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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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釋曇邕생몰연도 불명
전진의 인물. 약양군(略陽郡) 저족 출신.[1] 본래의 성은 양(楊)씨.
2. 생애
초기에 가난하였으나 공부는 충실히 하였다. 그리고 장성하여서는 키가 8척에 달했고, 씩씩함과 용맹함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전진에 임관하여 위장군을 지냈다.건원 18년(383년) 8월, 전진의 천왕 부견이 남정을 개시할 때 담옹도 이에 종군하였으나, 수 개월만에 동진군에게 대패하여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후 담옹은 사직한 뒤, 승려 석도안을 따라 단계사(檀溪寺)로 출가하였다.
태원 10년(385년), 석도안 사후 석혜원(釋慧遠)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내외의 경서를 두루 섭렵하여 뜻은 항상 불법을 널리 전달하는 것에 두었고, 피로함과 괴로움을 꺼리지 않았다. 이후로 담옹은 관중을 오가면서 혜원의 편지를 구마라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10여 년 동안 하였는데, 구마라집과 독대할 때에도 스승인 혜원을 욕보이는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 또는 관중 일대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