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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진/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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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및 성장2. 정치 입문 이후
2.1. 정치 활동
3. 19대, 20대 총선 낙선4. 21대 총선 낙선 그리고 논란5. 이후 행보6. 만평 활동

1. 출생 및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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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대학생 시절, 군 시절, 신혼 시절의 차명진

1959년 서울특별시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용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으며, 중에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구금되어 강원도로 이송되기도 했다. 1988년에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서명희와 결혼했는데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결혼식 주례를 맡았다. 하지만 차명진은 나중에 백기완과의 악연으로 인해 민주화운동과 결별하고 우익으로 전향했다는 사실을 알리게 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1990년 혁신정당인 민중당 서울특별시 구로구 갑 지구당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당시 구로구 갑 지구당 위원장은 바로 김문수였다.

그러나 민중당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득표율 미달로 해체되었고 문민정부 출범 이후 김문수, 이재오 등을 중심으로 민중당 출신들이 대대적으로 우익으로 전향하고 민주자유당에 단체로 입당할 때 함께 하였다.[1] 1996년부터 2000년까지 김문수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역임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공보관을 역임했다.

2. 정치 입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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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명진 당시 개표방송 볼때
2006년에 김문수가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퇴함에 따라 실시된 부천시 소사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열린우리당 김만수 후보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

2.1. 정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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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명진 당시 국회의원
김문수가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기도지사에 출마하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여 치러진 2006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이후 한나라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여 친이계가 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재선 의원이 되었다. 이후 한나라당 원내대변인,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사실 이 시기부터 지역구에서의 행보와는 별개로 구설수에 오를 행보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한미 FTA에서 큰 화두로 떠올랐던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 문제를 검증하기 위해 스테이크 시식회 개최를 했다가 돌발영상에 찍히기도 했다.[2] 사실 이 정도는 문제가 없었고 지역구 현안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한나라당의 의원으로 활동하나 싶었으나...

후반기 국회 개원 이후의 행보가 이래저래 화젯거리였는데 2010년 7월 23일에서 24일까지 참여연대가 실시한 '최저생계비로 1달나기' 캠페인에 참여한 이후 "나는 왜 단돈 6,300원으로 황제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물가에 대한 좋은 정보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강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글을 써 논란을 빚었다. 이때 나온 말이 황제의 식사 드립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정감사 때 구렁이를 감사장에 데리고 나온 적이 있다. 그 가격이 무려 1천만원이다. 불법 밀매를 막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

3. 19대, 20대 총선 낙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김상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당시 새누리당은 차명진을 제외하면 이 지역구에서 공천을 신청한 사람이 아예 없었다.[3] 이후 원외 당협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구 관리에 힘썼다. 하지만 2015년 5월에는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에 대한 허위 비방사실 유포혐의로 700만 원 배상판결을 받았다. #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후보에 또 밀려 낙선하였다.

상술했듯 차명진은 바로 그 김문수로부터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1996년 15대 총선 때부터 김문수가 김대중의 최측근 박지원에게 승리한 이래 쭈욱 사수한, 심지어 탄핵 후폭풍이 거센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사수해낸 선거구다. 그런 선거구를 고작 6년 지키고 야권에게 헌납하고, 다음 선거에서 또 졌다는 점에서 확실히 김문수에 비하면 지역구 관리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 될 만한 부분이다. 하필이면 친노 성향 김만수 부천시장 시절이니... 특히 2016년에는 김상희 당선자 외에 정의당, 국민의당 후보가 모두 출마하면서 야권분열이 일어나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꽤 큰 득표 차이로 패배하고 말았다.[4]

MBN 판도라에서 초반에는 박근혜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비난을 샀으나, 회를 거듭할수록 비판하고 보수 우파에게도 쓴소리를 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차명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및 박근혜 대통령 구속 재판에 대해 사법 쿠데타, 법치 사망이라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어 친박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원래 비박 - 김문수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부분. 그의 정치적 스승인 김문수도 똑같이 박근혜를 옹호하고 있다.

두 번 낙선했음에도 조직력은 제법 탄탄했던고로 자유한국당으로 바뀐 이후에도 부천시 병(구 소사구) 당협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김문수의 유튜브 채널에 자주 나오는데, 알다시피 차명진이 젊었을 때 모시던 의원이 김문수였고, 지역구를 물려받을 만큼 신뢰를 얻었던 최측근이었기 때문이다.

2018년 자신의 페이스북에 만평 형식의 글을 몇회 업로드하였는데 펜앤드마이크를 통해 기사화되었고 결국 펜앤드마이크가 그를 영입해 2019년 9월부터 부정기적으로 만평을 기고하고 있다.

2019년 4월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세월호 유가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처먹고, 찜쪄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라고 적었다. 또 ‘그들이 개인당 10억원의 보상금 받아 학생들 안전사고 대비용으로 기부했다는 얘기 못 들었다. 귀하디 귀한 사회적 눈물비용을 개인용으로 다 쌈 싸먹었다’고도 했다.

이에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고소당했고, 결국 법원이 차명진에게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인천지법 부천지원 민사2부는 세월호 유가족 126명이 차 전 의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하고, 원고 1명당 100만 원씩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4. 21대 총선 낙선 그리고 논란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2020년 차명진 세월호 유가족 망언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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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6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부천시 병 선거구에 경선 승리를 통해 미래통합당 후보로 공천되었다. 경선에서 4점 감점되었음[5]에도 불구하고 최환식 전 경기도의원을 이겼다. #

부천시 선거관리위원회 주관으로 2020년 4월 6일 진행된 부천시 병 후보자 토론회에서 세월호 유가족을 가리켜 비방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문제 부분은 토론영상 참조) 그 결과 2020년 4월 8일 미래통합당 김종인 선대위원장 중심으로 제명을 결정했다. 다만, 당 지도부에서는 일단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며 제명에 제동을 걸었다. # 당 게시판은 차명진을 살리란 입장이 많다 보니 미래통합당 내부의 의견도 갈릴 것으로 보인다.

2020년 4월 10일, 미래통합당 윤리위원회에서는 제명 조치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의 징계인 '탈당 권유' 결정을 내렸다. # 탈당 권유를 받은 자는 10일 이내에 자발적으로 탈당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제명된다. 이것도 중징계이지만 총선투표일을 포함한 10일 동안은 당적을 유지할 수 있어서 총선에서는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6]

그런데, 다음 날(4월 11일)에 페이스북에 현수막 사진과 함께 다시 막말을 게시했고, 다시 논란이 되었다. # 결국, 4월 13일, 미래통합당 최고위원회는 윤리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차명진에 대한 직권 제명 조치를 내렸다. ## 본인은 당 최고위에 재심을 요청하는 한편, 법원에 제명 취소 가처분신청을 청구했다.

총선을 하루 앞둔 4월 14일, 법원이 차명진이 법원에 낸 제명 처분 무효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법원은 제명 결의 과정에서 윤리위원회의 심의 절차 및 의결을 거치지 않은 것 등의 절차상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정당한 이유 없이 소명 기회를 박탈한 것 역시 지적했다. 이에 따라 선관위는 차명진의 후보 등록 무효 처분을 취소했으며, 차명진은 선거를 완주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기존에 내려진 차명진에 대한 탈당 권유 처분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4월 19일까지 탈당계를 제출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제명된다. #

2020년 4월 14일 부천시선관위는 차명진에 대한 후보지위 회복조치를 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 이후 72년간 치러진 대한민국 선거 역사 상 한번 등록무효가 된 후보에 대해 후보지위 회복조치를 한 것은 2020년 차명진 후보에 대한 것이 역대 처음이라고 한다. # 어쨌거나 차명진은 대한민국 선거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됐다.[7] 본인 또한 선거에서 민주당 김상희 후보에게 아예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차이로 대패한 것은 덤이다.[8][9]

결국 자신의 막말 논란으로 인해 미래통합당의 경합지 의석을 최소 10~20석은 날려먹었다는 평가를 받으며[10], 19대 총선에서 서울특별시 노원구 갑에 출마했던 민주통합당 후보인 김용민급 혹은 그 이상의 역대급 총선 트롤러로서 다시 선거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11]

막말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여론조사부터 현역인 김상희 의원과 차이가 꽤 많이 나서 당선될 가능성은 희박하긴 했다. 김용민은 그전 여론조사까진 당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12]에 약간이나마 이해되는 상황이었지만, 차명진은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당에 빅엿을 선사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만약 이 때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차명진의 제명 및 후보 등록 무효가 사전투표, 적어도 본투표 전에 완료되었다면 선거 판도가 더욱 웃기게 돌아갈 수 있었다. 차명진이 얻을 보수 야권 지지표가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차명진처럼 막말 파문으로 제명 및 후보 등록 무효가 된 김대호가 있던 관악구 갑의 경우엔 그래도 지역에서 인지도가 있고 구 바른미래당 계열인 무소속 김성식[13]이 후보로 있어서[14] 어느 정도 보수 표를 모을 수 있었지만, 부천시 병은 차명진을 제외한 야권 후보가 정의당 후보와 국가혁명배당금당 후보 뿐이었다. 이러면 보수 야권 지지자들은 눈 딱 감고 국가혁명배당금당을 지지할지, 아니면 정치 성향이 전혀 다른 정의당이나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할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할 상황이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선거를 포기해야 했을 판인 것이다.

선거 당일 출구조사가 공개된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부천 소사에서의 정치를 접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차기 지방선거나 총선에 출마하더라도 다른 지역으로 옮기게 될 전망이다. 결국 거주지를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으로 옮기면서 부천과는 완전히 거리를 두게 되었다. 가평 주민들과의 소통 활동 등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다음 선거는 가평에서 출마를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기엔 새로 당선된 최춘식과의 경쟁이 문제.[15]

4월 10일 내려진 '탈당 권유'징계가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에, 4월 20일 자로 제명 처리가 될 예정이었으나, 4월 16일 자진 탈당했다. #

미래통합당 제명 이후 김문수를 돕기 위해 기독자유통일당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다.

이후 이경전 전 교수가 자신의 세월호 막말에 찬동한 SNS글로 인해 미래통합당 영입이 불발되자 김종인을 비롯한 현재의 미래통합당을 향해 진실을 잘라내는 가짜보수, 까마귀집단 등등을 써가며 비난하였고 가짜보수도 적이라며 첫 단계로 권한도 없는데 제명처리 운운한 김종인부터 고소하겠다는 등 막말을 이어갔다.

5. 이후 행보

2020년 8월 중 사랑제일교회 철거 강제집행 반대시위 현장에서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 등과 함께 포착되었다. 사실상 정치적 스승인 김문수와 동행하는 셈이다.

2021년 2월, 상술된 이재명 전 성남시장에 대한 허위 비방사실 유포혐의로 700만 원 배상판결에 대해, 당시 재판부가 허위 비방이라고 여겼던 이재명의 공권력 투입 의혹을 대법원이 사실로 인정[16]하게 되면서 판결에 대한 재심을 요구했다. #

또한 21대 총선에서 막말의 피해자인 세월호 유가족들은 차명진 의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2021년 12월 23일, 법원은 126명 유가족에게 각 100만원씩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친이계 출신 정치인답게, 2022년 1월 24일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전직 국회의원들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

2022년 6월 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출마한 강용석의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이로써 국민의힘에서 정치 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상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강용석이 낙선하면서 차명진도 더는 어떻게 돌아갈 길이 없어졌다. 그나마 본인의 선배인 김문수는 윤석열 정부에서 과거의 노동운동가 경력 및 재선 시절의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경력을 인정받아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직이라도 받았지만, 차명진은 그마저도 어렵다는 것이 정설.

이후 국민의힘 제3차 전당대회 국면에서는 나경원을 비난하던 초재선 의원들이 나경원 불출마 후 순식간에 위로한답시고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이게 2차 가해가 아니면 뭐냐. 너네가 나경원 정치 인생 망쳤고 윤 대통령을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었다."라며 격노하는 반응을 보였다. 태극기 세력과 어울리는 것과는 별개로 원래 친이계였다보니 같은 친이계 출신 나경원에 대해 감정이 복잡미묘한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 선언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22대 총선에도 출마 가능성이 있었으나, 막상 3월이 되도록 별 얘기가 없다. 언론들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조차 후보군들 혹은 당 지도부의 설화 논란이 터질 때마다 차명진 사건을 언급하며 말을 조심하자는 취지일 뿐, 정작 차명진의 총선 행보에 대한 언급은 없는 상황. 이 때문에 이번 총선에는 불출마가 기정사실화 된 상황이다. 사실 출마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간의 논란 때문에 친정인 국민의힘으로 복당하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간 이야기이며 그렇다고 무소속 출마 혹은 군소 우익 정당 출마를 하기에는 당선 가능성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다. 거기다가 나이도 어느덧 60대 중반에 접어든데다가 청년 정치인들의 목소리가 미미하게나마 커지고 있는 만큼, 사실상 정계 복귀는 매우 어려워진 것이다.

6. 만평 활동

정치인 약력 외에 그림을 상당히 잘 그린다. 차명진 본인 말로는 중학생 때부터 학교 교과서낙서그림을 남기곤 했다고 한다. 운동권 시절에는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의 걸개그림 등에 두꺼비 마크를 그리기도 했다. 국회의원 시절에 만화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였으며, 낙선 후에는 TV조선의 박종진 라이브쇼 및 MBN뉴스와이드에서 패널로 나와 만평으로 한 주간의 내용을 정리하기도 했다. # # #

이후 2019년 9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보수 매체인 펜앤드마이크에서 정치 만평을 연재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다.

2021년 11월 부터 자유일보에 만평을 연재하고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다.

[1] 이때 보수로 넘어가지 않고 남은 민중당 잔류파들은 노회찬을 중심으로 결집했고, 이들이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의 주역들이다.[2] 당시 이 영상은 차명진의 숫자 계산과 말실수라던가 "한우보다 더 맛있어!" 심재철, 이윤성 등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응과 말 실수가 포인트였다. 김형오 국회의장이나 안형환 대변인 등도 등장하긴 하는데 어디까지나 이들은 양념에 가깝다.[3] 만일 이 때 차명진이 당선되었더라면 최초의 여성 국회부의장이 배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차명진이 상임위원장 중 한 곳을 맡았을 수도 있는 노릇.[4] 다만 지역구 관리를 잘 했다는 평도 있는 것을 볼 때 특유의 실언과 행보 때문에 평판이 매우 나빠서 낙선했다고 보는 쪽이 더 적절하다.[5] 정확한 감점 사유는 공천관리위원회에서 공개하지 않았다.[6]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통합당 지도부가 차명진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같은 시기 3040세대 비하발언으로 윤리위에 회부된 관악 갑의 김대호 후보는 그대로 제명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부천 병의 경우 차명진 외에 보수계열 후보가 없지만 관악 갑의 경우에는 현역 의원인 무소속 김성식 후보가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차명진만 살려낸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7]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와 김종인 선대위원장이 "우리 당 후보가 아니다." 라고 선을 그었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한 후보인 만큼, 다른 후보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8] 19~21대 3차례의 총선 득표율이 44.6 - 36.9 - 32.5로 계속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며 해당 지역에선 사실상 외면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대중의 평가도 매우 좋지 않아진 만큼, 보수정당 입장에서는 차기 총선에서 새 인물을 발굴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으로 보인다.[9] 거기다가 정의당 신현자 후보로 진보 표가 분산된 것을 감안하면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대패한 것이다.[10] 말이 10~20석이지, 최소 30석은 날려먹었다고 봐야 한다.[11] 대표적으로 고민정 후보와 오세훈 후보의 대결은 매우 근소한 표차로 결정되었다. 이외에도 본투표에서 이기고도 사전투표함을 개표하니 역전당한 지역들이 많았는데, 사전투표일인 4월 10~11일에는 차명진 막말 논란으로 언론사 뉴스헤드라인이 거의 도배되다시피 했다. 확실한건 알 수 없지만, 차명진의 막말 때문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12] 김용민이 출마한 노원구 갑은 원래부터 민주당 강세지역인 데다, 나꼼수의 인기가 상한가를 치던 시절 구속수감된 정봉주의 지역구에 대타로 출마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이 막말 논란이 터진 후 최종 선거결과는 새누리당 이노근 후보가 고작 4782표(5.86%p)차로 김용민을 가까스로 누르는 걸로 나왔다. 이 지역의 민주당세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이 동네는 새누리당의 전신 한나라당 소속 현직 국회의원인 현경병이 임기 1년 미만을 남기고 국회의원직을 잃는 일까지 생기면서(잔여 임기가 1년 미만이었던 관계로 재보궐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 새누리당에 대한 감정이 좋기 더 어려웠다.[13] 1997년 11월 21일부터 2011년 12월 13일까지는 당적이 한나라당이었다.[14] 그 외에도 우리공화당 권미성 후보도 있었다.[15] 최춘식은 포천시 기반 정치인이어서 가평을 틈새시장으로 노리는 듯 하나 알다시피 포천 쪽의 인구가 더 많기 때문에 아예 연고가 없는 차명진이 불리하다.[16] 대법원은 '피고인은 자신의 지휘와 감독을 받고 있는 분당구 보건소장 등에게 형에 대한 정신병원 입원을 강제하고 독촉한 사실이 인정된다.'라고 판결을 내리면서 공권력을 투입한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이재명이 지방선거 토론회에서 이를 부정한 언행에 대해 허위사실 유포로 볼 수 없단 판단으로 무죄취지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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