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청보 핀토스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007f55><tablebgcolor=#007f55> | 현대 유니콘스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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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보 | 구단 역사|역대 시즌|실업 현대|연고 이전 1994년 한국시리즈|1996년 한국시리즈|1998년 한국시리즈 (V1)|2000년 한국시리즈 (V2)|2003년 한국시리즈 (V3)|2004년 한국시리즈 (V4) 역대 감독|역대 주장|역대 1차 지명 선수|사건 사고 | 암흑기 | ||||
세부 정보 | 선수단|등번호|유니폼|재계 라이벌 시리즈 | ||||
경기장 | 숭의야구장(1996~1999)|수원종합운동장 야구장(2000~2007)|춘천공설운동장 야구장|원당 야구장(제2 홈구장) |
1. 창단
청보 핀토스의 모회사는 당시 중견 섬유업체였던 풍한방직이었다. 풍한방직이 식품 산업에 진출하면서 청보라는 상표명을 썼는데 마침 김정우 풍한방직 사장이 경기고등학교 후배인 김현철 삼미그룹 회장의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되어 후배의 어려움을 돕고 무엇보다 새로 시작한 식품 사업도 홍보할 겸 전격적으로 프로야구에 참여한 것이다. 이 당시 삼미 슈퍼스타즈 야구단 지분의 매각대금은 60억원이었는데[1] 현금을 지불하지 않고 삼미의 부채를 청보식품이 떠안는[2] 조건으로 구단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희한한 것은 청보식품은 인천과 전혀 연관이 없는 기업이라는 점이다. 청보식품의 모기업인 풍한방직은 대전광역시에 본사를 둔 회사로[3] 실향민 출신 김영귀(1911~1999)가 창업했다고 한다. 더구나 야구단을 직접 운영하던 청보식품 역시 본사는 서울에 있고 라면공장은 경기도 평택에 있었다.[4]
삼미 야구단을 인수하는 기업의 정체가 밝혀지자 팬들은 일제히 머리를 갸우뚱했다. 청보식품이 워낙 듣보잡에 가까울 정도로 존재감이 적었던 식품업체였고 프로야구단 창단 과정에서도 갑툭튀에 가까운 모습으로 시장에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여러 루머가 많았다. 군납 라면 업체로 선정돼 대량의 라면 납품권을 얻은 것을 두고 당시 최고 권력자인 전두환 대통령의 영부인 이순자가 청보식품의 실소유주라는 루머가 그럴듯 하게 퍼졌다. 당시에는 청보가 청와대의 보물의 줄임말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또는 여의도순복음교회나 통일교의 투자라는 루머도 돌았다. 그러나 군납업체 선정 건은 청보식품 사장이던 장기하가[5] 예비역 장성에 하나회 출신으로 군 쪽엔 파워가 남아있던 양반이라는 뒷얘기도 있다.[6]
원래 청보 야구단의 팀명은 '청보 팬더스'로 정해질 뻔 했다. 당시 청보식품 로고가 팬더라 팀명을 팬더스라하려 했으나 곰을 마스코트로 쓰던 OB 베어스와 이미지가 중복되고 OB의 불곰보다 청보의 팬더가 훨씬 약하다는 이미지가 지적되면서 다른 동물로 교체된다. 팀 마스코트는 북미산 조랑말로 결정됐고 조랑말을 뜻하는 핀토스(Pintos)를 새 팀명으로 결정했다. 말을 청보 야구단의 상징 동물로 정한 것은 김정우 구단주의 아이디어였는데 당시 김 구단주는 대한승마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모기업 청보식품이 식품회사였던지라 청보 핀토스는 인천과 춘천에서 열린 홈경기 때 관중들에게 자사 제품인 곱배기라면과 영라면을 무료로 나눠줬지만 엉망진창인 팀 성적만큼이나 라면의 품질 수준마저도 심각하게 나빴다. 청보라면은 굴뚝 같은 팬심에 호소해서라도 도저히 먹기 어려운 수준이었기에 뜯지도 않은 라면이 야구장 관중석 바닥에 버려진 채로 굴러다녔다고 한다. 당시 야구장에서 청보라면을 받고 집에서 이를 끓여먹은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야구도 못 하는 것들이 라면이라고 잘 만들 리가 있나!" 혹은 "라면도 못 만드는 것들이 야구라고 잘 할 리가 있나!"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 당시 청보식품의 모회사인 풍한방직은 "핀토스"라는 이름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청바지 브랜드에도 활용했다. 감독 시절의 허구연이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2. 1985년
1985년 전기리그를 끝으로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의 역사를 이어 받아 조랑말을 마스코트로 앞세워 1985년 후기리그에 참여했다. 그러나 삼미의 짧은 영광을 이끌었던 장명부도 거듭된 혹사의 후폭풍으로 인해 슬슬 삽질을 시작할 때였고 장명부 이외 선수들의 기량도 삼미 때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팀의 성적은 최하위권. 그런데 1985년 후기리그 부터 리그에 뛰어든 청보는 그 해 후기 4위로 나름 선전했다.3. 1986년
1985년의 호성적을 바탕으로 청보 핀토스는 1986년 포스트시즌 진출을 목표로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1986년 개막과 함께 7연패에 빠지는 등[7]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하위권으로 떨어졌고, 그나마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의 기초공사(?) 덕분에 최하위는 면했다.[8]4. 1987년
청보 핀토스라는 구단명을 가지고 프로야구 리그에 참가한 마지막 시즌이다. 1987 시즌을 앞두고 그동안의 성적 부진과 고질적인 마운드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롯데 자이언츠에 정구선(2루수), 정성만(투수), 우경하(외야수)를 내주고 임호균, 배경환, 이진우, 양상문(이하 투수), 김진근(내야수)을 받아오는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켜 마운드 보강에 힘썼다. 그렇게 시작한 1987년 시즌. 트레이드로 합류한 양상문과 임호균이 원투펀치로 활약하고 같이 합류한 배경환도 나름대로 활약하면서 선발진이 어느정도 안정되었고, 이 해 도루왕을 차지한 이해창 등을 앞세운 발야구, 작년부터 주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김동기 등의 활약으로 시즌 개막 후 5경기동안 4승 1패의 호성적을 기록하며 올해는 작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듯 했으나.. 지난시즌 31홈런을 합작해냈던 정구선과 우경하의 이탈로 약해진 타선과 부실한 불펜 등 약한 선수층으로 인해 한계점에 도달하면서 기어이 최하위로 떨어지며(...) 모기업에 대한 심각한 역홍보 효과를 우려할 수준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모기업인 풍한방직과 청보식품이 자금난에 휘말리면서 1987년 시즌 초반 4월 중순부터 야구단의 제3자 매각이 추진된다.5. 구단 매각
앞서 서술했듯 청보식품의 라면 사업이 생각보다 확장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후반 섬유업계의 구조적 불황까지 겹치며 야구단 운영은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 결국 1987년 시즌 후 태평양화학(현 아모레퍼시픽)에 50억원에 구단을 매각하여[9] 태평양 돌핀스로 이름이 바뀌었다.[10] 이에 따라 동명의 기존 운영법인은 의류 제조업으로 변모했다.1987년 9월 30일 MBC 청룡전에서 홈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으며 동년 10월 4일 빙그레 이글스와의 대전 원정이 청보 핀토스라는 이름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성적은 667. 뒤에서 121이다. 1986년의 6위 역시 이 해부터 리그에 참가한 신생 제7구단 빙그레 이글스가 최하위를 깔아줬기 때문에 기존 6개 구단 중에서는 꼴찌였다. 쉽게 말해 3년 내내 꼴찌 근처만 헤맨 셈. 더구나 창단 → 667 → 인수였다. 이 당시 청보의 매각대금은 50억원[11]이었는데 삼미 인수 때와 마찬가지로 청보 부채 50억원을 태평양이 떠안고, 대신 그 부채를 8년 거치 - 7년 분할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구단을 인수하였다. 기가 막히게도 거치 기간이 종료된 1996년에 태평양은 현대그룹에 야구단을 매각했는데, 당초 청보로부터 인수한 부채 50억원에 8년간 붙은 이자 포함하여 총 70억원을 현대에 넘기고 별도 매각대금으로 무려 400억원(!)을 받았다. 말하자면 태평양은 8시즌 동안 거의 현금 한푼 안들인 채 인수한 야구단을 운영하며 회계상으로는 적자였겠지만 막대한 홍보효과를 얻었고, 게다가 거액을 받고 구단을 팔았으니 태평양으로선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였던 셈이다. 이후 풍한방직은 풍한산업을 거쳐 풍안방직으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김정우 구단주는 홈경기 때 매일 야구장을 찾을 정도로 골수 야빠였는데, 야구단을 매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하며,[12] 인천 송도비치호텔에서 선수단과 송별회 겸 해단식까지 마련해 줬다고 한다. 이런저런 말이 많아도 그의 야구단 운영에 대한 열정만큼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이후 김정우 구단주는 폐암 투병 중에 비교적 젊은 나이인 2005년 7월 13일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대재벌 그룹이 아닌 중견회사의 자회사였던 만큼 야구 역사에서도 가장 적은 발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는데, 전신 삼미가 워낙 임팩트 있는 불명예 진기록(한 시즌 최저승률, 최다연패, 특정구단 상대 전패, 장명부의 427이닝 혹사 등)들을 많이 남기는 바람에 삼미는 한국 야구계에서 최악의 팀의 대명사격으로 현재까지 야구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이 형편없는 성적을 냈음에도[13] 삼미와의 인지도는 천지 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보가 2시즌 반 동안 거둔 성적은 271경기 97승 169패 5무 승률 0.3646, 전신 삼미가 3년 반 동안 거둔 335경기 120승 211패 4무(.3625)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역대 KBO 리그 구단들 중에서 가장 존재감이 병풍인 팀이다. 없어진 지 40년이 되어가고 있는데다 만년 꼴찌라는 점에서 비슷한 경우인 삼미는 프로야구 원년팀이라는 경우를 제외하고도 장명부의 30승 원맨쇼, 전년도 압도적인 꼴찌에서 전후기 2위를 기록하는 꼴찌팀의 반짝 돌풍, 최저 승률, 최다 연패, 단일시즌 특정팀 상대 전패 등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간에 엄청난 성적을 거두며 팀이 사라진지 무려 38년이 지난 지금도 컬트적인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반면, 청보는 딱히 내세울 만한 임팩트 있는 스타도 없었고, 또한 성적도 만년 꼴찌였지만 그렇다고 주목할 만한 꼴찌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진 실정이다. 심지어 삼미나 태평양은 알아도 청보 핀토스에 대해서는 '그런 팀도 있었어?' 소리가 나올 정도로 존재를 모르는 경우도 있을 정도. 그나마 오늘날 이 팀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허구연이 감독을 맡은 팀 정도로나 미약하게나마 기억되고 있다.
[1] 당초 언론 보도엔 70억원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60억원이었다고 한다.[2] 이 부채는 청보의 후신인 태평양 돌핀스까지 넘어갔다가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 과정에서 완전히 해소된다.[3] 공교롭게도 OB 베어스의 마지막 대전 홈경기(1985년 8월 18일~8월 20일) 상대가 청보였다. 물론 이 시리즈는 OB가 위닝 시리즈를 가져갔다.[4] 그나마 삼미의 연고권역에 인천 뿐 아니라 경기, 강원이 포함된지라 평택에 라면공장이 있던 청보는 일단 연고 조건은 만족한 상태였다.[5] 가수 장기하와는 동명이인. 이쪽은 이름의 한자와 성씨부터가 다르다. 아니 애초에 가수 장기하는 82년생.[6] 위에도 적혀있지만 진실은 그냥 고등학교 후배가 어려움에 쳐해있으니 김정우 풍한방직 사장이 선배로서 도움을 준 것이지 위의 음모론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7] 7연패 후 첫 승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청보는 1986년 4월 6일 춘천 빙그레전에서 8회초까지 신생팀 빙그레에 3:8로 뒤지고 있다가 8회말에 3점을 얻고 9회말에 터진 양승관의 끝내기 쓰리런에 힘입어 9:8 대역전승을 이뤘다. 이 경기가 끝나자 감독 데뷔 첫 승을 거둔 허구연 감독이 엉엉 울었다고 한다.[8] 이 당시 소년중앙에서 허구연 감독과 빙그레 이글스의 배성서 감독의 대담을 성사시키는 환상적인 일도 있었다.[9] 정확히는 운영사 청보 핀토스의 자산을 신규법인 (주)태평양 돌핀스로 넘겼다.[10] 풍한방직은 야구단은 매각했지만 야구와 완전히 발을 끊은 것은 아니어서 당시 유일한 야구전문지였던 주간야구를 계속 후원하였다. 그러나 기업이 회생 기미를 보이지 않은 데 이어 스포츠신문들의 증면경쟁에 따른 기자스카웃이 이어지면서 1993년 11월 말 지원을 끊었고 주간야구는 발행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주간야구는 2006년 2월 복간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복간 6주만에 다시 폐간되고 만다.[11] 청보가 삼미를 인수한 금액보다 10억원이나 더 싸다![12] 바로 1985년 여름에 삼미가 청보로 매각될 때도 김현철 삼미 구단주는 아쉬움에 눈물로 밤을 보냈었다. 역사는 반복된 셈.[13] 두 팀은 똑같이 3시즌 동안 존재했는데, 삼미는 1983년 전/후기 2위의 성적을 내긴 했다. 삼미의 전설적 투수 장명부의 원맨쇼에 힘입은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