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추어 시절
부산고등학교 출신으로 2000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 2001년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우승을 경험하였다. 2000년에는 2년 선배 추신수, 김백만, 정근우가 활약했고 2001년에는 1년 후배인 장원준이 팀을 이끌었다. 전병두의 고교 동기생으로 노환수가 있다.2. 프로 시절
2.1. 두산 베어스 시절
2003년 두산 베어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 좌완 강속구 투수로 기대를 받았다.[1] 당시에는 컨트롤이 잡히지 않은 좌완 강속구 투수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팬들의 기대가 큰 선수 중 하나였다.
프로 입단 2년차인 2004년에 35경기(선발 17경기)[2]에 나와 81⅔이닝을 던지며 86피안타(11피홈런) 59사사구 50탈삼진에 4패 1홀드 ERA 5.51을 기록했다. 클래식 기록만 봤을 때는 썩 잘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승운이 없었기도 한 것이 이 해 선발 투수의 승리 투수 요건을 위한 최소 이닝인 5이닝 이상 투구를 총 6차례 했음에도 여기에서 단 한 차례도 승리투수와는 연을 맺지 못했다.[3] 그럼에도 만 20세에 나름의 가능성을 보여준 시즌이기도 했다.
2.2. KIA 타이거즈 시절
2005년 7월 10일에 KIA 타이거즈의 다니엘 리오스와 2:1 트레이드 되었다. 당시 KIA는 유남호 감독 치하로 창단 첫 꼴찌를 기록한 후라서 리빌딩이 필요했고, 두산에서는 포스트시즌용 1선발이 필요했기에 트레이드가 이루어진 것. 당시 KIA는 미래를 받고 두산은 현재를 받았다고 하여 윈윈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세스 그레이싱어는 리오스를 보내고 KIA가 남은 용병 슬롯에 그레이싱어를 영입한 것이고, KIA가 오히려 유망주 타자 김주호를 내주면서 2:1 트레이드가 된 것이다. 참고로 김주호는 두산에서 2003년에 데뷔했고, KIA에 트레이드 된 후 2년 더 뛴 후에는 눈에 띄는 선수생활이 없다. 통산 76경기 나와서 .203의 타율을 남기고 사라졌기에 그가 트레이드 되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KIA 입장에서는 전병두를 데려오기 위해 선수 두 명을 내주었다는 이야기다.
트레이드 후 2005년 49경기 57이닝을 던지면서 3.0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해 김정수 이후 좌완 강속구 투수가 없다시피 하던 KIA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노리타들의 주장과는 달리 전병두는 두산-KIA 시절에 폐급 투수가 아니었다. 2차 1순위로 지명되어 입단 당시부터 흔치 않은 좌완 파이어볼러로 큰 기대를 받았고, 폐급 투수면 아무리 유망주라도 1선발이랑 바꾸는 게 가능하지도 않다. 제 아무리 리오스가 2005년에 KIA에서 부진했던 데다가 태업 의혹까지 받았다고 해도 리오스는 해 온 게 있었고, 전병두는 수준급의 유망주였으니 트레이드가 가능했다.
이때 활약과 놀라운 구위를 바탕으로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에 막내로 뽑히며 병역특례를 받았다. 당시 대표팀 투수코치였던 선동열이 훈련 당시 전병두의 불펜 투구를 보고 극찬할 정도였다.[4]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전병두가 SK로 트레이드됐을 때 먼저 선수쳐볼 걸 하면서 굉장히 아쉬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선동열도 삼성 감독 시절인 2006년 말 김한수, 팀과 갈등을 빚던 임창용을 상대로 KIA에 전병두 트레이드를 논의했던 적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무산되었다고 한다.
2006 시즌은 4~5선발로 기용하여 좌완 선발로 키우려 했다. 후반기 부상으로 101⅓이닝을 던지면서 탈삼진을 94개나 기록했다. 잘 던지는 날에는 영점이 잡히면서 언터처블의 모습을 보였지만, 2006 시즌 후반 팔꿈치 부위의 작은 부상으로 구위와 제구가 떨어지며 부진했고, 시즌 종료 때 평균자책점은 4.35를 기록했다.
2007 시즌은 제구력 난조로 시즌 초 선발에서 밀려나 불펜을 맡게 되었으나, 이후 팔꿈치 부상으로 5월을 넘기지 못하고 2군으로 추락, 총 9경기 28이닝 3승 2패 4.19을 기록했다.
2008년 4월 2일 두산전에서 6이닝 노히트 노런으로 기대를 부풀게 했지만, 이후 3경기 연속 3회도 채우지 못하고 강판, 총 6이닝 동안 8개의 볼넷을 허용한 뒤 2군으로 내려갔다. 이후 2군 등판에서도 3이닝 4실점을 기록하며 KIA 구단의 전병두에 대한 기대치가 많이 낮아지게 되었고, 팀내 부상으로 공석이된 백업포수를 얻기위한 트레이드로 SK에 가게 된다.
2.3.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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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4일 김연훈과 함께 세트로 SK 와이번스 소속의 채종범, 이성우, 김형철과 2:3 트레이드를 통해 SK로 이적했다. 당시 주전 포수였던 김상훈의 부상과 외야의 부실화로 인한 필요성에서 이루어진 트레이드였다. KIA에선 김상훈의 부상으로 차일목이 주전이 되자 백업포수를 해결하고 조범현 감독의 SK 시절 눈여겨본 채종범으로 이종범과 조경환의 자리를 보강한다는 목적.
손해보는 트레이드라 트레이드 당일부터 가열차게 까였다. 당시의 네임밸류만 보아도 전병두는 군 문제가 해결된 겨우 20대 중반의 좌완 파이어볼러 유망주였으며, 김연훈은 팜 출신의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2라운드에 뽑힌 내야수였다. 조범현 감독의 주도로 이뤄진 트레이드 이후 08시즌에서 07년도 좌완 2차 전체 1번으로 뽑아 데뷔한 양현종은 당시엔 영점을 제대로 잡지 못했고 2차 2라운드 신인 팔아먹고 내야수가 없다고 데려온 유격수 용병 윌슨 발데스가 삽질을 하자 조범현을 욕하는 KIA 팬들의 원성이 극에 달했다. 조범현 KIA 감독의 고교 시절 은사가 김성근 감독이었기에 스승의 은혜를 갚는 조공 트레이드라고 불렸다. 이후 SK에서 온 선수들이 모두 삽질한 반면 2009년 김연훈과 전병두가 예상대로 성적을 잘 내자 조범현 감독에 대한 비난은 거세졌다. 조범현이 우승감독임에도 안티가 많고 16연패 이후 짤린 원인에도 꼽힐 트레이드 망작 중 하나.
2.3.1. 2008 시즌
트레이드 3일만에 선발로 등판했는데, 이날 LG전 성적은 5이닝 1피안타 7사사구 4삼진 무실점을 기록하고 SK 타선은 9안타 7볼넷을 뽑아내며 전병두에 힘을 실어주며 이적 후 첫 승을 안겨준다. 경기 전 박경완은 전병두에게 "형만 믿고 싸인 내는 대로 마음대로 던져, 형이 다 받아줄게"라고 말했다고 한다.2.3.2. 2009 시즌
시즌 초에는 선발로 출장해 5월 23일 두산전에서 9타자 연속 삼진[6]이란 무시무시한 포스를 뿜어냈고, 6월 12일부터는 채병용의 부상과 이승호의 과부하, 부상에서 회복이 덜 된 윤길현 등으로 맛이 가버린 SK의 벌떼 불펜으로 보직 변경, 원 포인트 릴리프부터 최대 4이닝 짜리 롱 릴리프까지 소화하는 등 전천후 핵심 계투으로 맹활약, 또한 2009시즌 좌완 투수들 중 슬라이더가 가장 좋다는 소문을 듣고 봉중근이 전병두에게 그립을 배워가기도 했다.
2009년 페넌트레이스 성적은 8승 4패 8세이브 1홀드, 50사사구, 136삼진, 평균자책점 3.12로 팀내 다승 공동 4위, 세이브 2위이며, 시즌 초 선발투수로 출장을 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선발 51⅔이닝, 계투 81⅔이닝으로 규정이닝을 채워 리그 평균자책점 2위와 탈삼진 5위를 차지했다. 시즌 종료 뒤 연봉점수 계산으로 SK 와이번스에서 팀 내 투수 중 1위였다. 일반 필승조 계투들도 80이닝 던지는 경우는 많진 않다. 그런데 거기에 선발로 50이닝을 던졌으니...
포스트시즌에도 활약할 것이란 팬들의 예상을 깨고 부상 때문에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 제외되었고, 팀은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연패 뒤 3연승을 거두며 2009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KIA 타이거즈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3승 4패로 패하여 준우승에 그쳤다.
2.3.3. 2010 시즌
많은 야구팬들과 언론들은 2009 시즌의 지독한 혹사로 인해 부진하거나 2010년에는 보지 못할수도 있다고 예상하였으나 2010년 역시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전매특허인 이닝당 탈삼진 평균개수도 여전했다.복귀 후 그는 병역 절차를 마무리한 좌완 강속구 투수라는 점에서 미래가 밝다고 볼 수 있어 향후 김광현, 고효준과 함께 선발진에서 한 축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2010년 SK는 김성근 감독도 말했지만 기본적으로 안심하고 맡길 수 있고 고정적으로 선발로 뛰어줄수 있는 선발 투수가 김광현과 카도쿠라 켄의 원투펀치 뿐이라[7] 나머지 로테이션은 그때그때 구멍을 메우는 식의 야구를 했었다. 그 중심에 고효준과 전병두가 제 역할을 해줬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벌떼야구와는 조금 다르게 여러 명으로 선발 및 중간 이닝을 메우고 중계로 바톤터치[8]하는 방식이다 보니, 성적만 봤을 땐 크게 잘한 것처럼 보이진 않고 전병두가 출장한 경기도 27경기뿐이었지만 그래도 67⅔이닝을 소화하며 팀을 위해 자신의 역할은 충분히 해주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4경기 모두 등판하여 4⅓이닝 2피안타 1볼넷 7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2.08, 2승 1홀드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무패로 우승하였다.
대만과의 한국 대만 클럽 챔피언쉽에서 글로버의 뒤를 이어 등판. 5⅔이닝 무피안타라는 굉장한 호투를 펼치고 내려왔으나, 9회말에 송은범이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며 아쉽게 됐다.
2.3.4. 2011 ~ 2014 시즌
자주 경기에 등판하여 51경기에 92⅓이닝 87탈삼진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했다. 참고로 이것도 9월에 등판을 하지 않고 올린 성적이다. 시즌 막판 잠시 올라왔을 때를 제외하면 김성근이 경질당하기 직전인 8월 중순까지 이미 85이닝 이상을 소화한 셈. 이만수 대행 시절에는 7이닝이 끝이다.11월 17일, 왼 어깨 회전근 재건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토미 존 수술의 경우에는 2010년대에 들어와 선수 본인의 재활 의지에 따라 회복 기간이 많이 단축되고 빨라진 편이지만, 어깨와 관련된 수술은 한국은 물론이고 의료시설이 잘 구축된 미국에서조차도 재기한 선수는 많지 않다.[9] 결국 2014년까지 퓨처스리그조차 출장하지 못하며 기약 없는 재활의 기간을 보냈다.
2.3.5. 2015 시즌
기나긴 재활에 팀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는지 6개월 동안 재활이 미진하면 방출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팀에서 전병두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당장 다음 시즌에 방출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후 7월 들어 ITP를 소화하고 있고, 9월, 피칭 단계에 들어갔다. 이미 2군 시즌은 종료했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가 없어 내년을 보고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최민규 기자의 언급에 의하면 현재 90%까지 몸 상태가 올라왔다고 한다.
11월 프런트는 전병두를 보류선수 명단에 묶었다. SK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고, 기량 저하의 이유가 부상이었기 때문에 한 번 더 기회를 줬다.
2.3.6. 2016 시즌
SK 와이번스 2군 캠프에 참가해 대만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리고 3월 초, 5년 만에 포수한테 공을 던져봤다고 한다. 기사 '마운드 피칭' 전병두, 4년 만 최고 페이스‘라이브 3회 완료’ 전병두, 복귀 희망 커진다병두야, 조금 늦더라도, 조금 쉬었다 가더라도 괜찮아. 어차피 목적지까지는 다 도착한대. 코치님이 다른건 몰라도 니 옆에는 꼭 있어줄 테니까. 응, 열심히 해야 돼. 노래 선택이 좋다. 그지?[10]
시즌 전 제춘모 코치의 마춘텔에 나와서 오래간만에 팬들앞에 얼굴을 비췄다. 링크 핼쑥한 모습에 팬들이 안타까워했다. 이번 편에선 제춘모 코치도 가장 긴장된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다. 선수단 내에서도 재활 기간이 길어지는 전병두에게 관심이 많은 듯.2016년 9월 8일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된 옛 동료 고효준이 모자에 28번을 매직으로 새기고 마운드에 올라왔다. 28번 새긴 고효준, 전병두와 함께 던졌다 9월 25일 한화전부터 다른 선수들도 모자에 28번을 새기고 뛰기로 했다.[11]
그러나 이러한 복귀를 위한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병두는 마운드에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2.3.6.1. 은퇴
결국 부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2016년 9월 7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5년 간의 재활' SK 전병두, 결국 은퇴 선택 다행히도 SK 구단 측의 배려로 1군 경기에서 단 한번이라도 뛰어보고 싶다는 선수의 뜻을 받아들여 선발 투수로 한 타자만 상대하고 은퇴경기를 치러 주기로 했다.[12] 없는 자리를 내서라도 전병두의 자리를 지켜 주겠다는 민경삼 단장의 언급도 있긴 했다. SK팬 이외에도 탑급 유망주 시절 소속팀인 두산이나 KIA 팬들도 많이 그리워했으며, 침울한 분위기고 타팀팬들도 전병두를 안타까운 선수로 기억하며 잊지 않겠다고 말한다.은퇴 경기는 최종 잔여 경기인 10월 8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가 그의 마지막 경기로 결정이 되었고, 상대인 삼성 역시 양해해 주었다. 이 경우가 사실 엄밀히 따지면 위장선발이니 상대팀의 사전 합의는 도의 상 필요한 절차다. 그래서 SK는 사실상 선발인 다음 투수가 윤희상임을 미리 발표했다.
1군 엔트리를 ⅓이닝을 위해 낭비해도 되냐는 의견이 있을 법도 하지만 오히려 "전병두 때문에 5강 못 가도 괜찮다"는 의견도 나왔다.[13] 10월 5일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가 확정되면서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등판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이것은 SK 창단 첫 은퇴 경기이기도 하다. # 오랜만에 열리는 은퇴 관련 행사인 만큼[14] 팬 차원에서도 준비가 되고 있다. 비룡천하와 SK 와이번스 갤러리 등에서 모금을 진행 했다.
등판 하루 전날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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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때에 비해 팔 각도가 한참이나 내려갔으며[16], 구속도 130km을 간신히 찍을 정도로 눈에 띄게 줄었다. 거기다가 한 구 한 구를 던질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17]이 보여 안타까워하는 팬들도 많다.
투구 당시 혹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한순간에 바로 알 수 있었는데, 팔 각도가 아예 올라가질 않아서 거의 사이드암 수준의 폼으로 던진 데다가 5개의 공만 던졌는데도 팔을 잘 올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18]
초구와 2구 120대의 직구가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가는 매우 치기 쉬운 공일텐데도 김상수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인플레이 타구가 된 5구의 타구는 긴 체공시간과 바로 잡지 않고 안정적으로 바운드를 기다렸다 잡은 유격수, 김상수의 발을 감안하면 안타가 될 수도 있었는데 1루까지 전력질주하지 않고 아웃처리되었다.[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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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썼던 등번호 28번은 2017년 2차 1라운드로 지명된 신인 좌완투수 김성민이 이어받으며, 이후 김성민이 2017년 시즌 중 넥센으로 트레이드 되어 반대 급부로 넥센에서 온 김택형이 28번을 이어 받아 뛰다가 얼마 안가 등번호를 바꿨다. 여담으로, 은퇴식에서 번호를 물려줄 때 팬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전병두의 마지막 시즌은 이렇게 끝이 났다. 2016 시즌 기록으로는 1경기 선발등판, 0.1이닝, 무실점, WHIP 0.000, WAR 0.02. 참고로 이날 경기를 끝으로 SK 와이번스 감독이던 김용희 감독도 팀을 떠나게 됐다.[21] 한 가지 이채로운 것은 이 경기를 해설한 스포티비의 염종석 해설위원은 전병두의 초-중-고등학교 11년 선배라는 것이다. 게다가 혹사로 인해 은퇴했다는 점도 같다.
같은 날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한화 이글스가 KIA 타이거즈에 연장전 역전승을 거두며 시즌을 마쳤다는, 혹사로 인한 은퇴를 아쉬워하는 팬들에게 씁슬한 소식이 들려왔다.[22][23]
[1] 당시 입단 동기로 노경은, 나주환, 허도환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주환과 전병두는 SK로 건너가 주력 선수가 된다. 또한, 허도환은 넥센 히어로즈와 한화 이글스를 거쳐 2차 드래프트를 통해 SK로 건너갔는데 백업이지만 당당히 한국 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어 김광현이 우승을 확정짓는 삼진을 솎아냈을 때 그의 공을 잡은 포수가 바로 허도환이다. 이후 허도환은 KT와 LG로 옮기며 저니맨이 되었다. 한편, 롯데 자이언츠를 거쳐 SK의 후신인 SSG 랜더스로 영입된 노경은도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선수 생활 말년을 불태우는 중이다. 네 명 모두 SK-SSG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는 공통점도 있다.[2] 참고로 이 17번의 선발등판이 전병두 프로 커리어 중 단일 시즌 가장 많이 선발로 나왔던 해이다.[3] 그리고 5이닝에 아웃카운트 하나 모자른 4⅔이닝을 2차례 소화.[4] 참고로 명투수 출신인 선동열은 삼성 감독 시절부터 투수들에게 깐깐한 평가를 내렸던 걸로 유명하다.[5] 불 같은 강속구를 가졌지만, 제구가 엉망인 일명 '와일드씽' 투수들을 오히려 팔각도를 높혀서 더욱더 구위를 강조하는 쪽으로 개조하니 오히려 제구가 잡히는 것처럼 보이면서 성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배터리코치, 포수와 상의해서 말 그대로 압도적인 구위와 랜덤제구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더욱더 공격적인 피칭을 하는 것이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도 유인구 없이 바로 빠른 공으로 승부하는 게 그 예 중 하나. 이게 먹히기 시작하면 상대 타자들도 구위에 현혹되어서 어설픈 볼에도 마구 배트가 나오면서 삼진이 엄청나게 잡히게 된다. 이러면서 투수가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고 제구도 좋아지는 것이다. 냉정하게 관찰해보면 마치 제구가 잡힌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지만, 어찌하던 타자를 잡아내고 승리투수가 되면 장땡이니 상관없다.[6] 선동열과 함께 공동 2위. 1위는 1998년 이대진의 10타자 연속 삼진.[7] 시즌이 끝난 후 결과론적으로 얘기했을 때의 내용이다. 실제로는 고효준, 게리 글로버, 송은범 등 로테이션상 들어갈 고정선발 후보는 나름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마음대로 되질 못했고, 특히 김광현에 이은 2, 3 선발로서 글로버가 제 역할을 해주길 바랬는데 그러지 못한 점은 선발 투수 관리에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었음이 시즌 과정 및 결과로서의 평가다.[8] 필승조로 불리는 정우람, 이승호로 연결.[9] 굳이 찾아보자면 외국의 사례로는 바톨로 콜론처럼 줄기세포 치료법이라는 묘한 시술을 한 케이스 정도고, 그나마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시술법이었다. 국내에서는 이용훈이 그나마 재기에 성공한 케이스. 그마저도 수술 전의 구위를 상당히 잃어버렸다.[10] 나오던 음악은 걱정말아요 그대.[11] 한화의 감독이 전병두를 이 모양으로 만든 장본인 김성근임을 생각하면 대놓고 빅엿을 먹이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12] 선발 투수로 나서 한 타자 상대하는 형식으로 은퇴 경기를 치르는 것은 2009년 송진우와 2010년 한화 구대성의 은퇴 경기 이후 처음이다.[13] 물론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으므로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긴 하지만, 전병두가 만들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1번 타자에게 홈런을 맞고 1:0 스코어를 내주는 것 뿐이다.[14] SK 구단의 가장 최근 은퇴 관련 행사는 2014년 4월 박경완의 은퇴식.[15] 윤희상 역시 2020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은퇴경기를 한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오는 걸로 하였다.[16] 거의 사이드암으로 보일 정도로 팔 각도를 내렸다.[17] 경기를 마치고 은퇴식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와인드업을 하고 공을 뿌리는 동작을 할 때 팔이 앞으로 나오면서 통증이 온다고 밝혔다.[18] 혹사의 영향으로 인해 회전근이 망가진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다.[19] 김상수는 공이 좋아서 칠 수가 없었다라고 말해서 야구팬들에게 호감을 받았다.[20] 자세히 보면 초반에 잠깐 달리다가 생각보다 타구 체공이 길어 살 것 같으니까 종종걸음으로 바꿔 뛰어서 일부러 죽었다.[21] 이전에 "압도적으로 망한 커리어를 감안하면 현역 감독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상당히 낮기에 이날 경기가 김용희 감독에게도 사실상의 은퇴경기가 됐다."라는 서술이 있었으나, 2017년부터 2023년까지 KBO 경기운영위원 등을 거치다 2024시즌 부터 다시 친정팀인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하게 되었다.[22] 최훈도 10월 9일 카툰에서 은퇴를 위로하는 동시에 김성근을 비판하였다.[23] 다만 이거는 김성근이 SK 감독시절 그리고 한화이글스 감독시절 여러 선수들 팔을 갈은게 잘못이지 한화 이글스의 잘못은 아니기에 한화이글스가 승리해서 씁쓸하다는 반응은 조금 지나친 면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