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colcolor=#fff> 오토 스코르체니 Otto Skorzeny | ||
출생 | 1908년 6월 12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 ||
사망 | 1975년 7월 7일 (향년 67세) | |
스페인국 마드리드 | ||
신체 | 193cm | |
직업 | 군인 | |
최종 계급 | 무장친위대 대령 | |
서훈 내역 | 기사십자철십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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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나치 독일의 친위대 연대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대령이였으며 종전 후에는 모사드 공작, 저술, 사업 등 다양한 활동에 몸담았다. 수십 년간 침투, 사보타주, 인질 구출, 요인 암살 등 다양한 공작 활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키 193cm, 체중 100kg이 넘는 덩치에 얼굴에 큰 흉터까지 있어 인간흉기와도 같은 외모를 가졌으며 그 활약 또한 가히 전설적인 공작원으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한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데다 뛰어난 완력과 실행력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아돌프 히틀러도 그를 특별히 신임해 SS내에 편재된 특수부대의 지휘관이 된다.그래서 생긴 별명이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이며 그의 행적을 연합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대악당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실물 사진과 자세한 약력은 이 링크에서도 잘 설명되어 있다.
2. 유명해지기 전까지
1908년 6월 12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1] 10대 소년 시절부터 15번의 목숨을 건 결투를 벌였다고 한다. 10번째에는 펜싱 칼을 들고 싸웠는데 얼굴의 흉터는 그때 생겼다고. 스코르체니는 사실 대학 결투클럽의 회원이었고 모든 결투는 합의에 의한 결투였다. 결투후에 회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존재한다. 당시까지도 독일에서는 결투를 남자의 미덕으로 여겼고 얼굴에 상처가 몇 개 있는 것 정도는 오히려 멋으로 치부되었다.1920년대에 빈 공대 건축학과를 다녔고 이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복학생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졸업한 후에는 건축업에 종사했다. 원래 공돌이라 그런지, 자서전의 문장도 짧고 이해가 쉬운 편.
1931년에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했으며 곧 이어 돌격대에 가입했다. 1938년에 안슐루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조종사 면허가 있어서 30세의 나이로 독일 공군에 입대했으나 나이가 많은 데다가 키가 너무 커서 조종사 지원에서는 탈락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이때 공수훈련 등의 기초를 배운 것으로 되어있기도 하다. 그 이후 무장친위대에 지원하여 소위로 임관하고, 다스 라이히 사단 소속으로 서부 전격전 및 발칸, 러시아 등 동부전선에서 싸웠는데 탁월한 전공으로 인해 부상을 입자 본토로 후송됨과 동시에 철십자 훈장을 수훈받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게되자 무장친위대 특수부대 편성 계획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의 계급이 대위.
이 부대는 각군의 지원자 중 최정예를 가려뽑은 프리덴탈 특수임무대로, 스코르체니가 지휘를 맡게 된다. 이미 독일 국방군에 브란덴부르크 사단이라는 특수부대가 있었지만 스코르체니와 그의 부대는 그보다도 훨씬 높은 강도의 교육훈련과 특히나 어렵고도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대한 임무들을 해내게 된다.
스코르체니와 장성들[2] |
3. 스코르체니가 벌인 작전들
3.1. 떡갈나무 작전
히틀러의 친구이자 우방이었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파시스트 대평의회의 결탁에 의해 1943년 7월 25일 실각당하여 이탈리아 어딘가에 연금 중이었다. 히틀러는 한때 자신의 우상이었던 무솔리니가 힘없이 갇혀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따라서 무솔리니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의 지휘관으로 스코르체니 대위가 임명된다. 계속 옮겨지는 무솔리니의 위치를 추적한 끝에 그 해 9월 12일 오후 2시, 스코르체니는 자신이 거느린 SS 소속의 프리덴탈 특수부대와 공군 공수사단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구성된 특수임무부대를 이끌고 무솔리니가 연금된 아펜니노 산맥 골짜기의 그란 사소(Gran Sasso)의 캄포 임펠라토르 호텔에 글라이더를 타고 돌입, 무솔리니를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부대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 스코르체니 휘하의 특수부대는 이탈리아에 올 때부터 전원 공군 공수부대원으로 위장했으며, 스코르체니를 지원하기 위해 아래쪽 골짜기와 케이블카 정거장을 장악한 지원부대는 진짜 공군 공수부대였다.글라이더 12기에 나눠 탄 특공대는 그란 사소 산장 근처 야산 분지의 평지에 강행착륙했다.[3] 이 산장을 경비하던 이탈리아 헌병군 1개 중대는 소총 정도의 빈약한 무장밖에 없었지만 독일군의 습격에 저항했으나 스코르체니가 데려온 친무솔리니파 이탈리아 육군 장성 페르난도 솔레티 장군이 "국왕의 어명으로 무솔리니가 다시 권좌에 복귀한다!" 라고 거짓말을 했고, 독일 특공대가 산장의 통신실을 장악해 통신을 끊어버린 바람에 솔레티 장군의 거짓말을 확인하지 못해 결국 저항을 멈췄다. 스코르체니 부대는 무솔리니를 무사히 구출해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Fi 156 피젤러 슈토리히 연락기로 무솔리니와 지휘관 스코르체니 대위가 먼저 탈출했다. 그리고 남은 SS대원들은 유유히 케이블카로 하산해 공수부대와 합류해 철수했다.
그렇게 빠져나온 무솔리니는 히틀러에 의해 괴뢰정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수장이 되었으며 스코르체니는 소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기사 철십자장과 친위대 해골 순금반지, 히틀러 친필이 금으로 양각된 금박 독수리 담배 케이스를 수여 받으며 연합국으로부터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네이버에 등재된 무솔리니 구출작전 설명.
3.2. 기사의 도약 작전
1944년 5월 25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지휘소 한복판에 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생포하러 강하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실패하고 만다.[4] 한때 스코르체니의 부대는 티토에게 부상을 입히면서 5분 거리에 도달하기까지 했으나 티토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거물인지라 결국 수적으로 우세한 파르티잔들과 부비트랩들을 이용해 지연전을 펼치며 자신은 숨겨놓은 비상 열차로 도피한다. 이 작전에 투입된 제500SS공수대대는 스코르체니 등 일부 인원을 제외하고는 전원 각종 전과로 인해 계급과 서훈이 박탈된 일종의 형벌부대원들이었으며 작전 성과에 따라 계급과 서훈을 전부 회복시켜 주겠다는 약속하에 투입된 것이었다. 비록 티토를 잡지는 못했으나 공수대대원 874명 중 576명이 전사하고 48명이 부상당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티토를 코앞까지 몰아붙인 데다 그의 육군 원수 예복 등 상징적인 노획품 등을 획득한 것에 만족한 히틀러가 이들의 계급과 서훈을 모두 회복시켜 주었다.[5]단, 스코르체니는 작전의 입안은 주도했으나 작전 실행 부대가 여럿 겹치고 또 이들 간의 알력 다툼까지 더해져 그의 직속 부대가 강하하지는 않았다.
3.3.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후폭풍을 수습했다. 당시 아직까지 체포되지 않고 도망치던 가담자 대부분을 36시간 만에 체포했으며 프리드리히 프롬과 에리히 회프너, 에르빈 폰 비츨레벤 등 연루된 육군 장성들을 여럿 사로잡은 것으로 유명. 당시 주변에 있던 쿠데타 측에서 동원한 육군 장병들과 프롬 휘하 장교들도 스코르체니가 나타나자 모두 얼어붙어서 움직이지도 않았다고한다.하지만 당시 프롬은 쿠데타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반쿠데타측으로 변절해 쿠데타 측을 즉결처형하거나 체포하던 중이기 때문에 스코르체니에게 반항할 이유가 없었다. 쿠데타 측에서 동원한, 대대장 오토 에른스트 레머 소령 이하 육군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수도경비대대 장병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쿠데타 측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며, 오히려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소집되었다고 생각했으므로 더할 나위도 없다. 레머 소령은 괴벨스 장관을 체포하러 갔다가 그가 연결해 준 히틀러의 직통 전화를 받고 바로 진압 작전으로 전환했다.
자서전에서 스코르체니는 이때 자신의 주된 활동이 베를린의 혼란이 확대되지 않도록 각 군부대를 돌며 조율하고, 행정적인 뒷수습을 맡은 것이라고 기술했다. 무장친위대나 육공군 간에 우발적인 충돌이 벌어져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지지 않도록 수습한 공이 크지만 음모사건 중 핵심적인 역할을 맡지는 않았다.
3.4. 판처파우스트 작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그때까지 동맹이었던 독일을 배신하고 연합군에 항복하려는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의 아들 호르티 미클로시 2세를 납치하여 인질로 세워 항복을 막고 호르티 미클로시를 섭정에서 사임시켰다. 만약 이 작전이 실패 했다면 헝가리에 주둔해 있는 독일군이 고립되어 궤멸됐을 것이다.이 작전에 성공하여 독일 십자장 금장[6]과 중령 진급을 상으로 받았다. 사족으로 이 왕 없는 나라의 섭정은 이후 스코르체니에게 대단한 악감정을 가져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때 그와 같은 증인동에 거주하게 되자 연합군에게 항의했다고 전해진다.
3.5. 그라이프 작전
아르덴 대공세 당시에는 1개 기갑여단을 연합군 차량으로 위장하고 도색하여 진격하는 작전을 입안한뒤 실행한다. 특히, 영어가 가능하고 미군의 관습을 배운 병력들이 미제 장비를 착용하고 미제 지프에 올라 미군진영을 온통 들쑤시고 다녔다.[7]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도로 표지판을 정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아 연대 하나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다거나 멀쩡한 평지에 테이프를 둘러치고 지뢰밭 표시를 해서 포병대의 발을 묶은 것은 물론 체포당하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암살하러 왔다고 허위 진술을 해서 혼란을 가중시킨 대원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영화 벌지 대전투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대원들의 훈련도가 부족했기에 초반에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을 뿐, 대부분의 대원들은 작전 중 미군에게 붙잡혀 스파이 혐의로 총살당했다.[8]
3.6. 네이메헌 철교 폭파작전
3.7. 레마겐 철교 폭파작전
라인강에 걸쳐있는 레마겐의 루덴도르프 대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작전을 실행하였으나, 강 일부가 얼어버려 실패하였다.3.8. 미실행 작전
- 마그니토고르스크 공격작전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공업단지를 폭파하려고 하였으나 수송기가 없어서 실행되지 않았다
- 이온 안토네스쿠 구출작전
차출 병력 부족, 루마니아군의 완강한 저항, 특수부대 브란덴부르크 사단의 패퇴, 안토네스쿠의 가택연금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 했다.
- 제2차 티토 체포작전
본거지를 비스섬으로 옮긴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지휘관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체포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준비중이었는데 히틀러가 그라이프 작전의 준비를 명령하는 바람에 작전이 취소되었다. 그라이프 작전 후에는 비스와-오데르 대공세가 실행되면서 티토를 생포할 여유가 없었다.
3.9. 잘못 알려진 작전
- 테헤란 회담 3거두 암살작전 - 설은 2018년까지도 계속 흘러나오는데, 본인은 자서전에서 그런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허무맹랑한 작전을 어떤 미친 놈이 진행하느냐면서 부인했다.[10]
4. 전후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는 그간의 특수작전들과 아르덴 대공세 당시 위장 특수부대를 지휘했던 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뒷수습을 했던 점, 연합국 정보부를 가장 쩔쩔매게 했던 존재이니 만큼 검사 측은 그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연합군 검사 측은 애초에 사형을 요구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976년판 자서전을 보면 자신은 마땅히 무죄를 받았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검사 측이 스코르체니가 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억지로 사형을 구형한 데 대한 반발심이 크다. 위장부대는 연합국 특수부대도 운용했으므로 이를 가지고 스코르체니를 기소할 수 없게 되자 검사 측이 스코르체니가 하지도 않은 포로에 대한 고문 및 살해, 민간인 학살 등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기소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기소된 죄목들은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무죄 판결을 내렸으면 풀어주기나 할 것이지 풀어주지도 않고 (자기 말에 따르면)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에서 계속 자기를 데려다 이용하려고 한다는 이야기[11]를 듣고 탈나치화 과정에서 포로수용소를 탈출, 도피하며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닌다.
다만 탈출 방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국내 출간된 자서전에 나온 탈출 방법과 위키백과에 기술된 탈출 방법이 다르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자료를 더 확인해야 알 수 있을 듯. 스코르체니가 두 명이라 두 가지 방법으로 탈출한 것도 아닐 것이고...
1964년 1월 마드리드 몬테라 25번지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자와 인터뷰 중인 스코르체니[12] | |
사망하기 6개월전 1975년 1월에 찍은 사진[13] | 늙어도 여전한 패기 |
이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파시즘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스페인에 정착하여 프랑코의 고문으로 활약하였고 오데사를 결성해 나치 잔당들의 남미 도주를 돕는 한편 건축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둬 당시 돈으로 최대 5백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54년에는 결혼도 했다. 배우자는 나치 독일의 장관이었던 얄마르 샤흐트의 조카인 일제 폰 피스켄슈타인(1919-2001)이다.[14]
스페인 정착 이후 해외여행도 즐겼고, 기자들의 취재도 즐긴 것으로 보이는데 종종 2차대전 시절을 회고하거나 미국의 피그스만 침공 작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등 여러가지 썰을 풀며 농담도 나누곤 했다. 호인답게 자기에 대한 가짜뉴스가 퍼지는 것도 즐겼는데, 온갖 소설을 써놓고 이게 사실 스코르체니의 작전이었다 식으로 된 기사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고(...) 물론 개중에 도저히 못봐줄 만한 기사들은 고소미를 먹여 손해배상을 받아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황색언론의 발원지인, 그의 옛 적 영국이 관련 법률이 제일 잘 되어 있다며 칭찬하기도...
이렇게 전후에도 알차게 살던 그였지만 전상으로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이 엄청나게 쪘고 심지어 1970년에는 함부르크에서 척추 종양 수술을 받던 도중 척수가 손상되어 하반신 불구 판정을 받았으나 6개월간의 끈질긴 물리치료 끝에 다시 걷게 되어 초인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친 재활치료가 몸에 무리를 주는 바람에 폐암이 재발하여[15]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1975년 7월 7일 마드리드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가톨릭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수많은 슈츠슈타펠 출신 동지들이 모여 나치식 경례를 통해 예를 표했다. 한편 이 골수 나치들의 모임에는 굉장히 색다른 얼굴이 끼어 있었는데, 전후 작전에서 그와 협력한 모사드 요원이 장례식에 참석해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마지막까지 영화 같은 삶, 아니 많은 창작물이 그에게서 영감을 받았음을 고려하면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에 부족함 없는 삶을 살다 갔다.
2016년 3월 27일에 이스라엘 하아레츠지가 보도한 바에 따르자면, 스코르체니는 모사드에게 정보를 일부 넘겨준 정도도 아니고 아예 모사드에 협력하여 이집트군 무기 개발에 종사하던 독일 과학자를 암살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집트 여행 중에 무기 개발 연구 시설을 폭파해서 이집트인 직원 다섯 명을 폭사시킴으로서 독일인 연구자들에게 겁을 주어 모조리 철수시키기도 했다고.
기사는 스코르체니가 이런 활동을 한 이유로 시몬 비젠탈이 작성한 나치 사냥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빼 주기를 바라서라는 것과 함께 순전히 그런 비밀 공작 활동이 그의 천성이라서[16] 그랬다는 설명도 제시하고 있다. 기사번역본
5. 저서
저서로는 자서전《Meine Kommando Unternehmen(내가 벌인 특수작전)》이 있다. 1976년 독일어판을 번역한 영어판을 기본으로 한 한국어 번역본이 2016년 상반기에 나왔다. 번역자는 발번역으로 유명한 이동훈이었는데 진흙 속의 호랑이 사건 이후 번역에 대한 검증 요구가 있어 이글루스의 유명유저인 슈타인호프가 감수를 하였다. 슈타인호프는 2016년 1월에 "감수를 다 끝냈으며,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으니 4월에 출판될거 같다"고 했으나, 5월 플래툰 컨벤션에서야 잠시 선판매되었다. 6월 말이 되어서야 정식 발매. 계약 문제로 역자 이름에 이동훈을 그대로 올릴 수 밖에 없는 비극이 발생했다.판본에 따른 내용 변화도 있다. 스코르체니는 생전에만 자서전을 몇 번이나 냈고[17], 죽은 뒤에도 여기저기 출판사에서 각기 다른 판본으로 출간하면서 약간씩 내용이 달라진 경우가 많다. 생전에 자기가 고친 것도 고친 거지만 사후에 나온 판본은 문제가 있는 부분[18]을 각 출판사 편집부가 손본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떤 사건에 대한 서술이 이 판에는 있고 저 판에는 없다거나, 여기는 이렇게 했는데 저기서는 저렇게 했다거나 등등 하는 문제가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 번역 과정에서 오역이 더해지면 헬게이트가...
6. 여담
- 인간쓰레기 오스카 디를레방어와 정말 정말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디를레방어가 계급빨로 눌러댔지만[19] 디를레방어가 워낙 개차반인 인물인지라 독일 상층부에서 디를레방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친구인 고틀로프 베르거[20]를 제외하면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 도피하면서 모사드와 협력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이집트 미사일 계획에서 일했던 독일 과학자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에 협력한 것인데,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다. 물론 스코르체니 본인이 모사드에 접근한 것이 아니고, 모사드 요원들이 관광객[21] 행세를 하며 으슥하게 찾아왔기 때문이다. 외국인 관광객을 가장한 모사드 요원들이 찾아오자 스코르체니는 그들에게 바로 권총을 들이대며 모사드 요원임을 눈치챘다고 한다. 그 때가 돼서야 당황한 모사드 요원들이 정체를 밝히며 구속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협력을 제안하기 위해 온 것이며, 여기서 우리를 쏴죽이면 너도 죽는다고 이야기하면서 협상을 했다고 한다.
- 이에 대해서는 스코르체니가 죽을까봐 겁을 집어먹은 것이 아니라 모사드와의 협력을 대가로 그가 세운 오데사 조직에 관련된 옛 나치당 인사들의 추적을 그만두는 것, 또는 그 자신을 나치 사냥꾼인 시몬 비젠탈이 만든 체포 대상자 명단에서 빼는 것으로 합의봤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게다가 그가 겁을 먹었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어이가 없는 것이, 극비중의 극비인 미사일 계획에 관여중인 과학자들의 신상까지 털어내는, 모사드조차 하지 못해서 도움을 청하러 올 수 밖에 없게 만든 양반이 모사드 몇명 왔다고 겁을 먹었을까? 게다가 이 사람은 일단 자기 주장에 따르자면 유대인을 건드리지도 않았으므로 모사드 상대로 하나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이다. 물론 모사드가 그와 접선했던 시기가 아돌프 아이히만을 이스라엘 본토까지 송환하여 재판장에 세워 세계를 놀라게 한 때였으니 아주 근거없는 얘기는 아니다. 이 이야기도 결국 이스라엘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므로 어느 정도 과장이 섞였다고 봐야할 것이다. 애초에 시몬 비젠탈도 명단에 올려 놓기는 했어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주 타겟은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인간쓰레기들이었다.[22]
-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동맹이었던 핀란드에도 라우리 퇴르니라는 인간병기가 있었다. 퇴르니는 핀란드군, 무장친위대에서 복무했으며, 전후에는 더 이상 군대에서 복무하지 않고 민간인으로 살아간 스코르체니와 달리 미국에 망명하여 미합중국 육군에서도 복무하였다. 생년상 퇴르니쪽이 스코르체니보다 11살 어리지만 퇴르니는 베트남 전쟁에서 특수부대인 MACV-SOG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헬기 사고로 인해 10년 먼저 사망한다.
7. 매체에서의 등장
《겁스 무한세계》에서 홈라인의 무한그룹은 파시즘을 혐오하고 나치에 반발하다가 수감된 평행세계[23]의 오토 스코르체니를 구출했으며 오토의 주장으로 수많은 평행세계의 온갖 초인들을 모은 '무한경비대 특무부'라는 비밀 부대가 창설되어 부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특징으론 다른 평행세계의 자신-그러니까 나치의 졸개인 자신-을 비겁자라며 몹시 싫어한다는 것. 그래서 부하들에게도 평행세계에서 나치를 만나면 모조리 때려잡을 것을 권장하고 있다.1942년에 파충류 외계인이 내려온다는 해리 터틀도브[24]의 대체역사소설《월드워》에서는 말 그대로 지구를 구한 사나이로 나온다. 외계인에 대한 각종 공격을 주도하면서 외계인의 우월한 기술을 모조리 빼오고 앞서 말한 무솔리니 구출, 호르티 제독 제압이나 외계인의 핵물질 탈취작전 등을 실행한다. 마지막에 지구와 외계인의 평화조약 장소를 신경가스로 제압하려다가 역으로 당해서 사망. SS라면 치를 떠는 미국에서 나온 작품임을 생각하면 취급이 좋은 편.
코에이의 게임《유럽 전선》에서도 후반부 시나리오에 등장한다. 근데 쓰기엔 뭔가 좀 특출난 능력치가 잘 안 나온다.
《메탈기어 솔리드 3》의 등장 인물인 볼긴 대령과 고전 FPS게임《울펜슈타인 3D》의 첫 번째 보스 한스 그로스의 모델로 추정 된다. 특히 볼긴 대령은 거구에다가 얼굴에 난 흉터가 한스 그로스는 머리 스타일이 정말정말 닮았다. 특히 대체역사물로 리부트된 울펜슈타인 시리즈의 최신작 울펜슈타인 2: 더 프리덤 크로니클즈의 마지막 에피소드 윌킨스 대위의 놀라운 기행 편에서는 미군버전 스코르체니인 클라이브 크로스라는 인물도 나온다.[25]
《트리니티 블러드》의 로젠크로이츠 올덴의 간부 쉬잔느 폰 스코르체니의 모델이다. 이름과 얼굴의 흉터를 따왔다.
《헛쯔모없는 개혁》에서는 제 4제국 소속으로 등장. 바티칸에 모인 정상들의 앞에 나타나 마작 대결을 제안한 뒤 하우니브를 타고 사라진다. 그 후 제 4제국의 한스 울리히 루델과 함께 중견으로 출전해 아버지 부시&아들 부시를 상대로 마작 대결을 벌인다. 블러핑에 능해 아들 부시를 여러 번 위기로 몰아넣지만, 아버지 부시의 희생으로 각성한 아들 부시에게 역으로 몰리다가 눈에조차 보이지 않는 츠바메가에시로 흐름을 뒤집다 반칙을 간파당해 콜린 파월이 배치해 둔 저격수에게 당하지만, 루델 역시 츠바메가에시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결국에는 승리. 필살기는 그리프 작전[26], 판처파우스트 작전, 아이헤 작전[27], 그리고 발켄크로이츠(직십자).
슈타인호프의 대체역사소설 《내가 히틀러라니!》에서는 히틀러에 빙의된 한국인 주인공이 광복군을 돕기 위하여 군사고문으로 파견해 이우 구출작전 등의 활약으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에 기여하고, 종전 후에도 한국에 정착해 만주에서의 공작활동을 하여 이 세계관에선 유라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고 불린다.
카르카손의 대체역사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루프트바페 협력사의 정비공으로 일하다가 작중에서 프랑크푸르트 폭격에 반대하고 반역죄로 끌려갈 뻔한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을 순식간에 구해주고, 오히려 그를 체포하러 온 참모총장 예쇼네크를 역으로 잡아버린다.[28] 이후 나치 정권의 부활을 꿈꾸며 쿠데타를 계획하던 게오르크 폰 퀴힐러의 3군이 주둔하던 포젠 상공으로 직접 자신이 훈련시킨 공수부대(팔시름예거)를 쿠데타를 제압하기 위해 이끌고 투입한 뒤, 순식간에 퀴힐러 앞에 직접 나타나며 그를 생포하는 활약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공수부대로 인정받아 활약하게 된다. 이후 이탈리아로 도망갔던 힘러를 공포영화처럼 쫓아가 잡아들이고, 2차 대전 후반기에는 주인공 디트리히 샤흐트의 특별 지시로 특 A급 타깃으로 분류된 마오쩌둥을 사살하는 성과를 낸다.
종이호랑이의 대체역사소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프리덴탈 특수임무대를 이끌면서 원 역사와 달리 기사의 도약 작전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생포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대영전에도 투입되어 윈스턴 처칠을 생포해 독일로 압송한다. 이탈리아 내전이 터진 후 히틀러의 명령으로 무솔리니를 구출해 독일로 데려가는데 이때는 영관급이 아닌 장성이 된지라 이전과 달리 일선에서 교전을 벌이진 않았다.
레니비의 대체역사소설 카이저를 구했다에서는 독일 제국의 공수부대 지휘관으로 등장 영국과의 합동작전으로 루즈벨트 주지사 구출에 주인공인 한스 폰 초이가 직접 지목해서 작전에 차출된다. 작중 구출작전에 함께한 영국군 코만도의 잭 처칠과 죽이 맞는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의 대체역사게임인 Hearts of Iron IV에서는 뜬금없게도 독일국의 정보기관인 아프베어의 요원으로 등장한다.
[1] 'Skorzeny'라는 표기에서 알 수 있듯이 폴란드계 성씨이다.[2] 사진 속 스코르체니의 좌우에 있는 인물들은 국방군 육군 장군들이고, 이들 중에 3명은 친위대에도 소속되었다. 왼쪽에서 첫번째는 육군 보병대장 요아힘 폰 코르츠플라이슈, 세 번째는 SS중령 프리츠 라인하르트, 네 번째 검은 제복은 SS중령 쿠르트 치른트, 다섯 번째는 SS소장 헬무트 쾨르너이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스코르체니다.[3] 12기 중 착륙에 성공한 것은 8기뿐이다.[4] 티토의 아지트를 밀고한 배신자는 전후 체포되어 처형됐다.[5] 이들은 작전을 수행하면서 티토의 지휘소에 들어가서 티토의 체스로 체스를 두는 여유까지 보였으나 철수하면서 체스 세트는 분실했다. 곧 기지로 돌아온 티토는 되찾은 체스로 솔플레잉하는 모습을 촬영하여 자신이 습격을 받았어도 건재하다며 추축국들을 엿먹이는 선전에 써먹었다.[6] 1급 철십자 훈장과 기사 철십자 훈장의 중간 등급으로, 은장과 금장이 있다. 은장은 비전투 수훈에 수여되는 전쟁공로십자훈장 1급과 기사 등급 사이에 있는 것으로, 전투 수훈에는 금장이 수여된다. 독일 십자장은 철십자 훈장과 마찬가지로 바로 아래 등급 훈장인 1급 철십자 훈장을 수훈한 상태여야 받을 수 있으며, "임무에서 뛰어나고 용감한 행동을 반복"한 사람에게 수여한다고 하나 보통 기사 철십자 훈장을 주긴 애매한 공로를 세운 1급 철십자 훈장 수훈자에게 수여됐다. 당연히, 이를 건너뛰고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이들에겐 기존 훈장보다 낮은 걸 주는 셈이 되다 보니 잘 안 수여됐다.[7] 기갑장비도 운용했는데 본래는 연합군 전차를 사용하려 했으나 구할 수가 없자 5호 전차 판터에 철판을 덧대고 하얀별을 칠하여 M10 GMC로 위장시켜 사용했다.[8] 이들은 교전상대국인 미군의 군복을 입고 활동 했기에 국제법 위반으로, 전쟁 포로로 취급하지 않고 스파이로 분류했다. 참고로, 영화 대탈주에서도 체포 당시에 민간인 복장이나 독일군 군복을 입었던 전쟁 포로들은 이를 명분으로 해서 처형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9] 대영제국의 위상은 인도 하나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인도와의 연결은 영국의 위신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었는데, 이를 이어주는 주요 지점 두 곳이 지중해의 두 관문 지브롤터와 수에즈 운하이다. 물론 이 작전이 성공했더라도 일시적으로 운하를 차단할 뿐 곧 개통되었을 것이고, 희망봉을 우회하는 항로는 여전히 살아있기에 영국은 대영제국의 심장인 인도와의 연결이 끊기지는 않았을 것이다.[10] 다만 그와 별개로 처칠은 진짜 테헤란으로 가던 도중 죽을 뻔했다. 독일이 근처에 유보트 몇 척을 매복시켜두었는데, 이들 중 한 척이 과감하게 대잠망을 뚫고 처칠이 승선한 전함 넬슨에 어뢰를 발사한 것. 하지만 어뢰는 모두 불발되었고 결국 처칠은 살아서 테헤란으로 갔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때 넬슨을 노렸던 유보트의 함장은 훗날 거기 처칠이 타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었다고.[11] 이건 꽤나 신빙성이 있는데, 이유는 그를 체코 법정에 압송한다고 했기 때문이다.[12] GTA 시리즈에 등장하는 U.L.P.C.의 모습이 이 사진의 스코르체니와 상당히 흡사하다.[13] 이때 이미 암투병 중이었는데도 담배를 피워댔다.(...)[14] 이 결혼은 재혼이다. 스코르체니는 안슐루스 이전, 20대 때 한번 결혼한 적이 있다.[15] 스코르체니는 골초로 유명했다. 전술 하였듯이 떡갈나무 작전의 포상으로 금박의 국장과 히틀러의 친필이 양각된 담배 케이스를 받았으며 전후 1945년~1975년 사진들을 보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진들이 매우 드물고 말보로 레드를 선호하였다.[16] 독극물에 열광한 탈륨살인마 그레이엄 영이나 무기상을 천직으로 여긴 빅토르 부트, 그리고 부트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로드 오브 워의 유리 올로프 같이 자신이 파멸할 수 있는 위험에도 전공 분야에 탐닉하는 부류[17] 무려 1950년에 프랑스어판을 내기도 했다![18] 저자의 성향을 너무 강하게 드러낸 부분이라거나, 명백한 역사적 오류이거나.[19] 디를레방어는 상급대령까지 진급했고, 이 사람은 중령까지 진급했다.[20] 최종 계급이 상급집단지도자(독일 국방군의 대장, 영국군, 미군의 중장과 동 계급이다.)[21] NATO 관계자 행세라는 이야기도 있다.[22] 애당초 정말 겁을 먹었으면 어떻게든 변장을 하고 숨어 지내지 저렇게 대놓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23] 아이올루스 평행계. 현지연도 1941년으로 왕정제의 유럽 강대국들이 세계의 패권을 거의 쥔 상태.[24] 대체역사소설계의 거장으로 인정받는 미국소설가이다. 국내에는 비잔티움의 첩자, 가지 않은 길, 최후의 신조가 번역출판돼 있다.[25] 사실 나치의 스파이로 클라이브 크로스라는 이름은 미군 군번줄에 적힌 클라이브 크로스라는 이름을 도용해 그의 전우(?)인 제럴드 윌킨스 대위와 함께 결성한 나치 도살 특수부대(노르망디 상륙작전 패배 이후 결성되었다.) 스콜피온 부대를 로마에서 괴멸시켰다. 상처만 없다 뿐이지 그의 악행을 보면 가히 울펜슈타인 리부트 시리즈판 스코르체니인 셈.[26] 영어가 유창한 독일군으로 편성된 기갑여단을 연합군 차량으로 위장해 진격시키는 작전.[27] 나치스의 베니토 무솔리니 구출 작전.[28] 이때 무장한 SS 요원 4명을 혼자서 맨손으로 단 10초만에 제압한다.