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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209·210권 「외이전(外夷傳)」 고려 · 탐라 · 일본 · 안남(진조) · 면국 · 점성 · 섬국 · 유구 · 삼서 (1) 121권의 속불태(速不台)와 122권의 설불태(雪不台)는 동일인물이므로 122권에서는 생략한다.
(2) 131권의 완자도(完者都)와 133권의 완자도발도(完者都拔都)는 동일인물이므로 133권에서는 생략한다.
(3) 150권의 석말야선(石抹也先)과 152권의 석말아신(石抹阿辛)은 동일인물이므로 152권에서는 생략한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4db1><tablebgcolor=#004db1> ||
1. 개요
張弘略(? ~ 1296)
몽골 제국과 원나라의 한족 관리로 몽골 제국의 명장 장유(張柔)의 8남이며, 자(字)는 중걸(仲傑)이다. 생전에 군사와 내정 분야에서 두루 공적을 세웠고, 2품관의 관직에 올랐을 정도로 출세하였지만 부친과 동생의 업적과 명성에 가려진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1255년, 장홍략은 몽케 칸을 알현하여 금부(金符)를 하사받았고, 권순천만호(權順天萬戶)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에 순천로총관(順天路總官)[1]이 되었는데, 원래대로라면 장홍략은 받은 관직에 따라 순천로(順天路)를 다스려야 했지만 그는 행도(行都)에서 한창 전쟁을 준비하던 몽케 칸을 모시고 있었으므로 임지로 가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는 동생 장홍범(張弘範)을 대신 보내서 순천로를 다스리게 하였다.1258년, 몽케 칸이 대군을 일으켜서 사천(四川)을 정벌하려 하자 장홍략이 종군을 희망하였지만 이때 그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몽케 칸이 그에게 돌아가서 박주(亳州)를 지키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의 임지가 바뀌게 되었다.
1261년, 부친 장유가 은퇴하면서 장홍략을 사자(嗣子)로 삼으니[2] 장홍략은 순천로총관과 행군만호(行軍萬戶)직을 겸하게 되었고,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금호부를 하사받아 패용하였다. 또한 쿠빌라이 칸이 그에게 선덕(宣德), 하남(河南), 회맹(懷孟)[3] 등의 로(路)들을 관할하게 하니 장홍략은 관할구역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박주에 주둔하였다.
2.2. 실지를 수복하다
1262년, 이단이 반란을 일으키자 남송의 장군 하귀(夏貴)가 이단에 호응하여 기춘(蕲春)[4]에서 출발하였는데, 그는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회북(淮北), 산동(山東) 일대를 석권한 후 하북(河北)에까지 진출하였으며, 몽골군 수장(守將)들을 살해하거나 굴복시키니 그 기세가 흉흉하였다.이때 장홍략이 관할하던 박주도 하귀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홍략은 그 당시 박주에 없었으므로[5] 하귀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고, 그는 이후에 하귀가 몽골군의 반격을 받고 회남(淮南)으로 물러나자 박주를 되찾고 반격을 준비하였다.
동년 가을, 장홍략이 수군을 이끌고 과구(涡口)[6]로 진격해서 그곳에 주둔해 있던 남송군을 패배시키고 수로를 장악하니 하귀가 기현(蘄縣)[7]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장홍략이 즉시 수군과 육군을 모두 이끌고 기현까지 공격해오자 하귀의 군사들이 장홍략군의 규모와 위세에 전의를 상실하였고, 결국 하귀는 군사들의 사기를 회복할 방법이 없자 성을 불태우고 물자들을 챙겨서 동쪽으로 달아났다.
장홍략이 달아나는 하귀를 추격해서 대부분의 남송군을 섬멸하고 물자들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니 이 날이 9월 5일이었고, 이로써 이단이 반란을 일으킨 와중에 남송군에게 탈취당하였던 영토를 전부 수복하였다.
2.3. 억울한 징계와 현명한 처신
한편 반란이 진압되고 이단이 처형당하자[8] 조정에서 이단에게 글을 보냈던 자들을 추궁하였는데, 장홍략은 이단에게 반란을 그만두고 나라에 다시 충성하라는 글들을 보냈었기 때문에 쿠빌라이 칸이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은 애초부터 한족 제후들과 관련자들의 병권을 박탈하려 하였고[9], 장유가 한족 제후들의 대표 격인 인물이었으므로 장홍략은 장홍범과 함께 1263년에 관직을 빼앗기게 되었다.장홍략은 징계를 당한 직후에 명령에 따라 경사(京師)로 가서 쿠빌라이 칸을 숙위(宿衛)하였는데, 쿠빌라이 칸은 그가 불만을 품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지손복(只孫服, 몽골식 장복)을 하사하고 황궁의 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장홍략이 명령에 따라 황궁으로 오자 쿠빌라이 칸이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장홍략이 하사받은 지손복을 입고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잔치를 즐기자 기뻐하면서 의심을 거두었다.
1264년, 쿠빌라이 칸은 장홍략, 장홍범 형제가 순천로를 다스렸던 공로와 큰 군공을 세웠던 일을 생각해서 두 사람을 소환하였고, 관직과 병권을 회복시켜주었다.
2.4. 황궁을 건축하다
1266년, 쿠빌라이 칸이 대도(大都) 건설에 착수하자 장유가 인부들의 노역을 감독하는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장홍략은 축궁성총관(築宮城總官)[10]이 되어서 장유를 보좌하고 대도 도성 축조와 황궁 건축을 감독하였다.1271년, 조열대부(朝列大夫)[11], 동행공부사(同行工部事)에 임명되었고, 영숙위친군(領宿衛親軍)[12]을 겸하는 한편 의란국(儀鸞局) 등 공부(工部) 산하 관청들의 업무를 지휘, 감독하였다.
1276년, 마침내 도성이 완공되자 쿠빌라이 칸이 그 기념으로 특제 술잔을 황궁의 금고에서 꺼내어 장홍략에게 하사하였으며, 그의 작위를 중봉대부(中奉大夫)[13]로 높이고 회동도선위사(淮東道宣尉使)[14] 관직도 내려주었다. 이에 따라 장홍략은 조정을 떠나 강회행성(江淮行省)으로 향하였다.
2.5. 슬기로운 선위사생활
1277년, 동해현(東海縣)[15]에서 풍년이 들어 마련한 곡식이 수만 석(石)에 달하였는데, 그 인근에 남송군이 집결해 있었으므로 강회행성의 관리들은 남송군이 동해현을 침략할까봐 두려워하였다. 결국 강회행성의 수장이 장홍략에게 편지를 보내서 동해현의 곡식들을 회안(淮安)으로 운반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이때 장홍략이 소집한 백성들에게 10석을 선박에 싣을 때마다 1석을 포상해주겠다고 말하니 백성들이 앞다투어 곡식을 운반하였고, 결국 한 달 만에 곡식을 모두 운반할 수 있었다.1279년, 강서도선위사(江西道宣尉使)로 관직이 옮겨져서 융흥로(隆興路)에 부임하였다. 그가 부임한 무렵에 요주(饒州)[16]에서 도적들이 봉기하여 강서행성의 경내를 침범하자 장홍략이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지만 요주는 강동도에 소속된 곳이었으므로 그가 직접 도적들을 토벌하러 가면 조정에서 그의 월권행위를 문제삼고 처벌할 위험이 있었다. 이에 장홍략이 사람을 보내서 도적들의 소굴로 곧장 쳐들어가게 하였고, 우두머리가 붙잡혀 오자 저잣거리에서 처단하니 잔당들이 뿔뿔이 흩어져 반란이 평정되었다.
2.6. 만년의 삶과 최후
장홍략은 요주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에 갑자기 병으로 쓰러져서 박주에 있는 자택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택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조정의 한 관리가 강남에 거주하는 세력가들이 본분을 망각하여 조정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모함하였는데, 그가 모함한 이들 중에 장홍략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다른 관리가 장홍략을 찾아와서 황제를 알현하고 결백함을 증명하라고 설득하니 장홍략이 그의 설득에 응하여 상경하였고, 결국 무사히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1292년, 장홍략이 쿠빌라이 칸을 알현하면서 그의 장남 장개(張玠)를 숙위장교로 천거하니 쿠빌라이 칸이 허락하고 장홍략에게도 특별히 하남행성참지정사(河南行省參知政事)[17] 직책을 주었다. 장홍략은 그로부터 4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2.7. 사후
사망한 직후 추충좌리공신(推忠佐理功臣)의 칭호가 내려졌고, 은청영록대부(銀青榮祿大夫)[18], 평장정사(平章政事)[19], 상주국(上柱國)의 관직과 채국공(蔡國公)의 작위가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1] 정3품[2] 사자는 대를 이을 아들이므로 일반적으로 장자를 택하나 일찍 태어난 장유의 아들들은 대부분 요절하였고, 그가 은퇴할 당시에 장홍략이 그의 다른 아들들보다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장홍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3] 위진남북조 시대에 설치된 중국의 전근대 행정구역으로 성과 치소가 있던 중심지는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친양시(沁陽市)이다.[4] 오늘날의 후베이성(湖北省) 황강시(黃岡市) 치춘현(蕲春縣)[5] 1262년 4월에 쿠빌라이 칸이 장유에게 조서를 내려서 병사 1천 명을 박주에 파견하라고 독촉했다는 세조본기의 기록, 이후 장홍략군의 위세가 어마어마하여 하귀의 군사들이 두려움에 떨었다는 장홍략전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애초부터 장홍략이 관할구역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박주를 지켰다면 쿠빌라이 칸이 장유를 독촉하지 않았을 것이고, 장홍략의 군대가 하귀의 군대를 기세로 압도하였다는 서술은 장홍략이 그의 군대를 온전히 보존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6] 과하(涡河)의 입구라는 뜻으로 안후이성(安徽省) 벙부시(蚌埠市) 화이위안현(懷遠縣) 동부에 형성된, 과하와 회하(淮河)의 합류점을 일컫는 명칭이다.[7] 오늘날의 안후이성 쑤저우시(宿州市) 융차오구(埇橋區) 치현진(蘄縣鎭)[8] 이단은 장홍략이 하귀에게 승리를 거두기 전인 7월 20일에 처형되었다.[9] 반란을 일으킨 이단이 한족 제후였기 때문에 권력이 큰 한족 제후와 관련 인사들을 미리 징계해서 제2, 제3의 이단이 나타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10] 정3품[11] 종4품[12] 정3품[13] 종2품[14] 종2품[15] 오늘날의 장쑤성(江蘇省) 롄윈강시(連雲港市) 둥하이현(東海縣)[16] 오늘날의 장시성(江西省) 상라오시(上饒市) 포양현(鄱陽縣)[17] 종2품[18] 종1품[19] 종1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