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23:47:25

성전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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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기사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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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전사들
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alomonici
파일:성전기사단_깃발.png
파일:성전기사단_문장.png
깃발 문장
<colbgcolor=#000000,#000000><colcolor=#ff0000,#ff0000> 이명 <colbgcolor=#000000,#000000><colcolor=#ff0000,#ff0000> 라틴어 Ordo militum Templariorum
영어 Knights Templar
한국어 성전 기사단
표어 라틴어 {{{#ff0000,#ff0000 'Non nobis, Domine, non nobis, sed Nomini tuo da gloriam'}}}
영어 Not to us lord, not to us, but to your name give the glory
한국어 저희에게가 아니라, 주님, 저희에게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약력 설립 1119년경
해체 1312년 3월 22일
설립자 위그 드 파앵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그랜드 마스터 초대 위그 드 파앵
말대 자크 드 몰레
규모 약 15,000~20,000명
종교 가톨릭
체제 기사수도회
소재지
[[예루살렘 왕국|]][[틀:국기|]][[틀:국기|]] 예루살렘 성전산
수호성인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언어별 명칭
{{{#000,#white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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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000000> 라틴어 <colbgcolor=white,#1f2023> 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alomonici
Ordo militum Templariorum
영어 Poor Fellow-Soldiers of Christ and of the Temple of Solomon
Knights Templar
프랑스어 Pauvres Chevaliers du Christ et du Temple de Salomon
Ordre du Temple
스페인어 Orden de los Pobres Compañeros de Cristo del Templo de Salomón
Caballeros templarios
이탈리아어 Poveri Commilitoni di Cristo e del Tempio di Salomone
Cavalieri templari
포르투갈어 Ordem dos Pobres Cavaleiros de Cristo e do Templo de Salomão
Cavaleiros Templários
독일어 Arme Ritterschaft Christi und des salomonischen Tempels zu Jerusalem
Templerorden
네덜란드어 Orde van de Arme Ridders van Christus en de Tempel van Salomo
Tempelorde
폴란드어 Zakon Ubogich Rycerzy Chrystusa i Świątyni Salomona
Templariusze
러시아어 Бе́дные во́ины Христа́ и Хра́ма Соломо́на
Тамплие́ры
아랍어 فرسان الهيكل، أو فرسان المعبد الملقبون بـالجنود الفقراء
فرسان الهيكل
일본어 キリストとソロモン神殿の貧しき戦友たち
テンプル騎士団
중국어 基督和所罗门圣殿的贫苦骑士团
圣殿骑士团 / 聖殿騎士團
}}}}}}}}}}}} ||

1. 개요2. 상징3. 특징4. 역사
4.1. 탄생4.2. 성지에서의 모습4.3. 거대 금융기관이 된 기사단4.4. 몰락4.5. 몰락 이후4.6. 후예
5. 직급 및 계급 체계6. 역대 그랜드 마스터7. 대중 매체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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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Batalla_de_las_Navas_de_Tolosa.jpg
성전 기사단의 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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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0000,#ff0000> Crucem sanctam subiit(그분은 십자가를 지고)[1]
<rowcolor=#ff0000,#ff0000> Da pacem Domine(주님, 평화를 주소서)
}}}}}}}}} ||
Non nobis, Domine, non nobis, sed Nomini tuo da gloriam[2]
주님, 저희에게가 아니라, 저희에게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 성전 기사단의 표어
가톨릭기사수도회. 십자군 전쟁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것과 더불어 중세를 풍미한 유력 기사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상징

파일:성전기사단_십자가.png 파일:성전기사단_문장.png
<rowcolor=#ff0000,#ff0000> ▲ 크로스 파테 ▲ 문장
상징은 흰색 바탕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 여러 십자가 중 잉글랜드의 상징이기도 한 성 조지의 십자가를 쓴다. 이 십자가는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라는 색상을 제외하고는 형태가 다양했는데, 성전 기사단은 이중 크로스 파테(Cross pattée)라고 불리는 끝이 굵은 형태를 주로 사용했다.

성전 기사단은 다양한 문장들을 사용해 왔으나 이중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바로 2명의 기사가 한 마리의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문장으로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추구하는 성전 기사단의 기사들을 의미한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이미지에 해당하며 실제로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집필한 규율에 따라 기사 1명당 최대 말 3마리를 보유했고 2명 이상의 기사들이 1마리의 말을 공유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문장 주변에는 라틴어로 SIGILLUM MILITUM XPISTI(그리스도의 군사들의 인장)가 쓰여 있다.

3. 특징

한국어로는 성전 기사단[3], 성당 기사단, 템플 기사단, 신전 기사단, 성전 수도회, 청빈 기사단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통용된다. 영어 계열에서 잘 나오는 'Templar'도 이들을 말하거나 그걸 본뜬 것이다. 한자를 많이 쓰던 1960년대 이전 출판물에서는 수도자+군인이라는 이들의 정체성 때문에 이들을 승병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청렴한 기사'라는 이미지를 내세웠으며[4]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 1마리에 기사 둘이 타는 상징도 우리는 말 하나를 기사 둘이서 같이 탈 정도로 가난하다고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동물학대 물론 실제로 이렇게 타지는 않았고, 저 로고 덕택에 남색의 억울한 이미지가 덧칠되기도 했다. 거기다 십자군 전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중근동 우트르메르에서 입지가 중요해진 뒤로는 가난하기는커녕 많은 기부금에 더해 입회한 기사들의 유산[5]을 상속하여 부유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거대 금융자본집단으로 성장했다.

구호기사단과 달리 프리메이슨과 함께 음모론단골로 등장하는 떡밥이다. 물론 절대 다수는 거짓이거나 날조되었다. 대표적으로 다빈치 코드에서도 떡밥으로 활용되었다. 푸코의 진자는 성전 기사단 음모론을 한 번 더 비틀어서 만든 걸작이다. 특히 <푸코의 진자>는 성전기사단의 역사로 논문을 쓰던 주인공 까소봉의 입을 빌려 성전기사단의 역사적 사실과 후세에 덧붙여진 이야기를 구분하여 잘 설명하기 때문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봄 직하다.[6]

역사상 최고의 기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윌리엄 마셜이 자신이 모시던 주군 청년왕 헨리가 사망한 후 방랑생활을 할 때 이곳에 몸담은 적이 있다.

특이하게도 성전 기사단에 오래 몸담은 기사는 당시 평균 수명인 40세[7]보다 더 장수해 60대까지, 길게는 70대까지 살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들이 하느님의 가호를 받아 장수할 수 있었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성전 기사단원에게 규칙적이고 건강한 식단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부유층은 기름진 고기 중심의 불규칙적인 식생활을 즐겼지만[8] 성전 기사단에게는 과일, 채소, 콩, 치즈, 생선, 올리브유가 제공되었으며, 음료로 포도주[9]가 배급되었다. 이런 건강한 식단을 규칙적으로 먹은 탓에 전장에서 죽지 않으면 상당히 오래 살았다고 한다. 또 진짜 수도원수도자들은 지나치게 검소하게 먹지만 이들은 군인이기도 하니 열량을 챙길 수밖에 없어 결과적으로 건강식이 된 것이다.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은 덤. 물론 기사답게 몸을 단련한 것도 있다. 다만 당시 유럽은 귀족이 곧 기사인지라, 귀족도 몸을 단련했으니 성전 기사단만의 특징은 아니다. 또 건강 목적 이상의 혹독한 신체단련은 오히려 기대수명에 악영향을 준다. 결국 식단에서 차이가 생긴 거다.

4. 역사

파일:Knights_Templar.jpg

4.1. 탄생

파일:Baldwin_II_ceeding_the_Temple_of_Salomon_to_Hugues_de_Payens_and_Gaudefroy_de_Saint-Homer.jpg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로부터 알 아크사 모스크 (전 솔로몬 성전)를 하사받는 초대 그랜드 마스터 위그 드 파앵

1차 십자군 전쟁의 성공으로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인의 손아귀에 들어왔으나 서남아시아 내 그리스도 신자 병력은 충분한 건 아니었고, 주변엔 적들이 철철 넘치는지라 성지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오가는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1119년 말엽 프랑스 귀족 위그 드 파앵의 주도로 뜻을 함께 하는 8명이 모여 구호기사단과 같은 형식으로 9인 기사단을 조직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2세는 자신의 궁전이 기거한 예루살렘 성전의 언덕에 기사단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 터가 옛날 솔로몬 성전(Temple)이 있었던 자리였기 때문에 기사단의 이름을 성전기사단이라고 짓게 되었다. 최초 9명으로 시작된 기사단이니만큼 초기에는 가난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주재 라틴 총대주교의 축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아직 수도회로써 인가된 상황도 아니었기에 이들의 활동은 불안불안했다.

이 불안한 상황을 좋은 쪽으로 해결해 준 사람은 바로 시토회의 창립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였다. 훗날 2차 십자군을 창설할 때 큰 역할을 하기도 하는 그는, 우트르메르의 기사 수도회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1129년, 그의 수도회와 함께 교황을 설득하여 성전 기사단을 공식 수도회로 인준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그들이 교회법에 적법한 방식으로 기부, 모병, 영지 관리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0년 뒤인 1139년에는 인노첸시오 2세의 칙령으로 성지에서 활동하는 기사 수도회들에 세속법의 의무를 대폭 면제해주는 특혜가 내려져, 그들이 성지로 향하는 동안 국경과 관세, 세속법에 구애받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4.2. 성지에서의 모습

파일:터키 바그라스2.jpg
1153년 안티오크의 북쪽 관문인 누르 산맥의 아마누스 고개를 방어하기 위해 템플기사단이 건립한 바그라스 성채. 구호기사단에 밀리긴 하지만 템플기사단 역시 축성술이 뛰어났다.

세가 불어난 기사단은 우트르메르 각지에 영토를 두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단원의 숫자는 가장 많았을 때도 1만 명 안팎이었으므로[10] 이들은 각지의 요새를 바탕으로 활동하다가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나 영주들이 요청할 때 규합되어 전투를 벌였다.

넓은 영토를 적은 병력으로 지켜야 하기에 항상 부족한 병력 수급 상황, 그리고 수도회로써 창설된 기사단의 특성상 평민이나 하층민도 성전 기사단원이 될 수 있었다. 물론 평민 기사(혹은 하사관)라는 계급이 따로 있었지만, 이들도 기병으로 복무하였고, 각 함대나 지역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데다, 이들을 위한 고위 칭호가 따로 있었던 만큼 큰 차별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 기사단은 부족한 인원의 보충을 위하여 이교도들도 용병 병력으로 사용하였다. 많은 사료들에서 성전 기사단이 전투나 방어전에서 투르코폴레스 용병을 고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들은 구호기사단과 라이벌 각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안티오크 공국의 경우에는 두 기사 수도회가 내전의 양측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안티오크의 노르만 영주들은 대대로 성전 기사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안티오크 시내의 일부 지역과, 아르메니아 왕국, 동로마 제국과의 국경인 바그라스를 성전 기사단에게 양도하기도 하는 등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반대로 구호 기사단은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들과 연대하여 이들이 안티오키아 내에서 가지고 있는 영유권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결국 계승 문제로 내전을 벌이던 안티오키아 공국 내에서 각각 친 아르메니아파, 반 아르메니아파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 것. 자세한 사항은 안티오키아 공국 문서 참조.

킹덤 오브 헤븐 등의 매체에 나온 광신도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집단이었는데,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무슬림 순례객들도 보호해줬고[11] 무슬림 용병이나 보조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4.3. 거대 금융기관이 된 기사단

1128년에 교황에게 정식으로 인가받은 기사단은 많은 입단자들과 후원자들을 바탕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으며, 2차 십자군 원정이 끝날 때를 즈음하여 프랑스 내 광활한 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조직 확대 과정에서 입단자들의 재산을 맡아 이를 바탕으로 금융업을 벌이면서 엄청난 양의 재정을 확보했고, 순례자들의 예금을 맡아 두는, 현대로 치면 다국적 은행 같은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렇게 막대한 부를 축적한 기사단은 유럽중동 각지에 광활한 영지와 독자적인 함대까지 만들었고 정부에 자금을 빌려줄 정도로 위세를 높였다. 최전성기에는 키프로스 섬 전체를 소유했다고 하며, 파리에 있는 지부는 프랑스 왕국의 비공식 재무성이라는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4.4. 몰락

십자군 전쟁이 살라흐 앗 딘의 지도 아래 이슬람군의 우세로 기울면서 성전기사단은 존립 근거가 희박해졌다.[12] 아크레 함락 이후 취임한 총장 자크 드 몰레는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기사단의 개혁을 주장하며 외교와 무역을 통해 기사단 본부인 키프로스의 무역을 강화시키고,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동맹 구상에 참여하는 등 기사단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비록 군사동맹은 1302년 루아드 공성전의 패배로 기사단이 근동 본토의 거점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사실상 실패로 끝났으나, 자크 드 몰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의 재력과 외교 수완을 발휘해 여전히 대규모 십자군의 필요성을 설파하였다.

이때 13세기 말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전쟁 등으로 인해 막대한 돈을 쓰고 있었는데, 돈 나올 구석이 없던 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돈놀이나 하며 기사단들 사이에서도 고립된 성전기사단을 털자는 것이었다.
  • 근현대처럼 세금수취체계가 발달하지 않았던 이 시대에는 효과적인 세금 수취 자체가 극히 어려웠기에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국가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해결책은 대외원정을 통한 전리품등의 형태로 재정을 충당하는 것이지만, 유럽 내에서 이게 가능하던 시절은 중세 초기에 끝나버렸고, 따라서 어지간한 군주들로써는 이런 수단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13] 따라서 서유럽 군주들의 재정 패턴은 기본적으로 일단 돈을 쓰고, 모자라면 은행가들에게 빌리든지 조세수취권을 팔아치우든지 해서 땜빵하고, 그러다 국가 재정에 땜질도 불가능할 수준으로 빵꾸가 날 수준이 되면 그동안 강화된 왕권을 이용하여 만만한 놈을 조져서 털든지, 나 빚 못 갚는데 니가 어쩔 거냐, 왕 배 한번 째볼 거냐 식으로 해결하는 식으로 재정난을 해결했다.
  • 결국 이 시대에 정부(왕)을 상대로 돈놀이를 한다는 건 현대 국가의 국채를 사는 것 같은 안정적인 투자처가 아니라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위험한 사업이었다. 왕을 상대로 돈놀이를 하려면 일단 빌려주다가 재정 파탄도가 올라가면 다른 금융업자에게 폭탄을 돌리고 발을 뺀다거나, 왕이 '다른 데 빚을 째고 말지 얘네 빚을 째면 뒤탈이 염려된다'고 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다거나, 정 뭐하면 왕의 권력으로 조져지기 전에 일정한 수준에서 빚을 탕감해주는등의 요령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전기사단의 경우 독자적인 집단으로서 성전 노선을 타던 다른 기사단들과 달리 여전히 대규모 십자군 원정에 의한 성지 탈환을 지향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외교나 무역 등에 의한 재원 확보를 중심으로 기사단을 꾸리다 보니 축재된 재산들이 눈에 잘 띄게 되었으며, 이것이 화가 되어 프랑스 지부를 노린 필리프 4세의 음모에 걸려들고 만다.

필리프 4세는 확실하게 이들을 작살내기 위해서 치밀한 계획 하에 행동했다. 우선 그는 구호기사단과의 합병 문제를 논의하고, 프랑스에 돌던 기사단 관련 유언비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프랑스에 방문한 총장 자크 드 몰레를 거짓말로 안심시켜 푸아티에에 묶어 놓았다. 이후, 아비뇽에 유수 중이던 꼭두각시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이용해, 성전기사단에게 남색, 악마 숭배 같은 반그리스도 행위에 대한 죄를 물어 프랑스 지부 단원들을 기습적으로 모조리 잡아들인 뒤[14] 이단이라는 누명을 씌웠다. 이 체포와 즉결 처형을 비롯한 모든 것이 시작된 그날이 바로 저 유명한 13일의 금요일이었다.

결국 기사단원들은 고문 끝에 모두 입회식에서 십자가를 짓밟고 모욕했으며, 바포메트를 숭배했다는 자백을 하게 된다. 물론 재판이 열리자 이들 전원은 그 자백을 부인하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그래서 재판이 꽤나 길어졌다. 그러나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인 교황은 그저 왕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니, 결국 1311년~1312년에 개최된 공의회에서 교황은 성전기사단의 해체를 결정했다.

사실 교황은 성전기사단이 약간 의심스러운 구석은 있었을지라도, 날조되고 누명씌워진 악마숭배 같은 말도 안되는 혐의에서는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청 자체 조사를 통한 시농 양피지 문서[15] 등을 통해 성전기사단에 교회 사면령을 결정했으나 이는 왕의 압력으로 인해 공표가 늦어졌고, 철저히 묻혔다.

결국 성전기사단은 악마숭배자 단체로 몰려 강제로 해산당했다. 재판 중에 대부분의 프랑스 지부 기사단원들이 시농에서 고문을 견디지 못해 죽고, 자크 드 몰레와 프랑스 지부의 핵심 간부 3명만이 살아남아 사형 판결을 받고 화형당한다. 이후, 국왕 디니스 1세가 직접 나서서 기사단을 보호하고 새 조직으로 개편한 포르투갈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 존재하던 수백 개의 성전기사단 지부들 또한 그 뒤를 따라 각국의 군주들에 의해 해체되어 사라진다. 단, 이들은 당연히 프랑스의 정세와는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형식상의 재판을 받은 뒤 방면되거나, 다른 기사단으로 적을 옮기거나, 연금을 받고 노후를 보내는 등 비교적 평온한 최후를 맞았다.

필리프 4세가 갑자기 성전기사단을 잡아들인 이유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이후 수없이 많은 추측을 낳았는데, 현재 일반적인 평가로는 재정 궁핍에 시달리던 필리프 4세가 최대 채권자였던 성전기사단의 채무를 없애고,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필리프 4세는 프랑스 내의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여 거두기도 했고 내지 못하는 유대인은 추방하기까지 했다.

다만 오늘날의 연구에 따르면 그렇게 몰수된 많은 재산들이 상당 부분 구호기사단과 같은 다른 조직에도 흘러들었다는 점을 들어 정치적인 목적이 더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요컨데 국민 국가 관점에서 보나 왕권 강화 관점에서 보나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 군사력, 재력, 종교적 권위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데다가 국제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하고 있는 성전기사단은 언젠가는 반드시 숙청해야 할 대상이었다.

게다가 당대 총장 자크 드 몰레는 전세가 기울어진 당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규모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프랑스 왕의 교황청에 대한 간섭에 사사건건 방해가 되던 강경파였고, 거기에 그런 구상을 어느 정도 실현할 만한 외교적, 경제적 역량을 가진 위험인물이었다. 결국 필리프 4세의 입장에서 성전기사단은 단순히 돈 많고 만만한 빚쟁이가 아닌, 교황권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잡고 프랑스 왕국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반드시 쳐내야 할 장애물이었고, 이것이 단순히 프랑스 지부의 영향력을 척결하는 것이 아닌, 성전기사단이라는 집단 그 자체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결정으로 연결된 것이다.

4.5. 몰락 이후

최후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던 마지막 기사단장이었던 자크 드 몰레가 결국 사형이 확정되자 "프랑스 왕과 교황이 1년 안에 주님 면전으로 끌려나와 자기 앞에서 죄를 고백하게 될 것이다!", 즉, 왕과 교황이 1년 안에 죽을 거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필리프 4세와 클레멘스 5세 모두 1년도 안 되어서 죽었다. 이외에도 자크 드 몰레가 필리프 4세의 세 아들들(루이, 필리프, 샤를)에게도 저주를 퍼부었다는 말도 있는데 이것에 대한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성전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이었던 자크 드 몰레가 내린 저주 에피소드는 실제로 존재했던 에피소드 + 후대의 구전 창작으로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에게 행해졌던 부정행위에 맞서, 한때는 위대했던 이 영웅들의 혐의를 풀어주는 것 같은 전설들이 존재하는데, 무죄를 주장하여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한 무리의 성전기사들이 당시 성전기사단의 유죄를 적극 주장했던 법률가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16]를 보고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를 퍼부었다고 하는데, 정확히 8일후에 노가레가 죽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자크 드 몰레는 화염에 휩싸이면서 "만일 성전기사단이 결백하다면 교황은 40일 만에, 왕은 1년 안에 자신들이 저지른 죄과를 이행하기 위해 하느님의 법정으로 불려가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17] 아마 이 내용이 후대에 조금 더 살이 붙어서 오늘 날 전해지는 화형의 저주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일이 있은 후, 정확하게 꼭두각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는 33일 만에, 필리프는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필리프 사후, 그의 세 아들들이 모두 왕좌에 올랐는데, 필리프 사망 약 14년 만에 이 세 아들들마저 모두 사망해, 카페 왕조 직계 혈통의 300년 역사와 그에 걸친 통치가 막을 내렸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있으며, '그가 처형(그러니까 화형) 중에서 두려워하는 내색 없이, 하느님께서 복수를 해주실 것'이라고 말했다는 목격이 존재한다.(An eyewitness to the execution stated that Molay had shown no sign of fear and had told those present that God would avenge their deaths)'[18]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필리프 4세의 세 아들들의 자손들은 모두 요절하거나 대가 끊겨 결국 모두 멸족했다.[19] 필리프 4세가 죽고 세 아들들과 손자가 차례차례 뒤를 이었는데 모두 아들 없이 죽어 카페 왕조가 무너지고 만다.
  • 장남 루이 10세(완고왕): 필리프 4세의 뒤를 이었으며 아들 장 1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딸 이 있었으나 살리카법 확대 해석으로 즉위하지 못했다.[20] 하지만 잔은 오래 살아 나바라 왕국의 여왕으로 즉위하여 후손을 남겼다.
  • 차남 필리프 5세(장신왕): 조카 장 1세의 뒤를 이었으나, 외아들 필리프가 1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다만 딸 4명은 모두 오래 살아서 시집갔고 그 중 이사벨은 후손도 남겼다.
  • 삼남 샤를 4세(미남왕): 형 필리프 5세의 뒤를 이었으나, 외아들 샤를이 태어나자마자 죽었고[21] 딸 3명도 모두 요절하거나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 손자 장 1세(유복자왕): 루이 10세의 유복자로 아버지 루이 10세가 죽기 전에 이미 뱃속에서 왕위 계승자로 결정났었다. 따라서 태어나자마자 왕에 즉위했지만 갓난아기가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삼촌 필리프(필리프 5세)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생후 5일만에 사망했다.[22]

마지막 왕이었던 샤를 4세마저 죽자 필리프 4세의 혈족 중에서 3명이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 필리프 드 발루아: 필리프 4세의 동생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이자 필리프 4세의 조카.
  •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 필리프 4세의 차녀이자 샤를 4세의 누나 이자벨의 아들로 필리프 4세의 외손자.
  • 나바라 왕 펠리페 3세: 필리프 4세의 동생 루이 데브뢰의 아들로 필리프 4세의 조카인 동시에 루이 10세의 사위.[23] 필리프 4세의 조카인 동시에 손녀 사위가 된다.
결국 필리프 드 발루아가 왕위 계승을 해서 필리프 6세가 되어 발루아 왕조를 세웠으나, 이 문제는 에드워드 3세의 반발을 사서 백년전쟁의 단초가 된다.

이렇다 보니 프랑스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가 몰락한 것이 성전기사단을 계승한 프리메이슨의 음모 때문이라는 음모론 떡밥까지도 존재한다. 루이 16세의 목이 떨어질 때 누군가 "자크 드 몰레여, 그대의 복수가 끝났다!"고 외쳤다는 풍문도 존재하지만 실제여부는 불명이다.

4.6. 후예

기사단은 1312년 정식으로 해체되었으나,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에서는 그다지 탄압이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이들은 이름을 바꾸고 잠적하거나 다른 기사단에 흡수되는 형태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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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슬람과의 최전선에서 국토회복운동이 진행 중이던 포르투갈 지부는 1312년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의 중재를 받아 이름을 그리스도 기사단(Ordem Militar de Cristo)으로 바꾸고 계속 활동해 나간다. 대항해 시대에는 항해왕자 엔히크를 비롯한 왕족들이 그리스도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가 되고, 바스코 다 가마 같은 유능한 탐험가들이 기사단원이 되어 바다로 진출해 포르투갈의 융성에 한 몫 거들게 된다. 1910년 10월 5일 혁명(Revolução de 5 de Outubro de 1910)으로 포르투갈에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들어선 현대에도 그리스도 기사단은 여전히 존속 중이며, 포르투갈 대통령이 기사단장을 맡고 있다. 홈페이지

사족으로, 스코틀랜드로 간 일부 기사들이 잉글랜드 왕의 전투를 돕다가 나중에 프리메이슨의 기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이것도 성전기사단에 대한 무수한 날조 및 음모론 중 하나라고 보고 있다.

5. 직급 및 계급 체계

  • 총장(그랜드 마스터): 성전기사단의 총지휘관.
  • 집사장: 성전기사단 내의 기사단장 아래의 2인자이자 행정 업무를 담당.
  • 원수: 성전기사단의 군대를 지휘.
  • 부원수: 성전기사단의 군대에 소속된 보병대를 지휘.
  • 기수: 기사단에 소속된 평민 기사들을 지휘.
  • 보급감: 기사단의 보급을 담당.
  • 지역 사령관: 기사단령에 소속된 각 지역을 담당.
  • 성주: 지역 사령관 아래에서 각 성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지휘.
  • 기사: 귀족 출신 기사.
  • 평민 기사: 비귀족 출신 기사.

6. 역대 그랜드 마스터

대수 이름 재직기간 본부
초대 위그 드 파앵 1119-1136 예루살렘 왕국예루살렘
제2대 로베르 드 크롱 1136-1147
제3대 에버라르 데 바레스 1147-1151
제4대 베르나르 드 트라멜레 1151-1153
제5대 앙드레 드 몽바르 1153-1156
제6대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 1156-1169
제7대 필리프 드 밀리 1169-1171
제8대 외드 드 생 아망 1171-1179
제9대 아르노 데 토로야 1181-1184
제10대 제라르 드 라이드포르 1185-1189 예루살렘 왕국아크레
제11대 로베르 드 사브레 1191-1193
제12대 길버트 호랄 1193-1200
제13대 필리프 뒤 플레시스 1201-1208
제14대 기욤 드 샤르트르 1209-1218
제15대 피에르 데 몽테규 1218-1232
제16대 아르망 드 페리고르 1232-1244
제17대 리샤르 드 부레스 1245-1247
제18대 기욤 드 소냑 1247-1250
제19대 르노 드 비시에 1250-1256
제20대 토마스 베라르 1256-1273
제21대 기욤 드 보주 1273-1291
제22대 티보 고댕 1291-1292 키프로스 왕국리마솔
제23대 자크 드 몰레 1292-1312

7.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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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



[1]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성전 기사단의 성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가로 예루살렘 성묘교회에서 쓰였다. 해당 음원은 본 성가를 새롭게 녹음한 것이다.[2] 라틴어. 시편 115편의 첫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3] 예루살렘성전산에 위치해 있는 '성전(聖殿)'에서 유래하였다. 성스러운 전쟁을 뜻하는 성전(聖戰)은 아니다.[4] 기사이자 또한 수도자이므로 수도자에게 요구되는 정결, 청빈, 순명의 복음삼덕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5] 성전기사단에 가입하면 수도자가 되기 때문에 결혼하여 후손을 남길 수 없다. 따라서 입회자의 유산은 기사단에 흡수된다.[6] 프리메이슨의 일부 핵심 인물들이 성전기사단원을 자처한다.[7] 다만 당시에는 유아사망률이 높았으므로 실제 기대수명은 40세보다 더 길었을 것이다.[8] 사실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고기를 선호했던 반면에, 채소를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이나 먹는 하찮은 음식으로 여겨 좋아하지 않았다.[9] 방부제를 겸해 알로에 과육을 넣었다고 한다.[10] 평민 기사와 종군 사제들을 모두 포함한 숫자이다. 실제 서임받은 기사는 훨씬 적었다.[11] 예루살렘의 성지에서 예배를 보던 무슬림이 그리스도인에게 꺼지라는 말을 듣자 이를 저지하고 사과한 기록도 있다. 심지어 무슬림 방문객이 성전기사단을 친구라고 표현하기도.[12] 당시 전투에서 기사단의 총장이 포로가 되면서 항복보다 죽음을 택하는 성전기사단의 명예가 실추된다.[13] 이후 근세에 세력을 떨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대륙에서 수탈한 막대한 귀금속을 기반으로 권위를 강화했다.[14] 총장 자크 드 몰레를 포함하여 230명이 체포되었다.[15] 21세기에 바티칸 고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16] 1260~1313. 프랑스의 법률가·정치가. 프랑스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법률을 가르치다, 국왕 필리프 4세의 측근이 되어 그의 왕권 강화를 위하여 힘썼다.[17] 사실 이것도 거의 저주와 같은 말이긴 하지만.[18] 영문 위키피디아 Jacques de Molay 문서, Legends(전설) 문단의 하위문단인 Curse(저주) 문단, 23:33, 13 September 2020‎ 버전.[19] 다만 차녀 이자벨은 영국의 에드워드 2세에게 시집을 가서 2남 2녀를 낳으며 후손을 남겼다. 이자벨은 무시무시한 여걸로서 무능하여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한 남편 에드워드 2세를 유폐하고 죽였는데 일설에는 때려죽였다고도 한다. 그녀의 장남 에드워드 3세는 에드워드 2세의 뒤를 이었으며 이후 어머니의 혈통을 통해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는 백년전쟁을 일으키게 된다.[20] 살리카법 말고도 잔의 어머니이자 루이 10세의 첫번째 아내인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가 간통죄로 유폐되어 사망하고 잔도 루이가 아닌 마르그리트의 불륜남 필리프 드 오네이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무성한 탓도 있었다.[21] 마차 사고가 나서 급히 제왕절개를 통해 출산시켰는데 어머니 마리아, 샤를 모두 사망했다.[22] '섭정을 맡은 필리프 5세가 손을 썼다 카더라'라는 설이 있으며 심지어 형 루이 10세가 요절한 것도 필리프 5세의 짓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정황이나 심증만 약간 있으며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만약 정말 필리프 5세가 관여한 것이라면 프랑스의 수양대군이 되는 셈이다.[23] 루이 10세의 외동딸 잔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