라 동성애자들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되었다. 온라인 공간은 새로운 동성애자 공간으로 급부상했다.

1995년 하이텔에 처음 만들어진 동성애자 게시판은 적어도 같은 동성애자들이 올바른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서구의 다양한 젠더 이론들과 정체성 개념들을 전달하였고 수많은 호모포비아들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게시판에 접속한 전국의 수많은 동성애자들에게 연대의식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공동체로서의 게이 커뮤니티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PC통신 회사측에서는 동성애자 게시판을 공식 게시판으로 등록하기를 거부했으나 수많은 동성애자들과 호모포비아들이 모여 엄청난 접속자 수를 기록하는 해당 게시판을 없애지는 못했다. 그리고 결국 몇 년 뒤 공식 게시판으로 등록되기에 이른다. 이 게시판이 당시 동성애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력이었냐면, 이 게시판에서 처음으로 주최한 정모에 참가한 인원이 무려 1,000명에 이르렀다고 증언한다. 심지어는 제주도나 부산에서도 왔다고 하니, 그야말로 억눌려온 욕구가 폭발한 것이다.

이 첫 정모는 종로가 아닌 이태원동에서 이루어졌다. 각종 매스미디어로부터 종로3가의 어둡고 폐쇄적이며 퇴폐적인 이미지만을 접해온 젊은 세대는 종로3가를 거부했다. 종로를 대신하여 그들이 선택한 곳은 외국인이 많고 (당시엔 '게이바'로 불렸던) 트랜스젠더바들이 모여있는 이태원이었다. (잘못된 용어로 여러 사람 헷갈리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태원은 새로운 게이 공간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트랜스젠더 바가 많이 모여 있는 이태원 소방서 뒷골목 부근에 진짜 게이바들이 하나 둘 문을 열었는데, 그 모습이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웠던 종로 3가와는 많이 달랐다. 1층에 유리문을 달고 커다란 네온사인 간판을 건 채로 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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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소방서 뒷편에 있는 이른바 "게이힐"의 모습

1997년에는 야간정액제와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첫 동성애자 웹사이트 <엑스존>[7]이 문을 열었고, 온라인 동성애자 모임은 게이, 레즈비언, 연령별, 지역별로 분화되어갔다. 동성애자들이 그들 스스로 담론을 형성할 수 있게 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동시에 저항적인, 새로운 퀴어 문화를 창조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세대는 전처럼 숨지 않았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체화했고,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동지”를 만났으며, 인터넷을 통해 종로와 이태원 업소들의 정보를 얻어 장소로 찾아왔다. 인터넷에서는 그들의 성 뿐 아니라 정치, 연예, 사회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새로운 세대의 외면 속에 종로3가는 위기에 처했다. 이태원의 등장은 종로의 변화를 촉발했다. 종로의 업소들 역시 이태원처럼 간판을 달고 공개적으로 영업하기 시작했고, 크루징 명소였던 파고다 극장은 결국 문을 닫았다. 인터넷으로 쉽게 같은 동네에 사는 동지를 찾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 크루징 명소라는 것은 무의미해진 것이다.

종로3가 포차골목. 주말에는 이 포차들은 게이들의 차지가 된다. 이 근방에는 호프, 바, 소주방, 가라오케 등 수십여개에 이르는 게이업소들이 몰려있다.

PC통신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한국의 게이 커뮤니티를 사실상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 결정론적 관점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사회환경의 차이가 기술의 영향력도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미 1970년대 성해방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체화하여 정치 세력화한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터넷의 등장은 크루징 수단의 확대에 불과했지만, 1990년대까지도 이렇다 할 게이 커뮤니티가 부재했던 한국의 경우 인터넷이 섬으로 존재했던 동성애자들을 하나로 연결시켰다. 새로운 통신수단이 등장할 때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이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2.4. 게이 디바

의외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남가수들이 아닌 게이들(넓게는 LGBT)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얻는 여가수들을 말한다. 게이들이 유독 디바가수들을 좋아하는 현상을 두고 아예 게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여가수들을 통칭하여 이와 같이 이름을 붙이게 된 것. 댄스디바들이 주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 쪽 계열 가수만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아델, 머라이어 캐리, 이소라같이 정말 순수한 의미의 디바들도 게이 디바로 알려져 있다.

실상 팝계에서는 여가수 = 게이팬 겨냥 가수라는 법칙이 그냥 공식화 되어 있다. 특히 70~80년대 이후 게이팬층이 여가수들에게 매우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관계자들이 대놓고 게이팬들을 겨냥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더 이상 디바가수들이 게이팬을 무시하기는 매우 어려워졌다.[8] 아예 자신의 음반 프로모션을 현지 게이 클럽에서 행하는 경우도 흔하고, LGBT 퍼레이드에 헤드라이너로 참여해 이들을 독려하는 가수들도 많다.

이 때문에 북미권에서는 '여가수를 좋아하는 남자는 게이이다' 라는 말이 그냥 상식처럼 통하기도 한다. 사실 아예 우스개소리로 치부하기는 뭐한게, 실제 일반적인 남성들의 경우 힙합 같은 장르에 심취하고 즐기는 경우는 많아도 여가수의 노래(특히 디바가수들)를 깊이 심취해서 듣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9] 특히나 해당 명제가 그냥 공식처럼 퍼지면서 일부러 게이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여가수의 노래를 멀리하는 분위기도 있을 정도.

한국에서는 아예 게이에 대한 담론 자체가 거의 드물기 때문에 여가수=게이 라는 말을 함부로 공식화하기 뭐한 측면이 있다. 특히 걸그룹의 경우 싸인회 남자팬 비율이 95%인 러블리즈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그냥 일반 남성인데도 열렬히 좋아하는 문화가 널리 퍼져있다. 애초에 한국의 아이돌 문화 자체가 일본의 아이돌 문화에서 상당부분 유래한 측면도 많고, 특히 아시아권의 아이돌들이 유사 연애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면서 남성이 여가수를 좋아하는 것을 게이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가수가 아닌 배우, 유명인사 등으로 범위를 넓어지면 이들을 통칭해 '게이 아이콘' 이라고 명명짓기도 한다. 특히 배우들의 경우, 주로 고전영화 여주인공들이 게이 아이콘으로 자주 언급된다. 대표적인 예로 주디 갈런드, 베티 데이비스 같은 인물들이 있다.

2.4.1. 대표적인 게이디바들

가수 / 게이디바가 된 이유
2.4.1.1. 한국
다른 국가들과 달리 보수적인 한국정서로 인해 가수들이 직접 적극적인 LGBT 활동에 나서는 경우는 없다. 때문에 한국의 경우는 평범한 이성애자나 게이들이나 좋아하는 가수들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경우들도 많고, 게이들 중 일부는 '한국에는 게이디바라 부를 만한 가수는 없다'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나마 엄정화 정도가 여가수들 중에서는 드물게 퍼포먼스에 드랙퀸이나 Gay Lether[10] 컨셉을 시도했던 게 가장 적극적인 활동일 정도. 다만 게이 프렌들리한 미국 팝시장의 영향으로 그들의 컨셉을 벤치마킹한 한국의 가수들이 게이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때문인지 굳이 게이 프렌들리한 노선을 보이지 않음에도 게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여가수들이 상당히 많다.

2010년대 이후, 한류의 영향으로 아시아 게이씬은 사실상 K-POP이 평정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아예 클럽에서 밤새도록 K-POP 릴레이를 달리는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 케이팝이 나오면 무대위로 올라가 한국의 걸그룹들의 안무를 따라하는 풍경이 쉽게 눈에 띈다.
  • 김추자 / 70년대 대표 섹시스타. 당시 여가수로서는 드물게 소울풀하면서 육감적인 목소리로 큰 인기를 누렸다. '님은 먼곳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노래들이 유명하다. 게이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시작한 90년대에 들어 뒤늦게 게이들 사이에서 재평가를 받고 호응을 얻었다.
  • 김완선 / 80년대를 주름잡았던 댄스디바. 마돈나를 연상케하는 퍼포먼스와 댄스음악으로 게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 민해경 / 김완선, 나미 등과 함께 80년대 인기 가수. 신나는 댄스음악으로 호응이 좋았다.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섹스어필로 유명했던 가수. 그 시절의 청하, 현아 같은 포지션이었다고.
  • 나미 / '빙글빙글', '인디언 인형처럼' 같은 노래들이 당시 게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 엄정화 / 90년대 게이들 사이에서 제일 인기 많았던 가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가사와 근육질 남성댄서, 화려한 퍼포먼스 등으로 인기. 본인도 자신이 게이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밝힌 바 있으며, 실제로 7집 앨범의 쇼케이스를 이태원 게이클럽에서 진행한 바 있다.[11]
  • 이정현 / 데뷔하자마자 게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가수. 똘끼넘치는 퍼포먼스와 컨셉으로 호응을 얻었다. 요즘으로 치면 거의 레이디 가가 수준. 00년대 초반 '반' 이나 '달아달아' 같은 노래들은 아예 응원법까지 외워서 클럽에서 추던 이들도 많았고, 그 시절 게이 모임에서는 엄정화와 함께 장기자랑 무대를 양분했었다.
  • 이효리 / 00년대~10년대 게이계를 주름잡았던 가수. 팝가수 느낌이 물씬나는 섹시컨셉과 노래, 퍼포먼스로 게이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다. 특히 유고걸, 배드걸 같은 노래들이 큰 인기. 다만 이효리 본인이 예전처럼 화려한 컨셉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고, 음악스타일이 바뀐 뒤로는 인기가 많이 주춤해졌다.
  • 보아 / 이효리와 더불어 당시 인기가 좋았던 가수. 주로 10대~20대 초중반의 어린 게이들이 많이 좋아했다. 팬층이 어린만큼 순수 화력자체는 이효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이효리가 당시 제니퍼 로페즈 정도의 포지션이라면 보아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정도의 입지. 언급된 다른 가수들과 다르게 보이시하고 파워풀한 이미지가 강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어필해 큰 인기를 누렸다.
  • 이소라 / 특유의 서정적이고 센치한 노랫말이 인기요인. 드라마퀸 스러운 우울한 감성이 크게 어필하는 요소로 보인다. 우스개소리로 "이소라 콘서트는 게이 퍼레이드 빼면 한국에서 가장 큰 게이행사" 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정도.
  • 김윤아 / 이소라와 같은 이유로 인기가 좋았다. 다만 자우림으로서 인기가 있었다기 보다는 솔로로서 인기가 더 많았다.
  • 티아라 / 이상할 정도로 게이들이 좋아하는 걸그룹으로 유명. 사실 가수 자체보다는 노래에 열광하는 이들이 대다수이긴 한데, 그걸 감안해도 정말 특이할 정도로 게이들한테 인기가 많다.[12] 왕따사건으로 한참 추락했을때 조차 '애들은 싫은데 노래는 정말 좋다' 며 말하던 게이들이 많았다. 우스개소리로 '티아라는 게이들이 먹여살린다' 는 말을 농담삼아 하는 게이들도 있었을 정도. 특히 섹시러브 - 넘버나인 - 슈가프리는 아직도 게이클럽에서 주야장천 틀어주는 걸그룹 노래로 손꼽힌다.
2.4.1.2. 영미권
앞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팝 여가수들은 게이 프렌들리 노선을 취하기 때문에 엄격히 나눠 구분하는 것은 사실 크게 의미는 없다. 다만 여기 적힌 가수들은 그 중에서도 '특출나게' 게이들한테 인기가 좋은 가수들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보기 쉬울 것으로 보인다. 마돈나바브라 스트라이샌드처럼 아예 단순히 인기 가수를 넘어 하나의 게이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경우들이 게이 디바로 평가된다. 특히 마돈나셰어의 경우는 해당 가수들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게이라고 여길 정도로 게이 디바 이미지가 강하다.
  • 주디 갈런드 / <오즈의 마법사>(1939)에 나온 아역배우 출신으로 많이 유명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뮤지컬계에서 크게 활약한 당대의 게이 디바였다. 박복한 인생여정 때문에 게이들의 공감을 많이 얻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삶에서 세 명의 게이에게 뒷통수를 세게 맞았는데, 게이인 아버지가 어머니를 속이고 결혼한 뒤 어린 남자애들만 몰래 건드리고 돌아다니다가 발각돼 가족들이 함께 동네 망신을 당한 적이 있으며, 네 번째 남편이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갈런드와 결혼했다가 갈런드의 딸 라이자 미넬리의 남편 즉 갈런드의 사위와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를 벌였다.
  • 글로리아 게이너 / 디스코의 여왕으로 그녀의 노래 'I will survive' 는 대표적인 게이 앤썸 송으로 통한다. 거의 미국게이들의 애국가로 통할 정도(...). 위키피디아 영문판에 아예 해당 노래 문서에 'LGBT Community' 라는 문단이 따로 개설되어 있었을 정도. 링크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마돈나 등장 이전까지 최고의 게이 아이콘. 게이들에게 인기를 많이 얻었던 뮤지컬에서 활약했으며 중장년 유대인 팬층까지 겹쳐 미국에선 여전히 두터운 팬덤을 가지고 있다. 영화 쪽에서 명성을 쌓았던 셰어도 비슷한 케이스.
  • 마돈나 / 말이 필요없는 역사상 최고의 게이퀸. 일명 게이들의 어머니. 일렉트로닉 위주의 클럽댄스곡과 당당한 섹스어필, 근육질 남성댄서들과 남성을 주무르는 듯한 여왕이미지 등등 현재 게이 디바의 이미지는 모두 이 사람이 만들어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스개소리로 마돈나의 콘서트 투어는 전 세계적 규모의 게이 축제라는 말도 있을 정도. 마돈나 본인도 양성애자임을 공공연히 밝히기도 하였다. 영미권에서는 셰어와 함께 대표적인 게이디바로 꼽힌다.
  • 머라이어 캐리 / 게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고, 그녀 자체의 공주병, 디바병 기질도 게이들에게 인기를 끄는 요소중 하나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마찬가지로, 게이들의 영향력을 이용하려고 들지 않고 항상 LGBTQ커뮤니티에 지지를 보낸다. GLAAD 미디어 어워드에서 Ally award상을 수상한 수상자이기도 하다.
  • 셰어 / 마돈나와 함께 게이 아이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디바 가수. 마돈나가 게이들의 어머니라면 셰어는 게이들의 할머니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게이들에게 명성이 높다. 특유의 과장된 의상과 메이크업, 그 당시 가수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파격적인 무대 등으로 인기가 좋다. 그녀의 노래 'Believe' 는 90년대 말~00년대 초까지 게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게다가 셰어의 아들 채즈 보노트랜스남성이기 때문에 그녀 스스로도 성소수자에 아주 호의적이라서 더 큰 호응을 받는 것도 있다.
  • 카일리 미노그 / 호주와 영국을 대표하는 게이들의 여신. 80년대 댄스튠부터 현재 트렌드에 맞는 일렉트로닉 뮤직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노래들이 포진해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그녀의 앨범 11번째 정규앨범 'Aphrodite' 는 사랑의 여신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응원하는 메세지를 비롯해 뮤직비디오에서 LGBT 단체들과의 콜라보 등 친LGBT 행보 덕에 게이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수록곡 'Get Outta My Way' 는 게이 포르노 배우들이 직접 헌정 영상으로 찍은 뮤직비디오가 있다.
  • 자넷 잭슨 / 비욘세 이전 독보적인 흑인 게이 아이콘. 여성, 유색 인종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섹시 댄스디바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녀의 앨범 'Velvet Rope' 의 수록곡인 'Free Xone' 은 게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바치는 헌사로 게이 청취자들 사이에서 크게 호평받았다. 또한 앨범 수록곡인 'Together Again' 의 수익 일부를 미국에이즈협회에 기부하였으며, 이러한 공로들이 인정받아 그 해 흑인동성애자 협회에서 시상하는 상을 받기도 하였다.
  • 브리트니 스피어스 / 데뷔 초엔 모두에게 사랑받는 청순 아이돌이었으나 마돈나가 연상되는 섹시 컨셉으로 전향한 후 게이들이 열광하는 가수가 되었다. 2000년대 가장 센세이셔널했던 일렉 댄스 가수라는 점이 어필 요소인듯 하다. 특히 'I'm Slave 4 U' 는 대표적인 게이 클럽 레파토리.
  •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비슷한 시기에 역시 게이 및 다른 성소수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그녀가 전형적인 디바 스타일의 여가수라서 그런 점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녀에 대한 게이들의 지지는 'Beautiful'이라는 그녀 인생 최고의 역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곡의 존재 덕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 뮤직비디오에 성소수자들의 모습이 묘사되기도 하고,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다는 메시지가 성소수자들의 마음을 울린 까닭.
  • 비욘세 / 화려한 퍼포먼스 실력으로 게이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특히 흑인들에겐 신과 같은 존재이며, 마돈나와 함께 LGBT 공로상을 수상한 여가수이다.
  • 레이디 가가 / 현 세대 영미권 게이들의 여왕. 인종이나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모두가 아름답다는 내용의 'Born This Way'는 대놓고 LGBT를 겨냥했음에도 가수 자체의 화제성이 엄청났기 때문에 전 세계적인 히트곡이자 게이 앤썸이 되었다. 춤과 노래 역시 수준급인 진짜 '디바'라고 할 수 있다.
2.4.1.3. 일본
주로 쇼와돌이나 헤이세이 디바(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 코다 쿠미 등등)들이 인기가 좋다. 그렇지만 나카지마 미유키마츠토야 유미, 우타다 히카루 처럼 다소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노래를 하는 가수들의 인기도 매우 좋은 편. 최근 걸그룹 중에서는 하로프로 아이돌들이 인기가 많다. 춤이 쉽고 따라부르기 쉬운데다 노래의 뽕끼 때문에 분위기 띄우기 좋다고.
  • 나카지마 미유키 / 서정적인 게이디바 라인의 정석. 과거 일본의 싸이월드 격이었던 mixi의 게이팬 커뮤니티 규모가 여가수들 중 순위권을 다툴 정도로 높았다.
  • 마츠토야 유미 / 나카지마 미유키와 더불어 서정적인 디바 라인의 가수. 시대를 주름잡았던 여가수 답게 게이팬들의 지지도 엄청나게 높다. 정작 성격자체는 독살스럽고 못되기로 유명한데, 오히려 그 점이 걸크러쉬라고 좋아하는 게이들이 많다.
  • 마츠다 세이코 / 쇼와돌의 대표격인 가수. 소녀풍 컨셉과 노래로 내면에 소녀감성이 가득한 게이들의 취향에 맞아 떨어진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
  • 나카모리 아키나 / 마츠다 세이코와 양대산맥. 강렬한 카리스마와 무대매너, 사랑의 허무함이 담긴 노래 가사등으로 인기가 많았다. 특히 비극적이라고 봐도 좋은 인생사가 큰 인기요인.
  • 모닝구 무스메, 큐트, 베리즈코보하로프로 계열 아이돌들 / 그 자체로 하나의 밈으로 통할 정도로 유명하다. 워낙 방송에서 드랙퀸이나 게이 속성의 패널들이 하로프로 아이돌들을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고. 최근에는 과거의 향수와 특유의 뽕짝스러운 곡조로 인기가 좋다. 정작 하로프로 계열 아이돌들은 그사세가 된 일본 걸그룹 시장에서도 아예 대중들의 관심에서 떨어질 정도로 접근성이 좋지 못함에도 불구, 잘 알려지지 않은 걸그룹들 노래까지 섭렵한 게이들이 많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최근 모닝구무스메 멤버들 중에는 후쿠무라 미즈키, 이시다 아유미가 가장 인기가 많다.
  • 아무로 나미에 / 일본에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게이퀸. 뽕짝 유로비트로 활동하던 90년대부터 세련된 팝스타일로 변화한 00년대 이후까지 즐기기 좋은 노래들이 포진해 있다는 점이 매력포인트. 당당하고 세련된 음악과 퍼포먼스로 게이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아예 '아무로 나이트' 라는 자체적인 행사를 만들어 놀 정도. 본인도 그 점을 알고 개인적으로 행사를 방문하는 걸로 유명. 사실 아시아 뿐만 아니라 범아시아적으로 게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아 대만이나 홍콩 같은 곳에서도 게이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
  • 코다 쿠미 / 파격적인 섹시컨셉과 퍼포먼스, 당당하고 거침 없는 성격 등으로 인기가 좋다. 이쪽도 아무로 나미에처럼 '코다 나이트' 라는 행사를 여는 게이바들이 많다. 심지어 대중적인 인기가 한 참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관련 행사가 이어질 정도로 인기가 뜨겁다.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 와 함께 3대 댄스 디바로 통한다.
  • 나카시마 미카 /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눈의 꽃 원곡자. 중성적인 보컬과 서정적인 노래로 인기를 얻었다. 하마사키 아유미와 더불어 2018년도 게이 퍼레이드의 헤드라이너로 참여하였다.
  • 시마타니 히토미 / 대중적인 인기는 없는데 이상하게 게이들만 열광하는 가수로 유명하다. '황갈색 머리 여자'나 '페르세우스' 같은 노래들이 인기가 좋다고 한다. 본인도 그 때문인지 거의 게이관련 행사 위주로 라이브를 많이 한다고.
2.4.1.4. 중화권
친 LGBT 국가로 유명한 대만의 영향으로 의외로 대부분 LGBT 친화적인 노선을 타고 있다. 대만 연에계가 거의 사장되다 시피한 관계로 대부분 좀 뜬다 싶으면 중국본토로 넘어가거나 활동범위를 중화권 전역으로 넓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대만 연예인들의 영향 때문인지 중화권 연예계는 대체로 LGBT 프렌들리한 분위기가 다분하다. 특히 디바 가수들은 어지간한 팝가수들 뺨칠 정도로 LGBT 활동을 적극 독려한다. 실제로 이들은 직접 대만의 동성결혼을 독려하는 캠페인도 벌이며, 대만의 동성결혼 합법화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 왕정문 / 90년대 중화권을 주름잡았던 홍콩 여가수. 국내에는 중경삼림의 주인공으로 알려져있고, 파이널 판타지 8의 주제가인 Eyes on Me를 부른 가수로 유명하다.
  • 아메이 / 중화권의 대표 팝 디바이자 Pride of Taiwan으로 통한다. 채의림 못지 않게 이 쪽도 꽤나 유명한 게이 디바로 손꼽힌다. 뛰어난 가창력과 싱어송라이팅 실력으로 게이외에도 대중적인 평가가 아주 좋다. 한국으로 치면 이소라김윤아 정도 포지션. 본인도 LGBT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라, 콘서트에서 관객들과 함께 무지개 깃발을 들고 흔들며 라이브를 한 적도 있고 LGBT 관련 제품을 출시한 적이 있다.콘서트에서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라이브하는 영상

2.5. 게이 앤썸

게이사회에서 지지를 받는 노래. 주로 디바 가수들의 노래인 경우가 많으며, 자신에게 당당하고 틀에 박힌 사랑을 초월하며, 범세계적인 인류애를 지향하자는 내용의 메세지를 담은 노래인 경우가 많다.
노래제목 - 가수 / 게이 앤썸이 된 이유

2.5.1. 나라별 게이앤썸

2.5.1.1. 한국
  • 페스티발 - 엄정화 / 어려운 일이 있어도 늘 웃으며 즐겁게 살자는 가사가 게이 앤썸의 주제의식과 통하는 면이 많다고. 00년대 중반까지 대표적인 게이 앤썸 곡이었다.
  • 보름달 - 선미 / 관능적인 노래가사와 섹시한 퍼포먼스, 컨셉 등이 인기
  • 빨개요 - 현아 / 2014년 게이클럽을 평정했던 노래. 도발적인 가사와 슬러티하면서 화끈한 퍼포먼스로 인기가 많았다. 현아 노래들 중 유독 이 노래만 꾸준히 스테디 셀러처럼 쭉 나오고 있다.
  • 거의 모든 타이틀곡 - 티아라 / 데뷔곡부터 거의 모든 곡이 히트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 다시 만난 세계 - 소녀시대 / 퀴어축제 공식 Anthem으로 지정된 노래. 가사가 성소수자들이 나아갈 방향을 말해주는 듯한 느낌이라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소녀시대의 멤버 티파니 영 역시 직접 축하 영상에 나와 게이 앤썸으로 지정해줘서 고맙다고 영상을 남기기도 했다.
2.5.1.2. 영미권
  • Born this way - 레이디 가가 / 대놓고 노래가사에 게이, 레즈비언에 대한 언급을 한다. 노래 가사 역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자' 는 내용으로 LGBT권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 Firework - 케이티 페리
  • Raise your glass - 핑크
  • True Colors - 신디 로퍼 / 자신의 진정한 색을 보여주라는 내용. 신디 로퍼 본인도 친구를 AIDS로 잃은 경험이 있으며, 이후 LGBT 노숙 청소년들을 위한 단체인 True Colors Fund를 창립하기도 한다.
  • Hero - 머라이어 캐리
  • All the Lovers - 카일리 미노그 / 호주의 LGBT 단체와 콜라보해 뮤직비디오를 찍은 걸로 화제가 되었다.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은 모두 LGBT 단체의 회원들로 내용 역시 이성애, 동성애를 가리지 않은 다양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 Slow Disco - 세인트 빈센트
  • You Need To Calm Down - 테일러 스위프트 / 이 곡은 (특히 2절) 대놓고 호모포비아들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내용의 곡이다. 가사와 뮤직비디오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 Beautiful -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 이 곡을 작곡한 린다 페리는 실제 동성애자이다.[13] 뮤직비디오에서는 게이, 트랜스젠더, 왕따 등 사회의 소수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 Vogue - 마돈나 / 게이 클럽에서 유행하던 보깅을 소재로 한 곡이며, 마돈나의 이미지와 더불어 대표적인 게이 앤썸으로 불리고 있다.
2.5.1.3. 일본
2.5.1.4. 중국
  • Dr.Jolin - 채의림 / 남녀가 바뀐 상황을 재치있게 표현한 뮤직비디오가 화제를 모았다. 여성스러운 퍼포먼스와 복장으로 유명한 게이 안무가 '야니스 마샬' 이 직접 출연해 아이를 임신한 남성 역할을 연기하였다.
  • 迷幻(환상) - 채의림 / 주제 자체가 LGBT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사랑은 어떤 형태든 같다' 라는 주제를 담은 곡으로 대만 게이씬의 대표적인 게이 앤썸 송이 되었다. 뮤직비디오도 유니콘 분장을 한 여성들의 동성키스씬, 무지개 무늬 등 다양한 퀴어 코드가 들어가 있다.
2.5.1.5. 그 외


[1] 엉덩국의 만화나 다른 매체들에서 나오는 모습은 당연히 왜곡된 것이다. 엉덩국 만화의 홍콩행 게이바는 서양의 SM바에 가까우며 거긴 동성애자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DS(지배/피지배 또는 가학/피학)가 기준일 뿐이다. 사실 SM바와도 거리가 멀다. 도미넌트서브미시브가 오는 서양의 바에 채찍을 들고 우스꽝스런 복장을 한 에세머는 없다.[2] 일반적인 남성 전용 휴게텔과 달리 간판에 '남성 전용'이 아니라 '회원제' 휴게텔이라고 써 있다.[3] 아예 기혼자 바이섹슈얼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4]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이 모여있는 동대구 일대가 대표적인 예다. 한편, 부산의 경우 서울처럼 도심지인 서면과 멀지 않은 범일동에 게이 공간이 형성되었고, 광주 역시 충장로와 금남로에서 멀지 않은 대인동에 게이 공간이 위치해 있다. 대전은 대전역 부근에서부터 도심지인 은행동과 가까운 대전 대흥동 일대에 산발적으로 형성되어 있다.[5] 현재도 "때짜", "마짜"라는 은어로 남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게이/은어 참조[6] 물론 실명을 밝히지는 않고, 중견 정치인 K씨, 유명 배우 P씨라는 식이었다[7] 2000년에 청보위로부터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 정통윤이 해당 사유로 유해매체 표시를 하라고 요구하자 운영자가 이에 항의하며 사이트를 닫았다. 이후 운영자는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2002년에 기각되었다. 2003년에 헌법소원, 2004년 대법원까지 상고했으나 2007년 최종 기각되고 말았다.[8] 이처럼 LGBT 계층을 겨냥한 상업적 전략을 통틀어 'LGBT Marketing' 이라고 이름붙이기도 한다. 서구권에서는 워낙에 LGBT 부류들이 하나의 정치세력화 되어있기 때문에 이들의 파워를 무시하기 힘든 수준에 올랐다.[9] 한국으로 치면 남자들이 SG워너비버즈같은 가수들에 심취해 있는 것과 같은 케이스[10] 가죽옷을 입은 게이 페티쉬.[11] 한국에서 정말 보기 드문 본디지 풍 게이컨셉으로 화제가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엔 선정성 논란으로 비난하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12] 인상적인 포인트 안무나 다양한 콘셉트를 과감히 시도하는 점 때문인 듯하다.[13] 헤이예이예예예로 유명한 원곡 <What'up>을 부른 4 Non Blondes의 보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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