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실록(實錄)은 동아시아권에서 편년체 역사 기록 양식 및 이 양식에 따라 쓰여진 기록을 총칭하는 말이다. 전근대 중국, 한반도, 일본, 베트남의 왕조들이 실록을 출간했으며, 현대까지 실록을 만들고 있는 나라는 군주제를 시행하는 일본이 유일하다. 실록이라는 명칭은 "실제로 있었던 일(事實)을 그대로 기록한다(直錄)"라는 뜻.본래 중국에서 황제의 일대기를 사관이 기록했던 것에서 유래하며 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관의 원래 기록은 사초(史草)라고 부른다.
2. 각국의 사례
2.1. 중국
최초의 실록은 중국 남북조시대(439~589) 이전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며 남조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의 행적을 기록한 양황제실록이 기록 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실록이다. 그러나 실록의 제작체계가 마련된 것은 당나라 때의 일로, 황제가 사망하면 기록관원인 기거주(起居住)의 기록을 중심으로 문서와 기타 기록을 모아 편찬하는 형식이었다. 또한 중국의 실록은 각 왕조의 정사(正史)를 기록하는 총서를 편찬할 때 기초자료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왕조역사서는 서(書)나 사(史)로 부른다[1].현존 중국 실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당순종 실록 5권, 그 다음이 송태종 실록 일부 20권이다. 나머지 명 이전 실록들은 죄다 유실되었다. 명나라의 대명실록(大明實錄)[2]은 태조 홍무제부터 천계제까지[3] 2,964권, 청나라의 청실록(淸實錄)[4]은 청태조부터 광서제까지 4,404권이 있다.[5] 하지만 분량상으로는 같은 시기 조선왕조실록이 앞서는 편이다. 일례로 대명실록의 경우 글자 수는 총 1,600만 자 정도인데 조선왕조실록은 총 4,964만 자 이상이다.[6]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명·청 실록도 볼 수 있다. 다만 번역이 안 된 원문만 제공한다.
2.2. 한국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의 원사료가 삼국사기에 반영되어 있으며 8세기 당시 작성된 신라의 사초 목간이 출토되기도 했기 때문에, 한국에도 원래부터 사관과 기록 체계, 그리고 실록에 해당하는 기록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 방식의 '실록'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918~1392) 때로, 8대 현종 대에 이르러 창업주 태조 왕건부터 전왕이었던 7대 목종 왕송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여 7대실록 36권을 편찬하게 한 것이 최초이다. 이 실록은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면서 왕실 역사를 기록했던 서적들이 모두 불타 다시 역사서를 편찬한다는 의미로 제작된 것이며, 1034년 덕종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려실록 제작체계는 중국과는 다른 구조로, 감수국사, 수국사, 동수국사, 수찬관, 직사관의 5대 편제였으며, 사관은 시정을 기록하는 관리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이후 덕종실록[7]이 편찬되었으며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 공양왕의 실록이 추가로 편찬되었다. 고려사 기록에서 실록이 편찬된 왕은 상기 21왕이 전부라서 나머지 왕들은 실록을 편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국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역대왕의 실록은 모두 편찬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고려실록 중 현존하는 실록은 없다. 조선 시기 한양 춘추관에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가 임진왜란 때 타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조선왕조실록도 같이 불탔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전국 각지에 백업본을 분산 배치해 둬서 한양이 불타도 복원이 가능했다. 반면 지나간 왕조의 실록인 고려실록은 그냥 보관에 의의를 두는 상태였으므로 백업은 따로 해놓지 않았고 그대로 원본이 사라진 것이다.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는 조선시대의 고려사는 고려실록보다 훨씬 적은 분량으로 요약한 것으로, 고려실록을 얼마나 반영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애석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한국 실록의 대표이자 현존하는 유일한 한국의 실록인 조선왕조실록이 등장한다. 고대와 중세 국가를 통틀어 세계 역사상 가장 자세한 통치 기록임과 동시에 편년체 역사서 중 가장 세밀한 기록으로, 당시의 국내 및 국외 정세와 천문현상, 자연재해, 기상, 생활상, 지리, 인물 등 여러 방면에서 참고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매년 연말마다 공영방송인 한국방송공사의 프로그램인 KBS 영상실록이 제작되어 방영된다.
2.3. 일본
일본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879년(간교 3년)에 55대 몬토쿠 천황의 일대역사를 다룬 일본 몬토쿠 천황 실록(日本文徳天皇実録)이 완성된 것이 최초의 실록[8]이다. 몬토쿠 덴노의 뒤를 이어 즉위한 56대 세이와 천황의 명으로 편찬된 이 실록은, 후지와라노 모토츠네(藤原基経), 미나후치노 토시나(南淵年名), 미야코노 요시카(都良香), 오오에노 오톤도(大江音人)의 4인 체제로 제작되다가 877년에 미나후치노 토시나, 오오에노 오톤도가 잇따라 사망하자 스가와라노 코레요시(菅原是善)가 뒤를 이어 참가해 3인 체제로 완성시켰다.뒤를 이어 56대 세이와 천황부터 57대 요제이 천황, 58대 고코 천환 3대 3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이 901년(엔기 원년) 8월에 완성되었다. 59대 우다 천황의 명으로 편찬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이 우다 천황이 897년(칸표 9년) 황태자인 아쓰히토(敦仁) 친왕에게 양위하면서 작업이 일시중단되었다. 이후 60대 다이고 천황으로 즉위한 아쓰히토의 명으로 그 해 다시 편찬재개에 들어가 901년에 완성시켰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말기에 율령제의 쇠퇴로 더 이상 실록간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의 천 년이 지나 천황 중심의 정부가 들어선 메이지 유신 이후에 실록 간행이 재개되었다.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일본은 군주제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실록을 지금도 계속 만들고 있으며, 궁내청(패전 이전에는 궁내성)에서 편찬을 주도한다. 전근대 한반도나 중국처럼 천황이 죽으면 편찬 작업을 시작하며, 완성되면 현재 재위 중인 천황에게 바쳐진다. 지금까지 고메이 천황기(孝明天皇紀), 메이지 천황기(明治天皇紀), 다이쇼 천황실록(大正天皇実録), 쇼와 천황실록(昭和天皇実録)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완성되었다고 해서 출간이 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메이지 천황기는 1933년 완성되었으나 출판은 1968년에서야 메이지 연호 100주년을 맞아 이루어졌고, 다이쇼 천황실록은 1937년 완성되었으나 출간되지 않다가, 2001년에 일본에서 제정된 정보공개법에 따라 아사히 신문이 정보공개를 청구해 2002년부터 11년간 4차례에 걸쳐 정보공개를 통해 출간되었다. 쇼와 천황실록은 2014년에 완성되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출간되었다. 다만 다이쇼 천황 실록은 본래 비공개 자료였다가 정보공개 청구 때문에 공개된만큼 출간 당시에는 전체의 3% 부분이 비공개 처리되어 있었고, 2015년에 NHK의 정보공개 청구로 인해 비공개 처리를 대부분 해제한 다이쇼 천황실록이 재출간된 바 있다. 지금도 비공개 처리된 부분이 없지는 않은데 주로 다이쇼 천황의 의료진단서나 성적 등이 개인정보 문제로 비공개 처리되어 있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에도 막부에서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부터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까지 역대 쇼군의 언행과 치적을 편년체로 편찬한 역사서인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가 있다.
2.4. 베트남
응우옌 왕조 시대에 쓰여진 대남식록(大南寔錄)[9]이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도 응우옌 왕조는 유지되었기에 1802년부터 1945년까지 기록되었다. 이 당시 베트남이 황권 강화와 프랑스의 속국이라는 상황으로 인해 편집과 기록에 있어서 황실과 프랑스 식민당국의 눈치를 봐야 했지만, 어쨌든 베트남 근현대사와 근처 나라의 정세를 연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이다.총 584권으로 한문으로 기록되었다. 1960년대부터 1978년까지 북베트남에서 번역이 진행되어 베트남어 번역본이 순차적으로 출간되었고, 남베트남에서도 별개의 번역본이 순차적으로 출간될 예정이었지만 혼란과 남진통일로 인해 끝을 보지 못했다, 2000년대 초부터 새로 개정한 번역본이 출간되고 있다. 단, 바오다이 황제에 대해 기록한 대남식록은 현재 소실되어서 없다. 물론 기록은 해놓았지만 1960년대 남베트남이 혼란에 빠지면서 실록 자체가 사라졌다. 다만 프랑스 식민당국에서 남겨놓은 기록물들은 있기 때문에 이걸로 보충한다는 듯.
2.5. 대만
동녕 왕국 2대 정경 시대에 양영이 선왕실록(先王實錄)을 집필했다. 선왕은 정성공을 뜻한다.[1] 고려사도 이처럼 고려실록을 기초자료로 하여 편찬되었다.[2] 혹은 황명실록(皇明實錄)이라고도 한다.[3]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실록은 명나라의 멸망으로 인해 편찬되지 못하였다. 역사기록을 맡은 관리인 주국정은 기록들을 가지고 강남으로 도망쳐 살았다가 그 후손이 장정롱이란 사람에게 팔았는데 덕분에 문자의 옥 중 하나인 명사집략 사건이 벌어진다. 한편, 중간에 폐위된 건문제와 경태제의 실록은 별도로 편찬되지 않았고, 대신 영락제의 실록인 태종실록과 정통제의 실록인 영종실록을 편찬할 때 해당 황제의 재위기간을 포함시켜 편찬하였다.[4] 만주국에서 대청역대실록(大淸歷代實錄)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5] 광서제의 실록은 청나라가 망한 후 1921년에 편찬되었고,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재위 기간의 기록은 실록의 양식을 따라 '선통정기'라는 제목으로 편찬되었다. 청나라는 찬탈이나 중조가 없었기 때문에 명실록과 달리 독립적인 실록이 편찬되지 못한 황제는 선통제 외에는 없다.[6] 다루는 기간의 차이를 고려하면, 명실록의 분량은 조선왕조실록의 60% 정도 분량이다. 분량에 비해 명실록의 권수가 많은 이유는, 명실록의 한 쪽당 글자 수가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적기 때문이다.[7] 선대 현종은 실록 편찬 여부에 대한 당대 기록이 없다.[8] 일본어로는 じつろく/지츠로쿠라고 읽는다.[9] '실록(實錄)'이 아니라 '식록(寔錄)'인 이유는 명명제의 황후 호씨실(胡氏實)의 이름을 피휘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