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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비공식 국기[1] | 비공식 문장[2] | |
<colbgcolor=#2ca02c><colcolor=#fff> 1806년 ~ 1813년 | ||
성립 이전 | 붕괴 이후 | |
신성 로마 제국 | 독일 연방 | |
수도 | 프랑크푸르트 (명목상) | |
정치체제 | 국가연합 (사실상 프랑스 제1제국의 괴뢰국) | |
언어 | 독일어, 프랑스어 | |
종교 | 가톨릭,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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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 전쟁 시기 중 1806년 옛 신성 로마 제국의 수많은 영방 국가로 구성되었던 국가연합.2. 특징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스위스 등을 제외한 중부유럽의 독일어권 영방 국가들이 소속되었는데,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 나폴레옹에게 협력한 영방 국가들을 제외하면, 프랑스 대육군의 무시무시한 군사력 앞에서 눈치를 살피다가, 정복군주 나폴레옹의 설득(사실상 협박)으로 가입당했다.겉모습은 독일 민족들의 연합국처럼 보여도, 실상은 라인 동맹의 보호자를 자처한 나폴레옹과 프랑스 제1제국이 독일 점령지에 설립한 종속국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라인 동맹 회원국들은 명목상 프랑스 제국의 동맹국으로, 프랑스는 라인 동맹이 공격받을 경우 13만의 병력을 제공해주며, 라인 동맹은 프랑스가 요구할 경우 11만의 병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프랑스와 평등한 동맹 관계는 절대로 아니었다.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제국이 모든 권한을 쥐어, 프랑스인 관리들이 파견돼서 회원국의 정치·군사·행정 등을 도맡았으며, 회원국 군주 휘하의 주요 궁정 관리마저 모두 프랑스 사람들(나폴레옹의 측근, 코르시카 출신의 친척들)로 임명했을 정도로, 나폴레옹의 승인 없이는 사소한 것조차 할 수 없고 그저 병력과 물자만 제공하는 괴뢰국 신세였다.
애초에 이 거짓된 동맹 연합은 단순히 프랑스 제국의 무력으로 독일 영방 국가들을 억압하는 체제에 불과했으므로,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처참히 패한 후 프랑스 대육군의 군사력이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경지에 이른 이상, 더 이상 나폴레옹의 눈치를 보며, 협력할 이유가 없어졌다. 결국 라이프치히 전투를 기점으로 거의 모든 독일 영방 국가들이 프랑스 제국을 적대시하며, 라인 동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일부 나폴레옹 추종자들은 라인 동맹의 배신을 맹비난하지만, 사실상 프랑스 직할령이었던 베스트팔렌 왕국과 베르크 대공국을 제외한 나머지 라인 동맹 회원국들은 대체로 프랑스 제국에 강제 합병당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라인 동맹에 억지로 가입했을 뿐이며, 프랑스 제국은 그 대가로 라인 동맹 회원국들을 아프리카 식민지의 노예처럼 착취했다. 일례로 바이에른 왕국은 라인 동맹 회원국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나라로, 국왕인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는 나폴레옹 전쟁 초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나폴레옹에 의해 왕으로 승격되고, 나폴레옹의 의붓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를 사위로 맞이했을 정도였는데, 이런 바이에른조차 프랑스의 수탈에 학을 뗐다. 러시아 원정에는 회원국 중에서 제일 많은 30,000명의 군사력과 보급품을 탈탈 털어서 지급했는데, 정작 대량의 동사자와 영양실조 사망자를 내놓고, 프랑스 제국의 사절단이 와서 유감을 표현하기는 커녕, 크게 패배를 한 주제에 황제폐하께서 이번 전쟁은 그대들의 형편없는 병사들이 군기가 빠져서 패배의 실책들이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12세 이상의 남성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왕국의 국고를 전부 군비로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게다가 전쟁비용을 대주느라 국내에는 심각한 식량난 상태인데, 추가로 왕국에 있는 군량을 최대한 프랑스군에 지급하라는 명령까지 덧붙였다. 이렇게 되니 중립이니 의리니, 사돈댁이고 나발이고, 단단히 원한을 사게 되어,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곧바로 손절하여 대프랑스 연합군에 합류해 반드시 나폴레옹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다짐하며 파리로 진격했을 정도였다. 라인 동맹의 이탈은 나폴레옹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물론, 라인 동맹 회원국들이 얻은 것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자유도시와 라인 동맹에 합류하지 않은 영방 국가를 인접한 회원국들에게 나눠주면서 회원국 간의 국경선을 조정했는데, 영토가 확장된 만큼 프랑스에 지원해야 할 병력도 더 늘어나는 문제는 있었으나, 이때 확정된 영토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도 대체로 유지되었다. 그 결과 베스트팔렌 조약 당시 1,448개가 넘었던 각종 제후령은 40개 안팎의 영방 국가로 정립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는 왕으로 승격하거나 대공으로 대체되었으며, 백작급 제후들은 모두 후작(Fürst)으로 단일화되었다.[3]
또한 라인 동맹의 압제를 통해 역설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사상과 법령체계가 독일 지역에도 이식되는 결과가 초래되면서, 빈 체제의 반동으로 일어난 1848년 혁명이 독일 지역에도 확산되어 영방 국가들이 자유주의 헌법을 제정하게 만드는 영향을 미쳤다.
3. 역사
1800년 6월 나폴레옹의 2차 이탈리아 원정의 마렝고 전투와 뒤이은 라인 전역에서 오스트리아는 참패했다. 이에 따른 1801년 2월 뤼네빌 평화조약으로 라인강 서안이 자연국경으로 프랑스에 합병되었으며, 나폴레옹은 1803년 레겐스부르크에서 개최된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대표 회의에 간섭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는 5개 영방 국가를 선제후로 승격시켰다. 기존 4명의 선제후 중에 바이에른 공작과 작센 공작은 나폴레옹에 우호적이었고, 남은 2명은 합스부르크의 보헤미아 국왕과 프로이센 왕국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뿐이었다. 1804년 나폴레옹은 '프랑스인의 황제'로 즉위했으며, 이대로 가다간 신성 로마 황제 지위마저 프랑스에 뺏길 것을 우려한 프란츠 2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을 합쳐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했다. 이후 1805년에 영국이 아미앵 조약을 파기한 것을 시작으로 동맹국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 제국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영국 상륙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대신 오스트리아로 진격하여 11월 14일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입성하고, 12월 2일에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영국이 라인 동맹을 풍자한 그림. 레겐스부르크 대주교가 오스만, 폴란드, 기타 등과 같은 친프 성향을 가진 국가들을 한데 섞어 밑반죽을 하고,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의 수많은 제후국들과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로이센 왕국을 땔감으로 이용해서, 오븐에서 자기 입맛에 맞게 구어낸 신흥국가(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를 보며 기뻐하고 있다.
이를 기점으로 독일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은 확고해졌고, 나폴레옹은 자신을 따르는 선제후들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려 시도했다. 1806년 6월 프란츠 2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지 않으면 선전포고를 하겠다고 위협했고, 7월 12일에 라인 동맹을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이에 프란츠 2세는 8월 6일에 신성 로마 제국을 해산했다. 이 무렵까진 라인 동맹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제외한 독일 중·남부 회원국들로 구성되었으나,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프로이센 왕국이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여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일으켰다.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이 참패하면서 25일에 나폴레옹은 베를린에 입성했고, 나폴레옹의 눈치를 보고 있던 북독일 지역의 영방 국가들도 라인 동맹에 가입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7월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로이센의 엘베강 이서 북독일 영토가 대거 프랑스 제국으로 할양되었으며, 나폴레옹은 베스트팔렌 왕국을 세우고 획득한 영토는 대체로 프랑스 제국의 괴뢰국인 베스트팔렌 왕국과 베르크 대공국에 소속시켰다.
1808년에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친정하여 프랑스 제국의 괴뢰국으로 전락한 스페인의 독립을 후원하는 영국군을 격파했고, 이듬해에 바그람 전투를 통해 또다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켜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마무리지었으나, 영국의 지속적인 파병으로 이베리아 반도 전쟁은 종결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이 지지부진한 상황에 불만을 품었고, 1810년 7월에 괴뢰국인 홀란트 왕국과 라인 동맹의 북해 연안 일대를 프랑스 직할령으로 편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12월에 라인 동맹 회원국인 올덴베르크 공국과 잘름 후국이 프랑스에 합병되고, 베스트팔렌 왕국과 베르크 대공국 영토의 일부도 프랑스로 할양된다. 하지만 당초 나폴레옹은 틸지트 조약을 통해 올덴베르크 공국에 대한 러시아의 주권 보장을 약속한 상황이었기에, 이에 격노한 러시아는 프랑스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1812년 러시아 원정을 위해 라인 동맹에서 대량의 병력과 물자를 징발했으나 대참패를 당했고, 당연히 회원국에서 반발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듬해 1813년에도 다시 병력과 물자를 차출하여 크게 소모하면서, 프랑스의 수탈에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회원국들은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여 라인 동맹은 실질적으로 해체된다. 애당초 라인 동맹의 존속은 오로지 프랑스 제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기존 라인 동맹의 회원국을 포함한 독일어권 국가들이 독일 연방을 형성했다. 프랑스의 괴뢰국이었던 베스트팔렌 왕국과 베르크 대공국은 당연히 해체되고, 프랑크푸르트·뷔르츠부르크 대공국이 바이에른 왕국에 합병되었으며,[4] 끝까지 나폴레옹에 협력하던 이젠부르크·라이엔 후국도 인접국에 합병되었다. 프랑스 제국에 해체된 나라들 중에 복구된 것은 하노버 선제후국·헤센 선제후국·올덴부르크 공국·브라운슈바이크 공국·헤센-홈부르크 방백국 등 5개국 뿐이었으며,[5] 라인 동맹에선 독립적 지위가 부정되었던 자유도시 중에는 뤼베크·함부르크·브레멘·프랑크푸르트 4곳만 복구되었다. 그외 라인강 서안에 네덜란드 국왕이 동군연합으로 겸하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이 형성되었고, 하노버 선제후국은 왕국으로 승격되었으며,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메클렌부르크슈베린·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올덴부르크 공국이 대공국으로 승격했다. 헤센 선제후국은 대공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선제후 칭호를 유지했다.[6]
해체된 6개국 외에 기존 라인 동맹에 가담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작위를 승격시킨 기존 회원국들의 기득권은 그대로 인정되었고, 작센 왕국이 프로이센 왕국에 강제로 영토를 할양한 것과 복구된 5개국의 영토가 반환된 것 정도의 예외만 있었다. 프랑스에서 반환된 영토는 원래의 제후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사이좋게 나눠가졌으며, 대신 '슈탄데스헤어'라는 신분을 창설하여 옛 제후들의 귀족 지위를 유지시키는 결정만 내렸다.
4. 구성국
라인 동맹 구성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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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동맹의 명목상 '수석군주(Fürstprimas)'는 레겐스부르크 대주교였다. 회원국들은 라인 연맹 의회를 구성하며, 왕국과 대공국은 '제왕원(諸王院, Kollegium der Könige)'에 소속되고, 공국과 후국은 '제후원(諸侯院, Kollegium der Fürsten)'에 소속되었다. 연맹 의회 및 제왕원의 의장은 수석군주인 레겐스부르크 대주교였고, 제후원 의장은 나사우-우징겐 후작이었으나, 라인 연맹 의회는 단 한번도 개최된 적이 없기에 별 의미는 없었다.
4.1. 왕국
- 바이에른 왕국
- 창설 회원국(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30,000명
- 나폴레옹 전쟁의 최대 수혜국으로 친프랑스 행보로 오스트리아를 견제했는데, 정작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한 맞수가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바이에른의 확장을 묵인했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 프랑스에 병력을 제공했고, 나폴레옹은 그 대가로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프란츠 2세에게 바이에른 선제후를 왕으로 승격시킬 것을 강요하여, 1806년 1월 1일부터 왕국으로 승인되었다. 해체된 영방 국가 및 자유도시와 세속화된 성직제후령을 가장 많이 흡수했으며, 나폴레옹의 의중에 따라 라인 동맹 창설을 주도했다.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에는 대프랑스 동맹군에 합류하여, 빈 회의에서도 추가로 다수의 영토를 확보했다.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에서도 독보적인 자치권을 승인받았다.
- 뷔르템베르크 왕국
- 창설 회원국(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12,000명
- 나폴레옹에 의해 1803년에 선제후로 승격했고,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에도 프랑스에 병력을 제공했기에, 나폴레옹은 그 대가로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프란츠 2세에게 뷔르템베르크 선제후를 왕으로 승격시킬 것을 강요하여, 1806년 1월 1일부터 왕국으로 승인되었다. 라이프치히 전투 도중 대프랑스 동맹군에 합류하여, 빈 체제 이후에도 왕국 및 영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 작센 왕국
- 1806년 12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20,000명
- 동군연합: 바르샤바 공국
신성 로마 제국 시절에 작센 선제후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로 선출되어 동군연합을 이룬 적이 몇 번 있었는데, 1807년에 틸지트 조약을 통해 구 폴란드 왕국 일부를 바르샤바 공국으로 독립시킨 나폴레옹은 작센 국왕이 동군연합으로 바르샤바 공작을 겸하게 했다. 바르샤바 공국은 라인 동맹 소속이 아니었으나, 러시아 원정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작센 왕국과 별도로 무려 95,000명의 병력을 프랑스 제국에 제공했다. -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 프로이센의 강요로 대프랑스 동맹군으로 참전했으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프랑스와 단독으로 강화를 맺고 라인 동맹에 합류하여 선제후국에서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작센 왕국군은 라이프치히 전투 도중 대프랑스 동맹군에 합류했으나 폴란드군은 나폴레옹과 끝까지 함께 했으며,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라이프치히 전투 이전까지 대프랑스 동맹에 소극적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작센에 최대 위협인 프로이센을 불신하여 동맹에 합류하지 않고 있다가 포로로 잡혔다. 빈 회의 당시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은 각자가 작센 왕국과 바르샤바 공국을 완전 합병하기로 밀약을 나눴으나, 두 나라의 연대 및 지나친 확장을 우려하던 다른 강대국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결국 바르샤바 공국은 포젠 대공국과 폴란드 입헌왕국으로 분할되어 각각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고, 작센 왕국은 완전 합병을 면하긴 했지만 영토의 57.5%를 프로이센에 강제로 할양하게 되었다.
- 베스트팔렌 왕국
- 1807년 12월 7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25,000명
- 틸지트 조약을 통해 구성된 괴뢰국으로,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이 왕위를 차지했으며, 1807년 11월 15일에 수립되었다. 실질적인 주권은 프랑스 제국이 행사했다. 1803년에 프로이센이 합병했던 하노버 선제후국과 라인 동맹에 반대한 헤센 선제후국을 비롯하여 주변의 영방 국가와 자유도시를 합쳐서 형성했다. 기존 하노버 선제후국 북부와 북독일 지역 자유도시들은 공식적으론 프랑스 제국의 점령지였으나,[7] 1810년 3월 1일에 정식으로 베스트팔렌 왕국에 통합되고 북해 연안 일대는 홀란트 왕국 등과 함께 프랑스 제국에 합병되었다.
4.2. 대공국
- 베르크 대공국
- 창설 회원국(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5,000명
- 유일하게 선제후 지위와 관계없이 형성된 대공 지위로, 프랑스 대공(Prince français)이었던 조아킴 뮈라가 군주 지위를 원했기에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프랑스 제국의 관할이 된 베르크 공국·클레페 공국·뮌스터 후국 등을 합쳐서 형성했다. 베르크 대공국의 주권은 실질적으로 프랑스 제국이 행사했으며, 1807년에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서 취득한 영토 일부를 취득했다. 베르크-클레페 대공을 자처하던 뮈라는 이런 허울 뿐인 군주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여 스페인 국왕이 되려는 공작을 펼쳤고, 결국 1808년에 나폴레옹이 뮈라를 나폴리 왕으로 보내면서 베르크 대공 작위를 회수했다가, 1809년에 조카인 나폴레옹루이[8]를 베르크 대공으로 책봉했다. 이후 1810년에 아렌베르크 공국을 합병하였으나, 나폴레옹이 북해 연안 일대를 프랑스 제국으로 합병하면서 영토가 축소되었으며,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해체되어 프로이센 왕국과 나사우 공국에 분할 합병되었다.
- 레겐스부르크 선제후국 → 프랑크푸르트 대공국
- 창설 회원국(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968명
- 1803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수석 선제후인 마인츠 대주교는 레겐스부르크 대주교로 대체되었고, 이에 따라 마인츠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 폰 달베르크는 레겐스부르크 대주교로 옮겨 제국재상 및 수석 선제후 지위를 그대로 승계했다.[9] 프랑스에 넘어간 라인강 서안의 마인츠 대주교령에 대한 보상으로 기존 레겐스부르크 주교후령과 주변의 몇몇 수도원령이 세속화되어 레겐스부르크 자유도시와 함께 '레겐스부르크 후국'으로 통합되었으며, 라인강 동안의 기존 마인츠 대주교후령 일부도 세속화되어 '아샤펜부르크 후국'으로 재구성되었는데, 두 후국은 레겐스부르크 선제후의 세속 영지가 되었다. 라인 동맹에서 수석 선제후 지위는 '수석군주(Fürstprimas)'로 대체되었고, 추가로 프랑크푸르트·베츨라어 자유도시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바이에른은 자국 영내에 위치한 레겐스부르크 후국의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당연히 레겐스부르크 선제후국의 대공국 전환도 반대했다. 결국 1810년에 나폴레옹은 바이에른의 주장을 수용하는 대신 아샤펜부르크 후국 주변의 하나우 후작령과 풀다 후작령을 보상으로 할양했고, 2월 16일에 달베르크의 영지들을 통합해 프랑크푸르트 대공국을 구성했으며, 달베르크 사후에 수석군주 및 프랑크푸르트 대공은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이 계승하도록 설정했다. 달베르크는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세속 지위를 포기했고, 외젠은 명목상 라인 동맹의 수석군주 및 프랑크푸르트 대공 지위를 승계했지만, 대공국은 12월에 연합군에 점령되면서 해체당했다. 빈 체제에서 레겐스부르크 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의 영토로 유지되었고, 프랑크푸르트는 자유도시로 회복되었지만, 베츨라어는 프로이센에 합병되었다.
- 헤센 대공국
- 창설 회원국(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4,000명
- 원래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으로, 라인 동맹에 합류하지 않은 헤센 가문의 종가인 헤센-카셀 선제후 대신 대공으로 승격되었고, 분파인 헤센-홈부르크 방백국을 합병했다. 빈 체제에서 헤센-홈부르크가 복구되었으나, 라인강 서안의 마인츠 일대를 보상으로 받으면서 영토는 오히려 늘어났다. 복구된 헤센-홈부르크 방백국은 후국(Fürstentum)과 동격인 독립적인 주권국가 지위를 얻긴 했으나 종가인 헤센-다름슈타트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고, 1866년에 가문의 단절로 인한 상속으로 헤센 대공국에 통합되었으나, 같은 해 헤센 대공국 북부가 북독일 연방에 가입당하면서 기존 방백국 영토는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었다.
- 뷔르츠부르크 대공국
- 1806년 9월 23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2,000명
- 대공 페르디난도는 원래 토스카나 대공이었으며 프랑스 혁명에 유화적인 인물이었다. 수도 피렌체에 공화정부가 들어서면서 오스트리아로 도피했고 1801년에 대공국을 포기할 것을 강요당했는데, 그 보상으로 1803년에 잘츠부르크 선제후가 되었지만, 1805년에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잘츠부르크 공국은 오스트리아에 합병되고 대신 뷔르츠부르크를 받으면서 프랑스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세속화된 뷔르츠부르크 공국은 바이에른의 영토였는데, 이를 제공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의 티롤 후백국을 얻었다. 페르디난도는 라인 동맹 창설 과정부터 관여하여 바덴 선제후와 함께 나폴레옹에게 선제후 작위를 대공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 소속으로 프란츠 2세의 동생이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에는 동참하지 않았기에 정식 가입이 늦춰졌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시점부터 대공국으로 전환했다. 빈 체제에서 토스카나 대공으로 복귀하면서, 뷔르츠부르크는 바이에른 왕국에 환원되고 티롤도 오스트리아에 환원되었다.
4.3. 공국
- 나사우 공국
- 창설 회원국(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1,680명
- 나사우-우징겐 후국과 나사우-바일부르크 후백국이 통합하여 공국으로 승격했다. 사촌 형제인 나사우-우징겐 후작과 나사우-바일부르크 후작은 프랑스에 합병당할 것을 우려하여 라인 동맹에 가입하고 통합에 합의했으며, 나사우-우징겐 후작에게 적법한 계승자가 없는 상황이라 어차피 나사우-바일부르크에 상속될 예정이었기에 통합이 수월했다. 두 후작이 공동 공작이었으나 나사우-우징겐 후작에게 우선권이 있었고, 명목뿐이긴 하지만 라인 동맹 의회의 제후원 의장을 맡았다. 1816년에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으로 통합되었고, 이후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프로이센에 합병당했다. 이때 먼 친척인 오라녀나사우[10]는 네덜란드 국왕과 룩셈부르크 대공을 동군연합으로 겸하고 있었는데, 1890년 네덜란드 왕국에서 빌헬미나 여왕이 즉위하면서 룩셈부르크 대공은 살리카 법에 의거해 당시 영지를 잃은 상태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에 상속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 아렌베르크 공국
- 창설 회원국(1806년 7월 12일) → 베르크 대공국에 합병(1810년 2월 16일)
- 의무 제공 병력: 379명
- 원래 아렌베르크 공국은 라인강 서안에 있었으나 프랑스에 합병되었고, 1803년에 보상으로 기존 뮌스터 주교후령을 세속화하면서 분할된 메펜 공작령과 레클링하우젠 후작령 등을 받았다. 1808년에 당시 공작인 프로스페르 루트비히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조카와 결혼하여 나폴레옹의 인척이 되었는데, 사냥 중 사고로 시력을 잃으면서 영지를 포기했다. 북해 연안이 프랑스 제국에 합병되면서 베르크 대공국에 합병된 영토 중 메펜 공작령은 프랑스 직할령이 되었다. 프로스페르의 작위는 유지되었으나 1811년 스페인에서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고, 빈 체제에서 메펜 공작령은 하노버 왕국으로 레클링하우젠 후작령은 프로이센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아렌베르크 공작가의 작위는 그대로 유지되어 슈탄데스헤어로 편입되었다.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
- 1806년 12월 15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800명
- 1741년부터 작센바이마르 공국과 작센아이제나흐 공국은 동군연합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1809년 9월 20일에 정식 통합되었다. 베틴 가문의 종가로 원래는 작센 선제후를 맡고 있었으나, 슈말칼덴 전쟁에서 패하여 1547년에 분가인 알브레히트계에 선제후 권리를 넘겼다.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 왕국은 알브레히트계의 작센 왕국을 완전히 합병하고 대신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를 대공으로 승격시키고자 했으나, 다른 강대국들의 견제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를 대공으로 승격시키는 안은 그대로 통과되었으며, 이에 따라 1815년에 대공국으로 승격했다.
- 작센고타알덴부르크 공국
- 1806년 12월 15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1,100명
- 1826년에 단절되어 튀링겐 일대 베틴 가문들의 영지가 재편되었다.
- 작센코부르크 공국
- 1806년 12월 15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400명
- 1826년 튀링겐 일대 베틴 가문들의 영지가 재편되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이 되었다.
- 작센마이닝겐 공국
- 1806년 12월 15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300명
- 1826년 튀링겐 일대 베틴 가문들의 영지가 재편되면서 작센마이닝겐힐드부르크하우젠 공국이 되었다.
-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국
- 1806년 12월 15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200명
- 1826년 튀링겐 일대 베틴 가문들의 영지가 재편되면서 작센알텐부르크 공국이 되었다.
- 안할트베른부르크 공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240명
- 안할트데사우 공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350명
- 라인 동맹에 가입하여 후국에서 승격했다.
- 안할트쾨텐 공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210명
- 라인 동맹에 가입하여 후국에서 승격했다.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
- 1808년 2월 18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400명
- 빈 체제에서 대공국으로 승격했다.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
- 1808년 3월 22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1,900명
- 빈 체제에서 대공국으로 승격했다.
- 올덴부르크 공국
- 1808년 10월 14일 가입 → 프랑스 제국에 합병(1810년 12월 13일)
- 의무 제공 병력: 800명
- 올덴부르크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말엽부터 북독일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프로이센과 하노버의 압력에 친척인 러시아 황실에 의지했다.[11] 그 덕으로 라인 동맹에도 가입하지 않았는데, 틸지트 조약으로 나폴레옹이 올덴부르크에서 러시아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을 약속하면서 역으로 러시아 황제가 라인 동맹 가입을 압박하여 뒤늦게 가입했다. 하지만 1808년 10월 무렵부터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고, 대륙 봉쇄령이 지지부진한 상황에 불만을 품은 나폴레옹이 1810년에 북해 연안 일대를 프랑스 제국으로 강제 합병하면서 올덴부르크 공국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 빈 회의에서 러시아 제국은 올덴부르크에 대한 이권을 강력히 주장했고, 그 결과 1815년에 대공국으로 승격한 올덴부르크는 실질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공작 빌헬름과 후계자인 페터는 대공 칭호에 부담을 느껴 여전히 공작을 자처했지만, 1829년에 즉위한 아우구스트부터 정식으로 대공 칭호를 사용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중 러시아가 친프로이센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올덴부르크 대공국은 북독일 연방에 소속되었다.
4.4. 후국
- 이젠부르크 후국
- 라이엔 후국
- 창설 회원국(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29명
- 창설 회원국으로 라인 동맹에 가입하여 아덴도르프 백국에서 승격되었다. 후작가는 프랑스 계통의 귀족이었으며 당시 후작 필립 프란츠의 외삼촌은 라인 동맹의 수석군주인 달베르크였다. 때문에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대프랑스 동맹 합류를 주저하고 있다가 영지가 동맹군에 점령당했고, 빈 회의 도중인 1814년 오스트리아에 합병되는 것이 결정되었으나, 작위는 유지되어 후작가는 슈탄데스헤어로 편입되었다. 라이엔 후국은 바덴 대공국 영내에 위치한 위요지였기에 바덴 대공국에서 영유권을 주장했고, 결국 1819년에 오스트리아에서 매입했다.
- 호엔촐레른헤힝겐 후국
- 창설 회원국(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97명
-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후국
- 창설 회원국(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193명
- 아샤펜부르크 후국
- 창설 회원국(1806년 7월 12일) → 프랑스푸르트 대공국에 통합(1810년 2월 16일)
- 레겐스부르크 대주교의 세속 영지로 바이에른이 레겐스부르크 후국 영유권을 주장했기에 아샤펜부르크 후국은 라인 동맹에 별도로 가입되었다. 영유권 분쟁이 종결되면서 프랑크푸르트 대공국으로 통합되었으며, 통합된 뒤에도 아샤펜부르크가 대공국의 수도로 유지되었다. 빈 체제에서 기존 아샤펜부르크 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에 합병되었다.
- 잘름 후국
- 리페 후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500명
- 샤움부르크리페 후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150명
- 라인 동맹에 가입하여 백국에서 승격했다.
- 발데크피르몬트 후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400명
-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후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325명
-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후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325명
-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117명
- 1848년에 로이스 가문 소속 분가들이 재편되면서 로이스엘테르어리네 후국이 되었다.
- 로이스로벤슈타인 후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108명
- 1824년에 로이스로벤슈타인에버스도르프 후국으로 통합되었고, 1848년 혁명으로 작위를 로이스슐라이츠에 양위했다.
- 로이스에버스도르프 후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100명
- 원래 백국이었으나 1806년 4월 9일에 후국으로 승격되었다. 1824년 로이스로벤슈타인에 상속되어 로이스로벤슈타인에버스도르프 후국으로 통합되었다.
- 로이스슐라이츠 후국
- 1807년 4월 11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125명
- 원래 백국이었으나 1806년 4월 9일에 후국으로 승격되었다. 수도가 게라에 있기에 로이스게라와 혼용되어 쓰인다. 1848년에 로이스로벤슈타인에버스도르프 후국과 통합되어 로이스윙게레르리네(Reuß jüngerer Linie) 후국이 되었다.
4.5. 프랑스 제국 직할령
- 카체넬른보겐 백작령
1806년에 헤센 선제후국을 해체하면서 합병했다. 원래 헤센-카셀과 그 분파인 헤센-로텐부르크의 공동 소유였으나, 라인강 동안에 프랑스군을 자유롭게 배치시킬 거점을 원했기에 이 지역을 프랑스 직할의 점령지로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라인강 건너편에 프랑스와 접하는 부분을 빼면 나사우 공국에 둘러싸인 형세로 남았다. 빈 회의 중에 헤센 선제후국에 환원되었으나 프로이센 왕국에 매각되었고, 이 거래에 따라 헤센-로텐부르크는 명목상의 작위인 라티보르 공작과 코르베이 후작 칭호를 얻었다. 카체넬른보겐 합병을 원했던 나사우 공국은 프로이센 왕국과 거래하여 1816년에 매입했다.
- 에어푸르트 후작령
1807년에 틸지트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왕국에서 획득했다. 나폴레옹은 1808년에 에어푸르트 회담을 개최했고,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를 포함하여 유럽 대륙의 여러 군주들과 저명인사들이 참석하기도 했다. 1810년 7월에 북해 연안 일대를 프랑스 제국으로 합병하기로 선언한 나폴레옹은 올덴부르크 공작에게 보상으로 에어푸르트를 수여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공작가는 같은 가문인 러시아 제국으로 망명해버렸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프로이센 왕국에 환원되었다.
바이로이트 후작령
1807년에 틸지트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왕국에서 획득했다. 바이에른 인근에 위치한 프로이센의 월경지였는데, 나폴레옹은 이 영토의 후속 처리를 고민하다가 에어푸르트 회담 중 바이에른 왕국에 2,500만 프랑을 제시하며 강매하다시피 떠넘기려했다. 결국 1810년 2월 28일에 바이에른 왕국이 1,500만 프랑을 지불하여 매입했으며, 이때 잘츠부르크 공국과 레겐스부르크 후국을 합병하고, 티롤 후백국의 남부를 이탈리아 왕국으로 할양했다. 빈 체제에서 바이로이트는 프로이센에 반환되지 않고 바이에른의 합법적인 점유가 인정되었고, 뷔르츠부르크를 재합병하는 대신 오스트리아에 잘츠부르크와 티롤을 반환했다.
하나우 후작령
1806년에 헤센 선제후국을 해체하면서 합병했으며, 레겐스부르크 영유권 분쟁이 종결되자 1810년 2월 16일에 구성된 프랑크푸르트 대공국으로 통합되었다. 빈 체제에서 하나우 후작령은 헤센 선제후국에 환원되었다.
풀다 후작령
1806년에 나사우오라니엔풀다 후국을 해체하면서 합병했으며, 레겐스부르크 영유권 분쟁이 종결되자 1810년 2월 16일에 구성된 프랑크푸르트 대공국으로 통합되었다. 원래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을 세습하고 있던 오라녀나사우 왕조는 1795년에 네덜란드에 프랑스의 괴뢰국이 세워지면서 그 보상으로 1803년에 세속화된 풀다 후작령·코르베이 후작령·도르트문트 백작령·바인가르텐 영주령 등으로 구성된 나사우오라니엔풀다 후국을 보상으로 받았지만, 라인 동맹에 합류하지 않으면서 해체당하여, 코르베이 후작령과 도르트문트 백작령은 베스트팔렌 왕국에 합병되었고, 바인가르텐은 뷔르템베르크 왕국에 합병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를 되찾아 국왕이 되었으며, 빈 체제에서 나사우오라니엔풀다 후국을 포기하는 대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합병했는데, 그 일부인 룩셈부르크는 독일 연방에 가입하여 대공국으로 격상되었다. 풀다 후작령은 헤센 선제후국에 합병되었고, 1816년에 대공령으로 격상되었다. 또한 베스트팔렌 왕국이 해체되면서 코르베이 후작령과 도르트문트 백작령은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었다.
5. 여담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영역이 브란덴부르크[12], 니더작센 일부와 브레멘, 함부르크를 제외한 현재의 독일과 일치한다.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독일 제국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처럼 찢는 방안으로 라인강 이서를 분할하는 방안이 있었는데, 독일은 유난히 민족주의가 강하고 소수민족이 거의 없어 구태여 독일을 찢어 나누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그 방안대로 독일 분할을 시도했으나 독일의 저항과 영미의 반대로 물러나야 했고, 결국 라인강 이서를 비무장지대로 만들고 자르 분지 지역을 국제연맹의 관할지로 편성하는 데에 그쳤다. 그마저도 1935년에 자르 주민들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일에 환원되었고, 1936년 라인강 이서에 독일군이 재배치되면서 무력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다시 자르 보호령을 편성해 프랑스로 편입시켜려 시도했으나, 1955년에 주민 투표로 서독에 반환되는 것이 결정되었으며 프랑스 국내에서도 베르사유 체제가 붕괴된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비난만 들었다.
[1] 비공식 도안으로, 나폴레옹이 라인 강의 영감을 받아 도안한 깃발이라는 말도 있으나, 실제 출처나 용도는 불확실하다. 역사적으로도 이 깃발을 사용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며, 구성국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독립된 깃발을 고집했다. 여담으로 시에라리온 국기와 매우 비슷하다.[2] 비공식 문장(紋章)으로, 사실 프랑스에서 발행된 라인 동맹 창설 기념 메달의 뒷면 도안이다.[3] 원래 신성 로마 제국에서 'Fürst'는 황제 직속 제후라면 자칭할 수 있는 칭호였다. 다만 정식으로 후국(Fürstentum)으로 승격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기에, 신성 로마 제국 말기까지 변경백국·방백국·백국 등이 남아있던 것이다. 관례적으로 Fürst를 칭하고 있으나 후국으로 승격되지 않은 백작령은 'Gefürstete Grafschaft'으로 지칭되었는데, 일반적으로 '후백국'으로 번역되며, 영어로는 'Princely County'로 번역된다.[4] 프랑크푸르트 대공을 겸하던 레겐스부르크 대주교는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작위를 포기했고, 뷔르츠부르크 대공은 원래의 지위였던 토스카나 대공으로 복귀했다.[5] 모두 강대국과 특수한 관계가 있는 나라들이다. 하노버는 애초에 영국과 동군연합이고, 브라운슈바이크 공가는 하노버 왕가와 같은 집안이다. 올덴부르크 공가는 덴마크 왕실의 분가로, 당시 러시아 황실과 스웨덴 왕실과 같은 집안이기도 하다. 헤센 가문은 러시아 황실과 인척 관계였다.[6] 헤센 가문의 종가인 헤센-카셀은 당초 나폴레옹에 협력하여 1803년에 선제후로 승격했으나, 라인 동맹에는 반대했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헤센-카셀 대신 방계 가문인 헤센-다름슈타트를 대공으로 승격시켰고 헤센-카셀은 해체해버렸다. 헤센-다름슈타트의 헤센 대공국은 빈 체제 이후에도 그 지위를 유지했고, 이에 헤센-카셀의 선제후는 헤센 지방의 고대 게르만 부족인 카티족에서 따온 '카텐 왕(König der Chatten)'으로 승격해달라고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공 지위만 공인받았다. 결국 헤센-다름슈타트의 헤센 대공국보다 우월함을 내세우기 위해 헤센-카셀은 종전대로 '헤센 선제후국'을 유지하면서 풀다 대공(Großherzog von Fulda)을 보조 칭호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7] 브라운슈바이크 공국과 그 이남의 하노버 선제후국 영토는 베스트팔렌 왕국에 합병된 상태였다. 아마도 영국과의 강화 협상을 위해 북부를 점령지 상태로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8] 홀란트 왕 로데베이크 1세의 아들, 루이나폴레옹(후의 나폴레옹 3세)의 형. 홀란트 왕국이 프랑스에 합병되기 직전 홀란트 왕 로데베이크 2세로 즉위하기도 했다.[9] 참고로 교황이 교구 변동을 정식 승인한 것은 1805년 2월 1일이다. 달베르크는 원래 콘스탄츠 주교후였는데, 나폴레옹의 독일 침공을 지지하여 1802년에 마인츠 선제후가 되었고, 이후 레겐스부르크 선제후로 옮겨 최종적으로 프랑크푸르트 대공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나폴레옹에게 기대를 걸었던 독일인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나폴레옹의 행보에 실망하여 점차 소원해졌고, 1812년 무렵부터는 대놓고 프랑스에 반기를 들었다. 1813년 9월에는 피난을 명목으로 아예 거처를 스위스로 옮겼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 독일로 돌아왔다. 달베르크는 레겐스부르크 대주교 직책을 남은 평생 유지했으나, 달베르크가 1817년에 죽으면서 대주교 직책은 다시 레겐스부르크 주교로 환원되었다.[10] 원래 나사우 가문의 분가인 '나사우-딜렌부르크'였으나 오랑주 공국을 상속받으면서 새로운 분파를 개창한 것이다. 프랑스의 오랑주(Orange)는 네덜란드어로 오라녀, 독일어로 오라니엔(Oranien)으로 발음된다.[11] 공가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은 당시 덴마크 왕실인 올덴부르크 왕조의 분가이며, 러시아 황실 및 스웨덴 왕실과 같은 가문이다. 라인 동맹 시기의 공작인 빌헬름과 후계자인 페터는 4촌 형제이며, 표트르 3세와는 6촌 형제로 당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표트르 3세의 손자인 만큼 두 사람과 8촌 관계가 된다. 또한 당시 스웨덴의 섭정이었다가 조카의 왕위를 승계한 칼 13세는 4촌 형제이다. 페터는 알렉산드르 1세의 여동생을 며느리로 들였기에, 올덴부르크 공가는 러시아 황실의 인척이기도 하다.[12] 브란덴부르크는 프로이센 왕국의 핵심 영토이자 발원지였기 때문에 라인 동맹에 포함되지 않았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프로이센은 이름만 빌려온 것이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프로이센 왕국이 된 것이다. 브란덴부르크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독일 왕국 산하 국가여서 왕을 칭하면 독일왕이기도 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동격이 되는 문제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지 않은 역외지인 프로이센의 국왕을 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