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6 08:13:05

마로니에공원

서울특별시의 공원
마로니에공원
Marronnier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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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69e50,#383b40><colcolor=#fff>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04
(동숭동 1-124)
개원일 1982년 4월 29일
면적 5,802㎡
분류 근린공원
개방 기간 연중무휴
개방 시간 항시 개방
이용료 무료
관리 서울특별시 중부공원여가센터
운영
1. 개요2. 역사
2.1.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캠퍼스 시절2.2.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캠퍼스 시절2.3. 서울대학교 이전 이후2.4. 공원화 이후
3. 특징4. 내부 시설
4.1. 아르코미술관4.2. 아르코예술극장4.3. 예술가의집4.4. 야외무대4.5. 카페
5. 교통편6. 주변 지역7. 여담

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근린공원. 면적은 5,802㎡이며, 서울특별시 중부공원여가센터에서 관리하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이 있었다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에 남은 땅을 공원화한 것이다. 마로니에공원이라는 이름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캠퍼스 시절부터 이곳에 있었던 마로니에 나무(가시칠엽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현재도 세 그루가 남아 있다.[1]

2. 역사

2.1.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캠퍼스 시절

파일:f3ed37b2a71ad2ebde1771e6770f6474.jpg
경성제대 법문학부 전경
파일:a0285326_17091346.jpg
경성제대 시절 건물 배치도[2]
본래 이곳은 베네딕도회 소유 부지였는데, 조선총독부1922년부터 경성제국대학 설립에 착수하면서 이 부지를 매입하였다. 1925년 8월 15일부터 착공, 이듬해인 1926년에 완공하여 이곳에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가 개교하였다. 1931년에는 경성제대 본관 건물[3]이 낙성되었는데, 이 건물은 지금도 헐리지 않고 공원 안에 남아 있으며, 1981년사적 제278호로 지정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이 경성제국대학을 인수하였고, 이듬해인 1946년 8월 22일에 경성제국대학이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 법문학부·이공학부·경성공업전문학교(이하 경성공전)가 통합되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이 되었다. 동숭동의 舊 법문학부 캠퍼스와, 바로 옆에 있던 舊 경성공전 캠퍼스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캠퍼스로 통합되었으며, 지금의 마로니에공원 자리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캠퍼스의 일부였다.

2.2.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캠퍼스 시절

파일:서울대 문리과대학 전경.png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시절 전경[4]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대 문리과대학 앞으로 대학천이라고 하는 실개천이 흘렀는데[5], 문리과대학 학생들은 이 대학천을 가리켜 센강으로, 대학천을 건너가는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6] 캠퍼스 안에는 경성제대 시절에 심은 마로니에 나무(실은 일본칠엽수)가 있었고, 이 마로니에 나무가 프랑스 파리에 많으니, 아마 이러한 까닭으로 문리과대학 교정 안팎을 파리에 빗대 표현한 듯하다.
파일:서울대 시계탑.jpg
일본칠엽수 옆에 있던 시계탑
서울대신림동에 있는 지금은 서울대의 상징이 정문의 조형물이지만, 이 당시에는 문리과대학 안에 있던 일본칠엽수와 시계탑이 서울대의 상징이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들이 만남의 장소로 애용하였다. 공원화 이후에 이 시계탑은 헐려서 지금은 없다.

이렇듯 교정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당시 재학생들에게는 대학 생활의 낭만을, 대학생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대학 생활에 대한 로망을 심어 주었다. 지금도 서울에서 오래 산 60대 이상 시민들은 서울대 문리과 캠퍼스이었던 시절의 이곳 풍경을 회상하곤 한다.

서울대 문리과대학이 있던 곳인 만큼, 이곳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시작된 곳이기도 했다. 4.19 혁명이 터지고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1960년 4월 25일에 서울대학교 교수진이 문리과대학 캠퍼스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처음으로 교수들이 시위에 참가한 것이었다. 서울대에서는 이를 기념해 교정에 4.19 기념탑을 세웠는데, 이 때문에 지금의 마로니에공원 안의 정원은 당시에는 4.19 광장이라고 불렸다. 공원화 이후에는 4.19 기념탑도 없어졌다.

6.3 항쟁이 처음 벌어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1964년 3월 24일에 서울시내 각 대학생들은 서울대 문리과대학 캠퍼스에 모였고, 시내로 나가 가두시위를 벌였다. 5월 20일에는 대학생들이 삼베 옷을 입고 지금도 공원 안에 남아 있는 마로니에 나무 밑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은 일종의 시국선언이라고 할 수 있었다.[7][8]

이처럼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는 1960년대까지 한국 학생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는데, 1974년에 동숭동 캠퍼스가 신림동으로 이전하게 되자, 학생 운동의 중심지가 서울시내 각 대학으로 분산되고, 시내에서 멀리 떨어지게 된 서울대는 학생 운동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등의 지각 변동도 있었다. 이 때문에 서울 중심에 있는 서울대를 주축으로 시위를 하는 게 껄끄러웠던 정부가 일부러 관악산 기슭에다가 쳐박아 버렸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다.

서울대 캠퍼스가 이전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캠퍼스의 포화와 학부들의 분산으로 인한 불편함이었다. 사실 학생 수는 나날이 늘어 가고, 학과와 학부는 계속해서 늘어나는지라 1950년대 말에 이르면 이미 캠퍼스는 포화 상태가 되는 데다, 경성제대 설립 때부터 학부들이 서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고, 광복 이후 다른 전문학교들까지 통합하면서 학부들이 다 떨어져 있는 형태가 된 서울대는 캠퍼스 통합이 절실했다. 동숭동 캠퍼스를 확장하자니 이미 주변 땅값이 만만찮았으니, 1960년부터 이미 캠퍼스 이전 구상이 있었다. 1967년에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전 부지를 확정짓고, 1974년부터 순차적으로 이전을 시작하였다.

한편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후에 문리과대학은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으로 분리되었다. 따라서 서울대 문리과대학이라 하면 동숭동에 있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

2.3. 서울대학교 이전 이후

1975년, 대한주택공사는 동숭동 캠퍼스 자리에 중산층용 아파트를 지을 계획을 세운다. 30~40평대로 1,200세대, 평당 40만원에 분양가가 확정되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부촌이라고 하는 반포주공아파트나 잠실주공아파트조차 20~30평대로 지어진 것을 생각하면, 주공아파트치고는 상당한 호화 주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시민들의 반대에 부딫혀 아파트를 짓는다는 계획은 철회하고, 대신 공원화로 가닥을 잡았다.

동숭동 캠퍼스가 완전히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후, 문리대에서 이공계열 학과들이 있던 부지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캠퍼스로 개편되었고, 인문계열 학과들이 있던 옛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캠퍼스 부지는 구 서울대학교 본관 건물만 남기고 모두 헐었다. 구 서울대학교 본관 건물에는 문화예술진흥원이 입주하였고, 1981년에는 구 서울대학교 본관이 사적 27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산하 '예술가의 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1979년에는 옛 문리과대학 본관 건물을 헐고 김수근이 설계한 미술회관(現 아르코미술관) 건물이 들어섰고, 바로 옆에 있던 옛 중앙도서관 자리에는 1981년에 마찬가지로 김수근이 설계한 극장(現 아르코예술극장) 건물이 들어서면서 전시공연이 열리는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정원에 있던 몇몇 시설물도 철거되기는 했지만, 정원 자체는 그대로 남았으며, 서울대의 상징이었던 시계탑은 없어졌지만 경성제대 시절부터 있었던 마로니에 나무는 남았다. 이 나무가 옛 동숭동 캠퍼스를 상징하는 유물이 되면서 사람들은 이곳을 '마로니에광장'이라 이름 붙였다. 이것이 1982년에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그대로 마로니에공원이 되었다.

2.4. 공원화 이후

서울대학교신림동으로 이전한 뒤에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가톨릭대학교, 한성대학교 등이 남았고, 마로니에공원은 대학로에서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5년부터 마로니에공원을 중심으로 대학로 일대에 '문화예술의 거리'를 조성하면서 신촌 등지에 있던 예술인들이 이곳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대학로가 연극·뮤지컬메카가 된 것도 이 즈음부터이며, 학전을 비롯한 극단들이 마로니에공원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80년대 일본 방송에서 취재한 대학로 풍경
(2분 11초부터)
이때 당시 마로니에공원은 대학가 문화의 중심지로서, 대학 생활의 낭만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매일 버스킹이 열리고, 주말에는 대학생들의 거리 축제가 열렸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전국 여성백일장 축제가 1983년부터 2008년까지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렸다. 그 중 버스킹은 지금도 볼 수 있다.

2002 한일 월드컵 때는 시청광장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거리 응원 장소였다.

3. 특징

성균관대학교 이공계열이 경기도 수원시자연과학캠퍼스로 옮겨가고, 2000년대 등어서 대학가의 중심지가 홍대로 옮겨가면서 예전과 같은 위상을 가지지는 않지만, 여전히 대학로 일대 상권의 중심지로서 사람이 붐비는 곳이다.

공원 내부에는 아르코미술관, 아르코예술극장, 예술가의집, 카페, 야외무대 등이 있다. 아르코미술관과 아르코예술극장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로,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원 남쪽에는 사적 제278호로 지정된 구 서울대학교 본관 건물이 있는데,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는다. 이 건물은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산하 '예술가의집'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르코미술관과 아르코예술극장 건물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가을에는 노란색 은행 나무와 붉은 벽돌 건물이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 아르코미술관 앞에는 마로니에 나무로 알려진 일본칠엽수 세 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그 크기가 공원 안에서 단연 으뜸이다.

대학로와 바로 맞닿아 있고, 공원에서 바라보는 정면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관이 보인다. 이 건물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시절에 지어진 건물로, 100년이 넘은 건물이다. 아르코미술관 좌측으로 동숭동 대학로 상권과 연결되는 출입구가 있다.

4. 내부 시설

4.1. 아르코미술관

4.2. 아르코예술극장

4.3. 예술가의집

4.4. 야외무대

4.5. 카페

5. 교통편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와서 40m 정도 걸으면 바로 좌측에 공원이 있다. 버스로는 혜화역2번출구.마로니에공원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서울시티투어버스도 마로니에공원 앞에 정차한다.

6. 주변 지역

마로니에공원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서울대학교병원이, 남쪽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본부가 있으며, 동쪽과 북쪽에는 대학로 상권이 있다. 상권으로 연결되는 동쪽 출입구로 나와서 좌회전한 뒤, 90m 정도 걸으면 우측에 대학로의 또 다른 상징인 광장빌딩 건물이 보인다.

동쪽 출입구에서 직진한 뒤, 동숭길로 접어들어 우회전하여 50m 정도 걸으면 좌측에 낙산공원으로 연결되는 낙산길이 나온다. 동숭길과 낙산길이 만나는 곳에서 남쪽으로 60m 정도 가면 이화장길인데, 이화장길을 따라 쭉 내려가다가 이화동주민센터에서 8시 방향으로 좌회전해서 쭉 올라가면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살았던 이화장이 나온다. 이화장 입구에서 우측 계단을 오르면 1박 2일에서 이승기가 다녀간 걸로 유명한 이화동 벽화마을이 나온다.

공원에서 길을 건너서 140m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학림다방이라는 다방이 있는데, 이곳은 1956년에 개업한 역사가 깊은 다방으로, 서울에 남아 있는 다방 중에서는 제일 오래되었고, 전국에 남아 있는 다방 중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다방으로 알려져 있다.[9]

7. 여담

날씨가 좋은 날이면 공원 인근의 공연장에서 하늘 위로 날아다니는 연예인 유령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원래 이 자리에는 수령이 400년이 넘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어서 동숭동의 당산나무 노릇을 했는데, 이 나무 아래서 무당들이 굿을 벌이다 보니 나무에 신기가 서렸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잘려서 사라졌지만, 그 신기는 주변에 있는 은행나무 다섯 그루로 흩어져 아직도 신기가 남아 있다는데, 그 나무들 옆에서 하늘을 한참 보면 날아다니는 연예인 유령이 보인다는 것이다. 가수배우를 비롯한 문화예술 계통의 직종을 꿈꾸는 사람이 그곳에서 기도를 하면 대성하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

이외에도 대학로 일대에서 귀신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대학로에 있는 극단 출신 배우나 대학로를 자주 찾는 연뮤덕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편이다. 연예인이나 그런 쪽에 기질이 있는 사람이 무당 팔자와 비슷하다는 속설도 있지만, 귀신들이 본래 음악이나 연극·영화 같이 화려한 것들을 좋아해서 모여든다는 속설이 있다. 대학로는 극장와 배우들이 몰려 있는 곳이니 귀신도 많이 모일 수밖에 없다. 풍수지리적으로는 이곳 대학로 일대가 원래 음기가 센 곳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속설일 뿐이니만큼 진지하게 믿을 필요는 없다.
[1] 사실 이것은 진짜 마로니에가 아니라 마로니에와 친척 관계에 있는 일본칠엽수이며, 서울대학교가 경성제국대학이던 시절에 한 일본인 교수가 심은 것이다. 따라서 마로니에 공원에는 이름과 달리 진짜 마로니에가 없다.[2] 도로 오른쪽이 공원 자리에 있던 법문학부 캠퍼스다.[3] 법문학부 본관과는 다른 건물이다.[4] 앞에 흐르는 실개천이 학생들 사이에서 센강으로 불리던 대학천(大學川)이었고, 그 위로 놓인 다리가 미라보다리로 불리던 응란교(凝鸞橋)이다. 뒤에 보이는 민둥산은 낙산이다.[5] 원래 이름은 흥덕동천(興德洞川)이었다. 1978년에 복개하였고, 그 자리에 대학로를 확장하였다.[6] 조선시대 때 지어진 다리로, 원래 이름은 응란교(凝鸞橋)이다.[7] 아이러니한 것은 이 마로니에 나무로 알고 있는 것이 경성제대 시절에 심은 일본칠엽수 나무라는 것. 한일 수교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면서 제사를 일본칠엽수 나무에다 한 것이다. 물론 마로니에 나무로 알려져 있어서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8] 이 당시 조사(弔詞)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타는 목마름으로'로 유명한 김지하이다.[9] 전국에 남아 있는 다방 중 가장 오래된 다방은 전주 삼양다방(1952년)이고, 원래 두 번째는 서울 명동 왕실다방(1953년)이었는데, 왕실다방은 2020년 이후로 폐업한 듯하다. 이로써 학림다방이 서울에 남아 있는 다방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다방이자, 전국에 남아 있는 다방 중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다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