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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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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330066> 일생 생애
가족 배우자 이혜련 · 장남 안필립 · 장녀 안수산
사상 민족개조론
성향 사회민주주의
사건사고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 단체 신민회 · 대한민국 임시정부 · 흥사단 · 독립협회 · 한국독립당 · 국민대표회의 · 대한인국민회
기타 연통제 · 도산공원 · 대성학교 · 도산안창호급 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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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3. 독립운동
3.1. 1900년대3.2. 1910~1920년대3.3. 1930년대
4. 사망

1. 개요

안창호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초기

현재의 남포시 천리마구역(광복 당시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1]) 봉상도에서 농부인 안흥국(安興國)[2]제안 황씨[3]의 3남으로 태어났다.[4] 당시 안씨 가문의 선산이 있는 평안남도 대동군 남관면 노남리를 속칭 '노내미'라 했고 당시 사람들은 안창호의 집을 '노내미집'이라고 불렀으며 안창호를 '노내미집 셋째'라고 불렀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부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 왔다.

어려서부터 미소년에 고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며 옛날 이야기책을 소리내어 읽기를 좋아해서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동네 노인들이 저녁이면 사랑방에 모여 노내미집 셋째를 불러다가 옛날 이야기책을 읽게 했다고 한다.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용인리에서 출생한 봉산 김씨인 김희순(金羲舜)이 세운 한학당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후에 도산 선생은 김희순 훈장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김희순의 제자 중에서 과거 급제자 4명이 있음을 기념하는 비석을 직접 세웠다고 한다.[5]

1895년 미국 북장로회 계통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救世學堂, 경신학교)에 입학해 처음 신학문을 접했고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족운동에 눈떴다. 그러나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하자 낙향하여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교육자로 변신했다. 이 시기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개신교에 입교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에 다녔다.

3. 독립운동

3.1. 1900년대

1902년 안창호는 교육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리버사이드에서 각종 일을 하면서 공부하는 고학 생활을 하면서도 1905년 정재관, 이강, 송석준, 임준기 등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다. 공립협회는 안창호가 귀국할 무렵인 1907년에는 지방회 7곳을 둔 북미 최대의 한인자치단체로 발전했다.[6] 1907년 그는 불현듯 귀국해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라고 역설하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신민회, 대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부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다. 안창호의 뛰어난 웅변은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어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1908년 안창호는 평양부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 김좌진,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창립했다.

1907년에는 조선 통감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제의로 그와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나의 모국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도 함께 서양에 못지않게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다. 협조해달라."면서 안창호를 회유하려 했다. 이에 안창호는 "한국의 개혁과 발전은 한국인들 스스로의 힘과 노력에 맡겨야 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서양의 간섭과 압력을 받았다면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박했다. 근대화, 서양에 맞섬 등을 명목으로 한반도를 침탈하던 일본의 기만적인 실상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었다.

3.2. 1910~1920년대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서 105인 사건이 일어나 서북 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안창호는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 양성을 주장했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과 같은 급진파는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안창호는 실력 양성운동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1년 다시 출국해 1919년까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을 설립했다. 기본 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었으며 단체의 상징은 기러기였다. 이후 흥사단은 3·1 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흥사단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 중이다. 보이스카우트, 한국청소년연맹 등과 같이 일선 중학교·고등학교에 동아리 형식으로 흥사단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후 박용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안창호는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계속 하다가 3·1 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설립되려 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떠났는데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임시정부 초창기에 이승만이 당시 임시정부에 없는 직함인 대통령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이는 헌법 위반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말라"고 전보를 띄웠으나, 도리어 이승만에게 "지금 이러면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니 떠들지 마시오."라는 답장만 받았다. 당시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은 그러하게 된 불가피한 사정을 함께 적어 안창호에게 답장했다.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에서는 그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하고 이승만과 정한경을 파견 대표로 정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한경이 파리로 가지 못하게 되었고 대신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를 할 것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 신채호가 주동이 된 이승만 반대 운동이 임시정부 안팎에서 격렬히 진행되었다. 안창호는 초기에는 이승만을 지지했으나[7] 후에 독립운동 노선을 바꾸었고 이승만 반대편에 섰다. 이 대립은 각 인맥을 타고 격렬한 암투로 발전했다.[8] 안창호와 치열하게 싸운 이승만은 안창호 편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적대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시절에 자신의 비서가 여운형과 사이좋게 지내자 '안창호 똘마니와 놀러다니지 말라.'고 혼냈고, 서북 지역 출신을 폄하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안창호도 이승만을 비롯한 기호파들을 적대시하였고 이승만이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못한 틈을 타 임시정부 내에 안창호파가 득세하면서 결국 이승만은 탄핵당했다.

1920년대 초반 임시정부 내부의 대립이 극심해서 옹호/개조/창조라는 3개 진영이 생겨나 극심한 대립을 벌인 적이 있다. 안창호는 개조파에 서서 이동휘와 함께 국민대표회의(1923)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 탓에 이승만, 김구와 극심하게 대립했다. 이승만은 당시 대통령이였으니 안창호와 대립했고, 김구는 이승만 정부를 강력히 옹호한 인물 중 하나였는데 이후부터 김구는 안창호 측과 대립하며 반대 활동을 하였다. 예로 1926년 5월에 임시의정원에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했는데 김구는 안창호 국무령 선임 반대 운동을 하였다.[9] 이후에도 김구 측은 안창호 측과 갈등과 대립하였다.[10][11]

1930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32년에 체포되어[12] 국내에 압송되어 5년간 수감되었다가 출옥하였고 고향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3.3. 1930년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95%88%EC%B0%BD%ED%98%B8%EC%84%A0%EC%83%9D_%EB%A7%90%EB%85%84.jpg
1935년의 안창호.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군 대보산의 송태라는 곳에 집 한 채를 짓고 은거하면서 검문하는 일본 제국 경찰들을 피해가며 그를 찾아오는 청년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평양에서 신사 참배 문제로 평양 교회와 숭실학교의 존폐 문제가 벌어지자 평안남도 도지사 가마우치 시코사쿠는 안창호에게 한 경찰을 보내어 전했다.
교회와 학교 대표자들이 신사참배에 대해 의논하다가 안창호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서는 반대 의견을 취하니, 당신이 음모를 꾸미거나 선동을 하지 않아도 당신이 평안남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동이 되는 것이오. 그러니 당신이 평남을 떠나주기를 바라고, 될 수 있으면 미국으로 가기를 바라오. 당신만 미국으로 갈 의향이 있다면 여행권은 내가 주선해 주겠소.

그러자 안창호는 이렇게 답하며 그 경찰을 돌려보냈다.
이렇게 지사께 전하시오. 만약 안창호의 존재가 민심을 악화시킨다면, 평남에 있거나 미국에 갔거나 마찬가지라고. 아마 감옥에 잡아 가두거나 죽이더라도 마찬가지라고. 2천만 한국인이 다 안창호와 같은 사람인데 일개 안창호를 송태에서 내쫓았다는 것이 불명예나 될 뿐이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고.
파일:Ahn_Chang-ho_1937.jpg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도산 안창호[13]

아래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당했을 때 경성지방법원 검사의 심문에 답한 것이다.
검사(이하 검): "너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
안창호(이하 안):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는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검: "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안: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검: "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
안: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검: "너는 일본의 실력을 모르느냐?"
안: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14]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15][16]

4. 사망

1937년 6월 28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또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37년 12월 윤치호의 여러 번에 걸친 탄원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지속되는 고문과 감옥살이로 인하여 폐렴, 간경화 등 여러 질병을 앓았다. 출소 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였으며 막대한 치료 비용을 윤치호김성수가 지원해주었으나 이겨내지 못하고 59세[17]의 일기에 1938년 3월 10일 간경화로 별세하였는데 정확하게는 3월 10일 0시 5분 세상을 떠났다. 위인전에서 자주 나오는 그의 유언은 "목인아[18],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위키백과에 따르면 저 말을 한 뒤에도 한동안 살아있었고 다른 말도 했고 유상규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죽기 전 미국에 있던 가족들이 국내로 돌아와서 그를 만나고자 했으나 안타깝게도 무산되었다. 현재 상황이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에 오지 말라고 안창호 본인이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안창호의 동지들도 가족들의 귀국을 만류했다. 가족들을 일제가 어떤 식으로 이용해서 압박할지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는데 안창호의 두 아들들은 자신들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괜찮다고 하였지만 동지들은 일제가 그런걸 지킬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가족들도 뜻을 꺾어야 했고 안창호는 끝끝내 가족들을 보지 못한 채 사망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동포들이 겪은 고통에 마음이 아플 뿐이오. 일본자기가 일으킨 전쟁으로 망할 것이오. 그러니 아무리 힘들더라도 참고, 힘을 모으시오.
1938년 3월 10일, 동포들에게 남긴 유언

일제는 안창호의 사망이 끼치는 파급 효과를 우려했으며 가족들에게 “추도회를 열지 말 것과 장례식 주관 및 참석자는 가족 친지 등 몇 명에 한하고 고별식에도 이들 이외는 들어올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일반인의 조문이 금지되었고 친족이 상복을 입는 것까지 금지되었으며 영안실에는 정사복 경찰관 40여 명과 고등계 형사들을 배치해서 조문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그들의 언행을 사찰했다. 별세한 직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망우리로 향하는 출입로에는 '불온언동자'를 색출하고 소요 사태를 방지하려는 경찰들이 쫙 깔렸다. 영구차 앞뒤로는 경찰차가 경계를 폈으며 경관들은 가로수 수효만큼 나열하여 망우리로 향하는 길가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경계를 폈다. 당시 영구차가 묘지로 갈 때 망우리 방향 통행은 일절 금지됐으며 망우리에 도착한 안창호의 은 즉시 매장됐는데 묘지에 심으려고 가지고 갔던 무궁화 묘목은 압수됐다.

일본제국의 현상금으로 인해, 국내에 들어와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안창호를 추도하는 한자로 된 만시(晩詩)[19]를 지어보내 애도를 표했다.#
파일:우남 이승만의 만시(輓詩) 도산천고.jpg
이승만한시(漢詩) '도산천고' 원본.
도산천고(島山千古)

妻子天涯哭 처자는 하늘가에서 울고
親朋海外驚 친한 벗은 바다 멀리서 놀랐네
國亡人又去 나라가 망하자 사람마저 떠나가니
嗚咽狽江嗚 대동강물도 목이 막힌 듯 울어대네.

사후 30년이 넘은 1973년 서울특별시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부인 이혜련과 도산공원에 합장되었다.


[1] 북한 당국이 선전하는 '강선의 정신력'이라는 단어 유래가 바로 인근의 강서군 초리면 강선리이다.[2] 족보명 안교진(安敎晋).[3] 황기연(黃基璉)의 딸이다.[4] 정작 족보에는 형인 안치호(安致鎬)와 도산 안창호 자신만이 등재되어 있는데 이는 둘째 형이 1900년 요절했기 때문이다.[5] 평안남도 대동군 군민회가 발간한 《대동군지》라는 책에 나와 있다. 김희순 훈장의 손녀가 을지로에 있는 고기집인 우래옥의 사장이라고 한다.[6] 공립협회는 이후 1909년 국민회, 1910년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된다.[7] 애당초 위임통치 청원사건이 안창호도 참여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이승만 반대파가 이승만을 축출하려고 하자, 안창호는 자기도 찬성했으니 나부터 축출하라고 나서서 이를 막기도 했었다.[8] 한편 여운형은 출신지로 보면 이승만의 기호파일듯 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창호의 서북파로 분류되었다. 젊을 때부터 안창호를 가장 존경하고 스승으로 모시던 사람이 여운형이기 때문이다. 여운형이 말도 잘하고 여러 사람과의 교류에 능한 사람인데, 안창호를 지지하는 말을 자주 하다보니, 이는 김구와 이승만이 여운형을 싫어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9] 오영섭, 안공근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숭실사학회 35, 2015, 244쪽[10] 이만열, 도산 안창호와 백범 김구, 도산사상연구 8, 2002, 184~188[11] 통념과는 달리 김구는 이승만과 오랫동안 같은 진영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두사람은 사적으로도 1살 아래인 김구가 이승만을 형님으로 부르며 서로 호형호제했을 정도로 가까웠고, 광복 후에도 신탁통치 반대를 주도하는 등 한동안 같은 편이었다. 둘이 갈라선 것은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한 단독정부의 수용 여부에 따른 결과였다.[12] 안창호가 체포된 것을 살펴보면 불운이 겹치고 겹쳤다.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했었을 때 김구는 윤봉길의 의거 하루 전에 상하이 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미리 통보하며 잠시 피신할것을 알렸다. 다만 안창호에게는 통보하지 않았는데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이 개방적인 조직이라 자칫 잘못하면 비밀이 샐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거 당일 아침에는 안창호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사람 여럿을 보냈는데, 하필 모두가 전부 길이 엇갈려 안창호를 만나지 못하여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윤봉길은 체포된 뒤 일제 헌병대의 심문에 의거에 사용한 폭탄을 독립운동가 이유필에게 받았다고 진술하였고, 일제 군경은 이유필의 집을 급습하여 조사하게 되나 이유필 역시 미리 피신하여 집에 없었다. 그러나 하필 이 날 이유필의 아들에게 볼일이 있었던 안창호가 일제 군경이 조사 중에 있던 이유필의 집에 방문하였고, 안창호가 제발로 찾아오자마자 즉시 그를 체포했다. 사전에 여러 명이 피신을 권유하는 전갈을 보냈으나 모두 길이 엇갈려 소식을 알지 못하였고, 하필 윤봉길이 조력자로 진술하여 일제 군경이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던 이유필의 집에 마침 또 볼일이 있어 제발로 찾아가서 체포당한, 기가 막힌 불운이다.[13] 순국 4개월 전인 1937년 11월 10일, 서대문형무소. 남아 있는 사진 중 그의 생전에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이다.[14] 이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서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현대 국제사회가 성립된 이유다. 막대한 군비를 들여 가며 관리해야 하는 수천만 수억의 국민보다는 그냥 무역 대상으로 삼아서 돈이나 벌어다 주는 다른 나라로 만드는 게 경제적으로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2차 대전이 끝나고 식민지인들의 인식이 깨어나면서 이러한 문제점은 더욱 불거졌으며, 결국 다수의 신흥 독립국가들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국제사회가 성립된 것이다.[15] 독립운동가의 대표격인 그의 사상과 신념을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그저 대한의 독립만을 목표로 삼지 않고 더 나아가 한일 양국의 평화까지 담긴 명언. 실제로 (국민감정은 차치하고) 우호국가로서 서로의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며 발전하고 있는 현 한일관계를 생각해보면 탁월한 선견지명이다.[16] 당시 일본에서도 이시바시 단잔 동양경제신보 논설위원을 중심으로 한 일부 강경한 자유주의자들은 "식민지로 가지고 있는 대만, 조선, 만주를 모두 독립시켜주고 대등한 관계에서 우호적으로 무역을 하는 가공무역국가로서의 소일본론"을 주장하고 있었다.[17] 안창호는 그 해에 환갑이었으나 환갑을 맞이하지 못하였다.[18] 한일합방의 원흉인 메이지 덴노의 본명 무쓰히토(睦仁). 사망 당시의 일본 천황이었던 유인(裕仁, 히로히토)이라고 말했다는 버전도 있다.[19] 輓詩: 죽은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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