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13 11:38:23

완방(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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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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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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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팔달(江左八達)
사곤 필탁 광일 완방 양만 환이 완부 호무보지

阮放
(280 ~ 323)
1. 개요2. 생애

1. 개요

동진의 인물로 자는 사도(思度)로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 위씨현(尉氏縣) 출신. 죽림칠현 중 한 명인 완적과는 먼 친척 사이다.

2. 생애

일찍이 황궁에 들어가 태자 사마소의 시중 들면서 노장사상을 즐겨 읽었으나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완방은 태자와 가까이 지내며 서로 친해졌고, 이후 사마소가 즉위하자 황문시랑, 이부랑으로 점차 승진하였는데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공적이 뛰어났다. 성정이 청렴하기로 유명한 완방은 부업을 따로 운영하지 않아 이부랑이라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추위와 굶주림을 피하지 못했다. 이에 승상 왕도, 중서감 유량(庾亮)이 그에게 항상 의식주를 제공해주었다.

어린 성제가 즉위하고 외척인 유량이 집권했을 때, 조정에선 교주(交州)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완방을 교주군사, 양위장군, 교주자사로 임명하여 교주로 보냈다. 교주 녕포(寧浦)에 도착한 완방은 교지태수 양석(梁碩)을 수도로 귀환시키고, 연회를 열어 과거 도간의 부장 고보(高寶)[1]를 초청하고는 복병으로 그를 암살해버렸다. 고보의 부하들은 분노해 완방의 군대를 공격해 격파했고, 완방은 도망쳐 양성(陽城)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얼마 안가 갈증으로 사망하였다.

사망시기는 323년이면서 325년에 즉위한 성제 치세에도 활동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사관이 나이 계산을 실수했거나 오기로 추정된다.[2]


[1] 도간은 교주자사를 맡다가 조정으로부터 형주자사로 임명받고 형주를 다스리러 떠났다.[2] 진서의 이런 기록 때문에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완방이 교주자사로 활동하다가 죽은 시기를 성제가 아닌 명제 때의 일로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