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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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姚沖(? ~ 409)
후진의 황족. 태조 무소황제 요장의 아들이자, 고조 문환황제 요흥의 동생.
2. 생애
용맹하고 기마와 사격에 뛰어났으며, 초기에 평북장군으로 임명되었다.홍시 11년(409년) 정월, 진왕(秦王) 요흥의 명령을 받들어, 정로장군 적백지(狄伯支) 등과 함께 기병 40,000기를 거느리고, 북하를 침공해 유발발을 공격하였다. 요충의 군대가 영북(嶺北)에 이르렀을 때, 요충은 적백지를 찾아가 장안 습격을 모의하였으나, 적백지가 이를 따르지 않으려 하여 중지하였다. 이후 그는 적백지를 짐독으로 독살하였다.
한편, 진왕 요흥은 평량(平涼)에서 조나(朝那)로 이동하는 도중에 요충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요충은 형제들 중 가장 어리고 용맹했기에, 이를 불문에 부치려 하였다. 그러나 후군장군 염성(斂成)이 눈물을 흘리며 요흥에게 진언하였다.
"요충은 흉악하고 무자비하여, 항상 그의 좌우를 지킬 때면 신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다시 동료 장수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명백해졌으니, 부디 속히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요흥이 답했다."요충이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소? 다만, 명장(名將)을 해쳤으므로, 나는 그의 죄를 온 세상에 알리고자 할 뿐이오."
결국 요흥은 조서를 내려 요충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요충이 죽은 후에는 서인(庶人)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