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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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1. 개요
雷弱兒(? ~ 355)
전진의 인물. 자는 불명. 진주(秦州) 남안군(南安郡) 일대에 존재하던 강족 세력 추장 중 한 명.
2. 생애
영화 6년(350년) 정월, 본래 포홍을 따르던 뇌약아는 포홍이 대장군, 대선우, 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자 보국장군에 임명되었다.황시 원년(351년) 정월, 독살당한 부홍의 후사를 이은 세자 부건이 관중(關中) 일대를 장악하고, 천왕(天王), 대선우로 즉위하여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하면서 전진을 건국하였다. 이때 뇌약아는 태위에 제수받았다.
황시 2년(352년) 8월, 태위에서 대사마로 옮겨졌다. 호시탐탐 북벌할 기회만 노리던 동진의 중군장군 은호는 몰래 뇌약아와 우장사 양안(梁安)에게 사람을 보내 경명제 부건을 암살하면 관우(關右) 일대의 통치권을 인정해주겠다 하였는데, 뇌약아는 이를 짐짓 승낙하면서 동진군이 오면 부건을 죽이고 호응할 것을 약속하였다.
황시 3년(353년) 10월, 전진의 사공 장우(張遇)가 반란을 일으키고 낙양을 지키던 보국장군 부황미가 성을 버린 채 도망쳤다는 보고를 접한 은호는 뇌약아 등이 계획에 성공한 것이라 생각하고, 수춘(壽春)에서 70,000 대군을 일으켜 낙양으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도중에 선봉에 섰던 강족 요양이 반란을 일으켜 은호의 본대를 공격하였고, 은호는 산상(山桑)에서 대패하여 물러났다. 은호와 요양의 대립으로써 전진은 어부지리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뇌약아의 계략이었다고 한다.
황시 4년(354년) 4월, 동진의 대사마 환온이 북벌하여 도성인 장안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자, 뇌약아는 태자 부장(苻萇)과 함께 정예병 30,000명으로 장안성 남쪽에서 환온을 막았다.
황시 4년(354년) 6월, 환온이 북벌에 실패하고 돌아가자, 뇌약아는 환온을 막은 공로가 있어 승상으로 승진하였다.
황시 5년(355년) 6월, 병에 걸려 위독해진 경명제 부건은 뇌약아 등을 불러 태자 부생을 보정해달라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얼마 안 지나서 붕어하였다. 성품이 강직했던 뇌약아는 상서좌복야 조소(趙韶), 상서우복야 동영이 황제 부생의 총애를 등에 업고 간사한 짓을 일삼으며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을 보고, 조회에 참석할 때마다 모두의 앞에서 그들의 행동을 지적하였고 항상 이를 갈 정도로 혐오하였다.
수광 원년(355년) 12월, 결국 조소와 동영이 황제 부생에게 뇌약아를 참소하였고, 부생은 그들의 말을 믿어 뇌약아와 그 아들 9명, 손자 27명을 붙잡아 주살하였다. 전진이 세울 때 많은 공적을 세웠던 개국공신이자, 신망 높은 강족의 추장인 뇌약아가 억울하게 살해당하니, 여러 강족 부락들이 전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