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4:48:45

상인

장사꾼에서 넘어옴
1. 개요2. 극명히 갈리는 사회의 처우
2.1. 상업이 천대받는 문명2.2. 상업이 중요시되던 문명
3. 종류4. 법률상 상인5. 대중문화에서의 상인
5.1. 상인 속성의 세력5.2. 상인 속성의 가상인물

1. 개요

상인( / merchant, trader)은 상업 용어로, 장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경제적으로는 기업의 법률적 주체. 자기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을 이른다. 고대 중국의 맹주였던 상나라가 멸망한 후 상나라 유민들이 생업을 위해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2. 극명히 갈리는 사회의 처우

상인도 다양한 분류가 있고, 지역마다 굉장히 인식이 달랐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인식을 논하기 어렵다. 아예 상인 가문 자체가 최고 권력을 누리며 상업 이외의 분야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조선시대 한양에서처럼 '장사치'라는 상인 전체를 비하하는 표현이 쓰이며 말투까지 '뎁쇼', '깝쇼'와 같은 하인의 것을 쓰게 하며 심한 천대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도 르네상스가 유럽 만큼은 아니지만 오사카처럼 상인으로 유명한 도시가 있고, 이시다 바이간처럼 상업 윤리를 발전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우가 양면적이라서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한 것도 오사카가 상인의 도시라는 것이 문제였던 경우도 있다. 인도의 경우 상인은 바이샤라는 상위 30%보다 좀 위의 계급에 속했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대체로 상업이 천대받아 설령 거상이 되고 인본주의적인 활동을 벌여도 기존 권력자들이 무시하는 일이 있었다. 조선의 임상옥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중국에서도 상인은 견제할 계급으로 취급을 받았기에 '공상잡류', '공상이류'로 이들을 묶어 권력이 있는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 조선에서는 그나마 거상이 관직을 얻는 드문 경우는 있었으나, 한나라처럼 아예 그것도 막힌 경우도 있었다. 상인의 지위가 높던 유럽에서도 중세의 서유럽에서는 종교적으로 고리대금업과 연계된 좋지 않은 인식이 있었다. #

2.1. 상업이 천대받는 문명

중국과 이 영향이 강한 조선에서는 사농공상이라 하여 가장 천한 취급을 받았았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역시도 그의 저서 《의무론》에서 나쁜 직업의 예시로 거상이 아닌 유통업자를 들었다. 다만 중국, 조선에서는 거상조차도 일부 계층이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술과 기타 생계 수단, 즉 직업의 귀천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대체로 다음과 같이 배웠다. 우선, 사람들의 혐오의 대상이 되는 세금 징수자와 고리대금업자들의 직업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또 귀하지 않은, 즉 천한 것은 모든 고용노동자들의 생계 수단이다. 그들은 기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손으로 하는 노동력을 파는 것인데, 이들의 경우 일의 대가로 받는 보수 그 자체는 노예 상태의 임금수준이기 때문이다. 물건을 도매상인들에게서 사가지고 즉각 소매하는 것은 천하게 여겨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이익도 볼 수 없는데, 거짓말하는 것보다 더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 수공업자와 같이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모든 사람들은 천하게 평가받아야 하니, 그 까닭은 작업 장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자유인 출신은 없기 때문이다. 테렌티우스가 말하는 바로는,[1] 모든 직업 중에서 가장 천한 것은 감각적인 쾌락을 만족시켜주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즉 생선 장수, 백정, 요리사, 가금업자, 어부들이다.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에 향로 장수, 무희, 전 삼류 극단원을 첨가시켜도 좋다.
-키케로, 《의무론》 1.42.150
그러나 전문지식이 필요하거나 상당한 유용성이 있는 기술, 즉 의술, 건축술, 도덕적으로 선한 것들에 관한 교습술은 출신 성분에 적합한 사람들에게 명예로운 직업이다.
그런데 무역이 소규모라면 천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그것이 대규모로서 세계 각처에서의 물품을 수입하여 대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속임이 없이 분배한다면 비난을 퍼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니 심지어 공정하게 일단 무역을 하여 큰 재산을 마련하여 만족감을 충족시키고 나서 바다에서 항구로 활로를 찾듯이, 이제는 바로 그 항구에서 시골의 토지로 와서 그들의 진로를 개척하는 것은 최상의 찬사를 받을 만하다고까지 생각된다. 그러나 소득이 획득되는 모든 직업 중에서 농업보다 더 좋고 즐겁고 자유인 출신에게 더 작합한 것은 없다. 농업에 대해서는 전에 《노 카토》에서 충분히 언급했으니, 이 문제에 관해서는 네가 그 책을 읽고 알도록 하여라.
-키케로, 《의무론》 1.42.151
고대 로마에서는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이 많았었다. 이런 인식은 현대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주로 공산주의자연주의적 낭만적 지식인들은 서구에서의 상인의 권력에 대한 반발에 의거하여, 이른바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만악의 근원으로 비난하는 경우가 많고, 자급자족의 농업경제를 이상화하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중화권과 조선에서는 아예 상인은 권력도 가지지 못하도록 탄압을 하는 경우가 많아, 상업을 그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사기꾼, 혹은 허생전에 나오듯이 잘해봤자 투기꾼에 대응하는 어떤 것으로 보는 인식이 많았다. 그나마 양반전에서는 시대가 바뀌어가는데도 상업을 탄압하는 모습을 고리타분하게 묘사하는 부분이 있었다. 북학파는 상업에 대한 인식이 낮지 않았으나, 권력의 이너 서클에서 한동안 밀려났다. 개화파가 이들의 인식을 더 받아들이며 조선 사회에서 그나마 상인의 대우가 바닥은 면하게 되었다. 상업을 좋지 않게 여기던 위정척사파는 이런 과정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다만 개화파조차 정치적으로는 노련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경우 농자천하지대본의 정신에 입각, 같은 양민이라도 급이 있었는데 농업종사자, 기술자보다 상인을 더 낮게 쳤다.상인은 지배자들뿐만 아니라 일반백성들에게도 좋지 못한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상인의 기본 원칙인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는 원칙은 장삼이사가 보기엔 정보불균형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2] 천박한 놈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속인다. '상인=사기꾼'과 동일하다고까지 여겨졌다. 조선의 이런 억상정책은 성리학에 기인했는데 유교 역시 세상물정과 동떨어진 종교인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공자 스스로가 백성이 상업에 종사하면 민심이 어지러워진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로인해 상인에 대한 재산약탈이 자주 발생하고, 해금 정책으로 무역 자체를 금지하기까지 했다. 조선시대에 상업과 관련한 가장 많은 기록은, 상인들이 국법으로 금지된 밀무역을 행하고 부패한 관료들이 이를 묵인하고 있으니 국경통제를 보다 엄격히해야한다는 상소다. 이런 상소가 끝없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일시적 무역단절이 발생하기도 했다. 즉 국가 자체가 상업을 진흥하기는커녕 단속하려고만 했으니 상업의 발달이 극도로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한국 역시 이런 문화권에 속해있었으니 교육자나 관료에 비해 상인은 천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고령층일수록 많다. 따라서 상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고는 볼 수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상인의 헤르메스도둑의 신까지 겸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빠르게 돌아다닌다는 습성, 지혜을 상징하는 신이기에 전령과 같은 소통능력이 부각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적어도 중국보다는 정치를 상업보다 위로 여기며 구분지으려는 인식은 약했던 것이다. 도둑의 신이라고 해서 굳이 악한 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의적 등에서도 나타나는 영리함을 부각하는 것이다. 애시당초의 그리스의 여러 신은 다면적이고, 그리스의 윤리도 동양과 달리 상대성이 짙은 윤리였다. 주신으로 숭상되던 제우스도 유교적 관점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난봉꾼의 모습을 많이 가졌다. 헤르메스는 알파벳, 숫자를 발명했다고 하는데, 중국의 한자 창시자로 알려졌던 창힐과 같은 전설에서는 이런 일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중국은 탄생부터 대접이 좋지 않을 만했는데, 상인은 말 그대로 ('은(殷)나라'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진) 상(商)나라 '사람(人)'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주나라에게 조국이 멸망당한 후 먹고 살기 위해 장사라도 해야 했으며, 주나라 사람들은 장사를 상나라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하여 '상업'이라고 하였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상인'이라고 불렀다. 상인들은 중국역사 내내 제일 높은 비율을 담당하면서 심심하면 돈을 뜯겼는데 명나라 시기부터 상업에 높은 영업세를 거두는건 아예 전통이 되어버렸고 청나라의 공식외국무역상인인 공행(公行)은 심심하면 정해진 세금 외에도 다른 세금을 내야했으며 이후에도 정부의 물품조달이나 세금에 무기력하게 대응했고. 심지어 남경조약의 배상금조차 일부를 상업계층이 조달해야 하기도 했다.

현대 한국은 사실상 상업에 의존해 살고 있으며, 농민이라 할지라도 자급자족을 하는게 아니라 판매를 염두에 두고 생산하므로 외국상품의 수입관세,시장 격리등에 관심을 두는 등 상업과 무관할 수는 없다. 순수 상업인 유통업만 보더라도 롯데, 신세계 같은 대기업 종사자들부터, 2019년 기준 자영업 비율이 24.6%이며 이들 상당수가 상업에 종사하고 있기에 사실상 전국민이 상업과 연관되어있다. 그럼에도 농경사회에서 형성된 상인에 대한 비하적인 인식은 여전하여 일부 상인들의 일탈을 근거로 상인은 천한 것들 내지는 그런 취급을 받아도 마땅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은 여전히 남아있다.

근현대 이전까지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종사한 직업이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까이는 신세인데 농사나 다른 직업을 할 수 없으니 고리대금업에 종사하게 된 것인데 그래서 유대인은 더더욱 까이게 되었다. 다만 이들의 고리대금업은 베니스의 상인에서 묘사되듯 안토니오 같은 '친절한' 상인과 대비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2.2. 상업이 중요시되던 문명

모든 문명권이 그랬던 것이 아니다. 해양문명은 거의 다 상업을 중요시했다. 아니 상업으로 먹고 살아서 해양문명이 될 수 있었기에 고대에선 해양문명과 상업문명이 사실상 동의어나 다름없었다. 고대의 경우 카르타고가 속한 페니키아 문명권 전반, 그리스의 경우에도 거대한 농업식민지인 메세이아와 노예들을 거느린 스파르타는 고의로 철전을 쓸 정도로 상업을 박해했지만, 아테네는 빈약한 농업생산력 때문에 상인과 상업이 없으면 도시 자체가 유지될 수 없었으므로 상인들이 정국을 운영했다. 무역으로 인한 막대한 부와 식량수입으로 도시가 유지되었기에 아테네시 성벽안에 보호받는 아테네의 거대한 부두는 현재도 남아있다.

이렇듯 상인들이 국가 기반의 핵심이었던 경우에는 높으신 분들로부터 그에 준하는 예우를 기대할 수 있었으며, 아예 해당되는 높으신 분이 상인인 문명도 많았다. '상업 공화정'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국가의 수입에서 상업의 비중이 높았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제노바와 같은 이탈리아의 일부 공화국들, 네덜란드, 플랑드르,[3] 한자동맹에 속해있던 도시들, 노브고로드 등에서는 상인들의 대우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또, 이슬람교에서도 상인을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다. 애초에 무함마드와 그 일족도 상업으로 먹고살았던데다가, 무함마드에 뒤 이은 정통 칼리프 4명 가운데 3명이 상인 출신이었다. 이후로도 이슬람교이 전파된 국가들 중에서 상당수 국가들이 무역을 하기에 위치가 좋거나 아니면 국토의 상당수, 혹은 대다수가 사막이라 농사를 짓기가 힘들어서 무역업으로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꾸란의 구절을 통해 이자는 금지했지만 상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19세기 이전에는 중동권 상인들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이름을 떨쳤다.[4]

고려 시대에는 상인들이 의외로 대우받았던 것이 태조 왕건 자신이 할아버지 작제건 때부터 해운업으로 실력을 쌓은 상인 출신이었던 까닭에...[5] 고려 왕조가 멸망한 뒤에는 새로운 왕조에 벼슬하는 것도 싫어했던 유학자들 대부분이 상업에 투신했다고.[6] 덕분에 조선왕조 내내 개성은 양반 관료보다는 상인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덕분에 그들이 싫어했던 조선의 상업이 발전하게 되는데, 개성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송상(松商, 개성상인)들은 서울의 한강과 한성의 시전을 본거지로 한 경강(京江) 상인들과 양대 상인 세력으로 대립했고 덕분에 개성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대신 상업의 거점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 시대는 물론 일제 시대에도 대표적인 상인 집단으로써 현지에서 상권을 유지했다는 듯.

조선이 농업보다 상업을 천시한 것은 사실이나 국초 부터 화폐 통용을 위해 노력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상업에 관련된 논의가 폭주해서 북인들이 상업적 영농의 확대, 소금,산삼,은광의 개발,국가주도의 상업 활성화, 선박과 수레의 개선, 금속화폐의 주조와 유통등을 주장했으며 서인들 역시 상업의 개혁에 치중해서. 내수사와 절수(淮陽 = 궁가의 사유지로 세금을 면제받았다. 현종 시기 이들의 주장으로 상한선이 제정되었다.)혁파, 공안개정주장, 국가의 화폐(은을 합쳐서) 통제 반대를 주장했고. 이러한 노론의 주장을 결실이 맺은게 중상학파였다 조선 정부는 상업의 변화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대표적으로 17세기, 예송논쟁 전후에 서인과 남인은 각각 재부민산론(財富民散論)[7]과 이권재상론(利權在上論[8]으로 다투는 등 조선 역시 나름대로 상업 발전에 관심을 가졌었다.https://blog.naver.com/samka999/130190696765

장보고의 거대한 해상세력은 해적퇴치를 위해 해군을 건설하고 일본과 중국 신라 사이에서의 해상권을 장악한 결과 곧 무역을 시작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이들 무역선단은 청해진의 운영자금 및 장보고의 군자금이 되었고, 신라체제 자체를 뒤흔들게 된다.

하지만, 이는 모두 거상의 경우에 해당한다. 상업이 발달했던 로마의 경우에도 위의 키케로와 같이 거상은 다르게 보더라도 소규모 사업자들에 대한 시선은 많이 달랐다.물론 소규모 농민들, 평민들 역시 천대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3. 종류

4. 법률상 상인

상인(법률) 문서 참조

5. 대중문화에서의 상인

비록 계급은 평민중엔 가장 천하지만 실질적인 부의 힘은 가장 높기 때문인지, 권력자의 뒤를 대주면서 속으로는 권력의 야심을 품는 거상이라는 컨셉의 캐릭터가 자주 나온다. 중국사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에서는 여불위가 이런 모습을 많이 보인다. 또 상인은 직업 특성상 정보 수집에 능통해 정보를 사고팔거나 흘려주는 역할로도 자주 등장한다.

게임에서 등장하는 상인은 플레이어에게 엄청나게 도움을 준다. 게임 내 재화로 상인에게서 필요한 아이템을 구매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 중에서는 엄청나게 레어하고 상인 말고는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고급 아이템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MMORPG에서는 무조건 등장하며 주로 물약이나 단검, 총알, 화살 등 소모성 무기들과 간단한 아이템을 판매한다.

5.1. 상인 속성의 세력

5.2. 상인 속성의 가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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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unuchus, 2.2.26.[2] 정보불균형을 논하기 이전에 '비싸게 판다'는 행동 자체가 부도덕한 짓으로 여겨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양반들이 상인들을 조리돌림할때 아예 이문 자체를 문제시삼기도 했는데 다시말해 그들은 물건을 그냥 "원가"에 주지 않는 것을 양반을 능멸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3] 벨기에의 북부. 하지만 벨기에의 경우 신성로마와 스페인의 직접적인 영향이 있어서 네덜란드와 달리 귀족문화 쪽으로 더 발달 되었다. 상인들도 네덜란드에 비해 천시 받는 경향이 많았고, 결국 80년 전쟁 기간동안 많은 플랑데런의 상인들이 네덜란드로 옮겨 가게 된다.[4] 오스만 제국의 사례를 들어 뒷받침하자면, 오스만 제국은 전통적으로 상업이 상당히 흥했다. 당시 동서 교역로의 핵심지인 콘스탄티니예를 점거했기 때문이다. 동로마의 무역 인프라를 그대로 흡수한 오스만은 막대한 재정수입을 올렸다. 투르크인들은 유목민들이라 상업에 능하지 않았지만 제국 내에 그리스인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아랍인, 이란인 모두 실크로드 선상에 있어서 상업을 활발히 행하는 민족들이었다.때문에 16-17세기의 오스만 제국 경제를 보면 당시의 청나라처럼 전세계의 은이 집중하는 현상까지 보이고 있었다. 전통적인 대중국무역인 코발트를 가져다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화백자를 들여와 자국민과 유럽에 파는 무역은 사소한 사례이고, 당장 유럽에서 커피붐과 터키풍 카페트붐이 불자 돈방석에 앉은건 오스만 제국이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 유럽인들의 무역중심이 대서양과 아프리카 항로로 기울여져 지중해 무역루트가 크게 쇠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만제국의 상업정책은 언제나 투르크인인 술탄과 귀족들에 의한 상업통제에 그 방점이 찍혀있었다. 유럽과는 달리 오스만에서는 상인들은 정치에 대해 일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는 금융업을 금지한 이슬람의 규정과 맞물려 있기도 했다. 동로마의 인프라를 물려받은 후 쥐어짜내는 식으로 국가를 운영했지만 그 인프라가 의미없어지는 상황에서 투르크인 술탄과 귀족들은 이렇다할 대처법을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국력의 쇠퇴에 대한 대응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아타튀르크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술탄과 귀족을 전부 터키에서 추방하였다.[5] 충혜왕의 경우는 아예 궁중에 공방을 차려서 본인이 장사를 하기도 했다.[6] 서경덕 등 문사가 아예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7] 상업활동의 자유로움을 추구하여 재부가 민에게 있어야 하는것으로. 화폐를 각 관청에서 자유롭게 주조하자는 주장[8] 상업활동에 대한 통제를 통해 그 이권이 국왕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국가의 화페 제조 독점을 주장했다. 상평통보가 바로 전형적인 이권재상론의 산물이다[9] 1기: 석유장사, 3기: 약장수, 4기: 중고차 판매업[10] 둘 다 사기에 가까운 장사를 하고 다닌다(...).[11] 공식적으로는 상인이지만, 작중 행보는 깡패에 가깝다.[12] 이벤트, 인형학원 한정.[13] 사실 작중에서는 작중 최강급에 드는 무용을 자랑해서 그렇지, 원래는 북경 대명부의 제일가는 대상인이었다.[14] 게임에서는 무기상 주인이고 현실에서는 카페 겸 술집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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