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07:55:07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1950년 월드컵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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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 1946년 월드컵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
[1]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에서도 일부 경기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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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IV Campeonato Mundial de Futebol
1950 FIFA World Cup Brazil™
파일:1950 FIFA World Cup Brazil Poster.png
대회 기간 1950년 6월 24일 ~ 1950년 7월 16일
개최국
[[브라질|]][[틀:국기|]][[틀:국기|]]
유치 확정일 1946년 7월 26일[1]
공인구 듀플로 T (Duplo T)
본선 진출팀 13개팀
대회 결과
우승 우루과이
(두 번째 우승)
파일:Uruguay AUF 1950.png
준우승 브라질 파일:Brazil CBF 1950.png
3위 스웨덴 파일:Sweden SvFF 1938.png
4위 스페인 파일:Spain RFEF 1950.png
수상
득점왕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파일:브라질 국기.svg
]] 아데미르
이전·이후 대회
1938년
프랑스
1950년
브라질
1954년
스위스

1. 개요2. 내용3. 개최지 선정4. 지역 예선5. 대회 포스터·마스코트·공인구
5.1. 포스터
6. 경기장7. 참가팀 정보8. 대회 진행
8.1. 조별 리그8.2. 결선 리그8.3. 우승
9. 최종 순위10. 수상11. 기록실12. 뒷이야기13. 대회 이후

[clearfix]

1. 개요

1950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4회 FIFA 월드컵. 역대 월드컵 중 2번째로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개최된 대회이자 1930년 월드컵에 이어 두 번째로 남반구에서 개최된 대회이기도 하다. 한편, 이때 거의 동시에 지구 반대편인 한반도에선 1953년까지 3년 간에 걸친 전쟁이 발발했다.[2]

2. 내용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와 같이 이 본선 월드컵도 16개국 진출 체제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며, 개최국 브라질과 지난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를 제외한 14개국에 들어가기 위해 지역 예선에 참가한 국가는 총 31개였다.[3] 전범국인 독일, 일본은 참여 자격이 박탈되었고 지역예선 도중에, 또는 기껏 16개국 본선에 진출 확정하고도 2차 세계대전 복구 문제로 기권한 국가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 대회에서는 경기 수익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한경기라도 더 많이 치르게 하려는 생각으로 모든 경기방식을 8강전 없이 토너먼트 대신 리그제로 치렀다. 때문에 상당히 기형적인 조 편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월드컵 역사상 등번호가 처음으로 선을 보였는데 지금처럼 선수에게 매겨진 것이 아니라 포지션에 따라 매겨진 것이었다.[4]

4강 결선 리그에서 우루과이가 개최국이자 난적 브라질을 꺾고 2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우루과이는 역대 최소 경기 우승을 기록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후유증에 각 나라들의 사정상 워낙 기권국들도 많아서 13개국 진출로 본선을 치러야 했다. 우루과이는 13강 조별 리그 4조에서 볼리비아[5] 하나만 8:0으로 이기고 4강 결승리그에 진출했다. 그리고 거기서 브라질과 스웨덴을 이기고 총합 4전 3승 1무라는 매우 적은 경기로 우승했다. 이는 전 대회 챔피언 이탈리아와 경기 수로는 타이기록이자 최소 승점 우승 기록이다.

현대와 같은 월드컵은 이 대회부터 시작했다. 판을 좀 키우려 했다가 엎어진 게 벌써 2번이다. 2회 대회는 승부조작, 3회 대회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두 번의 대회를 건너뛰고 4회 대회부터 다시 제대로 월드컵 판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2회 대회의 승부조작으로 인해 월드컵 자체가 없어질 뻔했으며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건너뛴 것만 봐도 월드컵 최악의 악재가 두 대회 연달아 터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3. 개최지 선정

원래 개최되었어야 할 1942년 월드컵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되고 전쟁기간 동안 FIFA는 존폐의 위기를 겪는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FIFA 또한 월드컵의 재개를 모색했지만 유럽 국가들 상당수가 전후 복구로 문제를 겪고 있던 상황에 개최 신청은커녕 참가 신청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따라서 1946년 월드컵은 자연스럽게 취소, 월드컵 개최는 1950년으로 미뤄진다. 브라질에서 1950년 월드컵이 개최되는 것에 브라질과 앙숙관계였던 아르헨티나 이외에는 크게 반대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굳이 독일에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부 중립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전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월드컵을 개최할 여력이 없었기도 했다. 그래서 브라질이 단독으로 입후보를 했고, 개최권을 따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에 개최권이 간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 월드컵을 보이콧하게 된다.

원래는 1년 앞당겨 1949년에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이 월드컵의 개최를 확정지은 1946년의 룩셈부르크 총회에서 결국 4년 주기대로 1950년으로 확정했다.

4. 지역 예선

이 대회 지역 예선의 자세한 내용은 밑의 문서 참고.
그리고 아무래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첫 월드컵이라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이탈리아UEFA 유로 2012에서의 독일[10]2010 월드컵그리스[11]마냥 특정팀에서 과반수의 선수들을 차출해서 국가 대표를 꾸렸었다. 하지만, 당시 세리에 A를 5연패하고 그 국대 멤버 중 과반수가 있던 토리노 FC리스본에서 SL 벤피카와 친선 경기를 치르고 오는 도중에 비행기 사고를 당해 선수 18명과 스탭 5명이 사망했다. 당시 토리노의 베스트 11이 전부 사망했으며, 리스본에서 경기를 치렀던 선수들 중 후보 선수 루이지 줄리아노만 여권 문제로 리스본에 묶여 있다가 화를 면했다. 나머지 4경기에 토리노는 유스들을 콜업해서 경기를 치렀고 결국은 우승했다.[12] 결국 이탈리아는 치명적인 전력의 구멍을 만회하지 못하고 스웨덴에 밀려 대회 7위로 결선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8강전이 만약 있었으면 이탈리아도 8강 진출이 가능했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 시스템은 조 1위만 결선 리그권을 줬기 때문에 조 2위, 대회 7위를 하고도 이탈리아는 사상 최초로 디펜딩 챔피언이 1 라운드에서 탈락하는 기록을 남겼다.[13]
  • 아르헨티나 역시 이 대회에 불참했다. 그 이유는 1938년 월드컵 개최의 실패에 이어, 당시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의 라이벌 의식이 최악으로 악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불에 기름을 붓듯 FIFA는 아르헨티나의 개최로 약속되어 있던 월드컵 개최 권한을 브라질에게 줬다. 1945년의 친선 경기에서 브라질의 젊은 공격수 아데미르가 아르헨티나의 수비수 호세 바타글리에로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6대2로 승리를 챙겨간 것에 앙갚음하듯 아르헨티나는 이듬해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최종전에서 초유의 난투극을 벌인 끝에 노르베르토 멘데스의 2골에 힘입어 2대0으로 이겼다.[14] 그 이후로 10년간 두 팀은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한 팀이 참가하면 다른 한 팀은 빠졌음은 물론 친선 경기조차 잡지 않았다. 한편 아르헨티나의 기권으로 지역 예선에서 아르헨티나와 같은 조에 있던 볼리비아칠레는 자기들끼리 두 번 시합을 치르기는 했지만 아르헨티나의 기권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두 팀 모두 자동으로 브라질에 가는데 성공하였다.
  • 남미의 또다른 조에서도 에콰도르페루가 기권하는 바람에 우루과이파라과이가 자동 진출했다. 결과적으로 세 팀의 불참으로 인해 남미는 지역예선 없이 바로 본선 직행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 이전의 월드컵에서 강호로 군림했던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는 나라가 공산화된 관계로 아예 출전을 거부했다. 같은 이유로 이제 막 국가의 틀을 잡았던 소련 또한 지역예선에 불참했다. 새로 성립된 동유럽의 공산진영에서 이 월드컵에 진출한 국가는 유고슬라비아 단 한 팀 뿐이었다.
  • FIFA영국을 월드컵에 끌어들이기 위해 영국 홈네이션 4개국[15]끼리만 예선을 치른 후 그 중 상위 2개국을 월드컵에 진출시켜준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가 1위, 스코틀랜드가 2위로 진출권을 따냈다. 자세한 내용은 지역 예선 1조 항목 참조.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예선전 전부터 잉글랜드에게 밀리면 월드컵에 나가지 않겠다고 공언했었고 결국 잉글랜드가 진짜로 조 1위가 되자 월드컵 진출권을 따 놓고도 기권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대우받은 잉글랜드는 정작 본선에서 미국에게 참패하는 등 대회 8등으로 결선 리그도 못 가는 개망신을 당한다.
  • 이 월드컵의 미국 대표팀 진출사를 보면 월드컵에 참가했던 선수들 중 A매치 출전 횟수가 10회를 넘는 선수도 없을 정도로 얼굴이 자주 바뀌었고 상당수가 축구선수 외에도 투잡을 뛰었으며[16] 인접국 출신 불체자들에게 미국 국적을 주는 조건으로 뛰게 하기까지 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강 잉글랜드를 1대0으로 떡실신시켰다. 잉글랜드는 당시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고, 처음으로 출전하는 월드컵에서 다른 팀들을 상대로 얼마나 크게 이길까에만 관심이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미국의 언론사들은 미국이 잉글랜드를 1대0으로 이겼다는 현지 특파원의 전보를 믿지 못해 잉글랜드가 미국을 10대0으로 제압했다는 오보를 냈다가 나중에 정정 기사를 쓰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월드컵 역사에서 손꼽히는 이변의 경기 중 하나이고 흔히 나오는 월드컵의 이변 시리즈 중 가장 처음을 장식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것은 잉글랜드에게 있어서 3년 후에 일어날 세기의 경기[18]라는 진짜 재앙의 서곡에 불과했다.
    그러나 경기 전날 브라질 관중들이 잉글랜드가 탈락해야지 브라질의 우승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밤새 잉글랜드 선수들이 잠자던 호텔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등 방해를 일삼았다. 그리고 브라질은 마라카낭의 비극이라는 사건으로 그 댓가를 치렀다.[19]
  • 이 당시 아일랜드는 두 개의 대표팀을 꾸려 출전했다. 원래 아일랜드는 1880년 설립된 아일랜드 축구 협회(IFA)가 아일랜드 전 지역의 축구를 총괄하고 아일랜드 대표팀 선수들을 소집하고 있었는데 1921년 남아일랜드 26개 주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하면서 아일랜드 자유국 축구협회(FAI)를 출범시켰다. 새로 출범한 FAI는 FIFA에 가입한 후 아일랜드 전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아일랜드 자유국의 주장과 뜻을 같이하여 아일랜드 자유국령 남아일랜드 뿐만 아니라 영국령 북아일랜드에서도 선수들을 선발하였는데 기존의 IFA 역시 마찬가지여서 아일랜드에는 2개의 축구협회가 병립하는 꼴이 되었다. 이로 인해 2개의 대표팀이 서로 동일한 선수를 선발하는 경우도 많았고 실제로 이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4명의 선수[20]IFA 대표팀FAI 대표팀 양쪽에서 경기를 했다.[21] 하지만 서로 '아일랜드' 전체의 대표권를 주장하는 IFA와 FAI 간에 갈등이 고조되자 보다 못한 FIFA가 개입해 양 축구협회의 선수 선발 권한을 아일랜드-북아일랜드 경계를 따라 분리시켰다. 1946년 IFA가 FIFA에 재가입한 직후 FAI는 FIFA의 결정을 수용하여 북아일랜드에서의 선수 선발을 중단했는데 아직 수용하지 않은 IFA가 이미 FAI 대표팀으로 출전한 상기한 4명의 선수를 같은 지역예선에 출전시키는 일이 터지자 FAI가 FIFA에 항의하였고 결국 IFA 역시 남아일랜드에서의 선수 선발을 중단했다. 여기에 1953년 FIFA가 IFA와 FAI 모두 '아일랜드'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FAI 아일랜드 대표팀은 아일랜드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IFA 아일랜드 대표팀은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완전히 분리되었다.[22]
  • 튀르키예스코틀랜드, 인도는 지역 예선을 통과했지만 조 추첨 전에 기권하였다. 그래서 FIFA는 이 팀들의 자리를 지역 예선에서 탈락한 포르투갈프랑스, 아일랜드로 채워 넣으려 했지만 포르투갈은 거부하고 프랑스아일랜드는 처음에는 수용하였으나 나중에 기권하였다. 특히 아시아의 유일한 출전국이었던 인도가 이 대회에서 기권한 이유는 맨발로 축구를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23] 만약 이 대회에 출전했더라면 인도는 38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이후로 월드컵에 두번째로 진출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고 아시아 두번째 월드컵 진출 타이틀은 다음 대회 1954스위스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한 대한민국이 가져간다. 게다가, 인도는 이후로 월드컵 무대에 단 한번도 진출하지 못해서 월드컵과 인연이 멀어진 것은 물론 현재 인도 축구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보이기 때문에 인도 입장에서는 땅을 칠 노릇. 어쨌든 이렇게 해서 13강 조별 리그 4조의 경기는 딱 우루과이 vs. 볼리비아가 유일한 경기가 되고 말았다. 우루과이는 볼리비아를 8-0으로 난도질해 버렸다.
  • 튀르키예는 예선에서 꼴랑 시리아를 상대로 7-0으로 이기고[24] 진출했기에 인도 못지않은 거저먹기였지만 6.25 전쟁이 한창인 한국에 파병하고 소련이 쳐들어올까봐 노심초사하던 터라[25] 기권하게 된 거였다. 여담인데 시리아가 왜 유럽 예선에 포함되어있냐고 궁금하겠지만 1940~50년 유로바스켓이라든지 월드컵 예선에서도 시리아레바논, 이란, 이집트같은 나라들이 유럽 예선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다만 대부분이 내부 사정으로 한번에 나온 게 별로 없거나 기권했을뿐...
  •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에서 잘려나갔던 자르 지방(Saar protectorate)도 대표팀을 꾸려서 월드컵에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월드컵 개막 2주일 전에서야 FIFA에서 가입 승인을 하는 바람에 1950년 월드컵에선 문턱조차 밟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1954 월드컵 예선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갔고 1956년 정식으로 독일으로 편입되어 사라졌다.
  • 한국은 혼란스러운 국내정세 때문에 이 월드컵에는 참가할 여유조차 없었다. 개막전 휘슬이 불린 1950년 6월 24일은 한국시각으로 6월 25일 새벽, 즉 브라질 월드컵 개막전이 열릴 때 지구 반대편에선 북한군의 탱크가 38선을 뭉개며 6.25 전쟁이 시작되었을 정도로 나라가 개판이였다. 그 후 한국의 첫 본선 월드컵 진출은 4년 후 스위스 월드컵[26]때 이루어지게 된다.

5. 대회 포스터·마스코트·공인구

5.1. 포스터

파일:/image/etimesi/2010/06/17/1_04_Copy(320).jpg
축구공을 차는 축구 선수의 발을 형상화했는데, 축구 양말에 세계 각국의 국기를 그려 넣었다. 역시 이 당시의 월드컵도 초창기 월드컵이라서 마스코트는 없었고 공인구는 듀플로 T라는 이름의 인정구가 존재했다.

6. 경기장

월드컵이 열린 도시와 구장은 다음과 같다.

7. 참가팀 정보

8. 대회 진행

8.1. 조별 리그[13강]

진하게 표시된 국가는 결선 리그 진출국. 순서는 조별 리그 순위. 사선은 기권국.
조별 리그
1조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스위스 멕시코
2조 스페인 잉글랜드 칠레 미국
3조 스웨덴 이탈리아 파라과이 인도
4조 우루과이 볼리비아 프랑스[30]

자세한 내용은 밑의 문서 참고.

8.2. 결선 리그[4강]

결선 리그
결승 우루과이 브라질 스웨덴 스페인
진하게 표시된 국가 우루과이가 우승국. 순서는 결선 리그의 순서를 따랐다.
순위 국가 경기 득실 승점 비고
1 우루과이 3 2 1 0 7 5 +2 5 우승
2 브라질 3 2 0 1 14 4 +10 4 준우승
3 스웨덴 3 1 0 2 6 11 -5 2 3위
4 스페인 3 0 1 2 4 11 -7 1 4위

자세한 내용은 밑의 문서 참고.

8.3. 우승

1950 FIFA 월드컵 우승
파일: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000000 우루과이}}}]]
두 번째 우승
★★

9. 최종 순위

순위 국가 경기 득실 승점 비고
파일:트위터 금메달 이모지.svg
[[우루과이|]][[틀:국기|]][[틀:국기|]] 우루과이
4 3 1 0 15 5 +10 7 우승
파일:트위터 은메달 이모지.svg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브라질 제4공화국|]] 브라질
6 4 1 1 22 6 +16 9 준우승
파일:트위터 동메달 이모지.svg
[[스웨덴|]][[틀:국기|]][[틀:국기|]] 스웨덴
5 2 1 2 15 11 +4 5 3위
4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프랑코 정권|]] 스페인
6 3 1 2 10 12 -2 7 4위
5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틀:국기|]][[틀:국기|]] 유고슬라비아
3 2 0 1 7 3 +4 4 조별리그
6
[[스위스|]][[틀:국기|]][[틀:국기|]] 스위스
3 1 1 1 4 4 -2 3
7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이탈리아
2 1 0 1 4 3 +1 2
8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잉글랜드
3 1 0 2 2 2 0 2
9
[[칠레|]][[틀:국기|]][[틀:국기|]] 칠레
3 1 0 2 5 6 -1 2 조별리그
10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미국|]] 미국
3 1 0 2 4 8 -4 2
11
[[파라과이|]][[틀:국기|]][[틀:국기|]] 파라과이
2 0 1 1 2 4 -2 1
12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멕시코|]] 멕시코
3 0 0 3 2 10 -8 0
13
[[볼리비아|]][[틀:국기|]][[틀:국기|]] 볼리비아
1 0 0 1 0 8 -8 0

10. 수상

11. 기록실

22경기에서 88골이 터지면서 경기당 평균 4골을 기록했다.

12. 뒷이야기

  • 이 월드컵 개막전과 한국의 6.25 전쟁은 동시에 일어났다. 이 월드컵 개막전은 개최국인 브라질멕시코의 경기로, 현지 시각으로 1950년 6월 24일 15시에 시작되었다. 브라질의 표준시는 한국과는 정확히 12시간 차이지만, 당시 한국에서 서머타임을 적용하였으므로 한국 시각으로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였다. 개막전이 시작한 시점 지구 반대편에서는 조선인민군 전차가 삼팔선을 돌파했다.
  • 이 월드컵에서 브라질 정부는 브라질의 축구 열기를 상징하기 위한 메인 스타디움으로 리우데자네이루에 마라카낭 경기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마라카낭은 세계 최대 수용 인원을 자랑하던 경기장으로 입석까지 합하면 무려 2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경기장이었다.[33] 문제는 이 초대형 경기장의 첫 삽을 너무 늦게 뜨는 바람에[34] 이것을 제 시간 내에 짓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 원래 같았으면 월드컵 기간 내에 짓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브라질 정부의 엄청난 지원과 노동자들을 밤낮없이 굴린 덕분에 그나마 월드컵 개막전을 여기에서 치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경기장까지는 아니었고, 월드컵 중에도 공사를 계속하여 결국 결승전은 완공 상태에서 치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승전에서 뜻밖의 그 참혹한 비극이 일어날 줄을 누가 알았으랴...
  • 그리고 이 월드컵이 브라질에게는 홈에서 열리는 월드컵은 시궁창 수준으로 망친다징크스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대회에서 마라카낭의 비극을 당하고 64년 뒤에 이를 극복하려고 했으나 극복하기는커녕 또다른 비극을 맞이하고 말았다.[35][36] 심지어 2014년 월드컵의 로고도 브라질 입장에선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우는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두 대회 모두 브라질을 쓰러뜨린 팀이 우승까지 차지했다.
  • 비록 브라질은 우승에 실패했으나 역설적이게도 이때의 브라질은 역대 브라질 대표팀들 중 가장 압도적인 득점력을 뽐냈다. 경기수 대비 골 기록만 보면 역대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1970년 브라질 대표팀도 능가할 정도이며, 무엇보다도 스페인이나 스웨덴을 상대로 5골차 이상의 득점을 보여주는 엄청난 화력쇼를 펼쳤으니, 2014년 브라질 월드컵과는 달리 눈앞에서 우승을 놓친 것이 천추의 한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 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우루과이는 최소경기 우승이라는 진귀한 기록이 생겼다.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페루가 연달아 기권하는 통에 되려 본선 진출국이 부족한 상황이 발생해서 지역예선 없이 본선에 올랐으며, 13강 조별리그에서도 상대는 지난 1949 브라질 코파에서 자신들에게 2:3패배를 일으키며 1949코파 4위를 기록한 볼리비아 하나뿐이었는데 그 볼리비아를 8:0으로 복수하고, 4강 결선리그에 올랐다. 거기서 스페인과 비기고 스웨덴, 브라질을 이겨 단 4경기만으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적은 경기를 치르고 우승한 기록이다. 아래의 경기 기록은 우루과이가 이 월드컵에서 치른 모든 경기들이다.
  • 이 월드컵 참가자중 마지막 생존자는 안토니오 카르바할로 2023년 5월 9일 9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예선까지 범위를 넓혀도 마르코 발로크가 2024년 9월 29일 97세로 사망하면서 월드컵 참가자, 예선 모두 세상을 떠났다.

13. 대회 이후

브라질이 뜻밖에 우승을 놓쳐버리자 브라질 축구계는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비탄에 빠지며 한바탕 거대한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마라카낭의 비극 문서를 보면 된다.

2023년 5월 9일, 멕시코 국가대표로 출전한 안토니오 카르바할이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1950년 월드컵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이 세상을 떠났다.


[1] 1942, 1946 대회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취소되었고 1946년 개최국 투표에서 브라질이 선정되었다. 다만 개최 시기는 본래 1950년이 아닌 1949년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월드컵의 4년 개최 주기를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1950년에 개최하게 되었다.[2] 6월 24일에 개최되어 1일 늦게 발발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브라질은 대한민국보다 12시간이 늦으므로 브라질에서 6월 24일은 대한민국에서 6월 25일이다.[3] 하지만 팀은 32개이다. 이는 당시 아일랜드의 정세에 의한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지역 예선 항목에 기술되어 있다.[4] 즉, 한 선수가 다른 경기에 그대로 뛰어도 포지션이 바뀌면 등번호가 바뀌는 식이었으며 선수가 바뀌어도 포지션은 같은 다른 선수가 스타팅 멤버에 오르면 등번호는 바뀐 선수가 그대로 사용하는 식이었다.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부터 선수에게 고정된 번호가 부여되었다. 현재 기준이라면 포지션별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1: 골키퍼, 2,3,4: 중앙 수비수, 5,6: 수비형 미드필더, 7,11: 윙어, 9: 최전방 공격수, 8,10: 공격형 미드필더 이런 식이다.[5] 당시 볼리비아는 지난 1949 브라질 코파에서 우루과이를 3:2로 이기며, 1949코파 4위를 기록하였고, 1950월드컵에서 우루과이는 볼리비아를 무려 8:0으로 격파하여 복수하였다.[6] 동독은 아직 FIFA에 가입 신청도 넣기 전이라 참가하지 않았다.[7] 당시 일본은 전쟁통으로 정신이 없던 대한민국에도 밀릴 정도로 실력이 떨어져서 제재 여부와 관련없이 일본의 월드컵 경기를 기대하는 축구팬들이 거의 없었지만 서독은 예나 지금이나 유럽의 전통 강호였다. 서독이 초기 월드컵에 출전했다면 월드컵 역사의 판도 또한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8] 독일이 없는 이 두 번의 월드컵에서 모두 우루과이가 우승했는데 우루과이는 이 두 번 밖에 우승을 못했다.이거 때문에라도 우루과이는 독일을 월드컵에 못나오게 해야 할 기세[9]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나라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전쟁 직전에 독일에게 흡수되었다.[10] 유로 2012의 독일의 경우 FC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들을 과반수 차출했다.[11] 2010 월드컵그리스의 경우 파나시나이코스 FC의 선수들을 과반수 차출했다.[12] 1949년에 일어난 이 사고는 사고가 일어난 장소의 이름을 따서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유명한데, 이 당시에 사망한 선수 중 가장 아까운 이로는 플레이 메이커 발렌티노 마촐라를 꼽을 수 있겠다. 60년대에 이탈리아와 유럽을 주름잡았던 '위대한 인테르(La Grande Inter)'의 주축 플레이 메이커 산드로 마촐라의 아버지이다.[13] 이 사고로 인해 이탈리아 축구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탈리아가 이를 완전히 만회하기까지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써야 했으며, 이로 인해 1군 선수를 몽땅 잃은 토리노는 리그의 주도권까지 같은 연고지를 쓰는 유벤투스 FC에게 넘겨주게 된다.[14] 이 난투극의 시작점은 전반 29분, 브라질의 공격수 자이르 다호자가 아르헨티나의 주장 호세 살로몬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이었다. 이에 격분한 아르헨티나의 홈관중들이 경기장에 난입했고 경찰이 나서서 소요를 진정시킨 후에야 다시 경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살로몬은 당시 29살이었고, 이 태클로 인해 다시는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할 수 없었으며 결국 1년 후에 은퇴하게 되었다. 비센테 데라마타시쿠가 살로몬의 부상으로 싸우다 전반 30분에 동반 퇴장을 당한 건 덤이다.[15]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16] 예를 들어 하프백 월터 바르(Walter Bahr)는 고등학교 교사, 골키퍼 프랭크 보기(Frank Borghi)는 삼촌의 장례식장에 고용된 영구차 기사. 다른 사람들도 접시닦이, 우편배달부 등등 다양한 직업이 있고 이 중 상당수는 대학생들이었다.[17] 그 잉글랜드전에서 잉글랜드를 격침시킨 이변의 중심에 선 조 게이젠스원래 아이티 사람이었다.[18] 1953년, 자신들의 홈이자 축구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유니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놈들'에게 3대6으로 패하고 멘붕에 빠진 사건이다. 이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유럽 대륙의 팀에게 처음으로 자신들의 홈에서 패한 사건이었으며 그것도 대패의 굴욕을 받았다. 이후 잉글랜드는 이 상놈들에게 복수한답시고 6개월 뒤 원정을 떠났지만 1대7로 개발렸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잉글랜드의 역대 최다 점수차 패배 기록이다. 그 팀은 바로 1950년대 초반 축구계를 평정했던 페렌츠 푸스카스매직 마자르였다.[19] 이와 유사한 사례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때에도 있었는데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인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아르헨티나를 우승시키기 위해 1950년의 잉글랜드와 비슷하게 네덜란드 선수들이 잠자던 호텔 앞에서 고의로 소음를 내게 해서 제대로 잠을 못자게 하도록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고 결국 이런 비겁한 행동을 해가며 우승을 하긴 했다.[20] 톰 아르네, 렉 라이언, 데이비드 월시, 콘 마틴[21] 지금과 달리 선수들의 막연한 국가대표팀 변경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던 시절이기도 하고, 두 대표팀이 다른 조에 편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22] 다만 FAI가 IFA로부터 분리하여 나간 형태이기 때문에 관할 지역이 북아일랜드로 축소된 후에도 IFA는 아일랜드 축구 협회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으며 분리 이전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사는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승계한다.[23] 이전까지는 맨발로 축구를 했으며 이 때문에 1948년 올림픽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보고서에서는 인도브라질까지 갈 돈이 없어서 기권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BBC 스포츠 참고자료[24] 그 1경기도 안방경기였다.[25] 당시 튀르키예는 총비상이었다. 소련과의 국경에 20만 가까운 병력을 배치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26] 16개국 본선 진출[27] 당시 개막전과 결승 최종전을 치렸던 그 경기장이며 우루과이의 센테나리오 경기장, 아르헨티나엘 모누멘탈과 함께 남미 대륙을 대표하는 경기장이다. 2014년 월드컵에서도 메인 스타디움으로 쓰였다[28] 미나스 제라이스 주 소재. 세체 지 세템브루는 브라질의 독립 기념일인 9월 7일을 의미한다. 현재의 이름은 인디펜덴시아[13강] [30] 그런데 RSSSF에서는 4조에 튀르키예스코틀랜드가 배정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4강] [32] 라리가의 스페인 국적 선수 중에서 득점 1위에게 주는 '트로페오 텔모 사라'의 모델이 바로 이 사람이다. 라리가 통산 득점 3위(277골)에 올라있는 아틀레틱 빌바오의 레전드.[33] 현재는 입석이 금지되고 개보수를 거치면서 78,838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수용 인원이 이 정도면 충분히 대형 경기장이다.[34] 1948년 8월 2일에 떴다. 월드컵 개막에는 2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35] 다만, 1950년 월드컵에서는 모두들 브라질이 우승할 것이라고 여겼던 반면에, 2014년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이 절대적인 강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스쿼드 차이가 있다고 한들 웬만한 축구에서 7:1이란 스코어는 강팀과 강팀 사이에서 쉽게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인한 브라질 국민의 충격이 마라카낭의 비극보다 컸다고 보기는 힘들다. 브라질 국민들이 당연시 여기던 1950년 월드컵 우승을 놓친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1950년 월드컵은 출전 선수들 거의 모두가 대표팀에서 은퇴하고, 유니폼조차 아예 완전히 바꿔버렸을 정도로 브라질의 충격이 너무나 엄청났다. 전술했듯 경기장에서는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자살해버린 사람이 두 명, 심장마비로 죽은 이가 두 명이 나왔을 정도였다.[36] 포포투에서는 '미네이랑은 슬픈 코미디지만, 마라카낭에서의 비극은 아니다' 라는 기사에서 마라카낭과 달리 미네이랑에서는 폭동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디펜던트에서도 어째서 화요일의 상처가 1950년대의 마라카낭보다 깊지 않았나라는 기사에서 브라질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울지는 않았다며 마라카낭보다 큰 충격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브라질이 위대한 축구를 보여주던 1950년대와 다르게 현재의 브라질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라질 사람들은 그들이 언더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충격적인 패배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충격의 수준으로 보면 4강전에서 7점을 실점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 만큼,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인한 충격도 어마무시하긴 했다. 둘 다 세계를 뒤집어 엎어버렸을 정도이니...[37] 차이점이라면 1974년과 1978년에는 각 조 1위 끼리 결승전을 치렀지만, 1950년에는 조별리그로 우승팀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