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02 23:20:32

원보(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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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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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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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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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袁甫
생몰연도 불명

서진의 인물로 자는 공주(公胄). 화담과 함께 제(齊) 지역의 명사로 유명했다고 한다.

2. 생애

배우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고 사(詞)를 잘 지었다. 어느 날, 원보는 중령군 하욱(何勖)을 찾아가 스스로 극현(劇縣)의 현령에 임명시켜달라 청했다. 하욱이 물었다.
"어째서 중앙의 관직을 마다하고 지방의 현령이 되고 싶다 하는 것이오?"
원보가 말했다.
"사람에게는 각자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비단(繒) 중 제일 좋은 것은 양단(錦)이지만 양단으로 모자를 만들 수 없고, 벼가 곡물 중 제일 맛있어도 벼를 생으로 먹을 수 없는 법입니다. 무릇 성왕(聖王)은 사람을 부릴 때, 그의 그릇을 먼저 파악하고 섣불리 재능을 넘겨집지 아니하니, 어찌 모든 것이 훌륭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황패(黃霸)[1]는 주와 군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고, 수도에서도 이름을 떨쳤습니다. 자고로 정위(廷尉)의 재능으로 삼공(三公)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욱은 그의 대답에 만족하며 그를 송자현(松滋縣)의 현령으로 부임시켰다. 원보는 이후 회남국대농, 낭중령을 역임하다가 나이가 여든 남짓 되었을 때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1] 전한의 인물로 지방의 말단 관직으로 시작했으나 선제 시기에는 승상까지 오르며 출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