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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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謝奕(309 ~ 358)
자는 무혁(無奕). 진군 양하 사씨 출신으로, 사안, 사석의 형이자, 명장 사현의 아버지이다. 그의 행적 자체는 재상에 장군이 된 동생들에 비하면 수수하지만, 친구를 잘 만나 사씨 집안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2. 생애
젊어서부터 명성이 있어, 섬현 현령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이후 진릉태수에 임명되었다. 당시 서주자사였던 환온과 어렸을 적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항상 겸허히 행동하면서 친분을 과시하지 않았다.345년, 환온이 안서장군, 형주자사로 승진하여 서쪽으로 이동할 때, 환온은 사혁과 멀리 떨어지는 것을 자못 아쉬워하였지만 사혁 본인은 이에 대해 무심했다. 이런 환온의 마음을 눈치챈 아내 왕씨는 남편에게 그를 따라 서쪽으로 갈 것을 종용하니, 사혁은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태수직을 반납하고 환온의 사마가 되어 환온을 따라 형주로 갔다. 형주에 도착한 사혁은 자신보다 상관인 환온의 집에 자주 놀러가 평소 친구를 대하듯이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즐겁게 놀기만 했다. 환온은 그런 사혁을 나무라지도 않았고, 자신의 집을 방문했다가 당황한 손님들에게 "우리 사마는 세속을 초월했습니다."라고 웃으며 소개해주었다. 이렇게 둘의 친분은 형주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357년, 예주를 다스리던 사촌형 사상이 세상을 떠났다. 사상은 덕정을 펼쳐 예주 백성들이 그를 매우 그리워하니, 동진 조정에선 사혁을 도독예사기병사주군사(都督豫司冀幷四州軍事), 안서장군, 예주자사로 삼아 예주를 다스리게 했다. 사혁은 예주를 1년간 다스리다가 358년에 사망했다. 목제는 그를 진서장군으로 추증하였다. 조정에선 예주자사직을 그의 셋째 동생인 사안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사안이 사양하여 넷째 동생 사만이 사혁의 뒤를 이어 예주자사가 되었다.
환온은 사혁 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인 사씨 집안도 항상 챙겨주었는데, 그 덕에 사혁은 환온의 사마에서 예주자사로 승진할 수 있었고, 평범한 귀족 가문 정도였던 사씨 집안 또한 동진의 유력 명문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사혁의 동생인 사안이 동진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 덕분이었지만, 사안은 오히려 동진의 황실 편에 서서 왕표지 등과 같이 환씨 가문을 견제했다. 하지만 환온은 원래 성격도 호방하고, 사혁과의 우정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사혁 사후에도 정치적으로는 사씨와 환씨가 서로 반목해도 사적으론 친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3. 기타
사혁은 성격이 거칠고 말을 함부로 하고 다니기로 유명했다. 한번은 자신보다 직책이 높은 양주도독 왕술(王述)에게 분노하여 그의 앞에서 욕을 한바가지 퍼부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왕술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려 벽을 마주한 채 반나절이 지나도록 그렇게 서있었다. 욕을 하다 지친 사혁이 마침내 돌아가고 나서야 자리에 앉으니, 사람들은 모두 왕술의 현명함을 칭찬했다고 한다.여기에 더해 사혁은 엄청난 애주가라, 현령 시절 법을 어겨 잡혀온 노인이 술을 뇌물로 바치자 그대로 풀어줬다는 일화가 무려 정사인 진서에 당당히 적혀있다. 또, 술에 취해 남들 앞에서 자신의 절친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환온에 대한 험담을 함부로 늘어놓은 적이 자주 있었는데, 남들 같으면 손절당해도 싼 욕설에 가까운 소리였지만 환온은 이를 전해듣고도 단 한번도 사혁을 책망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